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생의 지극정성어린 헛소리를 보고 그냥 지나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 길게 답문을 하겠습니다. 지금 시점에서 학생이 ‘학생’이라는 이유로 좀 더 아량을 베풀 이유는 없어보입니다. 학생의 주장을 여러 개로 쪼개놓고 개별적으로 답하는 방식으로 진행하겠습니다.
“윤석열의 조치는 헌정질서를 지키기 위한 합법적이고 제한된 통치 행위”라는 주장에 대해
첫 주장부터 사실관계가 틀렸습니다. 계엄령이 대통령의 권한이기는 하나 우리 헌법은 계엄령의 행사를 극히 제한된 상황에서 발동하도록 규정합니다. 여기서 ‘제한된 상황’이란 전시, 사변, 또는 그에 준하는 비상상황을 의미합니다. 당신이 근거로 제시하고 있는 ‘무분별한 탄핵’, ‘예산 삭감’은 이러한 비상상황에 부합하지 않습니다. 예산 삭감이나 무분별한 탄핵으로 인해 기존 경찰력으로 치안을 유지할 수 없는 상황도 아니었고, 군대를 투입해야 할 소요사태 또한 발생한 것이 아닙니다. 게다가 당장 군대로 시민들을 통제해야 할 만큼 전쟁이 임박한 상황도 아니고, 열전이 치뤄지고 있는 것도 아니었습니다. 첫 주장부터 사실을 호도해버리면, 나는 당신이 지적 근거를 갖추고 토론에 임하려는 것이 아니라 악의를 가지고 선동하려는 악질적 유겐트라고 불러드릴 수 밖에 없습니다.
게다가 윤석열의 계엄령 행사는 지극히 월권적인 내용으로 채워졌습니다. 포고령 1호에는 계엄권에서 규정하고 있지도 않은 행위를 명시하고 있습니다. 국회를 포함한 정치활동을 금지시킨 게 대표적입니다. 계엄권 어디에도 계엄령을 통해 대통령이 국회를 통제할 수 있다는 문구는 명문화되어 있지 않습니다. 계엄포고령 1호는 명백한 월권과 위법의 증거입니다. ‘대통령 고유 권한’이면, 헌법에 명시되어 있지 않은 통제권을 행사해도 된다는 말인가요? 그건 당신이 비상사태를 이유로 대통령이 법의 통제를 벗어나 신권처럼 통제받지 않는 권력을 휘둘러도 된다는 주장이나 다름없습니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불행하게도) 대한민국은 법치국가이며, 윤석열의 위법한 행위와 의도는 그가 국회로 실제로 군대를 보냄으로써 증명되었고 목격되었습니다. 또한 절차상 흠결 역시 다수입니다. 윤석열은 국무회의 심의절차를 준수하지 않았고, 계엄 선포 절차 또한 국무위원의 ‘부서’ 없이 강행되었다는 점, 국회에 대한 통고 역시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 등이 대표적입니다. 대체 어디에 뭐가 ‘합법적’이라는건가요?
‘국가 전체가 하이브리드전의 직접적 위협에 노출된 상황이므로 계엄령은 정당하다’라는 주장에 대해
당신이 ‘하이브리드전’ 운운하며 근거로 제시한 선관위 해킹이나 군사기밀 유출 사건은 ‘계엄령’으로 해결을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먼저 지적해야겠습니다. 당신은 계엄령의 본질적 속성과 효과조차 모른 채 주장을 펼치고 있는 것 같군요. 계엄령은 기본적으로 기존의 치안력으로 질서 유지가 어려울만큼 비상한 상황에서 군대를 동원해 국민의 기본권을 제한하고 통제를 극대화하는 통치행위입니다. 당신 눈에는 선관위의 보안사항을 강화하거나 군사기밀 유출에 대해 강력히 처벌하고 보안 체계 강화를 주문하는 것보다 계엄령으로 국민 기본권을 제한하고 통제하는 게 문제 해결에 더 효과적인 것으로 보이나봅니다. 대체 어떤 프로세스로 ‘계엄령’을 통해 당신이 제시한 ‘하이브리드전’을 극복할 수 있다는 건가요? 안보 위협은 안보 관련 투자를 늘리고 군대의 전투력을 증진하면서 현대의 전장상황에 맞는 체계를 구축하면서 대응하는 게 합리적이라고 보는데, 혹시 당신이 보는 안보위협의 해소방안은 계엄령으로 민주당 정치인들을 싸그리 잡아들이고 (윤석열이 규정한) 반국가세력을 전부 처단하면 해결되는 문제인가요? 대체 계엄령으로 당신이 주장하는 ‘하이브리드전’을 어떻게 극복하겠다는건가요?
