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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의 베팬알백] <64편> '베어스 사령탑 9년' 김인식 감독의 퇴장…그 흔적과 기억들

2023-08-18


[베팬알백] ⑭ '베어스 사령탑 9년' 김인식 감독의 퇴장… 그 흔적과 기억들




2003년 9월 29일. 월요일이었지만 두산 베어스는 잔여 일정으로 한화 이글스와 대전구장에서 시즌 최종전을 치를 예정이었다. 두산 선수단이 경기 전 훈련을 하고 있던 무렵, 김인식 감독은 ‘야구장 앞에 주차돼 있는 경창호 사장 승용차로 와 달라’는 전갈을 받았다.


야구장 밖으로 나간 김 감독은 경 사장의 승용차에 탑승했다. 경 사장은 무거운 공기를 가르며 어렵게 입을 열었다.


“나하고 계속 같이 하시죠. 부사장을 맡아주세요.”


“…….”


김 감독은 말없이 경 사장의 얘기를 듣기만 했다.


쉽게 말하자면 9년간 지휘해 온 두산 감독직에서 물러나 달라는 뜻이었다. 대신 구단은 두 차례나 우승을 이끈 김 감독에게 예우를 갖춰 파격적인 부사장직을 제안한 것이었다.


사실 김 감독도 어느 정도 마음의 준비를 하고는 있었다. 재계약 만료 해인 2003년, 팀 성적도 부진한 데다 시즌이 종료되기 며칠 전부터 이미 언론을 통해 기사들이 터져 나왔기 때문이다. 두산이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연수를 마치고 돌아오는 선동열을 새 사령탑으로 영입하려 한다는 내용이었다.


“무슨 뜻인지 알겠습니다.”


아무 말이 없던 김 감독은 한마디를 한 뒤 승용차에서 내렸다. 1995년부터 9년간 이어 온 두산 감독 자리. 그렇다면 이날 경기는 두산 사령탑으로서 마지막 경기다. 김 감독은 한화전을 치르기 위해 뚜벅뚜벅 대전구장 안으로 다시 걸어 들어갔다.


[베팬알백_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두산 베어스 시대’ 14번째 주제는 2002년과 2003년의 부진 그리고 구단 역사상 최장수 감독인 김인식 감독 시대와 결별 이야기다.




두산 김인식 감독과 역대 베어스 감독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오른쪽부터 초대 김영덕 감독(작고), 김성근 감독, 이광환 감독, 윤동균 감독, 김인식 감독. ⓒ두산베어스




◆2001년 우승의 영광 뒤로…5년 만에 가을야구 방관자


[베팬알백] 12편에서 설명했듯이, 두산은 2001년 페넌트레이스 3위에 오른 뒤 준플레이오프, 플레이오프, 한국시리즈를 거치며 우승을 차지하는 ‘미러클 두산’ 신화를 썼다.


두산은 2002년 1월 17일 이도형을 한화에 내주고, 강인권을 받는 1대1 포수 트레이드로 시즌을 준비했다. 그리고는 2002년 전반기에 44승2무29패(승률 0.603)를 기록하며 2위로 마쳤다. 전반기 1위 KIA(47승3무25패)에 3.5게임차로 붙어 있는 상황. 후반기 레이스에 따라 한국시리즈 직행을 다툴 수도 있었다. 최소한 플레이오프 직행 티켓이 걸린 2위는 확보해 놓았다는 분위기였다.


하지만 후반기를 시작하자마자 충격의 9연패를 기록하고 말았다. 7월 20일 잠실 삼성전에서 3-4로 1점차 패배를 당하더니 7월 31일 잠실 LG전(0-7 패배)까지 1승도 거두지 못하고 내리 9연패. 7월 24일 잠실 SK전에서 마무리 진필중의 난조로 4-1로 앞서던 경기를 4-7로 역전패하는 등 이 기간 4차례나 뼈아픈 역전패를 당했다.


OB 시절이던 1990년에만 두 차례 작성된 구단 최다 11연패까지 가지는 않았지만, 9연패는 1995년 김인식 감독이 베어스 사령탑으로 부임한 뒤로 최다 연패였다.


