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2020년 1학기 레포트입니다
1. 왜, 지금, 이곳에서 리인허인가
리인허의 사상은 불온하다. 1996년 발간된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은 중국 본토에 의해 출판이 허락되지 않아 반환 전 홍콩에서 출간되어야 했다. 2014년에 발간된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의 부제는 아예 ‘검열의 나라에서 페미니즘-하기’이다. 리인허는 중국 여성의 성생활과 섹슈얼리티에 대해 가감 없이 말하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어째서 이것이 불온한가? 여기서 우리는 이런 질문을 제기해볼 수 있다. 그 불온함은 누구에 의해 만들어진 것인가? 중국의 여성운동에서 이유의 실마리를 찾아볼 수 있다.
진동원은 1928년 출간한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에서 당시 사조에 따라 자유연애를 칭송하지만, 여성과 남성이 ‘첫눈에 사랑에 빠져서 결혼하는 것’에는 반대하고 있다. 이는 ‘열정의 분화구’를 찾기에 급급한 것이라는 것이다. 이를 통해 자유연애라는 사조는 좋지만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거부한다는 생각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1925년의 <부녀잡지>에서 일어난 성도덕 논쟁을 보면 결론적으로 성생활을 여성의 섹슈얼리티의 관점에서 생각하는 것이 아니라 장래의 ‘국민’이나 ‘민족’을 생산하는 수단으로 간주하여, 성생활 논의가 내셔널리즘의 일종으로 치부되었다고 할 수 있다. 이후 1949년 이후 마오쩌둥이 권력을 잡고 나서 여성의 생물학적 성은 인정하지만, 그것이 ‘섹슈얼리티’의 영역으로 갔을 때는 금지하는 풍조는 더욱 심해진다.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고, 전혀 여성만의 다른 특징이 없다고 무시되며 ‘무성화’되는 것이다. 문화혁명기(이하 문혁)에는 “화장이나 여성다운 복장을 비롯해서 성적 차이를 나타내는 어떠한 표현도 억압”되었다. 리인허 또한 성 억압이나 성에 대한 반감을 조장하는 환경이 여성의 ‘남성화’를 낳았다고 말하고 있다.
이후 이러한 억압에 의한 반동으로 문혁이 끝나고 나서 여성학자들은 여성의 ‘성’이라는 금기에 대해서 불만을 토로한다. 여성과 남성의 성차를 말하긴 하지만, 정작 여성의 생물-생리상 차이는 지워버린다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80년대에 퍼지기 시작했고, 치마를 입고 화장을 하며 그동안 지워졌던 ‘여성스러움’을 되찾고 싶다는 표현의 욕구와 같은 맥락에 있었다. 이런 ‘여성스러움’에 집중하는 경향에도 불구하고 리인허의 연구는 왜 2014년까지 스스로 ‘검열’이라는 표현을 써야 했을까? 이는 개혁개방 이후에도 중화전국부녀연합회(이하 부련) 중심으로 이루어지고 있다는 것을 통해 추측해 볼 수 있다. 부련은 중국 여성들의 인권을 향상시키는 데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동시에 당 중심으로 이루어지는 여성운동에서 벗어날 수 없다는 단점이 있다.
부련은 필연적으로 국가의 발전성과 생산성을 주요시 여긴 국가 산하기관이었다. 이 기관이 주축이 된 현재 중국의 여성담론에서, 그러한 목적에서 벗어난 여성의 섹슈얼리티 발화와, 그 다양한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옹호하는 리인허의 사상은 불온하다고 낙인찍혔다. 이는 어쩌면 필연일 것이다. 섹슈얼리티의 표현은 포르노그래피(마땅히 싸워야만 하는 불쾌한 것들)와 에로티카(승인할 수 있는 나머지 성적인 것들)로 나뉘어 있다. 그리고 당은 무엇이 포르노그래피이고 무엇이 에로티카인지 정할 수 있는 권력을 가지고 있다. 포르노그래피는 단지 성적 흥분을 일으키기 위해 만들어진 생산품이라는 의미를 떠나, 음란함을 떠올리게 만드는 모든 것을 지칭할 수 있다. 음란함은 “그 자체로는 규정을 갖지 않는 무규정적인 개념”으로 국민을 통치하기 위해 통치 권력에 의해 구성된 개념이다.
여기서 퀴어의 섹슈얼리티와 리인허 사상의 낙인찍혀진 불온함, 음란함이 교차된다. 레즈비언 섹슈얼리티는 포르노그래피적이고 불온한가? ‘일반인’이 보기에 불쾌한 BDSM 성생활은 무조건 음란한가? 무조건 다자연애를 하는 것처럼 보이는 폴리아모리에 대한 ‘일반인’의 시선은 어떠한가? 이것도 음란하고 ‘정상성’에서 어긋나기 때문에 정부에서 제지해야 할 대상인가? 성생활을 하지 않아 재생산을 하지 않는 에이섹슈얼은 정부의 시점에서 발전적이지 않은가? 많은 퀴어들은 정부의 발전성과 생산성을 앞세우는 천편일률적인 ‘정상성’ 앞에 폭력을 경험해야 했다. 한국의 경우에는, 박정희 정권 시기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한 목적으로 남성을 군인으로 징집하기 위해 모든 국민을 남성 아니면 여성으로만 이분법화해 구분하는 제도 아래 트랜스젠더 퀴어는 경범죄로 불법화 당했다.
리인허의 시선에는 당의 시선이 없다고 할 수 있다. 천편일률적인 ‘정상성’을 구분 짓는 시선이, ‘에로티카’와 ‘포르노그래피’를 구분 짓는 시선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리인허의 1996년 저작인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는 리인허가 퀴어 담론에 대해서 자세히 논하고 있지 않음에도 아주 다양한 퀴어의 양상이 드러나고 있다. 그것은 아마 리인허가 편견 없이 여성들의 섹슈얼리티 이야기를 듣고 수집했기 때문이리라. 2014년 저작인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는 이러한 태도가 더욱 발전하여 섹슈얼리티의 다양성에 대해 논하며 중국의 포르노그래피 검열제도의 국가성이 잘못이라는 이야기를 하고 있다.
편견 없이 여성들의 성생활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경험을 모은다는 것, 이것은 아주 중요한 작업이다. 현재의 우리는 이를 통해 퀴어 담론이 거의 전무했던 현대 중국에도 퀴어가 존재했다는 분석 증거로 사용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는 서양 중심이고, 서양의 퀴어 경험을 동아시아에 적용시켜야 하는 현재 동아시아의 퀴어 담론 상황을 발전시킬 수 있다. 또한 퀴어로 대표되는 ‘낙인찍힌 음란함’은 리인허의 표현에 따르면 ‘검열의 나라’에 당 중심의 여성운동에 균열을 내는 일을 한다. 여성은 한 집단으로 완벽히 뭉쳐질 수 없고, 한 집단 내에서도 정상성에서 벗어난 다양한 여성의 목소리가 존재한다. 리인허의 작업은 이 목소리들을 잡아내는 과정이다.
그러므로, 지금, 이곳에서 리인허이다. 리인허의 사상은 중국 여성 담론의 주류에서도 벗어나 주류에 균열을 내고 있어서 주목할 필요가 있으며, 그 균열을 내는 방법이 주류에 의해 ‘포르노그래피’로 낙인찍힌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기록하고—단순히 퀴어의 이야기뿐만이 아니라 여성의 포르노그래피적 섹슈얼리티 전반에 관한 이야기이다—그것을 분석하는 작업을 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것은 서양 중심으로 흘러가는 섹슈얼리티, 페미니즘 담론과 퀴어 담론에서 동아시아에 사는 우리는 과연 어떤 경험을 했는가, 하고 예시를 찾아볼 수 있게 해주는 귀한 자료가 된다. 또한 그 예시 속에서 우리는 퀴어 속에서도 마이너리티인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폴리아모리, BDSM에 대한 자연스러운 서술을 발견할 수 있다. 이를 통해 언제까지나 서양에서 번역되어 수입되어 들어오는 이론들이 아니라 동아시아 문화에 맞춘 퀴어 담론을 발전시켜 볼 수 있을 것이며, 서양 퀴어 이론들이 들어오기 전의 동아시아 퀴어들의 양상들도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레포트에서는 먼저 리인허의 이론의 특수성에 대해 알기 위해 리인허보다 앞선 중국의 여성 담론들에 대해 살펴본 후 리인허의 이론의 특징을 살펴볼 것이다. 그중에서도 특히 리인허 연구 속 나타난 마이너리티 퀴어의 양상과 그것이 현재 퀴어 담론에 의해서 어떻게 해석될 수 있는지, 그리고 그 해석들이 한국에 미칠 수 있는 영향을 알아보려고 한다.
2. 리인허 이전의 중국 여성 담론: 최근 100년간의 변화를 중심으로
대부분의 사상은 시의성을 가지고 있다. 당시에는 그 사상이 유효한 측면이 분명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시의성만으로 사상을 평가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모든 사상이 타당성을 가지고, 더 이상의 진보는 있을 수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나는 당시에 발화되었던 모든 사상적 담론들을 긍정하면서 서술하는 것이 아니라, 현대의 비판적인 시각, 그 중에서도 이 레포트의 방향과 일치하는 퀴어 및 페미니즘 담론의 시각으로 서술할 예정이다.
2.1 범람하는 서구 수입 사상들
19세기 말, 그리고 20세기 초에는 서구로부터 수입되거나, 일본을 통해 수입된 서구의 사상들이 범람하였다. 이 과정에서 사회진화론과 자유연애사상, 사회주의 같은 당대에 큰 영향을 미친 사상들도 함께 들어왔다. 이는 1928년 쓰인 진동원의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에서 영향을 찾아볼 수 있다. 사회주의는 다음 챕터에서 다룰 것이기 때문에, 이 챕터에서는 크게 사회진화론과 자유연애사상의 영향만 다루어 보기로 한다. 사회진화론의 영향은 크게 두 가지로 살펴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구시대’를 마치 중세처럼 암흑의 시대로 묘사하고 현재를 르네상스기처럼 “신사조의 맹아 시기”로 구분한 것이다. 두 번째는 여성의 권익이 향상되어야 하는 이유를 부국강병과 연관 지어서 설명하고 있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구시대’의 억압받았던 여성을 강조하기 위해서 궁인의 삶이 매우 고통스러웠다고 묘사하고 있는데 실제로 그러했는가? 당시 여성들이 기녀 말고 봉급을 받으며 일할 수 있는 직업이 궁인 외에는 거의 없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전혀 논하고 있지 않다. ‘구시대’는 암흑이었다고 강력히 논하는 진동원의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에서는 ‘구시대’에도 작위를 가지고 목소리를 냈던 여성들에 대해서 수백 쪽 중 단 한 장밖에 서술하지 않고 있다. 또한 책 전반에 걸쳐 기녀는 매우 고통스럽고 인간답지 못한 삶을 살았다고 하다가 갑자기 그들의 시문을 설명하는 부분에 그들의 이르러 사상과 정신은 자유롭고 구속받지 않으며 유동적이었다고 말한다. 반면 양가 여성은 기녀와 비교하여 몸과 마음이 억압받고 예교에 매어 있었다고 평한다. 그러나 결국 결론을 읽어보면 기녀가 양가 여성보다 고통스러웠다는 것이다. 이는 결국 여성이 실제로 어떤 삶을 살았는가를 알아보기보다는, ‘구시대’의 여성은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매우 고통스러웠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한 서술이다.
이러한 ‘구시대’의 여성의 억압은 네 가지로 압축되는데, 바로 전족, 몸치장, 미신, 그리고 구속된 삶이다. 특히 전족은 매우 심각하게 여겨지고 있다. 물론 전족은 여성에게 실질적으로 가해지는 심각한 억압이지만, 사회진화론에 따라 중국의 ‘구시대’ 문화를 모조리 열등한 것으로 치부하고 이에서 무조건 탈피할 것을 주장하는 논조는 매우 강력하여 이 또한 일종의 억압이 될 수 있다. 예를 들면 중국의 혼인 문화 또한 ‘구시대’의 것이기 때문에 무조건 이로부터 해방되어야 한다는 식이다. 혹은 <여계종>의 저자처럼 여성을 세 단계로 나누어 어느 정도 해방되었는지 계급화시키는 예를 들 수도 있겠다.
