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와 kutara의 이중성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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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일 2025.08.14. 08:13 조회 769

백제의 국명을 현대 일본어로 kudara라고 부른다는 사실은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실 것입니다. 이 이름은 문헌상으로는 '유취명의초(類聚名義抄)'의 전기 중세 일본어 kutara로 거슬러올라갑니다. 어느 쪽이든 이 이름은 '백제'와는 전혀 발음상 비슷하지 않습니다. 이 글에서는 이 이름의 비밀을 파고들어 봅니다.


백제의 일본어 명칭에 대해 '유취명의초'보다 더 오래된 기록은 전하지 않습니다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kutara의 원형을 복원할 수 있는 몇몇 단서들이 있습니다. 첫째는 kutara의 다른 형태 kutana의 존재입니다.

일본 혼슈 서부에 있는 야마구치 현 히라오 정에는 한자로 '백제부(百済部)'라고 쓰는 '쿠타나베'라는 지명이 있습니다. '백제'를 kutana로 읽는 것은 특이한 현상인데, 근방에 위치한 쿠다마츠 시에도 백제와 관련된 전승이 있어, 이 전승에 따르면 '카나에 소나무(鼎の松)'라는 소나무에 별이 내려와 백제의 태자가 찾아올 것을 미리 알렸다고 합니다 (이때 일본으로 건너온 백제 태자의 후손이라고 주장했던 씨족이 '조선왕조실록'에도 나오는 오오우치 씨입니다). 카나에 소나무의 '카나에'라는 이름도 사실 '한반도 쪽'이라는 뜻으로 풀이할 수 있는데, 이런 풀이가 성립하기 위해서는 한반도를 뜻하는 kara를 이 지역에서 kana라고 발음했어야 합니다. 이 대응 관계는 '백제'를 kutana라고 한 것과 평행합니다. 즉 단순한 우연이 아닐 수 있다는 뜻입니다.

야마구치 현 히라오 정(山口県平生町)에 위치한 쿠타나베(百済部) 마을의 이름이 적힌 표지판. 2024년 12월 촬영.

이와 관련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것이 타나베 향(田邊鄕)의 존재입니다. 타나베 향은 현재의 오사카 부 오사카 시에 위치한 옛 츠 국 스미요시 군(攝津國住吉郡)에 속한 마을인데, 정창원 문서를 통해 늦어도 천평 5년 (733)에 이미 존재했음이 확인됩니다. 그런데 흥미롭게도 고대 일본 전국의 마을 명칭을 기록하고 있는 20권본 '화명유취초(和名類聚抄)' 국군부에는 스미요시 군 아래에 타나베 향이 나타나지 않고 그 대신 백제군(百濟郡)이 있습니다. 백제군의 성립과 소멸 시기에 대해서는 확실하게 알려진 것이 없지만, 백제군의 존재가 가장 명확하게 나타나는 자료에 타나베 향이 누락되어 있는 것은 두 지역이 물리적으로 동일할 가능성, 즉 타나베 향의 위치가 곧 백제군의 위치였을 가능성을 생각하게 합니다.

