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태어나니 금수저 vs 가난의 아이콘
업타운 걸
(Uptown Girl)
김현정 김지연
요란한 배기음 내며 루프를 연 채 질주하는 빨간 람보르기니. 베스트 클래식 명곡 50선이 빵빵한 스피커를 통해 서울 도로 한복판에 울려 퍼졌다. 운전대의 주인은 제 얼굴의 반만 한 썬글라스로도 가려지지 않는 뽀얀 피부와 당당한 콧대를 자랑하는, 김현정.
늘 사람이 붐비는 강남역 11번 출구 골목길로 진입하자 모든 이들의 관심과 시선을 사로잡았다. 현정의 미러 썬글라스 위로 부러움 섞인 수많은 얼굴들이 비쳤다. 그중 검정 긴 생머리에 귀여운 보조개를 가진 한 여자와 눈이 마주치자 현정은 씨익 웃는다. 아는 사람이야? 아니, 모르는 사람이야……
그렇게 현정은 인사성이 밝고 웃음이 헤펐다.
올해로 스물 둘인 김현정은 잘난 할머니 둔 덕에 뱃속에서부터 억 소리 나는 자기 명의 통장을 가졌다. 꾸준한 고급 과외로 무난히 명문대에 합격했으며 면허 따기도 전에 선물로 벤츠를 받았다. 그러나 무난하고 흔해빠진 회색 벤츠는 현정의 눈에 차지 않았다. 혈기왕성한 여자라면 빨간 스포츠카 하나 정돈 끌고 다녀야 하지 않을까. 결국 현정은 엄마를 조르고 졸라서 세달 만에 람보르기니 아벤타도르를 거머쥐었지만 부록처럼 딸려오는 열두 시 통금은 감수해야 했다.
현정이 생각하는 자신의 무기는 뭐냐. 혈연? 학벌? 재산? 그런 어마무시한 배경마저 차치하고 꿀피부와 순진무구하면서도 깊은 눈매로 완성된 자신의 백억 짜리 미모임을 자부했다. 게다가 무광도색까지 입혀 재탄생 시킨 람보르기니는 이 세상에 더는 없는 섹시함을 내뿜으니 현정의 미모를 뒷받침해주고도 남았다. 김현정은 폼에 죽고 폼에 살았다.
할머니가 낳은 외동아들의 무남독녀인 현정은 그야말로 김씨 가문의 뼈와 살 같은 존재였다. 그러나 현정은 종종 실낱같은 죄책에 휩싸이기도 했다. 부잣집에서 귀하게 나고 자란 남자애들은 하나같이 재미없고 유치해서 하품만 하게 되는데. 그 이유가 꼭 아니더라도 남자라는 이성에 죽어도 안 끌린다는 거였다. 어릴 때부터 친한 그룹의 손자들을 데려다 놓고 현정의 사위로 찜 해놓는 식의 어른들의 인형놀이가 펼쳐지면 현정은 차갑게 식었다.
할머니, 어머니, 아버지. 우리 김씨 가문의 대를 잇지 못해서 죄송합니다. 대신 제가 마지막 김씨로서 최선을 다해 화려하게 살겠습니다. 그런 뉘우침을 속으로 되뇌었다. 그래서 현정은 격주마다 열리는 사립고 상류층의 애프터 파티마다 꼭 참석해 예쁘기로 소문난 여자애들과 붙어먹었으며 성인이 되자마자 클럽에 나가 예쁜 언니들과 술잔을 부딪쳤다. 최선을 다해 화려하게, 죄책감 억누르며 살았다.
그러다 사랑도 손쉽게 해버릴 법한 현정은 의외로 사랑할 엄두조차 못 냈다. 한창 자아가 형성되던 시절에 사랑의 결말이 다 배신뿐이라서. 침대에서 마주 보고 앉아 서로 젤네일을 발라줬던 첫 썸녀는 제주도 전학을 앞두고 약 오백만 원에 달하는 현정의 명품 아이템들을 계획적으로 빼돌려갔으며. 고등학교 등하교 할 때마다 옆자리에 태워줬던 첫사랑은 현정의 운전기사와 정분이 났다. 여담이지만 현정이 누구보다 빨리 면허를 딴 이유도 여기에 있었다. 그 뒤로 운전기사라면 꼴 보기가 싫었으니까.
현정은 몰랐다. 오히려 가진 게 많아서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빼앗길 수 있다는 걸. 사랑을 하고 그 사랑을 잃어버린 사람은 아무것도 잃어본 적 없는 사람보다 아름답다지만, 태어나기 전부터 온 세상을 다 가진 격인 현정에게는 그래서 상실의 아름다움이 대체 뭐라는 건지 더더욱 몰랐다. 그때의 상처가 깊게 남아 누군가에게 마음을 주는 게 꺼려졌다. 경계는 안 했지만 신뢰도 안 했다. 자신보단 자신의 돈에 더 관심 있는 경우가 다반사였으니까. 현정도 딱 그만큼에 걸맞은 가벼운 만남만 전전하며 지냈다. 언젠가 잃어버려도 슬프지 않게.
웅. 도연아. 언니 지금 가는 중. 그날도 현정은 간지나는 람보르기니에 누군갈 태울 준비를 하고 있었다. 조수석 가죽 시트에선 늘 좋은 향이 났다. 여러 여자의 향기가 섞여 세상에서 하나밖에 없는 잔향이 늘 차 안에 은은하게 감돌았다. 현정은 잠시 좁지만 한산한 대로변에 차를 세워두고 경치 좋은 드라이브 코스를 검색하고 있었다. 그때 와장창, 하고 어딘가에서 날아온 소주병들이 조수석 문짝을 두들기며 비처럼 쏟아졌다.
현정은 제 오른쪽 볼을 한 번 비틀어 꼬집은 후 나갔다. 나가서 다시 눈을 부비고 봐도 유리 파편이 사방에 널려 있었다. 꿈이 아니었다.
"씨……"
다소 신경질적인 한숨을 내뱉으며 김지연이 다가왔다. 소주병들을 던진 장본인이었다. 현정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자세히 지연을 살폈다. 현정이 아는 얼굴은 아니었다. 무릎을 탈탈 털며 현정을 보고는 말없이 꾸벅 인사했다. 가운데에 Reds가 쓰인 빨간 2002 월드컵 티셔츠에 무릎이 다 늘어난 츄리닝 바지. 헬로키티가 그려진 지압 슬리퍼까지. 현정 인생에 전례 없는 워스트룩이었지만 꽤 똑 부러져 보였다. 높게 틀어 묶은 머리나 담담한 눈빛 같은 게. 웬만한 아파트값보다 비싼 차에 병 던져놓고 뉘우치지 않는 태도에서 현정의 호기심을 불러일으켰지만.
무엇보다 지연의 얼굴이 여태 현정이 꼬셔온 여자들을 합쳐서도 탑 쓰리에 드는 얼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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와작와작. 사방에 널린 유리 파편이 현정의 발아래 계속 밟혔다. 조수석 창문마저 내려져 있었다면 가죽 시트도 망가질 뻔했다. 현정은 고운 제 뺨에 생채기라도 났을까 봐 얼굴이 닳도록 거울을 들여다봤다.
언덕을 내려오던 지연은 쏜살같이 지나가는 어린아이를 피하다 넘어졌다고 했다. 지연의 품을 벗어나 현정의 차에 날라 온 소주병들은 자그마치 아홉 병이었다. 근데 병은 왜 모았던 거예요? 현정이 물었다. 하나 팔면 백이거든요. 지연이 시큰둥하게 대답했다. 요 앞 만물슈퍼에 가서 팔면 백씩 준다고 했다.
“……100만 원?”
“100원이요.”
“아.”
현정은 멍하게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팔짱 끼고 서 있는 지연의 표정은 영 시원찮아 보였다. 그 돈 모아서 저녁 먹으려 했거든요. 지연은 차 키 세 개가 한꺼번에 달린 현정의 검정고양이 키링을 노려보며 말했다. 사고 일으킨 쪽은 지연인데 어쩐지 현정은 자신이 나쁜 사람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한 천만 원 나오겠는데요?”
현정이 말했다. 겉면이 무광이라 찍힌 자국들이 더 적나라했다. 미세하게 거미줄처럼 금이 간 조수석 유리창도 톡, 치면 깨질 것 같았다. 지연은 금액을 듣고도 여전히 짝다리를 짚으며 남 일인 듯 응시만 했다. 아니면 너무 놀라서 꼼짝 못 하는 걸지도? 갸웃거리던 현정은 일단 도연에게 카톡 했다. 아무래도 오늘 옆자리에 누구 태우긴 글렀으니까.
「언니 접촉사고 났어 ㅜ.ㅜ」
그리고는 자연스레 지연의 번호를 땄다. 약속 파토난 사람치곤 좀 들뜬 표정으로. 공일일, 일구구오, 공팔일구? 이거 맞아요? 뻥 같은데. 현정은 처음 보는 공일일이 미심쩍어 확인 전화를 걸었다. 띵딩딩. 굿 몰 닝. 띵딩딩. 모닝콜 벨소리의 진원지인 두툼한 고물 폰이 지연의 품에서 나왔다.
“맞죠? 그쪽 이름은 뭐라구요?”
“……김현정이요. 근데 폰 고장 난 거 아니에요?”
“아니에요. 가로본능이라 원래 꺾여요.”
“아…… 그리고 김혀정 아니고 현정인데.”
“니은 자가 잘 안 눌려서요.”
수리 다 되면 청구할게요. 지연이 들은 체 만 체 하며 고개만 끄덕였다. 현정은 운전석으로 돌아가 시동을 켰다. 괴물 같은 굉음이 주변의 고요를 집어삼켰다.
“저기요.”
다시 되돌아온 지연이 현정을 불렀다. 푹 꺼진 보도블록 끄트머리에 서서.
“네?”
“이왕 천만 원 빚진 거 만 원만 더 빌려줄래요?”
“뭐 하게요?”
“맛있는 거 먹게요.”
대체 만 원으로 뭘 먹지? 압구정 단골 카페에선 커피 한 잔도 못 살 가격인데. 현정은 더 궁금해졌다. 시간이 멈춘 듯 흑백사진처럼 퇴색된 개발 지구. 숲보다 가파른 골목길의 허름한 입구에서. 대도시의 불빛을 마주하고 서 있는 지연의 눈빛이. 고작 만 원을 더 빌리겠단 지연의 말투가. 용맹하고 당돌해서. 그래서 지연에게 맛있는 음식은 뭔지, 지연은 어떤 이야기에 반응하고 웃게 되는지, 빨간 Reds 티가 아닌 근사한 드레스를 입는다면 어떤 표정을 지을지. 지연의 얼굴 말고도 더 알아보고 싶은 게 생겨서 현정은 진도를 좀 뺐다.
“빌려줄 테니까 나랑 같이 먹어요.”
지연을 따라 간 작고 허름한 분식집엔 2층까지 딸려 있었다. 빽빽한 낙서로 도배된 누런 벽지. 색깔종이 위에 유치하고 큼지막한 글씨로 쓰인 메뉴들. 현정은 지저분한 인테리어에 눈이 찌푸려졌다. 천장에 머리가 닿지 않도록 구부정한 자세로 걸어 올라갔다. 허리를 쭉 펴고 들어가는 지연의 머리는 천장에 닿아 부스스해졌다. 딱 두 명만 나란히 앉을 만큼의 자리가 안쪽 창문가 앞에 길게 붙어 있었다. 1.5층 높이의 창문 너머로는 건너편의 슬레이트 지붕 위에 자리 잡은 고양이 가족이 바로 보였다. 여기 뷰가 좋아요. 그렇게 말하는 지연의 정수리 위로 몇 가닥이 붕 떠 있었다.
떡볶이 삼천 원, 순대 삼천 원, 튀김 이천 원. 만 원어치도 안 되는 음식들이 초록색 멜라민 그릇 위로 덧씌운 비닐봉지에 담겨 나왔다. 현정은 생전 처음 보는 허접한 상차림에 경악했다. 지연은 천 원짜리 포도맛 슬러시까지 시켜서 쪽쪽 빨아마셨다. 현정이 손댈 수 있는 건 없었다. 떡볶이는 딱 봐도 매워 보였고, 순대는 꼬릿한 냄새부터 질색이었다. 으. 엄청 비위생적인 거 같은데…… 떡볶이 국물에 순대 푹 찍어먹던 지연이 꾹 참다가 말했다.
“저기요. 먹는 사람 앞에 두고 자꾸 밥맛 떨어지게 그럴래요?”
“미안미안.”
지연은 현정보다 한 살 어렸다. 동그랗고 앳된 얼굴 속에서도 숨겨지지 않는 까칠함이 꽤 인상적이었다. 현정은 턱 괸 채 지연만 구경하던 시선을 고양이 가족에게로 옮겼다. 아장아장 걷는 아기 고양이들이 앵앵 울며 엄마만 찾았다. 젖 물리길 꺼려하는 엄마 고양이의 등가죽에선 뼈 윤곽이 그대로 나타났다. 여기 뷰 좋다며. 한강도 없고 야경도 없고. 얼핏 봤을 땐 귀엽기만 할 고양이들이었지만 자세히 들여다보고 있자니 한 가족의 비극을 보는 듯했다. 쟤네 얼마 못 가 죽을걸요. 마침 지연이 살벌한 내레이션을 던졌다. 그런 말 하면 밥맛 안 떨어져? 지연은 끄덕이며 떡볶이를 두 개씩 입에 넣고 오물거렸다. 근데 왜 갑자기 반말해요? 내가 언니잖아.
“그러면요, 언니.”
“……”
“천만 원만 깎아주면 안 돼요?”
“에이……”
“천 개월 할부는요?”
“글쎄당.”
지연은 이번엔 현정 대신 떡볶이를 노려보며 입을 꾹 다물었다. 왜 자꾸 얘가 당한 표정을 짓지? 다친 건 내 찬데. 천만 원쯤이야 현정 입장에선 안 받고 넘겨도 통장에 기별도 안 갈 액수였지만 어쨌든 당장은 안 됐다. 조금씩 깎아줄 명목으로 만남 횟수를 늘려야지. 지연의 호감도 사 볼 생각이었다. 지연의 얼굴이며 꼬라지며 깡다구며 현정에겐 흥미로운 것 천지라서. 너 번호 바꾸고 튈 건 아니지? 저 그런 애 아니거든요? 지연이 눈썹을 매섭게 세우며 반박했다. 아님 말구.
밤이 길어지는 계절이었다. 둘이 분식집을 나왔을 땐 노을도 없이 깜깜해져 있었다. 어. 너 무릎에 떡볶이 소스 묻었다. 그 말에 지연은 구십 도로 허리 숙여 제 무릎을 살폈다. 여전히 붕 떠 있는 지연의 머리 꼭대기가 현정의 눈에 거슬렸다. 거슬리면 궁금해지고 궁금한 건 자꾸 들여다보게 되니까. 또 허리 꼿꼿이 펴고 나왔구나. 현정이 그 위에 손바닥을 살짝 대고 누르자 정수리 끝이 얌전해졌다. 이거 소스 아니고 핀데. 피? 무릎에서 난 피요. 바닥에 쓸린 듯 다 헤져있는 지연의 츄리닝 무릎 부분에 새빨간 피가 묻어 나왔다.
“안 아퍼?”
“추워요.”
현정은 긴팔이라 벗어줄 게 없었다. 너 하나두 안 아프고 안 추워 보여. 그렇게 말하고 근처의 약국을 찾았다. 지연의 얼굴만 보면 하나도 안 아파 보이는데 무릎에선 피가 철철 났고, 안 추워 보이는데 춥다고 말했다. 현정은 제일 비싼 겨울 왕국 반창고와 후시딘을 사서 지연에게 건넸다.
“너가 발라.”
첨부터 너무 진도 빼지 않기. 적당히 멋진 척하기. 지연은 먼지 쌓인 실외기 위에 다친 다리를 탁 올리고 바지를 걷었다. 이런 예쁜 거 첨 붙여 봐요. 그 말을 하는 지연의 눈이 진심 같아서 현정은 좀 신기했다. 유치해서 싫어할 줄 알았는데 의외네. 그래서 너무 오래 쳐다봤나. 왜요. 불쌍해 보여요? 지연의 입에선 고맙단 말 대신 날 선 말이 돌아왔다.
“어? 아니……”
현정은 융통성 있게 거짓말했다. 불쌍한 것도 없잖아 있지만 너 예뻐서. 그 말도 삼키고 딴 말을 했다. 그거 다 만 원이야. 너 만원 더 빚졌어. 지연은 입술을 샐쭉하게 내밀며 발을 내렸다. 무릎 위로 돌돌 말려있던 츄리닝이 그대로 정강이까지 흘러내렸다. 현정은 이번엔 정수리가 아닌 한쪽만 말아 올라간 지연의 바짓단이 거슬렸다. 지연은 끝까지 내리지 않고 걸었다. 어느새 현정의 차가 세워져 있던 골목 초입에 다다랐다.
“아무튼 견적 나오면 연락할게.”
“최대한 늦게요. 알죠?”
지연은 농담 비스무리한 말도 무표정으로 던지곤 휙 뒤돌아 골목길 사이로 쏙 들어갔다. 튈 것 같은 낌새는 전혀 없어서 집까지 따라가 보려다 말았다. 고맙단 말도 잘 가란 말도 듣지 못한 게 현정은 못내 서운했다. 춥다면서. 한쪽 발목을 훤히 드러낸 지연의 뒷모습이 가파른 경사를 따라 점차 사라져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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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심받길 좋아하는 천성은 아니었지만 현정의 팔자가 그랬다. 일곱 살 때부터 포털 사이트 검색창에 '박말순'만 쳐도 이미지 결과에 손녀인 김현정 얼굴까지 딸려 나왔다. 가업의 중요한 행사가 아니더라도 놀러 간 놀이공원, 공부하러 간 학원에서 찍힌 사진도 올라왔다. 중학교 땐 별명이 박말순이기도 했다. 학교 졸업사진과 함께 '연예인급 미모를 가진 재벌집 딸' 등의 헤드라인으로 기사가 나기도 했다. 일반인인 현정에겐 무례한 스포트라이트일 때도 있었지만. 유난히 무신경했던 어린 김현정은 머리가 커가면서 점차 즐겼다.
보고 싶었어. 웰컴 투 코리아. 사랑해. 어서 와!
귀국을 축하하는 수많은 플래카드가 입국 게이트 앞을 채웠다. 루이비통 캐리어를 끌고 오던 현정이 썬글라스를 벗으며 웃자 군중이 조금씩 웅성거렸다. 동시에 뒤에서 나오던 한 톱스타가 전방을 향해 입맞춤 날리자 확신에 찬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꺅. 꺅. 모두의 찬사가 그녀만을 향해 쏟아졌다. 김현정은 순식간에 스포트라이트 바깥으로 밀려났지만 뿌듯한 입매를 유지하며 유유히 사라졌다. 자신의 연예인 뺨치는 미모로 잠시나마 누구지? 누구지? 하는 시선 몇 개를 즐겼으면 된 거다.
현정은 거의 한 달에 한 번꼴로 일본에 들렀다. 가장 좋아하는 KYK 돈가스 먹으러. 한국에선 그만한 돈가스 집을 찾지 못했다.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 집만큼 맛있는 샐러드 소스가 없었다. 일본에 가있던 동안 미뤄뒀던 카톡은 전부 엇비슷한 내용이었다. 과제했니. 과제했냐. 과제했어요? 나 과제 다 했다. 그리고 그 카톡 주인들의 최종 목표마저 같았다. 김현정한테 과제 넘기고 선물이나 비싼 밥 얻어먹기. 현정은 그 중에 한 명을 골라서 과제를 받았다. 주로 과탑 아니면 과탑이었던 애.
유일하게 다른 내용은 거의 도연의 카톡뿐이었다. 언니. 한 번만 더 빠지면 에프각. 현정이 도연에게 전화를 걸자 시시콜콜한 잔소리가 쏟아졌다. 시험은 어떡하려구요? 괜찮아. 나 머리 좋아. 아무튼 오후 수업은 나올 거죠? 근데 나 시차 때문에…… 일본엔 시차 없잖아요. 언니가 심적으로 쫌 그래……
현정은 진짜 쫌 그랬다. 새어나가는 등록금보단 강의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더 아까웠다. 돈을 벌려면 일해야 되고, 일하려면 뭔가를 배워야 하지만 현정은 그럴 필요가 없으니까 말이다. 이미 가질 걸 다 가졌는데.
할머니는 종종 현정의 나태와 안일을 나무라기도 했지만 현정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이 세상에 맛있는 음식이며 아름다운 명소가 얼마나 많은데, 죽기 전에 그런 걸 다 겪으려면 평생 돌아다녀도 모자라다니까요? 하면서 나름 세계 일주가 꿈인 사람처럼 그럴싸하게 대꾸했다. 그래서 현정이 진짜 여행을 좋아해서 곳곳을 누비고 다니느냐면 그것도 아니다. 귀찮아서, 어딜 가든 호텔 침대 속에만 푹 꺼져있었다.
그래도 현정의 꿈을 말해보자면 안 먹어본 돈가스와 안 누워본 호텔 침대를 정복하기 정도. 그리고 당장의 꿈은 김지연이 전화를 받았으면 좋겠단 거.
수하물 찾고, 톱스타 놀이하고, 모범택시를 타고, 집에 도착할 동안. 현정은 지연에게 무려 열세 통의 부재중을 남겼다. 견적 나옴. 전화 왜 안 받아? 김지연씨 폰 아닌가요? 내 천만 원. 문자까지 보내는 족족 전부 씹혔다. 요즘 시대엔 오히려 상대의 번호만 모르지, 그 밖의 연락수단은 차고 넘쳤으나 현정이 지연에 대해 아는 거라곤 받지 않는 번호밖에 없었다.
키티 슬리퍼 신는 애. 100원 벌려고 병 줍는 애. 어디서 찾지.
고심 끝에 현정은 경찰서 대신 둘이 처음 마주쳤던 장소로 향했다. 한 블록 더 걸어가자 지연이 말했던 슈퍼가 언덕길 코너에 딸려 있었다. 없는 게 더 많은 것 같은 만물 슈퍼. 기울어진 경사면에 있다 보니 가게 전체가 금방이라도 앞으로 쏟아질 것 같았다. 현정은 바깥 냉장고에서 아이스크림을 꺼내 슈퍼 안으로 들어갔다. 계세요. 가게 내부엔 들어갈수록 완만한 계단까지 동반됐다.
드르륵. 안쪽에서 미닫이문이 열리고 슈퍼 주인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말했다. 칠백 원. 현정의 지갑에서 오만 원 권만 나오자 주인의 눈초리가 싸늘해졌다. 현정은 주춤거리다 가게 밖으로 나갔다. 이내 아이스크림 열댓 개를 두 팔로 잔뜩 안고 들어왔다. 주인의 얼굴이 환해졌다. 현정은 빵빵해진 비닐봉지 두 개를 받아들며 물었다. 여기 소주병 파는 여자애 안 와요? 걔는 왜. 아니, 뭐 볼 일이 있어서……
“아가씨, 빚쟁이는 아니지?”
“……에이. 당연히 아니죠.”
뜨끔. 현정은 일부러 더 서글서글한 티를 냈다. 제가 어딜 봐서 빚쟁이예요. 이렇게 예쁜데. 그치. 난 아가씨 첨에 딱 들어오는데 탤런트인 줄 알았네. 그 말에 현정이 호탕한 미소를 지었다. 그러다 아주머니의 한탄까지 모두 들어줘야 했다. 이 슈퍼에 드나드는 사람들 중 잘 차려입은 사람들은 십중팔구 빚 받으러 온 사람이야. 그리고 빚쟁이들이 찾는 사람들 중 태반이 우리 동네 사람이고, 다 내 단골들이었어. 아주머니는 그들의 추궁을 토로하며 몸서리쳤다. 현정은 다 먹은 하드 막대만 쪽쪽 빨았다.
