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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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년대 말의 몇 년 동안에 조선의 산업 로비스트들은 산미증식운동이 다시 가동되고 철도건설안이 통과되며, 대다수 관세의 철폐와 조선 남해안을 따라 더 많고 더 좋은 항만시설들이 갖춰지는 현실을 지켜봤다.
정착민 지도자들은 그들의 초기 '4대 요항'이 다소간에 결실을 맺자 또 다른 운동을 시작했다. 그것은 조림과 수해방지 사업에서부터 제조업과 광업, 그리고 수산업 발전까지 망라한 '6대 요항'이었다. 정착민들은 이제 포괄적인 공업화 정책의 시행을 식민국가에 촉구했으며, '전 세계의' 자본가들과 잠재적 투자자들에게 '무궁무진한 매장량'을 지닌 조선반도의 철광석과 석탄, 금, 규서에 투자하라고 선언했다.
하지만 조선 민중들은 산업운동을 그 시초부터 냉랭하게 대했다. 일본인 정착민들이 조선의 발전을 명분으로 더 많은 산업을 촉구할 때, 《동아일보》는 그로 인해 빚어지는 역설적인 현실을 다음과 같이 지적했다.
"산업이 더 많이 늘어날수록 더 많은 조선인들이 고통당한다." 농민들은 점점 더 자신들의 수확물이 아니라 수입된 만주의 기장에 기대어 근근히 살아갈 수 밖에 없도록 내몰렸다.
《조선일보》도 경쟁신문의 그런 탄식에 공감해 조선인들은 "매일 산업적 권리를 박탈당한 채" "거대은행들과 기업들에서부터 영세 고리대금업자들에 이르는 외국인 군단의 착취 아래" 간신히 끼니를 때우고 있으며, "우리 농토와 집들과 숲은 끊임없이 저들의 손아귀로 들어가고 있다"라고 한탄했다.
"우리는 쌀 증산도 산업발전도 원치 않는다"라고 《조선공론》의 어느 독자는 편집자에게 보낸 편지에서 단호하게 선언했다. 관개사업, 광업, 농업 등 그 어느 분야에 산업이든 간에,
"그것들은 오직 일본인 기업가들의 이해와 탐욕을 만족시켜줄 뿐"이고,
"조선인들의 일상적인 고난을 더 악화시킬 뿐"이라고 그는 지적했다.
조선 민족주의자들은 운동을 통해 그런 감정들을 행동으로 이행하려 했다. 그 전형적인 것이 물산장려운동이었다. 1922년에 조만식과 이광수가 조직한 그 운동에 김성수 같은 이름난 민족주의 사업가들이 합류했다. 제1차 세계대전 뒤에 인도와 중국 같은 나라를 휩쓴 경제적 민족주의의 세계적 흐름을 구현한 그 운동은 조선의 경제적 자급자족과 토착 부르주아지 육성을 촉진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고 있었다. 지역에 설치된 지부들의 연결망을 통해 물산장려운동은 사람들에게 "조선인들이 만든 물건을 사서 쓰고", "자력으로 상품을 만들어 공급하자"라고 촉구했는데, 이는 1923년에 가장 활발했던 일부 일본 상품들에 대한 불매운동으로까지 이어졌다.
초기 2년간의 열정과 성공 뒤에 물산장려운동은 정부의 탄압과 좌익의 비판 속에 흔들리기 시작했다. 그러나 일본인들은 그 운동을 심각하게 받아들였다 마루야마 경무국장은 "지역의 물산장려라는 외견상 아름다운 딱지 뒤에" 도사리고 있는 체제전복적인 '일본 통화 보이콧'(조선인 지도자들은 그 반대로 주장했지만) 촉구를 주목했다. 또한 정착민 지도자들은 물산장려운동을 이끌고 있는 것이 '비타협적인 정신'이라고 의심했다.
