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년 10월 20일, 마음속에 묵혀왔던 생각을 처음으로 터놓자는 생각을 합니다. 처음으로 정신과에 어렵게 연락을 전하고, 예약을 잡습니다.
10월 26일, 처음으로 정신과 초진을 다녀옵니다.
의사 선생님과 12월에 가족과 이야기하기로 합의합니다.
큰 결심을 한 나를, 조금 다독여 줍니다.
책상 위에 둔 영수증을 보고 엄마가 독촉합니다.
나를 지지해 주었으면 한다는 말과 함께 어렵사리 얘기를 꺼냅니다.
당신은 전혀 어이가 없다는 듯 전면 부정합니다.
당신의 입에서 처음 나온, 연을 잇기 어렵다는 말에 일단 물러섭니다.
2021년 1월, 반쯤 폐인이 된 상태로 게임만 하며 시간을 때웁니다. 무엇에도 집중할 수 없습니다.
31일, 더는 참을 수 없어 다시 당신에게 얘기합니다.
그때 코로나 때문에 생각이 이상해졌다고 했었죠.
나도 그러길 바랐습니다.
다시 찾아온 학기, 그러나 나는 많이 망가져 있습니다.
학업에 집중하기 힘들고, 다른 정신과를 찾습니다.
4월 30일, 다른 병원 초진을 다녀옵니다.
새로운 시작이었지만, 아직 불안합니다.
6궐 22일, 종강과 함께 심리검사를 하고 옵니다.
학점이 낮아서 학고 누적이 확실해집니다.
이대로라면 학교에서 잘리게 됩니다.
절망합니다.
7월, 예정대로 학고 누적과 제적이 이루어집니다. 진단서가 나왔지만 학교를 다닐 수 없다는 생각에 우울합니다.
12일, 군대 처분변경원 제출을 위한 사진 촬영을 엄마가 눈치챕니다. 또 독촉하고, 진단서를 내주며 자백합니다.
당신은 나에게 항 수 있는 가장 독한 말들을 쏟아냅니다.
그날 당신이 사온 주먹밥은 차갑게 식은 돌이 되었습니다.
8월까지, 나는 반쯤 주검이 되었습니다.
정말 무엇도 할 수 없습니다. 유튜브로만 보아왔던 히키코모리가, 이젠 점점 내가 되고 있습니다.
9월 13일, 처음으로 피검사를 받습니다.
고등학교 친구를 만나며, 오늘이 새로운 시작일지 약간은 기대합니다.
17일, 첫 주사를 맞습니다.
대학에 합격했던 날이 주마등처럼 지나갑니다.
지금 몰랐더라면, 또는 그때 알았더라면 지금과 달랐을까 생각해봅니다.
연말까지, 많은 친구들을 만납니다.
허물없이 대화하는 친구, 초등학교 친구, 본인이 자랑스럽게 포비아라고 떠든 친구까지. 마냥 즐겁지만은 않은 시간을 보냅니다.
2022년 2월, 다행히 재입학에 성공합니다. 새내기 때부터 친했던 친구와 기숙사 방을 잡습니다.
새로 도착한 방에서 살림을 꾸릴 준비를 합니다.
4월 20일, 중간고사와 함께 바빴던 8주가 끝이 납니다. 두 달간 억누른 우울이 미친듯이 몰려옵니다. 호르몬 작용 때문이라고 마인드 트레이닝하지만, 마음은 머리를 따르지 않습니다.
21일, 하루종일 침대에서 펑펑 웁니다. 내 존재가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가위손 같은 존재일까, 내가 살아가는 게 맞을까 고민하며 눈물을 쏟아냅니다.
5월, 열심히 대비했던 시험들의, 끔찍한 성적표를 받습니다. 이전보다 디포와 우울도 더욱 심해져만 갑니다.
6일, 시도에 관한 망상이 나를 사로잡습니다. 하늘이 점차 잿빛으로 물들어 갑니다.
12일. 강의를 결석하고 강가에 나와 하염없이 울며 하늘만 하라봅니다. 정말로 할 것만 같습니다. 시도 직전까지 간 나를, 겨우 멈춰세웁니다.
13일, 왠지 모르게 후련한 아침, 그러나 이는 지진 전의 평온이었을까요, 곧 온 세상이 뒤집히고 와해되며 내 정신은 끔찍하게 분쇄되기 시작합니다. 눈물로 뒤덮인 얼굴로, 공황 치료를 한다는 정신과를 찾습니다.
늦은 예약에 저녁 7시까지, 계속 찾아오는 공포삽화를 겨우 견디며 진료 시간을 기다립니다.
진료가 끝나고 겨우 받아온 약 7첩을, 소중하게 들고 방으로 향합니다.
병명은 조울증과 조기 정신증. 약을 받아 다행이지만 만성이 될까 두렵기도 합니다.
6월, 학기가 끝나고, 다시금 엄마의 의심이 찾아옵니다. 끝내 나를 믿지 못했던 당신은 나를 본가로 소환합니다. 카페에서 어떻게든 당신의 방식으로 설득되고 합리화당한 나는, 자기관리라도 허락해달라며 머리를 기르기 시작합니다.
7월 11일, 소중한 친구를 만납니다. 지금도 연락하고 고마움에 정정 인우보증서까지 써주었던 친구입니다.
25일, 가족에게 병을 고백합니다. 또 당신은 믿지 못하고 나를 심문하지만 이건 다행히 받아들여줍니다. 그러나 여전히 약은 믿지 못해 임의단약을 부추깁니다.
