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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04-04
댓글 영역
공인 전에도 복리로 스노우볼마냥 늘고 있었음.
그래봐야 300년간 간신히 10%인걸
https://m.dcinside.com/board/alternative_history/576506
콘스탄티누스 개종 전까지 10년마다 40%씩 복리로 늘어난 스노우볼 종교였음.
퍼센티지로 따질때야 그렇지 절대수는 공인 이후 급속히 증가했잖아. 원래 절대값이 적으면 조금만 증가해도 퍼센티지야 팍 늘어나는거고.
@ㅇㅇ(121.190) 선교가 맨투맨 전파이니 당연히 퍼센티지로 따져야지;;;
믿어도 죽이지 않겠다만큼 큰 버프가 없지
공인 이전에도 10프로면 엄청난 거임.
공인 전에 10% 퍼진게 도시 주민들 위주로 퍼진거라 공인되자마자 폭발적으로 늘어날만도 했음
도시 시민들 + 식자층 위주로 퍼졌고, 경쟁 상대였던 종교들은 기독교에 비해 체계적인 종교도 아니었으니까
반대지. 그 정도로 퍼져나갈 역량이 있었던걸 힘으로 찍어눌러서 막은거
기본적으로 기독교가 동방을 중심으로 주요 도시나 공동체에 형성되던 시점임 신자가 아직 과반을 넘는다거나 그런 건 아니지만 이제 기독교가 절대 눈에 안 보이는 종교는 아니었던거임
그런 상황에서 콘스탄티누스는 그 기독교를 ㅈㄴ게 밀어줬음 공인만 해준게 아님 국교화가 아닐뿐이고 다른 다신교를 빨아주긴 해도 기독교를 젤 빨아줬음 의무 면제, 주교들에게 권한 부여, 토지 지원, 교회 건물 후원 등등 당시에 황제가 해줄 수 있던 대부분의 도움을 기독교가 받은거임
당연히 황제가 이 지랄로 해대니 딸랑이 귀족들도 따라서 후원하고 믿기 시작하니 기존의 충분히 경쟁력 있던 신앙이 부스터를 타고 제국 전역으로 확산된거임 특히 서방에서는 동방보다 좀 더 소수파에 가까울 기독교가 서방에서도 주류로 거듭난 건 - dc App
그런 이유가 큼 거기다 로마 사회가 기본적으로 분절적이지 않음 지역들이 서로 잘 이어져 있고 중앙정치로 다시 한 번 순환을 도는 구조임 그렇기에 한 번 유행을 타는 문화나 이념은 여러 지역에 빠르게 진입하기 좋음
무튼 동방을 중심으로 어느 정도 양지에 깔릴 준비가 된 종교였는데 공인 이후 황제와 귀족층의 전폭적인 지원을 받으며 제국 전역으로 퍼져나갔다고 보면 됨
전자가 매력적인 신앙과 퍼트려나갈 인적 인프라를 제공해줬다면 후자가 그 인프라가 안정적으로 정착하고 자생할 수 있는 기반을 마련했다고 보면 됨 - dc App
밀라노 칙령 후의 교세확장은 근본적으로 이전 추세의 연장으로 보는 게 맞음. 100년경에 제국 전체 싸그리 긁어모아서 7000명대 초반 찍던 게 200년경에 20만명, 300년경에 600만명으로 교세가 100년마다 30배씩 뻥튀기되고 있었음.
콘스탄티누스의 개종이 이후 제국민의 개종에 요인이 된 건 맞지만, 교회의 성장속도는 이미 박해가 무의미한 수준의 복리 그래프였고, 이 성장 추세가 훨씬 근본적인 요인이었음.
