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조울증(양극성장애) 2형 환자다. 원래 그냥 우울증인 줄 알고 항우울제를 먹으며 살다가, 어느 날 과소비와 급작스러운 치정 행동을 의사에게 고백했더니 의사가 “어?”라고 하면서 아빌리파이를 처방해줬다. 그러고 나서도 내가 조울증이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다가, 1년 전쯤 병원을 옮기고 정식 테스트를 통해 진단 내지는 확인 사살을 받고서야 아 내가 조울증이구나 하고 인식했다. 사실 지금도 아리까리하다. 내가 조울증이라니? 보통 사람들은 나처럼 살지 않는단 말인가? 나 같은 사람이 어디 가서 조울증이라고 하면 드라마퀸 행세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을까? 그런 불안감에 방금 또 다시 인터넷 자가진단을 해보았다.
평소보다 잠을 덜 잤으며 실제로 잠잘 필요를 느끼지 않은 적이 있다.
=> 당연히 다들 그런 적이 있지 않나요?
평소보다 활동적이었거나 더 많은 일을 했던 적이 있다.
=> 당연히 다들 그런 적이 있지 않나요?
평소보다 더 사교적이거나 밖으로 나돌려고 했다. 예를 들어 한밤중에 친구들에게 전화했다.
=> 당연히 살다 보면 누구나 이럴 때가 있지 않나요??
평소와는 다른 행동을 했거나, 남들이 생각하기에도 지나치거나 바보 같거나 혹은 위험한 행동을 한 적이 있었다.
=> 아니 그러면 님들은 늘 현명하고 합리적이고 안전한 행동만 하면서 살아요???
뭐 이런 질문들에 의구심 가득한 대답을 하고 나니 검사 결과 “정신과전문의와 상의를 요하며 보호자와 함께 내원하여 전문의와 상의하시기 바랍니다”라고 한다. 아, 네. 정신과 잘 다니고 있어요. 약도 잘 먹고요. 이쯤이면 약을 안 먹어도 되지 않을까 하는 만용은 이제 부리지 않기로 했어요. 진짜로요.
나는 약이 잘 들어서 약을 먹으면 일상 생활에 큰 문제가 없는 편인데, 약을 안 먹으면 대체로 혼재성 삽화를 경험하는 것 같다. 우울증과 경조증이 동시에 나타나는 것이다. 하염없이 눈물이 나고 불행하고 무기력하고 자책감에 시달리는데, 그런 한편 뭔가 무모하거나 위험한 목표를 설정하고 그것을 향해 매진하거나 중독에 빠져들거나 안 하던 짓을 벌인다. 그리고 나는 뭔가 스펙터클한 일이 벌어지는 상황을 좋아할 때가 있다. 설령 그 상황이 위험하거나 두렵거나 부정적인 일이라고 할지라도. 뭔가 박진감 넘치고 짜릿하고 스릴 있고, 내가 그 상황을 해결할 수 있을 거라는 자신감과 도전 의식이 불타오른다.
이것은 조증 및 경조증에서 흔히 나타나는 패턴이다. 이때는 자극 추구가 증가하고, 당면한 위험보다는 보상이 더 크게 보이고, 자기 효능감을 과대 평가하고, 정서적 각성 자체를 쾌감으로 받아들인다. 그래서 위험, 갈등, 혼란, 드라마가 있는 상황을 ‘내가 살아 있는 느낌’, ‘나를 증명할 무대’로 인식한다. 반면 무사평온한 상황은 심심하고 무기력하고 죽어 있는 느낌으로 인식한다.
그렇다 보니 드라마를 스스로 찾아가기도 한다. 아무 문제도 없던 인생에 공연히 파란을 일으키는 것이다.
이렇게 조울증 병식이 확실해지고 보니, 혹시 내 바이섹슈얼 정체성이 이것과 연관이 있는 건 아닐까 하는 추측을 하게 됐다. 왜냐하면 예전에 트위터에서 이런 얘기를 본 적이 있다.
“양성애자들은 동성애자들과 달리 이성애만 하고 살려면 살 수도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성애‘도’ 하기를 스스로 선택한 사람들이다.” (출처 불분명. 문제시 삭제할게요/ 아시면 알려주세요)
“예술 바이: 이들은 바이라서 예술하는 사람이 아니라 예술하다 보니 바이가 된 케이스임. 주로 한예종/계원예대/서울예대에 분포함. 예술을 하려면 일탈을 해야지! 결핍이 있어야지! 라는 생각 때문에 동성애에 도전했다가 헤어나올 수 없게 된 부류.”
