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제의 조선통치가 비일관적이었던 이유
대일본제국 정부는 조선을 산업화하라!
???: 우리가만든것우리가쓰자
(주요 인용문)
1.
예컨대, 초안에 그 윤곽이 제시된 다양한 사업들을 실행하겠다는 공식적인 약속을 요구하면서 정착민 사업가들은 당국이 구상한 산업화 범위를 훌쩍 넘어서는 요청을 했다. 후지이 간타로는 3.1 운동 이후 총독부가 치안유지에 그 자원을 쏟아부으면서 "합병 이후 산업 관련 총지출은 총독부 세입의 겨우 1퍼센트에 지나지 않았다"라고 불만을 토로했다.
그의 이러한 심정에 공감한 가다 나오지와 그가 속한 분과 위원회의 동료 위원들은 조선의 철도를 '향후 10년간 총 3,500마일(약 5,6000킬로미터)'로 확장하자고 제안했지만, 재무담당 관리들은 "예산확보가 극히 어렵다"는 말로 이에 대응했다.
그리고 본국에서 온 어느 관료가 온건하고 점진적인 산업진흥을 옹호하면서 그것이 "조선인들에게 적합하다"라고 말하자, 수리회사 사장인 마쓰야마 쓰네지로는 강력하게 이의를 제기하면서 조선의 기업들을 육성하기 위해서는 "재정자립 [원칙]을 폐지해서라도" 더 많은 정부지원금을 투입하고 본국 자본를 조선으로 유입시켜야 한다고 촉구했다.
2.
1922년 2월,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는 '조선 산업개발 4대 요항'을 추진했다. '4대 요항'은 산미증식, 조선의 철도체계 완공, 이입세(수입관세) 철폐, 그리고 광산업 발전을 위한 항만시설의 개선이었다. 사업가들이 제안한 이 목표들은 당시 일본이 워싱턴에서 체결한 해군군축조약(Naval Treaty, 1921)으로 생긴 도쿄 중앙정부의 잉여금 2억 엔 가운데 일부를 투입해야 달성될 수 있는 것이었다.
'4대 요항'이 이미 추진 중인 정부의 경제계획에 맞춰 조정된 것이라면, 그것은 각기 강력한 로비를 벌이고 있던 정착민들의 핵심적인 이해 영역 - 쌀 시장, 관개사업, 철도, 수산물 - 과도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었다. 달리 말하면, '4대 요항'은 정부의 산업정책을 자신들의 사업적 이익에 부합하는 쪽으로 중점을 옮기려던 정착민들의 노력을 반영했다. 그들의 첫 도쿄 방문로비의 밑바탕에는 분명히 그런 동기가 깔려 있었다. '4대 요항'을 들고 간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의 일본인 대표 3명 - 경성의 시키 신타로, 부산의 가시이 겐타로, 평양의 후쿠시마 소헤이 - 은 총리와 중의원, 참의원의 유력의원들을 상대로 1922년 2월 23일부터 3월 23일까지 한 달 동안 로비를 벌였다.
'4대 요항'을 제시하면서 로비스트들은 빠른 투자수익에도 불구하고 '조선의 수산물업체들에 대한 완전한 무시'는 말할 것도 없고 '타이완과 비교해도 무색할 정도의 느려터진 조선의 철도건설' 문제를 부각했다. 또한 그들은 "제국의 식량부족 문제를 해소하기 위한 쌀 증산지로 조선보다 더 완벽한 데가 없다"라고 주장했으며, 그들이 보기에 총독부의 위신에 '심각한 문제'를 안겨주고 있는 이입세를 즉각 철폐하라고 촉구했다.
그들은 "조선이 식민지가 아니라 내지(본토)의 연장이라면", "내지의 산업발전 계획을 검토할 때마다 조선도 늘 동등하게 취급해야 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정착민 로비스트들은 내지연장이라는 공간논리를 활용햐 조선의 산업화를 일본의 유기적 확장차원에서 봐야 한다며, 예산도 '일본열도의 혼슈와 거의 같은 크기'인 조선반도의 지리적 크기에 비례해 배정하라고 요구했다.
3.
산업을 위한 정착민들의 요구가 일부 경제관료들의 의견과 완전히 어긋난 것은 아니었다. 예컨대, 정무총감 시모오카처럼 식산국장 니시무라 야스키치도 조선은 '농공병진'을 추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총독부 관리들이 그런 구성을 추구할 수 있는 범위는 결국 도쿄의 지역(조선)대표라는 그들의 지위 때문에 제한되었다. 그들의 가장 중요한 임무는 내지연장의 틀 안에서 조선의 종속적인 역할을 구현하는 것이었다. 그것은 곧 일본의 식량수요를 충당하고 일본에서 생산한 공산품들에 시장을 제공하는 것이었다.
