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쁘신 와중에 이렇게 자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이 자리를 빌려 항간에 떠도는 가십에 대해 머리 숙여 사죄드립니다. 모든 건 저의 책임입니다. 그러나 맹세컨대 여러분이 짐작하시는 일은 없었습니다. 허위 사실에 대해선 변명이 아닌 진실을 말하고자 합니다. 무분별한 추측성 기사는 멈춰주십시오. 


전적으로 제가 부족한 탓에 많은 분께 심려를 끼쳤습니다. 국민 여러분들의 그 어떤 비난도 피하지 않고 달게 받겠습니다.


저는 남자로서 나아가 한 인간으로서 또한 왕실의 일원으로서 책임을 다하지 못했습니다. 이렇게 실망을 안겨드려 죄송합니다. 대단히 면목이 없지만 마지막으로 부탁드립니다. 다시 한 번 너그러운 눈으로 보아주신다면, 더는 오늘과 같은 일이 없이 이 사회와 국가에 헌신하는 사람이 될 것을 약속드립니다. 


더는 이런 물의를 일으키지 않도록 스스로 주의하고 단속하겠습니다. 이번 소동을 깊이 사죄드립니다. 






사방에서 플래쉬가 터졌다. 너 나 할 것 없이 목청을 높이는 기자군단의 질문 세례도 함께였다. 


리쿠는 직각으로 허리를 숙인 채 한참을 그대로 있었다. 땅바닥에 고개를 처박고 광이 나는 구두 앞코를 멍하니 쳐다봤다. 시끄러운 소음 때문에 머리가 웅웅 울렸다. 언제 허리를 세워야 하지. 도통 모르겠어서 앞발치를 들썩거리며 초를 셌다. 하나, 둘... 열셋이 넘어갈 때 보좌진이 단상으로 들어왔다. 수행비서들에 에워싸여 천천히 퇴장하는 내내 쉬지 않고 질문 폭격이 이어졌다. 질의응답은 없기로 했다면서. 그럼 저 입에 다 재갈을 물렸어야지. 


말을 하고 싶었다. 잘 짜여진 진심 없는 대본 말고. 이유와 대상도 모르겠는 허울뿐인 사죄 말고. 묻는 말에 솔직하게 전부 답하고 억울한 심정을 털고 싶었다. 그러기엔 전과가 화려해서. 당장 리쿠를 보호하듯 둘러싼 비서들도 행여나 리쿠가 입을 열까 잔뜩 경계하며 흡사 타임리밋이 얼마 안 남은 시한폭탄이라도 되는 듯 끌려나가는 중이라. 나 하나 억울하고 모두가 편할 수 있으면 입을 닫는 게 맞겠지. 그렇게 생각하며 잘 떨어지지 않는 발을 옮겼다. 



유우시 왕자님께 미안하지 않으신가요? 

벌써 이번이 몇번째 추문인가요?! 



조용히 가려고 했는데. 그 질문이 리쿠의 발목을 잡았다. 옆에서 리쿠를 부축하는 척하고 있던 수석비서가 불안한 기운을 감지해 팔을 잡고 있던 손에 힘을 줬다. 무시하세요. 가셔야 합니다. 잠깐 멈춰 생각하던 리쿠가 이내 팔을 뿌리치고 뒤를 돌았다. 옆에 비서가 간절하게 고개를 젓는 건 미처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유우시한테는 미안해요."


잠깐 숨을 고르고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유우시한테만 미안해요." 


아까보다 더한 셔터음과 고성이 회견장을 가득 채웠다. 순식간에 난장판이 된 공간에서 빳빳이 고개를 쳐들고 있던 리쿠가 다시금 붙들려 끌려나갔다. 대체 누가 더 서열이 높은 건지, 리쿠를 짐짝 다루듯 차에 태운 수석비서가 고쳐지지 않는 리쿠의 경솔한 태도와 불같은 성미를 매섭게 지적했다. 또 한동안 대중과 언론의 씹을 거리로 1면을 장식하게 되어 기쁘시냐 물어왔다. 거기서 유우시 얘기를 꺼낸 건 뻔한 노림수인데 그거에 넘어가냐고. 덕분에 유우시가 우습게 된 꼴이라고. 그 말엔 리쿠도 반박하지 않고 반성했다. 


이제 달이 넘어가면 왕가에 들어오신지 1년입니다. 제발 존칭을 입에 익히십시오.


그 말을 듣고서야 깨달았다. 또 유우시 이름을 멋대로 불렀다. 죽어도 입에 붙지 않는 그 사마(様)호칭. 내가 함부로 부를 수 없는 내 남편의 이름. 토쿠노 유우시 왕자님께 또 결례를 범했다. 우리는 평범한 부부가 아니라 왕세자 내외니까. 나는 유우시 남편으로 끝나지 않는 일국의 부마니까. 내가 유우시를 유우시라고 부르는 것도 허락되질 않아서. 갑갑한 한숨을 내쉰 리쿠가 달리는 차 안에서 창문을 내렸다. 기자들이 따라온다며 그것마저 통제당했다. 마음대로 바람을 쐴 자유 하나 없는 삶. 그게 지금 리쿠가 처한 일상이다. 목을 조를듯이 죄어오는 넥타이를 급하게 잡아빼고 셔츠 단추를 세네개 풀었다. 얼마 안 가 차에서 내려야 할 때 다시 단정하게 채워야 하는 걸 잘 알고 있었다. 다만 잠깐이라도 숨을 쉬어야 했다. 자신에게 할당된 공기마저 세상 모든 이가 한 움큼씩 빼앗아가는 기분이 들었다. 










사랑해서 결혼했다. 심지어 리쿠가 죽도록 원해서 성사된 결혼이었다. 한때는 달콤한 연애감정에 취해 영영 유우시에게 종속된 삶을 바랐었다. 그때는 그랬다. 


다 버릴 수 있을 것 같았다. 최정상 아이돌로 쌓아온 화려한 커리어도. 남녀 가리지 않고 즐기던 방탕한 사생활도. 데뷔 이후 탄탄대로만을 걸어 한껏 치솟은 오만한 자존심도 전부. 리쿠를 포장하는 수많은 수식어들, 프라이드로 삼았던 경력과 노력 모두가 유우시 앞에서 희뿌연 뜬구름처럼 흩어졌다. 그땐 눈앞이 흐려 오직 유우시만 또렷하게 보였다. 불의에 찾아온 사랑에 눈이 멀었는지 그게 아니라면 유우시가 흑마법이라도 부렸는지. 지금 생각해보면 가히 제정신은 아니었다. 