8월 1일 잠실 한화전에서 8-4로 승리하며 가까스로 9연패에서 벗어났지만, 두산은 8월에도 첫 9경기에서 3승6패로 부진했다. 순식간에 팀 순위가 5위로 급전직하했다. 당시엔 8개 구단 체제여서 4강까지 포스트시즌에 진출했다. 4위와 5위를 오가던 두산은 8월 28일 5위로 내려앉더니 시즌 최종전까지 5위 자리에서 한 번도 움직이지 않았다.




김인식 감독이 2002년 하와이 스프링캠프 도중 KIA 김성한 감독과 얘기를 나누고 있다. 두산은 전반기에 KIA와 선두 싸움을 벌였다. ⓒ두산베어스


그러는 사이, 시즌 초반 꼴찌까지 내려앉았던 옆집 LG가 치고 올라오면서 결국 4위 자리를 차지했다


(당시 김성근 감독이 이끈 LG는 준플레이오프부터 시작해 한국시리즈까지 진출하는 파란을 일으켰는데, 삼성과 맞붙은 한국시리즈 6차전 9회말에 이상훈이 이승엽에게 동점 3점홈런, 바뀐 투수 최원호가 마해영에게 끝내기 홈런을 맞으면서 준우승에 그쳤다).


두산으로선 여러 악재가 겹쳤다. 1997년 5위, 1998년 4위, 1999년 3위, 2000년 2위, 2001년 1위로 해마다 순위가 한 계단씩 상승하는 대역사를 썼지만, 아무래도 부족한 전력으로 4년 연속 포스트시즌에서 혈전을 치르다 보니 2002년에는 주력 선수들의 크고 작은 부상과 부진이 잇따랐다.


리드오프 정수근(0.235, 100안타, 58득점, 40도루)과 4번타자 심재학(0.245, 94안타, 15홈런, 57타점)이 잦은 부상으로 제몫을 못했다. 여기에 타이론 우즈(0.256, 25홈런, 82타점)마저 1998년 KBO리그 데뷔 후 가장 저조한 성적을 냈다. 김동주(0.318, 26홈런, 79타점)도 부상으로 자주 자리를 비웠다. LG에서 방출된 최경환이 쏠쏠한 활약(타율 0.274, 69득점, 47타점, 15도루)을 펼쳤지만 전반적으로 두산 특유의 파괴력과 뚝심이 사라졌다.


이 와중에 마운드에서는 몇몇 희망적인 요소를 보이기는 했다. 진필중은 2002시즌에 앞서 포스팅시스템으로 메이저리그 도전에 나섰지만, 응찰 구단이 없어 두산 구단으로 유턴했다. 그런 충격에도 불구하고 당시 KBO리그 최연소 150세이브(29세10개월10일)를 기록했고, 35세이브포인트(4구원승+31세이브)로 4년 연속 30세이브포인트를 달성하며 팀의 뒷문을 책임졌다. 차명주는 2001년(18홀드)에 이어 2002년(17홀드)까지 2년 연속 홀드왕에 올랐다. 그해 두산에서 유일하게 따낸 개인 타이틀이었다.




2002년 16승을 기록하며 에이스로 활약한 게리 레스. ⓒ두산베어스



선발진은 1년 전보다 훨씬 안정됐다. 2001년 10승 투수 한 명 없이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한 것과 비교하면 상전벽해. 2002년에는 KIA가 포기한 좌완 게리 레스를 데려와 에이스(16승8패, 평균자책점 3.87)로 키워냈다. 박명환은 1998년 작성한 자신의 최다승(14승)과 타이를 이루며 토종 에이스로 부활했다. 또 다른 외국인투수 빅터 콜은 평균자책점이 4점대(4.01)로 다소 불안했지만 2완봉 포함 12승6패를 거뒀다. 2001년(6승9패, 평균자책점 5.04)보다 승수가 두 배나 많았다.


두산은 66승2무65패로 5할 이상의 승률을 올렸지만 순위 경쟁에서 5위로 밀려났다. 페넌트레이스 3위를 차지한 2001년(66승5무63패)과 비슷한 성적에도 불구하고 결과(우승과 포스트시즌 탈락)는 하늘과 땅 차이였다.


이를 두고 그해 시즌 도중 김인식 감독이 부산아시안게임 국가대표 감독을 맡았던 점을 이야기하는 사람도 있다.