현대 일본에 남아있는 또다른 유명한 타나베는 키이 반도 남부에 위치한 와카야마 현 타나베 시인데, 이 지역의 옛 명칭은 다름아닌 무로 군(牟婁郡)으로, '무로(牟婁)'는 "산"을 뜻하는 고대 한국어로 알려져 있습니다 (실제로도 키이 반도 남부는 산악 지역입니다). 이와 같이 고대 일본의 수도에 가까운 지역에 위치한 '타나베'라는 지명들이 고대 한반도 출신의 세력과 모종의 관계가 있다면, '타나베'는 '백제부'를 뜻하는 '쿠타나베'가 와전된 결과일 가능성을 우리는 충분히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백제를 뜻하는 kutara를 고대부터 일부 방언에서 kutana라고도 했다면, 그 원형은 무엇일까요? 일본어에는 중앙 방언의 r에 대해 비중앙 방언에서 n이 나타나는 몇몇 단어들이 있으며, 이들은 조어 *rn으로 거슬러올라가는 것으로 대체로 재구될 수 있습니다. 대표적으로 들 수 있는 예는 고대 서부 일본어의 -uram-과 고대 동부 일본어의 -unam-입니다만, 그 외에도 표준 일본어 arare "우박"과 방언의 arane, 표준 일본어 kurabe- "비교하다" (< kuraᵐbe-)와 오키나와어 슈리 방언 kunabir- (< *k[u]naᵐbe-) 등이 같은 대응 관계를 보입니다. 특히 마지막 예의 경우 na(ra)ᵐbe- "늘어놓다"를 포함하는 합성어일 것임을 생각하면 r~n 교체 관계가 *rn에서 유래하는 것이 비교적 뚜렷합니다. 이러한 사례들을 참고하면 kutara~kutana 역시 *k[u]tarna와 같은 형태로 재구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이 *k[u]tarna에 대응되는 지명이 한성의 바로 코앞에 있습니다. '삼국사기' 지리지에서 한양군 황양현의 옛 이름으로 제시되는 '골의노(骨衣奴)' (권35) 또는 '골의내(骨衣內)'입니다. '황(荒)'과의 대응에서 알 수 있듯이, '골의(骨衣)'는 "거칠다"를 뜻하는 고대 한국어이며 그 발음은 *kɔtɛr입니다. 따라서 황양현의 이름은 백제의 일본어 이름의 원형 *k[u]tarna와 완벽하게 일치합니다.

여기에는 재미있는 역사적 시사점이 있습니다. 백제의 한자 이름은 그 발음이 '박'과 비슷한데, '박'은 호로하(瓠瀘河), 표하(瓢河) 등으로 표기된 임진강의 옛 이름입니다. 한편 황양현은 한강 유역에 위치한 지명이었을 것입니다. 특히 '위례성'이라는 명칭이 백제의 수도가 건설되면서 인위적으로 부여된 새로운 지명일 것임을 생각하면, 위례성 일대의 원래 지명이 바로 이 '황양'에 남아있을 가능성이 큽니다. 즉 백제는 임진강 유역에서 한강 유역으로 남하한 국가이지만, 일본인들은 백제를 한강 유역의 지명으로 불렀다는 것이 됩니다.

이는 일본인들이 백제의 존재를 인식하기 시작한 시기가 백제가 한강 유역에 자리잡은 직후, 아직 '백제'라는 이름이 한강 유역에 확실하게 자리잡기 이전의 시점임을 알려줍니다. 이러한 결론은 일본 열도 세력이 4세기 후반에는 이미 백제와 동맹을 맺고 군사적으로 긴밀하게 협조하고 있었다는 사실과도 부합합니다. 기존설에서는 예컨대 부여의 지명 '구드래'를 통해 일본어의 kutara를 설명하고자 한 시도가 있습니다만, '구드래'라는 지명이 고대에 존재했는지도 확인할 수 없을뿐더러, 사비 천도 이전에는 일본어에 백제를 부르는 명칭이 없었느냐는 의문에 부딪히게 됩니다. 그러나 황양현의 명칭은 광개토왕비 영락 6년 (396) 기사에서 광개토왕이 빼앗은 성으로 백제의 도성 (위례성) 바로 전에 (판독되지 않는 부분에 성 이름이 하나 더 있었다면 2개 전에) 그 이름이 나타나는 '구천성(仇天城)'과 일치하므로, 늦어도 4세기에는 위례성 근방에 *k[u]tarna에 대응되는 지명이 존재했음을 확신할 수 있습니다.


백제는 그 국명에서 볼 때 아마도 임진강 유역에서 출발해 한강 유역으로 남하한 국가입니다. '백제'는 전자의 정체성을, 일본어 명칭 kutara < *k[u]tarna는 후자의 정체성을 반영합니다. 고대 한국어 공식 국명은 전자였겠으나, 3–4세기경에는 두 정체성 사이에 다소의 혼란이 있었음을 우리는 언어적 근거를 통해 들여다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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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짜로 몽골인들의 "솔롱고스"랑 더불어서 마음같아선 그때 4세기 타임슬립해서 당시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어지네요.
    특히나 당대 고문 한문들을 보여주면서 중국, 일본, 한국 지식인들에게 어떻게 읽는지 직접 들어보면서 비교도 해보고 싶고요.