8월 12일, 4일간의 임의단약 후, 다시 정신이 망가집니다. 머릿속에는 피가 튀기는 망상이 떠다니고, 세상이 울렁거려 눈을 뜰 수 없습니다. 그제서야 당신은 자신이 틀렸다며 약을 허락합니다. 내 정체성에 관해서도 내가 완전히 망가졌을 때에야 믿어줄까, 두려워합니다.
9월, 시련의 시간이 끝나고, 새로운 지식과 사람들이 생겨납니다.
드디어 나에게도 다시 빛나는 날이 올까 간절히 바랍니다.
12월, 비슷한 학문적 취향을 공유하는 친구들을 만납니다. 아직 나를 지정성별로 대하지만 괜찮습니다. 시간의 문제라 생각합니다.
2023년 1월, 믿었던 사람에게 배신을 당하고, 여러 사람들에게 조리돌림과 비난을 받습니다. 다시금 인간의 무서움에 대해 느낍니다.
2월, 친구와 함께 산 날이 1년이 지나갑니다. 많은 추억이 쌓이고, 이제 이 방은 본가보다 더 내 집이 되었습니다.
4월 21일, 지난해 5월부터 다녔던 병원에서 완치 판정을 받습니다. 이전의 아픈 나는 끝나고 건강한 나로 살아갈 생각에 조금 들떠봅니다.
9월, 새로운 진로를 찾습니다. 분야의 퀴어프렌들리한 느낌에 바로 매료되고 맙니다. 새로운 친구들도 많이 만나게 됩니다.
12월, 다시 본가로 올라가고, 또 심문이 시작됩니다. 견디다 못해 팔에 줄을 긋습니다.
처음 보는 빨간줄이, 조금은 무서웠습니다.
2024년 1월 말, 가족여행을 떠납니다. 나는 가고 싶지 않았지만, 가족여행인 만큼 합류합니다.
2월 3일, 당신은 내가 호르몬을 하는 걸 결국 눈치채고 맙니다. 진단서 때와는 비교도 되지 않는 끔찍한 말들이 쏟아지고, 국제미아로 남습니다.
다행히 도착한 공항이었지만, 당신은 하지도 않던 줄담배를 피우며, 여행은 파국으로 끝나고 맙니다.
돌아와서 내가 결국 주사 끊겠다고 말하니, 그제서야 바로 안아주면서 다행이라고 말합니다. 당신의 그 끔찍한 이중성에, 나는 절망하여 눈물만 흘립니다.
4월, 원하던 대학원에 지원합니다. 새로운 첫 교내 퀴어 친구도 사귑니다. 친구와 함께 병원도 가게 되었습니다.
26일, 학과 선배들과 여행을 떠납니다. 그곳에서 내 pronoun부터 물어보는 개방성에 살짝은 놀라면서 기쁩니다.
5월, 1차 합격과 함께 면접을 응시합니다. 성적으로 비관하던 지난날과 같은 장소, 다른 상황. 감회가 새롭습니다.
6월, 꿈에 그리던 대학원에 불합격합니다. 아쉬운 대로 술잔을 기울이고, 다시 가족에게 커밍을 시도합니다.
2월의 일 때문에 말이 곱게 나가지 않습니다. 결국 태어나서 처음으로 가족에게 말로 상처 주었단 자괴감에 일주일 동안 방에서 나오지 못합니다.
7월, 다시 대학원을 지원하고, 가족과 다시 대화를 시도합니다. 평행선만을 달리는 대화. 나는 처음으로 진지하게 가족과의 분리를 고려합니다.
8월, 갈 곳 없는 나에게 지도교수님이 손길을 내밀었습니다. 일할 곳이 생겨 기쁩니다.
10월. 행정적 문제로 일이 끊기고, 다시 백수가 됩니다. 펑펑 울던 찰나에, 한 기업에서 포지션 제안이 옵니다.
25일, 성공적으로 끝난 면접, 그러나 대표가 나의 정체성에 대해 회의가 필요하다 말합니다.고처음 겪는 고용 차별에, 슬픔과 긴장이 몰려옵니다.
28일, 꿈에 그리던 최종합격 통지가 날아옵니다. 내 손으로 먹고살 수 있게 되어 너무나도 기쁩니다.
11월 1일, 내 생일과 함께 첫 출근하여 계약서를 작성합니다. 그리고 이전까지 모아두었던 서류들을 모아 개명 신청을 합니다.
11월 23일, 취업 사실을 선물과 함께 가족에게 알립니다. 당신들의 기쁨이 왜인지 나의 슬픔입니다.
12월 12일, 개명 허가 통지를 받습니다. 그러나 이 문제를 극도로 싫어할 가족 때문에, 신고할 수 없습니다.
18일, 2년 반 동안 나와 살림을 함께했던 친구에게 내 정체성을 고백합니다. 다행히 너무나도 잘 받아주어 무한한 고마움을 느낍니다.
2025년 1월, 가족에게 다시 이야기를 꺼냅니다. 하지만 여전히 양립 불가능하다는 판단에, 개명을 강행해야겠다는 확신만이 커집니다.
1월 10일, 꿈에 그리던 개명신고를 완료합니다. 새 임시신분증이 왜인지 너무나도 사랑스럽습니다.
앞으로 이 이름으로 살아갈 익숙하지만 새로운 나에게, 홀로 작은 위로 하나 건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