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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규칙괴담] 승전병의 매뉴얼

이혁영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11.06 19:06:12
조회 16073 추천 311 댓글 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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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전병의 매뉴얼





길었던 전쟁은 끝났다.

우리가 대체 무엇과 싸우고 있었는지,

이 마을을 짓밟았던 사악하고 흉측한 것들의 정체가 무엇인지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 되었다.

하늘에 뚫렸던 구멍은 사라졌고 땅은 더이상 흔들리지 않는다.

무엇보다도, 우리는 살아남았다.

그것만으로 인생은 그럭저럭 괜찮아 보였다.





사태가 일단락된 이후로 정부는 놀랄 만한 통제력을 발휘했다.

고용된 청소부들이 매일같이 거리의 시체와 부서진 건물 파편 따위를 실어날랐다.

대부분의 생존자는 재난 상황에 빠르게 적응해 살 길을 찾았던 이들이다.

그들은 재난이 그랬듯 갑자기 들이닥친 일상에 적응하는 것도 능숙했다.

사람들은 정말, 정말로 빠르게 일상을 찾았다.







나는 아니다.

그게 내가 이 매뉴얼을 쓰는 이유다.






이것은 되찾은 일상을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규칙이다.








0. 나에겐 형이 있었고, 형은 죽었다.

둘 중 하나를 가끔 잊고 만다.

무덤은 따로 없고 사진도 다 잃어버렸지만 이건 사실이다.








1. 이제는 낮이 안전하다.

어디서든 피어나 사람을 미치게 하던 감염성 눈알들은 이제 없다.

건물의 외벽, 가로수, 버려진 자동차, 심지어는 오래된 시체에서까지도 창궐하던 눈알은 모두 사라졌다.

그러니 밤에 잠들고, 낮에 활동할 것.








2. TV와 라디오, 유튜브를 청취할 것.

소문은 더 이상 신뢰할 만한 정보가 안 된다.




+

음, 정정이 필요할 것 같다. 사태 당시라고 특별히 소문이 정확한 것은 아니었다.

그냥 동네 바자회라거나 (총기를 소지했다는 점을 빼면, 암시장은 동네 바자회랑 비슷하다) 학창 시절 수련회에서(좋든 싫든 우리는 모여서 잠들어야 했다) 지껄이는 허무맹랑한 유령 이야기에 지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런 소문이 사실이든 아니든 내가 말할 수 있는 건, 살아남은 우리들은 알 수 없는 무언가가 사람의 몸뚱이를 꼬치마냥 꿰뚫고 다닌다는 헛소문이 퍼졌을 때 그 의견에 조금이나마 귀 기울인 사람들이었다는 사실이다.

사태 종료 후, 총기 소지가 금지된 '진짜' 동네 바자회에서는 옆 동네에 구세주가 재림했다느니 납을 금으로 바꿔 주는 신비한 주문이 있다느니 하는 소문이 돌고 있다.



글쎄. 그닥 끌리는 내용은 아니다.

최근에는 증권가 뉴스에 관심을 두려 한다.








3. 금연할 것.

담배가 그렇게 비쌀 수 있다는 걸 사태 이전에는 몰랐다.

사태가 절정에 달했을 때에는 달력 종이와 쌀가루로 만든 조잡한 사제 궐련이 꽤나 값나가는 귀중품으로 둔감했다.

스트레스가 과중한 상황이 아닐 때 미리 끊어두는 게 좋겠다.




+

이건 믿거나 말거나인 소문인데, 우리 동네의 이웃 중 하나는 담배 연기 때문에 무언가에게 발각되어 끔찍하게 죽었다고 하더라.

별로 신뢰성 있는 내용은 아니다.

말했다시피 우리는 낮에 자고 밤에 활동했다.

우리에게든 그들에게든 연기보다는 불꽃이 훨씬 잘 보였을 것이다.








4. 뒤에서 인기척이 느껴진다면 미소를 띠고 뒤돌아라.

천천히, 아주 천천히.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최소한 세 배는 더 천천히 뒤돌아라.

극도의 긴장과 아드레날린은 사람의 반응 속도를 미친 듯이 올린다.

정말로 미친 것처럼 보이기 십상이다.