훗날 수많은 국제대회를 치르면서 ‘국민감독’으로 자리잡았지만, 2002년 부산아시안게임은 김인식 감독에게 국가대표 사령탑 데뷔 무대이기도 했다. 9월 29일 합숙훈련부터 10월 10일까지 KBO리그가 중단됐다. 김 감독은 지금도 “그게 시즌 성적하고 무슨 상관이야. 핑계지”라며 웃지만, 가까운 거리에서 지켜봤던 두산 프런트 인사들은 “아무래도 감독님이 오롯이 팀에만 신경 쓸 수 없는 환경이었던 것도 사실이다”고 돌이켰다.


실제로 2002년은 한·일월드컵 4강 신화로 국민의 관심이 온통 축구로 향했던 해였다. 야구장을 찾는 관중의 발걸음은 뜸했다. 위기였다. 야구계 전체가 아시안게임 금메달로 '야구의 르네상스'를 고대하던 상황이라 김 감독의 어깨는 그만큼 무거웠다. 국가대표 감독으로선 모두가 기대한 금메달을 이끌어 냈지만, 두산 감독으로선 5년 만에 가을야구 방관자가 되고 말았다.




김인식 감독은 2002년 정규시즌 중단 후 펼쳐진 부산 아시안게임에서 국가대표 감독으로 우승을 이끌었다. 그러나 두산 팀 성적은 5위에 그치고 말았다. ⓒ두산베어스



◆ 정수근 하와이 사건…시작부터 꼬여버린 2003시즌


권토중래(捲土重來). 그러나 2003년은 험난한 시간이 되고 말았다. 우선 선수 구성부터 큰 변화를 맞이해야만 했다.


1998년 이후 5년간 베어스 간판 타자로 중심을 잡던 외국인타자 타이론 우즈가 일본프로야구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 계약하며 팀을 떠났다. 전년도 16승을 기록한 외국인 에이스 게리 레스도 이 같은 활약을 발판 삼아 일본 요미우리 자이언츠 유니폼을 입었다. 또 다른 외국인 투수 빅터 콜과도 재계약하지 않았다.


진필중은 2002년 시즌 종료 후 다시 한번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 메이저리그 진출을 노렸다. 그러나 이번엔 2만5000달러가 최고 응찰액. 당시 우리돈으로 약 3000만 원 수준이었다. 사실상의 이적료였기에 두산은 포스팅 결과를 거절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1월 16일 두산은 심란해진 진필중을 KIA로 보내면서 투수 손혁과 외야수 김창희를 받는 2대1 트레이드를 단행했다.


2003년 2월 하와이 스프링캠프에서 큰일이 벌어졌다. 정수근이 심야 음주폭력 사건에 휘말려 현지 법정에 서는 불상사가 생겼다. 주점에서 술을 마시던 동료가 현지에 사는 한인들과 시비가 붙은 게 발단. 현지 경찰이 긴급출동했다. 여기서 정수근은 경찰의 몸에 손을 대는 바람에 ‘공무집행 방해’와 ‘폭행 혐의’로 하와이 법정에 서서 450달러의 벌금형을 받았다.




정수근은 2003년 부상까지 겹치며 제몫을 하지 못했다. ⓒ두산베어스



정규시즌도 시작부터 꼬였다. 대구에서 삼성과 치른 개막 2연전에서 선발로 나선 박명환과 구자운이 조기에 무너지는 바람에 각각 6-7, 4-5로 연이어 1점차로 패했다.


특히 개막전 패배가 뼈아팠다. KBO 외국인선수 역사상 최초의 일본인 투수 이리키 사토시가 한 타자도 잡지 못하고 2연속 안타를 맞으면서 패전투수가 된 것. KIA로 떠난 진필중을 대신해 소방수 역학을 해줄 것으로 기대했지만 첫판부터 어긋났다. 그 이후 두산은 4월 13일 잠실 SK전까지 8연패를 당했다. 이는 아직도 남아 있는 두산 구단 개막 최다 연패 기록이기도 하다.


