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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겐 나름의 개똥철학이 있다.

첫 번째, 남은 내 인생을 대신 살아주지 않는다.


그니까 남의 조언 따위는 그냥 흘려들어도 좋다. 이게 좋은 것 같다, 저게 좋은 것 같다 왈가왈부하는 이야기에는 별 관심이 없다. 잘 알지도 못하면서 어쭙잖게 조언하는 꼴을 보고 있으면 꽤 웃기기도 하다. 그냥 진짜요?, 그렇구나, 그럴게요- 와 같은 말로 대충 맞장구를 쳐주고 있으면 자신의 조언이 꽤 먹혔구나 하는 표정이 된다. 그 바뀐 표정을 바라보는 것도 나름 재밌다.


다 네 생각해서 하는 얘기인 거 알지?


그럼 당연하죠. 저도 선배 진짜 좋아하는 거 알죠? 기계적으로 뱉는 몇 마디에도 흐뭇한 표정을 짓고 돌아선다. 난 그 어깨에 침을 뱉는 상상을 한다. 선을 넘는 말 한마디마다 토를 달아주고 싶었으나 일일이 대꾸해줄 여력도 없었으므로 텅 빈 눈으로 술자리를 견뎌냈다. 어차피 새겨듣지도 않을 거면 애초에 그런 자리를 안 가면 그만 아닌가. 그래. 사실 그러면 그만이다. 그러나 개똥철학은 개똥철학일 뿐, 내 이득은 챙기고 본다. 그냥 흘려들으면 그만이므로 그런 꼰대 짓 또한 기꺼이 견뎌내는 편이다. 다 쌩까고 지내는 방법도 있겠으나, 나에게는 필요한 이해관계라는 것이 있고 그것을 위한다면 개 같은 성격을 잠깐 죽이는 '연기'를 할 수도 있다. 피곤하게 모든 관계를 유지하고자 하진 않지만, 내게 이득만 된다면 기꺼이 감수한다.


두 번째, 관계는 가벼울수록 좋다.

무거운 관계는 책임이 잇따른다. 내 몸뚱이 하나 책임지기도 어려운데 누군가에게 기대고, 의지하고, 서로에게 새로운 의미로 정의되는 관계는 너무 피곤하다. 그렇다고 해서 연애를 피하지는 않는다. 그냥 부담되지 않는 관계의 연애를 지향할 뿐. 아무리 애인이라고도 한들 모든 것을 이해하고, 이해받을 수 있는 관계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물론 첫 시작은 남들과 비슷하다. 하지만, 상대방의 간섭이 시작되는 순간 이야기는 달라진다. 몇 시에 일어났는지, 밥은 뭐 먹었는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의무적으로 보고하는 관계는 사람을 소모하게 한다. 결정적으로 나는 상대방의 시시콜콜한 이야기가 궁금하지 않다. 그러면 상대방을 '진심으로' 사랑하는 게 아닌 게 되는 건가. 대체 그 '진심'의 정도는 누가 정의하는 것인가. 로미오와 줄리엣처럼 눈 맞은 지 며칠 만에 서로의 목숨이라도 내어 줄 듯이 지랄발광을 떨어야만 사랑인 건가. 그게 정녕 사랑이던가. 객기가 아니고?


이런 나의 가치관은 연애하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싸울 주제 1'이 되기에 십상이었다. 혼자 맥주를 마시며 늘어지게 영화나 보고 있는 시간에 테이블 위에 윙윙대는 핸드폰을 목격하면 그냥 전원을 꺼버린다. 그러다 삼십 분쯤이 지나면 자취방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리는 날도 있었고, 그날의 기분에 따라 문을 열지 안 열지를 결정했다. 꼴리면 문 열어서 같이 영화나 보다가 자는 거고, 귀찮으면 그 길로 잠수 이별로 이어지는 루트를 택했다.


넌 진짜 이기적이야.


헤어지는 상대방들은 대부분 이딴 대사를 읊었다. 억울했다. 사람이 모두 이기적인 존재가 아니던가. 이타심 또한 자기만족의 일종이 아닌가. 주절대는 상대방의 눈을 봤다가, 코를 봤다가, 들썩이는 어깨를 보면서 나는 그런 생각에 자주 빠졌다. 착하게 살고 싶은 생각은 없긴 했으나 늘 이별의 끝에서는 항상 내가 나쁜 년이 되는 것 같았다.