부국강병과 연관지어 여성의 권익을 올리자는 논조는 여성 교육의 근거로 많이 활용되었다. 교육을 통하여 ‘구시대’적 관습을 없애고 신여성을 만들자는 논의와 함께, 엘렌 케이의 여성 교육에 대한 주장을 들고오며 여성에게 모성을 가르쳐줘야 한다고 말한다. 모성을 가르치면 여성이 사회와 가정에 좋은 영향을 주고, 그로 인하여 사회가 발전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담론은 여성에게 단순히 ‘현모양처 교육’을 하자는 주장과는 거리가 있었으며, ‘남녀 공통의 교육’을 하자는 주장과 좀 더 가까웠는데 이 이유 역시 여성의 지위 향상뿐 아니라 인류의 발전을 도모하기 위함이었다.
자유연애 사상 또한 당시에 수입된 혁명적인 사상이었다. 기존의 종법제도에서 벗어나 남녀가 자유롭게 만나며 가정을 꾸리니 이는 ‘구시대’의 관습에서 벗어나려던 당시 지식인들에게 한 줄기 빛처럼 느껴졌을 수 있다. 자유연애를 긍정해야 하는 이유가 재미있는데, 왜냐하면 여성들이 갇혀서만 지내면 바람을 피우기 때문이라고 한다. 또 자유가 없으면 여성의 삶이 메마르기 때문에 결혼 생활에 활기가 없어서 남성도 힘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런 경우에 대체 결론적으로 누구를 위한 자유연애, 누구를 위한 성해방인가 하는 질문을 우리는 던져볼 수 있다.
또한 여성에게만 강조되는 정조를 비판하며 애정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가도 남편에게 붙어있으며 정조를 지키는 여성을 치켜세우는 세태를 비판하는데, 이는 광서지방의 소수민족의 풍속을 묘사했던 태도와 모순된다. 광서지방의 사람들은 부부가 결합도 하면서 따로 ‘친구(애인)’도 삼는데, 이것이 문제라는 것이다. 이는 현재의 기준으로 폴리아모리 수행에 해당된다. 위에서 말한 애정이 다른 사람에게 옮겨간 여성의 문제를 이런 식으로도 해결할 수 있다는 것을 당시의 저자는 생각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저자는 ‘구시대’에서 벗어나자고 이야기하지만, 결국 일부 ‘구시대’적인 생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고, 그 결과 불륜은 안 되지만 이혼은 된다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구시대’적인 생각은 동성애를 바라보는 것에도 똑같이 적용되어, 소수민족의 동성애 관습을 말하는 데 있어 여성의 건강에도 좋지 않고, 자연의 이치에 위배되며, 정말 커다란 문제라고 말하고 있다. 이는 단지 1928년에 쓰인 『중국, 여성 그리고 역사』에서만 유효한 것이 아니며, 이 시각이 끼친 영향으로 인하여 2013년에 쓰인 한국의 중국 여성사 책에서도 똑같이 동성연애를 비문명적이라고 서술하고 있다.
단순히 동성애와 폴리아모리의 문제뿐만 아니라, 너무나 한족 중심으로 서술한 나머지 소수민족의 섹슈얼리티 사례들을 대부분 ‘특이하고 잘못된 것’ 취급하고 있다. 설령 그것이 한족의 ‘구시대’적 문제들을 해결하는 실마리를 가지고 있음에도 말이다. 예를 들어 중국 북쪽지방의 아내들이 모두 남편보다 나이가 많은 현상에 대해서 매우 문제라고 서술하고 있는데, 이는 한족의 ‘구시대’의 나이 어린 여자가 결혼을 해야 했던 상황을 해결할 수 있는 실마리가 된다. 그러나 저자는 그러한 새로운 모색을 하기보다는 ‘엽기적인 일화’에 집중하며 이것이 얼마나 나쁜지 설토하고 있다. 이러한 방식의, 나쁜 예만을 가지고 논쟁하는 것은 효과적일지 몰라도 매우 무책임하다. 다양한 형태의 혐오를—이 경우에는 어쩌면 소수민족 혹은 특이 섹슈얼리티 타자화 및 혐오—를 전파하는 수사적 전략이기 때문이다.
결론적으로, 사회진화론과 자유연애사상이 수입된 당시의 문헌들을 통해 ‘구시대’의 관습을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자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그러나 사회진화론에 따라 중국의 ‘구시대’를 너무나 열등한 것으로 치부한 나머지 중국의 옛 여성사와 여성들을 납작하게 해석한다거나, 현재 여성들에게 ‘구시대’로부터의 무조건적인 해방과 탈피를 강하게 요구하는 분위기를 엿볼 수 있었다. 시대적 한계로 인하여 ‘구시대’로부터 해방과 탈피를 하는 방법 또한 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구시대’적이며, 그로 인하여 글 속에서 모순이 발견되기도 한다. 또한 매우 한족 ‘정상인’ 중심이며, 섹슈얼리티에 대한 서술에서는 섹슈얼리티의 다양성 그 자체보다는 맬서스주의적 성과학적인 접근이 서구적이고 우월하다고 생각하는 면모가 드러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당시의 지식인들은 여성의 권익 향상을 위해 어떤 방법을 모색할 수 있을지 고민했다. 그리고 당시의 지식인들은 새로운 시대의 실마리를 사회주의에서 찾았다.
2.2 사회주의로: 남녀는 동등한 인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남녀는 동등한 인민이다. 그리고 인민은 생산을 통해 집합적으로 사회를 창출하고, 그 사회는 역으로 남성과 여성을 형성한다. 이것이 사회주의를 기반으로 한 여성해방 담론의 기초이다. 사회주의 해방을 통한 공산국가가 이루어지면, 모든 인민이 평등하게 되므로 남녀평등 역시 따라오는 것이다. 그러므로 진동원은 자신의 저작에서 여성의 한 층만 더 올라가면 천당에서의 생활을 할 것인데, 이 생활은 사회주의 사회에서의 생활이라고 말하고 있다.
이러한 시각을 통하여 ‘구시대’를 납작하게 해석하고 현재의 여성을 끊임없이 한데로 묶어서 계몽시키려는 시도를 이해할 수 있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사상에서 계급인식을 하고 체계를 전복하는 과정에 대해서, 사치스러운 고용자에 맞서 기진맥진한 노동자—여성담론에서는 억압받은 여성—이 스스로를 계급으로 인식할 때 계급투쟁이 필연적으로 일어나고, 이러한 계급을 만들어낸 체계를 전복시킨다고 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의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이 끊임없이 여성을 하나의 ‘집합체’로 간주하려고 했던 것을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여성은 유산계급이고, 어떤 여성은 무산계급이라는 점에서 여성이 동일한 경험을 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가 관심을 가지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관심을 꺼버리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부분에서는 더욱더 그렇다.
어쨌거나 당시 중국 사회주의 페미니스트들은 사회주의 천국에서의 여성해방을 이루어내기 위해 많은 상상을 서구로부터 수입하거나 만들어냈고, 또는 실천했다. 예를 들면 아동 공육을 통해 가족 문제를 해결하려고 한다거나, 토지개혁을 통한 여성의 토지소유권 보장 주장, 그리고 여성 또한 생산에 참가시킨다는 43결정이 그렇다. 이외에도 여성과 남성의 권리를 제도적으로 동등하게 만들기 위하여 공산당정부와 국민당정부는 많은 노력을 했는데, 여기에서는 사회주의의 이야기를 하고 있으므로 공산당정부의 노력에 집중해 서술하겠다. 공산당의 소비에트 정부가 생기자마자 제1호로 통과된 법안이 남녀의 동등한 이혼권을 논한 ‘혼인법’이라는 것부터 사회주의자들이 여성담론에 관심을 많이 쏟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는 당시 ‘여성해방’이라는 것이 얼마나 중대한 정치자본이었는지를 보여준다. 이후 소비에트구와 홍군 대장정에서 소수의 여성이 남성과 함께 전투와 대장정을 치르는 사례가 있었다. 또한 여성이 상층기관에만 주로 포진했던 국민당과 달리 공산당은 여성의 정치 참여를 적극적으로 뒷받침하여 여성 간부를 양성하였고 이러한 여성 정치 참여의 독려는 때로는 90% 이상까지 올라가는 여성투표율로 나타났다. 이는 같은 해 만주국에서는 여전히 현모양처 교육을 하고 있었음과 비교해 볼 때, 얼마나 커다란 차이인지 알 수 있다.
마오쩌둥은 “여성노동자들의 해방과 모든 계급의 승리는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오로지 계급의 승리를 통해서만 여성이 진정으로 해방을 얻는 것이다.”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생산에서는 반드시 남녀 동일노동, 동일 임금을 실현”해야만 하며, “참된 남녀 평등은 사회주의 개조를 위한 전체 과정에서 제일 먼저 실현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여성이 ‘정권, 족권, 신권’의 지배에 잇달아 ‘부권’에 의하여 억압을 받고 있다고 하며 남녀 평등 제도를 만드는 데에 힘썼다. 그리고 부련을 만들어 제국주의, 봉건주의, 관료자본주의와 여성억압을 연관시키며, 여성의 사회노동진출을 촉진하였다. 특히 폐창정책이 당에 의하여 주도되었는데, 이 또한 사회주의와 연관이 없다고 할 수 없지 않다. 왜냐하면 사회주의 페미니즘적 시각에서 성매매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여성이 강요된 노동 선택을 한 것이기 때문이다.
이러한 노력의 결과로 60-70년대 이래 중국 여성은 가사 업무는 물론이요 심지어는 부엌에서도 해방되었다. 국가의 장려 하에 여성은 남성과 동등하게 사회노동과 공적영역에서 일할 수 있었다. 그러나 이것은 낮은 생산력 하에서 과연 여성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었는가 하는 질문을 제기하게 한다. 여성에게 이중의 부담을 준 것은 아닌가? 그저 여성에게 남성과 동등하게 일하고 행동하라는 지침을 내리고 강조한 것이 아닌가? 이는 문화대혁명기에 이르러, 앞서 말하였듯이 남녀간의 차이를 나타내는 어떠한 표현도 억압하는 결과를 낳게 되었으며, 여성들. 특히 생산성이 많이 낙후된 지역의 여성들은 가사노동에서 완전히 벗어날 수 없었고 이중노동을 부담해야만 했다. 마오쩌둥은 “집합적인 작업, 평등주의적 법조항, 자녀의 사회 양육 등에도 불구하고 중국인들의 여성에 대한 태도들을 진정으로 심도 있게 결정적으로 변화시켰다고 하기에는 너무 이르다.”고 시인했다.
결국 우리가 제기할 수 있는 문제의식들은 이것이다. 제도적으로 인민을 평등하게 한다고 해서 여성이 해방될 수 있는가? 여성이 자신의 섹슈얼리티적 목소리를 내지 않고서 ‘무성화’된 채로 여성해방이 가능한가? 딩링의 삶과 저작을 통하여 우리는 그 문제 제기들이 어떻게 중국 공산당에서 묵살 되었는지를 살펴볼 수 있다. 딩링은 자신의 작품을 속에서 여성의 섹슈얼리티에 대하여 발화하며 여성에게 가해지는 다층적인 억압에 대하여 말하려고 했다. 그러나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욕망을 지닌 여성의 ‘성적 주체’를 포괄하며, 이것은 가부장제 문화권에서 가장 안전한 지대에 속하는 ‘어머니됨’과 반대된다. 딩링은 이 점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공산당에 의해 해방되었다고 한 지역에서도 과연 여성해방이 이루어졌는가, 여성에 대한 이중기준이 사라졌는가 하는 글을 쓰기도 하였다. 여기서 여성의 ‘성적 주체’를 강조하는 것은 당에 의해 ‘포르노그래피’로 낙인 찍힌 여성성을 살리는 행위로 읽어낼 수 있다.
딩링은 여성만의 출로를 모색하기 위하여 동성애적 행위를 묘사하는데, 이는 동성애 담론에 포함된다기보다는, 일종의 제도 탈출적 책략으로서의 동성애이다. 이외에도 딩링은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다양하게 묘사하였다. 그러나 마오쩌둥의 집권과 함께 금욕주의적 분위기가 점점 강해지며 딩링의 소설의 면모도 변하게 된다. 딩링은 좌익작가로서 <어머니>라는 소설을 쓰는데 여기에서는 전략적으로 남녀간의 차이를 부정하며 ‘국민’의 성원이 되기 위해 ‘남성과 동등한 여성’이 되는 서사가 남겨져 있다. 이는 신해혁명시기와 일치하는데 여성문제가 다른 문제에 압도되어 이렇게 표현된 것이다. 그러나 이는 신해혁명시기만 그런 것이 아니라 사회주의의 인민해방이 모든 것에 제일 앞선 표어로 내걸려 있던 시기가 모두 이렇지 않았는가 하고 생각해볼 수 있는 여지를 마련한다. 딩링은 결국 1942년 “옌안문예좌담회 연설”에서 분열주의라고 비판을 받아 자아비판을 한 후 여성주의적 시각을 포기하게 된다.
