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 김민정, 니 남친 우리 아파트 놀이터에 딴 여자랑 같이 있는데?"


전화 한 통을 받고 부리나케 친구의 아파트로 향했다. 드디어 내 눈으로 똑똑히 보겠네. 긴장되면서도 설레는 감정을 감출 수 없었다. 독서실에 곱게 두고 올 것이지 꾸역꾸역 집에서 공부를 이어 하겠다고 다짐하며 가방에 챙긴 책은 걸음을 늦출 뿐, 더 이상의 공부는 예상되지 않는다. 무게를 축 처지게 하는 가방의 끈을 다잡고 친구의 아파트로 향한다. 입구에 들어가 서둘러 놀이터 쪽으로 발걸음을 돌리며 친구에게 연락을 남겼다.

                         [아직 있음?]
[ㅇㅇ]
                             [너 어디야]

놀이터에 도착했다. 산책 나온 사람들이 걸어다닐 뿐 찾던 이들은 보이지 않았다. 아. 나 설마 놓친 거야? 허탈함에 윗입술을 아랫니로 깨물자마자 손이 확 잡혔다. 아! 놀라서 나오는 소리는 입을 막는 손에 막혔다. 눈을 크게 뜨고 옆을 보면 친구가 있었다. 뭐하는 거야. 내가 미간을 좁히자 친구는 남은 손 검지를 입에 가져다 대고 조용히 하라고 한다. 그리고 이어 그 검지를 옆으로 가져갔다. 뭔데.... 내가 천천히 고개를 틀며 눈을 한 번 깜박이고 앞이 탁 보였을 때. 아. 씨발. 그나마 날 붙잡고 있던 줄이 뚝 끊긴 기분이 들었다.


"야. 이것 좀 놔."
    "놓으면 뭐하게."
    "그럼 저걸 보고만 있어?"


야마가 확 도는 기분. 사람이 이렇게 눈이 뒤집힐 수도 있구나. 그래 지수, 이 씹새끼야. 박지수 이 씹. 덕분에 참 많은 걸 알고 간다. 친구가 잡고 있지 않은 반대 손을 꽉 쥐었다. 손바닥엔 손톱 자국이 깊게 박혔다. 내가 흥분을 못 이기고 발걸음을 움직이려고 하면 친구는 잡고 있는 손을 더 꽉 쥐고 내게 눈치를 줬다. 야. 증거 확보 몰라? 원래 참고 봐야 이기는 거라고. 

나는 원래 성격이 순종적인 면모가 없지 않아 있어 친구가 하지 말라면 하지 않는다. 근데, 근데 말이다. 지금은 그게 잘 안 됐다고. 학교에서 니 남친 바람 났다고 소문이 다 난 걸 여태 아니라고 남친 편들고 다녔던 내가 쪽팔려서? 내가 왜 쪽팔려. 바람은 저 새끼가 피웠는데. 아니면 뭐, 남친 관수 못한 새끼로 낙인 찍힐까 봐? 요즘 같은 21세기에 그런 소리나 뱉는 녀석들은 주둥이를 다 찢어버려야 된다. 이것도 아니고 저것도 아니면 내가 왜 이러느냐. 나는 지수를 썩 사랑하지 않는다. 근데 내 이미지 망치는 건 좀 기분이 나쁘긴 하지. 근데 그깟 이미지는 다시 회복이 가능하다고. 내가 이러는 이유가 뭐냐면.


"지민 누나. 저희 이제 들어갈까요?"
    "벌써?"
    "... 그럼 좀 더 보다가 갈까요? 제가 집 데려다 드릴게요. 늦었잖아요."


박지수 저 개새끼 옆에 있는 애가 유지민이라서다. 