왕실이 주최한 크리스마스 자선 행사에서 처음 만났다. 유우시가 먼저 말을 붙였던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중요한 건 서로 흡입하듯 끌렸다는 사실이다. 화면 속에서나 보던 왕자님, 실제로 보니 그냥 귀여웠다. 그렇다고 귀엽지만은 않았고. 여태 리쿠가 만났던 수많은 상대에게 느껴본 적 없던 특별한 무언가, 단순히 기품이라기엔 부족하고 무게감이라 말하기엔 아쉬운. 말로 설명할 수 없을만큼 색다르고 묵직한 하나의 감정이 파도가 되어 덮쳐왔다. 


첫눈에 반했었나. 내가? 아니면 유우시가. 마음대로 이름을 부르고 어깨를 감싸도 아무 말 없이 웃기만 하던 건 유우시였는데. 무작정 둘만 있는 곳으로 잡아 끌면 가만히 따라오던 것도. 분위기 다 잡아놓은 주제에 그제서야 고귀한 왕자님 신분이 마음에 걸려 망설이는 날 당겨 먼저 키스한 것도. 앞으로 이런 거 하는 사이가 되고 싶다는 말에 끄덕여준 것도. 밤마다 변장에 가까운 무장을 하고 내 집에 찾아오던 것도. 무리하게 일정을 맞춰 내가 투어중인 도시에 공무를 핑계 삼아 방문하던 것도. 경호원 하나 없는 밤산책을 조르는 쪽도. 내 손에 가위를 쥐여주고 나랑 똑같은 스타일로 머리를 잘라달라고 맡기던 것도. 전부 유우시였는데.


그런 유우시를 사랑했다. 사랑스러웠다. 세상에 다시 없을 사랑을 하고 있다는 몽환에 젖었다. 이제 와 고백하지만 솔직히 취했었다. 전국민을 상대로 하는 눈치게임. 왕자님과 비밀연애하는 나. 내가 좋아 어쩔 줄 모르는 차기 국왕. 유우시를 사랑하는 순수한 마음에 비열하고 교만한 우월감이 살로 붙었다. 뭐가 됐든 감정이 날로 불어났다. 유우시가 가진 배경이 연료가 됐든, 유우시라는 사람 자체에 매료됐든. 다 버리고 오로지 유우시를 가지고 싶다는 끔찍한 충동에 매몰됐다. 단언컨대 태어난 이래 가장 비이성적이었으며 무모하기 짝이 없었다. 


리쿠의 대책 없는 기행엔 유우시가 크게 한 몫을 했다. 결혼하고 싶다는 말에 몇 번이나 퇴짜를 놓았기 때문이다. 리쿠라고 그게 전부 진심은 아니었다. 말하자면 사랑해를 능가하는 애정표현. 지루한 현실을 도피해 특별한 감정에 도취되고 싶은 가벼운 마음. 딱히 알맹이를 파고들기보다 감미로운 사랑놀음이나 하자는 습관적 청혼이었는데, 유우시는 번번이 냉정하게 싹을 잘랐다. 한두번은 고고한 내숭이려니 웃고 넘겼지만. 다음부턴 좀 부아가 돋았다. 기묘한 승부욕이 치고 올라왔다. 


은근히 유우시와의 관계에서 자신이 우위를 점하고 있다 자신하던 마에다 리쿠는 세 번째 청혼이 수포로 돌아가자 반쯤 미치기 직전이 된다. 분명히 눈에 보이게 날 사랑하면서 왜 안 된다는 건데. 평민이라서? 소위 말하는 딴따라여서? 평생을 일에 미쳐 살았던 리쿠는 이때쯤 그냥 사랑에 미친 남자가 됐다. 누군지는 모르지만 이미 진지한 관계의 연인이 있음을 짐작한 팬덤이 대거 탈빠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였다. 


그도 그럴 게 결혼을 암시하는 말을 숨쉬듯이 했다. 앨범 땡스투에 대놓고 둘만 아는 애칭을 적어넣고 그를 위해 살아가며 그에게만 감사한다 적었다. 걸핏하면 인스스에 커플템 찍어올렸다 빛삭했다. 이상형을 묻는 뻔한 질문에 보란듯이 유우시를 있는 그대로 묘사했다. 그리고 그 사람과 평생을 함께 하고 싶다 말했다. 아티스트병 악귀에 들려 신들린듯 랩메이킹을 해가며 유우시를 노래했다. 유우시 생일 당일 치뤄진 콘서트 무대에서 완벽하게 팬덤을 제외한 개인적 소감을 말했다. 물론 유우시를 향한 고백문이었다. 당장 은퇴라도 불사할 기세였다. 이쯤 되니 눈치 빠른 코어팬덤은 상대를 특정했다. 팬들 사이에서 돌고 돌던 화제는 곧바로 먹잇감을 찾아 헤매는 기자 무리로 넘어갔다. 대대적인 스캔들이 터졌다. 


리쿠야 몇 차례나 겪어본 일이지만 유우시는 처음이었다. 인정 여부는 나중 문제고 사실이든 아니든, 리쿠에겐 크게 흠집날 구석이 없었다. 코어팬이야 빠지겠지만 이미 대중적 이미지 자체가 사랑이 많은 남자였다. 함께 공연한 또래 배우나 아이돌은 전부 사귄 걸로 유명했다. 이제 왕세자까지 홀린 마성의 알파메일 타이틀이 붙었다. 팀에서 개인 기용 cm의 숫자가 넘사로 많기는 한참 된 일이었는데. 웃기게도 스캔들 이후 더욱 엄청난 오퍼가 밀려왔다. 


그딴 건 관심 없었다. 유우시의 상황은 리쿠와 사뭇 달랐다. 작은 구설수조차 없던 고귀한 왕자님이 바람둥이 아이돌에 빠져 해외까지 따라다녔다는 추잡한 헤드라인이 내내 유우시를 괴롭혔다. 물어뜯을 건덕지가 없어 입 다물고 있던 왕실폐지론자들이 벼락처럼 쏟아져나와 너도 나도 말을 얹기 시작했다. 리쿠는 죄책감을 느꼈다. 사랑하는 마음도 그에 따른 소유욕도 드러내선 안된다는 걸, 유우시는 평범한 삶을 보내고 있지 않다는 걸. 어렴풋이 느꼈다. 


유우시는 이렇게 되도록 리쿠를 탓하거나 통 힘든 소릴 밖으로 꺼내놓질 않아서. 내가 성급하고 경솔했단 말에 그래도 좋았다고만 하니까. 미안하다는 사과에 절레절레 고개만 젓던 유우시를 힘껏 끌어안고 사랑한다 말했다. 여태 했던 어떤 고백보다 진심이었다. 끝까지 유우시를 책임지고 지켜주고 싶었다. 이제껏 느껴본 건 사랑이 아니며 지금 이 감정만이 사랑인 것 같았다. 그래서 네번째 청혼을 했다. 





