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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괴담] 영원이 평생에게.

귀부in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5.03.20 03:09:15
조회 16404 추천 429 댓글 27
														

내 반려에게.


당신을 만난 그날로부터 어언 5년이 지났지만, 이리 편지를 써보는 것은 처음인 것 같습니다.

막 퇴근했을 당신은 이 편지를 보고 혹시 기념일을 잊은 걸까 마음이 덜컹했을테지요. 

그런게 아닙니다. 나는, 나는 그저 당신에게 고백을 하려고 이 편지를 썼습니다. 당신에게 말할 생각도 없었고, 차마 말할 수도 없었던 비밀을요.


나는 인간이 아닙니다.


내가 정확히 무엇인지는 나도 모릅니다. 

하지만 내가 '그들'과 같은 존재이고, 내 본능이 그들과 같은 것을 원했음은 분명히 알고 있습니다.


우리는 당신들을 대체하고 싶어합니다.

우리는 열등한 당신들 대신 우월한 우리가 이 푸르른 세계를 다스릴 주인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그렇기에 일단 당신들의 자리를 강탈하기로 했고, 성공했습니다.


네, 나는 이 육체의 원 소유주가 아닙니다. 김**씨에게는 늦었지만 사과의 말을 전하고 싶어요.

...물론 당신의 김**은 처음부터 끝까지 나였지만, 이게 중요한 건 아닐테지요.


본론을 말하겠습니다. 도망치셔야 합니다.

우리는 시간의 흐름에 휩쓸리지 않는 영원을 사는 종족이지만 우리들이 강탈한 당신들은 아니니까요.

그들이 당신을 자신들의 새로운 숙주로 점찍어버렸습니다.


아래 내용을 다 읽는대로 바로 행동해주세요. 함께하지 못해 미안합니다.





1. 당신은 정말 요리를 잘했지요.


나는 맛을 느낄 수 있는 수용체가 없음에도 당신의 음식은 항상 달달하고 목구멍으로 쉽게 넘어갔습니다.

그 음식을 이제 위장 안에 넣어 보관할 수 없다는 것이 애통합니다. 

지금껏 있었던 당신의 노고에 보답하고자, 나도 선물을 준비했습니다. 아니, 피해 보상금이라고 해야 할까요. 매 주말마다 애써 만든 음식의 맛 한번 제대로 묘사하지 못한 것에 미안함을 전하고 싶습니다.


...선물은 내가 직접 만들었습니다. 김**씨도 나도 꽤 똑똑해서 다행히 시간에 맞춰 만들 수 있었습니다.

부엌 선반을 열어보면, 오직 당신만 볼 수 있는 알약이 잔뜩 들어있는 약병 하나가 있습니다. 정확히 계산해보진 않았지만 300개는 넘을겁니다. 

그건 '나'의 일부로 만든 것인데, 한 알이면 당신이 1년간 그 무엇도 먹고 마실 필요 없게 해줍니다.

당신의 도주에 큰 도움이 되리라 보장할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과복용은 금물입니다. 

인류가 흡수하는 게 물과 식량만은 아니니까요. 당신이 고통스레 질식하는 모습은 보고 싶지 않습니다.




2. 당신은 매주 금요일마다 꽃을 사와 주었지요.


고맙습니다. 나는 아직도 저 꽃의 미추를 구분하지는 못하지만, 그걸 내게 건네주는 당신의 미소는 아름답다는 걸 알 수 있었어요.

하지만 이제 그러지 마세요.

그 꽃을 받을 나도 더 이상 당신 곁에 있을 수 없고, 무엇보다 꽃가루는 그들의 효과적인 침투 방법입니다.


어딜가나 마스크를 꼭 착용하세요.




3. 당신과 함께 걸었던 해안가는 정말 좋았습니다.


햇빛이 반사된 파도의 표면보다 당신의 눈이 반짝였던 건 아마 제 착각이 아닐겁니다.