“그래서 지연인 언제 와요?”
“지연이가 누구야.”
“병 팔러 오는 애요.”
“아, 걔? 몰라.”
“……아시는 거 아니었어요?”
“내가 그걸 어떻게 알어. 아무튼 글쎄, 그러다 보니 내 입장에선 또……”
틈을 주니 아주머니의 일방적인 수다가 쏟아졌다. 그렇게 현정은 십 분을 더 듣다 나왔다. 빚으로 시작해서 빚으로 끝나는 이야기. 평상에 걸터앉아 물렁해진 아이스크림 하나를 더 꺼내 먹었다. 거기서 하염없이 시간을 보냈다. 하나 둘 켜지기 시작하는 골목의 가로등 빛들을 지켜보면서.
오르막길을 올려다보면 아슬아슬하게 구색을 갖춘 낡은 집들이 다닥다닥 붙어있었고, 바로 옆 동네엔 지어진 지 얼마 안 된 고급 아파트들이 반듯하게 솟아있었다. 마치 두 동네가 서로 다른 세상인 것처럼 경계선으로 구분된 것 같았다. 동호대교를 지나가는 지하철 소리. 계단 난간에 쏟아져있는 쓰레기봉투들. 젖은 흙먼지에 찍혀 있는 발자국들. 현정은 살면서 마주하기 드물었던 것들이 사방에 가득했다. 구리고 후미진 조명, 온도, 습도. 사람들이 꾸역꾸역 살아가는 냄새.
전화가 왔다. 지연에게서.
“여보세요?”
“……”
“김지연?”
“왜 거기 있어요?”
핸드폰 너머 들려오던 지연의 목소리가 점차 커졌다.
“설마 계속 기다린 건 아니죠?”
저 멀리서 멀쩡한 운동화를 신고 걸어오는 지연이 현정의 시야에 잡혔다. 제 몸보다 품이 큰 맨투맨에 얇은 순면 츄리닝 바지를 입고 있었다. 저번엔 단단히 묶여있던 머리는 등허리까지 길게 내려와 있었다.
“왜 전화 안 받았어?”
“바빠서요.”
무덤덤한 대답에 현정은 겸연쩍었다. 날씨가 좀 추워진 것 같아 두 팔을 쓸어내렸다. 아, 그래? 일단 수긍하고는 수리 비용 청구서를 꺼내 흔들었다. 장난기 서린 웃음을 지으면서. 그와 반대로 피곤에 찌든 지연은 그대로 평상을 지나쳐 걸어갔다. 너 그렇게 가면 안 되지. 곧바로 현정이 따라붙었다.
“나 되게 오래 기다렸어.”
“……되게 빚쟁이처럼 말하네요.”
“빚쟁이들이 이렇게 말해?”
“네. 근데 언니도 빚쟁이 맞죠, 뭘.”
“……”
자기가 내 차에 병 던진 거면서…… 삐죽 입을 내민 현정은 들고 있던 청구서를 겉옷 주머니에 아무렇게나 꾸겨 넣었다. 점점 좁아지는 언덕 끝에 다다르자 거의 수직을 이루는 계단이 눈앞에 펼쳐졌다. 남산타워 계단보다도 훨씬 높고. 저 끝까지 오르면 하늘에 닿을 것 같았다. 한 계단 올라간 지연이 휙 뒤돌아서 말했다. 집까지 따라오게요? 앞으로 고쳐 멘 백팩에서 뭔가를 꺼내 현정에게 건넸다.
“돈. 일단 오늘은 이거.”
다 해서 만 원짜리 열 장이었다. 현정은 할 말 없이 받아들었다.
안 갚을 줄 알았는데. 뻔뻔하게 안 갚았음 좋겠는데. 현정은 돈 따위는 받을 생각이 없었다. 지연의 주머니에서 나온 거라면 더더욱. 뼛속까지 예민한 표정만 지으면서 존댓말은 꼬박 쓰는 지연. 또 나쁜 사람이 되어 덩그러니 남겨지는 기분. 그때처럼 인사 없이 가 버리는 뒷모습을 물끄러미 보고 있던 현정이 다시 지연을 따라 올라갔다. 저기.
“더 없어요, 지금은.”
“아이스크림 먹을래?”
“……뭐 있는데요?”
와서 골라 봐. 현정은 가로등 불빛이 가장 환한 곳에 봉지를 가져가 열어 보였다. 뭘 이렇게 많이 샀대. 봉지 속을 뒤적이며 열심히 고르던 지연이 말했다. 다 녹았잖아요. 다소 실망이 묻은 목소리였다. 빛나던 눈도 금세 식었다. 미안…… 현정은 벌써 지연에게 두 번째 사과했다. 현정의 어깨가 축 늘어졌다. 빈손으로 빼는 지연의 손목 근처에서는 엘사 얼굴이 슬쩍 보였다.
“다쳤어?”
지연은 대답 않고 화제를 돌렸다.
“진짜 집까지 오게요? 빚쟁이처럼?”
현정은 후들거리는 허벅지를 붙잡으며 계속 올라갔다. 다리는 아니라고 말하는데 입에선 웅이 튀어나왔다. 후회할걸요? 거의 다 왔는데 모. 지연의 뒷모습에선 지친 기색이 없었다. 저 쪼그만 체구가 죄다 돌로 만들어진 거 같애. 반면 현정의 팔다리는 물에 데친 것 마냥 흐물흐물해졌다.
안 보이던 마지막 계단이 보였다. 드디어 평지. 으아아. 현정은 검정 봉지 내려놓고 스트레칭을 했다. 대박이다. 너는 맨날 어떻게 다녀? 바닥에 닿을 것 같았던 하늘은 또 다른 언덕길 위로. 그리고 지연도 성큼 더 높은 곳 위로 올라가 있었다.
“뭐 해요? 더 가야 돼요.”
“어?”
“이제 반 왔어요.”
그때 현정은 왠지 모르게 이런 생각이 들었다. 자기보다 키도 작고 손도 작은 지연과 어쩌다 맞짱을 뜬다면 자신이 질 것 같다는 생각. 그리고 여기서 더 올라가면 자기 집으론 못 돌아갈 것 같단 생각. 언제든지 돌아갈 힘 남겨두며 느긋하게만 살아왔으니까. 나는 걍 가야겠다. 통금 땜에…… 현정이 말했다. 미안. 습관처럼 뱉은 세 번째 사과와 함께.
그러자 지연이 살포시 웃은 것 같았다. 싱거운 손 인사를 끝으로 현정은 왔던 길을 내려갔다. 그래서 손목은 왜 다쳤지? 눈 쌓인 날엔 어떻게 내려가지? 밤엔 혼자 안 무섭나? 이런저런 물음들이 현정의 머릿속에서 끊이질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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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하자면 환상이랄 게 없었다. 현정에게는. 누군가 꿈꾸는 영화 속 낭만들이 멀리 갈 필요 없이 자신의 침실과 정원에 있었다. 사십 평짜리 드레스 룸. 동해바다 대신 몰디브. 늘 구하기 쉬웠던 한정판. 아낌없이 받는 친절과 환대. 중학교 다닐 때 쥐샥 아닌 까르띠에를 손목에 찼고, 남들이 나이키 사듯 구찌를 샀다. 사실 현정은 자신이 상위 0.1퍼 상류층이란 걸 어릴 땐 자각하지도 못 했다. 다들 그렇게 살고 있는 줄 알았지.
없어도 되는 거. 있으면 좋은 거. 이를테면 그런 것들을 누리는 게 큰 차이 아닐까. 현정의 생각이 그 정도 선에서 그친 적도 있다. 좋게 말하면 겸손, 나쁘게 말하면 철부지. 세상 물정 모르는 우물 안 개구리. 물론 현정의 우물 안은 밖보다 더 컸으니 섣불리 꼬인 시선들엔 어느 정도 신경을 껐다. 현정은 직업에 귀천이 없단 것도 알고, 함부로 남을 무시하면 안 되는 것도 알았다. 분수에 맞게 살되 그만큼의 윤리적 의무를 다 해라. 노블레스 오블리주. 귀족도 아닌데 알파벳 모르고 아장아장 걷던 시절부터 할머니에게서 귀에 못 박히도록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 첫사랑한테 배신당했을 때 딱 한 번 망나니처럼 굴었지만.
천상천하 유아독존 안하무인. 딱 이 세 단어면 웬만한 한국 드라마의 상류층 캐릭터 설명이 가능하지 않나. 한국인들은 개천에서 용 나는 스토릴 지독히 사랑하는 게 분명했다. 결말에서의 부자들은 개과천선한 주연이거나, 모든 걸 잃게 된 악역 및 조연이었으니까. 현정은 그런 드라마들을 딱 질색했다. 부자들은 돈이면 다 되는 줄 알며 상대를 무시한다는 등의 프레임을 씌워 부자 이미지를 몽땅 망쳐놨으니까.
'그래서 지연이 날 싫어하나?'
현정은 문득 그런 생각을 했다. 자주. 아침에 일어나자마자 알 배긴 허벅지를 주무르면서. 후식으로 죠리퐁 라떼를 마시면서. 오늘 신을 신발에 어울릴 양말을 고르면서. 지연에게 문자로 오늘두 바빠?를 전송하면서. 빨간 신호등 앞에 멈춰있을 때에도. 세 시간 뒤 지루한 강의실에 앉아있을 때에도. 답이 또 안 와서.
생각해보니 그저께 지연이 웃은 게 아니라 바람 소리였던 것 같애. 헤어질 때 나만 손 흔든 것 같애. 내가 너무 물렁히 대했나. 날 만만히 여기나. 현정은 지연이 자길 무시하는 것 같단 생각도 들어 자존감이 시들시들했다.
“언니. 그거 들었어요?”
“뭐?”
“이제 스마트 출석제 도입한대요.”
“그게 뭔데?”
“이제 대출도 못 한단 말씀.”
캠퍼스 라이프의 절반이 대출이었던 현정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매일 서울의 교통체증으로 통학조차 힘든 일이었으니까. 학교에서 돈으로 못 사는 거. 졸업장, 그리고 '김현정이 웬일로 학교에 다 행차해주셨대? 얼굴 까먹겠어. 허허.' 하면서 비꼬고 지나가는 전공 교수의 환심. 3년 반째 2학년인 휴학 마스터 김현정의 가장 큰 고민이었다. 탐탁잖게 여기는 할머니 눈치도 슬슬 보여서 환기가 필요할 때.
그때. 뭔가가 현정의 뇌리를 반짝이며 지나갔다. 도랑 치고 가재 잡고 현정 좋고 지연 좋은 일. 현정은 지연에게 다시 문자를 보냈다. 너 알바 하나 할래? 그러자.
「뭐데요?」
네 시간을 씹던 지연에게서 니은 빠진 답장이 오 분 만에 도착했다. 피식. 현정의 입에서 어이없는 웃음이 샜다. 이렇게 금방 보낼 수 있었어? 현정이 곧바로 통화 버튼을 누르자 이어지는 지연의 목소리는 좀 다급해 보였다. 여보세요? 너 어딘데, 지금? 잠깐만요. 저 지금 바빠요. 전화는 십 초도 안 되어 뚝 끊겼다.
당황스러웠다. 어딜 가나 우선적으로 대우받던 현정은 이런 취급이 난생처음이라서. 화는 안 났지만 서운해서 웃음도 안 났다. 현정의 마음 한구석이 제멋대로 부풀어 올랐다. 더 커다란 호기심으로. 날 거들떠보지 않는 여잔 처음이야. 어떻게 하면 지연의 마음에 들 수 있을까. 유치찬란한 소설 속 주인공의 건방으로. 어떻게 하면 웃게 만들 수 있을까. 천진한 오기로.
다음 강의가 시작할 때까지도 전화가 안 왔다. 정말 바쁜가? 그러고 보니 얘는 대체 뭘 하고 사는 거지? 학교도 안 다닌다는 애가. 재촉하면 없어 보일까. 현정은 무려 한 시간을 더 고민한 후 다시 문자를 보냈다.
「잉 ㅠㅠ」
너무 귀여운 척했나, 현정은 곧바로 후회했지만 이번엔 답장이 제법 빨리 왔다.
「미앙 이따 저화해요」
현정은 그 짧은 답장을 몇 번씩 들여다봤다. 사과가 이렇게 동그랄 수 있구나. 뭐 빠진 게 이렇게 좋을 수가 있구나, 하고. 핸드폰을 오래 쥐고 있던 탓에 손바닥이 미지근해졌다.
저녁을 훌쩍 넘긴 시간. 현정은 이번엔 만물슈퍼 평상이 아닌 북적거리는 한 족발집 안에서 마냥 기다렸다. 지연을. 네, 나가요! 어, 네 분이시면 대 자가 좋죠? 지연은 새우젓이 말라붙은 남색 앞치마를 두르고 빠릿빠릿하게 뛰어다녔다. 제 발보다 훨씬 큰 손님용 화장실 슬리퍼 신고, 남아도는 뒤축을 팔랑거리며.
현정은 또 관찰했다. 손님 앞에서도 잘 웃지 않는 지연을. 진짜 안 웃어주네. 그러다가도 서비스 상 활짝 웃는 걸 목격하면. 쟤 저렇게 웃을 줄도 아네. 시시각각 속으로 사족을 달면서. 술 취한 남자 손님이 지연에게 얄궂게 굴면 현정은 속이 타들어갔다. 당장 가서 해줄 수 있는 게 없어서. 다행히 지연은 꾹 참고 만들어낸 웃음기로 상황을 익숙하게 넘겼다. 현정이 신기해서 눈을 끔뻑 감았다 뜨면 지연의 웃음기는 온데간데없어지기도 했다. 환상을 본 것처럼.
열한 시가 되자 지연은 앞치마를 벗고 나왔다. 왜 자꾸 사서 고생해요? 그러게. 왜 기다렸지? 현정은 삐친 투로 답했다. 지연이 기다려달라고 한 건 아니었지만 기다려줘서 고맙단 말도 없어서. 가난하면 싸가지도 가난한가? 아, 이런 생각 하면 안 되지. 현정은 고갤 젓고 웨이팅 석에서 일어났다. 그래도 이번엔 현정과 나란히 걸으며 일행 취급해줬다. 현정은 한 시간 내내 앉아만 있기 뭐 해서 포장했던 족발 대 자를 지연에게 건넸다. 너 먹어.
“왜요?”
“나 족발 싫어해.”
“싫어하는데 왜 샀어요.”
“……너도 싫어? 싫음 말구.”
“그건 아닌데.”
지연은 여전히 의심의 눈초릴 내밀면서 포장 봉지를 거둬갔다. 눈가에 미묘한 화색이 돌았다. 현정은 이제 대강 알 것 같았다. 지연이는 먹는 걸 좋아해. 떡볶이, 아이스크림, 족발. 또 뭘 좋아하지? 하나씩 다 사줘 볼까. 쉽지만 어려울 것 같은 상상들이 머릿속에 돌아다녔다.
그래서 무슨 알반데요? 지연이 물었다. 근처에 세워둔 람보르기니 앞에 다다랐다. 타면 말해줄게. 현정이 말했다. 지연은 새것처럼 말짱해져서 돌아온 차를 한 번 째려봤다. 지연에게 미움받는 람보르기니는 자연스레 지연의 동네로 향했다.
김현정 대리출석 해주기.
현정 딴에선 지연이 무리하지 않고 돈 벌 수 있게 할 최고의 아이디어라고 생각했는데. 지연은 그다지 반갑지도, 그렇다고 싫지도 않은 반응을 보였다. 싱거웠다. 건당 만 원? 이만 원? 조금씩 세게 부르면 웃을까? 현정이 시간표까지 보여주며 말했다. 얼굴 달라도 안 들키는 거만. 세 시간짜리 수업은 알아서 중간에 빠져나와. 못 나오면요? 건당 오만 원. 그쯤 되니 지연의 고개가 끄덕여졌다.
“대신 족발집 그만둬.”
“그건 안 돼요.”
“수업 겹치면?”
“저녁 강의는 없던데요?”
김지연 만날 빌미 만들기. 대출 해결하기. 두 마리 토끼는 잡았지만 족발집 진상 손님들로부터 김지연 떼어내기는 실패였다. 그럼 그건 차차 생각하기로 하자.
“차 뚜껑 좀 닫으면 안 돼요? 추운데.”
“어, 미안.”
“노래도 좀…… 정신 사나워요.”
“미안……”
엑셀과 함께 밤공기를 질주하던 노래도, 앞머리를 까뒤집으며 지나가던 바람 소리도 모두 사라지고 조용해지자 지연은 도착할 때까지 고개를 끄덕이며 졸았다. 아늑한 차 내부에 기름 진 족발 특유의 잡내가 풍겼다. 차가 멈추자 지연은 귀신처럼 눈을 번뜩 떴다. 예민한 성격만큼 잠귀도 밝아 보였다. 다 왔어. 이거 족발 꼭 가져가. 차에 냄새 배니까…… 현정이 봉지의 손잡이 부분을 벌려 지연에게 건넸다.
“언니.”
“응.”
“나한테 돈 받을 생각 없죠.”
“아아아니?”
“혹시…… 나한테 관심 있어요?”
그걸 벌써 알았나? 그리고 대놓고 묻는다구? 현정의 목울대가 움찔거렸다. 당연하지. 평소라면 기회를 덥석 물고 늘어졌을 현정이었지만. 아직은 간이 덜 된 타이밍이라 판단해 신중을 기했다. 어중 띠는 모습을 보이고 싶진 않았다. 조금 세게. 지연과 같은 무표정으로.
“왜 그렇게 생각해?”
“왜 자꾸 핑계 대면서 잘 해주냐고요.”
“핑계 아닌데?”
“아님 뭔데요?”
“……난 원래 그래. 내가 좀 다정해.”
“……”
“착해서 그래.”
착해서라니. 자신이 생각해도 재미도 멋도 없는 대답이었다. 들키기 싫어 덮어두려다 그 위에 더 엄한 걸 덧댄 꼴이었다. 현정은 꼬리가 밟힌 커튼처럼 끝도 없이 말려들어갔다. 알 수 없는 분위기 속으로. 지연은 더 대답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었다. 그게 무슨 표정인지 현정은 감을 못 잡았다.
나두 할 말 있어. 너가 나 무시하는 것 같애. 우리 할머니가 사람 무시하지 말랬는데. 현정은 딴 말로 분위길 바꿨지만. 지연이 부정도 안 하고 가만히 있어서 뭐에 쿡쿡 찔리는 것처럼 속이 따갑기만 했다. 얘 진짜 나 무시했나 보네. 현정은 억울했다. 이래 봬도 평판 좋고 잘나가는 무남독녀 귀한 딸인데.
“오해하지 마. 천만 원 다 받아낼 거야. 대출비로 다 깎을 거야.”
“그럼 나 평생 봐야겠네요?”
“너 예쁜 거 알고 이러는 거지?”
“저 예뻐요?”
진짜 예쁜 거 알고 저러는 게 맞네. 더 이상 당황한 티를 숨길 수 없던 현정은 돌돌 말려 버렸다. 대답 못 하고 차 문의 잠금을 풀었다. 안전벨트를 푸는 지연의 입꼬리가 일순간 말아 올라갔다. 대답 못 하는 게 지는 거였나. 현정이 애초에 지연을 이겨먹으려던 건 아니었지만. 그래도 마음이란 건 다 내어주면 안 되는 거니까.
“그거 알아요? 나 같은 애들은 착하게 굴면 더 망해요.”
지연은 미소를 싹 걷혔다. 찝찝한 한 마디를 붙여놓으면서. 아닌데. 너 같은 애가 나한테 착하게 굴면 뻑 갈 텐데. 현정은 그 말을 못 꺼냈다. 지연이 이미 저 멀리 가버려서. 져줄 걸 그랬나. 예쁘다고 해줄 걸 그랬나.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무딘 칼날 같던 지연의 표정이 거슬렸다.
-
백마 탄 공주가 되는 게 좋았다. 현정은 누군가(예쁜 여자)를 도와주고, 누군가(예쁜 여자)에게 선물을 주고, 누군가(예쁜 여자)의 반짝이는 시선을 받아내면 바로 그게 사는 낙이었다. 당시 옆 주택의 모 남학생 또한 백마 탄 시늉을 하려 온갖 유치한 멘트를 섞어 말할 때 현정은 단 한 마디면 됐다. '자꾸 마음이 가.' 재력을 떠나서 그 남자앤 못생겼는데 현정은 눈빛과 콧대와 입술과 감미로운 목소리가 멘트를 받쳐주니까.
그런데 지연은 어째서 시종일관 무감한 표정으로만 있는 걸까?
현정의 람보르기니 조수석을 차지해도, 신들의 궁전 올림푸스를 빼닮은 아름다운 캠퍼스를 소개시켜줘도, 스마트출석 어플을 깔아야 한다며 백만 원짜리 최신형 스마트폰 공기계를 공짜로 줘도. 도저히 반짝이지 않는 지연의 눈이 신경 쓰였다. 먹을 걸 안 사줘서 그런가. 현정이 폴바셋 가서 아이스크림 먹을래, 물어도 봤지만 추운데 왜 풀밭에서 먹냐는 지연의 답에 현정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렇게 입으니까 춥지. 현정은 잔뜩 핀 단풍과 화려한 분수 풍경을 지나는 지연의 옷차림을 힐끗 쳐다봤다. 한낮의 낭만적인 경관과 야무진 지연의 얼굴에 어울리지 않는 유일한 옥에티. 사실 아까부터 거슬렸다. 허물 같은 갈회색 니트와 밑창이 다 닳은 컨버스의 누추한 조합. 누렇게 변색된 아이보리 에코백 끈에서 화룡점정이었다. 옷이라면 자고로 사람의 날개여야 하는 건데. 그 옷은 지연의 얼굴이란 날개를 달고도 금방 추락할 것만 같았다.
“안 추워?”
“언니 추워요?”
“아니…… 너 말야. 니트가 얇아 보여서.”
“괜찮아요.”
현정이 안 괜찮았다. 아니야. 너 너무 추워 보여. ‘김현정’의 자리를 대신하기에는 조금 부족한 패션이었다. 대출하는데 옷이 무슨 상관이냐는 지연과 본체로서 용납을 못 하겠다는 현정 사이에 짧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우리 집에 예쁜 옷 진짜 많은데. 가서 한 번만 입어보면 안 돼?"
“왜요?”
“그야……”
당연히 좋은 거 입은 널 보고 싶으니까. 촘촘히 짜인 캐시미어 니트를 입으면 안 추울 거고, 버버리 더플코트를 입으면 귀여울 거고, 심플한 금색 로고가 반짝이는 프라다 구두를 신으면 나랑 눈높이가 얼추 맞을 테니까. 대답할 말은 넘쳤는데 이상하게 속에서만 들끓었다. 현정은 헷갈렸다. 원래 상대방을 어떻게 꼬셨더라. 언제쯤 눈을 오래 마주치고 적당한 멘트를 쳐야 했더라. 그런 것쯤은 타이밍 잴 것 없이 척척해냈던 것 같은데. 아냐…… 너 입고 싶은 거 입어. 현정이 쭈뼛거리자 지연은 별안간 웃음을 터뜨렸다. 왜. 왜 웃어?
“그렇게 보고 싶어요?”
“……”
“이대로는 안 예뻐요?”
지연이 한 발짝 가까이 다가왔다. 현정이 두 발짝 물러나며 말했다.
“예뻐.”