왜 사회주의 국가에서 더욱 납작해지고 무성화된, 혹은 남성화된 섹슈얼리티만이 남아있었던 것인가? 이 점은 매우 흥미롭다. 왜냐하면 사회주의의 시초에 해당하는 엥겔스가 이미 자신의 저술에서 “곧 닥쳐올 자본주의적 생산의 타도가 있을 후 성 관계들이 정립될 방식에 대하여”, “미래에 새로운 무엇이 있겠는가?”라고 기대하고 있기 때문이다. 폐창정책의 근본정신이 성매매란 자본주의 이데올로기 하에서 여성의 성노동이란 강요된 것이라는 생각일 때, 그리고 그 생각이 남녀의 모든 관계에 적용될 때, 진정한 사회주의 실현을 위해서는 남녀관계에 뿌리박혀있는 모든 계급차이로 인한 강요된 성노동을 폐창해야 한다. 그렇다면 엥겔스의 말 대로 “진정한 사랑 외의 다른 점을 고려하여 남자에게 자신을 준다거나 아니면 경제적 결과의 두려움 때문에 연인에게 자신을 내어주기를 거부한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전혀 알지 못하는 여자들의 세대”가 만들어졌을 것이고,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해방되었을 것이다. 물론 지나치게 과도한 성은 지나치게 부족한 성과 마찬가지로 억압적일 수 있다. 그러나 중국의 사회주의 하에서 성은 생물학적 성을 빼면 지나치게 억압되어 있었다. 우리는 문헌들을 통하여 당시 여성들이 얼마나 ‘남성과 동등한’ 권리를 누렸는지는 알 수 있으나, 여성이 어떠한 생각을 했는지는 알 수 없으며, 그에 대해서는 리인허의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 나오는 여성들의 당시 시대 회고를 통해서나마 알 수 있을 뿐이다.
2.3 개혁개방 이후 다시 수입되는 서구 사상
“오늘날, 세계 어느 나라의 여성도 중국의 여성만큼 해방되지 못했으며, 그 어느 나라의 여성도 중국 여성만큼 해방되지 못한 여성 또한 없다.” 이는 해체주의 평론가인 천샤오밍이 1970년대 초 미국의 한 페미니스트에게 한 말이다. 아마도 문혁 중에 특히 심해진 법제적으로 보장된 여성으로서의 자아와, 실제 여성으로서의 자아 사이의 괴리를 나타낸 말일 것이다. 그 괴리의 폭발로, 마오쩌둥 사후 1980년대 중, 후반의 중국 사회는 급격한 개방화와 사회, 정치적 격변을 겪었다. 특히 중국의 여성들은 커다란 삶의 변화를 맞이했다. 시장경제의 발전에 따라 경쟁과 이윤 추구가 강화되었으며, 행정력은 약해졌다. 여성들은 경제 발전의 변두리로 몰렸고, 다시 ‘산업예비군’으로 전락했다. 많은 여성들이 해고되거나 성매매를 하게 되었고, 취업을 하기 어렵게 되었으며, 가정으로 돌아가거나, 농업 여성화 되었다.
이 와중에 여성담론 또한 폭발적인 변화를 맞이하게 되었다. ‘여성성’, 즉 여성 섹슈얼리티의 문제가 수면 위로 떠오른 것이다. 서문에서 말했듯이 여성들은 화장을 하거나 치마를 입으며 여성 섹슈얼리티를 찾기도 했다. 그리고 여성 담론이 수입되었는데, 이는 미국과 프랑스에서 유입된 것으로 당시 개방적인 분위기 덕에 유입될 수 있었다. 개혁개방 시기에 서구의 여성주의가 처음 소개된 것은 1981년의 일로, 리샤오장이 당시 프로이트와 사르트르를 읽으며 인간의 자유와 해방에 대하여 다시 생각하였다. 그 결과 리샤오장은 중국이 ‘물질적 평등’은 이루었으나 사회적인 면에서 평등은 이루지 못하였으므로, ‘사회적인 해방’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어냈다. 이러한 기존의 여성운동에 대한 반문은 당시 사회주의 시기를 경험한 중년 여성들로부터 엄청난 인기를 불러일으켰다. 또한 ‘부녀(동지)’라는 단어를 쓰지 말고,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는 ‘여인’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였는데, 이는 인민해방 담론에서 여성문제를 독립적으로 해방시키려 했다는 데에 의의가 있다. 그러나, 시의적이지만 현재로서는 한계점이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리샤오장이 분리의 근거로 삼은 것이 남녀의 ‘생물학적 차이’라는 것이다. 이는 이후 리인허의 1996년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 저작에서도 어떤 부류의 사람을 여성으로 정하고, 이야기를 들었으며, 분석했는지에 영향을 미쳤다고 할 수 있다. 이후 2014년 리인허는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 트랜스젠더까지 다루면서 논의의 범주를 조금씩이나마 넓혀나가고 있다.
개혁개방 시기의 중국 페미니스트들의 입장은 크게 두 가지로 나뉜다. 한 가지는 여권신장을 위하여 당의 개입이 필요하다는 입장이고, 다른 한 가지는 당의 권력은 여성에게 억압적이라는 것이다. 리샤오장은 생산력의 향상이 여권신장에 필수적이기 때문에 전자의 태도를 취한다. 반면 왕쩡은 후자의 입장으로, 공산당이 아무리 여권신장에 도움이 되는 정책을 펼쳤다 해도 그것은 당 내부 남성들의 이해관계가 일치했기 때문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둘 다 당 중심, 그리고 사회적 의미의 여성 중심의 논의에서 벗어나고 있지 못한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다.
리샤오장은 미국의 페미니스트들이 너무 서구 중심적인 논의를 하며, 중국으로 여성 담론을 들여오기 위해서는 ‘토착화’를 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리고 여권주의보다 일반적인 인권이 우선이며 부련과의 협조를 중시한다. 이 과정에서 부련이 공산당의 산하기관이라고 불신하는 것은 올바르지 못한 견해라고 본다. 리샤오장이 현재의 중국 여성 인권 향상을 위해 열심히 노력하고 있음을 부정할 수는 없으나, 이것이 과연 여성을 사회적으로 지위 향상시키려는 사회주의 시절 노력과 얼마만큼의 차이가 있는지, 사회주의시절 억압 되었던 여성의 섹슈얼리티 발언에 도움이 되는지 하는 의문을 제기할 수 있다. 반면 왕쩡은 기존 중국 공산당이 어떠한 식으로 여성의 ‘남성화’를 진행시켜 여성이 요구하는 바를 말살하였는지에 집중한다. 이러한 분석은 억압받았던 여성에게 해방감을 줄 수는 있지만, 결국 남성의 가치를 더욱 높게 친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반대를 너무나 강조한 나머지 여성본질주의적으로 가면 그것은 가부장제가 여성에 대해 가지는 억압적 상상을 반영하고 재생산하는 것이라고 지적한다. 결국 왕쩡은 그 사이에서 어떠한 태도를 취해야 할지 제3의 길을 모색하고 있다. 이 또한 좋은 고민이지만, 역시 사회적인 의미의 여성 개념만을 가지고 고민을 하고 있으며, 여성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듣거나 하는 일은 없이 학문적인 논의만을 하고 있다는 한계점이 있다.
이러한 두 흐름 사이에서, 여성의 실재적인 목소리를 들은 리인허의 연구는 가치가 있다고 할 수 있겠다. 특히 지정성별(국가에 의해 지정받은 성별) 여성 퀴어 연구에서 가치가 있다. 왜냐하면 리샤오장과 왕쩡은 사회적인 여성 집합을 가지고 논의를 하고 있는데, 이것은 여성이 남성과 다른 하나의 사회적 집합이라는 의식적, 무의식적 기준 속에서 진행되는 논의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여성은 매우 다양하며 지정성별 여성의 경우에는 더더욱 다양하다. 여성의 직접적인 목소리를 들으면 그 기준들이 모두 의식적, 무의식적인 기준들에 의해 세워진 것이며 그 기준들은 더 커다란 사상이나 주의들에 의해 세워진 것임을 알 수 있다. 개인은 모두 다양하며 그 다양성을 잡아내는 것이 리인허 연구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리인허의 연구는 단순히 여성담론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며 퀴어담론까지 뻗어나갈 수 있고, 리인허가 연구하고 드러낸 여성의 섹슈얼리티는 여성의 퀴어한 섹슈얼리티들까지 드러내는 것이다. 그리고 앞서 말했듯 그 부분에서 주류 퀴어인 동성애뿐만 아니라 비주류 퀴어이고 당시 가시화는커녕 개념화도 되지 않았던 퀴어 섹슈얼리티들도 나타난다. 이 점에서 리인허의 연구는 매우 가치있다.
3.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과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 나타나는 리인허의 사상적 특징
리인허는 여러 글을 썼다. 그러나 내가 한국에서 접할 수 있는 저작이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과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 두 권 뿐이어서, 이 두 권을 가지고 리인허의 사상에 대해서 논하려고 한다. 리인허의 특징이라면 페미니스트이면서 퀴어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공산당에 의해 2020년인 아직까지도 동성애가 금지되고 있다는 점에 비추어 볼 때 매우 급진적인 사상이다. 리인허가 퀴어에 대해 논하게 된 이유는 아마 본인이 퀴어라는 점도 있겠지만, 1996년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 연구를 진행하면서 많은 다양한 여성들의 섹슈얼리티를 접했기 때문이리라. 그리고 이러한 관점은 2014년의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 더 발전되어 나타난다.
3.1 잃어버렸던 여성의 목소리를 되찾기: ‘포르노그래피’적 섹슈얼리티 발화
리인허는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서 연구 방식으로 ‘반구조적 대담(semi-structured interview)’ 방법론을 택하고 있는 이유를 ‘진실의 실체를 얻어내기 위해서’라고 말하고 있다. 과연 리인허가 얻어내고 싶었던 진실의 실체란 무엇이었나? 그것은 바로 개인의 은밀한 사생활과 관련된 것이었다. 그것은 당에서 ‘포르노그래피’의 영역으로 낙인찍은 영역이라고 할 수 있으며, 중국인들이 ‘수치스러운 것’이라고 치부하는 것이었다.. 예를 들면 첫 생리, 이성에 눈뜰 때, 성 억압, 성 무지, 성 학습, 첫사랑, 이성감정, 첫키스, 혼전 관계, 첫 경험, 성교 빈도수, 섹스 테크닉, 오르가슴, 성의아름다움, 성 거부, 성욕, 수음, 피임과 인공유산, 육아, 가정폭력, 사디즘과 강간상상, 불륜, 이혼, 동거, 동성 연애, 폐경과 갱년기, 음란물, 성 범죄, 정서와 성의 관계, 감정과 결혼의 관계, 성과 결혼의 관계, 성 의식, 여성의 성적 권리, 여성의 지위 문제 등이다. 인터뷰는 총 47명을 대상으로 했고 최고령자는 55세였으며 최연소자는 29세였다. 따라서 1996년에 행해진 연구라는 것을 가지고 역으로 계산했을 때, 이 피연구자 집단은 문혁을 사춘기 때 경험한 세대부터, 문혁 이후 사춘기를 경험한 세대로 나뉜다는 말이 된다.