두번째로, ‘계엄령이 실제로 빠르게 해제되었다’라는 주장도 왜곡된 주장입니다. 헌법에 계엄령은 ‘지체없이’ 해제하여야 한다고 명문화되어 있으나 윤석열은 ‘지체없이’라는 표현과는 거리가 멀게도 몇 시간이나 지나서야 해제했습니다. 국회에서 계엄 해제를 의결한 뒤 바로 해제한 게 아닙니다. 심지어 그 ‘몇 시간’이라는 시간 텀 사이에는 2차 계엄을 계획한 게 아니냐는 의혹까지 있습니다. 뭘 윤석열이 마치 자비롭고 자애로운 어버이인 양 묘사를 하세요. 당신의 신앙 간증은 관심 없습니다만 글 곳곳에 당신의 신앙 간증이 보여서 짜증날 지경입니다.
‘선관위를 군대로 점검하려 한 시도는 정당한 책무였다’라는 주장에 대해
이 역시 학생이 사실을 완전히 호도하고 있는 주장입니다. 헌재 판결문에 명확하게 명시되었듯이, 대통령이 계엄령을 발동하였다 하더라도 선관위에 대해 할 수 있는 조치는 ‘없습니다.’ 선관위는 독립된 헌법기구입니다. 선관위가 ‘독립적 기구’라는 의미는 선관위에 어떤 식으로든 권력의 입김이 들어갈 수 있는 통로를 제도적으로라도 차단해야 한다는 의미를 가집니다. 헌재 판결문을 인용합니다: ①“선거관리사무는 그 성격상 행정작용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우리 헌법이 위와 같이 해당 사무의 주체를 독립된 합의제 헌법기관으로 규정하면서 그 독립성과 중립성을 강조하는 체계를 택한 것은, 공정한 선거관리를 위해서는 외부 권력기관, 특히 대통령을 수반으로 하는 행정부의 영향력을 제도적으로 차단하여야 한다는 확고한 의사가 반영된 것이다.” ② “그런데 피청구인은 헌법과 법률이 예정하지 않은 방법으로 군대를 동원하여 중앙선관위 청사에 무단으로 들어가 선거관리에 사용되는 전산시스템을 압수․수색하도록 하였다. 이는 선관위의 선거관리사무에 대한 부당한 간섭이자 선거가 지니는 본래의 민주정치적 기능에 위협을 가하는 행위로서, 선관위의 독립성을 철저히 보장하고자 하는 우리 헌법의 취지에 반하는 것이다.”