여주 넌 나를 안 좋아하는 것 같아.


나를 이기적이라고 비난한 상대방 역시 이기적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네가 내 맘이 어느 정도인지 어떻게 알아? 삐딱한 대답이 나갈 수밖에 없었다. 자기가 하는 사랑이 '진짜' 사랑인 양 훈계를 두는 꼴을 보고 있으면 머리가 아파졌다. 불과 몇 달 전, 몇 주 전만 해도 서로가 없어도 밥만 잘 먹고 다녔다. 얼마나 대단한 사랑을 했다고, 헤어지면 평생 혼자 살 것도 아니면서. 세기의 사랑인 듯 말하는 그 가증스러운 말의 무게를 가늠할 수 없었다. 그렇게 서로를 몰라도 잘 살아가던 인생을 갑자기 연인이 되었다는 이유로 내게 모든 부담을 지려는 상대를 이해하지 못했다. 만약 내 말이 틀렸다고 하더라도 나는 내가 이기적인 사람임에 별로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다.


이기적이고, 자기중심적이고, 심지어 계산적이기까지 하나 그래도 내 분수는 안다. 그니까, 지질맞은 성격은 쉽게 숨기고 가증스러운 연기를 할 수도 있다는 얘기다. 연인 관계가 되는 이에겐 내 이런 개똥철학을 하나하나 이해시킬 이유도, 필요도 없었으므로 내 영역으로의 지나친 간섭만 없다면 그 정도 비위를 맞춰주는 것 정도는 어렵지는 않다고 생각해왔다. 그래서 난 대부분 애인에게 맞춰주는 편이라고- 스스로 생각해왔지만.


그렇게 나쁜 애는 아닌데. 고백하는 건 반대야.


라는 말로 평가받는 것을 우연히 듣게 되는 날도 있었다. 김여주의 평판은 '친구 하기엔 재밌지만, 만나면 니가 고생한다'가 되었고, 그런 반응에 일일이 대응하고 싶진 않았다.


근데 누가 친구는 해준다고 했나?




이미 다 유행이 지나가 버린 건배사를 시작으로 과 회식이 시작되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이 자리에 내가 있으면 안 됐는데. 계속 시험만 보느라 진이 다 빠졌기에 귀가하여 일주일 동안 밀린 잠이나 잤어야 했지만, 어쩌다가 이 시간이 될 때까지 여기에 남아있는지. 핸드폰을 자꾸 들여다봐도 시간은 느리게 흘러갔다. 밀려오는 하품을 참지도 않는다. 술이 들어가니 잠이 몰려왔다. 집에 가서 밀린 빨래도 돌려야 하는데. 시끄러운 술자리에서 시끄럽게 돌아가는 세탁기를 생각한다. 밤에 돌리면 안 되는데.


"여주야 한잔해."


새벽에 돌리는 세탁기가 층간 소음에 끼치는 영향을 생각하고 있는 찰나 내 옆자리에는 어느새 정훈 선배가 앉아있었다. 저 새끼 언제 여기 왔냐. 어우 네. 술잔을 받기는 했으나 마시지는 않는다. 선배 저 이제 그만 마시려고요. 에이, 서운하게. 이번에 팀플할 때 여주 후배가 너무 힘들어하는 것 같아서 한 잔 주는 거니까 마셔.


헐 선배가 이거 다 계산하는 거예요? 괜히 큰 소리로 말을 꺼내 시선을 집중시킨다. 옆자리에 앉은 선배들이 김정훈을 쳐다본다. 정훈아 니가 쏘는 거냐? 진짜? 너 돈 없다며 다 구라였지 이 새끼. 삽시간에 이미 붉어 있던 얼굴이 더 벌게진다. 무슨 소리야. 아니 선배가 한 잔 주신다길래 오늘 선배가 쏘는 줄 알았잖아요. 농담이었다며 상황을 마무리하지만, 한번 열받은 얼굴은 돌아오지 않는다.