4월 한 달 동안 5승16패를 기록했다. 5월 5일 잠실 LG전부터 15일 잠실 한화전까지 다시 9연패에 빠졌다. 5월에만 6승19패. 두 달 동안 거둔 승수는 11승에 불과했고, 패수는 무려 35패나 됐다. 승패 마진 ?24. 결국 최하위로 주저앉았다.


타선에서는 우즈를 대체할 선수가 나타나지 않았다. 새 외국인타자 마이크 쿨바는 파워도 기대에 미치지 못했고, 정교함도 부족했다. 점차 하위 타선으로 밀려나더니 44경기에서 타율 0.215, 10홈런, 24타점을 기록한 뒤 6월 12일 퇴출됐다.


이리키는 6월부터 구자운과 교대해 선발로 보직을 바꿨지만 39경기(20선발)에서 7승11패, 5세이브, 평균자책점 3.74를 기록하면서 재계약에 실패했다.


(공교롭게도 쿨바와 이리키는 은퇴 후 불의의 사고로 젊은 나이에 생을 마감했다. 쿨바는 미국에서 마이너리그 1루 코치를 하다 2007년 7월 22일 상대 타자의 강한 파울 타구에 머리를 맞으면서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 사고 이후 2008년부터 모든 베이스 코치들의 헬멧 착용이 의무화됐다. 이리키는 2023년 2월 10일에 교통사고로 숨을 거뒀다.)




KBO 역사상 최초 일본인 선수로 영입된 이리키 사토시와 구자운. 이리키는 마무리 투수로 영입됐으나 부진으로 시즌 도중 구자운과 보직을 맞바꿔야만 했다. ⓒ두산베어스



마운드의 박명환, 구자운, 이경필, 최용호 등이 부진한 상황. 7월 9일 최용호를 내주고 KIA 외국인투수 마크 키퍼를 받는 트레이드를 결정했다. 키퍼는 2002년 KIA에서 19승을 거두며 KBO 역대 외국인투수 중 최초로 다승왕에 오른 인물. 그러나 2003년에는 KIA와 두산에서 8승7패, 평균자책점 3.79에 그쳤다.


주전들의 줄이은 부상도 악재였다. 포수 홍성흔은 5월 5일 어린이날 오른손목 부상으로 이탈한 뒤 두 달 동안 안방에 앉지 못했다. 하와이 사건 이후 절치부심하던 정수근은 6월 4일 수원 현대전에서 권준헌의 투구에 왼손 엄지를 맞아 골절상으로 한 달간 쉬더니 8월에는 주루 도중 허벅지를 다쳐 20일간 이탈했다.


6월에 10승12패로 정비를 한 뒤 7월 8승6패, 8월 15승2무10패, 9월 13승11패로 뒷심을 발휘했지만 개막 두 달간 뽑아 쓴 마이너스 통장을 채워넣기는 불가능했다. 57승74패2무. 2003년은 승률제가 아닌 다승제였는데, 롯데(39승91패3무)를 밀어내고 탈꼴찌에 성공한 것이 위안이었다.


2003년 팀 내 최다승 투수는 8승을 거둔 이경필이었을 정도로 마운드 사정이 좋지 않았다. ‘우동수 트리오’ 중 유일하게 남은 김동주가 0.342의 고타율로 생애 처음 타격왕을 차지하고, 좌완 차명주가 16홀드로 3년 연속 홀드왕에 오른 것이 수확이라면 수확이었다. 2002년에는 한 명의 골든글러브 수상자도 배출하지 못했지만 2003년에는 2루수 안경현과 지명타자 김동주 2명이 황금장갑을 받은 것이 우울했던 그 시즌의 기쁜 소식이었다.




김인식 감독이 신문을 읽고 있다 ⓒ두산베어스



◆ ‘선동열 두산 감독설’ 후폭풍과 김인식 감독의 퇴장


두산은 2003년 정규시즌 최종전에서 한화를 5-3으로 이겼다. 선발투수 노경은이 5.1이닝 2실점으로 호투하고, 차명주~김승회~이재영이 나머지 이닝을 막아내면서 2003시즌 최종전을 승리로 마무리했다.


베어스 감독으로서 임무를 끝낸 김인식 감독은 이튿날인 9월 30일 서울 구단 사무실에 들렀다. 그리고는 경창호 사장을 만나 “후임자에게 더 이상 짐으로 남고 싶지 않다”며 사의를 표명했다. 감독직에서 물러나는 것은 물론 구단의 부사장직 제의도 거절하면서 야인의 길로 나섰다.



