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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 E-1. 착한 사마리아인 -epilogue- (샐러리맨 이규성 시리즈)

나폴리우레탄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3.10.27 23:58: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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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년 3월 1일 금요일



 이럴수가! 정말 믿기지 않는다.



내가 선생님이 되었다니! 어린시절부터 항상 꿈꿔왔던 일인데, 막상 현실이 되다니 설레서 잠이 오지 않아!



내일은 처음으로 아이들과 만나는 날인데, 이러다 푸석푸석한 얼굴로 만나게 될까봐 걱정이다.



얼른 자야지~ 내 첫 제자들아 너무 보고싶고 기대돼!



이 설레는 마음이 앞으로 오랫동안 변하지 않기를...





2002년 3월 13일 수요일



 규칙적인 생활이 필요하겠다고 생각한 하루였다.



그동안 임용고시 합격한 이후로 친구들하고 놀러 다니느라 너무 제멋대로 살았던 것 같다. 반성!



초등학교 3학년 아이들은 너무 활발하고 에너지가 넘쳐서 힘들다... 물론 그것도 이겨낼만큼 귀엽고 착한 아이들이지만!



그리고 반에 특수반 아이가 하나 있으니 역시 좀 어렵다.



반에서 지켜야 되는 규칙도 잘 이해못하고, 갑자기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서 돌아다니기도 하고...



그나마 다른 학년에 있는 남자애처럼 폭력적이지는 않아서 다행이라고 해야 할까, 어떻게 해야 좋을지 너무 고민돼!





2002년 4월 9일 화요일



 성격이 날카로워졌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충격!



송연우하면 ◆◆교대 마더 테레사였는데, 나도 벌써 세상의 때에 물들어 버렸나봐.



특히 지희 때문에 스트레스 받는 게 원인인 것 같다. 선생이 되어서 이런 생각이나 하다니 난 사실 나쁜사람 인가보다.



다른 애들하고 똑같이 대해야지 하면서도 그게 맘처럼 잘 안 된다. 지희야 미안해.



그래도 반에서 자발적으로 잘 챙겨주는 애가 있어서 다행이다.



얼마 전엔 음악시간이라서 교실 이동해야 되는데, 같이 손을 꼭 잡고 가주는 걸 봤다. 어찌나 귀엽고 멋진지!



나중에 커서 선생님하고 결혼하고 싶다는 애들도 물론 이쁘지만(히히), 저렇게 마음이 따뜻한 애들이 있어서 보람을 느끼는 거겠지.



나도 다시 따뜻한 마음으로 모든 아이들을 품어줄 수 있도록 노력해야겠다. 아자아자 파이팅!





2002년 4월 27일 토요일



 은사님을 오랜만에 찾아뵈었다.



시간이 오래 지났어도 한결같은 미소로 나를 맞아주시는 따뜻한 분이다.



내가 선생님을 따라서 선생님이 됐다고 말하자, 부끄러워하시면서도 대견하게 생각해주셔서 모처럼 힘이 났다.



선생님께서는 초임 때 어떻게 버텼는지 물어봤더니, 초등학생들은 하루가 다르게 쑥쑥 몸도 마음도 자라나서, 그 모습을 보고 있으면 자기도 모르게 마음이 사르르 녹아서 버틸 수 있다고 하셨다.



휴~ 나는 아직 선생님처럼 되기는 멀었나보다. 결혼해서 자식을 낳으면 이해할 수 있게 될까?



어쨌든 오랜만에 선생님을 만나니 너무 행복하고 즐거웠다.



다음주의 나는 지금보다 조금 더 여유 있고 행복한 선생님이길!




2002년 5월 15일 수요일



 괴롭다. 너무나도 괴롭다.



스승의 날이라고 아이들이 다같이 케이크를 준비해주었다.



칠판에 마구 써놓은 귀여운 글씨들도 너무 고마웠다. 스승의 은혜 노래에 맞춰서 케이크의 촛불도 불고 아이들에게 환하게 웃어줬다.



그런데 저 뒤쪽에서 끼지도 못하고 혼자 쳐다만 보고 있는 지희밖에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지희가 어느 순간부터 수업시간에 벌떡 일어나지도 않고, 갑자기 한꼬마 두꼬마 하는 노래도 부르지 않는다.



나는 사실 왜 그런지 알고 있어.



하지만 그동안 지희 때문에 너무 힘들었기 때문에, 알면서도 모른척하고 있을 뿐이야.



난 정말 최악의 선생이다.



이렇게 더러운 사람이 감히 스승의 은혜 노래를 들을 자격이 있을까?



어쩌다 이런 일이 되어버린 걸까. 지희야 미안해 너무 미안해.





2002년 6월 26일 수요일



 이제 난 선생이라고 불릴 자격도 없다.



내가 조금만 더 용기를 냈더라면 이런 일은 벌어지지 않았을 거다.



어제부터 학교에는 하루종일 경찰이 들어와서 여기저기 이야기를 묻고 다니고 있다.



나도 불려가서 조사를 받고 왔다.



하지만 아무것도 모른다는 대답밖에 할 수 없었어.



내가 무슨 힘이 있겠어! 그렇게 말해야 한다고 교장 선생님이 말씀하셨는 걸...



그치만 이러면 안 되는 거잖아.