이 연구는 가장 먼저 생리에 대한 서술로 시작하고 있다. 여성들은 생리가 있다는 건 알지만, 그 구체적인 세부사항이나, 생리적 원인에 대해서는 몰랐다. 문혁 이후 사춘기에 접어든 여성들은 그 전의 여성들보다 좀 더 생리에 대해 자연스러운 태도를 보인다는 점에서 마오쩌둥식 사회주의의 금욕주의, 여성의 ‘무성화’가 얼마나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억압했는지를 여성의 직접 발화를 통해 알 수 있다. 리인허는 현재 중년에 이른 여성들은 사춘기를 전후해 대부분 2차성징에 대해서, 심지어는 연애감정에 대해서도 반감을 가졌다는 사실을 알아냈다. 이는 가슴이 큰 게 나쁜 것이라고 생각했다는 진술이 반복되어 나오는 것을 통해 알 수 있다. 리인허는 일정기간동안 ‘성’의 이미지가 모든 문화 속에서 종적을 감추어 사라져버렸다고 말하고 있으며, 성에 관한 연구나 교육은 더 말할 것도 없다. 이것이 바로 당시 사춘기, 청춘기를 겪은 여성들을 이해하는 데에 도움이 될 것이다. 성 지식을 습득하는 경로는 책이나 음란 비디오, 그리고 친구와 가족 등이 있었다. 혹은 동물들의 성교나 심지어는 학생이 강간을 당해서 조사 과정에서 알게 되었다는 이도 있었다. 어쨌거나 잘 정돈된 성교육을 통하여 지식을 얻은 사람은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행위는 계속되어서 아이들은 태어났다. 리인허는 이 ‘난감한 상황’을 외국 기자와 중국의 극작가가 나눈 대화를 통해서 표현하고 있다. “중국 사람들은 성을 어떻게 대하고 있나요?” “중국 사람들은 성에 대해 관심이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그 많은 아이들이 태어날 수 있었을까요?” 리인허는 이를 문화적 요소로 설명한다. 중국 사람들은 아이만 낳고 성 쾌락에 대해서 무관심하며 저속하게 여긴다는 것이다. 그러나 리인허의 연구를 보면 단지 사회 분위가 그럴 뿐, 그 속에서 살아가고 있는 여성들은 성 쾌락에 대해서 전혀 무관심하지 않음을 알 수 있다. 여성들은 단지 아이만 낳는 존재가 아니라, 섹스를 몇 번 하는지, 어떤 체위로 하는지, 어떤 필로우 토크를 하고 오르가슴을 어떻게 느끼는지 전부 말할 수 있는 존재이다. 또 여성에 따라 성욕이 강할 수도, 약할 수도 있고, 언제 자위를 하며 자위에 대해 어떻게 느끼는지도 전부 말할 수 있는 존재이다.
이는 기존 질서에 저항하는 ‘포르노그래피’적 발화라고 할 수 있다. 기존 질서에서는 앞서 말했듯 맬서스주의적인 산아제한 정책 관련 성과학적인 성행위 발언만 가능했다. 그러나 리인허는 그것을 깨뜨린다. 왜 리인허는 이런 ‘포르노그래피’적 연구를 할까? 그에 대해 리인허는 “중국에서 성을 연구한다는 것은 모험과 위험을 무릅쓰는 도전이자 규범을 멋어나는 도발과 같으며, 심지어 전위적인 반역처럼 여겨지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하지만 그보다 더 본질적인 이유는 다음과 같다. 리인허는 문혁으로 대표되는 시기에 사춘기, 청춘기를 보냈고, 그 시기에 ‘성’은 말해져서는 안 될 어둠이었다고 그는 회고한다. 성이 사회의 어둠 속에 있으면서, 도덕군자인 척하면서 뒤로는 말도 안 되는 짓거리를 벌이는 사람도 있었고, 유치할 정도로 수줍음을 타는 사람도 있었다. 모든 죄악의 근원이 ‘성’인 것처럼 성과 관련된 것을 심하게 막으려고 하는 사회 분위기 속에서 리인허는 중국이 왜 성적인 문제에서 왜곡되고 변태적이고 억압적인지 밝히고자 했다. 그 이유로 리인허는 사회와 국가, 문화의 이름으로 현대 중국에서 ‘개인’이 형성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결국 리인허의 연구는 섹슈얼리티적 발화를 통해 ‘개인’을 되찾는 일인 것이다. 이를 통해 리인허는 여성에게 잃어버렸던 목소리를 되돌려주고, 잃어버렸던 자아를 되돌려준다. 리인허는 여성들의 섹슈얼리티의 기록이 “그들의 생활이고, 생명의 존재 상태”이기 때문에 매우 중요하다고 말한다. 이러한 이해를 가지고 리인허의 2014년 저작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의 서문인 “자신의 개성에 풍격을 주는 것, 그것은 숭고하면서도 보기 드문 예술이다. 진정한 자아는 드러나거나 발견되는 것이 아니라 창조되어야 하는 것이다.”를 보면 왜 이 글이 서문으로 들어갔는지 이해할 수 있다. 리인허는 무엇을 ‘포르노그래피’와 ‘에로티카’로 낙인찍을 것인지의 이분법에서 벗어나 섹슈얼리티의 자유로운 발화를 통하여 개인의 개성을 찾고, 자아를 완성하고 싶었던 것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이것은 단순히 여성의 주체적 섹슈얼리티 발화를 기록하는 것 너머의 의미가 있다.
3.2 급진파(급진적-문화적 페미니스트)와 자유파(급진적-자유의지론적 페미니스트) 사이에서
리인허는 섹슈얼리티를 대하는 관점에 있어서 급진파(급진적-문화적 페미니즈트의 관점, 이하 급진파)와 자유파(급진적-자유의지론적 페미니스트의 관점, 이하 자유파)의 관점 사이에서 고찰을 하고 있다. 둘의 관점은 거칠게 말해서 성 해방에 대해서 어떻게 보느냐 하는 것에 대한 차이이다. 급진파의 접근은 현재 형성된 여성의 성욕은 전적으로 남성 권력과 이데올로기의 결과라는 것이다. 따라서 여성은 여성만의 섹슈얼리티를 개발해야 한다. 그것은 포르노그래피의 배척과, 여성간의 동지애를 받아들이는 것과 연결된다. 그러나 이것은 또다시 무엇이 포르노그래피이고 무엇이 에로티카인지 구분하는 것과, 실제 레즈비언들을 배제하는 결과를 낳는다. 반면 자유파의 접근은 단순히 방출되어야 하는 자연적인 성욕을 가정하거나, 성에 관한 문제를 선택의 자유로 보고 있다. 이는 너무나 낭만적인 해석일 수 있으며, 모든 성욕이 인간 생활에 그냥 주어진 것이 아니고, 선택 또한 늘 자유롭지 않다는 점을 간과하고 있다.
리인허는 둘 중 어느 것이 더 낫다고 한쪽 손을 일방적으로 들어주지는 않는다. 분명 둘 다 해낸 업적이 있고, 급진파의 대표격인 맥키넌의 경우 성희롱을 정의 내린 것에 대해 인정한다. 자유파의 대표격인 루빈의 사상 또한 BDSM을 설명할 때 인용하고 있다. 그러나 연구 전체에서 흐르는 분위기를 보았을 때, 그리고 급진파와 자유파의 논쟁을 언급한 장의 논조를 보았을 때 리인허는 아마도 자유파 쪽에 기울어 있는 것 같다. 리인허는 사회 혁명과 성 혁명이 동일하다는 다니엘 갈란의 의견을 인용하며 자신의 논의를 끝마치고 있다. 또한 동성애에 대해서 언급할 때 “여성의 이익은 이성애를 반대하는 데 있다.”는 급진파의 말을 인용하고 있는데, 리인허는 이 동성애를 책략으로 내세운 ‘여성문화 건설을 통한 남녀의 분리’를 비판하고 있다. 음란물(포르노그래피)에 대한 논쟁에서도 자유파의 논지에 약간 더 가깝게 서 있다. 그리고 중국이 진보되어 음란물 논쟁이 수면 위로 떠오르기를 바라고 있는데, 시간이 지나 2014년에 쓰인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는 연극 <버자이너 모놀로그>가 취소된 사건을 두고 글을 썼다. 이 연극은 유명한 페미니즘 모노드라마로 여성이 자신의 신체에 대해서 말하는 극인데, 제목에 ‘버자이너(질)’이라는 단어가 들어갔다는 이유로 상연이 금지된 것이다. 이를 통해 리인허는 자신을 완전히 자유파에 놓으며, 성을 죄라고 여기는 것을 네 가지 이유를 들어 반대하고 있다.
첫째는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 욕구라는 것이다. 둘째는 인간 또한 동물이며 식욕이나 성욕처럼 인간의 몸에 남아있는 약간의 동물적 특성은 본능일 뿐, 죄가 아니다. 셋째, 인간의 정신적 추구와 생리적 추구는 모순되지 않으며 정신적 추구가 생리적 욕구를 죄로 만들 수는 없다는 이유이다. 넷째, 인간이 식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병에 걸릴 수도 있지만 밥이 죄가 되지는 않는데, 왜 성욕을 만족시키기 위해 병에 걸리면 성이 죄가 되냐는 것이다. 그러면서 리인허는 성에 대한 죄악감을 없애고 왜곡된 관념을 바꾸어 삶을 즐겁게 살자고 말하고 있다. 리인허는 자발적, 성인, 사적이라는 세 가지 원칙에 위배되지만 않는다면 인간의 성행위는 법률적 재제를 받아서는 안 된다는 ‘성애 3원칙’을 세웠다. 이는 앞서 말한 섹슈얼리티 긍정을 통해 개성적인 개인을 찾고 자아를 만들어가자는 주장과 연관된다.
그러나 이것은 분명 한계점을 가지고 있다. 이미 가부장제가 전복될 수 없는 세계라면, 여성의 섹슈얼리티 긍정은 남성의 시선 아래에서 행해지는 것이 아닌가? 그것은 소노 시온의 영화 <안티 포르노>의 문제 제기와 닮았다. 여성이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마음껏 행하지만, 그것은 남성의 카메라 아래에서 행해지는 포르노그래피에 불과할 뿐이다. 물론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굉장히 억압되었던 중국 사회에서 섹슈얼리티 발화는 의미 있겠지만, 개혁개방이 계속되고 아노미적 상태가 지속되는 상황에서 가부장제는 없어지지 않는데 섹슈얼리티 긍정만을 계속 하는 것이 과연 얼마나 도움이 될 것인가? 현재 중국의 상황을 감안할 때, 그래도 리인허가 계속해서 성에 대하여 긍정적인 발언을 하는 것은 도움이 되어 보인다. 그러나 그저 ‘성 긍정’보다는 좀 더 깊은 논의가 필요하다. 중국은 생각보다 빠르게 변하고 있다. 공산당에서는 동성애를 금지하고 있지만 자본주의 물결은 2019년 묵향동후의 동성애 소설 <마도조사>를 드라마화해서 미국 넷플릭스까지 진출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그 소설의 주인공은 텐센트에서 가상인물상을 수상했다. 중국은 현재 엄청난 자본주의의 물결과, 그와 반대로 공산국가 정체성을 지키기 위한 엄청난 검열이 함께한다고 여겨진다. 리인허는 이러한 중국의 특수성을 좀 더 고려할 필요가 있다.
물론 리인허는 중국의 특수성을 고려한다. 그것은 성에 대한 관점의 차이이다. 서양에서는 성을 옳고 그름, 선과 악, 정상과 비정상으로 구분한다. 그러나 중국에서는 성을 중요함과 미미함, 숭고함과 수치, 상류와 하류로 구분되어 왔고 항상 후자에 속했다. 서구사회는 성에 대해 죄악감을 느끼게 하는 사회이고, 중국사회는 수치심을 느끼게 하는 사회라는 것이다. 이러한 분석을 통해 리인허는 오히려 중국 여성들이 서구 여성들보다 어느 정도 성적 자유가 있다고 말한다. 반드시 오르가슴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이나 성이 부적절한 방향으로 흐르고 있다는 이유만으로 의사를 찾아갈 필요가 없다는 뜻이다. 이는 현대 중국에서 일반 상점에서 성인용품을 살 수 있다는 사실로도 입증 가능하다. 중국에서 성-섹슈얼리티는 서구만큼 정치성이 강렬하지 않다. 그러나 이것은 반대로 중국에서 그만큼 이 주제가 정치적으로 중요하게 다루어지지 않았다는 뜻도 된다. 하지만 그것이 중국에서 성이 중요하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개혁개방과 함께 성은 점점 중요해지고 있다. 사회주의 시기 성에 관해 모순되고 왜곡된 점이 있었다면, 개혁개방시기 성에 관해 모순되고 왜곡된 점 또한 있을 것이다. 중국은 물질적, 사회적으로 남녀가 매우 동등한 상태에서 여성이 성적으로 억압되어 있었다는 점에서 특이점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개혁개방 이후 물밀 듯이 밀려오는 성의 물결이 중국의 문화를 뒤흔들고 있다. 리인허는 이 점에 있어서의 중국의 특수성에 대해서 말해야 한다.
리인허의 자유파적인 ‘성 긍정’ 태도는 여성의 섹슈얼리티 발화에 커다란 도움이 되었고 몰개성화된 사회주의시기로부터 자아와 개성을 찾는데에도 도움이 되었다. 그러나 이제는 그저 ‘성 긍정’을 하는 것을 넘어서서, 현시대 중국의 특수성을 고려한 더 깊은 고민을 해야 할 것이다.
