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종역(靈終驛)에 배정되신 신입 역무원 여러분, 진심으로 환영합니다.

저희 영종역은 ■호선의 끝에 위치한 종착역으로, 가장 유동인구가 적기로 유명한 역입니다.

사실, 저희 역이 신입 역무원 분들에게 첫 근무지로는 잘 배정되진 않습니다만, 이번 기수는...대단하신 분들이 많다고 하더군요.

이유가 어떻든 간에 일단 영종역에 배정되신 이상, 저희가 지금부터 안내드리는 근무수칙은 반드시 숙지하셔야만 합니다.

꼭 이 수칙들을 숙지하시어 여러분 스스로가 훌륭한 역무원으로 거듭나시길 바랍니다.

1. 막차를 타고 오시는 승객은 세어보지 마십시오.

저희 역에는 막차가 오전 0시 14분에 도착합니다.

그 시각에 내리시는 승객분들을 절대 확인하지 마세요.

아마 출입문이 열리는 순간, 몇 명인지 확인하고 싶어질 것입니다.

그 순간의 충동을 억누르셔야 합니다.

또한, 충동을 억누르시는 와중에 문득 숫자를 세는 '개념'이 모호해지는 순간이 올 수도 있습니다.

가령, 숫자를 세려고 하는데 1,2,3,4...이런식이 아니라 435,164,875,947...이런식으로 숫자가 세어진다면,

그 날은 바로 역장님께 보고드리고 퇴근하십시오.

그 날 근무는 정상 출퇴근으로 처리해드리겠습니다.

2. 막차가 도착한 뒤, 객실 내 승객이 모두 하차했는지 확인하십시오.

반드시 모든 객실을 돌며 빈 좌석을 확인해보십시오. 

사람이 없는 것 같아도, 좌석을 손으로 한번씩 쓸어보는 것을 권장합니다.

간혹 빈 좌석에 온기가 남아있다면, 아직 누군가가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는 '선생님, 이번 역은 종착역입니다.' 라고 조용히 말씀하세요.

만약 손을 올려둔 좌석의 온기가 빠져나간다면(반드시 그 차이가 느껴지실 겁니다.),

하차하신 것이니 다음 객실로 이동하셔서 확인하시면 됩니다.

그러나, 온기가 남아있거나 오히려 더 뜨거워지는 느낌이 드신다면, 아마 열차가 출발할 것입니다.

3. 차량이 기지로 돌아가기 전까지 승강장에서 빠져나오십시오.

우리 역의 선로는 다른 역들과 다릅니다. 

반드시 차량이 완전히 들어온 후에 승강장에 진입하십시오.

차량이 출발했거나 기지로 돌아가 노출된 빈 선로를 직접 목격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절대 빈 선로가 노출되어 있는 승강장에 남아있으면 안 됩니다.

눈앞에 보이는 풍경이 선로인지 다른 곳인지 의심되는 순간, 이미 늦었습니다.

4. 승객이 남긴 분실물은 즉시 보관실에 제출하십시오.

다만, 우산 중에서도 검은색 장우산이라면 주의하십시오. 

혹시라도 이것을 들었을 때 뚜렷하게 들리는 빗소리가 느껴진다면, 즉시 우산을 바닥에 내려놓고 그 자리를 떠나십시오. 

그날 사무실 문을 잠그고 창 밖으로 시선을 두지 마십시오.

어떤 인기척에도 반응하지 마시고 퇴근 때까지 침묵을 유지하십시오. 

이 수칙은 재작년 김OO 주임의 경험을 토대로 반영되었습니다.

5. CCTV를 자정 이후에는 돌려보지 마십시오.

이 수칙은 야간 당직을 서는 역무원에게 해당되는 내용입니다.

간혹 CCTV에 무언가가 지나간다거나 신원미상인 인물이 이상한 행동으로 주의를 끄는 게 발견될 수 있습니다.

절대 되돌려 본다거나 확대해서 보는 일이 없도록 하십시오.

되감기 후 재생하는 순간, 이미 그 곳으로 달려가 함께 CCTV에 찍히는 중일 것입니다.

6. 막차 시간에 간혹 승강장에 혼자 있는 승객이 말을 걸어온다면, 시간을 확인하십시오.

오전 0시 15분에서 0시 25분 사이라면 응답하지 마십시오.

특히, '마지막 열차가 언제 오나요?'라고 묻는다면, 대답하지 마시고 바로 승강장을 벗어나 사무실로 이동하십시오.

저희는 이미 막차 시간이 언제인지 말씀드린 바 있습니다.

7. 역무원 대기실 안 쪽에서 노크소리가 들리면, 즉시 확인하십시오.

단, 문을 열어서는 안됩니다.

'선생님, 민원은 민원접수실로 가셔야 합니다.' 라고 얘기하십시오.

만약 같은 역무원이라면 절대 대답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감사합니다' 라는 대답이 들려오면, 10초 후에 문을 열어 확인하십시오.

(20XX.00.00 추가) 최근 대답이 없는 승객분들이 발견되었습니다.

역장님께서 확인 중이시니 당분간 대기실 사용을 금합니다.

8. 터널에서 이상한 울림이 들려도, 선로를 점검하러 가지 마십시오.

이미 보셨겠지만 저희 역 옆쪽에는 커다란 터널이 있습니다.

그 터널에서 간혹 이상한 울림이 들려올 수 있습니다.

이러한 울림을 듣는 것을 방지하기 위해 사전에 지급해드린 이어플러그가 있습니다.

만약 이어플러그를 깜빡하셨거나, 분실하게 되어 울림을 들으시는 경우 터널 안 선로를 확인하고 싶어지는 강렬한 충동이 발생할 수 있습니다.

그런 경우에 대비하기 위해 반드시 다른 역무원과 함께 다니십시오.

만일, 혼자서 선로를 확인하러 가신다면, 열차가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9. 어느 날 갑자기 이 수칙이 무슨 소용인가 라는 생각이 드신다면, 역장님께 보고하시고 퇴사하십시오.

유감스럽게도 여러분은 이 업무에 적합하지 않습니다.

어쩌면 이미 역무원이 아닐 수 있습니다.

만약, 그렇다면 막차가 기지로 돌아간 후 승강장에서 당신을 찾는 방송이 나올 것입니다.

조심히 들어가십시오.

10. 여러분 밑으로 새로운 역무원이 부임해오는 경우, 이 수칙을 꼭 전달해주십시오.

만일 새로 온 역무원이 이미 이 수칙에 대해 아는 것처럼 행동한다면, 조용히 터널로 들어가시기 바랍니다.

그 역무원이 당신에게 수칙에 대해 물어보고 그 수칙이 어디에 있느냐 물어보면, 역장님께 안내해드리십시오.

이 수칙은 역장님께서 직접 작성하신 것으로, 그대로만 준수한다면 안전한 역무원 생활을 이어나가실 수 있도록 작성되었습니다.

부디 이 수칙을 숙지하시거나 따로 필사하여 근무하시는 동안에는 계속 지참하시기 바랍니다.

단, 원본을 보고 싶어지거나 어디있는지 무조건 찾아야겠다는 생각이 드신다면, 역장님을 찾아가십시오.

역장님은 항상 해결책을 가지고 계시지만, 그 해결책이 언제나 당신을 위한 것은 아닙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