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짜 완벽하다고 생각했다. 어플로 만난 수많은 사람들 중에서 이렇게까지 잘 맞아도 되나 싶을 정도로 하나부터 열까지 말하는 족족 다 잘 맞아서 대화도 잘 통했고 메시지를 주고받는 시간이 즐거웠다. 여태 내가 어플로 만나 대화를 나눈 사람들은 다 미세먼지 같은 것들이었구나 싶을 정도로. 실제 이름과 나이, 학교가 어딘지 등등 자세한 프로필은 알지 못해도 B형의 건장한 탑이라는 것과 나와 같은 영상학과라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연락만 주고받은 지 일주일 하고도 반이 흘렀을 때 드디어 만나자는 메시지가 왔고 나는 쥐콩만한 원룸 자취방 침대 위에서 소리 없는 아우성을 내질렀다. 제발. 제발제발 겉모습도 마음에 쏙 들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약속 장소인 카페 안에 들어섰고, 그리고 지금 나는 절망했다. 그가 아저씨 같은 외모여서가 아니라, 그러니까...
"... 선배가 왜 여기 있어요?"
같은 학교 같은 학과인 박종성 선배가 앉아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놀라서 앉을 생각도 못 하고 멀뚱히 서 있었는데 박종성 선배가 앉으라고 앞자리를 가리키길래 얼떨결에 앉았다. 뭐 마실래? 핫초코 시켜줘? 어플로 연락한 게 나라는 것이 놀랍지도 않은지 너무나도 여유롭게 물어보는 태도에 기가 찼다. 이와중에도 메시지로 대화하면서 커피를 좋아하지 않는다는 내 말을 기억하고 내 앞에 핫초코를 대령하는 모습엔 실소를 터뜨렸다. 선배, 설마 저인 거 알고 계셨어요? 일단 사줬으니깐 핫초코를 호로록 들이키며 날이 선 말투로 물으니 어깨를 으쓱이며 처음엔 몰랐지. 하고 대답한다. 처음엔? 그럼 언제부터 아셨는데요? 아니, 알았는데 왜 만나자고 하셨어요? 마치 물음표 살인마가 된 마냥 쏘아 붙이며 물으니 선배가 피식 웃으면서 빨대로 아메리카노를 마신다. 잘생겼네... 아 이게 아니지.
"처음엔 진짜 몰랐어. 나랑 과도 같고 하는 얘기 들어보니까 시험 기간도 똑같고 혹시 우리 과 앤가 싶었는데 얼마 전에 어쩌다 네가 핸드폰으로 나한테 메시지 보내는 거 보고 알았지, 너인 거."
오 마이 갓. 나는 두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푹 숙였다. 만나러 오기 전에 꼰대 아저씨 같은 늙은 얼굴이면 어쩌지 하고 걱정했던 건 저 멀리 우주로 날라가버렸다. 사실 박종성 선배는 우리 학교에서도 꽤 유명한 과탑에 속했고 인기도 많았다. 그리고 뼈게이인 나도 한눈에 반했었고. 학교에서 마주치면 웃으면서 인사해주고 가끔 같은 강의를 들으면 내 옆에 앉아서 같이 수업을 듣고 내 뒷머리를 쓰다듬어주는 가벼운 스킨십이 있을 때마다 가슴이 두근거렸지만 그건 그냥 신입생 후배를 챙겨주는 아량 넓은 선배의 행동이었다. 박종성 선배는 여자친구가 있으니까. 아 맞다. 여자친구!
"선배 여자친구 있으시잖아요."
"헤어졌어. 한 달 전에"
"선배 게이예요?"
"그건 아닌데. 남자도 만난 적 있어."
"저 양성애자 싫어해요."
너무 단호하게 말했나 싶어서 입술을 꾹 말아 물었는데 나를 빤히 쳐다보며 하는 박종성 선배의 말에 입을 다시 벌릴 수밖에 없었다. 그럼 이제 여자 안 만나지 뭐. 눈을 살짝 가리는 앞머리를 쓸어 넘긴 선배가 한쪽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는다. 저거 플러팅 맞지. 나 꼬시는 거지. 맨날 어디서 예쁜 여자만 골라 사귄다 싶었는데 순 바람둥인가 봐. 제 말은 그런 뜻이 아니잖아요. 울상을 지으며 벌써 다 먹어버린 핫초코 잔을 매만졌다.