박지수 눈에서 꿀이 뚝뚝 흘렀다. 나는 박지수가 유지민의 손을 잡을 때까지 기다렸다. 시선이 손으로 간 걸 보아하니 얼마 남지 않았다. 바람의 현장 그까짓거, 드라마에서 보던 실력 발휘하면 되는 거 아니냐. 야, 손 놔봐. 아까보다 목소리가 깔려서 그런가, 진지해서 그런가, 아니면 빡친 게 드러나서? 친구는 그제서야 손을 놓았다. 찍어둘게. 친구는 와중에 내 편들어준다. 괜히 폭행이나 안 했으면 좋겠는데 말이다. 

지금이다. 박지수가 유지민의 손을 잡아챘다.


"누나 손이 차요."
    "네 손은 따뜻하다."


유지민은 박지수의 손 위로 자기 손을 올려 더 꽉 쥐어줬다. 허, 아주 쇼를 하세요. 헛웃음이 절로 나왔다. 이젠 더 이상 참을 이유가 없다. 나는 발걸음을 앞으로 옮겼다. 눈에 뵈는 게 없었다.

내가 한, 두 걸음? 정도 옮겼나. 유지민은 여전히 박지수의 손을 보고 있었고. 박지수는 꼴에 눈치는 빨라서 나를 발견했다. 바람 들킨 표정이 아주 볼만했다. 눈 커져선 입도 커지고, 근데 와중에 잡은 손은 놓지 않았다. 나는 걸음을 몇 발자국 더 옮겨 그들 앞에 섰고 뒤에선 영상 시작을 울리는 소리가 미세하게 들렸다. 박지수. 내가 이름을 부르자 들려있는 손을 내리곤 슬며시 빼내어 자리에서 일어났다. 민정아. 민정아 있잖아.


"너 양봉해도 되겠다."
    "민정아...."
    "몰랐는데 꿈이 그 쪽이었나 봐. 눈에서 꿀이, 아주 뚝뚝. 뚝뚜욱 떨어지던데?"


일부러 과장해서 표현하자 박지수는 초조한 듯 입술을 깨물었다. 그렇다고 그 반응이 영 마음에 들진 않았다. 어쩌면 당연하지. 내가 지금 마음에 안 드는 건 박지수가 아니라, 저 옆에 있는 유지민이었으니.


"왜? 민정이랑 지수랑 무슨 사이라도 돼?"


저 뻔뻔하게 말하는 표정. 흥미롭다는 듯 입꼬리를 올릴 때마다 입술 아래 있는 점이 움직이는 것마저도 꼴보기 싫었다. 또 시작이었다.


"응. 나 얘랑 사귀어."
    "누나, 누나 그게 아니라."
    "뭔 씨발 아니야.... 야. 너 아직도 안 갔냐?"
    "뭐?"


박지수 얘, 사귈 때는 좀 똑똑한 애인가 싶었는데 알고 보니 남자들은 다 똑같다 이거지. 안 그래도 화나 죽겠는데 얘한테 감정 소모할 시간 더는 없다.


"꺼져."
    "뭐?"
    "꺼지라고. 꺼지고, 나 네가 바람 피웠다고 애들한테 다 말할 거니까 아니라고 발뺌 할 생각하지 마라."


남이 보는 내 표정 세상 구리겠지. 세상 혐오가 다 담겨 있을 것이다. 평소엔 잘 보이지 않던 삼백안이 도드라졌다. 박지수는 내 눈치 몇 번 보더니 옆에 있던 가방을 챙긴다. 입술 깨물고 나랑 유지민 몇 번 번갈아 보더니 유지민에게 목례 정도의 가벼운 인사를 하고 뒤를 돈다. 유지민은 그걸 또 받아줬다. 


박지수 가고 친구도 보냈다. 11시 47분. 근처엔 아무도 없었다. 우리를 지켜보고 있는 건 고작 자신의 역할에 맞춰 주황빛을 꾸준히 내고 있는 가로등이 전부였다. 유지민은 나랑 같은 교복을 입고 벤치에 앉아 나를 가만 바라봤다. 오늘 렌즈 안 꼈네. 삼백안의 눈이 나만 주시했다. 나는 유지민의 눈을 볼 때마다 도통 무슨 생각 중인지 알 수가 없었다.