붕어처럼 뻐끔. 현정이 기다린 것처럼 대답하자 지연의 웃음은 더 헤퍼졌다. 이렇게 쉽게? 지연이는 먹는 걸 좋아하고 멍청한 걸 좋아하나. 현정은 일단 지연의 휘어진 눈꼬리와 하트 모양 입술을 눈에 주워 담았다. 웃음이 훨씬 잘 어울리는 얼굴. 그 얼굴에서 귀여운 웃음소리가 새어 나올 때마다 현정의 가슴 한 편에 뭔가 번졌다. 그게 뭔지 잘 몰라서 현정은 조금 안절부절. 눈을 느리게 끔뻑거리며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시간이 이렇게 빨리 흐르던 거였나.
멈추고 싶던 그 순간을 깨뜨린 건 모르는 한 남자였다. 저기…… 현정과 지연 앞에 다가와서는 상당히 뜸을 들였다. 현정은 그 남자가 뭔 말을 할지 알 것 같았다. 목소리가 부들부들 떨리거나 눈을 잘 못 마주치면 십중팔구 자신의 미모를 알아보고 번호를 묻는 거니까. 아, 지금은 때가 아닌데. 현정은 거절하려 했지만 남자의 시선은 지연을 향하고 있었다.
“번호 좀 알려주실 수 있나요? 완전 제 이상형이에요……”
“……”
“……”
벙 찐 현정은 어색한 기류가 흐르는 지연과 남자를 번갈아 쳐다봤다. 순간 결정적인 씬에서 배제된 조연이 된 것 같았다. 어딜 가나 세상의 중심에 서 있던 현정은 처음 느끼는 이 기분이 많이 언짢았다. 1. 남자의 얼굴이 꽤나 반반해서. 2. 지연은 거적때기를 걸쳤는데도 명품으로 도배된 자기가 밀려서. 3. 자기는 어렵게 본 지연의 환한 웃음을 저 새끼는 첨부터 쉽게 봐버려서. 그런데 현정이 더 짜증 나는 건 지연이 순순히 자신의 번호를 불러주고 있다는 거였다. 왜. 왜 줘?
“주면 안 돼요?”
“너 저 남자 맘에 들어?”
“내가 이상형이라잖아요.”
네 시간을 맘대로 씹던 애가 이렇게 쉬울 줄 아는 애였어? 남자라서 좋다 이건가? 현정은 종잡을 수 없는 지연의 태도에 말문이 막혔지만 왈가왈부할 입장이 아니란 건 알았다. 너무 참견하면 오지랖이라고 싫어할까 봐. 내가 먼저 찜했는데. 유치한 마음. 나도 네가 이상형인데. 간지러운 말. 사락사락. 한철 꺾여 바닥에 내려앉은 낙엽들이 현정의 발에 밟혔다. 코린트 양식 건물을 배경으로 둔 지연의 얼굴이 한없이 유구해 보였다. 현정은 시무룩해지는 입모양을 숨기고 말했다. 그래. 잘해봐라.
“어디 가요?”
“몰라.”
“캠퍼스 안내 안 해줘요?”
“그 남자한테 해달라고 하지 왜. 그럼 엄청 좋아할 텐데.”
현정이 내쉬는 한숨에 앞머리가 나불거렸다. 어딜 갈 생각은 없었으니 걸음이 느렸다. 한 번만 더 언니를 부르면 바로 뒤돌 생각이었는데 뒤통수가 안 따가워서 문제였다. 현정은 벌써 분수 광장을 지나 오르막길까지 와버렸다. 왜 안 잡지? 진짜 그 남자한테 가버리면 어떡하지? 스멀스멀 올라오는 분한 감정에 미간을 잔뜩 찡그렸다. 천만 원 갚으려면 평생 봐야겠다며. 내가 얼마나 잘해줬는데. 내가 이렇게 예쁜데. 이제 와서 되돌아가기엔 너무 늦어버렸나. 씨……
현정의 벨 소리가 울렸다.
“언니.”
지연이었다.
“그만 올라가면 안 돼요?”
“왜.”
저 그 남자한테 공일공으로 알려줬어요.
현정은 신이 지연에게서 돈과 싸가지를 뺏는 대신 자길 갖고 노는 천부적인 재능을 준 게 틀림없다고 생각했다. 화는 녹아 없어지고 웃음만 슬슬 삐져나와서. 현정이 애써 무던한 얼굴을 만들어 뒤돌자 저 멀리서 자신을 보고 있는 지연과 눈이 마주쳤다. 가파른 달동네가 아닌 평평하고 환한 길 위에 서 있는.
-
이주동안 지연이 열심히 출석 찍어서 번 돈은 고작 오십만 원이었다. 그마저도 지연의 지갑으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마이너스 천만 원을 갚는 돈이었다. 이미 둘 사이에선 암묵적으로 사라진 빚이기에 오히려 현정이 부려먹는 느낌이 강했다. 지연을 백마 위에 태운 게 아니라 백마로 만들어버린 것 같았다. 이게 아닌데.
현정은 마음만 같아서는 지연에게 조건 없이 현금다발을 쥐여주고 싶었다. 쌀쌀해져가는 날씨에 알맞은 옷들을 선물해주고 싶었고, 서울의 모든 건물이 한눈에 보이는 고층 빌딩 레스토랑에서 함께 식사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럴 사이가 아닌 데다 명목을 만들기란 쉽지 않았다.
고디바 초콜릿 아이스크림을 사주러 들어가면, 가격표를 확인한 지연으로부터 고마움의 표시보단 이상한 눈초리를 받는 게 현실이었기 때문이다. 왜 이런 걸 그 돈씩이나 주고 사 먹냐고. 그럼 현정은 할 말이 없었다. 있어도 하지 않는 게 나름의 철칙이었다. 지연의 자존심(또는 성질머리)을 건들고 싶지 않았고, 편의점에서 산 쌍쌍바 하나를 떼어먹으며 손끝을 부딪히는 등 더 나은 결과를 가져왔으니까.
정작 지연은 가짜 대학생 생활에 만족하는 눈치였다. 공부할 공간이 생겼다는 게 지연에겐 큰 메리트였다. 해가 지면 어두워서 글씨를 못 읽는 집 안에서 켜는 전깃불 값조차 아까운 돈이었다. 지연은 출석이 끝나고도 자리에 꼭 붙어 앉아 교수의 강의를 듣거나 다른 공부를 했다. 현정의 학생증을 빌려 도서관 출입도 자유로웠다.
“오늘은 왜 왔어요? 전공도 없는데.”
“그…… 오늘 경제학 시험 아닌가? 시험은 내가 쳐야 되잖아.”
“오늘 아닌데.”
“아, 인가탐 시험이다.”
“어제였죠. 설마 안 간 건 아니죠?”
“……”
지연이 대학교에 있는 시간이 늘어날수록 현정이 학교에 나오기 위한 핑계도 늘어났다. 그리고 그 핑계들은 열에 아홉이 헛소리였고, 현정은 필수 교양 삼수강 확정에 한 발짝 가까워지고 있었다.
둘은 함께 강의실에 들어섰다. 지연이 말하길 교수님이 사담을 재밌게 하셔서 가장 들을만한 강의라고 했다. 돈은 다 빚에서 생기는 거래요. 은행이 하는 짓은 야바위래요. 지연은 요즘 강의에서 주워들은 것들을 쫑알거렸다. 현정은 대꾸를 해주면서도 흘려들었다. 늘 예민해 보였던 지연의 눈이 반짝이는 걸 처음 봐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 나이대의 대학생 같아서. 지연이 대학생이라면 팀플도 과제도 척척 잘 해낼 것 같았다. 지연과 사이좋게 학교에 다니는 선후배 사이라면 좋았을 텐데.
“짜증나는 거 있죠. 따지고 보면 있지도 않은 빚을 내가 물려받았다는 게.”
“……”
“듣고 있어요?”
“어? 어.”
“내가 뭐라고 했는데요?”
“너가…… 뭘 물려받았어.”
“뭘?”
“……돈?”
퍽이나. 지연이 콧방귀를 뀌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현정에게서 좀 등을 돌려 앉은 것 같기도 했다. 근데 너 요즘 반말 잘 한다? 마침 교수가 들어와 현정의 말은 자연스레 씹혔다.
대형 스크린 위에 출석 비밀번호 네 자리가 떴다. 지연은 익숙하게 스마트 출석 서버에 들어가 번호를 입력했다. 현정은 어깨너머로 자신의 출석 확인을 지켜봤다. 잘 하네. 오늘 수업은 사담 없이 바로 시작됐다. 시험 문제를 찝어준다는 교수는 이백 페이지에 달하는 범위를 전부 부르고 있었다. 현정은 지연의 가방에서 나왔던 자신의 교재를 슬그머니 제 앞으로 가져왔다. 거시 경제학. 그 위에 네임펜으로 뭔가를 색칠하더니 다시 지연 쪽으로 내밀었다. 거세 경제학. 지연이 웃음을 참았다. 꼭 금방 피어날 것 같은 꽃봉오리처럼.
내 얼굴 좀 그만 봐요. 지연이 들리지 않게 입모양으로만 말했다. 내…… 얼굴…… 도? 단번에 알아차리지 못한 현정은 지연의 작은 입술만 계속해서 바라봤다. 꽃이 필 것처럼. 오므렸다 벌어졌다 하는 그 입술이. 마침내 환하게 웃었으면 좋겠는데. 지연은 마침내 웃음을 참으며 현정의 귀에 가까이 대고 속삭였다.
“그만 쳐다보라니까요.”
설레지도 간지럽지도 않은 지연의 그 한 마디에 현정의 귀가 새빨개졌다. 지연은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교수의 사담이 시작되자 바로 고개 돌려 집중했다. 현정은 지연의 입김이 닿았던 왼쪽 귀를 살짝 매만졌다.
강의실에 앉아있는 시간이 처음으로 아깝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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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는 무작정 김지연을 보고 싶어 했다. 그것도 현정은 며칠을 걸려 깨달은 결론이었다. 처음엔 호기심이 앞서 잴 거 없이 동네와 족발집에 찾아갈 수 있었다면. 이제는 그리움이란 걸 알기에 미련하게 기다리는 짓이 부끄러웠다.
합리적인 이유를 만들고 싶었다. 지연을 보려면 학교에 가거나 집 앞으로 찾아가야 했지만. 차가 막혀 시간 안에 도착하지 못할 때도 있었고, 밤늦게 찾아갈 이유가 도통 생기지 않았다. 얼마든지 새로운 사람들과 드라이브하거나 스테이크를 썰곤 했던 현정이었지만. 나랑 영화 볼래, 한 마디가 지연 앞에선 어려웠다.
게다가 지연은 쉴 틈 없이 바빴다. 벌어놓은 돈이 대체 왜 없나 싶을 정도로. 아침엔 김밥을 팔고 낮엔 대학교에 들렀다가 저녁엔 족발을 팔았다. 집 가서 뭐해? 물으면 머리끈에 큐빅을 박는다고 했다. 주말엔 뭐해? 물으면 오전엔 커피를 팔고 오후엔 돈가스를 판다고 했다. 자꾸 뭘 그렇게 팔지? 지연의 인생엔 취미도 휴식도 없는 것 같았다. 지연의 허리와 팔뚝은 티브이에 나오는 웬만한 아이돌보다도 더 가냘픈데. 온종일 돌아다니면서도 집까지의 가파른 언덕길을 오르내린다고 하니 접때 완주조차 못하고 다리가 후들거렸던 현정의 눈엔 기이할 따름이었다.
여느 때보다도 무료한 주말이었다. 발리오스 승마클럽에 나가 멋진 백마를 타고 달릴 수도, 제주도 애월에 있는 전용 별장에 놀러 가 탁 트인 바다 전망을 바라보며 늘어질 수도 있는 주말의 한낮. 현정은 방 침대에 누워 100인치 티브이 스크린을 가득 채운 구준표 얼굴이나 보고 있었다. 상류층 드라마라면 질색이었지만 자꾸 찾아보게 됐다.
그런 걸 보면 배울 수 있을까 싶어서. 지연과 함께 사랑에 빠지는 방법을.
구준표는 헬기에 금잔디를 태우고 하트 모양 섬이 보이는 곳으로 날아가 ‘보이냐, 내 마음?’ 이러고 있다. 람보르기니로는 안 되는 걸까? 전용 헬기라도 있어야 되나? 현정은 진짜 거기까지 심각하게 고민했지만 금잔디의 썩은 표정에 지연의 얼굴이 겹쳐 보이자 티브이를 껐다. 이럴 게 아니라 뭔가 생산적인 행동을 해야겠다고 결심했다.
어제저녁부터 대화가 끊겨있는 지연과의 카톡 방에 들어갔다. 분명히 돈가스집 이름을 말한 거 같아 날짜로 검색했다. '머거바돈까스’ 찾았다. ‘오기만 해봐요’ 그 답장은 무시했다. 3주 동안 주고받은 메시지가 은근 많아서 다시 읽어보는데 스크롤을 꽤 내렸다. 할 땐 몰랐는데 이제 보니 정말 바보 같고 쓸데없는 말을 많이 보냈네. 현정은 메시지의 시작과 끝맺음이 늘 자신이었단 것도 되새겨 버렸다.
막 타는 차, 벤츠. 품격 있고 싶을 땐, 롤스로이스. 질주하고 싶을 땐, 람보르기니. 현정은 거기서 롤스로이스를 골랐다. 근사한 데이트를 하기로 마음먹었으니까. 유리 진열장에 가지런히 진열된 수많은 시계 중 81개의 다이아몬드가 박힌 가죽 시계를 손목에 찼다. 수많은 셀럽들이 사랑하는 아크네 무스탕을 입고, 옵션을 줄줄이 달아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에르메스 버킨백을 걸쳐 본새를 더했다.
이로써 완성된 완벽한 자태. 럭셔리한 아우라.
김현정은 머거바돈까스로 향했다.
쨍한 주황색 간판 위에 그려진 돼지 주방장 캐릭터가 현정을 반겼다. 메뉴와 가격이 다 쓰여있는 유리창 너머로 지연의 얼굴이 보였다. 딸랑. 현정이 문을 열고 들어갔다. 어서 오세요! 기계적으로 나오는 지연의 목소리가 여태 현정이 들었던 것 중 제일 밝았다는 게 영 껄끄러웠다. 어? 자신을 발견하자마자 반가워하기보단 미간부터 찡그렸다는 것도. 안심 돈가스 하나 주세요. 삼십 분 뒤에 브레이크 타임인데 괜찮으시겠어요?
“다 못 먹으면 쫓아내?”
“그러려고요.”
“빨리 먹을게……”
“왜 온 건데요. 나 보려고?”
“아니? 돈가스 먹으려고.”
너 보려고 온 거 맞는데. 지연이 선수 치는 바람에 놀란 현정은 머리와는 다른 말을 뱉었다.
“진짜?”
“나 돈가스 좋아한다고 했잖아.”
“여기 별로 맛없어요.”
“손님한테 그런 말 해도 돼?”
“……”
“내가 먹어보고 판단할게.”
나 주차하려고 이 골목길만 다섯 바퀴 돌았단 말야…… 현정이 불쌍한 표정을 짓자 지연은 그제야 주문을 받아주고 물러났다. 돈가스 크기는 무려 손바닥 두 개만 했는데 가격이 육천 원이었다. 이걸로 마진이 남나? 적당히 달고 깊은 소스 맛은 훌륭했지만 바삭함만 있지 촉촉함이 없었다. 현정이 가장 좋아하는 KYK 돈가스엔 조금도 못 미쳤지만 문제는 그게 아니라…… 한산한 홀 테이블에 자리 잡고는 뚫어져라 보고 있는 지연의 눈길 때문에 현정은 체할 것 같아서 음미할 새가 없었다. 크흠. 현정이 곱게 접은 냅킨으로 입가를 톡톡 두드린 후 일어선 시각은 브레이크 타임 오 분 전이었다.
자, 이제 숨겨왔던 멋진 척을 할 때가 다가왔다.
카운터로 성큼 다가간 현정은 새빨간 악어가죽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며 말했다. 계산하러 온 김지연 말고 사장님에게. 사장님. 여기 남은 돈가스 재료 다 살게요. 그러자 두 눈이 휘둥그레진 사장이 뛰어나와 재차 확인했다. 네. 소스까지 싹 다 주세요. 너무 맛있어서요. 현정이 사람 좋은 웃음을 흘리며 대답했다. 그리고 그런 현정과 현정의 접시에 반 넘게 남은 돈가스를 번갈아 보던 지연이 말했다.
“언니 미쳤어요?"
양손 가득 빵빵한 봉지를 들고 현정은 힘겹게 차까지 걸어갔다. 여간 무거운 게 아니었는데 어쩜 손가락 하나도 뻗어주질 않는 지연이 야속했다. 재료 소진으로 일찍이 퇴근했음에도 지연의 얼굴은 후련해 보이지 않았다. 현정은 그저 반나절이라도 지연과 데이트하고 싶을 뿐이었다. 캠퍼스의 야경이라도 보며 같이 걸을까 하면 지연은 족발을 팔러 갔고, 맛있는 점심을 사줄까 하면 지연은 이미 학식을 먹고 배불렸으니까. 구준표는 금잔디를 위해 화재경보기를 울려 사람들을 다 내쫓고 백화점 통째로 전세를 내던데. 이런 것쯤은 부담 가질 것 없이 애교로 봐주면 안 되나? 언제나 위풍당당했던 현정은 누군가에게 진심을 전할 때 자신이 상위 0.1퍼라는 사실이 걸림돌이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어디서나 선두로만 달려오던 현정이지만 적어도 마음에서만큼 상대와 나란히 걷고 싶었다. 그전에 딱 한 번만 먼저 용기 내볼까. 지연아. 그, 혹시……
“나랑 영,”
“왜 그랬어요?”
“어? 뭐가……”
“그렇게 다 사 버려서 거덜 내는 거요. 혹시 뭐, 내가 좋아해 주기라도 바라는 거예요?”
“너, 너가 나를?”
“아뇨. 알바 일찍 끝난 거요.”
“아…… 그럼 싫어?”
“좋진 않죠. 오늘은 돈 못 벌게 생겼으니까.”
“……”
망한 건가. 돈이 문제라면 내가 얼마든지 줄 수 있는데. 나랑 놀아주면 시급을 몇 배로 쳐줄 수 있는데 그건 조건만남이나 다를 바가 없으니까…… 현정은 가렵지도 않은 목덜미를 계속 긁었고, 나오지도 않은 침을 삼켰다. 사실은 너 보러 온 거 맞아. 나랑 영화 볼래? 지연을 보러 오기 전부터 진작 정해 놓았던 대사는.
“진짜 나 때문이에요? 그걸 다 산 게?”
지연의 얼굴만 보면 얼토당토 없는 대사로 탈바꿈한다.
“아니. 그건 아닌데…… 돈가스가 너무 맛있어서.”
“다 남겼던데?”
“어? 어. 맛있는데 배불러서.”
“……아무튼 나는 그럼 집 갈게요.”
그러면 지연은 멀어지려고만 했다.
“왜?”
“왜요?”
“……나랑 안 놀고 가?”
“나 보러 온 건 아니라면서요.”
“어……”
서로 에두른 말들만 주고받길 거듭했다. 분명 이 안에 용기가 있었던 거 같은데 없어졌어. 답답해진 현정은 애꿎은 돈가스 봉지를 허벅지로 퍽퍽 치며 걸었다. 말이 없어진 둘 사이엔 어수선한 비닐봉지 소리만 오갔다.
낡은 벽돌담 앞. 양쪽 어깨가 슬슬 뻐근해질 때쯤 전봇대 뒤에 세워진 새하얀 롤스로이스가 보였다. 주차할 땐 없었던 국산차 한 대가 롤스로이스 뒤에 바짝 붙어 있었다. 간도 크지. 저거 뺄 수 있으려나? 현정은 묵직한 봉지를 내려놓고 차의 앞뒤를 살폈다. 같이 간격을 재주던 지연도 답이 없다 생각했는지 심드렁하게 말했다. 나는 가도 되죠?
“어? 어딜……”
“집에요. 버스 타고 갈게요.”
“아, 안 돼.”
현정은 차를 못 뺄 것 같아 심란한 마음에.
“나 너 보고 싶어서 온 건데……”
자신도 모르게 썼다가 다시 지워버렸던 대사까지 말해버렸다. 바로 승자의 미소를 띤 지연이 말했다. 우리 뭐 할까요? 현정은 완패했다. 그렇다고 지는 기분이 나쁘지만은 않았다. 지연에게 듣기 좋은 말을 해줄 수 있어서. 너는 내가 안 보고 싶었어? 자신도 듣고 싶은 말이 있었지만 물어봤다간 심장만 왕창 쪼그라들 것 같았다. 듣지 못한다면 서러울 테니까. 품격 있는 롤스로이스 운전석 위엔 싸구려 고깃덩어리가 무더기로 쌓이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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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버스 처음 타 봐. 버스정류장의 안내판을 구경하며 망설이던 현정이 끝내 말했다.
“그거 뭐 카드 같은 거 찍어야 되잖아……”
“교통 후불되는 카드 있어요?”
“되는지 어떻게 알아?”
지연의 얼굴이 못 볼 거라도 본 것처럼 일그러졌다. 손에 꼽힐 정도로 최고 멋지게 꾸미고 나온 날인데. 현정은 주머니 속에 고이 들어있는 차 키만 만지작거리며 동동거렸다. 멀리서 301이 쓰인 파란 버스가 오는 게 보였다. 현정이 지갑의 현금을 뒤적거리자 지연이 한쪽 팔을 잡아끌었다.
“언니. 그게 더 민폐예요.”
“……”
“두 명이요.”
지연이 카드를 찍자 요금 기계는 2500을 띄우며 삑 소리를 냈다. 폼생폼사 김현정의 가오가 뚝 떨어지는 소리였다. 덜컹이는 버스는 험난한 언덕길을 벗어나 동호대교 위를 달렸다. 드라마에서만 보던 장면이라 버스 내에서 직접 바라보는 풍경이 낯설기만 했다. 스쳐 지나가는 창밖의 난간 위로 드넓은 한강이 모습을 드러냈다. 도로 위를 쌩쌩 달리는 데 서서 가다니. 사뭇 심각해진 현정은 빨간 버스 손잡이를 꽉 잡고 버텼다. 언니 겁이 많아요? 지연이 놀리듯 물었다. 작은 얼굴을 내려다보니 미묘한 웃음기가 섞여 있었다. 기사 아저씨가 운전을 좀 난폭하게 하시는 거 같애…… 현정이 풀 죽은 목소리로 대답하자 오랜만에 하트 모양 입술이 나왔다. 지연이는 진짜 멍청한 걸 좋아하나 싶었다.
시네마 레스토랑에서 식사를 했다. 전체적으로 블랙과 베이지의 톤을 띄우는 우아한 실내에 들어서자 현정은 버스에서 울렁였던 속이 가라앉는 듯했다. 천장은 굉장히 높고 와인 진열장은 거의 한쪽 벽면을 다 차지하고 있다. 씨네드쉐프의 심볼인 샹들리에가 마치 빗방울처럼 쏟아지는 듯 압도적인 자태를 뽐냈다. 지연은 웬일로 메뉴판의 가격을 보고도 별다른 말을 얹지 않았고 현정을 이상하게 보지도 않았다.
