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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이너 갤러리 소개
괴담 장르 중 하나인 나폴리탄 괴담에 대해 다루는 갤러리입니다.
흰개(dcwhitedog)
블루워터(bluewate…) Rosefield_0313(subject0…) ㅇㅇ(clean738…) winter567(soccer28…) 이혁영(injury21…)
2021-03-02
괴담 장르 중 하나인 나폴리탄 괴담에 대해 다루는 갤러리입니다.
흰개(dcwhitedog)
블루워터(bluewate…) Rosefield_0313(subject0…) ㅇㅇ(clean738…) winter567(soccer28…) 이혁영(injury21…)
2021-03-02
안녕하세요.
어디에다 말하고 싶어도 말할 데가 없어서 익명으로 씁니다.
터무니없는 얘기라고 생각할 수도 있겠지만 어차피 온라인에는 그런 게 많으니까요.
어차피 여긴 보는 사람도 별로 없으니까 편하게 쓰겠습니다.
전 그냥 어디에라도 털어놓고 싶었어요.
저는 어렸을 때부터 할아버지와 함께 살았습니다.
부모님과 여동생도 있으니 요즘 시대치곤 한 식구가 많은 편이네요.
할머니는 일찍 돌아가셔서 뵌 적이 없지만 할아버지와는 무척 친했습니다.
할아버지의 방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곤 했죠.
그 방에는 할머니가 갖고 계시던 작은 병풍이 하나 있었습니다.
할아버지는 그걸 무척 아꼈고, 듣기로는 엄청 오래된 거라고 하면서 자랑스러워하셨습니다.
꼬부랑 무늬들 사이에 있는 작은 그림들을 자세히 들여다보려고 하면 항상 못하게 말리긴 하셨지만요.
어릴 때는 그 꼬부랑 무늬가 글자인지도 몰랐는데 크고 나니까 한자라는 걸 알겠더군요.
6폭짜리 병풍인데 '수(壽)' 자와 '복(福)'자가 섞여 있고, 글자 사이사이에는 길한 의미가 있는 동식물, 물건들이 그려져 있었습니다.
두 글자 다 전부 채워져 있지는 않았고 빈 공간이 남아 있는 상태였습니다.
나중에 사진 찍어서 검색해 보니 그게 우리집에만 있는 특별한 건 아니더라구요.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라고 장수와 만복을 기원하는 민화라고 했습니다.
어린 시절 이 병풍과 관련해서 유일하게 기억에 남아 있는 건 할아버지가 몇 번 보여주셨던 할머니의 기록입니다.
짧은 메모 같은 거라고 해야겠네요.
내용이 특이해서 아직까지 외우고 있는 건 아래 항목들입니다. 떠오르는 그대로 써 보겠습니다.
「 1. 병풍 뒤에 앉지 마시요
2. 개구리는 길눈이 밝고 똑똑하오
3. 호리병 엎지 마소 감당 안된다캤다
4. 책은 못 읽으니 읽으려면 책가도에서 찾아보이소
5. 개호주는 기운찬데 저지레를 많이 친다
6. 연꽃은 집안 물바다되기 쉽상이니 각오 단디헐것
7. 대나무는 시기를 놓쳤으면 고마 접으소
8. 수(壽)는 자세히 보지 마소
9. 두루미나 물총새는 꼭 한 쌍이요 띠놓으면 안되오 」
이것말고도 몇 개가 더 있었던 것 같지만 나머지는 가물가물합니다.
첫 번째 말고는 읽어도 도통 알아들을 수 없는 내용들이었는데 할아버지는 무슨 보물 지도마냥 은밀히 다루셨습니다.
그 때는 두 분 사이의 비밀스러운 암호라도 되나 보다 했던 것 같네요.
그 외에는 특별한 인상이 남아있지 않았습니다.
낡고 골동품 냄새가 나는 애장품 정도였죠.
그러다 얼마 전부터 할아버지 몸 상태가 안 좋아졌습니다.
나이들면 어르신들이 많이 겪는 그 증상이요.
치매가 온 거죠.
