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2012년, 이삿짐을 정리하던 중 벽장 안쪽에서 종이상자 1개가 발견되었다.

상자는 장기간 보관된 상태였다. 외부에는 굳은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었고, 모서리 일부는 눌려 있었다. 습기를 먹은 뒤 마른 것처럼 골판지가 휘어 있었다.

상자 안에는 CD-R 14장이 들어 있었다. 대부분 파란색 반투명 케이스에 보관되어 있었다. 비닐 포장은 모두 제거된 상태였다. 케이스 표면에는 미세한 균열, 먼지, 습기 얼룩이 남아 있었다. 일부 디스크의 데이터 면에는 희게 변색된 부분이 있었다.

당시 사용 중이던 데스크톱 컴퓨터에서 매체를 확인했다. 운영체제는 Windows 7이었다. CD-ROM 드라이브에 디스크를 넣자 회전음과 짧은 탐색음이 났다.

파일 목록은 표시되었다.

파일명은 대부분 깨져 있었다. 일부는 알아볼 수 없는 특수문자로 표시되었고, 일부는 숫자만 남아 있었다. 일본어 환경에서 작성된 파일명이 한국어 운영체제에서 제대로 표시되지 않은 결과로 추정되었다.

확장자는 MPG와 AVI가 많았다. ZIP 파일도 있었다. 일부 파일은 입출력 오류를 내며 열리지 않았다.

재생 가능한 영상 파일 몇 개를 열었다.

2.

초기 영상들은 대체로 같은 구조를 가지고 있었다.

촬영 장소는 저가 숙박업소 객실에 가까웠다. 화면에는 침대, 욕실 문, 출입구 일부가 함께 잡혀 있었다. 카메라는 방 안쪽 높은 위치에 고정되어 있었다.

녹화는 사람이 들어오기 전부터 시작되어 있었다. 입실자는 카메라의 존재를 모르는 상태였다.

여러 파일에서 같은 방식이 반복되었다. 객실 구조는 조금씩 달랐으나, 침대가 잡히는 각도와 욕실 문이 보이는 위치는 유사했다.

일부 영상에는 사람이 옷을 벗는 장면이 포함되어 있었다. 일부는 침대 주변에서 벌어진 사적인 장면을 멀리서 찍은 것이었다.

해당 영상들은 끝까지 재생하지 않았다. 촬영 위치와 구도만으로도 영상의 용도는 충분히 판단할 수 있었다.

파일 속성과 일부 남아 있는 파일명에는 날짜가 있었다. 확인 가능한 날짜는 1997년 11월에서 1998년 2월 사이에 집중되어 있었다. 그 날짜가 실제 촬영일인지, 원본 영상을 컴퓨터 파일로 옮긴 날짜인지는 구분할 수 없었다.

화면 품질로 볼 때 원본은 Hi8 또는 초기 DV 계열 테이프였을 가능성이 있었다. 화면 하단에는 아날로그 테이프에서 보이는 가로줄 형태의 왜곡이 간헐적으로 나타났다. 파일에는 압축 과정에서 생긴 블록 노이즈도 남아 있었다.

3.

2012년 당시에는 스물두 살이었다. 일본어 능력은 JLPT 2급을 취득한 정도였다. 일반적인 문장 이해는 가능했으나, 방언을 정확히 구분할 수준은 아니었다.

초기 영상 일부에는 남성의 짧은 혼잣말이 남아 있었다. 해당 발화는 교재에서 듣던 표준 일본어와 달랐다. 후쿠오카 지역에서 들었던 말투와 비슷했으나, 단정할 근거는 부족했다.

발화는 짧은 문장, 욕설, 호흡음에 가까운 소리로 이루어져 있었다. 상당 부분은 잡음과 압축 손실 때문에 식별되지 않았다.

초기 영상의 촬영자는 일본어권 남성으로 추정되었다.

초기 영상만 놓고 보면, 그는 숙박업소 객실 내부에 카메라를 설치하고 같은 방식의 촬영을 반복한 사람으로 판단되었다.

4.

어느 시점 이후 영상의 성격이 바뀌었다.

전환 지점으로 보이는 파일 하나가 있었다. 파일명은 손상되어 있었고, 재생 시간은 약 3분이었다.

카메라는 숙박업소 복도 끝에서 반쯤 열린 객실 문을 향하고 있었다. 문틈 너머로 침대 모서리와 벽에 걸린 가운이 보였다.

처음에는 이전 영상들과 같은 종류라고 판단했다.

잠시 뒤 남성 2명이 방 안으로 들어왔다. 두 사람의 움직임은 투숙객의 그것과 달랐다. 한 명은 검은색 비닐로 여러 번 감싼 물건을 들고 있었다.