일본 자체의 산업이 해외의 투자지역으로 충분히 밀고 들어갈 정도로 아직 성숙하지 못했으며, 일본 국내의 제조업자들이 자신들과 경쟁하는 산업이 식민지에 등장하는 데에 극도의 거부감을 갖고 있는 상황에서 그러한 식민지 분업체계에서 벗어나는 것은 '전혀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떤 모임이나 일본 내각에서 누군가가 조선의 제조업을 발전시켜야 한다는 이야기를 꺼낸다면, '즉각 강력한 반발을 불러일으킬 것'이라고 시모오카는 말했다.
조선에서 간 로비스트들은 식민비의 산업발전 지원을 요구하는 목소리에 별로 귀를 기울이지 않는 본국의 지도자들을 설득하기 위해 분투했다. 특히 국가의 부가 쪼그러들었다고 느끼는 불황기에 본국 지도자들의 그런 태도는 더 심해졌다. 경성 산업회의소의 주도 아래 조선의 재계지도자들과 현지의 대표들은 계속 도쿄를 찾아가 거듭 지원을 요청하는 한편, 총독에게는 조선 내 산업지원기금을 조성하기 위한 자신들의 비용지출을 삭감해달라고 요구했다. 하지만 그들의 노력이 즉각적인 성과를 내지는 못했으며, 이미 승인받은 보조금 일부는 연기되고 공공차관은 취소되었다.
한편, 일본 본국의 전국상업회의소연합회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다. 조선상업회의소연합회 대표들이 일본의 국가적 의제로 채택되리라는 희망을 안고 조선의 철도건설을 위한 자신들의 제안서를 제출하자, 본국의 재계지도자들은 그것을 '지역의 문제'라며 묵살.해버렸다. 이는 그들의 조선관이 조선을 농업지역으로 간주하는 기존 고정관념에서 전혀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던 사실을 뒷받침한다.
5.
초기 2년간의 열정과 성공 뒤에 물산장려운동은 정부의 탄압과 좌익의 비판 속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 운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마루야마 경무국장은 "지역의 물산장려라는 외견상 아름다운 딱지 뒤에" 도사리고 있는 체제전복적인 '일본 통화 보이콧'(조선인 지도자들은 그 반대로 주장했지만) 촉구를 주목했다. 또한 정착민 지도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을 이끌고 있는 것이 '비타협적인 정신'이라고 의심했다.
지역의 반대자들에 대한 그런 사라지지 않는 불안은 정착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산업운동을 (조선인 자본가들과 손잡음으로써) 정부의 순화정책에 맞추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불안의 근원, 즉 자급자족을 향한 조선 민족주의의 요구에도 지지를 보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특히 유용했던 것이 '조선의 물산장려'라는 수사였다. 그것은 정착민들의 산업진흥 활동과 조선 민족주의운동간의 차이를 적절히 매웠다. 예컨대, 1924년에 도미타 기사쿠가 설립한 조선물산협회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오사카와 다른 일본 도시들에서 열어 조선에서 생산항 물품판매를 촉진했다. 그것은 조선의 경제 전반에 이익이 된다고들 했지만 주로 정착민 무역업자들이 득을 봤다.
그다음 해에 시모오카도 지방의 수장들에게 "조선 물산을 우선적으로 사용해달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시모오카의 요청은 지역[조선]의 일본인 사업가와 기업가들에게는 조선 민족주의와 자강[실력양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희미한 반향차원을 넘어 조선에서 제조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기회로 큰 환영을 받았다.
이런 움직임은 자신들이 선점한 대의를 식민주의자들이 도용했다며 짜증을 내고 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로부터 경멸당했다. 조선어 신문들은 마찬가지로 조선 자본가들이 일본인들의 산업운동에 동참하는 데에도 비판적이었지만, 물산장려운동의 전체적 메시지가 1921년 산업조사위원회에서 이 자본가들이 요구한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 의제와 공명하고 있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쌍방이 조선인의 실력양성을 강조하고 식민지 체제 내에서 '민족적' 권리를 확장하려고 애쓰면서, 두 집단은 한편으로 그들의 경제가 점차 일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서로 거의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6.