처음에는 여든이 넘으셨으니까 기억력이 떨어진 건가 싶었는데 한 반 년 지나니까 가족들 얼굴도 깜박깜박 하시더라구요.
다들 마음이 너무 안 좋았습니다.
수발 들면서 지켜볼 사람이 필요해졌는데 그 때 마침 회사를 퇴사하고 쉬던 제가 맡게 되었습니다.
막막하기도 했고 힘들거 같았지만 할아버지가 늘 잘해 주셨으니까 제가 마땅히 할 일이라고 생각했어요.
물론 이유가 그 뿐만은 아니고,
사실 백수로 지낸 시간이 길어져서 가족들 눈치가 보이던 참이기도 했습니다.
써놓고 보니 갑자기 민망해지네요...장기백수가 남의 일만은 아닙니다 여러분.
여튼 그렇게 제가 할아버지를 돌보게 됐는데 처음에는 난리도 아니었습니다.
시행착오도 있었고 어려웠던 순간도 많았죠.
날이 갈수록 요령이 붙으면서 그나마 나아졌다고 할 수 있겠네요.
할아버지가 가끔 맑은 정신이실 때는 저와 대화도 많이 했습니다.
아버지가 사고를 치고 다녔다던 젊은 시절의 이야기를 듣는 건 재밌었어요.
하지만 문제가 이 때쯤 시작됐습니다.
자꾸 할아버지가 병풍을 붙잡고 본인은 아직 갈 때가 아니라고, 여기에 복을 청해야 한다고 하시는 겁니다.
목숨까지는 바라지도 않는다고 하셨죠.
처음에는 그냥 농담인가보다 했습니다.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눈빛이 진지해서 웃지는 못했지만요.
몇 번이나 같은 얘기를 하니까 저도 한 귀로 좀 흘려듣게 되었구요.
고작 병풍인데 무슨 영험한 효능이 있겠냐는 생각이었습니다.
그런 말씀을 하기 시작한지 며칠 지나고 어느날 밤이었습니다.
저는 이부자리가 괜찮은지 확인하려고 한밤중에도 가끔 방에 들어가보곤 합니다.
그 날 밤도 슬그머니 보고 나오려고 할아버지 방에 들어갔었죠.
그런데 할아버지가 안 주무시고 병풍 앞에 앉아계신 겁니다.
늦은 시간에 뭘 하고 계신 건가 싶어서 다가갔습니다.
가까이 가 보니 대체 어디서 가져온건지 그 앞에 쥐 시체가 있더라구요.
지금 생각해 보니...그게 쥐였는지도 잘 모르겠습니다.
작은 동물이긴 했어요.
본 순간 소리지를 뻔했는데 가족들 다 깨울까봐 겨우 참았습니다.
전 깜짝 놀란 채로 저 털뭉치가 어디서 난 건지 물었습니다. 요새 아파트에서 쥐가 나올리가 없으니까요.
할아버지가 이건 갖고 온 게 아니라 저 쪽에서 여기로 나온 거라고 했습니다.
그 말을 듣고 전 어리둥절한 표정을 지었었습니다.
저 쪽이라며 가리키신 게 그 백수백복도(百壽百福圖)였으니까요.
그 당시엔 어쩐지 기분이 나빠져서 그걸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지 않았어요.
할아버지는 멀쩡한 정신이신 거 같았는데 계속 뜻모를 소리만 하셨습니다.
'옥례(돌아가신 할머니 성함입니다.)가 살아 있을 땐 안 이랬는데 이상해졌다, 전혀 말을 들어주지 않는다' 라고요.
그 말을 하는 할아버지의 표정이 마치 무언가를 두려워하는 것 같아서...저는 이 때부터 그 말이 장난이 아니란걸 알았습니다.
별개로 이해는 전혀 못하고 있었지만요.
여러분도 당연히 말이 안 된다고 생각하시겠죠.
결국 병풍 앞에 있던 그 뭔지 모를 동물 사체는 할아버지가 치웠습니다.
저는 그 사이 제 휴대폰으로 병풍 6폭을 한 장씩 사진으로 찍어두었습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은 기분이었으니까요.
