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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잡담] "근데 '죄송합니다' 라는 표현은 왜 쓰는 겁니까?"

ㅇㅇ(210.57) 2024.09.04 01:27:50
조회 17306 추천 219 댓글 14
														

내가 그렇게 묻자마자
나를 돌아보는 선배의 신경질적인 표정에,
나는 곧바로 질문을 후회했다.

"죄, 죄송합니다."

무엇보다 때가 좋지 않았을 것이다.
선배와 나는 텅 빈 사무실에 단 둘이 남겨져 있었다.
남은 밤은 길었고 처리해야 할 문서는 산더미.

그리고 그 중 상당수의 처리가
내 신입 교육으로 인해 지체된 것이었다.

"뭐가 그렇게 궁금한데요?"

왜 쓸데없이 입을 놀린 거야 병신아.
분위기 어색하면 가만 닥치고나 있지.
어떻게든 말 걸어 보겠다고...

"아무것도 아닙...."
"뭐가 아무것도 아니냐고, '죄송합니다'가 뭔데?"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린 선배의 표정은
방금 전과 비교하면 한층 짜증이 옅어져 있었다.

"물어볼 거면 적어도 똑바로, 정확히 뭐가 궁금한지 확실히 물어요."

그렇게 말하며 키보드를 두드리는 선배에게
어쩌면 아직 완전히 찍힌 건 아니라고 생각하며
나는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 '메뉴얼'에 써져 있는 문구를 말씀드린 것이었습니다."

나는 생존자였다.

삼 개월 전.
지금 생각해도 도무지 믿겨지지 않는 이상 현상에 휘말려
기적적인 생존률을 뚫고 살아남았다.

나를 지금까지 살아 있게 해준 것은
이곳에서 만든 메뉴얼이었다.

이 세상 곳곳에 뚫려 있는 '수렁'을 연구하고
간혹 그곳에 불운하게 사로잡히는 나 같은 사람을 위해
생존 방법을 적은 메뉴얼을 배포하는 조직.

수렁에서 벗어나 구출된 직후
이곳의 존재를 안 나는 이루 말할 수 없는 감사와 함께
이곳의 일원으로서 일하는 꿈을 품었다.

지난 삼 개월 동안 하나하나 짚을 수 없을 정도의
수많은 우여곡절이 있었고...
그 끝에 나는 겨우 이곳의 수습이 될 수 있었던 것이다.

허나 입을 닫고 오직 듣는 것에만 집중해야만 하는 이 시기
나도 모르게 지난 삼 개월간 품었던 의문을 입 밖으로 뱉어
선배의 심기를 건드리고 말았다.

"죄송합니다라는 말이 무엇을 의미하는지는 이해하고 있습니다."

쏟아진 물을 다시 주워담을 수는 없다.
선배의 말처럼, 최대한 또렷하게 질문을 마무리하는 수밖에.

"조난자가 메뉴얼의 지침을 이행하지 못했을 때...
그리고 메뉴얼과는 상관없는 불운한 변수를 맞이했을 때
조난자에게 마음의 준비를... 시키기 위한 문구지요."

당신은 무슨 짓을 써도 살아남을 수 없고
당신이 도무지 상상조차 하지 못할 고통을
죽음보다 최저의 생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그런 말을 메뉴얼에 써 놓을 수는 없으니까.
하지만... 그렇다고 해도 '죄송합니다' 라는 말은
어떻게든 실낱 같은 희망을 붙잡으려고 하는
조난자 입장에선 그것만으로 더할 나위 없는 공포다.

나 역시 운 좋게도 '죄송합니다'가 지칭하는 상황을
마주하지는 않았지만... 메뉴얼에 적힌 '죄송합니다' 이후의
순간들을 상상하며 얼마나 몸서리쳤던가.

"주제 넘은 말이라 생각합니다만....
'죄송합니다' 를 대체할 만한 문구가 있지 않을까 합니다."
"예를 들면 어떤?"

여전히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며 선배가 물었다.

"예를... 들면... 조난자 분들이 어떻게든 끝까지
희망을 가지실 수 있도록... 생존과는 관계가 없더라도....
어떤 행동을 취하면 살 수 있다라는 문구를... 넣는다던가."

물론 이건 그들에 대한 기만인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저 막연한 절망을 상상하며
'죄송합니다' 로 그들을 방치하는 것보다는
거짓된 희망이라도 불어넣는 편이 훨씬 낫지 않을까.

"그리고 행여나 만약 그 분들이 살아남는다면...
저희로서도 메뉴얼을 업데이트할 여지를 남기는 셈이니..."
"이미 그렇게 하고 있는데요?"