3.3 여성 내 다양성의 발견과 그에 대한 긍정: 퀴어를 중심으로
이러한 한계점에도 불구하고 리인허의 연구는 매우 큰 가치가 있다. 여성들이 하나의 집합체가 아니며, 다양한 개성들을 가지고 있고 특히 섹슈얼리티의 영역에 있어서 얼마나 다양한 스펙트럼을 가지고 있는지 보여주기 때문이다. 이는 여성을 대부분 하나의 집합체로 보았던 기존 여성 담론이나, 나누어 보아도 유산 계급과 무산 계급으로 나누어 보았던 담론들과 비교된다. 왜냐하면 개개인을 모두 다르게 보고 있기 때문이다. 리인허의 연구 속에는 섹슈얼리티 차이에 대한 서술은 있지만 기존의 여성 연구들과는 달리 경제적 지위 차이에 대한 서술은 없다는 것이 커다란 특징이기도 하다. 이처럼 리인허는 앞서 말했듯 섹슈얼리티 긍정과 서술을 통하여 개인을 발견하고자 했던 것이다. 리인허는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 “시대가 달라져서 여자와 여자가 다르다”는 구호를 내세워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그 다른 여성들은 모두 각양각색의 인간이라서, ‘남성다운 여성’이나 ‘여성다운 여성’이라는 단어를 쓸 필요가 없다고 주장한다. 모두 여성이고 그 전에 본질적으로 인간이라는 것이다. 그 점에서 리인허는 기존 중국의 여성 중심 담론에서 한 발짝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리고 그 본질적으로 모두 인간이라는 시각이 퀴어를 긍정하는데에도 도움을 주었을 것이다.
먼저 LGBT나 성소수자가 아닌 ‘퀴어’라는 단어를 쓰는 이유에 대해서 설명하고자 한다. LGBT라는 단어는 레즈비언, 게이, 바이섹슈얼, 트랜스젠더라는 단어가 합쳐진 것으로 성소수자를 나타내는 단어로 쓰이지만, 성소수자 중에는 팬섹슈얼이나 젠더퀴어, BDSM 수행자 등 그 속에 들어가지 않는 부류가 많다. 또한 성소수자라는 단어 속에는 ‘성정체성’이나 ‘성지향성’이 시스젠더 이성애자가 아닌 사람을 칭한다는 뜻이 들어가 있는데, 이런 경우에 ‘로맨틱 지향성’이 제드(에이와 반대되는 말로, 끌림을 느낀다는 뜻, 사회에 의하여 ‘정상’의 범주에 속함)가 아닌 사람이나 관계를 맺는 형태가 모노아모리(1:1 관계를 말함, 사회에 의하여 ‘정상’ 범주에 속함)가 아닌 사람들은 이 단어에서 배제될 수 있다. 따라서 이 레포트에서는 사회에 의하여 ‘정상’이 아니라고 말해진 모든 범주를 나타내는 ‘퀴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자 한다.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은 총 47명을 대상으로 한 연구인데, 여기에서 우리는 다양한 퀴어의 형태들을 접할 수 있다. 이는 중요한 발견이다. 왜냐하면 현재 퀴어 담론에서 동아시아의 퀴어 섹슈얼리티 역사 연구는 발굴이 중요하며 이는 특히나 서구와의 교류가 끊겼던 시절의 영향을 받은 동아시아 연구라는 점에서 그렇다. 또한 여성이고 퀴어인 자신의 섹슈얼리티가 어느 한 쪽의 논의에만 속해지는 것이 아니라 복합된 채로 옛날에도 실재했다는 것을 아는 것은 퀴어 담론 뿐만 아니라 퀴어 당사자에게도 도움이 된다. 무엇보다도 퀴어가 최근에 생겨난 개념이 아니라 여성의 섹슈얼리티와 함께하는 개념이라는 것을 밝히는 작업은 여성 퀴어의 위치를 정립하는 데에 중요하다.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항상 존재해왔듯이 퀴어 또한 항상 존재해왔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둘은 분리된 것이 아니다. 그러므로 여성의 섹슈얼리티를 탐구한 이 연구에서 퀴어가 자연스럽게 발견되는 것이다.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는 가장 많이 알려진 퀴어의 형태인 동성애부터, 당시에는 리인허가 알지 못했을 폴리아모리나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으로 추정되는 사람들의 일화까지 서술되어 있다. 이는 퀴어가 생각보다 주변에 얼마나 많이 있는지 단적으로 드러내는 예라고 생각된다. BDSM과 폴리아모리,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은 다음 챕터에서 자세히 설명하기 때문에, 이 챕터에서는 리인허가 당시에 자신이 알고 있었던 퀴어인 동성애에 대해 보인 태도를 통하여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 저술 당시 리인허의 동성애에 대한 태도를 알아보려고 한다.
리인허는 여성들의 동성애 경험, 혹은 동성애를 접한 경험을 서술하며 동성애에 대한 담론들을 어느 한 쪽의 손을 완벽히 들어주지 않고 전부 나열하려고 애쓰고 있다. 예를 들면 동성애를 병으로 보는 관점과, 병으로 보지 않는 관점을 전부 설명하는 점이 그렇다. 그러나 은근히 레즈비언들의 발언, 그리고 푸코와 프로이트를 인용하면서 이것이 병이 아니라 자연스러움, 다양성에 관한 문제라는 것을 시사한다. 이 점에서 레즈비언과 게이에 대한 차별의 차이를 다룬 부분이 미심쩍다. 서양에서 역사적으로 게이에게는 엄격한 처벌이 적용되었던 반면, 레즈비언에게는 그렇지 않았다고만 언급하고서 넘어가는데, 이것이 만약 레즈비언이 타당한 근거로 사용된 것이라면 매우 바람직하지 않은 논설이며, 그냥 현상 설명만 하고 만 것이라면 얕은 분석이다. 왜냐하면, 전자라면 그것은 게이는 차별 받아도 괜찮다는 암묵적 동의와 함께 레즈비언의 비가시화로 인한 지워지는 차별은 보지 못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 후자는, 가부장제 사회 하에서 게이에 대한 처벌은 여성화 되는 남성, 가부장제 밖으로 벗어나는 남성에 대한 처벌에 가깝고 레즈비언에 대한 처벌이 없는 이유는 남성들이 언제든지 자신의 남근으로 다시 가부장제 하로 들여올 수 있는 유희거리로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인허는 둘 다 말하지 않고서 그냥 넘어갔다. 이는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서 리인허가 논하는 담론의 깊이의 한계점을 보여준다.
시간이 지나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는 퀴어이론의 주요 관점에 대해서 다룬다. 그 중에는 “전통적 동성애 문화에 대한 도전”이라는 것도 있다. 이성애 아니면 동성애, 혹은 양성애의 기준에서 벗어나 다양한 욕망, 다양한 젠더 정체성과 다양한 성적 정체성을 해체한다는 것이다. 리인허는 그동안 동성애에 대해서 가치판단 유보적이었던 태도에서 물러나 퀴어 이론에 완전히 경도된 것 같다. 개성을 찾겠다는 리인허에게 사람들에게 개성을 부여해주는 퀴어 이론은 매우 혁신적이었을 수 있다. 그리고 중국은 예로부터 동성애에 대한 관념이 서양보다 우위에 있었으며, 동성 결혼을 어서 합법화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여기서 특기할만한 중국만의 특이점은 동성애자 인권보호를 말하는 것이 마치 ‘매국’처럼 들릴 수 있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미국이 중국의 동성애자 인권을 비판하고 있는데, 거기에 덧붙여서 중국의 동성애자 인권을 비판하는 것은 미국에 덧붙어서 서구의 가치를 중국에 강요하는 것처럼 들린다는 것이다. 리인허는 이 점에 대해서도 해명을 하고 있다. 동성애 권리를 보호하는 것은 인간의 자유평등이라는 보편적 가치를 추구하는 것이지 결코 ‘매국’이 아니라고 말이다.
시간의 흐름을 따라서 볼 때 리인허의 퀴어에 대한 입장은 매우 확고해졌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이론가의 입장이 아니라 활동가의 입장으로서 확고해진 것 같다. 혹은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라는 한국에서 구할 수 있는 최근 책이 리인허가 쓴 짧은 글들을 모은 것이라서 리인허의 생각이 다 담길 수 없기 때문에 그럴 수도 있다. 한국에 리인허의 글이 많이 소개되기를 바란다.
4. 리인허 연구에서 발견할 수 있는 퀴어의 양상
1996년 저작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서는 리인허 자신조차 인식하지 못한 퀴어의 양상이 47명의 여성의 인터뷰를 통해 드러나고 있다. 나는 그 중에서도 잘 알려진 동성애보다는, 잘 조명받지 못하고 당시의 리인허도 그것이 퀴어라고 깨닫지 못한 사람들을 중심으로 리인허의 연구에서 드러난 퀴어의 양상에 대해서 서술하려고 한다. 그 종류는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폴리아모리, BDSM 수행자들이 있다. 에이섹슈얼은 누군가에게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고, 에이섹슈얼 엄브렐라라고 칭하면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의 집합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에이로맨틱은 누군가에게 로맨틱한 끌림을 느끼지 못하는 사람을 말하고, 에이로맨틱 엄브렐라라고 칭하면 그러한 종류의 사람들의 집합 전체를 지칭하는 말이다. 폴리아모리는 기존 질서인 모노아모리(1:1관계)에 대항하며 여러 형태의 관계를 맺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말하고, BDSM이란 Bondage, Discipline, Sadism, Masochism의 줄임말으로 다양한 형태로 나타나지만 보통 권력관계가 존재하는 성행위나 관계를 말한다. 그러나 여기서 서술한 것은 모두 짧은 글로 설명한 것으로 깊은 이해가 부족할 수 있으니, 아래의 각 챕터들에서 더 자세히 설명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이들은 너무나 연구가 부족한 소수 퀴어이기 때문에, 논의 전개에 있어서 가능한 전문 서적을 참고하도록 하겠지만 만약 필요하다면 나의 개인적인 경험도 근거로 사용될 예정이다.
현재 가시화되지 않은 퀴어들에는 이 네 부류 말고 다른 퀴어들도 많으나, 리인허의 연구에서 존재의 흔적을 확실히 발견할 수 있는 것이 이 네 부류이므로 에이섹슈얼, 에이로맨틱, 폴리아모리, BDSM 수행자를 레포트 목차에 넣었다.
4.1 중국 퀴어의 역사와 중국 사람들의 퀴어에 대한 태도
중국에서는 서양에서 그랬던 것과 같이 섹슈얼리티가 정상, 비정상으로 나뉘어 낙인찍히지 않았기 때문에 중국의 퀴어는 ‘비정상’에 속했다기보다 ‘소수’에 속했다고 말하는 것이 훨씬 옳은 서술이다. 특히 가장 가시적으로 드러나는 동성애의 경우에 있어서 리인허는 중국 고대 문화가 서양에 비교해 우위에 있다고 말하고 있다. 물론 문혁시기 동성애가 탄압을 받기는 했지만 당시는 비전형적인 시기였고 특별한 경우로 봐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고대 문화에서 동성애는 자연스러운 문화로 계속해서 등장했고, 오히려 이성애보다 규제에 있어서 자유로웠다. 이 점은 흥미로운데, 왜냐하면 왜 이성애에 한해서 동성애보다 규제가 심했는가, 라는 질문에 대하여 여러 가지 가설을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중국 문화에서 나타난 동성애의 경우 대부분 남성 동성애라는 점을 고려해 볼 때 동성애는 남성들의 문화인 반면 이성애는 여성과 얽히는 것이어서 규제받았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 있다. 또 다른 하나는 동성애는 재생산이 불가능한 말 그대로 ‘놔둬도 되는 유희의 영역’이지만, 이성애는 재생산이 가능한 영역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종법제도가 강력했던 고대 중국에서 그럴듯한 이유가 되어주지 않았나 싶다.