그 뒤로 계속 찜찜하긴 했지만 병풍에 제가 손대려고만 해도 할아버지가 뭐라고 해서 어떻게 할 수가 없었습니다.
병풍에 무슨 귀신이라도 씌였겠냐고 달래봤는데 대답도 안 하시더라고요.
부모님은 다 일 때문에 출근하시고 여동생은 대학생이라서 학교 다니느라 바쁘니까 괜히 얘기 꺼냈다가 걱정할까봐 그냥 입닫고 있었습니다.
게다가 업무(?) 특성상 제가 늦게까지 깨어 있는 경우가 많은데, 동생이 힘든일이 있었는지 혼자 화장실에서 우는 걸 몇 번 봤거든요.
최대한 돌려 물어봐도 말을 안 해주더군요.
그런 상황에 제가 쥐가 어쩌고 저쩌고 하는 이상한 얘길 꺼내긴 좀 그랬습니다.
제가 주로 할아버지를 돌보긴 했지만 가족들이 모두 신경쓰고 있었거든요.
다들 집에 오면 항상 상태가 어떤지 확인했고, 동생은 거의 매일 밤마다 할아버지를 붙잡고 잡다한 화제들을 떠들었던 것 같습니다.
말을 알아들으시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할아버지가 동생을 토닥이면서 뭐라고 진지하게 말씀하시는 것도 봤습니다.
그게 한 일주일 전이었던 것 같네요.
무슨 얘기를 했냐고 다음날 아침에 물어봤는데 비밀이라고 하더라고요.
희한하게 그럴 때는 정신이 항상 멀쩡해 보이십니다.
하여간 뭔가 도움이 되긴 한 건지 아님 일이 어떻게 잘 해결된 건지, 나중에 보니까 다행히 동생 표정도 밝아졌었습니다.
이렇게 그냥 넘어갔어야 하는 건데...하필이면 제가 괜한 짓을 한 게 문제였죠.
문득 방에 있는 그 병풍을 확인해 봐야 한다는 생각이 든 겁니다.
왜 그런 느낌이 들었는지는 지금 돌이켜 봐도 잘 모르겠습니다.
결론적으로 동생의 상태가 좋아진 날 밤, 할아버지 방으로 들어간 저는 기이한 것을 보게 되었습니다.
눈을 감고 반듯하게 누운 할아버지 옆에 손바닥만한 흑백 호랑이가 앉아 있는 장면을요.
잘못 쓴 게 아니라 정말 손바닥만큼 작은 크기였습니다.
호작도(虎鵲圖)에 나오는 호랑이를 축소해 놓은 것 같았어요.
저는 놀라 그 자리에 주저앉았는데 그것은 저를 본체도 하지 않더군요.
붉은 복(福)자가 적힌 검은색 병을 꼬리로 감고 있던 그 호랑이는 할아버지의 얼굴을 잠시 들여다보다가 일어나더니, 냉큼 입 안으로 연기처럼 들어가 버렸습니다.
이 모든 일이 찰나의 순간에 벌어졌습니다.
방 안이 마치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은 것처럼 평안해서, 전 제가 꿈을 꾼 게 아닌가 싶었어요.
한참이 지나고서야 간신히 원래 하려던 일을 할 수 있었습니다.
바로 떨리는 손으로 휴대폰 사진첩을 뒤져 찍어놓은 사진을 찾는 일 말입니다.
실물과 하나하나 비교해 보던 저는 금세 차이점을 발견했습니다.
병풍에 있던 작은 호랑이 그림이 없어지고, 그 자리엔 전서체로 쓰여진 수(壽)가 대신 자리를 잡고 있었습니다.
몇 번이나 다시 봐도 바뀐 게 맞았어요.
왜 수(壽)가 생긴 거지?
저게 저절로 변할 수도 있나?
수많은 의문이 들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봐도 끝내 알 수 없었습니다.
다만 그 다음날 아침부터 저는 저 병풍이 보통 물건이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할아버지의 인지 능력과 기억력이 그 어느 때보다 명료해졌기 때문이죠.