두 사람은 짧게 말을 주고받았다. 일본어는 아니었다.

재생 중간쯤, 남성 중 한 명이 문틈 방향을 보았다. 직후 화면이 급격히 아래로 꺾였다. 바닥과 벽지 하단이 흔들린 채 찍혔다. 짧은 발화 또는 신음에 가까운 소리가 녹음되었다.

곧 렌즈가 손에 가려진 것처럼 화면이 어두워졌다.

파일은 그 지점에서 깨진 프레임을 남기고 종료되었다.

그때 마우스를 쥔 오른손 검지가 한 차례 떨렸다. 재생을 중지했다.

5.

이후 파일부터 촬영 장소와 방식이 달라졌다.

화면에는 항만 외곽을 연상시키는 어두운 공간, 셔터가 내려진 건물 안쪽, 환기가 되지 않는 좁은 방, 물기 어린 복도와 출입구가 반복해서 나타났다. 일부 장면에는 간판 조각과 차량 불빛이 지나갔으나, 위치를 특정할 만한 정보는 남아 있지 않았다.

초기 영상이 고정 촬영이었다면, 후속 영상은 사람이 직접 들고 찍은 이동 촬영에 가까웠다.

카메라는 일정한 목적을 따라 움직였다. 바닥을 찍고, 벽을 찍고, 출입문을 찍었다. 놓인 가방, 접힌 종이, 신발, 손목 부근이 차례로 화면에 들어왔다.

화면 밖에서는 일본어가 아닌 말소리가 들렸다. 낮고 빠른 말이었다. 일부 발음은 중국어처럼 들렸으나, 방언인지 다른 언어인지 구분할 수 없었다.

카메라가 멈추면 그 말소리는 커졌다. 카메라가 다시 움직이면 줄어들었다.

촬영자는 말하지 않았다.

그 뒤의 카메라는 멈춰 있는 시간보다 다시 움직이는 시간이 더 많았다. 화면 밖의 말소리가 날 때마다 촬영 방향이 바뀌었다.

촬영자가 자기 판단으로 움직인다기보다, 지시를 듣고 화면을 옮기는 방식에 가까웠다.

6.

후속 영상에는 비슷한 대상들이 반복적으로 등장했다.

바닥에 앉은 사람들의 무릎과 손, 젖은 신발, 검은 비닐봉지, 접힌 종이, 복사된 문서, 작업복처럼 보이는 옷, 낡은 가방, 문 옆에 적힌 숫자였다.

화면 밖에서 짧은 말이 주어지면, 화면 안의 사람들은 카메라 쪽을 향해 대답했다.

대답은 짧았다. 어떤 사람은 일본어로 말했다. 어떤 사람의 말은 알아듣기 어려웠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었다.

한 사람은 흰 종이를 들고 문장을 읽었다. 발음은 끊겼고, 같은 문장이 반복되었다. 잡음 때문에 내용은 분명하지 않았다. 다만 이름처럼 들리는 소리, 숫자, 지명처럼 들리는 말이 드문드문 남아 있었다.

카메라는 얼굴을 오래 찍지 않았다. 얼굴보다 손, 신발, 가방, 종이, 문 옆 숫자를 더 오래 비췄다.

좁은 방에 여러 사람이 앉아 있는 영상도 있었다. 벽에는 거울이 붙어 있었고, 거울 가장자리에는 오래된 테이프 자국이 남아 있었다. 바닥에는 낮은 매트리스가 깔려 있었다.

카메라는 방 안의 사람들을 차례로 훑었으나, 사람 자체보다 발치의 물건과 손에 쥔 종이에 더 오래 머물렀다.

다른 영상에서는 몇 사람이 벽에 기대앉아 있었다. 앞에는 비닐봉지와 접힌 옷가지가 놓여 있었다. 질문이 주어질 때마다 대답은 짧았다. 한 사람은 끝까지 얼굴을 들지 않았다.

그 기록이 무엇을 위한 것이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영상은 사람을 설명하려 하지 않았다.

사람과 그 옆에 놓인 물건, 종이, 번호를 함께 확인하려는 방식이었다.

7.

마지막에서 두 번째 파일은 급하게 움직이는 장면이었다.

카메라는 정상적으로 들려 있지 않았다. 화면은 바닥 쪽으로 기울어진 채 심하게 흔들렸다.

복도, 계단, 젖은 시멘트 바닥이 짧게 지나갔다. 촬영자의 호흡음이 가까웠다. 숨은 일정하지 않았다.

