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외라면 의외겠고 소수민족을 대신 전선에 세우기 위한 공수표라면 공수표겠지만 한때 중공은 소수민족에 자결권을 약속하는 연방제 국가를 생각하였다. 1922년 7월 제2차당대회 선언에서는 "몽골, 티베트, 회강(위구르) 3부에 자치를 실행하고 민주자치연방으로 한다.", "자유연방제에 의하여 중국 본부, 몽골, 티베트, 회강을 통일하여 중화연방공화국을 건설한다."라고 밝혔었고, 1931년 11월 중화소비에트 제1회 대회에서는 본인들 헌법 제14조에 "중국 내 소수민족의 자결권을 승인한다. 또 각 소수민족이 중국을 이탈하여 독립 국가를 형성하는 권리를 승인한다."라 규정하여 소수민족의 분리독립까지 포함된 민족자결권을 보장하였다.
비록 1938년 10월 제6기 중앙위원회 확대 제6차 전체 회의 시발이름이뭐이따구노암튼 회의에서 마오쩌둥 손에 의해 '자결권'이 '자치권'으로 바뀌었고, 1949년 9월 채택된 중국인민정치협상회의 '공동강령'에서 자결권이나 연방제는 싹 사라져버렸지만, 아무튼 중공은 한때 소수민족들에게 온갖 감언이설을 했고 이는 1930년 6월 중공 만주성위원회에서 재만 한인의 자치공화국을 약속하는 것을 시작으로 재만 한인에까지 확장되었다.
이러한 민족자치에 대해 재만 한인들은 상당히 진지하게 생각했고, 이에 한때 친일 세력이 '한인생활안정'과 '한인자치'를 내세우며 민생단(民生團)을 조직하는 등 이용하려들 정도였다. 물론 광복이 되면서 한때 만주의 200여만 중 70여만 명이 1946년 여름 전까지 해방된 한반도로 귀국하였고, 오지에 있던 한인들은 연변으로 이동하는 등 민족자치를 할 여력-즉 대가리수 자체가 줄어들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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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못 먹어도 고"
장제스가 국공내전을 개시하면서 상황이 바뀌게 된다. 당시 중공은 한인들을 적극 끌어들여 반-국민당 전선에 동원시켰는데 이 과정에서 발생한 희생이 만주에서 한인이 살 권리로 변하였다고 보는, 중국공산당에 대한 한인의 채권의식으로 발전하였다. 왜냐면 이 시기 만주 한인은 단순 중국 국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서는 다음 말을 빌려 설명한다.
만주 조선인의 조국은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며 만주 조선인은 자신들의 조국을 보위해야할 의무가 있다. - 1948년 12월, 연변지방위원회(이하 연변지위) 서기 유준수(중국인)
당시 연변지위가 1948년 8월 15일 작성한 문서와 같은 해 12월 서기 유준수의 말을 보면 만주 한인은 일종의 '이중국적'으로, 만주 한인의 조국이 한반도임을 인정하는 것과 함께 북한에 대한 국방의 의무까지 존재하였다고 보았다(훗날 이 부분은 6.25 전쟁 당시 조선족이 중국군이 아닌 조선인민군으로 참전하는 것으로 실현된다). 그렇기에 만주 한인이 전투에 투입된 것은 '조국해방을 위하여!'이 아니라 '남의 땅에서 내 생존권을 위하여!'라는 성격이 더 컸던 것. 또한 1947년 목단강(무단장) 지역에 존재했던, '남조선인민항쟁지원회' 등 여러 행사들의 성격은 '한민족 애국자'의 반미투쟁을 지원하고 응원하는 것이었을지언정, 무슨 세계 프롤레타리아들이 민족의 벽을 넘어 어쩌구하는 그런 성격이 전혀 아니었다.
한편 북한 지도부 또한 만만찮게 연변이 북한의 영토라고 생각하였는데, 이는 김일성이 국공내전 기간 동안 중공 연변지위에 파견하였던 인물들의 발언이나 제안으로 두드러진다. 파견된 인물 중 한 명이자 동북항일연군 출신인 김광협은 몰래 받은 김일성의 지시에 따라 공개적으로 연변을 북한에 획분해달라는 요구를 한 적 있으며, 후임자로 온 임춘추 또한 비슷한 요구를 하였다. 북한 지도부 또한 "청년들이 흘린 핏값은 연변의 민족자결로 치러져야할 것이며, 그것은 조선족의 사회주의 조국인 북한에 합병되는 것으로 이루어져야한다."라는 생각을 공유하고 있었던 것.