아니라고 했다. 또 까였다. 엄청난 진심을 들이받은만큼 충격이 배가 되어 돌아왔다. 리쿠는 어느새 억지를 피웠다. 왜 아닌데. 왜 안되는데. 그럼 너 나랑 헤어질 거야? 


"아니." 

"그럼 결혼할 거야?" 

"아니." 

"그게 뭔데! 그럼 적당히 놀다 헤어질 거야?" 

"아니." 

"결혼할 사이도 아닌데 우리가 왜 만나는 건데? 어차피 헤어질 건데 왜 만나? 어?" 

".........."


따지자면 비혼주의에 가까운 성향을 가진 주제에. 가뜩이나 시달린 유우시를 붙잡고 거의 떼를 썼다. 진심 반 오기 반으로 버무려진 그야말로 생떼. 이때까지 결혼을 원하는 애인을 차본 적은 많았는데, 반대로 매달려본 적은 정말 처음이었다. 


유우시 입장만 놓고 보면 이 결혼이 성사되는 편이 그나마 나았다. 닳고 닳은 아이돌 손 안에서 놀아난 바보 왕자가 되느니 그 모든 걸 순애로 포장하는 것이 차라리 차선이었다는 말이다. 리쿠 또한 그걸 물고 늘어졌다. 


언제나 필요할 때 입을 꾹 닫지 넌. 평소엔 별 시덥잖은 얘기도 잘만 떠들면서. 답답해 하는 리쿠를 빤히 쳐다보던 유우시가 마침내 입을 열었다. 담담한 투였다. 


리쿠가 힘들 거야. 아마 버티지 못할 거야.


그 말을 들은 리쿠가 찡그리듯 웃었다. 아 나를 위해? 어째 빈정거리는 태도였다. 


유우시의 말은 많은 게 생략되어 있었고 리쿠는 직설적인 인간이었다. 사랑하는데 결혼하고 싶진 않고 그건 다 너를 위한 선택이라는 궤변. 리쿠에겐 궤변에 지나지 않는 유우시의 말. 설령 마음이 없다 해도 지금 이 자리에선 단지 귀에 듣기 좋은 말을 해주는 게 더 쉽지 않나. 리쿠는 실로 그러길 바랐다. 끝내 원하는 말을 못 들었지만. 


한심하게 화를 내다 기어이 울었다. 일종의 분한 눈물. 어쩌면 유우시의 완강한 고집을 꺾을 치트키. 서럽게, 그리고 예쁘게 울면서 마음을 쏟아냈다. 실제로 티가 나게 유우시를 감싼 공기가 달라졌다. 


정말 나를 위한다면 계속 같이 있겠다고 말해. 우리가 헤어지지 않는다는 확신을 줘. 나를 불안하게 만들지 마. 나는 오직 니가 필요해.


잔뜩 흔들리는 눈빛으로 리쿠를 보던 유우시가 입술을 들썩였다. 손을 어디 둘 줄 모르는 사람처럼 뺨을 긁적이다 리쿠의 어깨를 토닥이다 또 물길이 흐른 얼굴을 닦아냈다. 이윽고 벌게진 눈가로 다가와 살살 문질렀다. 리쿠 울지 마... 말하면서. 


나도 리쿠가 필요해. 그래서 안 된다는 거야. 리쿠가 계속 변하지 않고 나를 필요로 하려면 결혼하지 않는 게 맞으니까. 난 우리가 지금처럼 지내기를 원해. 언제까지나...


진심 어린 유우시의 문장 속에서 리쿠 귀에 박힌 건, 안돼와 결혼하지 않는다. 그것 뿐이었다. 허탈한 심정으로 소리 죽여 울기만 했다. 뭐가 그렇게 서럽고 슬펐는지 지금으로선 희미했다. 허나 그때는 꼭 죽어버릴 것 같았다. 이 사랑이 아니면 다음이 없을 것 같았다. 유우시가 아니면 망가질 것 같았다. 미치도록 절실했다. 


울고 빌었다. 사랑한다고 몇번이고 말했다. 언젠가 헤어짐을 받아들이지 못해 자해까지 하며 리쿠를 괴롭히던 멘헤라 엑스, 질리다 못해 역했는데. 유우시를 상대로 리쿠가 하는 짓이 그와 별반 다르지 않았다. 유우시는 헤어짐을 말한 적도, 리쿠가 정신병에 걸릴만한 행동을 한 적도 없었다. 다만 서로 가진 화력이 달랐다. 리쿠는 아낌없이 모든 걸 발산하는 타입이었다. 맹렬한 불길에 뜨거운 눈물을 불티로 튀기며 서늘한 유우시를 곤죽으로 녹였다. 


물기 어린 말이 이어질수록 유우시가 무너졌다. 점차 눈이 빠르게 깜빡였다. 리쿠는 때를 놓치지 않고 덥석 몸을 붙였다. 축축한 시선으로 올려다보며 간절하게 눈을 맞췄다. 유우시. 죄 젖어버린 목소리로 이름을 불렀다. 


후회 안 할 자신 있어? 유우시가 물었다. 리쿠는 냅다 고개를 끄덕였다. 그 이후로도 많은 질문이 뒤따라왔다. 듣지도 않고 마냥 긍정했다. 드디어 눈앞에 종착역이 펼쳐지는 고지였다. 사랑을 이뤄냈다는 로맨틱한 감동에 이어 어스름한 성취감이 고개를 디밀었다. 희한한 감상이었다. 


난 변하지 않아. 약속할게. 쉽게도 맹세했다. 결코 거짓은 아니었다. 정말 영원할 줄 알았으니까. 





한 주가 지나 결혼이 발표됐다. 또 한 주가 지나 리쿠가 그룹을 탈퇴했다. 팀을 떠나 솔로활동에 매진한다는 겉보기용 기사가 줄줄이 떴다. 십년 가까이 적을 뒀던 연예 활동에서 한순간에 발을 뺐다. 아쉽지가 않았다. 지금 가지고 싶은 건 무뎌진지 오래인 인기나 명성이 아니었다. 아직도 완전히 쥐어지질 않는 유우시. 유우시를 갖고 싶었다. 


그게 얼마나 어리석고 불가능한 생각이었는지는 결혼한 당일부터 뼈저리게 깨달았다. 