그것 자체는 참 좋은 일이었습니다.
할아버지가 사족보행을 하고 생고기 육식을 하기 시작했다는 점만 빼면 말입니다.
부모님과 동생은 모두 당황했습니다. 특히 동생이 많이 놀랐구요.
우리는 바로 가족끼리 긴급 회의를 열었습니다.
하지만 대화를 나눠 봤을 때 할아버지의 정신 상태는 지극히 정상이었습니다.
십 년 전의 일이 아니라 백 년 전에 있었던 일도 말해 주실 수 있을 것 같았습니다.
결론적으로 할아버지를 두 발로 걷도록 설득하는 데에는 실패했지만, 그렇다고 할아버지를 정신병원 같은 곳에 보낼 수는 없었습니다.
시간을 두고 설득해서 차차 교정해 나가자는 의견을 모았죠.
동생은 이상하게도 죄책감 어린 태도를 보였습니다. 마치 할아버지가 이렇게 변한 데에 본인 탓이 있다고 생각하는 듯이요.
그 뒤로 동생이 할아버지와 보내는 시간은 더 늘어나 제 일이 도리어 줄어들었습니다.
저에게는 나쁠 게 없었지만 동생이 이따금 그 병풍을 훑어볼 때는 기분이 좋지 않았습니다.
더 이상 그것과 엮이지 않는 편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러나 제가 완곡하게 의견을 전달할 때마다 동생은 화를 내곤 했습니다.
마치 해결 방법이 그 병풍에 있다고 믿는 것처럼요.
이렇게 서로 의견이 맞지 않다 보니, 그저께 저녁에는 결국 목소리를 높여 싸웠습니다.
동생이 할아버지와 같이 있었는데 저를 방 밖으로 쫓아내고 문을 잠궈 버리더라구요.
자기 방도 아니면서…
문을 열라고 여러 번 말했지만 밤이 될 때까지 아무 반응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정 안되면 문을 따고 들어가야겠다 싶어서 문에 귀를 대고 기척을 살폈습니다.
방 안에서 ‘솨-솨-‘하는 바람 소리가 나더라구요.
바람에 나뭇잎들이 흔들리는 듯한 그런 소리였습니다.
방 안에는 식물이 없는데? 라는 생각에 저는 급히 문을 따고 들어갔습니다.
그리고 제 눈 앞에 펼쳐진 것은 푸른 대나무 숲이었습니다.
쭉 뻗은 단단한 마디, 무성한 댓잎 사이로 가끔 쏟아지는 햇빛의 파편, 청량하고 싱그러운 향기까지 그야말로 울창한 숲이었습니다.
저는 넋이 빠져 있다가 여기가 할아버지의 방 안이었다는 사실을 기억해내고 동생을 찾았습니다.
하지만 동생은 보이지 않고 저 멀리 다급한 할아버지가 보였습니다.
할아버지는 무언가를 쫓고 있더군요.
열심히 뛰어가 보니 할아버지가 따라가고 있는 것은 백발의 여성이었습니다.
그 모습을 본 순간 옛날에 사진으로만 한 번 본 할머니가 생각났습니다.
할머니는 그저 걷고 있었는데, 할아버지가 아무리 네 발로 빠르게 뛰어도 할머니는 가까워지지 않았습니다.
할아버지가 ‘같이 가…!’ 하고 소리 치자, 이내 할머니는 뒤돌아보더니 저를 바라봤습니다.
사진 속의 그 얼굴 그대로였어요.
저와 눈이 마주친 할머니는 슬픈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습니다.
뭐라고 말씀하셨던 거 같았는데 손짓하는 걸 봐서는 그 자리에 서라는 거 같았죠.
제가 멈춰 서자 대나무 숲은 스스로 움직이는 것처럼 빠르게 멀어졌습니다.
가만히 서 있었던 것뿐인데도 어느새 숲의 바깥이었습니다.
마지막으로 본 것은 흐릿해지는 대나무 숲의 풍경과, 겅중겅중 뛰어 계속 할머니를 쫓는 할아버지의 모습입니다.