그냥 없었던 일로 해요. 학교사람을 만나는 건 불안하고 생각만 해도 머리 아파서 시도 조차도 안 했었다. 처음 박종성 선배를 보고 첫눈에 반해 아주 잠깐 짝사랑을 했을 때도 정신 차리라고 혼자 얼마나 머리를 쥐어 뜯었는데. 그 당사자가 눈앞에 있으니 머리가 터져버릴 지경이다. 없던 일로 하자는 내 말에 아무 말도 없는 선배를 힐끔 쳐다봤다. 왜 아무 말도 안 하지. 갑자기 내일 나랑 메시지 주고받은 거 캡쳐본 프린트로 뽑아서 학교에 퍼뜨리는 거 아냐? 아니 뭐 저 선배가 그렇게까지 할 정도로 생기진 않았지만 혹시 모르는 거니까... 눈을 데굴 굴리며 별의별 생각을 다 하고 있는데 별안간 선배가 내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웃었다.
"뭔 생각을 그렇게 해."
"...그, 없던 일로 하자구요. 왜 대답을 안 하세요?"
"그러기엔 난 좀 아쉬운데."
"네? 뭐가 아쉬운데요?"
"난 키링 네가 좀 더 궁금하거든"
"아 그렇게 부르지 마세요 진짜!"
급속도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우리 둘만 들릴 정도의 목소리였지만 혹시나 싶어 카페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어플 닉네임을 그대로 말하고 놀리듯 웃고 있는 선배 얼굴을 째려봤다. 저한테 대체 원하는 게 뭐에요? 그런 거 없어. 없는데 왜 자꾸 놀리세요? 너 귀여워서 그러지. 쿡쿡 웃는 선배 얼굴을 보다가 순간 후끈해져서 두손으로 얼굴 부채질이나 했다. 네 말 무슨 뜻인지 알겠으니까 일단 나가자. 저녁 사줄게.
저녁 메뉴는 카레였다. 이것도 어플 메시지로 주고받았던 공통점 중 하나다. 둘 다 빼이보릿 음식이 카레라는 것. 배 안 고프다고 먼저 가겠다고 튕겼는데 박종성 선배 손에 이끌려 와서는 밥 한 공기 더 리필까지 해서 카레를 뚝딱 해치웠다. 든든하게 배도 채웠겠다, 2차로 술집에 갔다. 술집은 학교 앞 자주 가는 곳. 여길 선배랑 단 둘이 오는 것도 어색한데 어플로 만나 온 것이 또 선배라고 생각하니까 더 어색했다. 어색함은 술로 푸는 것이랬다. 난 안주가 나오기도 전에 잔에 따라진 맥주를 원샷 때렸다. 놀란 선배가 내 입 앞으로 뻥튀기를 내밀어서 받아 먹었다. 아 이게 아닌데. 딱히 할 말이 없어서 과에 대한 걸 묻기도 하고 별로 궁금하지도 않은 어느 교수님의 얘기를 하기도 했다. 진짜 tmi인 내 말에도 귀찮다는 반응 하나도 없이 다 대답해주는 선배 모습 보면서 한숨이 절로 나왔다. 왜 하필 박종성 선배여서... 딱 내 이상형이긴 한데...
"야 키링. 정신 좀 차려봐"
"내가 그르케 부르지 말랬지!"
"그래그래. 정원아. 차라리 업히자. 업혀"
잘 마시지도 못하는 술에 객기 부리며 꿀떡꿀떡 마시다 보니 조금 취했다. 선배가 푹신한 침대에 날 팽개치듯 내려놓는 게 느껴져서 인상을 찌푸리며 욕을 했다. 아파 씨... 내 양말 벗겨줘... 중얼거림에 어이없다는 듯 웃는 선배가 다가와 양말을 벗겨주는 게 흐릿하게 보였지만 천장이 빙빙 돌아서 그냥 눈을 꾹 감아버렸다.
얼마나 잤을까 목이 말라 눈을 떴는데 눈앞에 옆으로 누워있는 박종성 선배가 있어서 순간 놀랐다. 술은 어느 정도 깬 거 같긴 한데. 눈을 감고 있는 선배 얼굴을 빤히 구경하는데 별안간 고요하던 두 눈이 떠져서 훔쳐보다 걸린 입장이 되어버렸다. 조용하고 어색한 공기에 눈만 도로록 굴리고 있는데 선배가 대뜸 날 끌어당겼다. 코 앞까지 가까워진 거리에 놀라서 침만 꿀꺽 삼키고 있는데 선배가 내 입술에 가볍게 입 맞추고는 떨어진다. 뭐, 뭐야. 이러는 게 어딨어. 내가 분명 없던 일로 하자고 했는데... 손을 올려 입을 막았더니 선배가 푸스스 웃으며 날 품에 안았다. 너 귀엽다 정원아. 그러고는 내 목 언저리에 고개를 묻고 쪽쪽 입을 맞추는데 점점 술기운이 다시 올라와서 정신이 몽롱해지는 기분이 들었다. 아 이러면 진짜 안 되는데... 안... 되는데...