말이야 세기의 결혼식으로 화려한 프레임이 씌워졌지만. 그 안에 리쿠의 의사나 의지는 단 한 톨도 포함되지 않았다. 하루종일 전국으로 생중계된 로열 웨딩의 시청률은 20프로대를 돌파했다. 사방에서 초단위로 포착하는 카메라 군단에 포위되어 있다는 것쯤, 오히려 리쿠에게 익숙한 일이었다. 그건 두렵지 않았다. 다만 유우시 옆에 나란히 서게 된 그 순간부터 부여받은 자격과 역할에 무지했다. 


리쿠는 유우시를 만지는 데에 거리낌이 없었다. 당연한 일이었다. 자연스럽게 카메라를 의식한 유우시가 슬쩍 허리에 감긴 팔을 밀어냈다. 남 보는 앞에서 유우시 몸에 손대지 말라고 교육받은 것도 같은데. 영 관심이 없어서 다 까먹었다. 그날 정해진 고리타분한 예식의 절차를 지겹게 밟는 동안 리쿠는 총 이백마흔네번의 실수를 했다. 방송국에서 쓸데없이 정성스럽게 세아려 보도한 횟수가 그랬다. 무려 이백마흔네번. 


우선 존칭 없이 유우시를 부른 횟수. 여든여섯회. 

입모양을 확대해 애칭이나 대화 내용을 전부 까발린 건 역시나 메이저 방송사였다. 독순술, 파닉스 전문가가 방송에 나와 리쿠와 유우시의 입모양을 분석하고 유추했다. 아이돌 시절에도 이보다는 인권이 있었던 거 같은데. 그 방송을 실시간으로 같이 봤다. 리쿠는 경악했고 유우시는 덤덤했다. 


유우시 몸에 손 댄 횟수. 셀 수 없지만 백회 이상. 유우시를 앞질러 걸어나간 횟수. 이십회 이상. 그 외에도 많았다. 유우시보다 화려한 복장을 셀렉한 죄. 유우시보다 카메라에 아이컨택을 많이 한 죄. 대포를 든 사생이 촬금 구역까지 따라와 소란을 일으킨 죄. 별게 다 트집잡혔다. 더워하는 리쿠에게 자진해서 손부채질을 해주던 유우시의 모습까지 리쿠의 실수로 포함됐다. 


신혼여행은 더했다. 말이 좋아 허니문이고 사실상 공무 중 하나였다. 카메라를 대동하고 우호국에 방문해 종일 봉사활동을 했다. 둘만 있을 수 있는 때는 자는 시간이 유일했다. 리쿠는 이게 뭔가 싶었다. 근데 유우시가 좋아했다. 여행 온 기분 난다고 했다. 유우시한텐 이것도 여행이구나. 순수하게 기뻐하는 얼굴을 마주하니 온종일 의아했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씻지도 않고 유우시를 안은 채로 뒹굴었다. 낮엔 유우시 그림자나 다름없지만 적어도 밤엔 좀 사정이 다르니까. 이런 얼굴은 나밖에 못 보니까. 맘껏 이름을 부르고 부드러운 뺨에 입술을 뭉갰다. 그러면 유우시가 어설프게 따라했다. 촉촉거리며 와닿는 입술이 귀여웠다. 자꾸 웃게 됐다. 





호텔에서의 시간을 제외하면 업무수행이나 마찬가지던 신혼여행은 종종 아니 자주 그리운 한때가 됐다. 적어도 그때는 자유가 있었다. 


본격적으로 궁에 입성하고 한달을 채우지도 못했을 시점에 벌써 지쳐 나가떨어졌다. 유우시는 예상했던 일이란 듯이 놀란 기색도 없었다.


독립이나 분가의 개념이 없는 거냐고. 뭐 이렇게 온 어른과 가족이 함께 살아야 하는 거냐고. 대체 언제까지. 얼마나 참으면 되는데. 답을 바라는 리쿠를 지긋이 보던 유우시가 단호하게 말했다. 영원히. 


아예 기대를 말라는 말이었다. 다행히 리쿠는 포기가 빠른 편이었다. 포기랄까 주제 파악. 안되는 싸움에 굳이 진 빼지 않는 성미였다. 왕실에 입성하는 과정부터 순탄치를 않아서. 리쿠를 탐탁하게 보는 왕족은 단 한명도 없었으니까. 유우시는 장자였고 누구보다 왕위 계승에 신경써야 할 위인이었다. 왕실 구성원 중 그 누구도 동성결혼한 전례가 없었다. 견고한 불문율을 어떻게 깨부셨는지, 무슨 수로 리쿠를 곁에 뒀는지. 리쿠는 그것보다 어떡하면 유우시와 둘이 독립할 수 있는지가 궁금했다. 


하지 말아야 할 것은 다 외우지도 못할 정도로 빼곡했다. 우선 결혼하기 전에 타투부터 지웠다. 신체 여기저기에 낙서처럼 널려있던 타투들. 본인은 낙서 아닌 패션이라 여겼지만. 셔츠를 입어도 삐죽 보이는 가슴 위 이레즈미나 손목에 레터링은 지우는 게 맞긴 했다. 거기까지는 충분히 리쿠도 불만 없이 납득 가능한 영역의 요구였다. 


지우는 김에 전부 없애려고 했는데. 뜻밖에 유우시가 제동을 걸었다. 왼쪽 장골 부위에 그려진 타투는 그냥 두라고 했다. 보이는 데도 아니고 예쁘니까. 리쿠가 씨익 웃으며 물어봤다. 왜. 꼴려? 


귀까지 붉어져서 작게 고개를 끄덕이는 폼이 귀여웠다. 사실 그건 전여친이랑 반쪽씩 나눠 새긴 커플타투였는데. 그걸 만지작대며 부끄러워 하는 유우시 얼굴을 못 본다고 생각하니 서운해서. 어차피 남은 감정도 없는 구여친의 흔적쯤 뭐가 대수인가 싶어 비밀로 했다. 먼저 지우지 말라고 말 꺼낸 건 유우시이기도 했고. 


자고 싶을 때 잘 수 있는 자유. 먹고 싶을 때 먹을 수 있는 자유. 혼자 외출할 수 있는 자유. 입고 싶은 옷을 입을 수 있는 자유. 아플 때 쉴 수 있는 자유. 모든 걸 뺏겼다. 엄격하게 통제된 일상에 빨리도 이골이 났다. 숨은 내 맘대로 쉬어도 되는 건가? 이 궁 안에 공기는 과연 내 것인가? 별 생각이 다 들었다. 


그러면서도 꾸역꾸역 참아넘기는 리쿠가 도저히 못 참겠다 봉기한 일이 더러 있긴 했다. 대표적으로 잠자리에 관한 일이었다. 