“(선)동열이가 온다는 소리도 나오고, 그래서 내가 비켜주면 동열이가 아무래도 더 편하게 오지 않을까 했지. 두산이 부사장 자리까지 제안한 것은 그만큼 배려를 해준 거라고 봐. 그렇지만 그땐 나도 젊기도 했고, 구단 부사장보다는 계속 현장에 있고 싶은 생각도 있어서 그만두겠다고 하고 (두산을) 나왔던 거야.”


김인식 전 감독은 2003년 두산 감독 자리에서 나오게 된 그 상황을 이렇게 기억했다.


한때 ‘종신 감독’이란 말이 나올 정도로 두산 베어스와 김인식 감독은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처럼 보였다. 그러나 만남이 있으면 헤어짐이 있는 법. 김 감독이 부사장직까지 고사한 것은 제자인 선동열에게 부담을 주지 않기 위해서였다. 1986년부터 1989년까지 해태 타이거즈 코치와 에이스로 4연패 신화를 이룬 사제지간. ‘국보투수’에서 지도자로 첫 발을 내딛는 후배가 행여나 뒷방으로 물러나 있는 자신의 눈치를 볼 수도 있기에 김 감독은 깨끗하게 구단에서 나가는 길을 택했다.




'국보투수' 선동열은 2003년 말 김인식 감독 후임으로 두산 감독 계약 협상을 했지만 결렬됐다. ⓒ두산베어스



선동열은 1999년 일본프로야구 주니치 드래건스에서 은퇴한 뒤 2000년부터 3년간 KBO 홍보위원으로 활동했다. 당시 KBO 총재를 맡고 있던 박용오 두산그룹 회장은 선 홍보위원과 각별한 친분을 쌓았다. 그러면서 언젠가는 두산 감독을 맡겨야겠다는 생각을 했던 것으로 알려졌다.


선동열은 2002년을 끝으로 KBO 홍보위원 자리에서 물러났다. 그리고는 2003년 주니치 2군에서 한 시즌 동안 지도자 연수를 받고 10월 4일 귀국했다.


하지만 두산과 선동열의 정식 감독 계약은 성사되지 않았다. 열흘가량의 밀당. 서울의 한 호텔방을 잡아놓고 경창호 사장이 비밀리에 마지막 협상을 이어갔지만 서로의 조건에서 이견이 생겼다. 선 전 위원이 요구한 해외 전지훈련과 자유계약선수(FA) 보강, 코치진 조각권 등에서 합의를 보지 못했다. 결국 두산이 “세부 조건에서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며 감독 계약 결렬을 공식 발표했다.


선동열의 회오리바람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두산과 선동열의 감독 계약 협상이 결렬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LG가 영입전에 나섰다. 이광환 감독의 임기가 1년 남았지만, 이 감독의 후계자 자리를 보장하며 투수코치로 영입하려 했다.


그러나 선동열은 자신이 가장 존경하고 믿고 따랐던 스승 김인식 감독이 야인의 길로 들어선 데 대해 죄책감을 갖고 있던 상황에서 고려대 선배이기도 한 이광환 LG 감독까지 밀어내는 모양새가 부담이 돼 LG의 러브콜을 고사했다.


그러자 삼성 김응용 감독이 “내 밑에서 수석코치로 현장 지도자 경험을 쌓고 여기서 감독을 하라”며 해태 시절 제자인 선동열을 불렀다.


LG에도 강한 후폭풍이 몰아쳤다. 이미 차기 감독으로 점찍고 선동열을 영입하려고 한 사실이 언론을 통해 보도된 마당에 이광환 감독의 리더십도 흔들릴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광환 감독은 구단 사무실을 찾아가 사의를 표명했다.


'선동열 핵폭탄'이 터진 뒤 KBO리그 전체 사령탑 지형도도 크게 바뀌었다. 두산은 김경문 배터리 코치를 감독으로 승격시켰고, LG는 이순철 작전·주루 코치를 감독으로 계약했다.