지역의 반대자들에 대한 그런 사라지지 않는 불안은 정착민들로 하여금 그들의 산업운동을 (조선인 자본가들과 손잡음으로써) 정부의 순화정책에 맞추도록 했을 뿐만 아니라 그 불안의 근원, 즉 자급자족을 향한 조선 민족주의의 요구에도 지지를 보내게 한 것으로 보인다.
이런 점에서 특히 유용했던 것이 '조선의 물산장려'라는 수사였다. 그것은 정착민들의 산업진흥 활동과 조선 민족주의운동간의 차이를 적절히 매웠다. 예컨대, 1924년에 도미타 기사쿠가 설립한 조선물산협회는 '조선물산공진회'를 오사카와 다른 일본 도시들에서 열어 조선에서 생산항 물품판매를 촉진했다. 그것은 조선의 경제 전반에 이익이 된다고들 했지만 주로 정착민 무역업자들이 득을 봤다.
그다음 해에 시모오카도 지방의 수장들에게
"조선 물산을 우선적으로 사용해달라"라는 지시를 내렸다. 시모오카의 요청은 지역[조선]의 일본인 사업가와 기업가들에게는 조선 민족주의와 자강[실력양성] 이데올로기에 대한 희미한 반향차원을 넘어 조선에서 제조업을 더욱 발전시키는 기회로 큰 환영을 받았다.
겉으로 동등해 보이는 물산장려운동과 일본인들의 조선 제품 구매장려 사이에는, 그러나 근본적인 차이가 그 밑바닥에 깔려 있었다. 《동아일보》가 독자들에게 상기시켰듯이, 물산장려운동은 조선인들에게 '자신들의 손으로' 생활용품을 만들도록 촉구하는 한편, "수입품뿐만 아니라 조선에서 조선인들 손으로 만들지 않은 모든 것의 사용을 거부"하라고 호소했다.
반면에 조선에서 만든 제품에 대한 일본인들의 판매 촉진운동은 "그것을 조선에서 소비하는 차원을 넘어 수출용 제품"으로 확장하고 "일본을 포함한 외국에서 들여오는 수입품들을 거부"하라고 촉구했다.
그것은 순전히 "자신들의 일자리를 늘리거나" "자신들의 생활비를 줄이기 위한" 정착민들의 이기적 욕망의 산물이었다.《동아일보》가 지적했듯이, "전자(물산장려운동)는 자급자족을 증진하려는 민족주의적 색깔을 지니고 있는 반면, 후자는 조선이 일본의 한 지역이라는 의식 속에 조선에서 만든 제품을 적극적으로 판매촉진하자는 것이었다."
달리 말하면, 일본인들은 자신들의 산업증진 활동을 위한 토대를 '민족'에서 '지역'으로 대체함으로써 전략적으로 자신들의 식민주의적 목적추구를 민족주의 사업처럼 보이게 만들었다.
이런 움직임은 자신들이 선점한 대의를 식민주의자들이 도용했다며 짜증을 내고 있던 조선 민족주의자들로부터 경멸당했다. 조선어 신문들은 마찬가지로 조선 자본가들이 일본인들의 산업운동에 동참하는 데에도 비판적이었지만, 물산장려운동의 전체적 메시지가 1921년 산업조사위원회에서 이 자본가들이 요구한 '조선인 본위'의 산업정책 의제와 공명하고 있었던 점을 간과해서는 안 된다. 쌍방이 조선인의 실력양성을 강조하고 식민지 체제 내에서 '민족적' 권리를 확장하려고 애쓰면서, 두 집단은 한편으로 그들의 경제가 점차 일본의 통제로부터 벗어나고 있던 상황 속에서 서로 거의 동조하기에 이르렀다.
온건파 민족주의자들 - 대부분 쌀 생산지인 전라도의 '지주-사업가들' - 은 '친일파' 엘리트들이 그랬던 것처럼 민족주의적 성향을 지니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그 점은 모든 타협안을 배척했던 급진세력이나 공산주의자들과 비교할 때 특히 도드라진다. 바로 그런 이유에서, 마이클 E. 로빈슨이 지적했듯이, 자신들과 대립했던 친일파 엘리트들만큼이나 자본주의를 적극적으로 수용했던 온건파 민족주의자들은 일본인들과의 공공연한 협력관계를 거부한 채 협력과 경쟁 사이에서 줄타기를 할 수밖에 없었다.
