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시대 후기 서울의 우물은 식수로 사용하기에 부적합하여 물장사가 식수를 공급했다. 수도가 만들어진 1907년 이후에도 물장사는 계속 존재했다. 1907년 뚝섬 쪽에 수원지가 만들어지고 상수도가 생겼다. 수도가 생겼지만 집집마다 수도관을 설치하는 경우가 굉장히 드물었고 일정 구역에 공용수도가 설치되었다. 물장사는 공용수도의 물을 나르는 역할을 하였다. 일제강점기 서울의 수돗물은 공급이 부족하여 종종 단수되었다. 조선총독부는 물장사에게 공용수도의 관리를 맡겨서 공짜로 공용수도 쓰는 것을 차단하였다.
1897년 9월 2일자의 독립신문에 의하면 당시 서울의 우물물은 물이 아니라 거름을 거른 것이라고 할 정도로 오염이 심했다. 1906년의 기록에 의하면 서울의 유일한 급수원은 도시에서 1000피트(약 300미터) 정도 떨어진 공동우물이었다. 이 공동우물은 개천에 매우 근접하여 오물이 쉽게 스며들었다. 1910년의 수질조사에 의하면 서울시내 우물 수는 총 11,410개였으며, 그중 음료에 부적당하다고 판정된 것이 9,911개였다. 거의 대부분의 우물이 식수로는 부적합하였던 셈이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물장수가 식수를 공급하고 있었다.
언제 서울에 물장수가 등장하였는지는 분명하지 않다. 1913년의 간략한 조사에 의하면 “지금으로부터 대략 백년전 함경도의 한 고학생(苦學生)이 경성에 올라와 우물물을 수용자에게 배급하고 노임을 받아 학자에 충당하였던 것이 시초가 되어 이후 함경남북도의 항산(恒産)이 없는 세민(細民)이 속속 입경하여 노임을 받고 우물물을 배급하는 것을 일종의 업으로 삼기에 이르렀다. 현재 이업에 종사하는 자는 모두 함경남북 양도인으로서 그 중에 함경남도 북청군(北靑郡)민이 가장 많다.”라고 하였다.
수도급수가 개시되기 직전 서울에서는 2000명의 물장수가 영업 중이었다. 서울인구를 20만명으로 간주하면 인구 백명당 한명꼴로 물장수가 있었던 셈이다. 전술하였듯이 서울시내에는 11,410개의 우물이 있었는데 1908년에 집계된 서울인구 21만 9879명, 호수 5만 2559호에 대해 계산하면 인구 19.27명당 1개, 4.60호당 1개의 비율로 우물이 존재했던 셈이다. 이러한 비율의 경우 우물이 고르게 분포하고 수질에 문제가 없었다면 물장수의 영업은 불가능했겠지만 물장수 2000명이 활동하고 있었던 것은 당시 우물의 분포가 매우 불균등하였고 수질이 악화되어 식수로 음용할 수 없는 샘물이 많았다는 것을 말해준다.(김재호, 「물장수와 서울의 수도(水道)」,『경제사학』23, 경제사학회, 1997.)
계곡물이나 한강물을 길러 팔던 물장수가 위기에 빠진 것은 1907년이다. 이때 뚝섬 쪽에 수원지가 만들어지고 상수도가 생겼던 것이다. 즉 수도가 생겼다. 그러나 수도관을 집집마다 설치하지는 못했다. 그리하여 물장수도 계속 존재했는데 이 시기 물장수는 수돗물을 집으로 나르는 역할을 하였다. 1907년 물장수의 변화를 『동아일보』에서는 다음과 같이 전한다.
... 이 문제에 관하여 조합발기인 중 김연환씨는 물장사의 내력에 관하여 말하되, 명치 40년(1907) 6월 처음 수도가 생겼을 때부터 석달 동안은 무료로 시내에 공급하였고 그 후 9월부터 수도 열쇠 한 개에 4원의 요금을 수도국에 바치고 180개를 얻어내어 ... 그후 45년(1912)에 어떤 자본가가 수상회사를 조직하고 물장사에게 월급을 주게 되었습니다. 대정 3년(1914)에 이르러 당국에서 이 회사를 해산시키고 물장사들은 우물물만 길게 하고 수돗물은 절대 길지 못하게 하였습니다. 아시다시피 서울풍속은 제 집에서 물을 길어 먹는 집은 아주 드뭅니다. 모두 물장사의 물을 사먹게 되니 물장사들은 몰래 관설수도물을 길었습니다. ...
(『동아일보』1924.02.24. 「계랑제 실시와 사백 수상 분기」)
이렇게 물장사들이 1914년부터 불법적으로 관설수도물을 길러 판매했는데 서울의 수돗물은 늘 부족하여 여름철에는 종종 단수가 되었다. 1917년 이후 공업화로 인해 총배수량이 급증하였기 때문이다. 수도의 사용량이 많아지자 수도비용이 올라갈 수 밖에 없었다. 조선총독부는 비용해결을 위해 1924년 4월 1일부터 서울에 있는 모든 수도에 계량제를 실시하였다.
그런데 공용수도에 계량기를 설치할 경우 돈을 낼 사람이 불투명했다. 공용수도는 물장수가 물을 파는 수돗물이었고 경성의 빈민들이 주로 쓰는 물이었다. 이에 조선총독부는 민간측에서 조합같은 것을 조직하게 만들어 조합에 수도를 넘기고 조합대표에게 수도세를 받을 계획이었다. 이 소문이 퍼지자 모모 재산가 측에서는 급수권을 얻고자 운동했다. 또한 이렇게 되면 지금까지 수돗물을 팔던 물장수들은 타격을 받으므로 서울에 있던 400명의 물장사들도 현금 이십만원으로 공수조합을 조직하여 삼가정 42번지에 사무소를 두고 경성부윤을 방문하여 경성부 수도의 급수권을 이 공수조합에 허가해 달라고 진정서를 제출하였다.
이 과정을 거쳐 조선총독부는 공용수도에 계량기를 설치한 후 물장수에게 물을 쓰도록 허가했다. 물장수가 수도값을 내게 되면서 그 전에 무료로 공용수도를 썼던 도시 하층민들은 사용하지 못하게 되었다. 도시하층민들은 수돗물 대신 우물이나 강물, 샘물을 쓰게 되었다.(주동빈, 「1920년대 경성부 상수도 생활용수 계량제 시행과정과 식민지‘공공성’」,『한국사연구』173, 2016.)
이후 서울에서 수돗물을 쓰는 양상은 동네 어귀의 공용수도에 주인이 있어서 한 지게 두 통에 1전을 받고 물을 파는 것이었다. 집집마다 물지게가 있어서 져 가는가 하면, 공동수도 임자가 수돗물을 져다가 주기도 했다. 물장수가 부엌 바닥에 묻어 놓은 큰 독에 물을 붓고 간다. 수돗물을 집집마다 날라주는 물장수는 한달에 얼마씩 물값과 져다주는 삯을 받고 한달에 두, 세 번 그 집에서 밥을 먹었다. 물장사는 물 져다 주는 집 서른 집을 정해 놓아서 세끼 밥 걱정이 없었다. 물지게 지고 물장수가 지나다니는 소리로 서울의 아침이 시작되었다.(어효선, 『내가 자란 서울』, 대원사, 2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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