이러한 결정에 비추어볼 때 “헌법상 독립기관이라는 지위가 책임 회피의 면죄부가 될 수 없다”는 당신의 주장은 헌법을 부정하겠다는 말로 해석됩니다. 선관위의 신뢰가 많이 떨어졌다는 주장은 일견 수긍할 수 있습니다. 실제로 기관 신뢰도를 조사하는 지표에서 선관위 신뢰도가 제법 떨어진 것으로 나오니까요. 그러나 최근에는 다시 상승했습니다. 한국리서치는 한 해 2번, 상반기 하반기에 나누어 헌법기관의 신뢰도를 조사하는데, 2025년 상반기 헌법 기관 신뢰도에서 선관위는 헌재, 국군에 이어 3번째를 기록했습니다. 물론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높기는 합니다만, 대체로 헌법기관의 역할수행 평가는 ‘못하고 있다’는 평가가 대체로 다수로 나온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는 있겠지요. (사진 첨부)
또 하나, 현재 전 세계 민주주의를 측정하는 가장 권위있는 지표인 V-Dem (민주주의다양성)에서도 하위 세부지표 중 각 국가의 선거관리기구(EMB, Electoral Management Body)의 역량을 평가하는 지수가 있습니다. 이 지표는 크게 두 개로 나뉘는데, 선거관리기구의 역량(선거를 공정하고 투명하게 관리하는 능력)과 선거관리기구의 자율성(정부로부터 부당한 개입을 받지 않고 자율적으로 업무를 수행할 수 있는가?)으로 나뉩니다. (정확한 질문은 이것입니다: “Does the Election Management Body (EMB) have autonomy from government to apply election laws and administrative rules impartially in national elections?”)
위 두 가지 지표에서 한국은 비교군으로 선정한 미국, 영국, 일본, 대만에 비해서도 상당히 역량 있는 것으로 나타납니다. 오히려 선관위의 자율성의 경우 윤석열 정부 들어 지표가 하락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구체적인 세부 케이스까진 데이터가 제공하지 않고 있으므로 추측의 영역입니다만, 윤석열 정부에서 지속적으로 선관위에 영향을 끼치려 했던 사건들이 몇몇 떠오르긴 하네요.
“국회 출입 제한을 근거로 쿠데타 운운하는데 이는 사실 왜곡이다”라는 주장에 대해
어처구니 없는 주장입니다. 국회 출입 제한 ‘뿐만 아니라’ 국회로 군대를 보냈다는 사실 자체가 쿠데타라는 평가의 근거입니다. 군대는 국회를 침탈할 수 없고 침탈해서도 안되는 조직입니다. 대통령이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를 국회로 투입할 수 있는 국가는 보통 ‘민주주의’라고 불리지 않습니다. 당신의 주장이 용인된다면 대통령은 야당에 밀렸을 때 비상사태를 선포하고 군대로 국회를 점령해버리면 됩니다. 투입된 군의 규모나 의도 따위는 여기서 중요한 사항이 아닙니다. “군대를 왜 국회로 투입했느냐”라는 질문이 더 중요합니다. 당신은 본질적인 질문은 멋대로 가려둔 채 프레임을 전환하려고 시도하시는 모양입니다만, 어리석은 일이라는 충고만 드리겠습니다.
당신이 “윤석열은 정당했다”라고 주장하고 싶으시다면 군대로 국회를 통제하는 “민주주의 국가”의 사례를 가져오면 됩니다. 과학적 대화는 언제나 반증 사례를 가지고 이야기하는 것이니까요. 나는 물론 학생이 과학적 대화를 할 의지나 역량은 한없이 부족하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여기서 학생이 어리다는 사실이야말로 딱히 면죄부가 되진 않을 것 같습니다. 헛소리 했으면 욕을 처먹는 게 인지상정 아니겠습니까. 서두에서 말했습니다만 나는 딱히 학생을 좀 더 너그럽게 봐줄 의향이 조금도 없습니다.
“민주당이 정치적 내란을 했다”, “헌재의 판결이 공정하지 못하다” 등의 여러 주장에 대해
여기에 대해서는 그냥 묶어서 답변하겠습니다. 답변할 가치가 없는 주장들이 대부분이나, 짤막하게 언급해둘 필요는 있다고 판단했기 때문입니다.
(i) “민주당이 정치적 내란을 시도했다”라는 주장: 탄핵안 의결 이후 헌재 재판 과정에서 ‘핵심 근거들을 철회했다’라는 부분은 이미 ‘문제 없음’으로 결론난 주장입니다. 헌법재판은 진행되었고, 판결문은 효력을 가졌습니다.