정신을 차려 보니 전 할아버지의 방 한 가운데에 서 있었습니다.
이미 날이 밝아와 창 밖이 환해지고 있더군요.
할아버지도, 동생도 보이지 않았고 병풍에는 여기저기 피가 튀어 있었습니다.
그건 동생의 핏자국이었을까요?
저는 다시 휴대폰 사진을 뒤져 비교해 보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병풍 안의 그림과 글자들이 이상하게 소란스러워 보였고, 핏자국 때문에 잘 보이지 않는 부분을 오래 쳐다보니 속이 안 좋아져서 그만뒀습니다.
출장을 가신 부모님이 돌아오면 뭐라고 말을 해야 하지?
경찰을 부를까, 이 병풍을 대체 어떻게 해야 하나 같은 지리멸렬한 생각들로 멍하니 서 있었는데 그 때 현관의 벨이 울렸습니다.
나가 보니 찾아온 사람은 20대의 여자였고 지팡이를 든 남자도 같이 있었습니다.
혼란스러운 상태였기 때문에 무슨 정신으로 문을 열었는지도 모르겠네요.
수상한 사람들이었을지도 모르는데 말입니다.
본인들이 등대지기 재단인가 뭔가 하는 데서 일하고 있다면서 집안에 있는 물건이 혹시 문제를 일으키고 있지 않냐고 물었습니다.
요약하자면 어느 정도 대가를 치를 테니 재단에 그걸 넘겨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그러면 더 이상 집안에서 재난을 겪지 않아도 된다고 남자가 말했습니다.
하지만 할아버지와 동생이 없어진 마당에, 피로 얼룩진 병풍을 어떻게 모르는 사람들한테 덥썩 넘길 수가 있겠어요?
무섭긴 했지만 안될 일이었습니다.
거절하니 여자 쪽에서 날카로운 눈빛으로 저와 집 안을 한번 흘긋 보았습니다. 그 둘은 순순히 돌아갔습니다만 또다른 의문이 남았죠.
우리 집에 문제를 일으키는 물건이 있는 줄은 어떻게 알았을까요?
이상한 사람들이 다녀간 뒤로 신경이 날카로워진 저는 괜히 문단속만 철저히 했습니다.
우리집은 아파트 8층인데 누가 밖에서 들여다보는 기분이 들기도 했고요.
딱히 그럴 방법도 없는데 말입니다.
그렇게 안절부절하고 있던 와중 먼저 귀가한 것은 아버지였습니다.
별 일 없었냐고 물으시는데 차마 입이 떨어지지 않더군요.
제가 몇 마디 자초지종을 설명하기도 전에 아버지는 방으로 뛰어들어갔습니다.
설명을 전부 들었어도 믿을 수 없는 내용일 텐데, 아버지는 저보다도 더 오래 이 병풍과 같이 지냈을 테니 뭔가 알고 있으셨을지도 모르겠습니다.
방에 들어가 보니 아버지가 화가 난 얼굴로 병풍을 잡아 흔들고 있더라구요.
아버지가 ‘이 따위 게 뭐라고, 잡아 찢어버리겠다’ 며 손에 힘을 꽉 주는 와중이었습니다.
제 귀에 ‘도르륵’ 하는 소리가 들렸습니다.
처음에는 그게 무슨 소리인지 몰랐습니다.
문득 아버지의 바짓단이 축축하길래 다가가 살펴보니, 병풍에 그려져 있던 호리병이 엎어져 있었습니다.
병풍의 귀퉁이가 젖어 가면서 아버지의 바지도 같이 적신 것이었죠.
이윽고 방에 술 냄새가 나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가 얼떨떨한 얼굴로 병풍을 툭 놓자, 늙수그레한 음성이 들려왔습니다.
그 목소리가 자신의 술병을 마음대로 엎다니 어떻게 할 거냐면서 호통치더군요.
기이하게도 그 음성은 병풍 바로 뒤에서 들려왔습니다.