남성 동성애자들은 이렇듯 역사에 많은 기록이 남아있지만 여성 동성애자들은 그렇지 않다. 진동원의 저작에서 서로를 의자매라고 부른 광주 지역 여성들의 동성애에 대한 기록이 나와있다. 여성들이 서로를 의자매 맺으며 만약 한 쪽이 시집을 가도 남편 집에 가지 않고 서로 이겨내자고 하는 것이다. 이는 시간이 흘러 두 자매가 부부처럼 동거하는 것에까지 이르게 되는데, 그 중 한 여자가 남편처럼 행동한다는 것은 부치 섹슈얼리티를 떠올리게 해서 흥미로운 구절이다. 리인허는 부치 섹슈얼리티에 대해서 여성 동성애에서 남성 역할을 하는 사람이고, 반대로 펨 섹슈얼리티에 대해서는 여성 동성애에 대해서 여성 역할을 하는 사람이라고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서 서술하고 있다. 그러나 이것은 이성애를 기준으로 한 서술이기 때문에 다소 오류가 있다. 여성과 여성의 관계는 여성과 남성의 관계에 대입해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다. 부치 섹슈얼리티는 여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더 능동적인 역할을 하고, 펨 섹슈얼리티는 여성 동성애자들 사이에서 상대적으로 더 수동적인 역할을 한다는 것이 더 알맞은 설명일 것이다. 이것이 이성애의 남성과 여성의 역할과 어느 정도 겹치는 부분이 있겠지만 그렇다고 해서 여성 동성애가 이성애간의 관계를 흉내낸다고 설명할 수는 없는 일이다. 20세기 초의 여성담론가인 진동원은 이러한 여성 동성애적 관계에 대해서 아주 부정적인 입장을 견지하고 있는데, 이 또한 문혁시기와 마찬가지로 비전형적인 시기로 봐야 하는지, 아니면 서구에서 성과학적인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시각이 수입되어서인지 리인허는 답변하지 않고 있다. “자연의 이치에 위배되는 일”이라는 진동원의 서술을 볼 때, 이는 아마도 정상-비정상을 나누는 서구의 시각을 수입했기 때문에 생겨난 일이라는 것을 유추해볼 수 있다.
어쨌거나 현재 중국에서는 무관심한 태도가 내려져 와서 현대 중국인들은 동성애에 대해서 정치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지 않거나 큰 관심이 없다는 것이 리인허의 의견이다. 물론 동성애는 소수문화로써 주류문화의 억압을 받았지만, 그것이 서양처럼 정치적으로 격렬한 탄압까지 가지는 않았다는 이야기이다. 리인허는 그 이유를 세 가지로 꼽는다. 첫 번째, 중국인은 대부분 종교적 신앙이 없다. 그러므로 타인을 자신의 직관으로 평가하지 어떠한 절대적 기준으로 평가하지 않는다. 그러한 관점에서 동성애는 타인을 다치게 하지 않기 때문에 별로 타인과 관계 없다고 느낀다. 두 번째, 동성애는 재생산이 불가하다. 그러므로 경시하긴 하지만 죄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세 번째, 중국인의 민족성과 관련이 있다. 한민족은 자신의 문화에 대해 자부심이 크고 하위문화에 의해 엎어질 것이라는 생각을 하지 않는다. 그래서 다른 문화를 거들떠 볼 가치가 없다는 태도가 많고 그렇기 때문에 박해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리인허는 주국 문화가 서양 문화에 비해서 동성애 문제를 대할 때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우위”에 있다고 말하지만, 나는 동의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이것은 ‘비가시화에 의한 차별’이기 때문이다. 리인허는 같은 책에서 동성애자들에 대하여 용납으로는 부족하고, 존중이 필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존중을 하려면 일단 주류 문화로 그들을 인정해야 한다.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신경쓰지 않는다, 경시할지언정 죄라고 하지는 않는다 정도로의 인식으로는 안 된다. 그러면 주류 문화는 계속해서 이성애 중심주의일 것이고 퀴어들은 계속해서 주변부로 밀려날 것이다.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신경쓰지 않는다는 정도의 인식은, 퀴어들이 죽더라도 그것이 타인을 해치지 않는 한 신경쓰지 않는 다는 말과 똑같다. 그리고 비가시화된 퀴어들은 주류문화에 의해서 상상도 못한 곳에서 공격을 받으며 은유적으로, 실재적으로 죽는다. 따라서 중국이 단순히 퀴어들을 용납하는 것이 아니라 존중을 하려면, 일단 그들에게 관심을 가져야 한다. 중국이 퀴어들에게 무관심하다는 것은 단지 그들이 겪는 차별의 종류가 다르다는 의미이다. 서구처럼 대중이 나서서 돌을 던지지 않는다는 의미일 뿐, 퀴어들이 겪는 실제 삶이 덜 차별적이라거나 중국이 동성애 문화를 대할 때 역사적으로나 문화적으로나 절대적 우위라는 뜻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 챕터에서는 동성애로 대표되는 퀴어가 중국에서 어떠한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현대 중국이 이에 대해 어떠한 인식을 가지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리인허는 중국에서 동성애가 무리 없이 받아들여졌고, 그러한 무관심이 현대까지 내려오고 있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동성애가 아니라 다른 퀴어들, 특히 현대 서구에서도 비가시화되어서 가시화 노력을 하고 있는 퀴어들은 현대 중국에서 어떠한 양상으로 나타나고 있을지 논해보도록 하겠다.
4.2 에이섹슈얼
성적 욕망이 결핍된 사람이나 타인을 향해 성적인 끌림을 느끼지 않는 사람은 역사 어느 시기에나 있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에이섹슈얼이라는 특정한 범주로 등장한 것은 2000년대 초반으로, 데이비드 제이라는 사람이 에이섹슈얼 교육 네트워크인 ‘에이븐’을 창시하면서 에이섹슈얼이 퀴어 담론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기 시작했다. 그것은 섹스리스를 병으로 보던 서구의 사람들, 그리고 정신의학자들과 성과학자들, 병리학자들에게 새로운 시각을 주었다. 에이섹슈얼 퀴어들은 DSM(정신 장애의 진단과 통계 편람)에서 말하는 ‘과소 성욕 장애’와 에이섹슈얼이 다르다는 것을 알리는 운동을 하고 있다. 그러나 아직까지도 성욕은 인간의 기본적이며 모두가 공통으로 가지고 있는 욕구로 인식되고 있어서 조현성 성격장애의 진단 기준에는 “다른 사람과 성 경험을 갖는 일에 거의 흥미가 없다”는 문항이 들어가 있다. 만약 이 문항과 다른 3문항을 더 충족한다면 그는 조현성 성격장애이다. 그러나 어떠한 사람이 다른 사람과 성 경험을 갖는 일에 흥미가 없는 것이 어째서 한 인간이 성격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근거가 될까? 이러한 인식 때문에 에이섹슈얼들은 동성애자들이나 양성애자들만큼이나, 혹은 그보다 더 실질적으로 부정적인 시선을 받고 있으며, 커밍아웃 할 때 커다란 스트레스를 느낀다.
앤서니 보개트는 에이섹슈얼의 핵심적인 정의로 첫째, 성적인 매혹(sexual attraction)이 없으며, 둘째, 지속적으로 성 충동이 결핍되어 있고, 셋째, 성적 파트너와 배타적인 관계를 유지하지 않으며, 마지막으로 자신이 성행위나 성적 충동에서 주체라는 관념이 없다는 것을 든다. 더 자세한 이해를 위해서는 인간의 성 심리학적 과정에서 매혹, 흥분, 행위, 인지, 욕망이 모두 분리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아야 한다. 여기서 매혹은 성적 매혹과 로맨틱한 매혹으로 나뉘는데, 에이섹슈얼은 앞서 말했듯 타인에 대한 성적인 매혹을 느끼지 않는다. 그렇다고 해서 로맨틱한 매혹을 느끼지 못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왜냐하면 둘은 별개의 것이기 때문이다. 섹스와 로맨스는 관계가 있긴 하지만, 필요충분조건은 아니다. 또한 성적흥분과 성적 매혹도 별개의 것인데, 에이섹슈얼도 성적 흥분에 몸이 반응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유쾌한 감정을 제드섹슈얼(성적인 끌림을 느끼는 사람들)과 다른 방식으로 좋아할 수도 있다. 그렇다고 그들이 에이섹슈얼이 아닌 것은 아니다.
행위 또한 마찬가지이다. 에이섹슈얼은 성적인 행위를 할 수도, 하지 않을 수도 있다. 그것이 그들이 에이섹슈얼이거나 에이섹슈얼이 아님을 판단하는 근거가 되지는 못한다. 행위는 어떤 사람의 성 지향성을 알기 위한 필요조건이 아니다. 마치 어떤 사람이 자신이 네 발 달린 포유류라면 전부 섹스가 가능한지 알아보기 위해 알파카와 성행위를 해볼 필요가 없듯이 말이다. 인지는 성적 판타지, 성적 시나리오를 말하고 이것은 에이섹슈얼 엄브렐라 내에서도 다양한 부류의 사람들이 다양한 형태를 보이고 있다. 예를 들어서 에이섹슈얼 엄브렐라에 속한 오코토리섹슈얼(혹은 에이고섹슈얼)은 성적 판타지를 가지긴 하지만 그 속에서 성적 주체가 되지는 않는다. 마지막으로 욕망은 신체적인 욕정과 같은 의미이며, 테스토스테론의 활동과 그 결과와 같은 의미이다. 따라서 성적 매혹과 성적 욕망은 구분되어야 하며, 에이섹슈얼의 정의는 성적 욕망의 부재가 아니라 성적 매혹의 부재이다.
그렇다면 리인허의 연구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서 에이섹슈얼로 추정되는 퀴어들이 나타나는 대목들을 살펴보겠다. 이는 15장, “여자가 섹스를 거부할 때”라는 장에 등장하는 여성들의 이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성욕이 떨어졌어요”라는 소제목 하에서는 다양한 ‘불감증’의 사례들이 나오는데 이는 전형적으로 에이섹슈얼의 서사에 일치하는 이야기들이다. 대부분 섹스 자체에 관심이 없고, 그저 피곤할 뿐이었으며, 섹스가 즐겁지 않았고 더러는 혐오감이 들기도 했다고 말한다.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점은 성적인 매혹이 없었다는 것이다. 그중 한 사람은 “난 둘이서 다정하게 끌어안고만 있어도 좋아요. 그 이상은 별로 하고 싶지 않아요. 느낌이 가장 좋은 건 섹스할 때가 아니라, 그냥 다정히 애무해줄 때예요. 그이가 본격적으로 시작하려 하면 느낌이 달라져요.”라고 진술하는데, 이는 자신을 주체로 한 성행위가 시작하려 하면 바로 거부감을 느끼는 에이섹슈얼의 특성과 정확히 닮아있다. 다정히 애무해주는 것은 좋다고 말하는 것에서 로맨틱한 매혹은 느끼고 있음을 알 수 있다. 리인허는 이 장의 마지막에서 “만일 한 여성이 쾌락을 향수할 수 있는 능력을 상실했다면, 그녀의 삶이 어떻게 될 것인가?”이라고 묻고 있는데, 나는 이에 대해서 별일이 일어나지 않으며, 사회의 차별적인 시선과 제도만 없다면 그녀는 행복하게 살아갈 것이라고 대답해주고 싶다. 리인허의 연구에서 여성들이 자신의 ‘불감증’을 느끼고 호소해야 했던 이유는 모두 자신이 에이섹슈얼인지 몰랐기 때문이고, 그 이유는 에이섹슈얼이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의 정상 기준에 따라 얼떨결에 결혼을 하고, 얼떨결에 섹스를 하고, 끊임없는 불쾌감과 불일치감을 느끼고 고통받는 것이다.
자위에 관한 장에서 또한 에이섹슈얼을 찾아볼 수 있다. 많은 에이섹슈얼은 특정한 대상 없이 자위를 한다. 혹은 건강의 문제에서 자위를 하기도 한다. 무언가 쌓였다는 느낌이 들어서 분출해내는 것이다. 이는 순전히 생리적인 차원의 자위이다. 17장 “자위행위”를 보면 일부 여성들은 자위행위 경험이 없었는데, 필요를 느끼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 중에는 이런 진술이 있었다. “나의 상상은 전부 낭만적인 사랑에 관한 것인데, 그 이야기가 섹스로까지 발전하면 멈춰버리죠.” 이는 성에 관한 것이 나오면 상상을 멈춘다는 진술이다. 이는 매우 흥미롭다. 자신을 성행위의 주체가 되는 상상-인지와 단절시킨다는 진술이기 때문이다. 이 여성은 에이섹슈얼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
또한 에이섹슈얼들은 자신의 젠더에 관해서 모호한 정체성을 가지고 있는 경우가 많다. 왜냐하면 전통적인 성적 발달은 여성을 좀 더 여성-섹슈얼리티적으로 만들고 남성을 좀 더 남성-섹슈얼리티적으로 만들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이섹슈얼들에게는 그러한 전통적인 성적 발달이 없고, 그러므로 에이섹슈얼 여성들은 일반 여성들보다 ‘덜 여성적일 수’ 있다. 실제로 내가 만난 에이섹슈얼 지정성별 여성들은 대부분 스스로를 여성이라기보다는 에이젠더, 혹은 젠더리스로 정체화하고 있는 경우가 많았다. 리인허도 만약 당시 다양한 젠더의 존재를 알았다면, 더 심도 깊은 질문을 통하여 그 여성들의 모호한 젠더 관념을 알아챌 수 있었을 것이다.
