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5년 8월 6일 저녁. 자민당 최대 파벌 수장이던 모리 전 총리가 홀로 총리 공관을 찾았다. "우정(郵政)공사 민영화 법안이 부결되면 국회를 해산하겠다"고 공언한 고이즈미 총리를 설득하기 위해서였다.

모리를 맞은 고이즈미는 직접 냉장고에서 깡통 맥주와 함께 "안주는 이것밖에 없다"며 치즈와 연어 조각을 내놓았다. 이혼남인 그는 홀로 공관에서 생활했다. 깡통을 딴 모리는 "모두 힘들어진다면 (개혁이) 무슨 의미가 있는가" 하고 운을 뗐다.

"신념이오. 죽어도 좋소. 그런 각오쯤은 하고 있습니다." 고이즈미는 모리의 손을 덥석 잡았다. "(민영화 법안이) 통과되도록 노력해 주시오. 부탁합니다."

모리는 "(당신을 위해) 노력해준 사람들이 먹고살기 힘들어지면 어떻게 책임을 지겠느냐"며 다시 설득했다. 당시 고이즈미 내각 지지율은 37%. 이런 지지율로는 정권을 빼앗길 위험이 컸다. '법안을 빨리 처리해야 한다'는 여론도 25%에 불과했다.

고이즈미는 안색을 바꿨다. "알고 있소. (정권을 빼앗겨도) 할 수 없지요. 총리는 접니다. (민영화를) 하겠다고 말해 왔으니 해야지요. 전 비정(非情)합니다." 탁자에 빈 맥주 깡통이 10개 늘어섰다. 고이즈미 총리가 냉장고 문을 다시 열었지만, 마실 것이라곤 우롱차뿐.

"당신은 괴짜 이상(以上)이오." 빈손으로 돌아온 고이즈미에게 모리는 말했다. '괴짜 이상'은 사실상 '광인(狂人)'을 뜻한다. "그래도 좋소." 고이즈미는 고개를 끄덕이며 웃었다.

공관을 나선 모리는 기자들에게 둘러싸였다. 왼손에 빈 맥주 깡통을 들고 있었다. "안주라며 내놓은 말라붙은 치즈가 너무 딱딱해 씹히지도 않았다. 나도 포기했다. 정말로 '괴짜 이상'이다."

다음 날 법안은 부결됐다. 자민당 반대파의 조반(造反) 탓이었다. 고이즈미는 곧장 국회를 해산했다. 법안에 반대한 의원들을 몽땅 공천에서 탈락시켰고, 이들의 지역구에 인기 후보를 '자객(刺客)'으로 투입하는 정치 보복을 단행했다.

언론은 총리의 광적인 집착을 빈정거렸다. 하지만 국민들 생각은 반대였다. 지지율은 37%에서 46%로 수직 상승했다. 선거 직전엔 50%를 넘었다. 결과는 자민·공명 연립여당이 의석 3분의 2를 확보하는 압승이었다.

1980년 이후 29년 동안 일본 총리는 16명. 총리 수명은 평균 1년 8개월로 짧다. 하지만 한국 대통령처럼 5년 동안 장기 집권한 '대통령형 총리'가 딱 2명 존재한다. 고이즈미와 나카소네다. 두 총리에겐 공통 업적이 있다. 극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적자를 먹고 사는 철밥통 공기업을 비정하게 잘라냈다는 것이다. 나카소네 총리는 1986년 최대 노동조합을 안고 있던 국철(國鐵)을 민영화함으로써 좌파 노동운동과 적색 사회당의 세력 기반을 와해시켰다.

일본 정계에는 '一內閣, 一仕事'란 말이 있다. '한 정권은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존재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의원내각제인 일본 정치는 총리가 개혁과 반개혁의 사이에서 목표를 잃고 우왕좌왕하면 곧장 끌어내리는 시스템이 작동된다. 5년은 비정한 권력에만 허락한 아주 특별한 시간인 것이다.

선거가 끝난 뒤 뜻밖에 모리의 '치즈 혹평'이 여론을 고이즈미 편으로 돌린 것으로 분석됐다. '말라붙은 치즈'가 목표를 포기하지 않는 강인하고 고독한 권력자의 이미지를 각인시킨 것이다. 덕분에 '말라붙은 치즈' 역시 일본에서 선풍을 일으켰다. 씹을수록 맛이 난다는 프랑스제 고급 경성(硬性) 치즈 '미모레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