식전 빵과 아뮤즈 부쉬부터 푸아그라를 얹은 전채요리, 베이컨 시저 샐러드 등이 차례차례 나왔다. 현정은 새 코스요리가 나올 때마다 관심을 보이고 향을 맡는 지연의 반응을 확인하며 물었다. 입맛에 좀 맞아? 누가 자꾸 쳐다봐서 체할 거 같아요. 지연이 찹쌀 뇨끼를 오물거리며 말했다. 현정도 아까 누구 때문에 체할 것 같았지만 그냥 미안…… 하고 눈길을 돌려 식사에 집중했다. 메인으로는 커다란 랍스터 구이와 채끝 스테이크가 나왔다. 지연은 스테이크보단 랍스터가 더 입맛에 맞아 보였다. 처음 먹어봐요. 하면서 갈릭 소스를 푹 찍어 먹었다. 어떻게 이십 년을 넘게 살아오면서 랍스터를 한 번도 안 먹어봤을 수가 있지? 현정은 오늘도 놀랐지만 능숙하게 많이 먹어, 이따 우리가 볼 영화 제목도 더 랍스터더라. 하고 적절한 대답을 골라 넣었다. 입안 가득 넣어 먹느라 볼록해진 지연의 양 볼이 귀여웠다. 지연이는 떡볶이, 아이스크림, 족발, 랍스터를 좋아해. 또 뭘 사주지. 식사도 안 끝났는데 벌써 다음, 그다음에 사줄 맛있는 음식까지 생각해놓는 현정이었다.
좌석이 아닌 침대가 두 개씩 놓인 상영관엔 옷걸이와 침대 리모컨, 담요와 슬리퍼까지 구비돼 있었다. 지연은 적잖이 어색해하는 눈치였다. 대부분 커플이 많았다. 영화 스크린이 아닌 바로 옆에 누워있는 지연의 기척에 더 신경이 쏠렸다. 중간중간 손등이 스치자 침을 꼴깍 삼켰다. 현정은 자세를 바꾸기도 하고 오렌지 음료를 홀짝이면서 한 번씩 옆을 힐끗거렸다. 지연은 미동도 없이 영화에 완전히 집중하고 있었다.
영화 속의 한 남자는 코피를 자주 흘리는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수영장 바닥 모서리에 연신 코를 들이박고 있었다. 또 한 남자는 사이코패스 여자와 커플이 되기 위해 눈앞에서 죽은 사람을 봐도 감정이 없는 척했다. 현정은 땀이 밴 손바닥을 쥐락펴락했다. 눈 한 번만 딱 감고 용기 내어 붙잡으면 될 텐데. 현정은 결국 지연의 손이 아닌 자신의 두 손을 맞잡았다. 영화가 끝날 때까지 지연의 차가웠던 손등이 신경 쓰였다.
지하 5층의 영화관을 벗어나자 어두워진 밤하늘이 둘을 맞이했다. 변덕스러운 일교차 탓에 입에선 하얀 입김이 나왔고 몸이 저절로 움츠려졌다. 현정은 택시를 타고 싶었지만 지연은 또 자신이 두 명의 몫을 내야 하는데도 버스를 고집했다. 두툼한 무스탕으로 무장한 현정에겐 버틸 수 있는 추위였지만 지연의 얇은 겉옷이 눈엣가시였다.
호불호 갈리는 영화의 엔딩에 대해 이야기하며 버스정류장까지 걸었다. 새드일 수도 해피일 수도 있는 열린 결말이었다. 그 남자. 여자한테 다시 돌아왔을까? 현정은 특히나 결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렇다면 왜? 저렇게 희생하면서까지 만나? 지연은 특히나 결말을 마음에 들어 했다. 멋있잖아요.
“저게 왜 멋있어? 너무 미련하잖아.”
그 말의 속뜻은 '넌 내가 람보르기니를 몰아도, 천만 원을 눈감아줘도, 너를 알바에서 빼내줘도, 생애 첫 랍스터를 선사해줘도 안 멋있어 해주잖아'였다.
“사랑을 지키기 위해서 다 포기하는 거잖아요.”
“근데 저건 쫌 그렇잖아. 공통점이 있어야만 사랑한다는 게.”
“사랑하는 사람을 닮고 싶은 마음이잖아요.”
“너 정반대가 끌리는 이유 몰라? 원래 자석도 다른 극끼리 끌어 당기구……”
“몰라요. 난 저게 낭만적인데?”
난데없는 설전 끝에 현정의 말문이 막혔다. 저런 끔찍한 결말이 낭만적이라니. 현정은 평생 지연의 눈에 멋있어 보일 수 없을 것 같았다. 버스로 되돌아오는 길에 보이는 밤 한강은 더 차갑고 깊어 보였다. 근데 언니. 그거 알아요? 차창에 비친 지연의 얼굴이 현정을 바라보며 말했다. 우리도 닮은 게 하나 있는데.
“……뭔데?”
“언니랑 나랑.”
“……”
“둘 다 예쁜 거?”
순간 현정의 심장은 무거운 돌에 맞아 퍼지는 강렬한 물결처럼 두근거렸다. 자기 예쁜 거 아는 예쁜 여자는 최고라지만…… 나 예쁜 것까지 알아주는 여자는 더 최고였다. 내가 널 꼬셔야 하는데. 나 혼자만 사랑해버리면 안 되는데. 현정은 헷갈렸다. 지연이 흘려버린 여지를 믿고 싶었다. 한강 수면 위로 눈물처럼 번져 보였던 한강 다리 기둥의 불빛들이 다. 지연을 향한 너의 마음이 깊어져도 괜찮을 거라며 현정을 응원해주는 것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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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정아 요즘 뭐하고 지내」
「나 한국 왔는데…… 밥 한 번 먹을래?」
「나 너 보고 싶었는데」
11월에 들어서자 수연에게서 연락이 왔다. 현정의 인생에 수연이라 하면 딱 두 명이 있었는데. 한 명은 현정이 키우는 강아지 양동이에게 초콜릿을 먹여 생사의 갈림길로 내몰았던 말단 가정부였고, 또 한 명은…… 현정의 열여덟 순정과 운전기사를 가져가 인생을 송두리째 흔들고 갔던 첫사랑이었다.
지연이 사주는 학식을 얻어먹겠다고 일찍 학교에 온 날이었다. 그것도 지연이 알려준 대로 교통 카드를 만들어 처음으로 지하철을 타고. 한때는 학년조차 다른 수연과 같이 급식 먹으려고 종 치자마자 뛰어갔던 현정이었지만. 이젠 보고 싶었다는 수연의 연락을 읽지도 않고 씹을 수 있었다. 목소리가 너무 달아서 사탕 발린 말에 넘어가곤 했던 지난날의 김현정이 아니니까. 교내 식당에 도착하자마자 지연에게 문자를 보냈다. 지연아. 빨리 와.
「한 시 약속이잖아요 언니」 오후 12:32
오후 12:32 「ㅠㅠ」
1 오후 12:34 「나 젤 비싼 거」
1 오후 12:50 「날치알로제파스타」
비록 지연은 쓸데없다 판단되는 현정의 연락은 읽지 않고 씹었지만. 현정은 다 좋았다. 지하철을 타면 꽉 막힌 도로 한가운데에 갇혀 하릴없이 시간 버릴 일도 없다는 거. 레스토랑의 눈부신 조명보단 낡은 골목길 가로등 아래가 더 낭만적일 수 있다는 거. 강의실로 향하는 발걸음이 때로는 가벼울 수 있다는 거. 기다리는 일이 생각보다 즐거운 일이라는 거.
그런 걸 다 알려준 지연이. 저 멀리서 자신을 발견하곤 걸음을 빨리하는 지연이.
“왜 이렇게 늦었어.”
이제 막 한 시였다. 현정은 주머니에 두 손을 콕 찔러 넣으며 말했다. 늘 주머니 속에 달랑거리던 차 키들이 없어 허전했다. 대신 오는 길에 지하철 역내 편의점에서 샀던 핫팩이 그 속을 뜨겁게 채웠다. 저번보단 두꺼워진 지연의 옷차림에 마음도 한결 편해졌다.
“언니가 일찍 왔거든요?”
“나 되게 오래 기다렸어.”
“내가 되게 보고 싶어서?”
“아니 지하철이 너무 빨라서……”
막상 지연이 정곡을 찔러 오면 삑 소리도 못 하고 한걸음 내뺐지만. 현정은 다 좋았다.
“지연아. 손 줘 봐.”
“손?”
“응.”
“왜요?”
“그냥 주면 안 돼? 잠깐만……”
“……이쪽 손?”
“음. 더 추운 손.”
걸음을 멈춰 선 지연이 팔짱을 풀었다. 더 추운 손. 하면서 조그만 양손바닥을 현정 앞에 다 내밀었다. 핫팩은 하나밖에 없는데. 현정은 망설이다 더 빨개 보이는 지연의 오른쪽 손바닥 위에 조심스레 핫팩을 올렸다. 왜 줘요? 지연이 습관처럼 또 이유를 물었다. 그놈의 왜. 당연히 너 추운 거 싫으니까, 바보야. 그런데 더 바보인 현정은 또 이상한 대답을 했다.
나는 너무 뜨거워서……
지연은 밥 먹는 내내 왼쪽 손에 핫팩을 꼭 쥐고 있었다. 본의 아니게 현정은 그걸 파스타 한입 먹고 보고 또 한입 먹고 보고 먹고 또 봤다. 다시 줘요? 지연이 말했다. 아냐, 아냐. 근데 이거 되게 맛있다. 현정은 다 퍼진 파스타면을 포크로 돌돌 말며 말했다. 사실은 느끼해서 속이 느글거렸지만 지연이 사준 거라 조금도 남기기가 싫었다.
카카오톡 친구 목록(정확히 말하면 즐겨찾기 목록)에서 김지연이 사라졌다. 현정이 지연을 어르고 달래서 깔게 만든 카카오톡이었다. 이거 하면 상대방이 읽었는지 안 읽었는지 알 수도 있고, 다른 사람들 뭐 하고 사나 구경할 수도 있고, 귀여운 이모티콘도 있고…… 다 언니한테만 좋은 거 아니에요? 나 감시하려고 그러죠. 에이, 그게 무슨 소리야. 귓등으로도 안 듣던 지연은 결국 현정이 보는 앞에서 옜다하고 어플을 깔았었다. 그럼에도 현정은 지연이 뭐 하고 사는지 구경도 못 했고, 귀여운 이모티콘은커녕 지연의 답장은 여정히 느렸지만.
처음엔 아무것도 없는 기본 프로필에서, 현정이 강의실에서 몰래 찍어 제 어깨와 함께 나온 지연의 옆모습으로, 또 그다음엔 무표정으로 고개 각도만 살짝 틀고 찍은 지연의 셀카로 바뀌었다.
남들과는 달리 볼에 바람도 안 넣고, 웃지도 않고, 보정도 없는 지연의 서늘한 얼굴을 현정은 하루에도 몇 번씩 들여다봤다. 안 웃으면 뭐해. 입술 끝에 걸린 볼살과 앞머리가 널 한없이 귀엽게 만드는데. 새로운 셀카가 업뎃 되기만 기다리며 확인하곤 했던 프로필이 사라지자 현정은 오만 생각을 다 했다. 핸드폰 잃어버렸나? 나보다 더 멋진 사람이 나타났나? 질 나쁜 빚쟁이들이 집에 쳐들어왔나?
내가 재미없나? 내가 부담스럽나?
확신이 무너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좋아하던 게 당장 눈앞에서 사라지면 제일 나쁜 생각들만 머릿속을 가득 채운다. 예를 들어 좋아한다고 믿었던 재능이 내 맘처럼 발휘되지 않으면, 적잖은 시간과 돈을 바쳐온 이 길이 내 길이 아닌 것처럼 느껴지고. 저번 주에 사랑을 결심하게 만든 상대가 두 시간만 연락이 안 돼도 결국엔 나만 진심이었던 것처럼 느껴진다. 어제 사랑한다 말하고 오늘 잘 지내라 말하며 헤어지는 게 연인이란 문장을, 제대로 된 연애 한 번 안 해본 현정이 뼈저리게 공감했다.
「뭐 해?」
지연에게 문자를 보낸 지 겨우 두 시간 이십분이 지나가고 있었다.
중간고사가 끝난 기념으로 과 모임이 있는 날이었다. 현정의 동기보단 복학생 선배나 후배들이 더 많았다. 현정은 제일 친한 도연 옆에만 붙어 앉아 두런두런 얘기 나눴다. 아무리 관심받기에 도가 튼 현정이라지만 좀 아는 사이인 사람들, 특히 대학 사람들 앞에선 에너지 소모가 커서 구석자리를 선호했다. 현정은 다 알 수 있었다. 혼자만 최고급 낙하산 펼치고 하늘 위에서 뚝 떨어진 현정의 삶을 무조건 시기하고 비꼬는 시선이 있다는걸. 사실은 더 어렸을 때부터 알았다. 현정이 쓰는 모든 돈이 스스로 번 돈이 아니라서 더.
스물두 살인데 슈퍼카 모는 여자애. 진짜 멋있다. 나도 한 번 구경해 봐도 돼? 타 봐도 돼? 와씨. 유지비는 얼마나 들어? 보험비는? 와, 그거 구찌야? 와, 그거 발렌시아가야? 그럼 현정이가 한 턱 쏘는 거야? 늘 비슷한 패턴의 질문 공세에 현정은 난감했다. 이딴 게 다 뭐라고. 현정은 꿀강의가 뭔지, 요즘 제일 핫한 우리 과 씨씨가 누구 누군지, 쟤의 별명은 왜 대머리독수리인지, 저번 엠티에선 누가 어떤 실수를 했고, 왜 아직도 학생회장과 부회장 사이가 안 좋은지. 그런 시답잖은 것들에 대해 얘기하고 싶었다.
할머니. 대학교 가면 사람들이 다 편하게 살아서 멍청한 여자애로 본단 말이에요. 지갑 안 열면 좀생이 취급한단 말이에요. 하면서 현정은 때 쓴 적도 있다. 그럼 할머니 박말순은 이렇게 대답했다. 배부른 소리 하지 마라. 할머니는 자식과 손녀에게 자기 객관화를 누구보다 철저히 시켰다.
하나 둘 대답해주며 소주잔을 기울이다 보니 한 병을 훌쩍 넘겼다. 시간은 열한 시를 넘겼고, 지연에게선 아직도 답장이 없었다. 지연이 앞치마 벗을 시간이란 걸 알았다. 울리지 않는 핸드폰과 비어 있는 즐겨찾기 목록. 현정은 마시고 더 마셨다. 살얼음이 동동 뜨도록 차가운 새 소주병을 깠다. 지연이가 내 차에 던졌던 소주병. 쌍쌍바는 소주병 여덟 개. 떡볶이는 소주병 서른 개. 내가 마시고 있는 소주 한 병은 소주병 마흔다섯 개. 내가 타는 차는 소주병 칠백만 개……
술 한 잔에 추억과 술 한 잔에 쓸쓸함과
술 한 잔에 지연이.
지연이.
머리가 별처럼 빙빙 돌았다. 엎지른 술잔의 술이 흥건해진 테이블 아래로 뚝뚝 떨어졌다. 현정은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내가 다 쏜다. 한쪽 손엔 소주병과 다른 한쪽 손엔 지갑을 들고. 여태껏 도연아, 그래서 수연이, 지연이, 수연이가, 지연아 그래서 도연이가…… 너 도연이니, 를 반복해서 듣던 도연은 두말할 것도 없이 따라 나와 현정에게 택시를 잡아줬다. 언니. 지연인지 수연인지한테 지금 가지 마요. 알았죠? 내일 후회하기 싫으면.
“웅.”
탁. 차문이 닫히자 현정이 꼬인 혀로 말했다.
“아저씨. 옥수동 만물슈퍼 가요.”
-
이상하게 없던 기운이 펄펄 났다. 술기운인가. 현정은 지연에게 다 녹은 아이스크림을 건넸던 가로등을 지나, 셀 수 없던 계단들을 더 걸어 올라가면서도 체력이 남아돌았다. 왜 이렇게 높은 곳에 집이 있지. 지연이 힘들게. 갈림길을 마주한 현정은 오른쪽 길 계단 턱에 걸터앉았다. 깨진 시멘트 바닥 틈 사이로 자잘한 풀들이 솟아 있었다. 가까이 바라보자 조그마한 잎사귀 위로 정교한 잎맥들이 뻗어 있었다. 어디로 가야 하지. 고개 숙여 검지로 풀잎을 휘적거리던 현정은 핸드폰을 꺼냈다. 끊기지 않을 것 같던 통화 연결음이 뚝 사라지고도. 한참 뒤에야 지연의 낮은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왜 전화했어요?”
“지연아.”
“네.”
“뭐해.”
……
수화기 너머가 조용했다. 현정은 귀에서 핸드폰을 떼고 확인했다. 통화 중인 액정 위엔 김지연 세 글자가 찍혀 있었다. 현정은 마주 보듯 핸드폰을 두 손으로 고이 들고 입을 가까이 대고 말했다.
“들려? 나 가고 있어. 너네 집. 그런데 길을 몰라.”
“……”
“통금이라 빨리 가야 되는데……”
“언니 술 마셨어요?”
지연이 귀신처럼 알아채자 현정은 한쪽 손바닥에 대고 후후 불었다. 술 냄새는 안 나는데. 발음도 또박또박한데. 어떻게 알았지. 오싹해진 현정은 두툼한 아이보리 양털 자켓을 더 꽉 여몄다.
“……응.”
“많이?”
“쪼끔.”
“쪼끔이 아닌 거 같은데.”
“아니야. 나 계단 올라오면서 다 깼어.”
“……진짜로 왔어요? 왜?”
지연은 또 이유만 묻고 반가워해주질 않았다. 기껏 미련 곰탱이처럼 달려와 찬 땅바닥에 앉아 기다리고 있는데. 현정은 심통이 나서 대답했다. 몰라. 두 글자에 악센트가 실렸다. 다 알지 않아? 네가 있는 곳에 자꾸 찾아가는 이유, 사서 고생하며 널 기다리는 이유도. 이쯤 되면 너도 다 알지 않아? 현정의 목덜미가 화끈해졌다. 그런데 지연은 정말 모를 수도 있다. 알지만 모르는 척할 수도 있다. 마음이 없어서?
뭉근하게 감도는 취기. 울렁거리는 속. 그 안에서 웅얼웅얼. 뭉게구름처럼 피어나는 속마음들. 현정은 만지작거리던 풀잎 하나를 똑 떼어 엄지와 검지로 돌돌 말았다. 왜 왔냐고? 너는 왜 자꾸 연락이 끊겨? 할 수 있으면서 왜 안 해? 그럼 걱정되잖아. 그리구…… 너 보고 싶어서…… 그래서 왔어. 너 보러. 그런데 있지. 너한테 여기까지 나와 달라는 말을 못 하겠어. 그럼 너는 내려왔다가 다시 힘들게 올라가야 되잖아. 그러면은…… 어떻게 가지. 거기가 어딘지 모르는데…… 어떡하지. 길 설명해주면 내가 알아서 갈까. 아니면 지연아.
“나 이러는 거 싫어? 갈까?”
“……”
“사실 술 다 안 깼어. 나 지금 내려가면 구를 거 같애. 막 피 나고 다리 부러질걸. 그래도 갈까?”
그 기다랗고 폼 안 나는 속마음을 현정은 핸드폰에 대고 줄줄 읊어 버렸다. 다 말하고 나니, 제 옷깃에서 술 냄새가 좀 나는 것 같았다. 웬만한 진상 손님보다 더 꼴사납게 굴고 있는 것 같았다. 후회는 없지만 후련하지도 않았다. 지연의 목소리 대신 희미하게 섞인 잡음만 들렸다.
어떡해. 진짜 싫은가 봐. 현정은 후회했다. 오래도록 이어지던 침묵 끝에 지연의 한 마디가 돌아왔다.
“싫은 건 아닌데……”
싫은데 싫다고 말하기 뭐 해서 난감한 걸 수도 있어. 현정은 마지막까지 절망을 저버리지 않았다.
“응.”
“나 쌩얼이에요, 언니.”
“난 괜찮은데.”
“내가 안 괜찮거든요? 그러니까 가요.”
“알겠어…… 그럼.”
지연이 핑계를 너무 잘 대서 현정은 더 대꾸도 못 하고 일어섰다. 너는 쌩얼이 더 귀여울 것 같은데. 푸우. 한숨을 푹 내쉬며 머나먼 전경을 바라봤다. 공사장 철골 구조물 끝에 모래알처럼 반짝이는 빨간 점. 자동차 헤드라이트로 가득한 고속도로. 미니어처 같은 빌딩 숲. 빈 집의 부서진 기와지붕 너머로 보이는 한강. 물결. 불빛. 소음. 시간에서 소외된 어지럽고 고요한 동네.
“진짜 가요?”
왼쪽 길모퉁이에서 지연의 목소리가 더 선명히 들려왔다. 설마 했는데 진짜였네. 헝클어진 앞머리. 보드라운 두 뺨. 연붉은 입술. 후드를 뒤집어쓴 지연이 여전히 통화 중인 핸드폰을 귀에 댄 채 말했다. 언니 진짜 뜬금없는 거 알아요? 지금 시간이 몇 신데요. 지연이 무슨 잔소리를 펼쳐놓든 현정은 실실 웃었다.
고양이인 줄 알았던 지연의 토끼 같은 민낯이 너무 좋아서.
거기서 오 분은 더 걸어 들어갔다. 위로 올라갈수록, 더 깊은 골목으로 파고들수록, 길을 비추는 가로등 수가 뜸해졌다. 삼각형이나 마름모꼴 등 각양각색의 집들이 덕지덕지 붙어 있었고, 한 집의 지붕은 또 다른 집의 대문으로 이어지기도 했다. 가구 수에 비해 빈 집이 많았다. 거미줄이며 깨진 창문이며 현정에겐 온통 생소하고 섬뜩한 것들뿐이었다. 현정은 익숙하게 앞서 나가는 지연의 후드티 팔꿈치를 슬쩍 붙잡고 걸었다.
자질구레한 골동품들이 마당을 가득 채웠다. 수돗가까지 겸비한 마당은 꽤나 넓어 보였지만 못 쓰는 공간이 더 많았다. 고무 대야의 파편이라든가 가구로부터 부서져 나온 오래된 잔해들이 썩은 화단 곳곳에 뿌리처럼 박혀있었다. 지연은 괘념치 않은 듯했지만 현정이 더 긴장했다. 혹시나 실수라도 하진 않을까. 최대한 곁눈질로만 슥 훑으며 들어갔다. 현관을 지나고부턴 지연의 취향이 담긴 정서가 물씬 풍겼다. 11월 달력 칸을 채우고 있는 뜬금없는 하와이 섬의 풍경. 원형 난로 위에서 물이 보글보글 끓고 있는 유리 주전자. 정사각형 창문 틀에 드문드문 붙은 귀여운 데코 스티커. 낮은 테이블과 좌식 의자. 그 위로 아무렇게나 쌓여있는 문제집. 잎사귀를 코팅해서 만든 책갈피. 부엌과 거실과 안방이 제자리에서도 한눈에 다 들어왔다.
현정이 액자 하나에 손을 대자 지연이 재빨리 뺏어갔다. 서랍 속에 팍 집어넣고는 말했다.
“후회하게 만들지 마요.”
“……왜 후회 해?”
“나 언니 모른 척하고 그냥 잘 수도 있었어요.”
“근데 안 그랬잖아, 너. 왔잖아.”
“……”
“너도 조금은……”
현정을 떨게 만드는 지연의 형형한 두 눈.
“뭐요.”
“잠이 안 왔던 거지.”