이렇듯 리인허의 연구에서는 에이섹슈얼 존재의 흔적이 곳곳에서 발견된다. 그러나 리인허의 기본적인 사상은 ‘성 긍정’이기 때문에 성적 매혹을 느끼지 않는 에이섹슈얼들은 리인허의 주 관심사가 되지 않는 것 같다. 그러나 에이섹슈얼 또한 가시화되고 차별을 받지 말아야 할 퀴어의 일부이다. 리인허의 연구는 중국에 서구의 퀴어 담론이 수입되지 않았을 때도 에이섹슈얼들이 존재했음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4.3 에이로맨틱: 사랑과 섹스의 별개 문제
리인허는 2014년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 성과 도덕에 대하여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진다. “애정과 도덕이 정말 관계 있을까? 애정은 사람의 마음인데, 그것을 도덕으로 단속할 필요가 있는 정도라면 애정이 있기나 한 것일까?” 예를 들어 쌍방이 성관계는 조화롭지 않으나 애정관계를 계속 유지하기를 바랄 때, 어느 한 쪽의 성관계의 일탈을 방지하기 위하여 도덕을 들이미는 것이 과연 자연스러운가, 하는 질문이다. 이 질문은 에이로맨틱들에게 매우 중요하다. 왜냐하면 에이로맨틱들은 이 질문에 대해서 “그것은 관계가 없다, 사회적으로 만들어진 관계이다.”라고 대답하기 때문이다. 성과 사랑, 성과 로맨스는 필요충분조건이 아니다. 최근 진화심리학자들은 섹스와 로맨스가 동시에 종종 발생하기는 하지만, 만들어진 과정이 전혀 다르다고 주장한다. 성적 욕망에 의한 매혹과 로맨틱한 애정은 전혀 다른 진화론적 시기에 발생했다. 로맨스는 인간 진화의 역사상 최근에 발생한 것으로, 아이들이 어머니에게 느끼는 애착 관계와 로맨틱한 연인 간의 애착 관계가 연관이 있음이 밝혀졌다. 또한 이것이 문화적 현상으로 자리 잡게 된 데에는 12세기 프랑스 궁정이 한몫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분명 로맨틱한 매혹을 느끼지만 성적인 매혹은 느끼지 않는 에이섹슈얼들이 존재하고, 반대로 성적인 매혹은 느끼지만 로맨틱한 매혹은 느끼지 않는 에이로맨틱들이 존재함을 볼 때 이는 분리되어 있는 종류임을 알 수 있다.
심리학자 리사 다이아몬드는 로맨틱한 애정을 “정서적 애착과 심취의 감정”이라고 설명한다. 이러한 로맨틱한 애정은 리인허에게 커다란 감동을 주었음이 틀림없다. 리인허는 사랑이라는 느낌이 착각에 불과할지라도, 그 심리적 과정을 겪은 사람들이 분명히 있고 그것은 모두 심미적으로도 아름답다고 말한다. 리인허는 글의 결론에서 격정이 점점 온정으로 변하면서 사랑과 결혼이 결합을 이룬다고 말하는데 이는 로맨틱한 매혹과 단순히 플라토닉한 매혹을 혼동하는 말이다. 에이로맨틱 에이섹슈얼들은 ‘주키니’라고 하는 관계를 갖기도 하는데, 이는 서로 플라토닉한 매혹을 느끼는 사람들이 연애 대신 QPR(Queer Platonic Relationship)이라는 관계를 맺는 것이다. 이것은 리인허가 말하는 ‘온정’적인 사랑에 들어갈 것이다. 세상에는 ‘온정’만 느끼는 사람도 있는 것이다.
그것을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서 찾아볼 수 있다. 3장 “여성의 성을 억압했던 것들”에 보면, 자신에 대하여 로맨틱한 감정을 드러내보인 이성을 향해 불쾌감을 느끼고, 함께 있게 될 때마다 온몸이 부자연스러웠다고 진술한 여성이 있다. 예를 들면 이런 것이다. “그는 나에 대한 감정을 밖으로 드러나게 표현했으며, 항상 나와 가까이 있고 싶어했어요. 나는 그런 그가 싫었지만, 학생 집회는 그가 주재하는 것이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그와 같이 있었지요. 그럴 때마다 나는 온몸이 부자연스러워졌어요. 그가 어떻게 할까봐 두려운 것도 아니었고, 낵 손끝조차 댄 적도 없었지만, 그저 더럽게 느껴졌고 그가 싫었어요.” 이는 당시 남녀관계가 매우 엄격했기 때문일 수도 있겠지만, 에이로맨틱이 처음으로 타인에게서 로맨틱한 호감의 표시를 받았을 때 겪는 느낌이나 행동과 매우 일치한다. 이성이 자신에게 갖는 관심을 일부러 피했다는 진술도 있다. “나는 어릴 때부터 남자들이 내게 관심 갖는 걸 피했어요. 수영부에서 수영을 배울 때, 한 수영 지도 교사가 내게 아주 많은 관심을 보인다는 것을 알았어요. 어느 날 나는 그를 물 속으로 밀어버렸어요. 지금 생각하면 왜 그랬는지 모르겠어요. 엄마는 항상 내가 경망스럽다고 말씀하셔서, 나는 내가 좋은 아이인지 나쁜 아이인지 생각할 틈도 없었어요. 그때부터 나는 남자들이 나에게 보이는 관심을 일부러 피했어요.” 이 또한 로맨틱한 매혹에 불쾌감이나 불일치감을 느끼고 일부러 피하려는 에이로맨틱들의 행동과 일치한다. 셋째 마당 1장의 “감정과 성의 관계”에서 에이로맨틱으로 추정되는 진술들을 발견할 수 있다. “때로는 감정 없이도 섹스를 한다”는 소제목 하에서 어떤 여성은 “난 성과 감정은 분리될 수 있다고 생각해요.”라고 말하고 있다. 리인허는 이러한 성은 있되 감정은 없는 성 관념에 대하여 ‘감탄’하고 있으며, 이러한 리인허의 사상은 더욱 발전하여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는 로맨틱한 사랑이 어쩌면 환상일 수 있다고 말하고 있다. 그러나 기꺼이 받아들이는 환상이라고 표현한다는 점에서 리인허는 로맨틱한 사랑을 매우 긍정하고 있으며, 그 점에서 그 환상에 거부감을 가지는 에이로맨틱들은 리인허의 담론에서 밀려나기 쉬운 위치에 서 있다.
4.4 폴리아모리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서 폴리아모리는 대부분 외도를 다룬 파트에서 나온다는 점에서 우리는 폴리아모리가 가시화되지 않은 사회가 폴리아모리를 대하는 시선과 태도를 알 수 있다. 폴리아모리는 간단히 말해서 여러 사람에게서 동시에 끌림을 느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렇다고 항상 여러 사람에게서 끌림을 느끼는 것도 아니고, 항상 여러 사람과 관계를 맺고 있는 것도 아니다. 양성애자가 항상 양성애를 하고 있거나, 양성과 다 사귄 경험이 있지 않은 것과 같다. 특히 그 관계가 여러 사람과 성관계를 맺기 위한 변명이라고 여겨지는 경우가 많은데, 그렇지 않다. 폴리아모리는 단지 1:1로 배타적인 모노아모리적 관계만을 맺어야 정상으로 간주되는 사회의 기준에서 벗어난 사람들인 것이다. 폴리아모리는 1990년대 초 미국에서 만들어진 신조어로, 물론 그 전에도 폴리아모리적 충동이나 수행을 하며 사는 사람들은 있었겠지만 가시화되기 시작한 것은 이때쯤부터이다. 폴리아모리는 특히나 많은 오해—예를 들면 바람을 정당화하기 위한 변명이라는—에 시달리는데, 그런 오해를 없애기 위해서 폴리아모리의 네 가지 특징에 대해서 설명하겠다.
먼저 폴리아모리는 합의에 따른 열린 관계를 가져야 한다. 모노아모리 사회에서 “당신 말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거나, 나타날 수 있을 수도 있어.”라고 말하는 것은 관계의 종식을 선언한다. 그러나 폴리아모리는 그것을 파트너에게 고백한 후에야 시작하는 것이고, 그것을 고백하는 이유는 나 자신을 있는 그대로 솔직하게 전달하고 싶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폴리아모리 관계에서는 상대와 관계에 있어서의 솔직함이 매우 중요하다. 둘째로, 폴리아모리는 신체적, 감정적으로 깊게 관여하는 지속적 관계를 추구한다. 그냥 여러 사람과 섹스만 하는 것과 달리, ‘감정적 유대’가 중요하다는 뜻이다. 따라서 이러한 유대를 지키기 위해 다양한 모양의 가족 형태가 존재한다. 셋째로, 폴리아모리는 상대를 소유하지 않는 사랑을 전제로 한다. 파트너가 되는 것과 소유하는 것은 다르며, 사랑의 총량을 한정 지으며 상대를 배타적으로 소유하는 것을 통하여 사랑을 분할하지 않으려 애쓸 필요가 없다고 생각한다. 마지막으로, 결혼제도에 구애받지 않는 의지와 선택에 따른 사랑이 중요하다. 이것은 폴리아모리 수행에 관한 이야기인데, ‘모노아모리적 정상성’을 강조하는 사회규범에 저항한다는 의미가 있다. 그러한 사회규범과 결혼제도를 무조건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의지로 사랑하는 사람의 수와 가족 형태를 만들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서 외도에 대해 긍정적인 견해를 가지고 있는 여성들은 다음과 같은 발언들을 한다. “어떤 경우의 외도는 이해할 수 있어요. 정말 서로 사랑하고, 그 감정이 그 단계까지 갔다면 이해해야죠.” “우리가 겨우 한 곳으로 발령이 나서 같이 지낼 수 있게 되었을 때, 남편이 다른 여자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고백했어요. 그래서 별거하게 되었죠. 난 한 남자와 사귀었지만 성 관계는 없었어요. 우리는 서로 농담을 했죠. 남편은 내 남자에게 한수 배웠다더군요.” 이와 같은 경우에는 폴리아모리적 사고로 이해할 수 있다. 항상 사랑이나 결혼이 배타성을 띠고 있는 것은 아니다. 만약 이들이 폴리아모리 개념을 알고 있었고 또 수행할 수 있었다면, 어떻게 되었을지 모르는 일이다. 예를 들어 폴리아모리 수행을 하는 한 여성의 경험에 따르면 그는 다른 누군가를 좋아하게 된 그대로를 남편에게 숨기면서 자신의 욕망을 억누른 채 살아가는 것이 너무 힘든 나머지 이혼을 하고, 폴리아모리 개념을 찾고 나서 폴리아모리 수행을 하게 되었다고 한다.
또는 ‘유부남을 좋아한 독신녀’ 파트에서도 폴리아모리적 관점을 찾아볼 수 있다. 왜 어떤 사람은 사랑조차 하면 안 되는 것일까? 폴리아모리스트들은 이러한 질문을 제기하고 이것이 사회가 만들어낸 기준이라고 말한다. 예를 들어서 “그 사람 지금은 이혼했어요. 그때는 이혼하기 전이었는데 우린 서로 마음에 들어서 만나면 헤어지기 싫고 즐거웠어요. 그렇게 자연스럽게 같이 지내다가, 갑자기 서로를 특별하게 생각한다는 걸 느꼈어요. (중략) 그는 나를 보며, ‘여자와 같이 있는 게 이렇게 좋은 건지 몰랐다’고 말했어요. 나도 그를 만날 때면 내 깊은 곳에 있는 여성스러움이 다 우러나오는 걸 느꼈어요.”라는 진술에서는 상대방이 ‘유부남이라서 느끼는 질투심이나 죄책감’같은 것이 느껴지지 않는다. 이는 한 폴리아모리스트가 유부남을 좋아하게 되었는데, 친구가 “유부남과 교제하는 것은 윤리적으로 옳지 않다”고 비난하여 세상에는 사랑하면 안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을 이상하게 느끼고, 폴리아모리를 접한 후 폴리아모리스트가 되었다는 증언과 일맥상통한다.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 리인허는 폴리아모리에 대하여 완전히 긍정적인 태도를 보이고 있다. 인간은 대부분 연애할 때 배타성을 띠지만 동시에 두 사람을 사랑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럴 권리 또한 있다. 중국 남성들은 고대에 일처다첩제를 통하여 여러 여성들과의 관계를 맺었고 그 여성들이 서로 질투를 하지 못하게 했다. 그런데 이제 와서 여성이 여러 남성을 동시에 좋아하는 것을 막는 다는 것은 말이 안 될뿐더러, 폴리아모리의 관계는 동등함 속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남권사회의 일처다부제와 비교도 할 수 없다. 시베이 지역에는 배타적이지 않은 사랑의 사례가 ‘라방타오(도우미)’라고 불리는 민간관습 형식으로 존재한다. 이는 일처다부제의 형식이다. 중국 소수민족에서는 사랑 관계의 배타성이 한족만큼 강렬하지 않다고 리인허는 말한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배타성이 사회적으로 만들어졌다는 증거이다.