중간에 렌즈가 뒤쪽을 향했다. 초점이 맞지 않은 거리에서 사람 그림자 몇 개가 잡혔다. 곧 일본어가 아닌 고함이 들렸다.

영상 말미에 충격음이 났고, 카메라는 바닥에 떨어졌다.

프레임 한쪽에 진흙 묻은 신발 앞부분과 손목 일부가 잡혔다. 손목에는 은색 금속 시계가 있었다.

그 시계는 초기 영상 중 유리창 반사면에 잠시 비쳤던 촬영자의 손목시계와 비슷했다.

그 뒤로 화면에는 변화가 없었다.

영상은 그대로 종료되었다.

마지막 영상 파일은 삼각대에 고정된 상태로 녹화되어 있었다. 카메라의 수평은 비교적 정확했다.

화면 중앙에는 남성 1명이 콘크리트 바닥에 앉아 있었다. 양팔은 등 뒤로 묶여 있었다. 고개는 아래로 숙여져 있었다.

해상도 문제로 얼굴은 명확히 확인할 수 없었다.

그러나 상의의 색, 얼굴 옆선, 손목 부근의 금속 시계가 이전 영상 속 촬영자와 일치하는 것으로 보였다.

같은 사람으로 보는 편이 자연스러웠다.

화면 가장자리에는 금속으로 된 낮은 물체 몇 개가 놓여 있었다. 용도는 알 수 없었다.

화면 밖에서 짧은 고함이 한 차례 들렸다. 내용은 잡음 때문에 식별되지 않았다.

남성은 몇 차례 고개를 들었다. 입을 움직였으나, 그 움직임과 대응되는 음성은 확인되지 않았다.

영상은 47분 12초까지 이어졌다.

후반부에는 화면 안으로 들어오는 사람이 없었다. 형광등 소리, 카메라 내부의 작동음, 프레임 밖에서 나는 낮은 마찰음만 남아 있었다.

이후의 파일은 없었다.

8.

해당 CD-R들이 2012년 벽장 안에서 발견되기 전, 그 상자가 언제부터 그곳에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전혀 짚이는 바가 없는 것은 아니었다.

고모부는 1990년대 말부터 2000년대 초반 무렵, 일본에서 나온 잉여 재고와 중고 전자 부품을 박스 단위로 매입한 적이 있었다. 출처가 명확하지 않은 재고를 싸게 사들여 국내 도매상 쪽으로 넘기는 일이었다.

어린 시절, 그런 물건들이 일본 쪽 창고에서 배를 타고 들어온다는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출발지가 후쿠오카였는지 시모노세키였는지는 분명하지 않았다. 부산을 거쳐 용산이나 남대문 쪽으로 간다는 말만 기억에 남아 있었다.

그 부업을 접은 뒤, 고모부는 남은 물건 일부를 정리했다. 그 과정에서 공디스크, 케이블, 중고 전자 부품, 사무용품 같은 것들이 섞인 상자 몇 개가 집안으로 넘어왔다.

2012년 벽장 안에서 발견된 CD-R 상자는 그때 들어온 상자들과 시기, 형태, 내용물이 맞물려 있었다. 파란색 반투명 케이스, 라벨 없는 디스크, 잡다한 전자 부품과 함께 보관된 흔적도 그쪽에 가까웠다.

해당 CD-R들은 고모부가 정리해 넘긴 혼합 재고품 가운데 섞여 들어왔을 가능성이 가장 높았다.

다만 그 상자가 어느 시점에 그 물건들 사이에 섞였는지는 알 수 없었다.

일본 현지의 어느 창고에서부터였는지, 국내로 들어온 뒤 다른 물건들과 합쳐진 것인지, 집안으로 넘어온 뒤 별도로 섞인 것인지는 확인할 수 없었다.

2012년 11월경, 데이터 일부를 확인한 뒤 디스크를 다시 종이상자에 넣었다.

경찰 신고 여부는 검토했다. 실행하지는 않았다.

파일명은 훼손되어 있었고, 영상 내부의 정보만으로는 장소와 인물을 특정할 수 없었다. 촬영 시점으로 보이는 날짜도 이미 오래전이었다.

원본이 아닌 사본이라는 점 역시 판단을 흐리게 했다.

남은 파일을 추가로 열람한다고 해서 사실관계가 더 명확해질 가능성은 낮다고 보았다. 반대로 보관, 설명, 제출, 출처 소명에 관한 부담은 분명히 늘어날 수 있었다.

상자를 닫았다.

이후 해당 상자는 다른 폐기물과 함께 배출되었다.

배출 이후 CD-R의 이동 경로는 확인되지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