그 해안가는 비행기와 배 공포증이 있다던 내 허술한 거짓말을 믿어 제주도 여행을 취소하고 예약한 여행지였지요... 언젠가 다시 가볼 수 있다면 좋을텐데. 


우리가 그때 가지 못했던 제주도가 당신이 가야 할 곳입니다.

우리는 바다를 넘지 못해요. 


더 멀리 가면 좋겠지만, 그럴 시간이 없습니다.




3-1. 제주도에 도착하면, 내가 편지 뒷 장에 써 놓은 주소로 가십시오.


당신 몰래 그들 몇을 죽여 강탈한 돈으로 산 집입니다. 전리품 비스무리한 걸로 생각하세요.

마당이 넓으니까, 그리 답답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그 후, 내가 준 선물 한 알을 부숴 대문 앞 감귤 나무에게 뿌리십시오.

감히 당신을 해치려 다가오는 것들의 숨통을 끊어 놓을 것입니다.

나는, 난 언제나 당신을 지킬 수 있어요.




3-2. 그리고 앞으로 그곳에서 나오지 마세요.

 

마당까지는 괜찮습니다.

유흥 거리와 목욕과 청소에 필요한 것들, 필요하지는 않지만 식량까지 얼마든지 준비해 놓았습니다.

대화할 상대는, 미안합니다 그건 준비 못했어요. 

종종 당신이 장난삼아 말을 걸곤 했던 ai로는 부족하겠죠. 그치만, 죽는 것보단 낫잖아요.


내가 죽음을 두려워하게 만든 당신의 탓입니다. 

아니 사실, 당신은 아무것도 잘못한 게 없어....

 



4. 당신은 종종 나에게 당신이 원하는 미래를 말하곤 했지요.


언젠가 나와 함께 한적한 섬으로 가서, 꽃이 아름답게 핀 정원을 꾸미고, 그곳에서 놀 자식을 낳고, 그들이 독립하고 나면 나와 단둘이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고 싶다고요.

그리고 나는 나도 모르게 꼭 그러리라 당신에게 맹세했습니다.


미안합니다. 나는 그 중 단 한마디도 지키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니까 내가 당신에게 그 약속을 지키러 왔노라 말할 일은 영원히 없을 겁니다.


잠든 당신의 귓가에 누군가 그런 말을 속삭이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면, 집 안 모든 창문을 닫고, 내가 준 선물 한 알을 태우십시오.

....2번 마지막 줄, 반드시 지키길 바랍니다. 

그 후엔, 감귤 나무가 알아서 할 겁니다.




4-1 마당에 있을 때 그런 소리가 들린다면, 천천히 집 안으로 들어가세요.


뒤돌아보지 말고, 뛰지도 말고. 

그 후엔 위에 적힌 것과 똑같이 행동하면 됩니다.

다만 그때 입고 있던 옷도 함께 불태우세요.




5. 당신은 모두에게 다정하고 친근한 사람이었습니다.


좋은 사람이었죠. 반려로서 질투가 나지 않았냐면, 그렇진 않았지만.


그 동안 내가 입 안에 가둬 놓았던 말을 이 최악의 상황에 최악의 방법으로 전해드립니다.

아무도 믿지 말고, 아무도 챙기려 하지 마십시오.


당신의 친구. 가족까지 구하는 건 무리입니다.

애초에, 그들이 정말로 당신이 알던 그들인지 구분할 수 없지 않나요. 

이번 한번만 제발, 제발 내 말대로 해주세요.




6. 당신을 사랑해서 비통합니다.


당신을 사랑하게 되는 건 내 계획에 없었단 말입니다.

조금 억울하고 많이 아립니다.

그래도 인생을 기만당한 당신만큼은 아니겠지요. 다시 한번 미안합니다.


이 고백을 들은 후 당신의 표정이 두려워 비겁하게 도망친 나를 용서해주십시오.

부디 평생 동안 행복해 주세요.

나는 그것만을 영원히 기원하겠습니다.