킬킬대며 장난이었다고 말하는 얼굴에 정색하기는 힘들다. 웃는 낯짝이 이럴 때 참 도움이 됐다. 저 새끼 때문에 힘들었던 걸 생각하면 더 엿먹이고 싶었지만, 오늘은 그런 기력이 없었으므로 빨리 자리를 뜨는 김정훈을 바라보는 것으로 상황이 마무리됐다. 또다시 술자리가 지루해졌다. 밀린 알림이나 확인 하기로 했다.


김선우

> 누나 어디야?



선우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과 회식 중이라는 말을 남기니 김선우에게서 곧장 답장이 왔다. 데리러 갈까? 너 어딘데. 집. 10분이면 가. 맨날 과 회식하던 데지?


< 걍 알아서 갈게! 쉬어~

>금방 가니까 기다려


산뜻하게 거절의 의사를 밝혔지만, 어림도 없었다. 김선우에게서 온 마지막 답장을 읽고 핸드폰을 내려놓았다. 선우는 과후배지만, 과회식에는 참석하지 않았다.






그 이유는 다름 아닌 나 때문이다.

김선우는 나의 전 남자 친구기 때문에 이 자리에 나올 수 없었다. 아니 정확히 얘기하면, 나를 위해 나오지 않았다. 선우와 헤어진 지는 꽤 됐지만, 우리는 한때 소문난 CC였기 때문에, 그리고 김선우의 친구들-나의 후배이긴 하지만-과 나의 관계는 매우 좋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같은 자리에 공존할 수 없었다. 물론 김선우는 뒤에서 이렇게 나에게 연락이나 하고 있지만.





한 이백일 넘게 사귀었나? 

누나, 저 누나 좋아하는 것 같아요. 김선우는 어렸고, 무식했고, 용감했다. 특히나 술을 마시면 목소리까지 커졌다. 그래서 과 엠티 날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내게 고백했고, 나는 그게 꿈이길 바랐었다. 간절히.


김선우의 고백 방식은 최악이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그가 싫은 것은 아니었다. 그냥 어려서 그래, 내가 이해해야지, 당장이라도 뛰쳐나가고 싶은 화끈한 감정을 가라앉히고 이성적으로 생각하기 위해 노력했다. 김선우의 고백을 거절하고자 하는 마음은 분명했으나, 모두가 있는 자리에서 그런 식으로 면박을 주고 싶진 않았고 밖으로 나와 선우를 타일렀다. 선우야, 정신 차려봐. 일단 내일 술 깨면 얘기하자... 방금 얘기는 못 들은 걸로 할게. 누나 제가 술 마시고 술주정 부린 건 맞지만, 이건 진심이에요. 진짜 제 마음이라고요. 아니 선우야 그런 얘기를 하는 게 아니잖아. 진심이 아니라는 게 아니라 다시 말하지만 내가 기억하는 김선우는 어렸고, 무식할 만큼 용감했고, 그게 무기였다. 어차피 나랑 사귀어봤자 별로 오래 가지도 못할 텐데. 어린놈의 패기이겠거니 생각하고 그냥 받아주었다. 굳이 우리 사귀어요-라고 얘기하고 다니지 않아도 김선우의 표정과 행동에서 모든 것이 티 났다. 그렇게 티 내는 김선우가 쪽팔렸으면 진작에 끝냈을 테지만, 그런 모습을 지켜보는 게 꽤 귀여워서 그러진 않았다. 


선우와의 이별도 비슷한 이유 때문이었다. 선우는 더 깊어진 관계를 원했다. 나를 향한 걱정이라는 건 잘 알고 있으나, 어찌 됐건 그런 간섭을 받는 건 달갑지 않았다. 알겠어 선우야. 누나가 알아서 할게. 처음에는 그렇게 타일렀으나, 타이른다고 해결된 문제는 아니었다. 슬슬 관계의 끝이 다가오고 있음이 느껴졌다. 선우야 우리 헤어지자. 누나 내가 잘못했어. 고칠게. 미안해. 아니야 네가 잘못한 건 없어. 그니까 더 좋은 사람 만나. 너만큼 너를 좋아해 줄 수 있는 사람 많을 거야.