“드라마퀸 바이: 이런 사람들은 자신의 특수성에 집중해서 정체화를 함. 헉! 난 동성도 좋아하나봐! 가 아니라 난 헤녀들이랑 다른 것 같아……부터 시작함. 어케든 자신의 다름을 납득하려고 하다 퀴어커뮤니티에 정착하는 케이스임. 자기애가 강하기 때문에 상대 성별에 크게 신경 쓰지 않는 것 같음.”
출처: https://x.com/nokkumgyangsalm/status/1378702146632175617/photo/4
이 이야기들을 접하고 뜨끔했다. 그러니까, 모든 바이가 그런 것은 아니겠지만, 이 설명들이 잘 들어맞는 나 같은 바이녀들이 세상에 있다는 얘기다. 남자랑 연애하면서 잘 살다가 굳이 여자도 만나겠다고 들이대면서 인생을 더 어렵게 만드는 바이녀. 평범한 삶은 곧죽어도 싫어서 일탈을 찾다가 여자하고도 섹스하게 된 바이녀. 자신의 남다름을 입증하고 싶어서 자신이 여자에 얼마나 진심인지 그러나 어째서 절대로 레즈비언은 아닌지 역설하는 바이녀. 자기 삶을 드라마로 만들고 싶어서 ‘문란’해지는 바이녀. <벨벳 골드마인> 영화를 보며 “모든 인간은 바이섹슈얼이다”라는 대사에 무릎을 치며 공감하는 바이녀.
그리고 이 모든 측면이, 그러니까 드라마와 일탈을 찾아 자기 인생이 꼬이게 만들고 ‘문란’해지는 것이 경조증 삽화와 정확히 일치하지 않나 하는 의심이 들었다.
혹시 싶어서 검색을 해봤다. 바이섹슈얼 정체성과 조울증 유병률 사이에 상관관계가 있는지. 그러자 놀랍게도 정말 그렇다는 결과가 나왔다!
“분석 결과, 우울증과 불안 장애 모두 트랜스젠더 집단에서 가장 높은 유병률을 보였습니다. 양성애자 집단에서는 양극성 장애의 유병률이 가장 높았지만, 이는 관련 연구의 부족과 참여자 수의 제한으로 인한 결과일 수 있습니다. 반대로, 남성 동성애자 집단에서는 우울증과 불안 장애의 유병률이 가장 낮았고, 여성 동성애자 집단에서는 양극성 장애의 유병률이 가장 낮았습니다.”
출처: https://pmc.ncbi.nlm.nih.gov/articles/PMC12711858/?utm_source=chatgpt.com
그러니까 (연구 수가 제한적이라는 한계는 있지만) 퀴어 집단 중에서 바이들은 조울증이 가장 많고 레즈들은 조울증이 가장 적다는 연구 결과다.
아, 레즈비언 여러분과 서먹해지는 순간이다.
그리고 이 깨달음은 내 바이섹슈얼 정체성을 깊이 고민하게 만들고 있다.
조울증 병식을 처음 갖게 되었을 때 내가 가장 괴로웠던 부분은 이런 것이다. 내가 드디어 깊은 우울과 무기력의 수렁에서 빠져나와 용기와 활력을 찾고 있다고 느꼈던 순간들이 병증의 일환이었다는 사실. 내가 병에서 낫고 있다는 방증이라 생각했던 순간들이 도리어 병이 심화되는 국면이었다는 것. 내가 이기고 있다고 생각할 때조차도 실은 지고 있었다는 것. 거대한 사기극의 피해자가 된 것 같은 기분.
그런데 이제는 만약 내 양성애도 경조증의 일환이라고 한다면 나는 어쩌나? 이 병은 나를 어디까지 규정하고 장악하고 있나? 내가 여자를 만나서 행복하고 짜릿하고 자신만만하고 용감해졌던 그 모든 순간들이 만약 질병이었다고 한다면 어떡하지? 나, 여성애를 그만둬야 하나?
물론 이런 사고는 비약일 수 있다. 내가 이런 글을 쓰는 것이 성소수자 정체성을 질병화하는 것이라고 욕을 먹을 수도 있다. 하지만 신경다양인이자 성소수자 당사자로서 이런 고민과 번뇌를 할 때가 있음을 이해해달라. 내 여성애는 실제로 때때로 나를 위험하게 만들었고, 내 인생을 어렵게 만들었고, 그 대신 내 앞에 많은 드라마를 펼쳐왔다. 내 사랑은 정말로 때때로 내 병과 구분이 잘 되지 않는다. 그리고 많은 경우 사랑은 병이라고도 하지 않던가.
나 같은 조울증자 바이녀들이 있다면 자조 모임이라도 갖고 싶다. 하지만 아마 안 될 것이다. 바이들은 단합이 안 되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