각방을 쓰라고 했다. 처음엔 각 채를 쓰라고 했다. 이지메? 이거 이지메인가? 리쿠는 현실을 부정했다. 갓 결혼한 신혼부부를 갈라놓는 황당한 규율이 대체 왜 존재하는 건지 상식으로 이해할 수가 없었다. 날뛰는 리쿠를 진정시킨 유우시가 좀 기다리라고 했다. 다행히 유우시가 힘이 있는 모양이었다. 같은 방을 쓰는 특례가 허용됐다. 침대는 두개가 놓였다. 


언론 앞에서 유우시를 귀엽다고 말했다가 호되게 혼난 적도 있었다. 겉으로는 듣는 척 어른 말씀에 고개를 조아렸지만 속으로 딴 생각했다. 내 남편 내가 귀여워 하는데 왜. 이 방 저 방 순회 돌며 릴레이로 꾸중 듣고 왔더니 유우시가 꼭 안아줬다. 귀엽다고 말해줘서 나는 기뻤어. 등을 토닥거리는 손길이 사뿐사뿐 와닿았다. 역시나 유우시는 귀엽다. 어느날 오늘의 에피소드도 크게 자랑하고 싶을 만큼. 





해선 안되는 일의 곱절로 많은 게 절대 지켜야 할 의무사항이었다. 궁에 발을 들여놓은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귀에 못이 박히게 듣고 있는 규칙과 예법. 리쿠가 듣기엔 구태의연하며 시대착오적인 과거의 답습. 들으면 들을수록 삐딱한 반항심이 자라나게 통제적이기만 했다. 유우시는 어떻게 이런 환경에서 귀여움을 지켜냈지. 새삼 대단했다. 듣고 계시냐는 교육 담당 비서의 말에 부러 멍청한 척 대답했다. 


유우시 왕자저하는 저 이런 거 안 배워도 된다고 하시던데. 하고 싶은대로 다 하랬어용. 


싸늘한 눈초리가 돌아왔다. 리쿠는 아무것도 모른다는 백치의 얼굴로 눈꺼풀을 깜빡였다. 눈은 벌레 보듯 하지만 입으론 한없이 정중한 비서가 한 수 물러났다. 내일 다시 하겠습니다. 


왕실에선 리쿠를 안 믿었다. 어디에도 내놓기 두려워 했다. 처음엔 젊은 피나 인기 아이돌의 영향력을 살려 이미지 쇄신에 활용하려는 쓸만한 계획이 있었던 것 같은데, 초장부터 리쿠가 기대에 못 미치는 바람에 아예 철회됐다. 


왕세자와 결혼한지 몇 달이나 지났는데 아무런 작위 수여도 못 받았다. 유우시와의 독립을 꿈꾸는 리쿠에겐 딱히 타격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진짜 아무도 날 환영하지 않네. 정도의 감상은 남았다. 나이가 지긋한 왕가의 보수 인사들은 리쿠의 존재를 도려낸듯 묵인했다. 카메라가 없으면 투명인간 취급이었다. 이유야 간단했다. 평민 신분의 남자인 것. 그들은 틀에 갇혀 있었지만 리쿠도 곁을 내주거나 이 세계에 뒤섞이려는 노력을 안 했다. 유우시는 사이에 끼어 적극적인 중재를 하는 성정이 아니었다. 늘 뒤로 빠져 있지만 실상 리쿠 편에 서있다는 걸 궁 관계자들은 다 알았다. 


유우시의 든든한 비호 아래, 리쿠는 무서울 게 없고 바라는 것만 많아졌다. 웬만한 건 다 들어줬기에 그랬다. 유우시는 리쿠가 본인 때문에 좋아하는 일을 포기했다는 부채감이 있었다. 해서 되도록 능력 안의 일은 전부 들어주려고 노력했다. 어떨 땐 들어주면 안되는 것도, 단호하게 안된다 선을 그어야 하는 것도 다 허락해준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풀파티에 가겠다고 했다. 생각할 것도 없이 안될 일이었다. 남편으로서 사사로운 감정의 개입까지도 안 갔다. 리쿠는 엄연한 왕실의 식구였다. 이유를 설명할 것도 없이 안된다고 했다. 


그러자 리쿠가 토라졌다. 저 삐진 얼굴. 웃지 않고 말하지 않는 리쿠에 유우시는 너무나도 약했다. 리쿠는 별 말도 안 했는데 유우시 혼자 너무 심했나 보내줘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달래주려고 살살 말을 붙여봐도 조용하기만 했다. 원래 리쿠는 절대 자기 침대에서 잠들지 않고 꼭 유우시 옆에 눕는데, 그날은 말도 없이 각 침대를 선택했다. 처음 있는 일이었다. 


결국 잠도 못 자고 고민하던 유우시가 조심스레 리쿠 침대로 건너갔다. 옆으로 웅크리고 있는 리쿠 등에 얼굴을 딱 붙이고 손으로 살살 만졌다. 리쿠 화났어? 


잠깐 가만 있던 리쿠가 이내 몸을 돌렸다. 깜깜한 데서 적응하려는 시간이 필요한듯 천천히 눈을 떴다 감으며 유우시를 바라봤다. 그 눈이 너무 예뻤다. 어둠 속에서도 리쿠의 눈빛은 반짝거렸다. 한번 눈을 감을 때마다 위아래 속눈썹이 맞붙고, 다시 열리면 빛나는 안광으로 유우시를 응시한다. 그리곤 팔을 벌려 감싸 안았다. 좋은 냄새가 나는 뜨끈한 품속. 거기다 머리를 비비며 유우시는 생각했다. 리쿠가 무슨 말을 하든, 나는 이미 졌다. 


리쿠는 눈치가 빨랐다. 원하는대로 흘러가고 있다는 걸 기민하게 알아챘다. 그러면서도 쐐기를 박는 베갯머리송사를 시작했다. 나 너무 답답해. 잠깐이라도 나갔다 오고 싶어. 대외비로 진행되는 파티래. 놀고 싶은 게 아니라 숨을 쉬고 싶어. 안돼?... 유우시이.....


자꾸 머리칼에 숨이 흩어졌다. 껴안고 귓볼을 만지면서 이름을 부르는 건 반칙이었다. 먼저 고개를 치켜든 유우시가 키스할 것처럼 입술을 붙여놓고 말했다. 갔다 와. 시원하게 찢어지는 입꼬리를 달고 달콤한 키스를 선사하는 리쿠. 내 사랑. 내 왕자님. 나는 이까짓 입맞춤에 현혹된 바보.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리쿠를 세게 당겨 안았다. 