  • 프로필겨울돼지 작성자

    중세 몽골어의 莎郞合‹中›思 solaŋqas는 거란어를 거쳐 받아들인 것인데 뿌리를 거슬러올라가면 신라의 국호에서 나왔습니다. 거란인들의 입장에서는 고구려의 후신인 발해를 자기들이 정복했으니 고려는 당연히 신라의 후신으로 간주했고 몽골인들 역시 이러한 인식을 그대로 이어받았습니다.

  • 겨울돼지일설에서는 거란측이 발해를 신라와 비슷한 종족으로 보고 신라와 비슷한 발음으로 불렀다고도 하는 것 같은데 혹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 프로필겨울돼지 작성자

    오렌지국밥누가 그런 말을 했는지 알려주시면 감사할 것 같습니다.

  • 카페에 글이 있었는데 잘 보이지 않습니다. 제가 기억하기로는 ‘sulwur’이라는 단어를 거란측이 한민족 계열 종족을 부르는 명칭으로 썼다는 내용이었는데 확실하지는 않네요.

  • 프로필겨울돼지 작성자

    오렌지국밥https://cafe.naver.com/booheong/207423 이 글인가 보네요. 안타깝게도 저로서는 판단하기 어렵습니다만 일단 신라라고 적혀있으니 실제로 신라일 가능성을 배제하는 것은 성급한 것 같습니다. 한문으로 번역된 부분만을 보면 반드시 군사적 충돌일 필요도 없고, 시기상 910년대일 필요도 없을 것 같습니다 (단순히 '동쪽' → '서쪽'의 순서로 적었다고 볼 수 있으므로). 신라 호족 아무개 세력의 망명을 받아들인 정도라도 그 사람의 업적을 띄워주는 문맥이라면 저런 표현을 쓸 수도 있지 않을까요.

  • 오렌지국밥맞는 내용입니다. 아래 논문을 참고하시면 좋습니다.
    https://www.kci.go.kr/kciportal/ci/sereArticleSearch/ciSereArtiView.kci?sereArticleSearchBean.artiId=ART002651537

  • 1. *kutarna가 골의노와 연결된다는 점은 논리적으로 납득이 갑니다. 하지만 백제(百濟)를 바로 호로하와 연결짓는 것은 조금 비약으로 느껴지는데, 百(*pˤrak)을 '박'과 연결한다 해도 濟(*tsˤijʔ)를 밝히지 않는 이상 아직은 납득이 잘 가지 않습니다. 혹시 이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2. *kutarna가 골의노와 연결된다고 한다면, 현재까지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이 백제국의 도성으로 인정받는 상황에서 왜 뜬금없이 훨씬 내륙에 있는 남양주 진접읍의 지명이 대외 국명으로 전해졌는지가 문제가 되겠죠. 이에 대해서는 혹시 설명이 가능한가요?

  • 프로필겨울돼지 작성자

    1. 대방군 한자음에서는 개음 *-r-이 반영되지 않으므로 (고대 일본어 yamatö의 ma를 馬 *mˤraʔ로 표기했듯), *pˤrak은 깔끔하게 *pak에 대응됩니다. 뒷부분은 현재로서는 아직 확실하게 말할 수 없습니다만, 이른 시기의 고대 한국어 *ts가 대체로 현재의 ㅅ에 대응되는 것을 고려하면 속격을 나타내는 ㅅ에 대응할 가능성을 생각해볼 수 있습니다.

    2. 이 글에서 간접적으로 시사되었듯이 '위례'라는 새로운 지명의 도입에 의해 *kɔtɛr-nɛr(ɛ)가 밀려났을 것입니다 (즉 원래는 한강 유역의 비교적 길쭉한 영역을 지칭하다가, '위례'의 도입에 의해 그 부분 중 '위례'에 해당하는 지역을 제외한 나머지만을 일컫게 되었을 것입니다). 아마도 잘 알고 계실 바와 같이 奴/內/那 등이 붙은 지명은 강변을 의미하기 때문에 해당 강을 따라 길쭉한 영역을 지칭했을 것으로 생각하는 것이 자연스럽습니다.

  • 겨울돼지답변 감사합니다. 일단 실마리를 찾았으니, 다음은 다른 분야와 협업해서 이 가설을 증명하는 방향으로 가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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