그게 무슨 소용이야. 내가 누나를 좋아하는데. 나를 좋아하는 사람을 왜 만나 내가. 늘 어리게만 봤던 선우지만, 그 말을 할 때의 표정은 진지했다. 애초에 그런 간섭이 보이기 시작할 때쯤 모든 관계를 정리했던 내가 백일을 넘도록 끌어온 이유도 이에 있었다. 선우가 너무 진지해서... 그 마음을 해칠 용기가 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나는 나쁜 년이 맞긴 했다. 마음을 다 주지도 않을 거면서, 미안하다는 핑계로 받아주고 있던 꼴이. 선우와 삐그덕대기 시작하면서 선우의 친구들이 나를 바라보는 눈빛이 달라지기 시작했다. 누나, 누나 하며 잘 따르던 얘들이 나만 보면 누나 때문에 김선우가 술만 마시고 다닌다고 얘기하질 않나, 선우 마음 아프게 하지 말라고 하질 않나. 김선우가 그런 얘기를 하라고 시키진 않았겠지만, 또 내가 잘못한 것도 있긴 했지만... 그렇지만... 백번 이해해도 욱하는 건 여전했다. 내가 왜 니 친구들한테 그런 소리 듣고 있어야 해? 애꿎은 김선우에게 또 화풀이만 해댔다.


"누나 진짜 미안해. 걔들이 그러고 다니는 줄 몰랐어. 내가 미안해. 응?"

"선우야 나 나쁜 년 그만 만들고 놔주라. 진짜 너 좋아하는 사람 만나. 누나가 그동안 미안했어. "

"왜 자꾸 다른 사람 만나라고 해? 내가 좋아하는 건 누난데. 누나가 나 안 좋아해도 괜찮아. 헤어지자고 하지만 말아주라. "


분하다는 듯이 울음을 참아내며 말하는 선우의 눈을 보자 욱한 감정마저 미안해졌다. 더욱더 마음을 굳게 먹을 수밖에 없었다. 선우야, 그거 사랑 아니야. 누나가 그냥 미안해. 미안. 정말 그 말밖에 할 수 없었다. 그렇게 모질게 선우를 내쳤고, 선우는 휴학하고 군대에 갔다는 얘기가 들려왔다.




이게 벌써 이 년 전 이야기고. 지금 왜 다시 선우와 이러고 있냐고 묻는다면...

할 말은 없다.


원래대로라면 선우가 제대할 때쯤엔 난 이미 졸업하고도 남았어야 했지만, 어쩌다 보니 그러지 못했다. 여전히 만나야 하는 불편한 상황이 연출됐다. 휴학했는데도, 아직도 니가 학교에 있다니... 김선우는 진짜 살기 싫겠다. 친구가 농담처럼 건네는 말에도 웃음이 나지 않았다.


지금 와서야 또라이 같은 성격을 죽이고, 어느 정도 착한 척 연기를 하며 사회화된 척 할 수 있다지만, 선우와 만날 때는 진짜 철이 없었다. 김선우 보고 어리고, 무식하고, 용감했다고 했지만 사실 내가 더 무식했다. 하지만 그 시기에 만난 연인에 대해 별다른 부채감을 느끼진 않지만 유독 김선우에게는... 욕먹어도 할 말이 없었다.


김선우는 아직도 내가 학교에 남아있다는 사실에 놀라는 것 같긴 했으나, 굳이 나를 알은체 하지 않았다. 백번이고 김선우가 불편하다면, 내가 피해주는 게 맞았으므로 나 역시 그의 존재를 잊은 듯이 살았다. 과생활을 하지 않으니 마주칠 일 자체가 많지도 않았다. 수업만 듣고 잽싸게 나오고, 되도록 그와 마주치는 일을 피했다.


"누난 진짜 못 됐어. 그냥 잘 지냈냐고 물어봐 주는 게 그렇게 어려워?"