술 냄새를 맡은 저는 정신이 몽롱해지고 있었는데 아버지도 마찬가지인 것 같았습니다.
어떻게 해야 되냐고 아버지가 더듬더듬 묻자 그 목소리가 답했습니다.
다행히 여기 새 술이 있으니, 이리 와서 자신에게 술 한 잔 따라주면 용서해 주겠노라 하더군요.
제가 말리기도 전에 아버지는 홀린 듯이 병풍 뒤로 걸어 들어갔습니다.
아버지의 모습이 사라진 뒤에야 저는 화들짝 몸을 떨었습니다.
할아버지가 보여준 그 규칙을 어떻게 잊고 있었을까요?
뒤늦게 제가 아버지, 아버지 하고 소리쳤지만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고 병풍이 다시 술렁이기 시작했습니다.
제가 아버지를 부르며 울부짖자, 깜짝 놀란 어머니가 정장 차림인 채로 다급히 들어왔습니다.
아버지에 뒤이어 집으로 돌아오신 것입니다.
집 안에 들어오자마자 제가 할아버지 방 안에서 목놓아 소리치고 있으니 놀라실 만도 했겠죠.
어머니는 당황한 눈빛으로 이게 무슨 일이냐는 듯 저와 병풍을 번갈아 바라보셨습니다.
그러나 이번에는 뭐라고 말할 시간조차도 없었습니다.
병풍에서 졸졸 흐르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방 안에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 것입니다.
눈 깜짝할 새 맑은 물이 무릎을 지나 허리까지 차오르더군요.
어머니는 이게 꿈인가? 하는 표정으로 굳어 있었고, 저는 필사적으로 어머니 쪽으로 헤엄쳐 가려고 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았습니다.
잠깐 사이 물이 가슴께까지 차자, 묘한 향기가 느껴졌습니다.
물 위로 연잎들과 몇 송이의 큼지막한 연꽃 봉오리가 솟아난 것입니다.
어찌나 큰지 사람이 양 팔로 껴안아야 할 정도의 크기였죠.
저는 연꽃이고 뭐고 어머니를 구해야겠다는 생각뿐이었습니다.
이대로 방 안에서 물에 빠져 죽을 수는 없는 일이었으니까요.
어머니는 제가 부르는 소리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눈 앞에 있는 연꽃을 들여다보고 있었습니다.
그 꽃이 신비로운 절경이라도 되는 듯이 사로잡힌 모습이었죠.
저는 천천히 열리고 있는 봉오리를 외면하며 발버둥쳤습니다.
어머니는 피어나는 연꽃의 안쪽을 뚫어져라 보더니 이내 충격과 슬픔, 환희가 뒤섞인 표정으로 꽃을 꼭 껴안았습니다.
‘정신 차리세요, 그걸 놓고 제 손을 잡으라고요!’
그렇게 외치면서 온 힘을 다해 손을 뻗었지만 닿지 않더군요.
연꽃을 껴안은 어머니와 제 목 위로 물이 더 높게 차오르기 시작했습니다.
코로 물이 들어왔고, 숨을 제대로 쉴 수 없었습니다.
의식이 희미해지자 아무것도 들리지도 보이지도 않게 되었습니다.
제가 정신을 잃기 전에 마지막으로 들을 수 있었던 것은 '개굴' 하는 울음소리뿐이었습니다.
그 뒤로 몇 시간이나 흘렀을까요.
저는 축축한 방바닥에서 깨어났습니다.
두통 때문에 머리가 아프고 물을 잔뜩 먹어 코 속이 아렸습니다.
몸을 간신히 일으켜 보니 방 안에 있던 병풍이 없어졌더라구요.
비틀대며 돌아다닌 집 안에는 아무도 없었고, 베란다 샷시 문과 방충망이 모두 열려 있었습니다.
할아버지, 부모님, 동생...제 가족은 다 어떻게 된 걸까요?
망연하게 돌아선 순간, 눈 앞에 홀연 연녹색 개구리 한 마리가 나타났습니다.
복(福)자가 적혀 있는 베개를 등에 짊어진 개구리는 저를 빤히 쳐다보면서 온순하게 눈을 끔벅였습니다.