지연의 얼굴에 한심한 낯빛이 스쳤다. 술 먹어서 용기가 생긴 줄 알았는데 부족했다. 현정은 고개를 돌렸다. 아직도 저한테서 술 냄새가 나나 어깨에 대고 킁킁거렸다. 어쨌든 기분이 좋아졌다. 이 집에 발을 들임으로써 지연과 더 가까워졌다고 생각해서. 현정이 얼핏 봤던 액자 속엔 지연과 지연의 아빠 사진이 있었지만 신발장에도 집안의 흔적에도 지연을 제외한 다른 이의 흔적은 보이지 않았다. 그래서 서글퍼졌다. 현정은 묻고 싶은데 물을 수 없었다. 지연이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는데 혼자인 것 같아서.
“통금은요?”
“어?”
“빨리 가야 된다면서요.”
시계를 확인해보니 열두시 땡 치고도 이십 분이나 지나 있었다. 좀 혼나고 말지 뭐. 열두 시가 지난다 해도 현정이 잃게 될 것은 없으니.
“괜찮아. 늦게 가도 돼.”
“술만 깨고 가요. 나 졸려요.”
“응……”
냉랭한 바닥은 부분 부분 미지근했다. 이미 술이 깬 현정은 난로 앞에 앉아 시린 발을 녹였다. 시치미 떼고 지연이 주는 보리차를 받아마셨다. 옆에 앉은 지연의 수면 양말 위에 그려진 베이지색 곰돌이가 말똥말똥 현정을 쳐다봤다. 작은 발이 꼼지락거렸다. 근데…… 카카오톡은 왜 지웠어? 현정은 일부러 늘어진 말투로 물었다.
“그거 물어보려고 왔어요?”
“그것도 그렇고, 연락이 아예 안 돼서 진짜 걱정했잖아……”
“내가 어디서 굶어죽기라도 했을까 봐요?”
얼어 죽었을까 봐. 누가 널 괴롭혔을까 봐. 내가 질렸을까 봐. 현정은 수많은 이유를 보리차와 함께 꾹 삼켰다. 목구멍이 뜨거워졌다.
“왜 지웠는데?”
“그냥요. 그냥 지웠어요.”
“그냥이 어딨어.”
“아, 술 냄새.”
벌떡 일어난 지연이 현관문을 열어젖혔다. 언니. 이리 와 봐요. 지연은 2단짜리 원목 신발장 위에 현정을 앉혔다. 술 냄새 때문에 환기시키는 줄 알았는데. 벌써 가라고 내쫓을 줄 알았는데. 지연은 수돗가 옆에서 끌고 온 조그만 화로 안에 연탄과 번개탄을 차례로 넣었다. 구긴 신문에 라이터로 불을 붙여 넣자 연탄 속의 불씨가 반짝이면서 연기가 피어올랐다. 가감 없이 척척해내는 지연의 모습은 마치 맥가이버를 연상시켰다. 이내 부엌 수납장을 뒤적거리더니 주황색 꿀밤맛 쫀디기 한 봉지를 꺼내 왔다. 이런 거 먹어본 적 없죠. 지연은 연분홍 담요를 망토처럼 두르고 서서 후라이팬 위에 쫀디기를 올렸다. 달고 고소한 냄새가 나면서 타닥타닥 굽는 소리가 났다.
“와. 진짜 맛있다.”
처음 먹어보는 맛이었다. 쫀득한 식감과 혀에 감도는 달짝지근한 맛. 현정은 주체하지 못하고 실실거렸다. 현관문 앞마당에 지연과 나란히 쭈그려 앉아 따뜻한 화롯불을 쪼였다. 호호 불며 쫀디기를 찢어 먹었다. 와. 와. 랍스터보다 맛있어. 현정이 바보처럼 연신 감탄사를 내뱉자 지연이 웃었다.
뷰가 좋았다. 달이 걸린 밤하늘 아래 지연의 순한 눈코입과 토끼 같은 두 눈을 찌르는 앞머리까지. 현정이 한 손을 뻗어 지연의 앞머리를 정리했다. 살짝 몸을 빼려던 지연은 가만히 앉아서 손길을 받았다. 졸리고 지쳐 보였다.
“어제 손님한테 왕창 깨졌어요. 그래서 기분도 별로였고.”
“……”
카카오톡을 보면 다들 잘 살고 있는 거예요. 진짜 대학교를 다니고, 여행도 가고, 연애도 하고요. 그걸 알게 돼서 싫었어요. 나는 이렇게 사는데…… 아빠가 기죽지 말라고 했거든요. 우리가 이렇게 사는 건 죄 지어서가 아니라고요. 그래놓고 자긴 먼저 죽어버렸어요. 죽은 아빠 병원비를 지금도 갚고 있고요. 그래서 난 가끔 기가 죽어요. 며칠 그랬다가 다시 괜찮아지기도 하고,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요.
풀썩. 지연의 어깨 위에서 담요가 떨어졌다. 현정이 말없이 주워들어 지연의 작은 몸에 다시 둘러줬다.
어떻게 안 해. 더 걱정이 돼. 훌찌럭. 현정은 손끝으로 촉촉해진 눈가를 닦다가 지연에게 들켰다. 그런 지연의 눈엔 물기가 하나도 없어서 도리어 무안해졌다. 슬픈 분위기 아니었나. 현정은 식어서 딱딱해진 쫀디기를 도로 후라이팬 위에 올려놨다.
“지금 울어요?”
“아냐. 운 거 아니야. 하품했어.”
“……그만 가요, 이제. 술 다 깼네.”
“아직 내 얼굴 빨갛지 않아?”
“추워서 그러죠. 빨리 가요.”
대문까지 마중 나온 지연을 꼭 안아주려고 준비했던 현정의 두 팔이 뻣뻣해졌다. 안녕. 현정은 머리를 긁적이며 손을 흔들었다. 죽은 나뭇가지들이 버석버석 밟혔다. 잘 가요. 현정은 지연의 잔뜩 졸린 눈을 보니 미안한 마음이 들었다.
“지연아.”
“네?”
나랑 연애하자. 같이 하와이에 가자. 세상에서 제일 비싸고 맛있는 것들을 전부 다 먹어보자. 현정 안엔 차오르는 말들이 많았지만.
“잘 자라구.”
시시하게. 오늘 지연의 꿈이 행복하기만을 빌었다. 조바심이 모든 걸 망쳐버릴까 봐 겁이 나서. 사랑과 연민을 더 명확히 구분하고 싶었다.
-
대학교 커뮤니티에 소문이 돌았다. 돈 주고 사람을 고용했대. 현정과 지연을 가리키는 이야기였다. 출석도. 과제도. 시험도? 어느 정도 맞던 소문은 점점 몸집을 부풀렸다. 입학도 돈 주고 했대. 특례? 학교에 돈 많이 기부하니까 입학시켜준 거지.
- 맞아. 나도 그 사람 돈 받고 과제 준 적 있어.
익명 댓글에 증인이 나타나면서 불거진 소문은 장안의 이슈가 되었다. 언니, 이거 봐요. 현정과 함께 이른 저녁 식사를 하던 도연이 핸드폰을 내밀었다. 현정은 소문의 주인공인 자신이 특례 입학녀가 되기까지를 실시간으로 지켜보고 있었다. 무슨 개소리야. 수능 공부해서 정시로 입학했는데. 손바닥만 한 화로 불판 위에 살치살을 한 점씩 올려 먹었다. 지연의 집에서 구워 먹던 쫀디기만 생각났다.
평화로운 날들이 이어지고 있었다. 지연이 답장을 곧잘 보내줘서. 술 먹고 찾아갔던 그 다음날 지연은 현정을 해장국집에도 데려가 줬다. 현정이 커다란 뼈다귀를 다 골라내고 먹으면 여기 살 붙어 있는 거 안 보이냐고 타박을 했다. 너 먹으라구 빼 논 거지…… 너 먹어. 지연은 그 말을 믿지는 않았지만 뼈다귀가 쌓여있는 접시를 제 쪽으로 가져갔다. 사실 국이 좀 매웠던 현정은 물 잔을 벌컥벌컥 들이마셨다.
며칠 후, 지연은 족발집을 그만뒀다고 했다. 주방 이모들이 가끔 싸주는 족발쌈 말고는 마음에 드는 게 하나도 없는 알바였다면서. 속으로 쾌재를 부른 현정은 저녁 식사를 예약할만한 레스토랑부터 고민했다. 지연은 옆에서 알바천국을 켰다.
“뭐해?”
“다른 알바 찾아야죠.”
“……”
“당분간 단기 알바로 채우려고요.”
인형탈 알바, 호텔 알바, 시식코너 알바, 아울렛 시즌행사 알바. 지연은 여기저기 지원 문자를 보내며 남은 연말 스케줄을 빼곡히 채우려고 했다. 현정은 가방에서 꺼낸 아몬드 빼빼로 봉지를 조심스레 뜯었다. 너도 먹을래? 아뇨. 언니 많이 먹어요. 오늘이 빼빼로 데이인 줄도 모르는 지연을 두고 현정은 혼자서 빼빼로를 먹고 또 먹었다. 녹여먹어도 보고, 오독오독 씹어 먹어도 봤다. 강의 내내 질리도록 먹다가 교수와 눈이 마주친 현정은 빼빼로를 볼펜처럼 들고 아무렇게나 끄적거렸다. 지연이 종이 위에 묻은 초콜릿 찌꺼기를 가리키며 쿡쿡 웃었다.
현정은 도연에게 지연을 소개해주기도 했다. 워낙 까칠한 지연의 성격을 저 말고 누가 또 받아줄까 싶지만 호탕하고 쿨하기로는 도연만 한 애가 없다고 생각했으니. 그리고 기억력 나쁘기로도 둘째가라면 서러웠다.
“언니가 말했던 그…… 수연이?”
“아니.”
“아, 채연이랬나?”
기억력이 좋은 건가.
“아니. 지연이. 채연이는 또 누구야.”
현정은 채연이 누군지 똑똑히 알면서 모른 체했다. 새내기 시절 썸이란 썸은 다 타놓고 남자친구가 있었던 예쁘고 나쁜 애. 언니 주변엔 연이 되게 많네요. 나도 그렇구. 도연이 말했다. 현정은 제 쪽을 살며시 올려다보는 지연의 눈길이 느껴졌다. 그러게. 왜 내 마음엔 예쁠 연들만 꼬이지.
현정은 샤넬 신상 립스틱 두 개가 들어있는 쇼핑백을 만지작거렸다. 시간이 맞는 김에 다 같이 밥 먹자는 서두를 던져 만난 거였지만 사실 현정의 진짜 목적은 이거였다. 지연의 입술에 어울리는 체리 버건디 립스틱을 선물해주기. 도연이 같이 받는 걸 보면 지연도 받는데 부담이 덜할까 싶어서. 현정은 그렇게라도 주고 싶었다.
언니. 나 이거 갖고 싶었던 거 어떻게 알았어요. 쇼핑백을 열어 보였을 땐 도연의 리액션이 더 컸지만 현정은 체리 빛이 도는 지연의 입술을 보며 흐뭇해했다. 자신만 아는 지연의 토끼 같던 민낯이 생각나 가슴속이 간질간질했다. 체리가 잘 어울리는 토끼였다.
셋이서 늦은 점심으로 피자를 먹었다. 도연과 지연은 음식 얘기로 말문이 트였다. 헐. 저도 떡볶이 좋아해요. 순대 국밥 맛있죠. 아, 트럭에서 파는 통닭이 더 맛있는 거 알죠. 언제 봤다고 저렇게 친해졌대. 받아주는 지연의 말투는 또 왜 저렇게 나긋하지. 대화에 끼지 못한 현정은 못마땅한 표정으로 피망을 하나하나 골라냈다. 아, 피망 왜 이렇게 많아. 다 들리는 혼잣말로 궁시렁거려도 둘은 곱창 얘기로 넘어가 있었다.
“소 곱창이 더 맛있지 않아요? 비싸서 잘 안 먹긴 하지만.”
“현정 언니한테 사달라고 해요. 저 언니 남는 게 돈이잖아요.”
“됐어요. 순대도 못 먹는 사람인데.”
순대도 못 먹는 현정은 서러움이 폭발했다. 지연이 얻어먹길 꺼려 하는 게 자신의 편식 때문이라면 못 먹는 거 얼마든지 다 먹을 수 있는데. 그런 것보다도…… 현정은 본 적 없던 지연의 상냥함과 트집 없이 넘어가는 순조로운 화법 때문에.
“봐요. 피망도 다 빼고 있잖아.”
그러면서 지연은 어느새 피망을 다 골라낸 피자 한 조각을 현정의 접시에 척 올렸다. 선물 보답이에요. 베이컨은 덤. 자기가 먹을 조각의 베이컨을 서너 개를 더 얹어주면서. 현정은 서러움이 뭔지도 모르는 얼굴로 행복하게 피자를 먹었다.
지연이 화장실에 간 사이 도연이 물었다. 언니. 지연 언니 좋아하죠? 어떻게 알아? 나 티 낸 적 없는데. 현정은 화들짝 놀랐다. 지나가는 개도 알 것 같은 얼굴이라고 했다. 지연을 바라보는 현정의 눈빛이. 이따금 나오는 어정쩡한 자세와 투명한 반응이.
그러면 어떡해. 지연이는 지나가는 개보다 똑똑하니까. 지연이도 다 알 거라는 말이잖아...... 마침 지연이 손의 물기를 털며 이쪽으로 걸어오자 현정은 포크를 떨어뜨렸다. 오우 쉣...... 그리곤 아주 어정쩡하고 투명한 표정을 지으며 맨손으로 피자를 집었다. 지연은 물음표 띄우며 새 물티슈를 현정 쪽으로 밀어줬고 그 광경에 도연 혼자 속으로 웃겨 죽었다.
시험 끝나기가 무섭게 교수들은 과제를 더 꼼꼼히 내줬다. 수강생들이 지루할 틈이 없도록. 지연은 착실히 현정에게 과제와 유의사항 등을 알렸고, 현정은 대부분의 과제를 스스로 해내기 시작했다. 도서관에서 공부하는 지연의 옆자리에 꼭 붙어 앉아 있으려고. 언니는 어떻게 들어오게요. 지연이 학생증을 도로 돌려주려 했지만 현정은 도연의 학생증을 꺼내 보이며 멋쩍게 웃었다. 지연이가 도서관에 안 가면 현정도 갈 이유가 없으니까.
지연은 영어 모의고사 모음집을 꺼내 풀었다. 손때가 많이 탄 문제집엔 지워지지 않는 볼펜으로 정답이 다 체크되어 있었다. 푼 거 또 푸는 거야? 아뇨. 딴 사람이 쓰던 거라서요. 지연은 헌책방에서 헐값으로 사거나 고등학교 폐지함에서 줍는다고 했다. 먹지도 못하는 거에 돈 쓰기 아까워요.
사랑도 틀리면 지울 수 있게 연필로 쓰라는 말이 있는데 감히 지연이가 풀게 될 문제들을 볼펜으로 풀다니. 현정의 가슴은 큰 돌덩이가 끼인 것처럼 뻑뻑해졌다. 지연은 답을 먼저 알아버린 후 문제를 푸는 셈이었다. 왜 이게 답인지 알아요? 간간이 현정에게 이해되지 않는 풀이 과정도 물었다. 수능 영어 1등급을 받았던 김현정은 지문 분석 팁까지 전수하며 성심성의껏 설명했다. 이런 거는 있지. 하우웨버가 들어간 문장부터 읽어보는 게 좋아. 그럼 다 알 수 있거든. 글에서 뭘 강조하고 싶고 뭘 부정하고 싶은 건지. 지연이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이면 명문대생 김현정의 어깨에 뽕이 들어갔다. 이러려고 수능 공부를 했지. 이러려고 좋은 대학에 왔지. 지연이가 모르는 걸 다 알려주려고.
의미 없이 형광펜으로 밑줄만 치던 현정은 이내 책을 베고 엎드렸다. 지연의 동글동글한 알파벳 글씨체와 안경 쓴 옆선을 번갈아 보면서.
“모르는 거 또 없어?”
“과제 다 했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생기면 물어볼게요. 그리구.”
얼굴 좀 저쪽으로 돌리면 안 돼요? 부담스러워서 집중이 안 돼요. 무안하고 섭섭해진 현정은 말없이 고개를 돌려 반대쪽으로 엎드렸다. 나는 집중이 안 돼서 널 보는 건데. 그럼 예쁘지나 말든가…… 현정의 눈앞엔 머리가 벗어진 중년 교수와 체크 남방을 입고 공부하는 남자만 있었다. 지연이 없는 시야는 너무 밋밋하고 칙칙했다. 현정은 이어폰을 꽂고 눈을 감았다. 구 분짜리 쇼팽 발라드 1번을 재생시켰다. 마음을 편안하게 만드는, 가끔은 눈물짓게 만드는 잔잔한 피아노 멜로디였다.
얼마간 졸던 현정을 번뜩 잠에서 깨게 만든 건 불쑥 느껴진 지연의 손길 때문이었다. 두 손으로 현정의 왼손을 잡아 제 쪽으로 끌어당기고는 아이폰 홈 버튼에 엄지손가락을 꾹 찍었다. 지연은 잠금이 풀린 현정의 아이폰을 열심히 만지작거렸다. 곧 현정의 귀에 갈매기와 파도 소리로 시작되는 낯설고 낡은 멜로디가 들려왔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사랑해. 다시 태어나지 못해도 너를 사랑해.
이런 노래는 대체 어떻게 알고 트는 건지. 현정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지연도 집중력이 다 떨어졌는지 나른한 얼굴로 낙서만 하고 있었다. 파도가 치는 해변과 야자수 나무를. 그 위에 눈웃음 같은 갈매기들을. 점점이 찍힌 볼펜 똥은 높은 상공에서 내려다보는 백사장 위의 사람들. 지연은 현정과 눈이 마주치자 웃었다. 그 갈매기 같은 눈웃음을 보고 현정도 따라 웃었다.
자신의 두 뺨이 책에서 옮겨붙은 분홍색 형광펜 자국으로 불그스름해진 것도 모른 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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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 닿는 곳마다 때 이른 캐롤 풍년이었다. 쇼팽의 클래식 다음으로 캐롤을 제일 좋아하는 김현정은 매년 이맘때쯤이면 좀 흥얼거리면서 걷게 됐다. 무려 열네 살까지 산타를 믿었으며 자신의 생일이기도 한 크리스마스이브 밤마다 선물 한 보따리를 짊어지고 방문하는 특수분장 산타를 직접 만났으니까. 울어도 울지 않아도 언제나 선물을 받았으니 나는 정말 착한 아이구나 생각했다. 그때와 같은 동심을 가졌다면 산타 할아버지가 산다는 핀란드가 있을 북쪽에 대고 소원을 빌었겠지. 산타 할아버지. 거기 계신다면 말해주세요. 지연이도 나에게 관심이 있는지 알려주세요. 창문 너머의 달을 바라보며 두 눈을 부릅떴겠지.
그런데 지금도 그러고 있다. 다 큰 스물두 살 김현정은 산타를 믿지 않으면서도 아리아나 그란데의 산타텔미를 들으며 퀸사이즈 침대에 모로 누워 대충 창문 쪽에 눈길을 주며 따졌다. 산타양반. 알고 있으면 말해보시라고요. 크리스마스가 다가올수록 현정의 마음은 붕 뜨고 또 급해졌다.
지연이도 나를 좋아할까? > 나 예쁘다고 해줬잖아. 나한테 학식도 사줬잖아. > 헐. 쌍방인가 봐. > 그건 아닌 듯. 맨날 정색하고 귀찮아하잖아. > ……결국 또 짝사랑인가 봐. > 나한테 베이컨도 줬잖아. 쫀디기도 구워줬잖아. > 고백해도 될까? > 에이. 그래도 고백하긴 이른 것 같음. > 밑져야 본전 아닌가? > 차였다가 밥도 못 먹는 사이 되면 어쩌려고.
김현정 안에 훈수 두는 연애세포들이 서로 투닥거리다 보면 뫼비우스의 띠처럼 답 없는 생각들만 무한 도출됐다. 지연이는 너무 예쁘고 바빠서 잡지 않으면 어디론가 가버릴 것만 같았다.
“지연아.”
캠퍼스를 벗어나며 나란히 걷던 지연의 팔을 조심스레 붙잡고 물었다.
“저녁에 뭐해? 왜요라고 묻지 말구.”
“왜요?”
“……같이 밥 먹자구.”
“아니, 왜요라고 물으면 왜 안 돼요?”
“그냐앙. 너 맨날 그러잖아.”
“정말? 몰랐네.”
그 무심한 얼굴을 보는 찰나에도 현정은 사랑을 확신했다.
“그래서 먹을 거야, 말 거야.”
“안 먹는다 하면 보내주게요?”
“보내주면 집 갈 거야?”
“가지 왜 안 가.”
“……”
“가지 말까요?”
결정을 떠넘기는 말들이 핀볼처럼 오갔다. 가지 말라고 하면 안 가겠지? 속수무책으로 접어든 현정이 말했다. 가지 마. 툭 던진 세 글자. 지연이 씩 웃었다. 아. 김지연 사랑하다가 늙을 것 같애.
“뭐 먹고 싶어?”
“엄청 매운 거요.”
“그래. 가자.”
“그리고 엄청 뜨거운 거.”
“알겠어. 맵고 뜨거운 거 먹자.”
“……싫어요. 왜 알겠대?”
“어?”
“먹지도 못하잖아요 언니.”
“아냐. 먹을 수 있어.”
“됐어요. 농담이니까 딴 데 가요.”
지연이도 나를 좋아할까? 현정은 약 서른여덟 번째 시작했던 원점으로 다시 돌아갔다.
퇴근길이라 사람이 몰리는 지하철을 타도 좋았다. 현정은 인파 속에서 지연을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겉옷 소매를 꼭 붙잡았다. 손이 닿지 않게 걸었다. 사람이 끝없이 들어와 열차 한가운데로 몰리고 밀렸다. 코앞으로 다가온 지연의 얼굴에 콧김을 내뿜지 않으려 꾹꾹 참았다. 팔을 쭉 뻗어 손잡이를 겨우 잡은 현정은 지연이 기댈 수 있도록 어깨 뒤로 남은 한쪽 팔을 둘렀다. 흔들릴 때마다 넘어질 것 같아서. 다른 남자들이랑 닿는 게 싫어서.
열차 안에서 함께 흔들릴 때마다 지연에게서 훅 끼치는 코튼캔디 섬유 유연제 향이 좋았다.
-
논현동의 한 호텔 뷔페를 찾았다. 로비는 벌써부터 꾸며놓은 크리스마스 장식으로 연말 분위기가 물씬 풍겼다. 사람 키만 하게 설치되어 있는 거대한 산타 마을 모형과 빙 두른 기찻길을 지나가는 장난감 기차 세트. 곳곳에 놓인 작은 트리들은 손톱만 한 전구 하나씩을 품고 반짝거렸다. 눈 쌓인 마을을 물끄러미 보던 지연이 손가락으로 바닥 부분을 살살 눌렀다. 새하얀 솜뭉치 안으로 지연의 손가락이 폭 들어갔다. 고객님. 되도록이면 눈으로 감상 부탁드립니다. 지켜보던 직원 한 명이 다가와 말하자 지연은 바로 손을 거뒀다. 저 눈이 뭐로 만들어진 건지 궁금했던 건가? 아이 같은 모습이 너무 귀여워서 현정은 킥킥 웃었다. 웃지 마요. 뾰로통한 지연의 말에 웃음기를 쏙 집어넣었다.
평일 저녁 기준 1인당 19만 원. 아, 그냥 딴 거 먹어요. 지연이 쌩하고 발걸음을 돌리자 현정이 다급하게 말했다. 아니야. 잠깐만. 지연아. 가지 말아 봐. 우리는 돈 안 내.
“왜 안 내요?”