4.5 BDSM
BDSM은 가장 많이 포르노그래피적으로 낙인찍히고, 왜곡되며, 과대 해석되는 퀴어이다. 1970년대에 미국에서는 BDSM을 가지고 이것이 여성의 지위를 향상시키는가 아닌가에 대하여 ‘성 전쟁’이라고 불릴 만큼의 커다란 논쟁이 있었다. 이것이 앞서 리인허가 언급한 급진파와 자유파의 논쟁이다. BDSM을 반페미니즘적 행위로 보는 사람들은 이것이 이성애의 돔-서브(지배자-피지배자) 역할 놀이가 내면화된 것이며, 이를 실행하는 레즈비언들은 호모포빅한 이성애주의자들이 보는 레즈비언의 관점을 내면화한 것으로 간주한다. 페미니즘에 ‘에로티카’가 있다면, ‘포르노그래피’의 영역에 BDSM이 속하는 것이다. 그것은 어둡고, 극단적이며, (‘정상인’ 범주의 시선에서) 기괴하게 의례적이고, 권력의 차이를 환영한다. 따라서 도덕성을 추구하는 페미니즘에서는 BDSM을 배척한다.
이를 철학, 문학적으로 해석해보려는 시도도 있다. 질 들뢰즈는 『매저키즘』에서 자허-마조흐의 텍스트를 분석하며 이에서 나타나는 마조흐의 욕망을 탐구한다. 사드의 작품과 마조흐의 작품 모두 이성애 텍스트이다. 사드의 작품에서는 피해자-여성이 자신의 논리에 동의하지 않음으로써 더 큰 유희를 느끼는 박해자의 모습을 찾아볼 수 있는 반면, 마조흐의 작품에서는 박해자-여성에게 자신의 특이한 계획을 성취시키기 위해 박해자를 자신의 취향에 맞추어 교육시키는 모습이 드러난다. 결국 마조흐의 작품에서 드러나는 여성의 모습은 일면 남성을 지배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남성 마조히스트가 투사하는 환영이 드러난 것이며 대리석 같은 객체성을 지니고 있다.
그렇다면 페미니즘적으로 BDSM은 정말로 해서는 안 되는 것인가? 게일 루빈은 이에 대하여 BDSM이 합의되지 않았고(물론 정당한 BDSM은 상호 합의된 것을 전제로 한 것이지만) 어떠한 역할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고 있기 때문에 부당한 것이라면, ‘정상적’ 이성애 또한 정당한 것인지 되묻고 있다. 그것 또한 상호 합의되었고 어떠한 역할을 따르도록 압력을 가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는가? BDSM은 안 된다는 압박 또한 여성 억압이 아닌가? 여성은 섹슈얼리티의 자유를 추구할 권리가 있다. 그러나 게일 루빈은 BDSM이 부상을 입을지라도 대부분의 스포츠에서보다 훨씬 가벼운 부상을 입을 뿐인데도 ‘가혹한 성행위’로 인하여 폭행으로 취급된다며 항의한다. 법원에 따르면 자신에게 하는 “채찍질에 동의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든 심신상실 상태인 사람, 그리고, 법적으로 합의할 권한이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고 만다”는 것인데, 이는 합당하지 않다는 것이다. 과연 자신에게 하는 채찍질에 동의하는 사람은 심신상실 상태인 사람이며 세뇌된 상태이고, 이런 상태의 여성은 반페미니즘적이며 선도의 대상이 되어야 하는가? 우리는 이것을 ‘성 전쟁’의 여파가 없었던 중국 여성들의 BDSM 경험에 대한 진술에서 알 수 있다.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의 둘째 마당의 3장 “우리는 누구나 사디스트일 수 있다”에서 마조히스트 경향이 있는 여성과 사디스트 경향이 있는 여성의 증언들을 서술하고 있다. 우선 마조히스트 경향이 있는 여성들의 증언들은 이렇다. “하지만 내 친구 중에는 피학 증세가 있는 아이가 있는데, 자기보다 훨씬 나이가 많은 남자와 사귀고 있어요. 그애는 매번 섹스하기 전에 남자한테 때려달라고 한대요.” “그는 내가 매저키스트가 아닌가 의심해요. 나는 고통과 간지러움을 비슷하게 느끼거든요.” 스위치(사디스트와 마조히스트 둘 다 하는 것) 경향을 가진 여성들의 진술도 있다. “난 가벼운 학대를 받는 걸 좋아하고 학대하고 싶은 충동도 조금 있어요. 연극하는 것처럼 말이에요.” “내가 강간당하는 상상을 하기도 하고 남자가 되어 여자를 강간하는 상상도 하죠.” 남성 배우자가 자신이 원하는 욕구를 충족시켜주지 않아서 불만을 토로하는 말도 있었다. “그는 나를 한 번도 때리거나 꾸짖은 적이 없어요. 난 도리어 그가 좀 더 남자다웠으면 해요. 우리는 싸움조차 되지가 않아요. 그는 나를 우상처럼 받들죠.” “그에게 무슨 문제가 있었던 것은 아니었어요. 그는 강한 사람이에요. 하지만 침략성이나 공격성이 없는 남자였지요. 어떤 일이든 내 말을 따랐죠. 나는 침범당하는 느낌을 바랬어요.” 전자는 이혼을 생각하고 있고, 후자는 바로 그 이유로 이혼을 했다고 했다.
리인허는 이러한 여성의 피학적 상상의 원인에 대한 프로이트식 해석을 인용하는데, 이는 매우 낡은 해석이다. 리인허 또한 이 점을 지적하고 있으며, ‘강간 상상’과 실제로 강간당하고 싶은 욕망 사이에 아무런 관련성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면서 게일 루빈이 만든 BDSM 성향을 가진 여성들의 집단인 사모아즈(Samois)를 언급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자유파를 긍정하고 있다. 또한 푸코의 철학적 이론을 끌고 오며 가학 성애와 피학 성애의 체험에 대해 분석한다. 결론은 섹스 중 사디스트와 매저키스트는 역할을 언제든지 끝내거나 바꿀 수 있는 관계로서 이는 권력과 쾌감을 한층 높은 수준으로 결합시킨 것이고, 권력을 가진 자와 권력을 가지지 않은 자 둘 다 이 과정에서 유희를 즐기며 쾌감을 얻는다는 것이다. 그러면서 이러한 유희를 즐기는 사람들은 분명히 폭력이 없는 환경에서 자란 사람일 것이라고 리인허는 결론짓는다. 나는 이 해석에 반대하는데, 폭력이 있는 환경에서 자랐음에도 BDSM을 하는 사람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이런 리인허의 연구를 통해 보았을 때, 여성이 BDSM적 상상을 하거나 수행을 하는 것은 포르노그래피의 범람 때문도 아니고, 여성 인권의 후퇴도 아니며, 그저 ‘자연스럽게 여성 중 일부에서 일어나는 일’이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반페미니즘, 호모포비아들의 관점을 내면화한 결과도 아니며, 심신상실 상태에 있는 사람들도 아니다. 2014년 저작 『이제부터 아주 위험한 이야기를 하겠습니다』에서도 리인허는 BDSM 수행자들이 모두 자원해서 하는 것이며, 그러므로 소수 범죄자의 폭행과는 다른 성적인 행위와 성적 유희라고 말한다.
5. 결론: 리인허 연구의 의의와 한계점, 그리고 한국에서의 의의
이 레포트에서는 먼저 리인허 이전의 여성 담론들에 대해서 논해보았고, 사회주의 시기에 여성의 섹슈얼리티가 ‘무성화’되는 경향이 있음을 지적했다. 그리고 그 이후에 나타난 리인허의 연구가 어떤 특이성을 띠고 있는지 살펴보았다. 리인허는 여성의 ‘개인성’을 찾기 위해 섹슈얼리티의 ‘포르노그래피’적 발화를 택했고, 그 발화들을 대하는 태도가 급진파보다는 자유파에 좀 더 기울어 있으며, 해당 발화들을 통하여 우리는 여성 간의 다양성을 찾아볼 수 있었다. 특히 다양한 퀴어의 양상을 찾아볼 수 있었다. 이는 동성애뿐만 아니라 가시화되지 않은 퀴어들이, 그러한 퀴어 개념이 없었던 사회에도 존재했음을 알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또한 리인허는 이에서 더 나아가 다양한 형태의 성을 긍정하며 중국 사회를 진보적으로 바꾸기 위하여 노력하고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이는 단지 중국에서만 의의가 있는 것이 아니라 현재 한국에서도 의의가 있는 연구들이다. 우선 현재 한국에서는 서양, 특히 미국에서 수입된 퀴어 담론이 번역되어 넘어와 있는 경우가 많아 동아시아 정서와 맞지 않는 경우가 많다. 리인허의 퀴어 연구는 동아시아의 퀴어 연구라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그 밖에도, 적용될 수 있는 부분이 많다. 현재 한국의 퀴어 담론의 상황은 매우 복잡하다. 한 측에서는 동성애 반대를 외치고 퀴어 내부에서는 에이로맨틱, 폴리아모리같은 이전에는 가시화되지 않았던 퀴어들까지 마구마구 담론이 쏟아져 나오고 있는 상황이다. 정보는 한없이 부족하고, 퀴어 내부에서도 소수자인 부류는 해외에서 번역되어 들어온 정체화 푯말과 설명 하나만을 붙잡고 자신을 지탱하는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1996년 『중국 여성의 성과 사랑』에 자신의 정체성의 흔적이 있다는 것을 발견하는 것만으로도 동아시아 한국의 퀴어에게는 큰 힘이 된다. 왜냐하면 한국에서 퀴어의 역사는, 특히 트랜스젠더 여성이 많이 나타나는데, 범죄 기사를 통해 가시화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리인허의 연구에서 나타나는 퀴어는 그렇지 않고 자연스럽다. 또한 소수 퀴어의 경우 “힙해보이려고 퀴어 한다”는 말을 하기도 한다. 주류 퀴어가 비주류 퀴어를 공격하는 것이다. 이런 경우에 우리는 설정놀음을 하는 것이 아니라, 그러한 정체성이 없던 시절에도 존재했다며 리인허의 연구를 근거로 들 수 있다.
한계점도 있다. 앞서 말했듯 리인허는 단지 ‘성 긍정’을 하느라 눈 깜짝할 사이에 바뀌어가는 개혁개방 시대 중국의 특수성을 따지지 못하고 있다. 또한 퀴어 이론을 극찬하면서 다양성을 존중한다고 하면서도, 성과 사랑을 너무나 예찬하고 있기 때문에 에이섹슈얼과 에이로맨틱은 담론에서 지워지고 있다. 무엇보다 모든 예시들이 비장애인 중심이다. 내가 겪은 사례 중에는 BDSM 성향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대부분의 BDSM 사례나 정보들이 성기 관련으로 집중되어 있어서, 하반신이 마비되어 성기에 아무런 느낌도 감상도 없는 자신의 경우에 그러한 성향이 있다는 것을 늦게 아는 경우가 있었다. 또한 트랜스젠더를 논하고는 있지만 의례적일 뿐, 생물학적 구분으로 나뉜 여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이 든다. 과연 MTF(지정성별 남성에서 여성으로 정체화한 트랜스젠더 여성) 여성의 경우에는 어떠한 성 경험을 할 것인지에 대한 이야기는 전혀 하고 있지 않다. 이는 두 가지 이유 때문일 수 있는데, 첫 번째는 리인허의 연구들을 내가 적게 읽었기 때문일 수 있고, 두 번째는 중국에서 이러한 소수자 중 소수자인 사람들이 정말로 가시화되지 않았기 때문일 수 있다. 만약 첫 번째 이유라면 리인허의 저술들이 한국에 빨리 많이 소개가 되어야 할 것이고, 두 번째 이유라면 나는 어려움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가시화시키는 작업이 진행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들 또한 인권을 가지고 있고 목소리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리인허의 표현에 따르자면, 그들에게도 개성을 부여하고 자아를 찾아갈 수 있도록 해주어야 한다. 그러나 역시 리인허의 표현에 따르자면, ‘검열의 국가’인 중국에서 그러한 작업이 얼마나 가능할지 의문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작업을 해 나가는 것이 변화를 위한 첫걸음이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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