유의하라. 사태에서 단 한 명의 희생자도 허용하지 않고 일가족을 모두 구해낸 사람은 거의 없다.

그런 사람을 등 뒤에서 습격할 배짱 좋은 사람도 거의 없기는 매한가지다.

내가 제대로, 충분히 천천히 뒤를 돌아보았다면 눈앞에는 높은 확률로 어색한 웃음을 짓는 아이가 있을 것이다.

조심스럽게 안아주어라. 미소를 잊지 말라.








5. 별로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으나, 가장 중요한 사항이다.

반드시, 반드시 잠자리에 들기 전에 침대 머리맡을 확인할 것.

권총 한 자루가 있을 것이다.

소음기를 장착하고, 탄창이 빌 때까지 천장을 향해 쏴버려라.

어떤 일이 있어도 총알이 장전된 채로 잠에 들어서는 안 된다.

새벽에 내 정신은 가장 위태롭다.









6. 새벽 시간대에 현관의 센서등이 켜질 때가 있다.

침입자를 확인하려는 강렬한 충동이 들겠지만, 다시 잠에 들도록 노력해야 한다.




+

만일 충동을 이기지 못해 자리에서 일어서고 말았다면 즉시 집안의 모든 전등을 켜라.

스위치로 향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인영이나 그림자, 말소리는 모두 무시해라.

반응하면 돌이킬 수 없을 테니까.

아직 내 첫째 딸의 목에 피멍이 남아 있다는 점을 기억해라.

그때는 운이 좋았다.









7. 마당에 무덤이 하나 있다.

매일 민들레 하나를 꺾어 놓아두어라.

아내가 가장 좋아하던 꽃이다.









내가 이 매뉴얼을 쓰는 두 번째 이유에 관해서 얘기했던가?

말하지 않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불확실하게 말할 수밖에 없는 점 사과한다. 하지만 이게 내 최선이다.

사태 이후 내 뇌는 별로 믿음직하지 않은 것이 되어버렸다.

이제, 나는 이것을 남은 내 가족을 지키기 위해서 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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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본 첨부파일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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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16
댓글 등록본문 보기
  • ㅇㅇ(223.39)

    와 이거 참신하고 좋네
    개추

    2024.11.06 19:25:43
    • 이혁영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11.06 19:25:59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괴이?나 괴물한테서 살아남은거 말곤 평범하게 진짜 있을법한 PTSD 증상 보유한 사람들에게 다시 평시처럼 지내야한다고 하는거 같네

    2024.11.06 20:02:37
  • 졸음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사태에서 단 한명의 희생자도 허용하지 않고> 이게 제일 의미심장하네

    나머지 가족은 본인이 PTSD로 죽였던 건가... - dc App

    2024.11.06 20:51:30
    • 스틸콜드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딸 피멍도 주인공이 죽일 뻔한 건가

      2024.11.07 19:11:19
  • 노란벽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3
    2024.11.06 20:53:09
  • ㅇㅇ(118.221)

    찡하다

    2024.11.07 11:05:41
  • ㅁㄴㅇㄹ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0. 나에겐 형이 있었고, 형은 죽었다.

    둘 중 하나를 가끔 잊고 만다.

    둘중 하나를 잊고 산다는 그냥 짧은 문장 하나로 어떤 상황인지 전부 설명되는게 개무섭네

    2024.11.09 12:10:26
    • 첨벙퐁당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ㄹㅇ 이 부분 되게 간결하고 좋음

      2024.11.09 14:52:33
  • Sw77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오... - dc App

    2024.11.10 03:26:04
  • 네탓이군시로코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자기 자신을 대비하는 매뉴얼 참신하다 개추 - dc App

    2024.11.10 14:41:43
  • 아르제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PTSD.. 개추

    2024.11.11 11:05:47
  • ㅇㅇ(222.98)

    0번 ㅈㄴ 잘썻네

    01.27 00:04:50
  • ㅇㅇ(223.118)

    4의 아이가 딸인건가

    01.31 14:12:05
  • 칼퇴전문가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7
    02.20 11:19:43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아 안아주는게 딸이구나... 개슬프네

    03.08 17:08:21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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