그렇게 계속해서 북한과 연변의 한인 지도자들은 만주에서 한인 생존권을 확보한 것을 넘어 연변과 북한을 하나로 통합시키자는 생각을 하고 있었고, 이 구상은 1949년 1월에 길림시에서 열린 민족공작좌담회까지 이어졌다.
(연변조선족자치주 초대 주장 주덕해. 사진은 1949년 3월, 중국공산당 연변지위 서기 겸 연변전원공서 전원로 부임한 시기)
30여 명의 주요 재만 한인 간부들이 참석한 민족공작좌담회에서 연변전원공서 전원 겸 연변지위 부서기였던 임춘추는 연변에 소련식 가맹공화국을 설립할 것을 주장하였고, 연변일보사 사장 임민호는 북한에 연변을 편입시키자는 제안을 내놓았다. 언뜻 보면 차이가 있는 듯하지만 당시 임춘추의 구상은 가맹공화국에서 시작하여 최종적으로 북한에 병합시키는 것이었으니 두 제안에 큰 차이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러나 여기까지 와서 말하기에는 너무 허무한 것이겠지만, 임춘추의 주장은 실제로 받아들여지기 어려웠다. 이는 연변의 팔로군 출신 간부들 또한 그동안 가만히 있지 않고 군대 및 군중단체 내에서 활동하던 한인 간부들의 힘을 약화시켰으며, 또한 '고급연구반'이라 하여 사실상 특정 민족 간부들의 당적을 취소하거나 불합리한 처분을 내리는 시설을 설치하는 등 그간 있었던 과정에서 연변 내 조선족의 주도권이—적어도 진지한 북한-연변 합병까지 논하는 것이 불가능할 정도로—상실당하였기 때문이었다. 이 때문에 북만주(주로 하얼빈)에서 간부를 양성하다 온, 그리고 친북한 일색이었던 임춘추와 다르게 상대적으로 중공의 정책을 잘 이해하고 있었던 주덕해가 반대하자 맥없이 끝나버렸다.
그럼 좌담회는 왜 열렸는가?할 수 있었겠지만... 좌담회의 목적은 '한인들끼리 논의되어 결정된 것'임을 연출하기 위한, 일종의 보여주기에 가까웠다. 좌담회가 폐회하자마자 주덕해는 자신이 양성하던 북만주 쪽 간부들을 연변으로 신속하게 불러모았고, 임춘추가 북한으로 돌아가자마자 주덕해가 그의 빈 자리를 채운 것이 그 증거라고 볼 수 있다.
아, 물론 주덕해가 그 자리를 맡았다고 해서 조선족의 민족자결권 욕구가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주덕해의 측근 중 한 명이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설립될 때까지 연길현 현장을 맡고 있었던 전봉래의 경우, 1950년 조선족을 위한 성(省)급 가맹공화국 설립을 건의한 것이 그 예다. 심지어 이 가맹공화국의 행정 체계는 중국의 것이 아니라 도-군-면-리 체계를 따라야한다고 했다.(다만 여의치 않으면 길림성의 지휘를 받는 구역으로 해도 된다고 단서조항을 넣었었다.)
그 이후는 더 이야기할 것이 없다. 찍싼것 같지만 정말 그렇다. 1952년에 연변조선족자치주가 건립되면서 잠시 연변 주민들 사이에 북한에 곧 편입될 것이라는 소문이 돌기도 했지만 그뿐이었다. 이후 자치주 건립으로 인해 서서히 이중국적 의식이 소멸되고 중국이 공식적인 조국이 되면서 연변 주민들은 북한 대신 중국을 사회주의 조국으로 여기게 되었고, 현재의 연변조선족자치주에 이르렀다.
주덕해는 어떻게 됐냐고? 북한 편입 대신 중국 내에서 조선족 지위 향상, 그리고 성급자치를 위해 구역확대운동을 전개하여 돈화(둔화), 교하(자오허), 장백(칭바이), 무송(푸쑹), 동영(둥닝), 영안(닝안), 목릉(무링), 밀산(미산) 등을 조선족자치주에 편입하고 각지에 퍼진 조선족들을 모으려했으나 하필 반우파투쟁 시국을 맞이하면서 돈화현만 편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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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주에 살던 한인이 국공내전에서 어느정도의 기여도가 있음?
백붕이는 갤러리에서 권장하는 비회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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