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편집자 설명] 12.3 친위쿠데타 이후 윤석열정권 퇴진투쟁에는 청년들이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사회주의자』에서는 이런 청년들로부터 투쟁에 나서게 된 동기, 투쟁 과정에서 들었던 고민과 함께 앞으로 어떤 투쟁이 만들어졌으면 하는지, 청년들이 자신의 요구를 적극적으로 하기 위해서는 어떤 것이 필요할지 등에 대한 이야기를 듣고자 청년 릴레이 인터뷰를 기획하였다. 마지막 세 번째 인터뷰에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연대로 투쟁으로’ 깃발 기수인 김명중 동지께서 응해주셨다. 인터뷰는 7월 17일 19시, 『사회주의자』 사무실에서 진행되었다.
① “자본주의는 그대로 두고 내가 받고 있는 억압만 해결할 수 있다는 건 착각이다”―김설아 동지 인터뷰
② “자본주의는 얘기하지 않은 채 평등만 얘기하는 건 민중들의 분노를 제대로 반영하지 않는 것”―이석훈 동지 인터뷰
Q1. 김명중 동지와는 서로 알게 된 계기가 나름 뜻 깊습니다. 서초동 법원 삼거리에서 진행하는 ‘내란 수괴 석방한 법원·검찰 규탄 1인 시위’에 지난 6월 중순 경 참여하시면서 저와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면서 김명중 동지에 대해 여러 가지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그게 오늘 인터뷰까지 이어진 것 같습니다. 본격적인 인터뷰에 앞서 간단한 자기소개 부탁드립니다.
김명중: 안녕하세요. 저는 싱어송라이터이자 ‘연대로 투쟁으로’ 깃발의 기수로 활동하고 있는 24살 김명중이라고 합니다.
Q2. 우선 작년 12월 3일에 있었던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시도에 대해 질문을 드리겠습니다. 동지께서는 12월 3일 당일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소식을 듣자마자 국회 앞으로 오셨다고 들었습니다. 친위쿠데타가 일어났다는 소식을 듣고 처음 어떤 느낌이 드셨는지, 국회 앞에 어떻게 나오시게 되었는지 궁금합니다.
김명중: 처음 비상계엄 선포 소식을 접하고 들었던 생각은 ‘가짜뉴스 아닌가’하는 것이었어요. 12월 3일 이전에도 종종 ‘윤석열정권이 비상계엄을 준비하고 있다’는 의혹이 제기되는 걸 보긴 했지만, ‘설마 21세기에 대통령이 그런 생각을 하는 게 가능이나 한 일인가’하는 생각만 들었어요.
12월 3일 그때 저는 당진에 있었어요. 친구들과 대학교 졸업공연 연습을 하고 있었죠. 연습을 하다가 연습실 1층에 있는 편의점에서 친구들과 술을 한 잔 마시고 있었어요. 그런데 갑자기 편의점 사장님이 “비상계엄이 선포됐다는데 혹시 소식 들었냐”고 물어보셨어요. ‘이게 무슨 소리지’하는 생각으로 뉴스를 확인하려고 네이버에 들어갔더니 때마침 네이버가 먹통이 되었더라고요. 그래서 불안한 마음으로 트위터에 들어가 보니까 ‘비상계엄이 선포됐다’, ‘지금 당장 국회 앞으로 가야 한다’는 내용의 글들이 많이 올라와 있더라구요. 그 글들을 보고 당장 친구들과 함께 당진에서 택시를 잡아 국회로 달려가서 계엄군을 막았죠. 계엄이 해제된 후에도 아침까지 국회 앞에 있었어요. 그때 당시 저와 친구들 모두 똑같이 ‘만일 심각한 상황이 터져서 우리가 죽게 되더라도 계엄은 무조건 막아야 한다’고 생각하면서 같이 계엄군을 막았던 기억이 나요.
Q3. 12월 3일 친위쿠데타 이후 동지의 삶이 많이 바뀐 것 같습니다. 노동자들의 투쟁 현장에도 적극적으로 연대하시고, 기수로도 활동하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기수 활동이나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면서 어떤 생각을 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또 12월 3일 이후 많은 청년들이 폭발적으로 광장에 나왔는데 이런 일이 어떻게 가능했다고 보시나요?