마찬가지로 산업화를 촉구한 일본인들과 조선인들의 접점이 단지 교활한 제국주의자들이 만들어낸 수사적 효과에 지나지 않는다는 이유로 부정될 수도 없다.
정착민들의 산업화 요구를 이끈 원동력은, 기본적으로 도쿄의 지도자들이나 조선에 잠시 머무는 식민지 고위관료들은 거의 공유할 수 없는 관심사들이었다.......
산업발전에 대한 그들의 공통적 이해관계는 정착민들과 조선인들, 그리고 식민지 관리들을 본국에 대항하는 일시적 동맹자로 묶는 일종의 지역적 '경제민족주의'마저 창출할 수 있었다.*
* '경제적 민족주의'라는 용어를 사용할 때 나는 브루스 버먼(Bruce Berman)의 단어사용법에 대해 부연하는데, 그는 그것을 본국에 대한 식민지 국가와 정착민들의 동맹으로 국한해서 사용했다.
우리는 그런 예를 조선 전역에서 전개된 조선 쌀 보호운동인 선미옹호운동에서 볼 수 있다. 선미옹호운동은 1932년 여름에 일본 정부가 조선 쌀의 생산을 규제하기로 결정한 데에 대한 저항으로 시작했는데, 일본 정부의 그런 조치는 식민지의 값싼 쌀 유입으로 손해를 보게 된 본국 농민들의 항의로 촉발되었다. 산미증식운동의 결과로 식민지의 곡물이 지속적으로 일본 본국에 쏟아져 들어가면서 쌀값을 하락시켜 1920년대 일본 농민의 장기불황을 야기했으며, 그것은 1920년대 말까지 이어진 본국 지방농민들과 쌀 상인들의 거센 항의를 불러왔다.
그들의 항의 뒤에는 산미증식운동의 수혜자들인 식민지 쌀 상인들의 위협적인 영향력이 어렷품이 그 존재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들의 영향력은 수출업자들이 1930년대 말에 총독부와 협력해 일본 내 조선 쌀 판매를 증대하기 위한 마케팅 로비단체인 선미협회를 결성한 뒤 본국으로 확장되기 시작했다. 검사절차의 강화로 도정하지 않은 조선 쌀의 일본 수출은 줄었고, 그로 인해 본국의 쌀 도정업자(정미소)들은 손해를 봤지만 식민지의 도정업자들과 도정한 쌀을 일본으로 수출하는 업자들은 득을 봤다.
......
이들 정착민 쌀 상인들과 수출업자들은 도쿄 정부의 식민지 쌀 수입에 대한 제한결정을 반대하는 운동의 중추를 형성했다. 부산의 쌀 상인들이 그 항의운동을 시작했고, 그것은 곧 조선 전역으로 급속히 확산되어 곡물거래업자들과 거래소들, 지주들에서부터 쌀농사를 짓는 농민들까지 끌어들였다.
마쓰이 후사지로, 사니토 히사타로, 다다 에이키치와 같은 유력한 일본인 쌀 상인들과 지주들은 선미옹호기성회를 결성해 본국 정부의 정책에 대한 반대운동을 이끌었다. 선미옹호기성회는 총독부의 충분한 지원, 그리고 "총독부의 정치적 해결을 아래로부터 지지하고 촉구하는" '순수민간운동'을 활성화하려던 언론의 지원 속에 결성되었다.