산업발전에 대한 그들의 공통적 이해관계는 정착민들과 조선인들, 그리고 식민지 관리들을 본국에 대항하는 일시적 동맹자로 묶는 일종의 지역적 '경제민족주의'마저 창출할 수 있었다.*
* '경제적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나는 브루스 버먼(Bruce Berman)의 단어사용법에 대해 부연하는데, 그는 그것을 본국에 대한 식민지 국가와 정착민들의 동맹으로 국한해서 사용했다.
우리는 그런 예를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조선 쌀 보호운동인 선미옹호운동에서 볼 수 있다. 선미옹호운동은 1932년 여름에 일본 정부가 조선 쌀의 생산을 규제하기로 결정한 데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했는데, 일본 정부의 그런 조치는 식민지의 값싼 쌀 유입으로 손해를 보게 된 본국 농민들의 항의로 촉발되었다. 산미증식운동의 결과로 식민지의 곡물이 지속적으로 일본 본국에 쏟아져 들어가면서 쌀값을 하락시켜 1920년대 일본 농민의 장기불황을 야기했으며, 그것은 1920년대 말까지 이어진 본국 지방농민들과 쌀 상인들의 거센 항의를 불러왔다.
선미옹호운동이 산업진흥운동처럼 대지주들과 상인자본가들의 이익 위주로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소작농들은 이 운동의 부담을 가장 무겁게 졌을 뿐만 아니라 이제 자신들의 생계까지 위협당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쌀 생산은 조선 경제의 모든 단계들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산위축의 전망은 조선인 생산자들과 일본인 상인들, 그리고 양쪽 공동체의 지주들이 발전을 위해 함께 뭉칠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을 조성했다.
조선의 농민들이 이 운동을 생존의 문제로 봤듯이, 정착민들도 본국의 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할 정치적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공동의 관심사들이 자신들의 거래이익 추구에 중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그들 간에 이해관계가 엇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은 전면적으로 조선 쌀을 옹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단결한 것으로 보인다.
현지의 농민들을 대변한 조선어 신문들은 정부의 쌀 통제정책이 '쌀 위에 구축된' 조선 경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위협조로 경고했다. 친정부적인 《경성일보》조차 이례적으로 조선을 "단지 착취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며 도쿄의 '이기주의'를 험악한 어조로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
항의시위가 조선에서 소용돌이쳤지만 고집스런 일본 정부는 1933년 9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과 타이완에서의 식민지 쌀 생산계획을 부분적으로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선미옹호기성회는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그룹인 '선미옹호 십자군'을 파견했는데, 이에는 미쓰이 에이초, 마쓰이 후사지로, 한상룡과 장헌식이 참여했다. 아라이 하쓰타로와 사이토 히사타로도 나중에 합류했다.
선미옹호기성회와 산하단체들은 신중하라는 총독부의 조언을 때로 무시하면서 1934년 3월에 약 6,000건에 이르는 청원들을 엮어 "한목소리로 본국에 집중포화를 쏟아부었다". 결국 일본 농민들의 압력과 조선 쪽에서 밀려온 단호한 반대가 합쳐져 쌀 통제에 대한 타협안과 조선 쌀 증산을 위한 소극적인 운동 쪽으로 귀착됐는데, 그런 조치들은 본국 소비자들 속에 형성된 조선 쌀의 변함없는 인기를 꺾는 데는 거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요약)
재조선 일본인: 조선에 투자하라고 시발!
조선총독부&일본 정부: 돈 없다고 시발!
재조선 일본인: 그리 좆같이 굴면 저, 조선인들이랑 손 잡아버려요?
조선인: (어휴 좆같은 새끼들...)
댓글 영역
웬만한 근대 식민지는 식민지에 거주하는 본국 출신과 친본국 현지 엘리트들에게 어떤 형태로든 상당한 실권을 갖고 군림하는데, 조선총독부는 양쪽 모두에게 유의미한 권력이 실질적으로 없는게 킬포지. 어떤 의미에서는 목적을 위해 고향사람들과 동문한 선후배들도 통수쳐 권력을 독식한 유신 과두집단 답다면 답지만.
자본주의가 발달한 영프에선 정착민들이 식민지에서 (자기들만의) 의회를 설립할 "실력"이 있었는데 일제는 정부가 까라면 까야지 어쩔 건데 이런 느낌이랄까
근데 그건 일본 자체의 문제보단 동아시아의 관치주의적 사고 방식이 문제일 수도...?
대붕이는 갤러리에서 권장하는 비회원 전용
갤닉네임입니다. (삭제 시 닉네임 등록 가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