김명중: 일단 12월 3일 이후로는 광장에 거의 살다시피 했어요. 원래는 비상계엄이 해제되고 나서 바로 집에 가려고 했는데, 어머니가 전화로 “무슨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계속 국회 앞을 지켜라”라고 하셨던 일이 있기도 했어요. 그렇게 처음 광장에 나온 뒤로는 집회 일정 있을 때마다 거의 매번 집회에 참여하곤 했어요. 저와 함께 집회에 나오던 친구들 중에는 초반에 열심히 집회에 나오다가 어느 순간부터 집회에 그만 나오게 된 친구들이 있어요. 그 친구들에게 왜 집회에 안 나오냐고 이유를 물었더니 “어차피 윤석열은 파면될 건데 굳이 계속 집회에 나갈 필요가 있냐”고 했어요. 그때 저는 “만약에 파면이 안 되면 어떻게 할 거냐”라고 반박하곤 했어요. 실제로 그런 부분이 불안했구요. 돌이켜보면 윤석열 체포도 엄청 늦게 이루어졌잖아요. 이런 상황이 이어지다보니 걱정과 두려움이 컸고, 그래서 계속 광장에 나오게 되었던 것 같아요. 중간에 조금 긴장이 풀어져서 집회에 드문드문 나오기도 했는데, 그러다 윤석열이 석방되니까 ‘큰일 났다’ 싶어서 계속 광장에 나오게 되었네요.
노동자 투쟁에 연대하게 된 계기와 관련해서 기억나는 것은 바로 “민주노총이 길을 열겠습니다”라는 발언을 집회에서 들었을 때에요. 그 발언을 듣고 “와 이 분들 뭐지?”하는 생각이 들었고, 민주노총이 어떤 단체인지 찾아보고 관심을 갖게 되었어요. 그 이후에는 집회 현장에서 민주노총이나 금속노조 깃발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지요. 그리고 세종호텔지부 깃발 같은 투쟁사업장 깃발들도 관심을 갖고 보게 되었고요. 이런 경험이 이후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연대로 이어진 것 같아요.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다 보면 이런 생각이 들어요. 주로 (투쟁사업장) 노동자 분들이 투쟁하는 이유가 부당해고 철회나 안전하게 일할 권리를 요구하는 것이었고, 임금체불에 맞서 투쟁하는 것도 자주 볼 수 있어요. 이런 투쟁들을 접할 때마다 예전에 고등학교 시절 담임 선생님이 부당하게 해고돼서 선배, 후배, 친구들과 같이 모여서 담임선생님의 부당해고에 항의하거나 지역 기자들에게 이런 부당해고에 대해 알리기도 했던 경험이나, 대학 다닐 때 교수님들이 학교로부터 임금을 받지 못하는 일, 공부하러 온 유학생들이 공부를 하지 못하고 학교 측에 끌려가 강제노동을 하였다는 소식을 듣고 화가 나서 학우들을 모아 같이 집회를 열기도 했던 기억 들이 되살아나요. 그런 기억들이 있다 보니까 ‘이 노동자들과 연대해야 하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자연스레 들었던 것 같아요. 제 자신이 아르바이트를 하는 노동자이기도 하니까 더욱 연대해야 한다는 생각이 강해지고 있고요. 저는 음악을 하다 보니까 마트노조 홈플러스 노동자들의 투쟁에 연대하는 노래를 만들어서 동지들께 선물하기도 하고, 최근에는 울산 이수기업 노동자들의 투쟁에 대한 노래를 만들기도 했어요. 그렇게 연대를 하고 있어요.
기수로 활동하게 된 이유는 단순해요. 처음에는 그냥 집회에서 나눠주는 피켓만 들고 다녔는데, 집회 현장에 재밌는 깃발이 많이 나와 있더라고요. 그래서 ‘나도 한 번 만들어볼까?’라는 생각이 들었고, 어떤 깃발을 만들지 고민하다가 이미 재밌는 깃발들, 내가 좋아하는 인디 음악 등에 대해 이야기하는 깃발들은 많이 만들어졌기에 ‘연대로 투쟁으로’라는 깃발을 만들게 됐어요. 이후에 ‘연대로 투쟁으로’ 깃발을 들고 여러 투쟁 현장에 연대하다보면 그 깃발 덕에 힘 받는다고 하시는 분도 있었어요.
청년들이 광장에 많이 나온 이유는 일단 재밌는 깃발이 많아서이기도 할 것 같고, 또 광장에서 많은 청년들이 발언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나는 이런 문제 때문에 힘들어요”라는 이야기를 하니까 다른 청년들도 그런 이야기를 듣고 “저거 내 문제인데”, “나도 똑같은 상황인데”하면서 공감이 되고, 그러다보니 ‘나도 광장에 나와도 되는구나’라는 생각이 들어서가 아닐까 싶어요.