조금은 시간이 지나 성숙한 얼굴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선우는 우는 얼굴이 똑같았다. 몇 달을 쌩까고 지내더니 갑자기 찾아와서 하는 말이 서운하다는 말이었다. 어... 야... 선우야, 내가 너한테 미안해서 그래. 가볍고 딱 떨어지는 관계 속에서만 살다 보니 옛 연인의 문자 공격 같은 것들은 사실상 무의미했다. 이미 차단한 지 오래되었으므로. 근데 선우에게만큼은 나의 개똥철학보다 미안한 감정이 더 컸다. 선우의 처음이 다 나여서. 첫 키스도, 첫 경험도, 첫사랑도. 유독 아픈 사랑을 겪게 하는 게 미안했던 건데. 이년이 지나도 선우는 똑같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다시 누나랑 만나자고 하는 거 아니야. 누나 구질구질한 거 싫어하잖아. 그냥 내 마음 정리될 때까지 연락받아달라는 거야. 그 정도는 해줄 수 있잖아. 나 가지고 재미 봤으면 그 정도는 해줘."


'재미' 봤다는 김선우의 공격을 맞받아치고 싶어도 할 말이 없기는 했다. 너도 다 알고 있었구나... 그래서 이렇게 이년이나 지났음에도 여전히 애매한 관계가 되었다. 선우는 나를 배려해서인지, 아니면 본인도 곧 정리될 관계라는 걸 알아서인지 주변 친구들에게 나와의 어정쩡한 관계를 알리지 않은 모양이었다. 그래서 선우 친구들의 눈초리는 여전했고, 김선우가 나를 욕하면 할 말 없겠지만, 그 새끼들이 내 욕을 할 명분은 없었으므로 술 먹고 한번 깽판 쳤다. 그 이후로 선우의 친구들도 과회식 자리에 나오지 않게 되었다. 공부하라고 대학 보내놨더니 졸업은 안 하고, 연애만 하다가 쌈닭 짓만 하고... 내 인생이 어디서부터 꼬였는지는 모르겠지만. 단단히 잘못되기는 했다.


선우는 보통 밤에 연락했고, 밤에는 보통 술을 마시는 나를 데려다주는 일을 맡아 했다. 선우야, 나 부담돼. 그럴 필요 없어. 네가 남자친구도 아니고. 누나 지금 남자친구 있어? 아니. 그럼 누나 애인 생길 때까지만 밤에 데려다줄게. 누나 자취방 근처에 취객 많잖아.


그래서 이렇게 김선우와 나란히 편의점 의자에 앉아있게 된 거다. 분명한 건, 지금 난 선우에게 마음이 없다. 내가 이러고 있는 게 선우에게 또 다른 여지를 주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과 또 그에게 쓰레기 짓을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마음이 들긴 한다. 근데 김선우가 사 온 숙취해소제 한 병을 비우고, 바나나 우유 빨면서 먹을 마음은 아닌 것 같기도... 하지만.



"어 재현이 형?"

"김선우?"


하필 여기서 마주친 사람이 이재현인 건, 나의 업보일까. 쓰레기 짓 하고 다닌 업보. 너 제대했다면서. 형한테 연락은 안 하고. 아 너무 바빴어요. 나의 동기이자 나의 7년 친구인 이재현과 김선우는 다행히도 둘도 없는 형 동생 사이까지는 아니었다. 그래도 같은 학과니까 친할 수밖에 없었다. 김선우와 이상한 악수 같은 걸 주고받은 이재현은 나를 한번 쳐다보더니 다시 시선을 김선우에게로 돌렸다. 형 근데 어디가? 나 약속 있어서. 누구. 또 세희 누나?



그놈의 세희, 그놈의 이세희. 김선우 입에서 나오는 저 단어를 세상에서 없애버리고 싶었다. 아 무슨 소리야-하며 김선우의 어깨를 밀치지만 웃는 이재현의 입꼬리가 말해주는 거 같다. 3초 만에 스캔한 이재현의 복장을 보아하니 저건 무조건 이세희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재현이 형도 여자 취향 한번 확고하네."


이재현 그리고 이세희. 이세희 그리고 이재현. 둘 다 진짜 지긋지긋했다. 이재현의 지독한 첫사랑. 그리고 수많은 깨 붙을 반복하며 다시 붙은 둘. 그 둘에 대한 수식어는 다양했고, 해석하기 나름이었다. 누군가는 이재현을 '세기의 사랑꾼' 따위로 표현했고, 나는 그런 이재현은 '개새끼' 정도로 표현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래서 김선우의 저 말 한마디가 심하게 거슬렀다.