지희의 삼촌이라는 분이 와서 나를 향해 고래고래 소리지를 때는 너무 무서워서 나도 모르게 눈물이 났다.



진짜 무섭고 눈물이 나야 되는 사람은 내가 아닌데, 왜 다른 선생님들은 나를 위로해주고 감싸주는 걸까?



그동안 얼마나 무서웠을까, 얼마나 힘들었을까?



이렇게 괴로운 일이 벌어졌는데도, 신문기사 한 줄 나지 않는다. 온 세상은 월드컵 4강 이야기뿐이다.



이렇게 세상에서 함부로 잊혀져도 되는 생명이 아닌데, 그렇게 만들어버린 난 정말 쓰레기야.



미안해 지희야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미안해 선생님이 어떻게든 갚을게





2002년 7월 19일 금요일



 일상으로 돌아갈 수 있을까.



휴직을 하고 할 수 있는 건 하루 종일 집에 있는 것뿐이다.



잠에 들어도 꿈에서 계속해서 노랫소리가 들려온다. 지희가 항상 부르던 노래다.



한 꼬마 두 꼬마 세 꼬마 깜둥이 네 꼬마 다섯 꼬마 여섯 꼬마 깜둥이 일곱 꼬마 여덟 꼬마 아홉 꼬마 깜둥이 열 꼬마 깜둥이들...



이제 학교는 방학기간이란다. 언니에게서 전화가 왔다.



방학인데 왜 집에 안 내려오냐고, 엄마아빠가 보고싶어 한다고.



아, 나 학교 쉬는거 엄마아빠한테 아직 말 안 했구나.



엄마아빠 미안해. 엄마아빠는 열심히 키워줬는데, 이렇게 못된 딸로 커서 너무너무 미안해...





2002년 7월 20일 토요일



 까만 그림자가 자꾸 눈앞에 보여.



그 아이가 나를 부르고 있어...








“연우가 남겨두고 간 거라곤 그 일기장이 다예요.”



남자가 일기장을 다 읽고 테이블 위에 내려놓자, 입가에 팔자주름이 엷게 내려앉은 중년의 여인이 티슈로 연신 눈물을 훔치며 말했다.



“벌써 20년도 더 된 일이죠. 꿈에도 그리던 교사가 되었다고 그렇게 행복하게 웃으면서 서울로 올라갔던 아이가, 설마 그렇게 괴로운 일을 겪고 있었을 줄은 꿈에도 몰랐어요. 내색을 하나도 안 했으니까.”



그녀가 눈물을 닦던 티슈를 꼭 쥔 채, 양 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



“그런데, 그쪽은 제 동생과 어떻게 아는 사이길래 이렇게 찾아오신 거죠? 연락받고 너무 놀랐어요. 경찰도 이미 실종된 지 너무 오래돼서 사망 처리해버린 아이를… 물론 부모님은 아직도 인정하지 못하고 계시지만요.”



“저는 연우 선생님의 제자였습니다.”



조금 진정이 된 듯 물어보는 그녀에게, 전신에 까만 옷을 입은 채 맞은편에 앉아있던 미남상의 남자가 침착하게 대답하였다.



“혹시 XX시라는 곳을 들어보신 적이 있습니까?”



“XX시요? 아뇨. 전혀 처음 들어보는 곳이네요. 어딘가 지방에 있나요?”



“그렇습니다. 서울에서는 아주 먼 곳에 떨어져 있습니다. 저는 우연한 기회로 그곳에 갈 일이 있었는데, 거기서 연우 선생님을 만날 수 있었습니다.”



“이런 세상에! 연우가 아직 살아있단 말인가요? 그런데 그 나쁜 계집애는 어떻게 걱정하는 가족한테는 연락도 한 통 안 하고… 아이고 맙소사!”



여인이 손으로 자신의 가슴을 퍽퍽 치면서 분한 듯이 소리 지르자, 남자가 진정하라는 듯이 양손을 들어 올리는 제스처를 취했다.



“진정하시고… 다 그럴만한 사정이 있었습니다. 전부 말씀드리자면 이야기가 좀 길어질 것 같은데, 혹시 시간도 아낄 겸, 제가 차를 가져왔으니 같이 타고 가면서 들어보시지 않겠습니까? XX시로 바로 안내해드리겠습니다.”



“후… 그래요. 믿기지 않았지만, 연락받고 나서 부모님하고 남편한테도 다 이야기 해뒀으니까, 지금 바로 가도 될 것 같아요. 이년 나한테 잡히기만 해봐라, 가만두지 않을라니까!”



씩씩거리는 그녀를 슬쩍 바라본 남자가, 두 사람 앞에 놓인 빈 잔 2개를 들고 일어났다. 카운터에 있는 직원에게 ‘잘 먹었습니다.’라고 말하며 그것을 반납한 그가, 까만 코트자락을 펄럭거리며 성큼성큼 출구를 향해 걸어가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연우의 제자라고 하셨는데, 혹시 이름이 어떻게 되시나요?”



헐레벌떡 자리에서 일어나 종종걸음으로 뒤를 따라가며, 여인이 그에게 물었다.



그 말을 들은 남자가, 한쪽 입꼬리로 미묘한 웃음을 짓고는 대답하였다.




“이규성, 제 이름은 이규성이라고 합니다.”




- fin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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