추천 비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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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닉 29

7

댓글 영역

전체 댓글 27
댓글 등록본문 보기
  • ㅇㅇ(58.143)

    아름다운 이야기네

    03.20 04:20:57
  • 패랭이꽃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순애는 언제나 옳지

    03.20 11:16:20
  • 칼퇴전문가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슬프냐 왜 ㅠ - dc App

    03.20 12:24:04
  • ㅇㅇ(220.72)

    "인간의 육체를 강탈해서 동화되는 중에 인간의 감정을 가지게되었다. 그가 사랑을 느낀 인간은 아포칼립스 세상에서 결국 유일하게 살아남는 생존자로 남는다..."
    맛있게 잘 읽었습니다~~^^

    03.20 12:46:59
  • ㅇㅇ(211.235)

    이거 첫글임 ? 진짜 너무 재밌는데 앞으로도 글 많이 써주라

    03.20 13:19:37
    • soso1116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유동으로 글 3개 썼었음ㅋㅋ 하나는 명작선 올라갔고 하나는 사례괴담 모음집에 있음. 글은 시간 날때마다 쓸 예정

      03.20 13:50:32
    • ㅇㅇ(211.182)

      다른 글도 보고싶은데 알려줄 수 있냐

      03.21 11:17:58
    • soso1116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https://m.dcinside.com/board/napolitan/17752

      https://m.dcinside.com/board/napolitan/18402

      첫번째거가 명작선, 두번째가 사례임. 나머지 하나는 이 글 초판 느낌이고 이름이 생각이 안나서ㅋㄱㅋㅋ 재밌게 봐줘서 고마워

      03.21 16:01:47
  • ㅇㅇ(60.196)

    여운이 길게남아서 좋다 잘먹었음

    03.20 13:44:35
  • ㅇㅇ(118.235)

    진짜 이름이 '영원' '평생'이었으면 갓벽.....

    03.20 14:44:36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3
    03.20 19:16:31
  • ㅇㅇ(211.234)

    맛있는 글 잘 먹었다

    03.21 00:10:16
  • ㅇㅇ(211.234)

    개추 잘 안 누르는데 이건 진짜 맛있네

    03.21 01:09:24
  • ㅇㅇ(125.128)

    와 개좋음 이런 순애 괴담 맛있다

    03.21 23:49:40
  • 설긔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순애 넘 좋고

    03.23 14:05:52
  • ㅇㅇ(203.251)

    와ㅈㄴ순애맛도리 - dc App

    03.23 18:18:46
  • ㅇㅇ(211.211)

    와나웬만해서댓글잘안다는데진짜미친놈처럼처울었다너무맛있다진짜로

    03.24 02:35:53
  • ㅇㅇ(121.144)

    괴이의 사랑 - dc App

    04.01 00:18:53
    • ㅇㅇ(121.144)

      후편으로 말안들은 평생이 영원에게 나 2도 나왔으면 - dc App

      04.01 00:19:32
  • ㅇㅇ(118.235)

    3-1에서 나는, 난 언제나 당신을 지킬 수 있어요
    여기서 주어를 한번 절었던건 정체성의 혼란, 종족 대신 자신의 목표를 확실히 하고
    화자이자 청자의 연인이었고 괴물인 나는 언제까지나 있을 거라고 확정하고 다짐하면서 얘기하는 것 같아서 속울렁거린다
    진짜 잘썼네

    04.03 12:37:14
    • ZODIAC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이것까지 생각하고 보니까 진짜 필력이 프로급이구만...

      04.10 11:57:44
  • ㅇㅇ(219.248)

    영원장 - dc App

    04.12 19:19:50
  • 김다리미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괴이순애뭔데

    04.17 16:11:45
    • 김다리미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4
      04.17 16:11:52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맛있네

    05.10 01:25:29
  • q유나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6.08 01:48:14
  • ㅇㅇ(175.203)

    이거 인간 시점에서 답신 쓴걸로 후속작 나와도 맛도리겠는데? 써주면 좋겠네

    06.19 19:22:09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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