(ii) “헌재의 판결이 공정하다고 볼 수 없다”라는 주장: 당신의 가치판단이니 따로 별론을 달진 않겠습니다만, 윤석열이 제출한 반대 증거나 자료야말로 ‘철저히 오염’되었다는 점은 쏙 빼놓으시는 건 대단히 유감입니다. 윤석열의 주장은 지속적으로 번복되고 뒤집어졌습니다. 윤석열은 헌법재판소에서 “부정선거 때문에 계엄했다”라고 주장했다가 “호소용 계엄”이라는 주장으로 바꾸는가 하면, “의원들을 끌어내라”라는 지시를 한 적이 없다는 등 다수의 증언과 배치되는 위증을 지속적으로 반복했습니다. 심지어 헌법재판관들은 보수 성향의 재판관도 다수 포석해있었습니다. 그러나 헌재는 만장일치로 판결을 내렸습니다. 당신의 주장이 얼마나 설득력 있게 먹힐지 모르겠군요.
(iii) “윤석열은 헌법이 부여한 권한을 극도로 절제된 범위 안에서 행사했을 뿐”이라는 주장: 위에서 이미 반론한 내용입니다. ‘극도로 절제된 범위’라는 당신의 주장은 우리에게 큰 웃음을 주려는 것으로 이해하겠습니다. 어리석음의 옛말이 ‘어리다’라고 하는데, 학생에게 어울리는 말이 아닐까 싶습니다. 사람들로부터 쏟아지는 비난은 학생이 헛소리를 했기 때문이라는 업보로 받아들이시는 게 정신건강에 좀 더 이로울 것 같네요. 세번째 말하지만 나는 학생에게 딱히 관용하거나 어리다는 이유로 너그럽게 대우할 생각이 추호도 없습니다. 나만 그런거라면 참 다행인데 아쉽게도 많은 사람들도 그렇게 생각하는 모양입니다.
“진정한 내란은 대통령의 판단을 악의적으로 해석하고 이를 정쟁의 도구로 삼아 민주적 절차를 흔들려 했던 민주당을 비롯한 세력에게서 비롯된 것”이라는 주장에 대해
민주주의 국가에서 여소야대는 제법 흔한 상황이며, 이 경우 대통령은 협치의 정신이나 제도적 자제를 통해 협상력을 확보함으로써 야당과 협상하는 게 일반적입니다. 그게 민주주의 정신에도 부합합니다. 그러나 윤석열은 ‘제도적 자제’가 필요한 영역, 규범적으로 자제되어야 한다고 여겨지던 부분을 제멋대로 무너뜨리는 행위를 반복했고, 종국에는 계엄을 터뜨림으로써 민주주의를 완전히 뒤집으려고 했습니다. 학생의 속내는 윤석열이 군대로 민주당 의원을 전원 체포하고 사살했어도 “정당한 계엄”이 되는 모양인가 봅니다. 학생의 주장 곳곳에는 그런 극단적 주장들로 읽힐 수 밖에 없는 행간들이 보입니다. 유겐트라는 비난을 받아도 그러려니 하시는 게 좋겠습니다. 난 학생을 명백한 파시스트로 규정하겠습니다.
윤석열이 민주주의를 얼마나 후퇴시켰는가에 대해서는 앞서 살펴보았던 V-Dem에서도 명백하게 드러납니다. 윤석열 정부에서 한국은 ‘자유민주주의(Liberal Democracy)’에서 ‘선거민주주의(Electoral Democracy)’로 하향되었고, 영국 이코노미스트의 EIU 지표에서도 한국이 ‘결함 있는 민주주의(Flawed Democracy)’로 강등되었습니다. 언론 자유 지수는 심각하게 후퇴했으며, 권위주의를 추종하는 운동은 대폭 증가했습니다. 대체 무슨 자격과 낯짝으로 ‘민주적 절차’를 입에 담는건지 모르겠습니다.
이 글을 쓰는데 대략 40분 걸렸습니다. 40분을 투자한 만큼 학생이 이 글을 성실하게 읽었길 바랍니다. 반론은 환영입니다.
이 글은 노션에 수록했으므로, 글이 너무 길다면 노션으로 보는 것도 추천합니다. (링크: memorandum-dissent.notion.site/21ce315bd58b8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