차라리 테오도시우스가 국교화 노력을 했다기보다 이미 퍼져나간 기반에 자신의 권위를 얻기 위해 숟가락 올린 감이 큼 테오도시우스는 권위가 약한 스타팅을 했기 때문에 통치 내내 기독교 수호자를 자처하며 권위를 쌓았고 기록자들도 ㅈㄴ 후원하며 후대의 자신을 그렇게 그려냈음 그렇기에 테오도시우스가 온갖 북 장구 다 치며 보여준 기독교화의 모습은 어느 정도 쌓인 기반을 바탕으로 했다는 느낌이 강함 이런 모습은 마그누스 막시무스 같은 애들도 하던거라 4세기 후반은 이미 기독교의 승리(?)와 같은 시대임 물론 정치판은 좀 복잡한 현실정치가 존재하지만 - dc App
@ㅇㅇ 그렇다기에 교회 건축과 신앙 인프라를 보장해준 건 황제 권력임 말대로 동방에서 3세기 말엽부터 확연한 성장세를 두드러지게 보이던 건 사실이지만 후자의 후원이 없었다면 양지의 종교로 거듭나기가 쉽지 않았을거임
애초에 박해도 디오클레티아누스 때 잠깐 강하게 나온 거고 갈리에누스 시대 이후로 박해란게 대단히 없었음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도 잠깐 나오다(인간의 삶에선 길긴 하지만) 후기 사두정 시대엔 나오다 말고 그러니까 - dc App
@ㅇㅇ 니 말대로 애초애 밀라노 칙령 전에도, "제국 전체에 일률적으로 적용되는 조직적 박해가 300여년간 지속"된 게 아니었음. 이미 관습적으론 묵인되고 지역 엘리트들이 믿던 종교였고, 밀라노 칙령은 이 관습적 대세에 최종 확정을 넣은 칙령임. 당연히 성장 기세는 근본적으로 칙령 전의 연장일 수 밖에 없고.
@ㅇㅇ 글쎄 그건 너무 '성장세'를 경제적 복리로만 보는거지 오히려 그거만 강조하려고 황제 권력의 후원과 종교의 정치화 같은 다른 환경을 무시하는 꼴이지 그냥 막연하게 늘어나는 중이니 황제의 공인 이후 환경 없이 다음에도 늘어났을거다, 황제는 거치는 길이란 근거가 있나?
if의 추측은 가능하겠지만 결국 기독교는 공인 이후 황제 권력 체제에 편입되어 거기서 부스터를 받고 성장했음 그리고 그 후원은 그냥 막 후원해줄게 그런거 이상으로 교회가 양지에서 '자생'할 수 있게 만들었고 교회가 지역엘리트의 당연하게 있어야 건물로 거듭나게 만들었음 사제의 의무면제나 교회 파벌 정치의 황제 개입도 종교를 도시에서 토론 주제로 만드는 역할을 하고 그러는데 이런 요소들을 빼놓고 그냥 복리로 성장하던거다, - dc App
@ㅇㅇ 이게 더 너무 러프하게 보는거지 성장세도 중요한거 맞고 그걸 타고 나가는 단일한 제국 환경이 그런 상황에 알맞았고 거기에 황제가 후원을 해준게 자생 여력을 마련해준게 ㅈㄴ 큰거지 로마에서 황제랑 거기에 메여있는 도시/로마시 엘리트층의 영향력은 도시엔 분명히 절대적임 - dc App
@ㅇㅇ 칙령 전에 '음지'에서 숨어서 믿는 종교가 애초에 아니었음. 황제의 개종이 여기에 장작을 부은 효과야 당연히 있지. 근데 양지에서 이미 지역 엘리트들이 대놓고 선교하던 종교가 칙령으로 '양지화', '자생화' 되었다고 볼 순 없단 거임.
@ㅇㅇ 말대로 음지 종교는 아니지만 충분히 자생 가능한 부유한 종교도 아니었는데? 그전까진 국가 권력이랑 무관심한 관계를 가진 종교1 중 하나였는데 성장세가 대신 두드러진거고
거기서 교회 건축이 확대되고 교회가 보편적으로 토지를 가지고 사제가 의무에서 면제되면서 권한을 가지고 도시 곳곳에 교회가 당연하게 생기고 거기에 귀족들이 후원을 하는 문화가 형성되던 건 공인 이후 황제의 후원이 관례화 되면서임 이게 절대 작은게 아니라니까 - dc App
@ㅇㅇ 칙령 전에 전통종교가 사회에서 맡는 기능(제사)이 이미 자멸하고 있었고, 이 공백지대가 후기 고대로 갈수록 이미 걷잡을 수 없이 확산된 상황에, 결국 어떤식으로든 공동체에서 차지하던 파이를 먹힐 수 밖에 없었음. 사제가 토지가 있든 없든 성당이 있든 없든 일단 한 지역사회가 공동종교의식을 필요로 하는데, 이 분야에서 경쟁종교들이 각자의 이유로 전혀 교회의 대항마가 못되었단 게 황제 개인이 성당에 가냐 마냐보다 더 본질적임.
@ㅇㅇ 자멸했다는 근거가 궁금하네 기독교가 4세기 내내 하던게 지역다신교의식을 기독교적으로 바꾸는 작업인데 뭘로 사라졌다 보는거임? - dc App
@ㅇㅇ 전통 다신교의 핵심은 결국 신전과 제사인데, 몇몇 힙스터들만 태클걸던 고전기 희랍은 그렇다쳐도 2세기쯤만 되도 "솔직히 동물희생제사 우스꽝스럽고 좀 그렇지 않냐" 하던 게 제국 엘리트들의 현실임. 2세기 후반 호교론서("디오그네투스에게")는 제국 엘리트을이 희생제사를 당혹스러워한다는 전제를 이미 깔고 호교론을 펼치고 있을 정도로 전통종교의 핵심전례(제사)가 이미 제국 엘리트들에게 전혀 매력을 주지 못하고 있었음.