“이 호텔 우리 할머니거라……”
공짜야…… 그렇게 말하고 나니 지연은 순순히 따라와 줬다. 간신히 뷔페에 입성하자 직접 맞이하러 나온 담당 매니저가 둘을 예약 자리로 안내했다. 붉은빛과 보랏빛 계열로 맞춘 인테리어. 대리석 바닥은 내려다보면 얼굴이 다 비치도록 광을 냈다. 기다란 복도를 따라 천장과 벽면마다 줄줄이 달려있는 앤티크한 샹들리에를 지나. 열기가 치솟고 있는 그릴 코너와 일식 코너를 지나. 오색찬란한 대도시의 야경이 훤히 보이는 창가에.
운전기사가 아닌 다른 남자와 마주 앉아 웃고 있는 현정의 첫사랑. 차수연이 거기에 있었다.
못 봤겠지? 안 마주치겠지? 현정은 음식이 한 접시에 최대한 담기도록 듬뿍 쌓아서 왔다. 어디선가 차수연이 자신을 보고 있을까 봐 돌아다니기 겁났다. 토마토 카프레제 위에 갈비찜이 담기고, 관자 세비체에 라구 소스가 섞였다. 현정은 무슨 맛인지도 모르고 먹었다. 수연의 갈색 머리만 보였다 하면 바로 튀어나갈 수 있도록 엉덩이에서 힘을 빼지 않았다. 그야말로 가시방석이었다.
“어디 불편한 데 있어요?”
“어? 아니아니.”
“그런데 왜 자꾸,”
“너 여기 뭐 묻었다.”
상체를 앞으로 뺀 현정이 지연의 볼에 묻은 샐러드 소스를 엄지로 닦았다. 슥. 정신이 하도 없어서 자기가 뭘 한지도 몰랐다. 순간 굳은 지연과 엉덩이를 떼고 일어선 현정의 엉거주춤한 자세. 함부로 손대서 싫었나? 다시 어영부영 앉은 현정은 휴지로 엄지를 닦았다. 테이블이 왜 이렇게 커……
그 뒤로 지연이 말없이 먹기만 해서 현정은 더 불편했다. 수연이 앉은 자리와 가까운 일식 코너 근처에는 얼씬도 못 했다. 지연의 접시에 담긴 연어 한두 점씩 슬쩍 빼먹고는 티없는 웃음으로 얼버무렸다. 지연은 뷔페의 거의 모든 메뉴를 조금씩 다 퍼 담았다. 차곡차곡 쌓아온 굴 그라탕 빼고. 그래봤자 배가 부르다고 두 접시 반밖에 못 먹었다. 여기는 디저트가 일품인데. 현정의 말을 듣고 다시 일어선 지연은 곰돌이 귀 모양으로 장식된 딸기 푸딩 하나만 달랑 담아왔다. 하긴 저렇게 작은 몸에 얼마나 들어가겠어. 현정은 웃음이 났다. 배불러서 시무룩해진 지연을 보고 있자니 뷔페 전부를 사주고 싶었다.
“여기 매일 와서 먹어두 돼. 내가 특별 귀빈으로 지연이 너 이름 걸어놓을 수 있으니까.”
“……”
“그건 그냥 브이아이피도 아니야. 브이브이브이브이아이피야.”
“됐거든요. 자주 먹으면 괜히 질리기만 해요.”
“그럼 가끔. 가끔 나랑 오자.”
먹을 때 제일 행복해 보이는 지연의 얼굴은 매일 봐도 질리지 않겠지만. 현정은 지연과의 소박한 약속을 받아내고 흡족해했다. 메뉴가 주기적으로 바뀌는데 내가 선정할 수도 있어. 오늘 랍스터가 없을 줄 알았으면 해놓으라고 말해놓는 건데. 좀 신이 나서 나불나불 떠들면서 나갔다. 그래서 현정은 자칫하면 모르고 지나갈 뻔했다. 오 미터 앞에서 과일이 담긴 접시를 들고 걸어가던 차수연을.
출구를 앞두고 산처럼 쌓여있는 대게 앞에서 제동이 걸렸다. 일제히 천장을 가리키고 있는 수많은 집게발 사이로 동그란 현정의 두 눈이 빼꼼.
“뭐해요?”
그런 현정을 내려다보며 지연이 물었다. 자, 잠깐만. 한껏 쭈그린 현정이 뒤뚱뒤뚱 걸어갔다. 동그란 양식 코너를 따라 모양새 빠지게. 언니. 왜 그러는데요. 지연도 현정을 따라 자세를 살짝 낮추고는 뒤에서 따라붙었다. 달라붙는 시선도 하나 둘 늘어났다.
“현정아.”
오리걸음으로 동그란 바를 한 바퀴 돌아 제자리에 돌아온 현정을 보고. 수연이 말했다.
“오랜만이야. 사실 아까 너 봤거든…… 그러니까 그렇게 안 피해도 돼.”
“……”
“여전하구나, 너.”
자기가 첫사랑인지도 모르는 차수연. 고작 자신의 운전기사랑 연애한 것 때문에 사이가 어색해진 줄 아는 차수연. 차수연이 무려 자신의 운전기사랑 연애한 것 때문에 술 퍼먹었다가 할머니한테 된통 혼나고 집에서 쫓겨난 적 있던 현정은 어색하게 일어나 말했다.
“어…… 오랜만이네.”
속으로 엄청 원망하고 욕했던 그 얼굴을 직접 보니 막상 미운 말이 나가지 않았다. 일 년을 애가 닳도록 사랑했던 그 얼굴을 직접 봐도 가슴이 떨리지 않았다. 현정은. 바로 뒤에서 영문도 모르고 멀뚱멀뚱 서 있는 지연의 손을 잡았다. 얼떨결에 생기는 용기. 그럼 나는 가볼게. 깔끔한 인사를 남기고 멋있는 퇴장. 그런데.
“저, 저기 고객님.”
“……”
“김현정 고객님!”
“네?”
“계산하고 가셔야 되세요……”
“……”
“……”
저 김.현.정.인데요?
“그건 아는데요…… 박말순 회장님 특별 지시가 내려왔습니다. 계산하고 보내시라고.”
내가 여기 온 건 어떻게 알고? 꽉. 현정은 어금니를 깨물며 지갑을 열었지만 꺼내는 족족 정지된 카드뿐이었다. 이건 필시 박말순 여사가 현정에게 화난 게 있다는 모양이었다. 그럴 때마다 언질도 없이 돈줄부터 끊어버렸으니까. 현정은 어쩔 수 없이 현금을 탈탈 털어 내밀었지만 칠만 원이 부족했다.
“나한테 거짓말 친 거예요? 공짜라고?”
“아니야. 거짓말은 아니야 진짜…… 갑자기 할머니가 왜 그러시지.”
“……”
“진짜 미안한데…… 지금 칠만 원만 계산해줄 수 있어?”
“할 수는 있는데……”
계좌이체밖에 못해요, 지금은. 그럼 그거라두…… 현정은 진땀을 줄줄 뺐다. 하필 이런 날. 지연에게 우리는 특별히 공짜라고 하고, 브이브이브이브이아이피로 이름까지 걸어주겠다며 생색내고, 지연의 손까지 덥석 잡은 날. 와이파이 비밀번호를 묻고 은행 어플까지 다운받는 지연 앞에서 현정은 쩔쩔맸다. 지켜보던 담당 매니저와 뷔페 직원들도 현정의 눈치를 보며 단체로 허둥지둥. 그러나 어떻게 안 되겠냐는 김현정의 부탁보단 돈 다 못 내면 설거지까지 시키라는 김현정 할머니의 지시가 훨씬 더 영향력 있었다. 지연이 공인인증서 복사하기에서 가로막히자 앞치마와 고무장갑을 들고 온 직원 한 명이 어물쩍 말했다. 딱 마감까지만 설거지해주시면 돼요…… 감히 호텔 회장 손녀딸한테 설거지 시키는 직원도 울상, 손에 물 한 번 묻혀본 적 없는 김현정은 더 울상.
그런 상황을 다 지켜보고 있던 차수연이 말했다.
“나머지 내가 낼게. 현정아.”
“……”
“대신 다음에 시간 한 번 내줄래? 같이 밥 먹자.”
맞잡았던 손의 촉감도 잊고 부끄러움과 굴욕감만 차오르던 그날. 현정은 지연과 함께 멀거니 서서 지갑을 가져오는 차수연을 기다릴 수밖에 없었다. 난데없이 나타난 차수연 앞에서. 고작 칠만 원으로 발목이 붙잡혀 현정의 자존심은 바닥을 쳤지만. 무너진 자신의 자존심보다도…… 영하로 뚝 떨어진 기온과 어두워진 지연의 얼굴이 현정의 마음을 뼛속까지 시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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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말순 손녀 대학 특례 입학. 시험 대리인 고용. 레포트 비리.
자극적인 타이틀의 기사들이 잇따라 터졌다. 김현정은 정정당당히 정시 전형으로 입학했다. 대학 시험도 다 본인이 직접 쳤다. (그래서 학점이 시원찮다.) 제출했던 과제는 절반이 남의 거라서 할 말이 없었지만 ‘레포트 비리’라니 단어가 너무 거창했다. 대출, 과제 베끼기는 대학 사회에 이미 만연했지만 돈 많고 유명한 박말순, 김현정 이름과 같이 있으니 잣대가 훨씬 엄격해졌다. 거기에 입학 전담 코디네이터까지 거슬러 올라가니 부잣집 자녀들의 특권 논란에도 불똥이 튀겼다.
모든 기사 제목이 진실은 아니었지만. 이번 사건으로 박말순의 명성과 권위에 손실이 간 건 팩트였다. 할머니 이름에 먹칠을 한 김현정은 그날 이후로 자택 대문을 통과할 수 없었다. 통금 있는데 내쫓는 게 어딨어. 벤츠와 롤스로이스와 람보르기니가 다 저 안에 있는데. 할머니. 차 한 개라도 좀 꺼내주고 닫아요……
단단히 매정해진 박말순은 답이 없었다. 김현정이 어른답게 살기를 바라는 거였다. 자신 덕에 편하게 살아온 손녀 김현정이 세상을 너무 만만하게 볼까 봐. 다른 사람들은 다 겪어보는 감정을 내 손녀만 모를까 봐. 박말순은 가정부가 정성껏 차려놓은 밥상 위에 지가 못 먹는 가지볶음이 올라와 있다고 때 쓰던 일곱 살 김현정을 호되게 혼냈다. 자기보다 나이가 한참 많은 퍼스널 쇼퍼에게 버릇없이 반말 찍찍했던 초딩 김현정의 눈물을 가차 없이 쏙 빼냈으며. 철이 좀 들었나 싶더니 술을 죽어라 퍼마시고 들어와 엉엉 울던 예비 고 삼 김현정을 아무것도 없는 길바닥으로 내쫓았다. 그래놓고 추운 날씨에 덜덜 떨고 있을 손녀가 마음에 걸려 고작 하루 만에 문을 열어줬다.
그래서 이번에도 금방 대문이 열릴 줄 알았다. 카드 정지가 풀릴 줄 알았다. 벌써 나흘째. 현정은 불가리 손목시계를 되팔아 하루 숙박 40만 원씩 하는 호텔에서 연명하고 있었다. 하필 싼 시계를 차고 있어서 이대로는 일주일도 못 버틸 것 같아 똥줄이 탔다. 아침부터 전화로 현정의 신세한탄을 듣던 도연이 큰 소리를 냈다.
“뭐라고요? 40만 원? 당장 그 호텔에서 나와요, 언니!”
“……근데 여기 조식이 진짜 맛있는데.”
“그러니까 쫓겨나죠. 내가 못 살아, 진짜.”
“……”
귀에 딱지가 앉도록 도연의 성화를 듣던 현정은 결국 호텔부터 나왔다. 럭셔리카도, 명품 손목시계도 없이 한산한 거리 위에 달랑 서 있자니 몸도 마음도 허했다.
이따 학교 와요? 지연에게서 문자가 왔다. 뷔페에서의 일이 쪽팔려서도 있지만 샤워가운 입고 호텔에만 내내 처박혀 있느라 지연을 못 만난 지 오래됐다. 멋 부린다고 춥게 입은 펜디 체크 재킷과 첼시 부츠. 뷔페에서 입고 있었던 옷차림 그대로였다. 현정은 창피했다. 같은 패션을 두 번이나 보여줄 순 없었다. 안티에이징 크림도 없이 호텔 기본 스킨로션만 내리 쓰다 보니 며칠 사이 피부도 푸석해진 것 같았다.
「아니ㅜㅜ」
답장을 보내고 도연의 집으로 향했다.
지금쯤 도서관에서 동그란 안경을 끼고 공부하고 있을 지연이. 이젠 다른 강의에서도 유명 인사가 된 '김현정'의 대출을 할 수 없어서 일자리가 사라진 지연이. 지연이가 낮에 다른 알바 지원해버리면 어떡하지. 더 이상 내 학교에 와주지 않으면 어떡하지. 같이 학식도 못 먹고 도서관도 못 가면 어떡하지. 온통 지연으로 시작해서 지연으로 끝나는 걱정들뿐. 현정은 도연의 베개에 닭똥 같은 눈물을 찔끔찔끔 묻혔다.
“그럴 거면 나가요, 언니.”
“……너 정말 너무한다. 나 갈 데도 없어.”
베개 적셔서 그러는 거면 안 울게…… 현정은 눈물 자국으로 촉촉해진 베갯잇을 문질렀다. 그런다고 지워지는 건 아니었지만. 그 찌질한 광경을 보고 있던 도연이 혀를 끌끌 차며 꿰뚫었다. 언니. 지금 지연 언니 보고 싶죠. 그런데 돈도 없고 옷도 없어서 못 가는 거죠? 현정의 투명하고 뻔한 속내를.
“나 같으면 재워달라고 할 거예요. 지연아. 나 집에서 쫓겨났어. 그래서 갈 곳이 없어. 재워줘. 딱 이렇게 말하라구요.”
“쫓겨났다고 어떻게 말해…… 쪽팔리잖아.”
“언니 그렇게 등신처럼 굴어서 연애 어떻게 할래요? ‘위기를 기회로 삼아라.’ 몰라?”
“등신? 말이 심해?”
“병 하려다 참았거든요.”
“……”
내가 지연이를 꼬실 수 있을까? 지연이랑 연애할 수 있을까? 인생에 위기가 별로 없었던 현정은 정말 몰랐다. 이걸 기회로 어떻게 삼아. 도연이 옷장에서 자신의 빨간 아디다스 트랙탑을 꺼내 현정에게 건넸다. 이거 입고 가요. 그게 더 간지야. 시크릿 가든에서 김주원도 츄리닝 입고 길라임을 꼬셨다고 말하면서.
“요즘은 또 너무 꾸미면 별론 거 알죠.”
“……그런가?”
“사랑은 원래 츄리닝에서 시작하는 거예요.”
현정은 긴가민가한 눈으로 시크릿 가든을 검색했다. 백화점 사장이라는 김주원은 정체 모를 호피무늬나 물고기 비늘 같은 츄리닝을 입고서도 상대를 그윽한 눈빛으로 바라볼 줄 알았다. 나름의 신빙성이 생긴 도연의 말. 그래서 현정도 김주원이 입은 것처럼 트랙탑 지퍼를 턱밑까지 쭉 올리고 전신 거울 앞에 섰다. 기분탓인지 이렇게 입으니까 막 용기가 생기는 거 같았다.
「머해?」
「면접 보러 가요」
「몇 시에 끝나는데?」
「아홉시쯤 왜요?」
딱 거기서 현정은 답장을 뚝 끊었다. 지연의 집으로 향하는 골목길 어귀에서 짠하고 나타나는 서프라이즈 계획. (그렇다고 전에는 예고하고 기다린 것도 아니었지만.) 새로이 선보이는 츄리닝룩과 그윽한 눈빛으로 지연의 하루 끝에서 사랑을 시작해보기. 자신이 문자를 씹은 건 처음이라 ‘그냥’이라도 보낼까 고민하다 말았다. 김주원이 차도남 컨셉이니까. 김현정도 차도녀 비슷하게, 차가운듯하면서도 간간이 튀어나오는 다정한 눈빛과 말투를 어쩌지 못하면서도 어딘지 쌀쌀맞으면서도 상대를 위해서라면 전부를 바칠 것 같은 컨셉을 고수하기로 맘먹었다.
부옇게 먼지 쌓인 만물 슈퍼 유리문 위로 백수 같은 현정의 전신이 비쳤다. 빨간 츄리닝과 평범한 숏패딩. 사이즈가 얼추 맞는 도연의 검정 컨버스화로는 찬바람이 솔솔 들어왔다. 현정은 잔스포츠 백팩을 멨다가 벗었다가, 다시 한쪽 어깨로 멨다가 벗었다가를 반복했다.
밖에서 아이스크림을 뒤적거리다가 손발이 시린 탓에 슈퍼 안의 온장고로 발길을 돌렸다. 레쓰비, 쌍화탕, 꿀홍삼밖에 없는 허름한 온장고에선 윙윙거리는 필터 소리만 크게 났다. 현정은 차가운 초코라떼 캔 두 개를 들고 안방 문을 똑똑 두들겼다. 아줌마. 이거 저기에 넣어놔도 돼요? 왜. 이따 와서 사 가게? 여기에서 좀 기다릴 일이 있어서요…… 패션이 좀 바뀌었다고 탤런트 같다던 현정을 알아보지 못한 주인아줌마. 아가씨. 혹시 빚쟁이는 아니지? 그렇게 또 수다의 물꼬가 트였다.
열시, 열시 반이 될 때까지도 가게 앞을 지나는 지연을 볼 수 없었다. 아주 멀리서 오는 중인가. 아니면 오다가 무슨 일이라도 생긴 건가. 가게 밖까지 들락날락거리던 현정은 코를 훌쩍거렸다. 이렇게 오래 기다리는 건 온장고 속의 초코라떼가 아주 따뜻하게 데워지고 있다는 것 말곤 하나도 좋은 게 없었다. 아줌마는 어느새 허리가 떨어져 나갈 거 같았다는 김장 얘기를 지나 얼마 전 봤다는 조카손녀 사진까지 보여줬다. 그래. 어차피 할 것도 없는데 다 들어주고 말지. 현정은 더 나아가 자기 얘기까지 꺼냈다. 공부 못했다고 할머니한테 혼났다는 대강의 스토리만 흘리면서. 세상에. 그건 좀 심했다. 그쵸. 너무했죠. 아줌마가 편 들어주는 김에 할머니 뒷담도 같이 깠다.
“아줌마는요. 손녀가 어떨 때 제일 예쁠 거 같아요?”
“어유. 밥 잘 먹고 쑥쑥 커주기만 하면 예쁘지.”
“진짜요? 공부 못 해도?”
“공부야 뭐 잘하면 더 좋지만은…… 좋은 사람 만나서 이~뿌게 사랑하는 게 인생의 꽃 아니겠어.”
그 좋은 사람이. 현정에겐 벅차게 좋은 사람인 김지연이 드디어 나타났다. 골목 앞 대로변에 세워진 하얀색 아반떼에서, 이름 모를 남자와 함께.
또 하필 이런 날이었다. 차도 없는 뚜벅이 신세에 껄렁한 츄리닝을 입은 날. 추워서 그윽한 눈빛은 안 나오고 콧물만 찔찔 나오는 날. 하나도 내세울 게 없는 날. 현정은 뜨거워진 초코라떼 두 개를 주머니에 쑤셔 넣고 나갔다. 슬금슬금. 인사를 나누고 있는 두 사람을 향해. 지연아. 부르고 싶었지만 다른 사람 앞에서 쉽게 웃어주는 지연을 보자 말이 쏙 들어갔다. 기척을 느끼고 이쪽을 돌아보는 얼굴. 고작 며칠 못 봤다고 보고 싶어 죽는 줄 알았던 얼굴. 원래도 말갛던 지연의 피부는 더 더 좋아 보였다.
지연이는 내가 보고 싶지 않았나. 내가 답장을 씹어도 아무렇지 않았나.
“……”
“……”
“언니가 여긴 어쩐 일이에요?”
“아. 지연씨 친언니 분이세요?”
“그건 아니고요…… 그냥 아는 언니예요.”
그냥 아는 언니? 난 너랑 사랑할 생각을 하고 있는데.
“친한 언니예요. 많이, 친한.”
못 미더웠던 현정은 입에 힘을 주어 말했다. 아, 닮아서 친언닌 줄 알았어요. 175쯤 돼 보이는 남자의 눈코입을 하나하나 뜯어보면서. 아무리 봐도 내가 더 예쁘고 잘생겼는데. 이게 바로 아반떼와 람보르기니의 차이랄까. 현정의 머릿속에서만 묘한 신경전이 벌어졌다. 불쑥 나타난 현정과 서먹해진 분위기 끝에 남자가 운을 뗐다. 그럼 다음에 봐요, 지연씨. 네. 태워다 주셔서 고마워요. 둘 사이에 오가는 담백한 끝인사에 현정은 열불이 났다. 멀어지는 구식 아반떼의 뒤꽁무니가 사라질 때까지 째려봤다.
“여태 나 기다렸어요?”
지연이 물었다. 무덤덤한 목소리. 설명을 바라는 눈. 끌어올린 목폴라로 인해 지연의 얼굴은 한층 더 작아졌다.
그럼 내가 여기에 너 말고 올 이유가 뭐가 있어. 슈퍼 아줌마랑 얘기하면서 기다렸어. 말 되게 많으시더라. 수다쟁이는 물에 빠지면 입만 둥둥 뜬다는데 저 아줌마는 아마 입부터 가라앉을걸. 물속에 있는 붕어들이랑 수다 떠느라. 그리고 이거 봐. 지금 너랑 커플 신발이다. 너랑 같이 먹으려고 초코라떼도 데우면서 기다렸어, 나. 쫀디기도 잔뜩 샀어. 어떡하지. 할 말이 이렇게나 많은데. 오늘은 술을 안 줬다고 현정의 속마음이 꼭꼭 숨어 버렸다. 지연아. 나 집에서 쫓겨났어. 그래서 갈 곳이 없어. 재워줘. 지연아. 나 집에서 쫓겨났어. 그래서 갈 곳이 없어. 재워줘. 현정이 속으로 수십 번씩 연습한 말도. 혀끝에 맴돌기만 하고 나와 주질 않았다.
한 시간 반을 기다린 현정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럼 왜 왔어요?”
“……아줌마랑 얘기 좀 하느라구.”
“아줌마?”
“저 슈퍼 주인아줌마 보러 올 일이 있어서…… 온 김에 너가 있길래.”
초식동물도 아닌데 개풀 뜯어 먹는 소릴 해버렸다. 지연이 그 말을 믿는지 안 믿는지는 지연이 보여주지 않는 이상 알 길이 없었다. 어쩔 땐 대놓고 핀잔을 주거나 속아준다는 듯 피식 웃어 보였지만. 또 어쩔 땐 세상에서 제일 어려운 포커페이스로 응했다. 개도 아는 표정만 짓는 현정이 해독하기엔 한참 불리했다.
“근데 아까 그 남자는 누구야?”
“그냥 예전에 호텔 알바하다가 알게 된 사이예요. 오랜만에 밥 먹자고 연락 와서요.”
“많이 친해?”
“알게 된 지는 꽤 됐죠.”