선배의 얼굴에서 완전히 짜증은 사라져 있었다.
내가 질문을 던지기 전처럼, 그저 피곤함에 찌든 덤덤함.

"네?"
"이미 ■■씨 말처럼 메뉴얼을 작성하고 있다고요.
설령 조난자들이 죽거나 영영 빠져나오지 못할 상황이면
그걸 어떤 방식으로든 암시하기보단 가짜 답을 제시해요.
뭐라도 하고 죽는 게 조금의 가능성이라도 있을 테니."

멍한 내 귓가에 선배의 말소리가 이어 꽂혔다.

"그게 작성팀 방침입니다.
'죄송합니다' 같은 말, 그들 절대로 쓰지 않아요."
"그, 그러면 그게...."
"그것의 장난질이죠."

메뉴얼의 오염이라고 한다고, 선배는 덧붙였다.

"오염되는 내용에는 한계가 있어요.
예컨대 확실하게 밝혀진 정보나 생존법에 대해서는
그건 메뉴얼을 건드리지 못합니다."

메뉴얼이 오염되는 부분은 거짓,
혹은 조직에서 확실하게 파악하고 밝혀내지 못한 부분이었다.
조난자들에게 희망과 일말의 가능성을 안겨주는 문구들.

그런 문구들에는 오염이 적용되어
죄송합니다 라는 선고만이 남게 되는 것이다.

"왜 그러는지는 굳이 말할 필요 없죠?"
"......."

포기하게 만들기 위해서겠지.

정해진 시간 내에 스위치를 올리지 못하셨다면 죄송합니다.
그것들의 발소리가 귓가에 들려오기 시작했다면 죄송합니다.
천장에서 붉은 물방울이 떨어지기 시작했다면 죄송합니다.

어쩌면 조난자들이 발버둥침으로서 살 수도 있을 상황
그 상황에 대한 생존 의지를 꺾고, 무력한 사냥감으로 만드는
다섯 글자의 농간.

"이따금씩 굴하지 않고 살아남은 사람이 있기는 해요.
그러면 작성팀은 그 사람들의 증언을 토대로 메뉴얼을 갱신하고
적어도 하나의 '죄송합니다'가 사라지죠."
".........."

내가 삼 개월 전 보았던 메뉴얼의 내용을 떠올린다.
그 안에 적힌 수많은 죄송합니다.의 숫자를.

만약 내가 운 좋게 확실한 루트를 걷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제 때에 맞게 열 손가락의 손톱을 모두 뽑아 낸 다음
■의 입에 넣고 기도문을 외우지 못했다면...

거기에 생각이 미치니
최근 희미해지는 듯했던 손가락 끝의 고통이 되살아났다.

작게 입술을 오므리며 나는 시선을 아래로 내렸다.
도무지 다시 돋을 생각을 하지 않는 아홉 개의 손가락.

아홉?

나는 다시 시선을 들어올렸다.
어느 사이 선배가 고개를 돌려 내 손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선배님."

그렇게 내뱉는 입 안은 물론
목구멍 안까지도 순식간에 말라버린 듯했다.

선배가 시선을 들어 나와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는 활짝 웃으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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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정닉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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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댓글 14
댓글 등록본문 보기
  • 지스핀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죄송합니다

    2024.09.04 01:31:52
  • ㅇㅇ(182.222)

    안 죄송해 임마!

    2024.09.04 02:31:55
    • ㅇㅇ(1.253)

      배먹어 배 - dc App

      2024.09.04 05:55:46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좆같았던 떡밥의 정상화ㅋㅋㅋㅋㅋ

    2024.09.04 04:29:27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7
      2024.09.04 04:29:40
  • ㅇㅇ(221.158)

    이걸 살리네

    2024.09.04 11:22:10
  • ㅇㅇ(211.235)

    ㅈㅅㅎㄴㄷ

    2024.09.04 11:57:12
  • ㅇㅇ(175.116)

    항상 맛있다

    2024.09.04 19:33:28
  • ㅇㅇ 갤로그로 이동합니다.

    지리네

    2024.09.05 17:32:21
  • ㅇㅇ(211.234)

    어우 시발거..

    2024.09.06 01:53:59
  • ㅇㅇ(211.198)

    뭐야 선배가 괴이임?

    2024.09.06 02:14:55
  • ㅇㅇ(112.167)

    뭔소리임?

    2024.10.19 16:11:44
    • ㅇㅇ(14.39)

      이해하지 못하셨다면 죄송합니다

      2024.12.16 12:35:16
  • ㅇㅇ(1.248)

    이야 재밌다

    01.09 23:41: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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