@ㅇㅇ 칙령 후이지만 율리아누스 시절쯤 되면 인위적으로 거름주고 물주고 관리해도 이미 죽어버린 뿌리였고.
@ㅇㅇ 신플라톤주의 같은 일신론과 새로운 신앙의 유행에 큰 영향을 준 건 동의하겠지만 그렇다 해서 그게 전통의식을 없엤다고 힘들지 강렬한 믿음이 아니더라도 애초에 그런 믿음도 아니었고 일상적 수준의 축제, 휴일, 공공공간 등은 사라진게 아님.. 하다못해 그 제사라는 형태조차 전통과 정치적 의식으로 주요 도시에선 남아서 꾸준히 이걸 어떻게 할 것인가로 4세기 말 5세기까지도 정치적 의제로 작동하는데 그 이야기 하나로 자멸했다 보긴 어렵지
말대로 율리아누스 시대에 이르렀을 때 동방이 특히 그런 다신교적 종교 의식이 줄어든 건 사실이지만 그럼에도 서방이나 동방에서조차 일상적 수준에서 완전히 기독교적인 걸로 대체되었다 보긴 어렵지
Rebilard가 왜 이전에 기독교인들이 됐는가 연구를 보면 - dc App
@ㅇㅇ 콘스탄티누수 전후로 박해/합법으로 보는 건 문제지만(이건 분명히 맞다 생각함) 동시에 기독교의 완전한 개종으로서 수치를 볼게 아니라 기독교가 사회에 확실하게 자리잡으며 영향을 주는 방식으로, 부분 개종 혹은 접촉 수준의 기독교인이 늘어나는 걸 기독교화의 핵심으로 보는데, 여기서만 보더라도 공백지대를 채워가는게 아니라 새 매장을 차리는 느낌에 가까움 물론 기독교가 새 믿음 개념과 다양한 교리를 가져와서 킥을 준 건 분명히 사실인데 그렇다고 완전 공백지대를 공략하던거라 무조건적 확산? 오히려 완전기독교인은 기독교화 만큼 따라가진 않았을고라 보는거지
물론 사회의 기독교화와 사람들의 접촉면적 및 부분적 기독교화가 ㅈㄴ 크기에 님 말대로 다신교를 재끼고 기독교가 사회 중심축으로 자리잡은 건 맞지만 - dc App
@ㅇㅇ elton이 이 시대 종교사 학자는 아니지만 elton의 배경 설명도 보면 교회를 자생시킬 기반을 준 후원으로 보는 편이고(물론 그게 절대적인가 식으론 절대 이야기 하지 않고)
무튼 나는 그 추세가 콘스탄티누스 시대로 없던게 생겼다가 아니라 300년대에서 350년대로 나아가는 길에선 분명하게 공인화와 국가권력과의 결합이 크다고 보는거임 600만명이 전부 기독교인지 얼마나 인지는 알 수 없더라도 분명 그만한 사람들이 기독교화 될 기회가 사회 전반에 퍼지기 시작한거고 심지어 황제 중에도 기독교인이 나오고 카르타고나 갈리아에도 기독교 세가 유의미하게 나타나고 그런 건 분명 기독교가 3세기 중반 내내 안정적 방치 속에서 확장된 결과지
그래도 그게 다시 한 번 폭발적으로 늘어나는 건 나는 - dc App
@ㅇㅇ 그게 콘스탄티누스가 사회 전반에 기독교의 접촉면을 더 확실하게 늘려나가고 위에서부터의 확산을 안 한게 크다 보는거지 확실히 좀 더 찾아보니 아까 Rebilard의 연구에서 갈리에누스(발레리아누스도)의 평화/방치 정책이 사실상 기독교를 사회에 활동 가능하게 공인했다 보고,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되려 사회 전반에 공적으로 존재하던 기독교 공간을 확인한다는 점에서, 그리고 Kulikowski도 이미 기독교가 3세기 말에 부유하고 다양한 공동체를 보여주고 있다는(동시에 아직 경쟁 중인 종교지만) 점에서 양지에 갈 준비된, 보다는 이미 양지에서 경쟁 중인 종교로 보는게 맞겠제 - dc Ap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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