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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폴리탄] 친애하는 인간에게

YOY갤로그로 이동합니다. 2024.09.13 06:04:15
조회 15504 추천 298 댓글 12
														

친애하는 🌕🌕에게


그동안 안녕하셨는지요. 🌕🌕씨. 

갑작스럽게 날아온, 발신지조차 불분명한 편지에 무척이나 당황하셨을 줄로 압니다.


부디, 이런 방식으로밖에 당신에게 연락을 취할 수 없는 저희의 입장을 헤아려주시길.


...우선 소개부터 드리자면, 저희는 당신이 20살이던 해의 4월 14일에 당신을 납치한 자들입니다.


네. 당연하게도 기억이 없으시겠지요.

저희가 당신의 기억을 지웠으니 말입니다.


아무튼, 저희가 당신을 납치한 당초의 목적은 식사를 하기 위함이었습니다.

당신을 불로불사의 몸으로 만든 뒤, 끝없는 미로에 가둬두고 몇백, 몇천 년에 걸쳐 당신이 느끼는 절망과 허무를 맛보고 싶었습니다.


인간이란 겨우 그 정도의 하찮은 존재일 뿐이다.- 라는 것이 이 세상의 보편적인 상식이니 말입니다.


하지만, 놀랍게도 당신은 겨우 그 정도의 존재가 아니었습니다.

오히려 저희에게 가르침을 줄 수 있는 그런 존재였습니다.


당신이 미로에 갇힌지 400년이 되는 날, 당신은 분명 미쳐있었습니다.

미로의 벽에 머리를 박고, 비명을 지르고, 바닥에 쓰러져 앓는 소리를 내는 등 이제까지 봐왔던 평범한 희생자들과 다름 없는 행동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도대체 무엇이 계기가 되었을까요.


당신은 갑자기 희미해져가는 정신을 붙잡더니 미로의 벽과 바닥에 수많은 철학적 논제를 적고 그에 대한 정답을 찾아나가기 시작했습니다.


그 뿐일까요. 당신은 이에 그치지 않고 소수(素數)에 담겨있는 절대적인 규칙을 찾아내고, 형이상학적 질문들에 대한 근원을 기하학을 통해 찾아내었으며, 명학(鳴學)이라는 새로운 학문을 창조해내기까지 했죠.


그런 상황이니 당신이 침묵의 장막 뒤에서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던 저희의 존재를 인지하는 것도 당연한 수순이었습니다.


분명히 저희를 향해 분노를 쏟아내야 마땅한 상황임에도, 당신은 그러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저희에게 당신이 깨달은 것에 대해 설파하고, 저희를 계몽시켜주시기 위해 노력하셨죠.


아아, 🌕🌕씨.

감사합니다. 정말 감사합니다.

당신 덕에 저희는 단순한 일희일비(一喜一悲)에서 벗어나, 진정한 가치를 위해 정진하는 존재가 될 수 있었습니다.

당신과 함께 이 세상의 진리를 담은 단 한 줄의 문장을 완성시키기 위해 발버둥쳐온 시간은, 저희에게는 그 어느 때보다도 행복한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래서일까요. 어느 날 갑자기 당신이 지금까지 이뤄온 모든 것을 포기하고 지구로 되돌아가겠다고 했을 때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당혹스러웠습니다.

당신과 영원을 함께하는 것을, 저희는 너무나 당연하게 여기고 있었으니까요.


그러나


진리를 찾는 것도, 영원을 살아가는 것도 좋지만 모든 것은 원래 있어야 할 곳에 있어야만 한다.

그리고 그것에는 나 또한 예외가 아니다.


-라고 말하는 당신의 모습에, 저희는 슬픔을 참고 당신을 지구로 돌려보내드릴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당신이 지구로 돌아가며 저희에게 부탁한 것은 3가지.


첫째, 시간을 되돌려 우주를 당신이 납치당한 당일의 상태로 복구시켜줄 것.

둘째, 당신의 기억을 지워줄 것.

셋째, 앞으로 당신의 앞에 나타나지 말 것.


이었습니다.


네. 눈치채셨겠지만 당신이 그 모든 일을 겪고도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는 것은 두 번째 항목, 저희가 직접 나타나지 않고 이렇게 편지를 통해서 간접적으로 연락을 드리는 것은 세 번째 항목 때문입니다.


...🌕🌕씨.


저희는 당신이 그립습니다.

언제나 가부좌를 틀고 앉아 저희를 이끌어주던 당신이 그립습니다.

당신이 없는 지금, 저희는 한치앞도 보이지 않는 어둠을 떠돌아다니는 존재처럼 방황하고 있습니다.


이런 말씀이 폐가 된다는 걸 알지만, 부디 저희에게 돌아와주세요.

이 가엾은 어린 양들을 다시 한 번 구제해주세요.


...조만간, 당신을 데리러 가겠습니다.





......


......


...


.


후훗, 농담입니다.


저희가 힘든 시간을 보내고 있는 것은 맞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저희의 일.

당신이 부탁한 것을 감히 어길 생각은 없습니다.


이 편지는 그저, 당신이 저희의 존재를 인지해주셨으면 해서, 한 때 그런 일이 있었다- 라는 것을 알아주셨으면 해서 보냈을 뿐입니다.


🌕🌕씨, 되돌아간 그곳에서 부디 행복하시기를.

당신이 저희에게 베풀어준 은혜만큼이나, 다른 사람들로부터 더 많은 것을 받고 계시기를.


그곳에서, 저희와의 시간보다 더 가치있는 무언가를 찾아내시기를.


당신의 영원한 친구,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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