사건이 터진 건 이틀 뒤였다. 리쿠가 비밀리에 풀파티에 다녀오자마자 파파라치샷이 대문짝만하게 보도됐다. 제 아무리 극비리로 벌이는 호텔 풀파티라지만 참석 명단의 화려함은 보통 수준이 아니었다. 사전에 정보를 입수한 하이에나들이 벌써 주변에 잠복해 있었다. 리쿠는 이제 한낱 연예인의 신분이 아니었다. 매년 최고의 주가를 올리는 국민적 인기의 배우나 엄청난 브레이크로 세간의 관심을 독차지하는 헤비급 신인도 그 자리에 있었는데, 발행된 모든 주간지의 1면을 장식한 주인공은 리쿠가 됐다. 


음란하거나 불순한 의도의 모임은 아니었다. 다만 그걸 일반 대중에게 납득시키기는 어려웠다. 그 자리엔 공개열애를 했던 리쿠의 엑스 여럿이 동석했다. 나쁠 것도 없는 사이라 쿨하게 말 섞었을 뿐인데 바람 의혹으로 부풀려졌다. 하루 아침에 책임감 없는 호색한이 됐다.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리쿠와 했던 대화를 몰래 녹음해 매스컴에 넘긴 사람도 있었다. 대화 속 리쿠는 또 유우시를 존칭 없이 불렀으며 왕실 험담을 했다. 험담이랄까 본인이 느낀 고충의 가벼운 토로였지만. 그것 또한 언론과 대중의 엄격한 잣대를 피해가긴 어려운 일이었다. 


왕실이 발칵 뒤집혔다. 이번 일에 대해선 리쿠 입이 열 개라도 할 변명이 없었다. 조용히 다녀온다고 했는데. 무엇보다 유우시한테 미안했다. 리쿠의 사과를 받아준 유우시가 그날 있던 일과 만난 사람, 대화 내용을 가감 없이 말해달라고 했다. 중간부턴 술에 취해서 기억이 애매모호한 구석이 있었다. 유우시 눈에 차가운 분노가 서서히 차올랐다. 어떻게든 떠올리려 애썼다. 뜨문뜨문 조각난 기억을 털어놨다.


라방 켜서 해명하면 안돼? 물었더니 유우시가 헛웃음을 지었다. 


"켜서. 뭐라고 할 건데." 

"바람 핀 적 없다고." 

"별로 좋은 선택이 아니야." 

"그럼 어쩌라고. 나 이대로 있어? 너 두고 바람 핀 사람으로 있는 게 너한테 나은 거야?" 

"니가 거길 안 가는 게 나한테 나은 거였지." 

"... 니가 가라고 했잖아." 

"그래서 참고 있잖아." 

"....." 

"니가 하는 말 같지도 않은 말을 다 들어주고 있잖아." 


부탁하는데 내 동의 없이 라이브 같은 거 하지 마. 그런다고 사람들이 너 안 믿어줘. 당장 흥분해서 억울하다 호소하려 하지 말고 이후 행동으로 아니라는 걸 증명해. 제발 꾸준하게 성실해. 어떤 말이나 행동을 할 때 너 말고 나도 좀 생각해. 이렇게 부탁할게. 


치미는 화를 꾹꾹 눌러담은 유우시가 거의 애원했다. 내가 생각 못한 유우시 자존심. 위치. 상황. 정말로 미안해졌다. 리쿠가 다시 한번 진심으로 사과했다. 어른들 앞에서 내내 리쿠의 방패막이가 되어줬던 유우시를 생각했다. 나 딱히 혼나도 상관 없는데. 머리 아프다는 유우시 이마 위에 손을 얹고 호 불었다. 푸스스 웃는 소리가 들렸다. 이제 진짜 사고 안 칠게. 말 잘 들을게. 주눅 들어 얘기했다. 그래... 대답하는 목소리가 평소보다 더 작았다. 


유우시가 믿어주고 용서하는 것과는 별개로 왕실 입성 후 첫번째 사죄회견을 했다. 대본만 읽고 나오는 걸로 협박에 가까운 교육을 받고 왔으면서 예고 없이 사족을 주절거렸다. 


바깥의 시선이 어떻든 항상 저를 믿어주고 감싸줘서 감사합니다. 앞으로 실망시키지 않도록 노력하겠습니다. 내게 힘이 되어 준 것처럼 저도 당신이 쉴 수 있는 그늘이 되겠습니다. 사랑합니다. 


생방으로 냅다 들이받은 공개 고백의 반응은 뜨거웠다. 저것까지 대본이라는 의견과 다소 시끄럽긴 해도 왕세자 부부는 찐사랑을 하고 있다는 의견이 여러군데서 난립했다. 어쨌든 긍정적인 바람이 더 크게 불었다. 그늘남이라는 별칭이 지어져 왕실 로맨스를 응원하는 팬덤이 늘어났다. 계산 아래 했던 말이 아닌데. 철저한 진심이 애먼 이미지 장사로 몰리는 것 같아 기분이 묘해졌다. 유우시가 감동했다고 말해줘서 금방 괜찮아졌다. 





한동안은 잘 지냈다. 리쿠는 팍팍한 궁 생활에 정을 붙이려 나름 애썼다. 어느새 결혼한지도 1년이 다가오는 시점이었다. 


예전의 생활이 그립지 않다면 거짓말이고. 청소년 시절부터 무대에 서고 조명과 환호 속에 살아왔다. 주인공이 아니었던 날이 없다. 메인이고 센터였다. 무명도 나락도 없었다. 고락을 함께한 멤버들을 들러리 취급하는 생각한 적도 있었다. 시건방진 착각 속에 살았다. 


그 벌이라도 받는 건지. 이제 완벽하게 유우시의 그림자가 되어야 하는 신세가 된 처지라. 그야말로 그늘. 유우시가 빛나는 태양이라면 나는 그 어깨 뒤에 음영. 절대로 유우시를 앞설 수 없으며 이끌 수 없는. 이름을 부를 수도 없는. 


더 이상 마에다 리쿠 개인이 아닌 토쿠노 유우시의 부속품. 주연 아닌 조연. 다 버릴 수 있다고 자신했는데. 그런 각오로 유우시를 사랑했는데. 안된다고 못박는 유우시를 눈물로 붙잡아 결혼했는데. 그때 내가 왜 울었지. 뭘 위해서. 유우시를 사랑하지만 그 정도로 사랑했었나. 내 인생을 다 버릴 만큼. 쌓아온 모든 걸 유우시 하나와 바꿀 정도로 내가 유우시를 사랑했나. 사랑하고 있나. 