Q4. 민중들은 내란을 일으킨 윤석열의 퇴진 뿐 아니라 체포, 구속을 요구하며 투쟁했고, 그 결과 지난 1월 윤석열은 체포, 구속 기소되었습니다. 그러나 지난 3월 법원과 검찰의 사법쿠데타로 내란 수괴 윤석열이 석방되었고, 윤석열은 7월 10일 재구속 전까지 약 4개월간 자유로이 거리를 활보하는 심각한 상황이 전개되기도 했습니다. 이런 상황과 관련해 어떤 생각이 드셨는지, 또 동지께서는 ‘내란 수괴 석방한 법원·검찰 규탄 1인 시위 실천단’의 1인 시위에 결합하셨는데 어떤 고민을 갖고 1인 시위에 참여하시게 되었는지 여쭤보고자 합니다.
김명중: (윤석열이) 석방됐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사법부는 끝났구나’, ‘우리나라 망했구나’라는 생각까지 들었어요. 이러고도 어떻게 민주주의 국가라는 건지, 도대체 왜 윤석열을 석방시킨 건지 이해되지 않고, 울분이 터졌어요. 특히 윤석열이 석방된 3월 8일이 여성의 날이었잖아요. 당시에 주변의 여성 동지들도 기분 좋게 집회에 참여하고 있는 걸 봤거든요. 근데 갑자기 윤석열이 석방됐다는 소식이 들리니 소름이 돋고 울분이 터지고 눈물이 났던 기억이 나요.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저랑 같이 광장에 나오던 친구가 있었어요. 이 친구는 비상계엄 이후로 ‘계엄 트라우마’를 앓았고, 개인적으로도 안 좋은 일들이 많이 겹쳐 일어나서 많이 불안해하고 있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윤석열이 석방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친구는 정말 충격을 받았어요. 안타깝게도 그 친구는 윤석열이 석방된 지 이틀 뒤에 세상을 떠났어요. 주변에 있던 저도 그때 정말 많이 힘들었어요.
1인 시위에 참여하게 된 계기는, 일단 내란범이 거리를 활보하는 게 너무 화가 났고, 그래서 1인 시위를 해서라도 윤석열을 다시 감옥에 보내야 한다는 절박함이 있어서였어요. 앞에서 말씀드린 친구가 차별금지법 제정이랑 윤석열 구속을 되게 열망했었는데, 그 친구를 생각해서라도 윤석열 구속을 꼭 이루고 싶었어요.
Q5. 청년들의 삶이 갈수록 악화되고 있습니다. 청년들이 지난겨울에 거리에 나온 이유도 일정 정도 이런 팍팍한 삶으로부터 영향을 받았을 것으로 보입니다. 동지께서는 음악 활동을 하시면서 동시에 생계 활동을 병행하고 계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이 시대를 살아가는 20대 청년의 한 사람으로서 동지께서는 삶의 어떤 부분이 고민스러웠는지, 주변 청년들은 삶에 어떤 고민이 있을지에 대해 이야기해주세요.
김명중: 생계유지가 제일 큰 고민이죠. 음악 활동만 해서는 생계가 유지되는 게 아니니까 다른 생계 활동을 하는데, 월급만으론 살기가 어려워요. 월세, 관리비 내고 나면 수중에 남는 게 없어요. 일자리를 구하는 것 자체도 힘이 들어요. 제가 고깃집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다 잘린 적이 있어요. 비상계엄 이후로 장사가 안 되는 상황에서 건물주가 관리비를 올려달라고 이야기해서 사장님이 가게를 정리하면서 잘린 거예요. 이런 경험들이 있다 보니 앞으로 생계를 어떻게 유지해야 하는가가 제일 큰 고민인 것 같아요.
주변 청년들의 경우에도 똑같이 생계에 대한 고민이 가장 컸어요. 그리고 윤석열 파면 이후 뭘 해야 하는가에 대한 고민도 많고요. 주변에 그간 광장에 나오느라 취업 준비도 밀리면서 앞으로 뭘 해서 먹고 살 것인가 고민하는 경우들이 많았어요. 거기에 (연대 활동에 열심인) 주변 청년 동지들의 경우에는 정권이 바뀌어도 노동자들의 문제, 장애인 이동권 문제, 농민 문제, 그리고 차별금지법 문제 등 열심히 연대하던 투쟁 사안들이 해결되지 않고 있다 보니까 ‘계속 연대 활동을 하는 게 무슨 의미가 있나’하는 동지들도 있어요. ‘그래도 끝까지 싸워야 한다’하는 동지들도 있지만요. 정권은 바뀌었는데 우리들의 문제는 크게 해결되지 않고 있는 상황에서 오는 고민들이 있는 것 같아요.