OB 베어스 시절 김인식 감독이 이명수에게 작전을 지시하고 있다. ⓒ두산베어스



◆김인식 시대가 남긴 것들


이로써 1995년 베어스의 제6대 사령탑으로 잠실에 온 김인식 감독의 시대는 막을 내렸다. OB 감독으로 4년(1995~1998년), 두산 감독으로 5년(1999~2003년). OB 베어스의 마지막 감독이자 두산 베어스의 첫 감독으로 9년간 베어스에서 거둔 성적은 1165경기, 576승556패33무였다. 베어스 역대 최장수 감독이자 최다 경기를 지휘한 감독으로 여전히 남아 있다.


그 이후 김경문 감독(2004~2011년 중도사퇴)과 김태형 감독(2015~2022년)이 8시즌 동안 두산 감독을 맡았다. 김태형 감독은 645승으로 김인식 감독의 승수를 넘어 베어스 역대 최다승 감독이 됐지만, 경기수는 1149경기로 김인식 감독보다 16경기 적었다.


덕장과 지장의 면모를 갖춘 김인식 감독은 베어스 역사에 많은 발자취를 남겼다. 1994년 선수단 집단이탈로 팀이 와해 직전까지 갔지만 감독으로 부임하자마자 특유의 인화력과 믿음의 야구로 선수단을 하나로 묶어 OB 감독 첫해인 1995년 곧바로 우승으로 이끄는 기적을 만들었다.


특히 1995년 레이스는 너무나도 극적이었다. 1위 LG에 8월말 6게임차나 뒤지던 상황에서 거짓말 같은 9월 스퍼트로 0.5게임차 뒤집기에 성공하며 한국시리즈에 직행했고, 4승3패로 롯데를 꺾으면서 팀의 두 번째 우승을 지휘해 ‘미러클 베어스’ 신화의 시작을 알렸다.




김인식 감독은 온화한 인품으로 선수단을 이끌면서 뚝심 야구와 미러클 베어스 신화를 만들었다. 사진은 투수 이혜천을 지도하는 모습 ⓒ두산베어스



OB 시절엔 대체적으로 투수력과 지키는 야구로 버티던 팀이었지만, 김인식 감독 부임 이후 팀 컬러에 변화가 생겼다. 1998년부터 ‘우동수 트리오’가 장착되고 두산으로 바뀐 1999년 신인왕 홍성흔이 입단하면서 두산은 호쾌한 공격 야구로 황금기를 개척했다. 여기에 도루왕 정수근을 필두로 ‘허슬두’의 밑바탕을 만들어갔다.


2000년 한국시리즈에서 3연패 후 3연승을 올리며 포기하지 않는 두산 특유의 뚝심을 살려냈고, 2001년에는 3위로 가을잔치에 나가 도장깨기를 하듯 언더독의 반란을 일으키며 우승까지 도달하는 기적의 드라마를 썼다. 특히 한국시리즈에서 9연승 무패 신화를 자랑하던 삼성 김응용 감독에게 첫 패배를 안긴 장면은 한국야구사에서도 일대사건으로 선명하게 기록돼 있다. 또한 야구팬들에게도 여전히 진한 추억으로 남아 있다.


“OB 베어스부터 시작해 두산 베어스는 아직도 나에겐 큰 추억이지. 좋은 선수들도 많이 만났고, 내 감독 인생 중에서도 가장 오래 있었던 팀이 베어스니까. 특히 1995년 첫 우승은 잊을 수 없어. 그 이후로도 일일이 열거하기 힘들 만큼 참 극적인 게 많았지. 선수들이 계속 트레이드되고 빠져나가면서 힘든 점도 있었지만, 여전히 난 두산 구단에 고마운 마음을 가지고 있어. 감독에서 물러날 때 부사장 자리까지 제안해 준 것은 그만큼 마지막까지 나를 배려해 준 거잖아.”






두산 주장 김태형과 타이론 우즈가 김인식 감독에게 1000경기 출장을 기념해 꽃다발을 전하고 있다. 김태형은 훗날 김인식 감독을 넘어 두산 역대 최다승 감독이 된다. ⓒ두산베어스





김인식 감독은 베어스에서만 9시즌을 지휘해 여전히 구단 역사상 최장수 감독으로 기록돼 있다. ⓒ두산베어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