"내가 그만하라고 했지."
    "뭐를?"
    "... 모르는 척도 하지 말라고."
    "난 진짜 모르겠는데."


유지민은 늘 그랬다. 다 알면서 항상 모르는 척했다.


"쟤 나랑 사귀는 거 알고 있었잖아."
    "응. 티 다 내고 다니는데 어떻게 몰라."


봐. 다 알고 있으면서.


"근데 또 왜 건드냐고."
    "아직도 모르겠어?"
    "알면 내가 이러고 있겠어?"
    "민정이, 눈치 내가 기르라고 했지."


그러면서 웃는다. 다정하게 웃는 척한다. 나는 유지민이 다정한 척할 때마다 환멸이 날 것만 같다.


"너 이렇게 아니면 나 안 봐 주잖아."
    "······."
    "나 먼저 갈게. 민정이 너도 얼른 들어가. 독서실에 너무 늦게까지 있지 좀 말고."


유지민이 자리에서 일어난다. 가방 같은 거 없고 손에 핸드폰 달랑 쥔 채 내 옆을 지나가다가 급 정지를 해 뒤를 돌았다. 그리곤 유일하게 자신 손에 있는 핸드폰을 좌우로 내게 흔들어 보였다.


"무서우면 전화하고- 언니 항상 대기 중!"


끝까지 재수 없는 유지민의 퇴장이었다. 















 유지민은 내 인생에 빌런이라고 칭해도 이상하지 않다. 흔한 스토리에서나 나오듯 원래부터 빌런이었던 건 아니다. 그리고 난 원래 유지민을 유지민이라고 하면 안 된다. 풀네임, 유지민 언니. 일단 이건 나중에 말하고. 내가 유지민을 알게 된 건, 내 인생에 빌런이 출현하기 시작한 건, 다 김민우 때문이었다. 내 이복 오빠, 김민우 때문.

우리 엄마가 재혼한 건 중학교 3학년 때였다. 나는 아저씨에 대해선 딱히 불만이 없는 편이었다. 엄마가 좋다는데 내가 뭐 어쩌겠어? 아저씨는 내게 용돈을 자주 쥐여줬다. 스스로 돈 벌 능력이 없는 나에겐 최고였다. 근데 문제는 아저씨 아들 김민우였다. 하루 아침에 생긴 한 살 위인 형제였다. 다정하신ㅡ엄마에게 하는 것으로 보아ㅡ 성격의 아저씨와 달리 김민우는 아주 싸가지가 밥 말아먹은 게 분명했다. 처음으로 함께 집을 합치고 대략 2주 정도는 자신의 성격 숨기고 살더니 2주 뒤가 문제였다. 김민우와 나는 바로 옆방이었다. 새벽에는 늘 누구와 전화를 하는 건지 음성이 끊기질 않았고, 대략 2시 정도엔 꼭 집을 나갔으며,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6시 정도에 돌아와 자는 척을 했다. 그리고 한 달 정도 지나고 학원 가기 전 집을 들렸을 때였다. 당연 아무도 없겠다 생각하고 화장실 문을 열었을 때 나는 김민우가 거기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모습을 발견했다. 지금 생각해 보면 별것도 아니지. 요즘은 술에 꼴아서 나에게 전화가 온다. 김민우에게 온 전화라 생각하고 받으면 정체 모를 남자들의 목소리가 들렸다. 민정아- 네가 민우 동생이냐? 너 존나 예쁘더라. 오빠랑 사귈래? 뭐 그딴 멘트나 들낙였으니.

김민우의 여친을 알게 된 건 열일곱이 되던 해 2월 정도였다. 비가 오는 날이었다. 아저씨가 이번 주 내내 오늘 비 온다고 우산 챙기라고 그렇게 말했는데 정작 아저씨의 아들인 김민우는 우산을 챙기지 않았다. 자연스럽게 나에게 우산을 가져오라고 시켰다. 내가, 지 따까리인 줄 알아. 문자 씹으려고 했는데 옆에서 엄마가 중얼거리셨다.