Q6. 윤석열의 친위쿠데타 이후 수구세력이 결집해 막무가내로 나가자, 일각에서는 ‘20대 청년들이 극우화되었다’,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있다’는 식의 주장이 나오고 있습니다. 심지어 ‘이대남’이라는 말까지 나왔는데요. 어떻게 보면 김명중 동지도 ‘이대남’ 범주에 속하신다고 할 것입니다. 12월 3일 국회 앞으로 달려갔던 입장에서 이런 ‘극우화’ 담론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듣고 싶습니다.
김명중: 조심스러운데요. 일단 20대 남성이 전체적으로 극우화되었다는 말은 틀린 것 같아요. 일부 커뮤니티에서 활동하는 청년들이 극우화되었다고는 볼 수 있겠지만 (윤석열 퇴진을 외친) 광장에도 청년 남성들이 많이 나왔거든요. 그래서 전체적으로 20대 청년들이 극우화됐다고 볼 수는 없다고 생각해요.
‘극우세력이 득세하고 있다’는 것과 관련해서는 사실 한남동에서 윤석열 체포투쟁을 할 때 육교에서 젊은 남성과 여성이 태극기랑 성조기를 들고 다니는 걸 본 적이 있어요. 이전에는 극우집회라고 하면 어르신들만 나온다고 생각했는데 젊은 사람들이 제법 있어서 처음에는 ‘큰일 난 것 아닌가’ 생각도 들고 놀랐는데요. 근데 지금의 극우집회를 보면 규모가 점점 줄어들고 있더라고요. 다시 ‘옛날’로 돌아온 것 같아요. 득세는 아닌 것 같다는 거죠.
Q7. 12월 3일 이후로 윤석열이 파면되고 조기대선이 치러지고 정권까지 바뀌었습니다. 그러나 민중들, 특히 우리 청년들의 삶은 여전히 크게 바뀐 것이 없는 것 같습니다. 이제는 우리 삶의 문제가 해결되는 싸움을 해야 할 때입니다. 우리 매체에서는 민중들, 청년들의 삶을 바꾸기 위해선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주장하고 있는데, 이런 주장에 대해 동지는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김명중: 진짜 자본주의와 싸워야 한다고 생각해요. 제가 아직은 사회주의에 대해 공부를 많이 한 것도 아니고, 잘 모르는 상태이긴 하지만요.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저희 청년들, 그리고 노동자들의 삶이 크게 바뀌지 않았잖아요. 그렇다 보니까 ‘이게 맞나’, ‘자본주의가 맞기는 한 건가’ 싶은 생각이 들었고, 자연스레 자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한다는 생각을 많이 갖게 된 것 같아요.
사실 예전에도 투쟁 현장에서 동지들과 이야기하다가 자본주의를 비판하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어요. 제 나름대로 자본주의가 무엇인지, 사회주의가 무엇인지에 대해 검색을 해보기도 했고요. 그러면서 사회주의의 내용에 조금씩 공감이 가기 시작했어요.
정권이 바뀌었는데도 바뀐 게 거의 없어요. 심지어 이재명정권은 농민들이 요구했던 법들에 대해서 ‘농망법’이라고 비하하기도 했던 송미령을 농림부장관으로 유임시켰잖아요. 화가 났어요. 그리고 참다 참다 제 속에서 뭔가 ‘뻥’하고 터졌고, 자본주의가 문제라고 했던 동지들의 말이 맞다고 생각하게 됐어요. ‘정권만 바뀐다고 우리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구나’. ‘이젠 자본주의에 맞서 싸워야 하는구나’하고 생각하게 된거죠.
Q8. 끝으로 하고 싶은 이야기, 못 다한 말씀이 있으시면 해주시길 바랍니다.
김명중: 요즘에는 가덕도 신공항 반대 집회나, 노동자들이 산업재해로 죽어가는 SPC 같은 기업에 문제제기하는 집회에 참여할 때마다 항상 지나가는 분들이 “정권이 바뀌었는데 집회를 왜 하냐”고 이야기하시는 걸 듣곤 해요. 그때마다 ‘왜 우리가 싸우고 있는지’에 대해 설명하기 위해서 고민하곤 해요. 윤석열정권을 몰아내는 광장은 마무리됐지만 노동자들의 투쟁 광장은 끝나지 않은 거잖아요. 장애인 이동권 쟁취 투쟁도 여전히 진행 중이고, ‘민주 동덕’을 요구하는 동덕여대 재학생들의 투쟁도 이어지고 있어요. 이런저런 투쟁들이 계속 이어지고 있으니 많은 분들이 같은 노동자로서, 우리나라 사람으로서 함께 싸우고 함께 쟁취하자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음악 활동과 관련해서는 곧 음원을 발매할 예정이고 유튜브로도 음악 활동을 하고 있으니 많은 관심과 사랑 부탁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