알게 된 지 고작 두 달밖에 안 된 현정은 지연이 혼자가 아니었으면 좋겠단 마음을 취소했다. 흡사 굴러들어온 돌의 심정과 같이. 자기보다 오래 박혀있던 그 남자를 발로 뻥뻥 차고 싶었다. 지연의 눈앞에서 안 보이게. 네 곁에 아무도 없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나만 있었으면 좋겠다. 지연이 듣는다면 혀 내두를 말들을 속으로만 뇌까렸다. 아직도 다듬지 않은 앞머리는 여전히 지연의 두 눈가를 찔렀다. 그거 때문에 더 모르겠어. 네 표정을. 네가 귀엽다는 거 빼곤 다 모르겠어. 현정은 지연의 앞머리로 손을 뻗으려다 말았다. 주머니 속에서 꼭 잡고 있던 음료캔 의 온기로 손바닥에 땀이 배 있었다.
“뭐 하는 사람인데?”
“이번에 호텔에서 내부발탁으로 정규직 됐대요. 현장에서 오래 버티다 보니까 입소문 났다구."
“다음엔 또 왜 보재?”
“그게 왜 궁금한데요?”
“……저 사람이랑 뭐 썸 그런 거 타는 거야?”
“지금 나 취조해요?”
어떻게 된 게 대화엔 갈수록 물음표만 있고 마침표가 없었다. 아니라고 딱 한 마디만 해주지. 지연은 말을 돌렸다. 평소답지 않은 현정의 꼬락서니를 슥 훑으며 말했다. 옷은 또 왜 그렇게 입었냐면서. 현정은 제가 가진 마음이란 마음은 다 흔들고 지나가기만 했던 옛 풋사랑들이 떠올랐다. 그때랑 레퍼토리가 똑같아. 결국엔 혼자만 무대 밖으로 밀려나는 전개까지 전부 똑같았다. 짙게 바른 체리색 입술을 봐도 불안은 증폭했다. 내가 사 준 립스틱을 왜 그 남자랑 있을 때 발라? 속절없이 유치해지는 마음.
현정은 퉁명스레 답했다.
“왜. 이상해? 너도 이렇게 입고 다니잖아.”
그 말을 들었던 지연의 표정을 이번만큼은 단번에 알 수 있었다. 그 말을 하는 순간에도 현정의 이성과 감정이 싸우고 있었으니까. 안 돼. 그렇게 말하면 안 돼. vs 뭐가 안 돼. 짜증 나잖아. 그 사이 지연은 멀찍이 떠났다. 그렇게 별로였나 봐요. 내 옷이. 지연이 남기고 간 불퉁한 말을 현정은 그 자리에서 한참 곱씹었다.
다시 도연의 집으로 기어들어간 현정은 대뜸 집주인의 멱살을 잡았다. 사랑은 츄리닝에서 시작한다며. 싸움만 시작됐잖아. 어떡할 거야. 책임져. 도연은 기회를 다시 위기로 만들어 버리고, 제 패딩에 초코 라떼나 줄줄 흘려온 현정의 멱살을 같이 잡았다. 내가 언제 츄리닝 입고 가서 그따위로 말하래요? 그러면 있던 마음도 달아나겠다! 있어 보이지도 않았어. 망했어. 진짜 망했어. 그 남자랑 진짜 썸 타는 거면 어떡해? 나는 왜 이렇게 운빨이 지지리도 없지? 근데 그 남자가 지연이 친언니 아니냐고 물어봤거든. 닮아 보였나 봐. 내가 지연이랑 닮았나 봐. 닮으면 사랑 맞지. 사랑 맞는데. 잉잉.
그날 밤 거실로 쫓겨난 현정은 새벽이 깊도록 감성에 푹 빠졌다. 아무도 없는 드넓은 거실이 마치 텅 빈 현정의 맘을 대변해주는 망망대해 같았다. 잠이 오지 않아 맥주 캔을 홀짝이며 잔뜩 사온 쫀디기를 먹었다. 딱딱해서 씹을 때마다 이만 아팠다. 슈퍼에 가면 얼마든지 살 수 있는 쫀디기가 지연의 집에선 왜 그렇게 맛있었는지. 불 꺼진 남의 집 거실 쇼파에 앉아 청승 떨면서. 김현정은 박말순 여사에게 문자를 보냈다.
「할머니 나 이제 사랑이 뭔지 좀 알 것 같아요」
궁금한 거. 유치한 거. 간지러운 거. 기다리는 거. 그 사람 생각만 하면 잠이 안 오는 거.
그런데 인생의 꽃을 피우려면 너무 많은 물이 필요한 것 같아요. 현정은 북유럽풍 패턴 쿠션에 코를 박고 또 잉잉 울었다. 바위섬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지연이의 어머니가 좋아했다던 노래. 그래서 지연의 아버지가 좋아했다는 노래. 그래서 지연이 좋아한다는 노래. 그래서 이젠 현정마저 좋아해버린 노래를 밤새 들으면서.
김지연 너는 내가 미워도. 나는 너를 너무 사랑해. 지저귀는 새소리가 들릴 때쯤에야 겨우 든 잠에서 꿈을 꿨다. 지연을 옆에 태운 전용 헬기에서 하트 모양의 바위섬을 가리키며 말했다. 내 마음 좀 봐줘. 그 말을 들은 지연의 표정은……
박말순 여사에게서 걸려온 전화 벨소리 때문에 못 보고 깼다. 벌떡 일어난 현정은 나갈 채비를 했다. 할머니가 뭐래요? 그만 염병하고 들어오기나 하래.
-
이틀 내내 거리를 적시던 진눈깨비가 그쳤다. 올겨울 첫 한파주의보가 발령되면서 순식간에 얼어붙은 길 위는 미끄러웠다. 현정은 넘어지지 않으려 부단히 애쓰며 걸어 다녔다. 따스한 햇볕과 단풍으로 가득 찼던 캠퍼스의 풍경은 허전하고 쌀쌀하기만 했다. 지연이 없어서 더.
뭐에 홀린 사람처럼, 다 잃은 사람처럼 걷다 보면 캠퍼스 곳곳에 남은 지연과의 추억이 현정을 더 괴롭게 했다. 도연은 이별이라도 했냐고 놀리기도 하고, 원래 다 그런 거라며 두 살 많은 현정을 위로하기도 했다. 정신 놓고 걷던 현정이 빙판길에서 자빠지고 말면 다가가 일으켜 세웠다. 어차피 망한 거 고백이라도 해보고 끝내요! 자기 성격답게 화끈한 해결책을 대뜸 던지면서.
고백? 고백을 어떻게 하지…… 생각해보니 살면서 고백이란 걸 한 번도 안 해본 김현정은 드라마 속 고백 모음을 검색하기 시작했다. 거기서 마음에 드는 명대사 몇 가지를 골라 메모장에 적었다. 옆에서 흘끔 보던 도연이 말렸다. 언니 진짜 미친놈처럼 왜 그래요.
* 나 싫어하면 안 돼.
* 우리 그냥 사랑할까.
* 잘 들어. 너 사람 진짜 신경 쓰이게 해.
* 나 너 좋아하냐.
* 너무 이상하니까 나는 그런 댁이 얼떨떨하고 신기해. 그래서 나는 지금 딱, 미친놈이야.
김현정이 태어나 진짜 미친놈처럼 굴었던 적은 (자신이 생각하기에) 딱 네 번 있었다.
유년을 함께했던 새하얀 스코티시폴드 샤키가 죽었는데 슬퍼할 겨를이 없도록 아빠가 새로운 고양이를 데려왔을 때. 흰 양말을 신은 것처럼 발 빼곤 새카만 그 고양이가 괜히 미웠던 열 살배기 김현정은 고양이를 침대 밖으로 툭 밀쳤다. 굉장히 비인도적인 짓이란 걸 알아서. 현정은 곧바로 안아들어 미안해미안해 뽀뽀했지만 고양이 성정이 까칠해서인지 밀쳐졌던 그때의 기억이 남아서인지 내킬 때 말고는 자신을 함부로 쓰다듬지 못하게 한다.
두 번째도 열 살 적의 기억인데 어린이날 울며불며 부모님한테 아득바득 대들었을 때. 못생긴 강경호(박말순네 주치의 막내아들)랑 같이 놀이공원 가기 싫어. 진희(같은 반이던 예쁘장한 아역배우)랑 같이 가고 싶어. 찡찡찡.
세 번째로는 알다시피 차수연 때문에 미자 주제에 술 처먹고 울었을 때. 네 번째도 차수연 때문이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 없어 입 냄새난다는 터무니없는 이유를 대며 운전기사 안 자르면 등교 안 하겠다고 시위했을 때였다. 그래도 여타 또래에 비하면 현정은 사건사고 없이 자라난 편이었다. 잘 길들여진 애완동물처럼, 공들여 완성시킨 백자기처럼. 인사성이 밝아야 돼, 다정해야 돼, 경청이 몸에 배야 돼, 와 같은 박말순의 빈번하고 혹독한 가르침 덕분이었다.
하지만 더는 없을 것 같았던 현정의 미친놈 데이가 오늘로써 다섯 번째에 추가될 것 같았다.
학생증을 돌려주겠다며 학교에 들른 지연은 덧없는 말로 현정을 얼빠지게 했다. 남은 팔백삼십만 원은 어떻게 할까요. 현정은 잊은 지 오래된 빚을 혼자서만 갚아온 지연이 미웠다. 저번 일에 대해 사과하기 위해 도연과 힘 합쳐서 준비해놓은 말들도 까먹어버렸다. 그딴 거 다 필요 없는데. 네 마음만 주면 되는데. 너가 그렇게 말하면 우린 아무것도 아닌 사이였던 것 같잖아. 두둥실 떠다니던 마음이 보이지 않는 나락 속으로 끝없이 가라앉았다.
“너 정말로 갚고 싶어서 묻는 거야?”
“그럼 그게 없는 돈이라도 돼요?”
“언제는 천만 원 깎아달라며.”
“언제는 다 갚으라면서요.”
현정을 얼게 만드는 지연의 시린 눈.
“그건……”
너를 더 만나고 싶어서 그런 거지. 혀에 꽁꽁 붙은 말. 망설이던 현정은 쏘아붙이듯 대답했다. 이번만큼은 져주기도 져버리기도 싫은 결전이었다.
“그래 그땐 받을 생각 있었는데, 이젠 없어졌어. 너한테도 좋은 거 아니야? 그러니까 갚지 마. 갚을 생각도 하지 마. 한 푼도 받기 싫어 나는.”
“……왜 싫은 건데요? 돈이 싫어요?”
“……”
“착해빠져서? 원래 그렇게 다 눈감아줘요?”
“그게 아니라……”
“아니면. 내가 다 못 갚을 것 같아서요?”
사랑이란 걸 확실히 구분한 현정은. 그 말이 정말 미웠다. 모자에 털이 달린 밤색 패딩을 입고 빨간 목도리를 돌돌 말고 온 지연의 모습은 고양이보다 토끼보다 곰돌이보다 더 귀여웠는데. 체리색도 없이 살짝 부르튼 입술로 현정의 마음 여기저기에 작고 딱딱한 흠집을 냈다.
“딱 봐도 내가 갚을 능력 없어 보여서. 그래서 그러는 거잖아요 언니. 필요 없는 대출이나 시키면서 깎아주려고 하고, 좋은 곳 데려가고, 비싼 거 먹여주고.”
“……”
“그러면 좀 마음이 편해요? 불우이웃 도운 것 같고 그래요? 뿌듯해요?”
그 한마디 한마디에 퍽퍽 맞는 것처럼 현정의 가슴이 뻐근했다. 밉다. 미운데 사랑스러운 얼굴. 내가 널 불쌍하게 바라봤나. 내 눈빛이 널 아프게 했나. 현정은 속이 상했다. 고개를 툭, 떨구자 지연의 찢어진 스키니진 사이로 보이는 허벅지 살갗이 빨갰다.
아무리 불러도 대답 없는 샤키를 울면서 톡톡 건드렸을 때보다, 어린이날이면 엄마 아빠가 남의 집에 자신을 반려견 맡기듯 데려다 놓고 떠났던 것보다, 할머니의 지나친 잔소리보다, 빼앗아가던 사랑과 빼앗겼던 사랑보다도. 비교도 안 되게 속상해서 눈물이 글썽글썽 나려고 했다.
“너는……”
나 싫어하면 안 돼. 우리 그냥 사랑할까. 잘 들어. 너 사람 진짜 신경 쓰이게 해. 나 너 좋아하냐. 차곡차곡 모아놨던 고백들도 무용지물이었다. 김지연. 너만 보면 자꾸 다른 말이 튀어나오고, 온몸이 콩닥콩닥 뛰고, 귀 끝이 빨개져. 너한테 돈 갚으라고 한 건 내가 너를 좋아해서야. 이제 와서 갚지 말라고 한 건 내가 너를 사랑해서야. 축축해진 눈시울로 숨을 고르던 현정이 가까스로 지연을 마주 보며 말했다.
“나랑 잘해볼 생각이 없어?”
얼떨결에 현정은 고백했다. 두 눈을 질끈 감고 싶었다. 지연을 똑바로 보고 있기가 겁났다. 여전히 모르겠는 표정. 지연이 뜸 들일수록 현정의 심장이 무르익었다. 일 초가 한 시간처럼 느껴졌다. 시간이 이렇게 느리게 흐르던 거였나.
“그게 무슨 말이에요?”
마침내 지연이 물었다. 무슨 말이냐면, 무슨 말이냐면…… 아. 모르는 게 아니라 모르는 척을 하는 건가. 어떤 길로 향하고 있었는지 갈피를 영영 놓친 것처럼 눈앞이 까무룩 했다. 없다는 대답을 들어버릴까 무서워서……
“미안. 말이 헛나왔다.”
겁 많은 김현정은 질러놓은 고백도 다시 주워 담았다.
“못 들은 거로 해줘. 그리고……”
침잠한 얼굴로 간격을 두고 말했다.
“천천히 갚아. 계좌 번호는 국민 5403……”
그렇게라도 해야 지연과의 연이 끊어지지 않을 것 같았다. 현정은 반대로 돌아서서 걸었다. 계좌번호는 지금 부르지 말걸 미친년…… 돌아서자마자 후회했다. 참았던 숨을 터뜨리며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았다. 동기와 마주치면 뚝 그치고 인사했다가 혼자가 되면 다시 눈물을 흘리면서 걸었다. 흐르는 게 금방 굳어서 얼굴은 만신창이가 됐다. 세상에서 제일 등신 같은 고백 랭킹에 오를 것 같은 날이었다. 도연의 말대로 등도 아니고 병이 어울렸다.
악!
기어코 계단도 걷듯이 내려가던 김현정은 일곱 칸 위에서 굴렀다. 부러진 것 같은 오른쪽 팔을 부여잡고 그 자리에서 꼼짝도 안 했다. 너무 아파서 반. 쪽팔려서 반. 괜찮으세요? 누군가 다가와서 일으켜 세워주려고 하자 현정은 벌떡 일어났다. 네. 멀쩡합니다. 괜찮은 척 집으로 돌아간 김현정은 결국 오른쪽 팔에 깁스한 채 엉엉 울었다. 김현정이 엉엉 울게 된다는 건 짝사랑을 끝내야 한다는 레퍼토리였다.
접어놓은 페이지처럼 지연의 얼굴은 불쑥불쑥 펼쳐졌다. 눈만 떴다 하면 아침부터 방 천장에 아른거렸다. 현정은 팔을 다친 걸 다행으로 여겼다. 지연 때문에 밥이 목구멍으로 넘어가지 않는 것도, 지연 때문에 허송세월 멍만 때리게 되는 것도, 지연 때문에 손에 아무것도 잡히지 않는 것도 전부 금 간 오른팔 탓을 할 수 있었다. 코앞으로 닥쳐온 기말고사도 합리적 포기가 가능했다. 팔이 아파서 운전을 못해. 대중교통도 못 타. 팔이 아파서 못 씻어. 팔이 아파서 못 먹어. 배고파. 학교에 못가. 과제를 못해. 공부를 못해.
뛰는 현정 위에 나는 말순 있다고, 박말순은 한 술 더 떠서 대적했다. 김현정 운전기사, 김현정 경호원, 김현정 공부 도우미, 김현정 식사 셔틀, 김현정 머리 감기고 말리기 셔틀까지 돈 주고 고용하더니. 초면인 사람들이 나타나 현정을 씻겨주고 먹여주고 모셔줬다. 계단만 보였다 하면 우락부락한 경호원이 두 팔을 대자로 뻗으며 과잉보호했다. 강의실을 가든 화장실을 가든 현정의 뒤로 세 명이 열을 지어 따라다녔다.
학교 앞 커리 집에서 익숙지 않은 왼손으로 부들부들 퍼먹던 현정이 카레를 다 흘리며 숟가락을 놓쳐버렸을 땐. 옆 테이블에 앉아 자신만 예의주시하던 고용인들이 득달같이 달려들어 숟가락을 쥐여주고 티슈를 넙죽 바쳤다. 김현정은 이마를 짚으며 박말순에게 전화했다. 할머니…… 저 다 나은 것 같아요…… 그 뒤로 김현정은 팔이 아파도 성실히 학교생활에 임할 수 있었다.
김지연 잊게 하는 법도 할머니한테 의뢰하면 좀 나을까. 어제도 오늘도 현정의 정신은 만물슈퍼 평상에 앉아 지연을 기다리고 있었다. 내일도 기다릴 것이다. 지금도 기다리고 있는 현정은 다 적지 못한 시험 답안지 여백에 삐뚤빼뚤한 왼손글씨로 지연과의 궁합을 점쳤다.
김 김 현 지 정 연
5 5 7 4 6 5
0 2 1 0 1
2 3 1 1
5 4 2
9 6 %
헐. 96퍼면 운명이잖아.
이건 김현정이 짝사랑을 끝낼 수 없다는 징조였다.
-
칠만 원 사건을 계기로 간간이 연락해오던 수연이 느닷없이 모바일 청첩장을 보냈다. 설마 차수연이 결혼을 해? 현정은 덜덜 떨리는 손으로 링크를 눌렀지만 다행히도 신부 이름은 차수연이 아닌 오윤미였다.
수연의 고3 시절 베프 오윤미. 김현정 기억 속의 오윤미는 ‘현정아 수연이’로 시작되는 말만 했던 순간밖에 없었다. 현정아 수연이 찾니? 현정아 수연이 보건실 갔어. 현정아 수연이 곧 생일인 거 알지? 현정아 수연이는 향초 좋아해. 현정아 수연이는 해산물 싫어해. 그래서 오윤미도 혹시 여자를 좋아하는 게 아닐까 추론한 적도 있었는데 한창 젊은 나이에 벌써부터 시집을 가버리다니 안타깝게 됐다고 생각했다. 그래도 짝사랑을 도와준 옛정이 있지. 쇠뿔도 단김에 빼랬다고 현정은 이참에 미루고 미루던 수연과의 저녁 약속도 퉁치기 위해 흔쾌히 수락했다.
멀리서 체크 롱코트를 입고 걸어오는 차수연이 손을 흔들었다. 현정도 반깁스 한 팔을 최대치로 올려 로봇처럼 뻣뻣하게 흔들었다. 팔은 왜 그래? 계단을 좀 헛디뎌 가지구…… 현 짝사랑 생각하다 다치게 된 사연을 전 짝사랑한테 말하고 있으니 기분이 묘했다. 웨딩홀 로비에 들어서자 아는 얼굴이 생각보다 많았다. 한구석에선 작은 동창회가 열리고 있었다. 나름 화려하고 붙임성 있게 살았던 현정은 머쓱하게 인사를 주고받으며 돌아다녔다. 너넨 아직도 붙어 다니냐? 차수연한테 고백했다 차였던 한 남자 선배도 있었다. 그때도 눈치 없이 굴었던 새끼. 생각해보면 자신과 같은 처지라는 게 짜증나서 수연의 팔짱을 끼고 말했다. 왜요. 부러워요? 차수연 앞에서 오래간만에 발동한 유치함이 스스로도 낯설었다.
소속이 없는 김현정은 신부 대기실 바깥에서 어슬렁거렸다. 방금 들어갔던 수연이 다시 문을 열고 현정을 불렀다. 현정아. 윤미가 너도 들어오래. 어? 아, 나는 괜찮은데…… 오윤미와 친하지도 않은데 무슨 얘길 할까 싶어서 느릿느릿 대기실 안으로 발을 들인 현정은 벌써부터 어색……
“어머, 얘!”
퍽. 4년 만에 만난 친하지도 않은 오윤미가 현정의 등짝을 때리며 격하게 반겼다. 들고 있던 부케로 입을 가리고 현정만 알아들을 수 있게 속닥속닥. 현정아 수연이…… 남자친구 있는 건 알아? 너 아직도 수연이 좋아하는 건 아니지? 무려 오늘 결혼하는 사람이 남의 동성애를 신경 써주고 있다는 사실이 현정은 눈물겹게 고마웠다.
언니. 걱정해줘서 고마운데요…… 저 이제 다른 애 좋아해서 괜찮아요. 어머. 여자친구? 아뇨. 남자친구? 아뇨. 너 또 짝사랑하니? ……안 괜찮은 것 같아요. 현정은 오윤미와 차수연과 그 밖의 여자 선배 세 명과 다 함께 앉아 사진을 찍었다. 브이. 터지는 카메라 셔터가 너무 눈부셔서 멈춰 있던 눈물이 또 삐져나올 뻔했다.
통유리 너머로 석양이 지고 있는 한강 풍경에 둘러싸인 나이트 웨딩이었다. 신랑이 제법 인맥이 되는 사람인지 유명한 방송인이 와서 사회를 보는 덕에 지루하지 않았다. 화려한 아치형 벚꽃 테라스 사이로 웨딩드레스 끝자락를 풍성하게 끌며 신부 오윤미가 등장했다. 그 와중에도 현정은 웨딩드레스 입은 지연의 모습을 상상했지만. 지연이 웨딩드레스 입을 날은 절대로 없어야 했다. 김현정은 김지연이랑 결혼을 못 하니까.
사이드 무대에 주방장이 직접 나와 오늘의 요리를 설명해주면서 디너 만찬이 시작됐다. 특 1급 호텔에선 보기 드문 한식 코스였다. 에피타이저로 잣즙을 곁든 전복 냉채가 나온 후, 소믈리에의 한식과 어울리는 이태리 와인 설명이 이어지며 각 테이블마다 와인이 서빙됐다. 수용인원이 최대 700명인 홀이 거의 꽉 찼으니 수십 명의 서버들이 테이블 사이를 분주하게 오갔다. 이어서 성게알 죽과 랍스터 김치말이가 나오니 해산물을 못 먹는 차수연이 먹을 게 별로 없었다. 현정은 제 몫으로 나온 등심 너비아니를 모두 차수연 접시로 옮겼다. 오래전 몸에 밴 행동이었다. 차수연도 몸에 밴 것처럼 못 먹는 성게알을 현정의 죽 그릇으로 덜었다. 현정은 잘 굽어지지 않는 오른팔로 삐거덕거리며 죽을 떠먹었다. 먹는 거 안 불편해? 괜찮아. 이제 능숙해. 말하기가 무섭게 수연의 랍스터 살을 빼오던 현정은 팔로 와인 잔을 툭 쳤다.
쨍그랑. 현정의 정장 바지로 검붉은 와인이 스며들었다. 발아래로는 날카로운 유리 파편이 널브러졌다. 수연이 제 손수건을 꺼내 현정의 바지를 닦아주며 서버를 불렀다. 여기 유리 조각 좀 치워주세요.
“다친 덴 없어?”
“어…… 너는?”
“언니한테 또 너란다.”
“너를 너라고 부르지 그럼.”
현정의 허벅지를 탈탈 털어주는 수연. 반말을 듣고도 싱긋 웃어주는 수연. 변함없이 따스하고 친절한 수연과 사이좋고 낯간지러운 대화. 순간 현정은 예전으로 돌아온 것처럼 느껴졌다. 빗자루와 쓰레받기를 들고 와 유리조각을 쓸어 담던 서버가 고개 들어 눈을 마주치기 전까지. 그 까맣고 익숙한 정수리의 주인이 지연이었다는 걸 알아채기 전까지.
