“신발을 신고 변소까지 가기가 귀찮다고 이 돌 위에서 변소 쪽으로 조준해 ‘볼일’을 보다 그만 엄마에게 들켜 밤새 벌을 섰다고 합니다. 이 돌을 ‘출세의 돌’이라고 부릅니다.”
한·일 강제병합의 원흉인 일본의 이토 히로부미가 어린 시절 살았던 집이 보존된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 한 디딤돌 앞에 멈춘 일본인 해설사는 이토 히로부미가 밟은 곳이라며 ‘출세의 돌’이라고 했다. 엄격한 가정교육 덕에 반듯하게 자라 훗날 총리대신이 돼 ‘출세’를 했다는 설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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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 23일 일본 야마구치현 하기시에 위치한 요시다 쇼인 신사로 들어가는 길목에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등재 결정을 홍보하는 플래카드가 걸려 있다. 오른쪽 벽화의 왼쪽은 요시다 쇼인의 제자인 사카이 지로 전 시마네현 현령(1878년), 오른쪽은 요시다 쇼인. |
지난달 23일, 요시다 쇼인과 이토 히로부미 등 제국주의 침략전쟁의 이론가와 이를 주도한 인사들이 관련된 장소마다 일본 정부는 ‘반성해야 할 역사’를 지우고 이들을 우상화하는 작업에 한창이었다. 이날은 아베 신조 총리가 기시다 후미오 외무상에게 우리나라와 ‘일본군위안부’ 문제 협상을 지시(24일)하기 불과 하루 전이었다.
이날 방문한 하기는 닷새 후 아베 총리가 ‘일본군위안부’ 관련 ‘사과’(28일)를 할 것이라고는 예상할 수 없을 정도로 극우 미화 분위기가 팽배했다. 하기는 정한론 창시자인 요시다 쇼인의 생가와 신사, 그가 이토 히로부미 등 제자들을 길러낸 사설 학당(쇼카 손주쿠)이 있는 지역으로, 일본 우익 사상의 발원지다. 곳곳에 요시다 쇼인의 묘석과 동상, 기념비가 널려 있어 일본 우익의 ‘원더랜드’를 방불케 했다.
눈을 돌리는 곳마다 요시다 쇼인 여동생을 주인공으로 1년 내내 방영되는 NHK의 대하드라마 ‘하나모유(꽃 타오르다)’ 홍보 플래카드가 펄럭였다. 쇼인 신사 한 쪽에는 방문객들이 소원을 적어 매달아 놓은 조각천 수백개가 빽빽했다. 일본인 해설사는 “요시다 쇼인은 ‘학문의 신’이기 때문에 학생들은 좋은 대학에 보내달라는 소원을 이곳에 와서 빈다”고 설명했다. 이어 “하기의 모든 초등학교에서 요시다 쇼인의 삶과 사상을 가르치고 있다”며 교과서를 내보였다.
특히 쇼카 손주쿠가 지난 7월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에 등재된 뒤 방문객은 더욱 많아졌다. 일본인 해설사는 “정확한 숫자는 알 수 없지만 등재 후 하기 방문객이 아주 크게 늘었다”고 힘주어 말했다. 일본 정부는 메이지유신시대 제철·제강·조선·석탄산업시설 23곳을 등재 신청하면서 산업시설이 아닌 쇼카 손주쿠를 포함시켜 ‘억지 끼워넣기’ 논란이 인 바 있다. 실제 이날은 평일 비수기에 비까지 내렸지만 내국인 관광객들로 북적거리고 있었다.
동북아역사재단의 정영미 독도체험관장은 “유산 등재로 우익 인사들의 가치가 올라가는 것은 물론이고, 아베 역시 그 정치적 효과를 누리고 있다”고 귀띔했다.
하기=김예진 기자 yejin@segye.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