그놈의 여자 취향이 뭐길래. 이재현은 고백받는 족족 내 취향이 아니라서-를 달고 살았다. 뭐 얼마나 대단한 취향을 가진 양반이길래. 저 새끼는 어렸을 때도 그랬다. 이재현과 나의 첫 만남은 강남의 한 보습학원에서였다. 그때 나의 둘도 없는 단짝 친구는 이재현을 지독하게 짝사랑했고, 결국 고백까지 했다. 내 친구지만, 친구는 예쁘고 다정하고 친절했다. 근처 남고에서도 소문이 돌 정도로 고백도 더러 받곤 했다. 그래서 난 친구의 고백 성공률을 감히 100퍼센트로 예측했다. 어떤 미친 새끼가 너를 차? 당연히 고백해야지. 난 벌써 둘의 미래의 아이 이름까지 지어주었다.


"미안... 근데 넌 내 스타일이 아니라."


외벽 뒤에 숨어서 친구의 고백 장면을 기다리던 나는 딱 벌어지는 입을 애써 손으로 막아야 했다. 저 새끼 지금 뭐라는 거야? 그날 친구는 대치동 길바닥에 주저앉아 한참을 울었다. 친구가 받은 충격을 나도 어느 정도는 이해할 수 있었다. 그동안 남자 중에 골라서 사귀었던 애일 텐데 차인 경험이 처음이니 얼마나 충격이 컸을까. 심지어 친구가 3일 동안 정성을 들여 쓴 편지는 읽어보지도 않고 그대로 돌려주었다.


이 새끼 진짜 가만 안 둬. 이재현과 같은 반이 아니었던 터라 이재현의 반을 알아내기 위해 보습학원에서 마주치는 모든 이에게 이재현의 행방을 물었다. 너 이재현 알아? 키만 멀대같이 커서 되게 싸가지없게 말하고, 여기 근처 남고 다니는 고2인데. 결국 이재현의 귀에까지 들어간 모양이었다. 제 발로 나를 찾아왔다. 니가 나 찾으러 다닌다는 애라는 데 맞아? 나한테 불만 있어?



사실 이재현이 어떻게 생겼는지 잘 알지 못했고, 친구가 한창 짝사랑할 때도 또 고백할 때도 어두운 밤길에서 본 이재현이 전부였기에 그때 처음으로 얼굴을 제대로 보게 되었다. 그의 첫인상은 싸가지없지만 눈이 예뻤다. 황당하지만 그랬다. 그래서 나는 와다다 퍼부으려고 준비했던 말을 자칫하면 까먹을 뻔했다.


"야... 니"

"나 뭐"

"니 때문에 내 친구 학원 그만뒀잖아."

"근데?"

"뭐 근데? 너 때문에 나 이제 숙제 같이할 친구도 없다고."

"그게 내 사정이냐고."

"너 싸가지없다는 말 자주 듣지?"



눈이 예뻤다는 말을 급하게 취소하고 공격 모드로 전환했다. 저 새끼가 근데 왜 말을... 욱하는 성격은 그때도 여전했다. 야야, 여주야, 곧 수업 시작이야. 둘 사이의 싸움이 심상치 않아 보였는지 주변에 있던 애들이 말리기 시작했다. 저 새끼가 아주 키만 크면 다야?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속으로 수학 문제를 풀 수가 없었다. 어떻게든 복수해주고 싶었다.



어쩌다가 이재현이 1층 편의점에서 항상 사 먹는 라면 종류를 알아냈다. 그래서 이재현이 학원에 오기 전에 항상 남아있는 컵라면을 싹쓸이해 왔다. 학생... 이거 다 먹게? 네, 계산해주세요. 매일같이 10개가 넘는 컵라면을 쓸어가는 나를 황당한 눈으로 쳐다봐도 어쩔 수 없었다. 분노로 가득한 여고생은 무서울 게 없었다. 학원 캐비닛에는 책 대신 컵라면 산이 쌓이기 시작했고, 가끔 친구들에게 나눠주기도 했다. 한두 번도 아니고 두 달을 넘게 그 짓을 하자 이재현도 알아버렸다. 야, 김여주.




"니지. 오징어 짬뽕 쓸어가는 얘."

"알빠? 뭔 상관?"