고뇌하는 시간이 점점 길어졌다. 명확한 끝맺음 없이 머릿속을 부유하는 생각의 양이 날로 늘었다. 깊이 없이 사방으로 가지만 치는 잡념에 가까웠다. 리쿠는 생각이 깊기보단 그저 많은 사람이었다. 상념의 근원을 찾아 스스로 결론 지어본 경험이 없었다. 생각이 많을 땐 주로 몸을 움직여 머리를 털어내곤 했었는데, 궁에선 격한 운동을 할 수도 춤을 출 수도 없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본인도 잘 모르는 채로 머릴 가득 채운 번뇌에 질질 끌려갔다. 


내가 없는 팀은 무리. 솔직히 망할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것마저도 오만한 자신이었지. 그 난리를 치고 탈퇴하면서도 그룹의 존속을 걱정했으니까. 내심 망하길 바랐는지도 모른다. 그렇게 존재감을 인정받고 싶었는지도. 비열한 인정욕구가 내 안에 있었는지도. 그런 리쿠를 세차게 비웃는 기세로 팀은 잘 나갔다. 데뷔 이래 줄곧 관심을 독차지하던 인기멤의 부재로 오히려 다른 멤버들의 매력이나 합이 돋보인다는 평까지 나왔다. 리쿠는 어딘가가 아파졌다. 배든 정신이든. 그러다 자신의 추악한 내면을 마주봤다. 토하고 싶어졌다. 


그걸 다 버리고 선택한 유우시니까. 이거라도 잘 해야지. 이런 날 사랑해주는 유우시를 최선으로 사랑해야지. 스스로 세뇌하듯 주입했다. 혼자 있을 땐 분명히 그랬다. 근데 유우시 앞에선 다른 말을 했다. 받아주니까. 거절하려면 끝까지 거절하지 왜 못 이긴 척 받아줘서. 왜 나랑 결혼해서. 날 새장 속에 가둬두고. 니 옆에 잘 그려진 병풍처럼 세워놓고. 나는 없고. 질투 자격지심 우울감 불안함. 여러 부정적 감정을 한 데 섞어 유우시에게 퍼부었다. 유우시는 다 들어줬다. 매번 미안하다고 했다. 


그러고 나면 되려 리쿠가 미안해졌다. 한참 화를 내다 또 울면서 사과했다. 사랑한다고 했다. 이만한 정신병자가 따로 없었다. 유우시는 다 이해한다고 했다. 리쿠가 이상한 게 아니라고 말해줬다. 그제야 리쿠는 안심했다. 왠지 엄마같고 아빠같은 유우시 품에 안겨 눈물을 그쳤다. 더 울어. 리쿠는 우는 게 예뻐. 이런 말로 웃겨주니까. 나 아직은 유우시를 많이 사랑하나보다. 또 생각이 바뀌었다. 


하고 싶은 게 있냐 물어왔다. 리쿠는 숨도 안 쉬고 대답했다. 둘만 있고 싶어. 둘이 나가서 살고 싶어.


"그거 말고." 

"원하는 건 그거밖에 없어." 

"그건 안돼." 

"... 왜 물어봤어?" 

"미안해." 

"그럼 여행 가고 싶어." 

"생각해볼게." 

"안된다는 말이잖아." 

"....." 

"나도 될 거라곤 생각 안 했어. 미안하다고 하지 마." 


그런 표정 짓지 말고. 유우시는 웃는 게 예뻐. 계속 웃어. 


리쿠가 자세를 바꿔 유우시를 품에 넣었다. 안은 채로 반쯤 누워 납작한 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같이 씻고 싶어. 그리고 내일은 늦잠을 자고 싶어. 유우시가 들어줄 수 있는 선의 요구를 했다. 앞에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거리는 게 보였다. 귀여운 머리통에 입술을 부비작댔다. 간지럽다고 웃는 유우시 옷을 벗기려다 말고 대뜸 물었다. 아까 누구야? 


"응?" 

"낮에. 동(東)정원에서 봤어." 

"....." 

"엄청 예쁜 여자던데."

"리쿠 그런 타입이 취향이야?" 

"아니." 

"그럼?" 

"나는 이렇게, 가슴 없고, 엉덩이도 없고, 근데 이상하게 말랑말랑한, 이런 타입이 취향." 


노골적으로 유우시를 지분거리며 야릇하게 말했다. 만지는대로 몸을 움츠리던 유우시가 뾰로통한 투로 속삭였다. 그렇게 다 없진 않아. 






안 될 것처럼 굴더니. 얼마 안 가 휴가를 받아낸 유우시가 자랑스럽게 공표했다. 침실에서 잠옷을 입고 침대 위에 벌떡 일어서 양손을 허리께에 딱딱 짚었다. 여행 가자. 리쿠는 과장되게 박수를 치고 좋아했다. 


겨우 얻은 2박 3일이라. 멀리 갈 수 없어 왕실 소유 별장으로 전용기를 타고 날아갔다. 그래도 행복했다. 오랜만에 연애하던 그때 느낌이 되살아났다. 그때처럼 대화를 많이 했다. 마음대로 먹고 마셨다. 입고 싶은 옷을 입고 세팅 없이 놀았다. 하고 싶은 만큼 했다. 낮에도 불이 붙으면 아래만 벗고 달려들었다. 이제야 신혼인 것 같았다.


돌아오는 비행기 안에서 손을 잡고 약속했다. 이 휴가를 잊지 말자고. 이 기분을 간직하자고. 언젠가 또 지치거나 서로 미워졌을 때, 그때 다시 이 곳에 오자고. 우린 둘이 있으면 다 괜찮아지니까. 여기에서 했던 것처럼 사랑할 수 있으니까. 부정적인 감정이 한계치로 쌓였을 땐 여행 가잔 말을 하기로. 손가락까지 걸고 약속했다. 


어떻게 알고 섬까지 따라 들어왔는지. 징그럽도록 음침한 파파라치들에 의해 둘만의 휴가 사진이 잔뜩 떠돌았다. 끔찍스러워도 어쩔 수 없었다. 발코니에서 키스하는 사진 정도가 좀 낯부끄럽긴 했지만. 온통 정략혼 뿐인 왕실 혼사판에 새로이 등장한 연애결혼이라 좋다는 반응이 더 많았다. 젊고 잘생긴 왕세자 부부를 덕질하는 사람들이 많아졌다. 


거기까지는 딱 좋았는데. 언제나 불행은 생각지도 않은 데서 닥쳐온다. 따지고 들자면 리쿠의 방심. 미리 막을 수 있었던 예고된 불행. 장골에 남겨둔 타투가 화근이었다.


해변가에서 상탈한 채 놀던 사진이 찍혔다. 당연히 타투가 만천하에 공개됐다. 하도 꽁꽁 감춰 사생이나 팬들도 모르는 자리였다. 다른 건 다 지웠는데 딱 하나 남겨놓은 터라 오해 사기 충분했다. 혹시 유우시를 의미하는 타투가 아니냐는 의견이 주를 이뤘다. 


