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년 12월, 호르몬을 시작하며 결심한 게 있다.
외모에 너무 집착하지 말자. 평범한 여성의 삶 이상의 것을 바라지 말자.
이마, 눈, 코, SRS. 그리고 필요 시 복부 거상 정도만. 4년 안에 천천히 하기.
평범한 여성의 모습을 갖기 위해 다이어트에 박차를 가했다.
건강해져야 했기에 고강도 근력 운동도 마다하지 않았다.
돈도 최소 월 150은 꼬박꼬박 저축했다.
친한 친구들에겐 모두 사실을 밝혔지만, 당연히 커밍아웃을 할 수 없는 사람도 있었다.
커밍아웃할 수 없는 인연들이 월요일부터 일요일까지 모두 끼어 있었기에, 나는 묵묵히 남자를 계속 연기했고
언젠가 찾아올 여성으로서의 삶을 위해 차근차근 준비하며 세월을 보냈다.
어느덧 찾아온 겨울.
살도 어느 정도 빠졌고, 얼굴도 이전에 비해 많이 예뻐졌다.
자신감이 생긴 나는 옷을 전에 비해 중성적으로 입어 보기로 했다.
주변 사람들은 그냥 패션이 조금 바뀌었구나 정도로, 깊게 생각하지 않는 듯 했다.
첫 패싱은 24년 11월이었다.
같은 달 두 번째 패싱도 경험했다.
봄까지 셀 수 없을 정도로 패싱이 되었다.
패싱은 익숙한 것이 되었다.
지정 성별로 인식되는 경우도 있었다.
그래도 호르몬 요법만 진행중인 내게는 당연한 일이었다.
그런데 패싱이 익숙해 질수록 지정 성별로 인식되는 게 더더욱 무서워지더라.
다시 봄이 되었고, 옷은 얇아졌다.
거리의 모두가 원하는 패션을 두르고 가감 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너무나 부러웠지만, 나는 여전히 남성으로서 사회적 역할을 수행해야 했고
겨울 때처럼 중성적인 옷을 입고 남자라고 우기기엔 내 몸은 많이 바뀌어 있었다.
어쩔 수 없이 남성적인 아우터로 몸을 가렸다.
다시금 지정 성별로서 인식되는 상황이 점점 늘어났다.
남자로 인식될 때마다 가슴이 찢어지게 아팠고, 이런 생활을 몇 년이나 더 해야 한다는 게 너무 두려웠다.
거울 속의 내 모습이 점점 괴물처럼 느껴졌다.
성형 플랜이 점점 비현실적이게, 과하게 변해갔다.
하루라도 빨리 성형과 정정을 마치고 싶어 미칠 것 같았다.
화장 없이는 나갈 수 없게 되었다.
밖에서 목소리를 내는 걸 꺼리게 되었다.
활력도 줄었고, 활동량도 줄었다.
일상 생활 자체가 버거워졌다.
이번 주 월요일에 이르러선 거의 인사불성이 되었고, 절망감에 목요일까지 혼자 있을 때마다 울기만 했다.
이렇게 자주 운 건 트랜지션 시작 이후로 처음이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된 건가 싶더라.
금요일에 겨우 제정신이 되어 뭐가 잘못된 건지 찬찬히 되돌아보았다.
되돌아 보니 그 잘못된 게 바로 나더라.
잠깐이나마 손에 들어왔던 패싱에 집착해 이성과 여유를 잃고 있었다. 그것도 상당히 예전부터 그랬던 것 같다.
난 내가 어디에 잘 휘둘리지 않을 줄 알았는데 외모정병이란게 겪어보니 장난없더라.
어제부터는 다시 초심을 잡아보려고 애쓰고 있다.
'Regain Control'이라는 노래가 갑자기 떠오르더라.
예전에 리듬게임에서 처음 들었던 노래고 가사는 기억이 안 나는데, 왠지 딱 지금의 나를 위한 내용일 것 같았다.
오랜만에 유튜브에서 찾아 들어봤다.
아무 상관 없는 내용이더라.
그래도 노래는 좋으니까 됐닼ㅋㅋㅋㅋ
잘 추스려 봐야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