두 달 동안 묵혀왔던 이재현 화법을 그대로 보여줬다. 이 새끼한테 이 말을 뱉고 싶어서 얼마나 기다렸던지. 그 말을 하고 나니까 속이 후련했다. 실실 나오는 웃음을 멈출 수가 없었다. 이재현이 나를 미친 사람을 쳐다보듯 봐도 뿌듯함이 사라지지 않았다.


"얘 진짜 골때리는 애네."


이재현은 나를 쳐다보며 그렇게 말했고, 내가 째려보자 웃음을 터트렸다. 골 때리는 새끼는 얜 거 같은데.



그리하여, 이재현의 첫인상은 싸가지 없는데 여자 취향 하나는 확고한 놈이었다. 근데 지금도 그게 여전하다는 게, 내가 아닌 타인이 봐도 여자 취향 하나는 존나 확고한 놈이라는 게 열이 뻗치기 시작했다.



"근데 선우야, 왜 이재현'도'야? 또 여자 취향 확고하다고 말하고 다니는 놈도 있냐."

"아니 그건 아닌데. 나 있잖아."

"..."

"그렇게 당해놓고, 아직도 누나 좋다고 따라다니는 애."



내가 아무 말 없자 김선우는 급하게 뒷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아 당한 게 아니지, 누난 가만히 있고 그냥 내가 코 꿰인 거지. 그냥 말이 그렇다고... 억울하다고 몇 년째 이러는 게.


"선우야... 그냥 집 가라. 여기서부터 알아서 갈게."

"미안. 장난이야 장난."


그렇게 덧붙이는 선우에게 다시 또 미안해졌다. 내가 태평하게 이재현 욕하고 있을 팔자도 아니긴 했다.


"근데 둘이 헤어진 지 꽤 되지 않았나? 애들이 그러던데. 다시 만나나 보네."


선우는 다시 이재현과 이세희 얘기로 대화 주제를 돌렸다. 그렇다. 그 둘은 헤어졌었다. 이재현과 이세희의 세기말 사랑도 잠깐의 휴식이 필요한 모양이었다. 그들은 일 년 반 동안 만나지 않았다.



왜냐면 그땐 이재현이 나를 만나고 있었거든.

아무한테도 얘기하지 않았지만. 


"근데, 누나 나 궁금한 거 있어. 누난 제일 길게 연애한 게 언제야?"


이재현이었다.


"아 너무 디테일하나...? 대답하기 싫으면 언제 마지막으로 연애했는지 알려주든가."


그것도 이재현이었고....

선우야 넌 그게 궁금해? 응. 누나가 나한테 미안하다며. 그럼 그 정도는 나도 알고 시작할 순 있잖아. 2년 까먹은 것도 억울한데. 넌 또 말을 왜 그렇게 하냐... 누나 아무 말도 못 하게 하려고. 어, 음... 일 년 반 정도 만났지. 최근에 헤어진 사람이랑. 와. 누나랑 그렇게 길게 연애할 수가 있어? 내가 뭐 어쨌다고. 놀라는 김선우를 이해 못한 건 아니었다. 내 기준으로는 김선우랑 사귀었던 기간도 꽤 오래 사귀었던 거니까.

부럽다고. 뭐가 부러워. 그냥, 누나 곁에 그렇게 오래 있을 수 있었다는 게. 그럼 뭐해 어차피 헤어졌는데. 그렇지, 나야 좋지 뭐. 뭐가 좋아 선우야... 너도 이제 정상적인 연애해야지. 나도 알아. 근데 아직은 억울한 게 더 크네. 아무것도 못 해봤다는 게. 나 누나 못 잊을 동안 누난 태평하게 연애 잘 하고 있었다는 게. 김선우의 한마디 한마디에 찔렸다.


김선우는 그게 이재현이라는 사실을 꿈에도 모를 거다.

그리고 웬만하면, 그냥 평생 몰랐으면 싶다. 그 아무도 몰랐으면.



이재현

> 너 왜 선우랑 있냐



이재현 문자 하나에 반가운 감정이 드는 내가 싫어죽겠어서.







다시 한번 되새긴다.

모든 관계는 가벼울수록 좋다.

그게 헤어진 연인 사이라면 더더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