계속 울리는 진동 소리에 눈을 떴다. 핸드폰을 찾던 것도 잠시 상의만 벗은 상태로 엎드려 잘만 자는 선배를 보고는 현타가 왔다. 어제 그러니까 제대로 말하면 새벽에 선배와 나는 잤다. 사실 진짜 잔 건 아니고 삽입 빼고 할 수 있는 건 다 했다. 끝까지 갈 수 있었는데 아마 내가 졸려서 그대로 까무룩 잤던 것 같기도 하고. 난 아무것도 못 해줬는데 선배는 혼자 풀고 잤으려나. 그런 생각까지 마치니 부끄러워서 이불을 퍽퍽 치다가 선배가 깰까 봐 침대 밑에 떨어진 내 후드티를 주워 입었다. 계속되는 진동의 근원지는 탁상 위에 올려진 선배의 핸드폰이었다. 침대에 반동이 가지 않게 느릿하게 일어나 핸드폰 화면을 보는데 [이민영] 이라는 이름에 팍식, 기분이 상해버렸다.
이민영은 한 달 전에 헤어졌다고 말했던 선배의 구여친이다. 이름만 들으면 다 알 정도로 학교에서도 유명한 존재였다. 헤어졌다더니 아침부터 전화는 왜 이렇게 해. 갑자기 기분이 땅끝까지 뚝 떨어지는 기분에 괜히 잘 자는 선배의 등만 째려봤다.
"선배. 일어나봐요. 저희 이제 나가야해요"
내버려 두고 나가기엔 좀 그렇고 모텔 퇴실 시간이 다가와서 에라 모르겠다 하고 선배를 흔들어 깨웠다. 부스스하게 눈을 뜬 선배가 나를 한번 쳐다봤다가 다시 베개에 얼굴을 파묻는다. 그 상태로 웅얼웅얼. 언제 씻었어? 방금 전에요. 선배도 얼른 씻고 나오세요. 퇴실 시간 다 됐어요.
나란히 모텔을 나왔다. 얼른 집으로 도망가고 싶어서 저 그럼 가볼게요. 하고 후다닥 사라지려 했는데 다시금 선배한테 붙잡혔다. 속 안 쓰려? 국밥이나 먹으러 가자. 결국엔 또 밥을 먹으러 왔다. 아침이라 퉁퉁 부은 얼굴로 뜨거운 국물을 후루룩 마시는 선배의 얼굴을 보다가 나도 국을 떠먹었다. 진짜 이제 뭐 어떻게 해야 하지. 그냥 어제 저녁이고 뭐고 카페에서 바로 집이나 갈 걸. 선배는 지금 무슨 생각할까. 그나저나 여자친구랑은 헤어졌다면서 아까 그렇게 오던 부재중 전화들은 뭐야. 진짜 이 선배 바람둥인가. 설마 나도 그 수많은 어항 속에 있는 물고기 중 한 마리인가?
"아직도 없던 일로 하고 싶어?"
"네?"
"나만 아쉬운가."
아쉽... 긴 나도 마찬가지다. 어플로 만난 사람이 선배여서 놀랍고 무섭기도 했는데 선배가 먼저 아쉽다고 말하고 새벽에도 물고 빨고는 다 해놓고 이제 와서 또 모르는 척 내빼기도 좀 그렇고. 큰맘 먹고 저도 아쉬워요, 라고 말하려던 참에 테이블 위에 올려진 선배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또다. 또 이민영. 선배는 핸드폰 한 번, 나 한 번 보더니 전화를 받았다. 어 왜. 아니 밖. 나중에 전화할게. 간단하게 끝난 전화지만 마지막 말이 걸렸다. 다시 전화한다니. 헤어졌다며.
"네가 뭘 걱정하는 지 알아. 연락 계속 하자고 재촉하진 않을게. 너만 괜찮으면 이런 사이도 좋을 것 같은데, 난."
"이런 사이가 무슨 사이인데요?"
"꼴릴 때 자는 사이?"
"아..."
"어때?"
절대 안 돼. 양정원. 완벽한 이상형이라고 해서 그렇게 다 받아주면 안돼.
"좋아요 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