정신을 잃기 전 들었던 개구리 울음소리가 떠오르자, 할머니의 쪽지 내용이 다시 기억났습니다.
'개구리는 길눈이 밝고 똑똑하오'
문득 저는 미친 것처럼 개구리에게 말을 걸었습니다.
"우리 가족이 어디 있는지 알아?"
딱히 대답을 바라고 말을 건 것도 아니었습니다.
경찰에 신고를 해도 당장 어떻게 말해야 할지 모르는 상황이니까요.
반쯤 패닉 상태에 빠진 혼잣말에 가까웠죠.
그러나 놀랍게도 개구리는 마치 대답하듯 개굴개굴 울었습니다. 그러고는 뒤를 돌아 뛰어가려고 하더군요.
네, 여기까지가 지금까지 저에게 벌어진 일입니다.
그리고 저는 개구리에게 잠시 기다려 달라고 한 채 여기까지 글을 썼네요.
이제 전 이 개구리를 따라갈 예정입니다.
그 병풍이 혹시나 정말로 가족들을 가져간 거라면, 혼자서라도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볼 겁니다.
저의 가까운 사람을 잃은 건 사실…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일 년쯤 전에, 가장 친한 친구가 돌연 실종되었거든요.
게임을 좋아하던 녀석이었는데 현실에서 못 해본 사장을 가상 세계에서라도 해 보겠다 어쩐다 그러더니 그 뒤로 연락이 두절되었습니다.
경찰이 수사는 하고 있지만 단서가 전혀 없는지 아직도 실종 상태입니다.
저로썬 이제 뭐라도 하지 않고는 도저히 납득할 수도, 견딜 수도 없을 것 같습니다.
정말 이런 이상한 일들이 저한테만 벌어지고 있는 걸까요?
요즘 들어 괴담처럼 인터넷에 우후죽순으로 떠도는 경험담들이 모두 허황된 소설에 불과할까요?
제가 돌아와 무사히 가족을 되찾았다는 글을 쓸 수 있을지조차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상하다고 생각하실지 몰라도 여기에 털어놓는 것만으로도 나름 홀가분해졌습니다.
나중에 제가 어떻게 되든 저의 흔적은 어쨌든 이곳에 남아 있을 테니까요.
글솜씨도 없는데 긴 이야기를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복 많이 받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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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영역
지팡이 남자는 계속 나오네
이게 이사장인가보다 - dc App
1팀 소속이라고 낙양아파트 문서때 나왔었음
꿀잼이였음 - dc App
맛있다 맛있어
ㅈㄴ맛있다
와
개잘썼네
와
글 진짜 잘 쓰네...어떻게 시리즈 중에 아쉬운 편이 하나도 없노
이거 뒷내용이 너무 궁금하다 ㅠㅠ 전통수산시장에 용왕나타났을때 주인공은 부모님 랩타일에 나온거보면 죽은거같은데 여기는 어찌되려나
글 진짜 맛있네
와 잘 썼다... 결국 병풍이 무엇인지 설명을 해주진 않아서 나폴리탄 특유의 느낌이 살아있는거같아 - dc App
진작에 병풍 버렸으면 후손은 안 죽었을건데 거참
할아버지는 정신 멀쩡할때 저 메모랑 의미 좀 가족들한테 말해주지 - dc App
지린다
진짜 너무 잘 쓴다
등대지기 재단 정체도 얼른 밝혀졌으면 - dc App
글 존나 잘쓴다 진짜
이게 100이 되네 뭐지...타이밍이 좋았나? 읽어주는 낲갤럼들 취향을 아직도 잘 모르겠지만 여튼 고맙다
개재밌다 ㄹㅇ 이 시리즈 처음 보는데 안 쉬고 다 읽음ㅜㅜ 아껴먹을걸
쉽상x십상
ㅁㅊ 전래동화같음
방금 정주행하다 왔는데 사장되겠다고 실종된 친구 삼사소프트 게임했었나보네ㄷㄷ
세계관 연계 미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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