아……
마치 지금 이 순간 김현정과 김지연이 마주치는 걸 계획이라도 한 것처럼 디너 만찬의 하이라이트인 피아노 5중주 오케스트라가 홀 전체에 울려 퍼졌다.
말끔한 정장 유니폼을 입은 지연은 앞머리까지 올려 단정하게 틀어 묶었다. 겨우 쉬고 있던 현정의 심장이 미친 듯이 팔딱거렸다. 저렇게 입으니까 더없이 고귀해 보였고 저렇게 머리를 틀어 올리니까 더없이 우아해 보였다. 저 예쁜 이마를 이제야 보게 되다니…… 지연을 알지 못한 세월 도합 지연을 알고 지낸 두 달 반마저 헛산 것처럼 느껴졌다. 현정은 지연을 보자마자 수저를 놓고 입맛을 버리고 지연 외의 모든 시야와 소리를 차단했지만. 지연은 오로지 현정만 투명인간 취급했다. 여기 와인 리필 좀…… 불러도 쌩. 여기 냅킨 좀…… 불러도 쌩. 좀 있다가는 아예 다른 서버와 구역을 바꿔버렸는지 근처로는 오지도 않았다. 결국 참지 못한 현정은 벌떡 일어나고 말았다. 어디 가? 수연의 물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자릴 떴다.
하지만 열 걸음 떨어진 곳에서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현정이 가까이 다가서려 하면 지연은 더 멀리 가버렸고, 말을 걸려 하면 차가운 눈으로 말문을 막아버렸다. 지연은 랍스터는 쏙 빠지고 김치만 남은 접시들을 대여섯 개씩 한꺼번에 수거한 후 실버 트레이에 담는 일을 반복했다. 낮은 굽이 있는 검정 구두는 사이즈가 큰지 뒷부분이 헐떡거렸다. 현정은 다 까져서 빨개진 지연의 발목 뒤쪽에서 눈을 뗄 수가 없었다. 직업에 귀천이 없다는 걸 알지만 귀한 지연이에 비하면 너무나 천한 것 같았다. 내가 행복하게 만들어줄 기회도 주지 않을 거면, 사람 맘 속상하게 하지도 말지. 다치지 말지. 힘들지 말지.
지연아. 부른 사람은 현정이 아닌 호텔 직원이었다. 그때 그 아반떼였다. 다리 아프지. 잠깐만 화장실 가서 쉬어. 십 분 뒤에 오면 내가 빈 트레이 갖다 줄게. 그거 끌고 다시 들어와. 단기 알바에서 호텔 직원으로 발탁됐다는 아반떼가 지연을 걱정하며 지연을 빼내줬다. 도와줄 것도 없이 우두커니 서 있던 현정은 울분이 터졌다. 개새끼야. 그렇게 걱정되면 이런 거 하지 말라고 했어야지. 이렇게 힘든 일 하지 말라고 말렸어야지.
“지연아.”
따라 들어간 화장실에서 지연을 불렀다. 닫혀있는 화장실 칸 앞으로 다가간 현정은 문을 두드렸다. 똑똑. 지연아. 잠깐만 나와 봐. 아무리 기다려도 대답이 없었다. 마주하기 싫은 걸까. 망설이고 있는 걸까. 그러다 한참 후 열린 문에서는…… 지연이 아닌 딴 여자가 나왔다. 어우 죄송합니다……
“뭐예요 언니.”
구석 칸의 화장실 문이 열리면서 지연이 나왔다.
“그냥 모른 척하지. 왜 따라왔어요.”
본전도 다 잃은 현정은 여과 없이 진심만을 말할 수 있었다. 보고 싶었어. 지연이 이쪽으로 또각또각 걸어왔다. 보고 싶었어…… 지연이 못 들었을까 봐 우물쭈물 한 번 더 말했다.
“가요. 나 일해야 돼요.”
“좀 쉬었다가 가도 되잖아.”
거울 너머로 손 씻는 지연의 얼굴을 똑바로 응시했다. 화장실 스피커 너머로는 차이코프스키의 백조의 호수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진부했다. 따분했다. 상황에 어울리지 않는 평화로운 음악 소리가 현정을 더 괴롭게 했다. 손의 물기를 닦은 지연이 돌아서서 말했다.
“알아서 쉬다가 갈게요. 그러니까,”
“안 가면 안 돼? 이런 거 안 하면 안 돼?”
“……”
“힘들잖아, 너. 지금 발목도 다 까졌어. 알아?”
처음으로 훤히 보이는 지연의 두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럼 내가 지금 모르고 이래요?”
“……”
“알아요, 나도. 힘들어요. 발뒤꿈치도 아파요. 허리도 아프고 어깨도 아프고 다 아파요. 짜증나요. 하기 싫어요. 그러면요. 언니가 대신해줄 거예요?”
“……”
“내 인생은 내가 살아요. 그런데 왜 자꾸…… 왜 자꾸 건드려요.”
“나는…… 나는 그냥.”
나는 그냥 너를 사랑해서 걱정된 것뿐인데. 이젠 정말 확실히 차이는구나 싶었다. 현정의 길고 짧았던 짝사랑이 막을 내리려고 했다.
“왜 자꾸 나 기다려요? 왜 자꾸 나한테 웃어주고 잘해줘요?”
“……”
“모르죠, 언닌. 나 엄청 떨렸어요. 언니가 그런 눈으로 볼 때마다 떨렸다고요. 자꾸 내일을 기대하게 되고 뭔가를 바라게 돼. 언니가 내 옆에 있으면 너무 좋고 떨려서…… 그래서 짜증이 나.”
어이없게도 그건 지연의 고백이었다.
“언니가 없으면 다 불편해요. 매일 먹고살았던 음식도 전부 쓰레기 같아. 잘해보고 싶은 마음 없냐고요? 매일 했어. 하루에도 몇 번씩. 그런데, 우리가 잘 하면 그다음엔? 연애를 하면 그다음엔? 그다음엔 뭐가 있어요.”
지연은 그 모든 고백들을 답지 않게 횡설수설 내뱉었다. 작은 몸. 동그란 이마. 선명한 눈동자. 현정은 언제나 지연의 곁에 있을 생각만 했지만. 지연은 언젠가 현정이 제 곁을 떠나갈 생각부터 했다. 사랑 운운하며 지새웠던 숱한 밤들이 한순간에 망연해졌다. 우린 여자잖아요. 아직 어리잖아요. 행복해보기도 전에 가로막힌 현실부터 가져다가 쐐기를 박아놓는 지연의 뼈아픈 고백들.
“현정아. 여기서 뭐해.”
때마침 차수연이 들어오자 금세 표정을 돌변한 지연은 현정을 눈길 한 번 주지 않고 지나쳐갔다. 현정은 정리되지 않는 엉킨 말들로 명치끝이 울렁거렸다. 지연이 화장실을 나가고도 미동도 없이 그 자리에 있었다. 무슨 일 있어? 자신을 걱정해오는 차수연의 목소리도, 경쾌하게 시작하는 비발디의 사계도 들리지 않았다.
그다음엔…… 그다음엔 뭐가 있을까. 여자면 어때. 어리면 어때. 사랑만 있으면 안 되는 걸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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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만으론 안 된다는 걸 알았어. 고백은 결말이 아니라 시작이었어. 현정은 차근차근 되짚어 보기로 했다. 지연이도 나를 좋아할까? 그 원점에서 더 많은 길을 걸어온 셈이지만 어째 한 치 앞이 더 캄캄해지기만 했다. 아니, 지연이도 나를 좋아한다는 건 알겠어. 그럼 이제 어쩌라는 거야? 더 건들지 말라는 거야, 더 건드려 달라는 거야. 꽃게탕의 게 다리를 쪽쪽 빨아먹던 도연이 결의에 찬 표정으로 말했다. 언니……
“어. 너는 좀 알 것 같아?”
“여기 다신 오지 말자. 게에 살이 너무 없어. 부실해.”
“아씨. 그게 문제냐구 진짜.”
“아 오키오키. 진정해 봐요. 나는 솔직히 언니의 어디가 좋다는 건지 이해가 안 되는데……”
“야.”
“그건 둘째로 치고 그럼…… 뭐가 문제예요? 서로 좋으면 사귀는 거 아니야?”
“아니래…… 다음이 있어야 한대.”
그다음이 뭘까 둘은 골똘히 고심했다. 현정은 다 식은 꽃게탕의 건더기를 휘적거렸다. 진짜 뭐 없네, 여기. 다신 안 와야겠네. 언니. 좋은 생각이 났어요. 도연이 숟가락으로 식탁을 탁 치며 말했다.
“뭔데?”
“언니가 지연 언니처럼 생각하고 살아보는 거예요. 그럼 좀 알지 않을까?”
“지연이처럼?”
“네. ‘지피지기면 백전백승.’ 몰라요?”
“역지사지 말하고 싶은 거지?”
“아, 어 그거. 그게 그거죠 뭐.”
늘 한 끗 차이로 개소리와 해결책 사이를 오갔던 도연의 말을 이번엔 믿어보기로 했다.
크리스마스이브였다. 현정은 스물두 번째 생일을 맞이했지만 생일 따윈 안중에도 없었다. 새벽 댓바람부터 볼캡과 선글라스, 칭칭 감은 목도리로 무장한 후 렌트한 스파크를 몰고 만물슈퍼 앞으로 향했다. 졸음에 직방이라는 핫식스를 두 캔 째 마시며 골목길에서 지연이 나오기만 오매불망 기다렸다.
오전 7시 30분. 지연이 등장했다. 덜 마른 머리끝을 무겁게 휘날리며 곧바로 지하철로 향했다. 현정은 부리나케 스파크를 버린 후 따라 들어갔다.
오전 7시 48분. 오금행 열차에 몸을 실은 지연은 고속터미널 역에서 내렸다. 지연은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올라가자 바로 보이는 역내 카페로 출근했다. 그렇게 지연의 하루가 시작됐다. 진한 초록색 유니폼으로 갈아입고 베레모를 쓴 지연이 카운터 옆 매대에 갓 만들어진 주먹밥과 김밥을 하나둘 진열했다. 고소한 참기름 냄새가 풍겼다. 흠…… 목도리를 더 꼼꼼히 감고 목소리를 저음까지 끌어내린 현정이 카운터로 조심스레 향했다. 김치참치주먹밥 하나 주세요. 천오백 원입니다. 지연은 현정 쪽을 보지도 않고 계산했다. 혹시라도 들킨 건 아닐까 앞이 안 보이도록 모자를 다시 고쳐 썼다. 반대쪽으로 걸어가면서 주먹밥을 야금야금 먹었다. 캑캑. 목이 막혀서 딸꾹질을 하던 현정은 다른 카페에 가서 따뜻한 라떼를 사 마셨다.
오전 9시 21분. 현정은 지연이 언제 퇴근할지도 모르는 이 복잡한 환승역을 서성거렸다. 그냥 포기하고 갈까. 누가 시키는 것도 아닌데. 게으른 맘이 들 때마다 지연의 정처 없던 고백을 떠올리며 심기일전했다.
오후 2시 13분. 지연이 퇴근했다. 역 안의 빈티지 샵을 구경하고 돌아오던 현정은 저 멀리서 옷을 갈아입고 나온 지연이 보이자 헐레벌떡 뛰어왔다. 지연은 입에 김밥을 문 채 반대편의 대화행 승강장으로 향했다.
오후 2시 44분. 지연이 종로 3가에서 내렸다. 한 상가빌딩으로 들어간 후로는 한 시간이 지나도록 나오지 않았다. 복도에 쭈그려 앉아 기다리던 현정은 엘리베이터도 없는 상가 계단을 성큼성큼 올라갔다. 지연이 없는 층들을 지나 꼭대기인 4층에 도착하자 바닥에 나뒹구는 인형 머리들이 현정을 맞이했다. 최경선 씨? 왜 이렇게 늦게 왔어요. 사무실에서 나온 사람이 다짜고짜 현정에게 눈사람 인형탈을 안겨줬다. 혹시 김지연 씨라고 들어오지 않았나요? 누구요? 얼굴 조그맣고 머리 긴 여자애요. 키는 한 요만하고…… 아, 루돌프 말하는 거요? 아까 산타랑 나갔어요. 그쪽도 얼른 나가요. 오늘 늦으신 건 시급에서 다 깝니다. 삼십 분 전 위에서 내려오던 산타와 루돌프를 떠올린 현정은 인형 옷을 주섬주섬 껴입었다.
오후 4시 17분. 저기요. 근데 저 어디로 가면 돼요? 아이 씨. 청계천으로 튀어가야죠. 일하러 온 사람이 그것도 몰라요?
오후 4시 38분. 대낮부터 불빛의 행렬로 가득한 청계천변은 서울 크리스마스 페스티벌이 한창이었다. 오색 전구로 꾸며놓은 꿈의 궁전 앞에서 눈사람 현정은 두리번거렸다. 인형탈과 눈의 좌우 폭이 달라서 시야 확보에 난항을 겪었다. 크리스마스 병정들이 지키고 있는 거대 트리 앞에서 루돌프와 산타를 발견할 수 있었지만 먼저 와 있던 눈사람 무리에 붙잡혀 강강술래를 해야 했다. 현정은 돌고 돌았다. 루돌프와 산타가 멀어지고 있었다.
오후 5시. 10분짜리 휴식시간이 주어져도 현정은 탈을 벗지 못 하고 루돌프만 찾아 다녔다. 기다란 청계천 물길을 따라 LED 조명작품과 대형 풍선 인형들이 둥둥 떠다녔다.
오후 5시 9분. 지나가던 어린이가 예고도 없이 오른쪽 손에 하이파이브를 하고 가는 탓에 눈사람은 찌릿한 통증으로 몸부림치며 드러누워 버렸다. 사람들이 더 좋아하며 몰려들었다. 찰칵찰칵. 눈사람은 모두의 관심을 한 몸에 받았다.
오후 5시 25분. 눈사람은 손과 발에 땀이 가득 차서 찝찝했다. 대가리가 너무 무거워서 확 벗어던지고 싶은 맘을 꾹꾹 참았다.
오후 5시 41분. 루돌프를 찾았다. 루돌프의 남아도는 발목 부분이 쭈글쭈글했다. 어떤 아이가 루돌프의 푹신한 뿔을 자꾸 잡아당기려고 했다. 눈사람이 가까이 다가가 만류했다. 루돌프를 괴롭히면 안 된다는 듯이 두 손을 휘휘 저었다. 아이가 혀를 내밀자 눈사람이 가운데손가락을 올렸다. 인형탈의 손가락이 네 개뿐이라 의미 전달이 정확히 안 됐다. 아이가 사라지고 나자 루돌프가 꾸벅 인사했다. 눈사람이 그 뒤를 졸졸 따랐다.
오후 5시 50분. 루돌프가 탈을 벗었다. 청계천 뒷골목의 셔터 닫힌 가게 앞에 앉은 지연이 장갑도 벗고 손을 슥슥 닦았다. 땀으로 달라붙은 지연의 앞머리가 찬바람을 쐬며 말라갔다.
오후 5시 52분. 안 쉬세요? 지연이 잠자코 서있기만 하는 눈사람에게 물었다. 눈사람은 커다란 머리를 버겁게 내저으며 지연 옆에 털썩 앉았다. 둘은 휴식이 끝나고 퍼레이드처럼 줄지어 걷는 사람들 틈에 섞일 때까지도 아무 말이 없었다. 눈사람은 눈사람끼리 모여 걸었고 루돌프는 산타의 곁으로 돌아갔다.
오후 6시 20분. 인기 많은 눈사람은 귀여운 여자 아이들과 나란히 손을 잡고 걸었다. 한겨울의 생일날을 덥게 지내는 것도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오후 7시 34분. 눈사람은 더워서 죽고 싶었다. 빛으로 가득한 청계천에 확 뛰어들고 싶었다. 루돌프가 보이지 않는 곳으로 멀찍이 도망간 후 인형탈을 벗어던졌다. 현정은 진짜 눈사람도 아니면서 이대로 녹아버리는 건 아닐까 쓸데없는 걱정을 했다.
오후 7시 57분. 드디어 퇴근 시간이었다. 화려하게 쏟아지는 크리스탈 폭포가 청계천을 밝혔다. 더욱 아름다워지는 야경과 동시에 인형들은 퇴장해야 했다. 혼자만 탈을 벗지 않은 눈사람은 맨 뒤에서 걸었다. 루돌프 머리를 안고 걸어가는 지연이 멈춰서 뒤돌자 눈사람도 멈춰 섰다. 이상한 눈사람을 한 번 흘긴 지연은 다시 걸어갔다.
오후 8시 11분. 두 블록 전에 샛길로 쏙 빠진 눈사람은 그제야 탈을 벗었다. 현정은 부서진 화단 울타리에 걸터앉아 땀을 식혔다.
오후 8시 24분. 지금쯤이면 갔겠지. 현정이 일어서자 샛길 틈으로 지나가는 지연의 옆모습이 불쑥 보였다. 헙. 현정은 뒤돌았다. 벗어놨던 눈사람 머리를 허겁지겁 뒤집어썼다.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그 앞이 막다른 길이긴 했는데……
눈코입은 이쪽을 향하고 있지만 몸뚱이는 돌아가 있는 섬뜩한 눈사람을 보고 지연이 물었다.
“반납 안 하세요?”
오후 8시 26분. 계획에 없던 조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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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얼리 금속 타운을 지나는 지연의 뒤를 부지런히 밟았다. 아까부터 말도 없이 뒤따라오는 눈사람을 지연이 힐끗힐끗 뒤돌았다. 그럴 때마다 현정은 발걸음을 늦추거나 면목 없는 사람처럼 두 손을 공손히 모았다.
어두운 밤하늘로 안개꽃 같은 지연의 새하얀 입김이 피어올랐다. 종묘 돌담이 보이는 길가에서 오른쪽으로 꺾은 지연은 간판도 없는 분식집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떡볶이의 달인 김귀엽. 상장 같은 종이만 달랑 붙어있었다. 지연은 맵고 빨간 떡볶이를 포장했다. 골목길 바깥에서 지켜보던 현정의 배에서 꼬르륵 소리가 났다. 탈의실 캐비닛에 놓고 온 짐이 생각났다. 겉옷이며 지갑이며 핸드폰이며 하나도 없는 빈털터리 신세였다. 이제는 지연을 따라가는 게 선택이 아닌 필수가 됐다. 현정은 떡볶이 봉지를 달고 걷는 지연 뒤로 더 과감하게 따라붙었다. 지연의 이상한 눈길을 다 받아낼 수밖에 없었다. 어떡하지. 그냥 말해야 되나. 되는 데까지 가볼까. 아니면 다시 돌아갈까……
“저기요.”
“……”
“나 따라오는 거 맞죠.”
갑작스레 뒤돌아 다섯 발자국을 걸어온 지연이 물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사람의 눈언저리를 바라보면서. 마치 그 안에 들어있는 현정의 눈을 보고 이야기하는 것처럼.
“저 아세요?”
아무리 물어도 대답이 없자 지연이 또박또박 따졌다. 저한테 할 말이라도 있으세요? 말도 안 하고 뭐 하자는 거예요? 그쪽이 누군지 알고 제가 지금 여기서 집까지 가요. 저 앞에 경찰서 보이죠. 계속 따라오면 저기로 들어갈 거예요. 어떡할래요? 흉흉하고 삭막한 이 세상 속에서 기죽지 않는 지연의 강경한 태도가 참 기특했다. 그래서 진짜로 경찰 부를 것 같애. 현정이 절박하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라고. 믿어 달라고. 깜깜하고 갑갑한 인형탈 속이 현정의 더운 숨으로 가득 찼다.
탁. 자비 없이 경찰서로 향하려는 지연의 손목을 붙잡고. 현정은 인형탈을 벗었다.
땀으로 범벅이 된 얼굴. 볼품없이 눌린 머리. 이토록 엉망인 적은 태어나서 처음인 현정이 갇혀있던 숨을 고르면서 말했다. 따라와서 미안한데.
“나 좀 재워줄래. 갈 곳이 없어서.”
이건 거짓말이었고.
“내가 지금 가진 게 없어서. 아무것도 없어서……”
이건 당장의 진심이었다.
“옆에 있게 해줘. 딱 오늘 하루만.”
뜻밖의 얼굴과 대답에 지연은 할 말을 잃은 듯했다. 화나지도 환하지도 않은 표정으로 젖어있는 현정의 얼굴을 지그시 봤다. 그렇게 보면 현정은 떨렸고 지연도 떨었다. 둘 다 말없이 떨고 있었다. 뺨을 스치고 지나가는 종로의 밤바람이 차가워서. 서로가 좋아서.
……
지연이 몸을 돌렸다.
좌절한 현정은 무거운 눈사람 머리를 아무렇게나 던져버렸다. 나뒹구는 눈사람 뒤통수에 흙먼지가 묻었다. 거절하고 가버리는 뒷모습을 현정은 볼 자신이 없었다. 고개를 툭 떨궜다.
“언니.”
가로등 빛이 노랗게 밝히고 있는 콘크리트길 위로 지연의 컨버스가 불쑥 나타났다.
“어?”
“옆에 있게 해달라며.”
“……”
“내 옆에 있으라구요.”
고개를 들자 보이는, 사랑해 마지않는 지연의 얼굴.
“나 사랑하죠.”
“……응.”
“그러면요.”
우리 연애해요. 나 좀 빼내줘요. 그 간단명료한 고백은 세상에서 가장 무거운 고백이었다. 현정은 오늘이 생일인 것도, 크리스마스이브인 것도 잊어버렸다. 오늘은 지연의 고백을 받은 날. 돈도 뭣도 없는 날. 제일 행복한 날. 현정의 눈에 뜨뜻미지근한 게 고였다. 맵고 뜨거웠던 떡볶이가 거리 위에서 식어갔다.
우리의 연애가 영원이 될 수 없더라도. 언젠가 내가 지연의 옆에 없어도 지연이 잘 살 수 있게. 내가 가진 걸 지연이에게 다 줄 거야. 지연이가 가진 빚은 다 갚아줄 거야. 람보르기니도 팔 수 있어. 그렇게 사랑해. 현정은 사랑해서.
숨죽여 웃던 강의시간도. 삼천 원짜리 싸구려 학식도. 가파른 골목길도. 오래된 노랫말도. 연탄불에 구워 먹던 쫀디기도. 태어나 가져본 것 중 제일 소중하고 값진 존재. 지연이 없으면 사랑하지 않았을 것들을 사랑하게 됐으니까. 현정은 눈사람 장갑을 벗고 지연의 손을 마주 잡으며 말했다.
"손 잡아도 돼?"
"……이미 잡았으면서 뭘 물어요."
"아 미안미안. 손에 땀이 많이 배서."
현정이 화들짝 놀라며 손을 놓자 이번엔 지연이 손을 잡았다. 줬다 뺐는 게 어딨어. 보금자리를 찾은 듯 지연의 작은 손이 쏙 들어왔다. 현정은 숨기지 않고 베시시 웃었다. 둘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나란히 서서 신호등을 기다렸다. 그 떡볶이 맛있어? 음. 언니한텐 매울 걸요? 괜찮아. 나 지금 뭐든 먹을 수 있어. 연인의 사소한 대화가 둘 사이를 가득 채우기 시작한다.
우리가 연애를 하면. 그다음엔 랍스터를 질리도록 먹자. 그다음엔 푸른 파도와 야자수가 보이는 하와이로 여행을 가자. 그다음에 우리는 손을 맞잡고 다운타운을 활보할 거야. 우리의 사랑은 아름다울 거야.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