식민지 관료들이 도쿄 정부와 직접 협상을 벌이는 동안 선미옹호기성회의 지도자들은 본국 정부에 식민지 쌀 생산을 규제하는 것은 "이제 싹이 트고 있는 조선의 산업을 그 토대부터 파괴"할 것이라고 주장하는 항의전보들을 보냈다. 그리고 조선인과 일본인 로비스트들은 함께 도쿄로 몰려가 본국의 경제적 수요를 충당하는 데 기여해온 조선의 희생을 강조하면서 조선에 대한 정책에서 표변하는 정부의 태도를 질책했다.
한편, 조선 내의 '선미옹호 촉구집회'가 조선 전역에서 벌어졌다. 지역의 상업회의소들과 지방의회들도
'우리 조선의 쌀'과
'우리 생명줄'을 지키고자 대중들을 결집하기 위한 자체의 청원운동을 벌이기 시작했다.
선미옹호운동이 산업진흥운동처럼 대지주들과 상인자본가들의 이익 위주로 진행된 것은 사실이다. 소작농들은 이 운동의 부담을 가장 무겁게 졌을 뿐만 아니라 이제 자신들의 생계까지 위협당하게 되었다. 그럼에도 쌀 생산은 조선 경제의 모든 단계들과 연관되어 있었기 때문에 생산위축의 전망은 조선인 생산자들과 일본인 상인들, 그리고 양쪽 공동체의 지주들이 발전을 위해 함께 뭉칠 수 있는 공동의 기반을 조성했다.
조선의 농민들이 이 운동을 생존의 문제로 봤듯이, 정착민들도 본국의 정책에 영향력을 발휘할 정치적 수단이 없는 상황에서 그런 공동의 관심사들이 자신들의 거래이익 추구에 중요하다고 봤다.
따라서 그들 간에 이해관계가 엇갈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은 전면적으로 조선 쌀을 옹호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단결한 것으로 보인다. 현지의 농민들을 대변한 조선어 신문들은 정부의 쌀 통제정책이 '쌀 위에 구축된' 조선 경제를 무너뜨릴 것이라고 위협조로 경고했다.
친정부적인 《경성일보》조차 이례적으로 조선을 "단지 착취의 대상으로만" 취급한다며 도쿄의 '이기주의'를 험악한 어조로 비난하는 기사를 실었다.항의시위가 조선에서 소용돌이쳤지만 고집스런 일본 정부는 1933년 9월 이에 아랑곳하지 않고 조선과 타이완에서의 식민지 쌀 생산계획을 부분적으로 중단하기로 결심했다. 선미옹호기성회는 일본인과 조선인으로 구성된 그룹인 '선미옹호 십자군'을 파견했는데, 이에는 미쓰이 에이초, 마쓰이 후사지로, 한상룡과 장헌식이 참여했다. 아라이 하쓰타로와 사이토 히사타로도 나중에 합류했다.
선미옹호기성회와 산하단체들은 신중하라는 총독부의 조언을 때로 무시하면서 1934년 3월에 약 6,000건에 이르는 청원들을 엮어 "한목소리로 본국에 집중포화를 쏟아부었다". 결국 일본 농민들의 압력과 조선 쪽에서 밀려온 단호한 반대가 합쳐져 쌀 통제에 대한 타협안과 조선 쌀 증산을 위한 소극적인 운동 쪽으로 귀착됐는데, 그런 조치들은 본국 소비자들 속에 형성된 조선 쌀의 변함없는 인기를 꺾는 데는 거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 제국의 브로커들, 우치다 준
일본 농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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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해보니 황도파애들이 가난하고 깡촌에 농촌밖에 없던 도호쿠 지방 자재들 애들이 피폐해지고 있는 고향을 보며 거기에 동조하는 고향 병사들이랑 의기투합해서 일으킨 사건인데 그 도호쿠 지방 피폐해졌던게 산미증식계획이였다면 나비효과 개쩌네 진짜
개인적으로는 농촌의 몰락은 메이지 시대부터 일본을 먹여 살리던 양잠산업이 대공황으로 꼬라박아 버린 것이 더 큰 원인이라고 생각해요...
대붕이는 갤러리에서 권장하는 비회원 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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