리쿠는 고민했다. 지금이라도 유우시한테 사실을 털어놓고 지워야 하나. 일단 말이라도 해 놓는 편이... 선뜻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휴가 이후 알콩달콩한 분위기인 와중에 전여친 얘기 따위로 초치고 싶지 않았다. 나만 입 다물면 되겠지. 우선 뒤로 넘겼다. 


그날 밤 은근히 하고 싶었던 유우시가 타투를 만지작거리며 어필하길래 불편한 죄의식이 덩치를 키웠지만... 이 무드를 망치고 싶지 않아서. 비밀을 고백하는 순간엔 원망을 사겠지만 결국 솔직함은 신뢰를 주는 훌륭한 무기가 된다는 걸. 유우시는 순간을 모면할 배려보다 솔직하기 위해 낸 용기를 더 높이 사는 사람이라는 걸. 리쿠는 잘 몰랐다. 


눈을 뜨니 세상이 달라져 있었다. 마약 사건에 연루되어 업계 평판이 추락한 전여친이 렉카성 유튜브 라이브에 출연해 커플 타투를 노출하고 리쿠와의 연애사나 과거 사진을 전부 깠다. 잃을 게 없는 사람은 두려운 게 없다. 눈에 뵈는 게 없다. 그녀에겐 화제성이 필요했고 리쿠가 남겨놓은 타투는 알맞은 사냥감 그 이상이었다. 



타투를 남겨 놓은 걸 보니 아직 저를 못 잊었나 보네요. 갑자기 유우시님과 결혼 발표를 해서 놀라긴 했어요. 리쿠군 그런 취향이 아니라서... 제 예상으론 쇼윈도가 아닐까요? 대단한 보상금을 약속받았다든지...



멋대로 지껄이는 소설에 온 국민이 넘어갔다. 마냥 허언이라기엔 물적 증거가 넘쳐났다. 말을 떠나 타투가. 사진이. 그녀는 커플이어야만 찍을 수 있는 높은 수위의 사진들을 만천하에 공개했다. 눈이 다 풀려서 헐벗고 담배 피는 사진. 그녀의 다리 사이에 얼굴을 묻고 브이 하는 리쿠. 풍만한 가슴 위에 떡하니 얹힌 크고 까무잡잡한 손. 다 나열할 수 없이 많았다. 


멘탈이 나가버린 리쿠가 우선 유우시를 찾았다. 다른 건 필요 없고 유우시에게 해명해야 했다. 저 말 믿지 말라고. 그런 게 아니라고. 사실 말하려고 했었다고. 미안하다고. 


이른 아침부터 사라진 유우시를 찾아 헤매다 잡혀갔다. 상복 같은 수트가 입혀지고 대본을 넘겨 받았다. 함께 약을 한 게 아니냐는 의혹이 불거지고 있다고. 그것부터 수습하라는 명이 떨어졌다. 그것보다 유우시를 만나야 하는데. 그 와중에도 의혹은 눈덩이처럼 불고 있었다. 겨우 정신을 잡고 주어진 문장을 외웠다. 


내가 미안할 사람은 유우시밖에 없는데. 유우시한테도 사죄를 못했는데 왜 이 사람들한테 먼저 고개를 숙여야 하지. 잘 이해가 안 됐다. 가식적인 표정이 잘 안 지어졌다. 그러다 말했다. 


"유우시한테만 미안해요." 






돌아오니 유우시가 기다리고 있었다. 얼른 달려가 손부터 잡았다. 다 설명할게. 사실은, 


차갑게 내쳐진 손이 허공을 맴돌았다. 전에 없이 냉랭한 얼굴이 리쿠를 긴장하게 만들었다. 


"....." 

"정말 미안해." 

"....." 

"일부러 속이려고 한 건 아니었어." 

"....." 

"말하려고 했어." 

"....." 

"미안해..." 

"....."

"유우시이..."

"....." 

"나 믿어?..." 


열심히 눈치를 살피는 리쿠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던 유우시가 깊은 한숨을 토하듯 입을 열었다. 믿어.


"믿고 싶어." 

"믿어 줘..." 

"내가 널 믿는다고 해도 사람들이 널 안 믿을 거야." 

"그건 중요하지 않아." 

"중요해." 

"난 신경 안 써." 

"그래 넌 안 써. 그래서 이 사달을 만들어놨지.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하고, 뭐가 중요한지도 모르고. 알고 싶지도 않지? 넌 너밖에 모르잖아." 

"... 미안해." 


톤에 높낮이가 없어서 평상시와 다를 바 없는 투였지만 리쿠는 확실히 알 수 있었다. 지금 유우시는 엄청나게 화가 났다. 그걸 풀어주는 방법에 관해선 아는 바가 없고. 앵무새처럼 같은 말을 반복했다. 미안, 미안해. 


관자놀이를 지압하다 신경질적으로 앞머리를 쓸어올리는 손길이 거칠었다. 입술을 꾹꾹 씹는 움직임도. 완전히 애정이 걷어진 예리한 눈빛도. 리쿠는 다 낯설었다. 


무거운 침묵을 견디기 힘들어 아무 말이나 했다. 내가 어떡하면 돼? 


"가만히 있어. 아무것도 하지 마." 

"라방이라도," 

"머리가 있으면 생각이라는 걸 좀 해." 

"....." 

"화내고 싶지 않아. 그만 얘기하자." 

"차라리 화를 내. 나한테 다 풀어." 

"방에서 나오지 마. 핸드폰 보지 말고." 

"말을 하라고." 

"내가 해결할 때까지 조용히만 있어줘." 

"... 난 너를 도저히 이해할 수 없어." 

"누가 이해해달래?!" 


넌 어차피 나를 이해할 생각이 없잖아! 니 머릿속엔 너밖에 없잖아! 끝까지 나를 속였잖아! 내가 너 때문에 뭘 포기했는지도 모르잖아! 


내가 너한테 많은 걸 바랬어? 난 어떻게든 널 지켜주려고 노력했어. 니가 관심 없고 신경 안 쓰는 그 모든 곳에서 너를 지켜주려고 발버둥쳤어. 


"나도 지쳤어."

"....."

"얼마나 부어야 리쿠가 채워지는지 모르겠어." 

"....." 

"나야말로 널 이해하기 힘들어."


유우시가 방을 나갔다. 리쿠는 한참을 멍하니 서있었다. 
















회견 직후 공항에 모습을 드러낸 리쿠様 왕세자 부부 별거 돌입? 연예계 복귀에 귀추가 주목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