"오늘 민우 우산 가져갔나? 비가 이렇게 많이 오는데... 맞음 어쩌지."
    "뭐 어때. 돈 있으니까 근처에서 우산 사서 오든가 하겠지."
    "민정아, 네가 좀 갔다 와. 어차피 오늘 학원도 안 가는 날이잖아."


나는 결국 우산 두 개를 챙기고 김민우가 보내준 주소로 향했다. 도대체 뭔데 우산을 두 개나 가져오라고 한 건지 이해가 안 갔다. 더럽게 머네. 택시비 보내준다는 말에 냅다 택시 타고 향했다. 빗줄기가 주르륵 창문을 타고 내리는 걸 구경한다. 물, 싫은데. 괜히 손가락으로 지그재그 모양을 만들며 닦다가 보면 도착했다. 내 것까지 우산 세 개를 들고 내렸을 때 왜 내가 우산을 두 개나 들고 왔는지 이해가 바로 갔다. 김민우 옆엔 여자가 있었다. 얼굴이 매우매우매우, 내 십칠 년 인생 중 가장 얼굴이 작은 사람이었다. 게다가 예뻤다. 입을 떡 벌리고 볼 수 있는 기회가 있다면 한 시간은 거뜬히 채울 수 있을 정도로. 그런 미모에 감탄하고 있을 때 김민우가 내게서 우산 두 개를 뺏어가더니 하나는 펴서 여자에게 주곤, 하나는 자기가 썼다. 걍 친구겠지. 김민우가 저런 여자 꼬실 능력이 있겠냐. 

김민우가 뒤돌아 집 가려는 나를 불렀다. 야야. 김민정. 와봐. 평소 같았음 지가 뭔데 오라 마라야 불만을 표출했을 건데 내가 무슨 정신인지 김민우의 말을 따랐다.


"얘, 내 동생이거든?"
    "아 진짜? 예쁘다."
    "여보랑 같은 학교래."


여보? 나는 눈살을 바로 찌푸렸다. 여보? 시발 내가 방금 뭘 들은 거야? 여보? 호칭도 호칭 대로 엄청난 충격이었지만, 그니까 저 여자가 김민우의 여친? 이상하게 화가 났다. 도대체 저딴 새끼를, 왜? 왜 만나? 

속으로 여자가 아깝다, 여자가 천 배 아깝다, 김민우 저 새끼는 양심이 없나, 이런저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이름이 뭐야?"


김민우 여친이 말을 걸었다.


"김... 민정이요."
    "올해 1학년?"
    "네."
    "반 나왔어?"
    "... 아직."
    "나는 2학년. 민우랑 동갑이야."
    "아...."


목소리도 좋았다. 가까이서 보니까 더 예뻤다. 그러면 그럴수록 더 이해가 안 갔다. 김민우랑 왜 만나는 건지 이해가 안 갔다고. 도대체 언니가 뭐가 아까워서요? 


"핸드폰 좀 줄 수 있어?"
    "네?"


이유도 안 물어보고 홀린듯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건넸다. 


"비번은?"
    "010101."
    "뭐야. 왜 이렇게 단순해."
    "제 생년월일이에요."
    "진짜? 신기하다."


언니는 자신의 번호를 치곤 전화를 걸었다. 언니의 주머니에 있는 폰이 진동을 울렸다. 됐다. 핸드폰을 주길래 받으려고 했더니. 아! 뭔가 빼먹은 게 있는지 다시 핸드폰을 가져간다. 정성스럽게 타자를 치다가 지우고, 치다가 지우고를 반복한다. 이제 진짜로 됐다. 여기. 

집으로 돌아갈 땐 새로운 연락처가 하나 늘어있었다. 

[유지민 언니💙]

그게 유지민과 나의 첫만남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