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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의 베팬알백] <62편> 정규시즌+올스타전+KS MVP…역대 최고 외국인타자 타이론 우즈 이야기
2023-08-07
타이론 우즈가 1999년 구단 시무식에서 고사상에 오른 돼지의 코에 돈을 꽂아 넣고 있다. 우즈는 역대 최고의 외국인타자로 꼽힌다. ⓒ두산베어스
『타이론 우즈(두산)가 한국야구사에 새로운 발자취를 남겼다. 우즈는 28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프로야구 한국시리즈에서 두산이 4승2패로 우승컵을 안은 뒤 실시된 기자단 투표에서 총 59표 중 55표의 몰표를 얻어 팀 동료 정수근(3표)과 홍성흔(1표)을 압도적 표차로 따돌리고 한국시리즈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됐다.』 <연합뉴스 2001년 10월 28일자>
2001년 한국시리즈 최고 영웅은 두산 타이론 우즈였다. 우즈는 1998년 정규리그 MVP, 2001년 올스타전 MVP에 이어 KBO 역사상 최초로 MVP 3관왕을 달성하는 역사를 썼다.
[베팬알백-베어스 팬이라면 죽기 전에 알아야 할 100가지 이야기] ‘시즌2-두산 베어스 시대’ 12번째 주제는 역대 최고의 외국인타자로 평가받는 우즈의 MVP 3관왕 달성과 그에 관한 추억 이야기다.
타이론 우즈는 빠르게 한국 문화에 적응해 나갔다. 아내 셰릴 블랙 우즈와 한복을 입고 기념사진을 찍었다. ⓒ두산베어스
◆ 1998년 외국인 최초 정규시즌 MVP
“젓가락질하는 방법을 딱 한 번 설명해줬는데 단 한 번만에 100% 완벽하게 사용하더라고요. 한국사람보다 더 젓가락질을 잘해요. 그만큼 적응력이 빨랐어요. 저는 그것부터 생각납니다.”
외국인선수 제도가 처음 도입됐을 때 통역을 맡았던 조성일 전 두산 베어스 운영2팀 부장은 우즈에 대한 옛 추억을 떠올리며 웃었다.
1998년 1월. 당시 IMF(국제통화기금) 사태가 터지면서 KBO리그 각 구단들은 해외로 스프링캠프를 떠날 수 없었다. 두산은 그래서 창원에서 캠프를 진행하기로 했다.
스프링캠프에 앞서 조 부장은 두산 최초 외국인선수로 영입된 타이론 우즈와 에드가 캐세레스를 경기도 이천에 있는 OB맥주 공장으로 데려가 견학을 시켰다. 그해까지 OB맥주는 두산그룹의 주력 계열사였다.
식사 시간이 되자 우즈에게 젓가락을 사용하는 방법을 설명했다. 그런데 우즈는 놀랍게도 한 번만에 완벽하게 젓가락질을 해내는 게 아닌가.
“한국인도 수없이 연습해도 젓가락질 못하는 사람 많잖아요. 그런데 우즈는 100% 완벽했어요. 그게 야구하고 연관성이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손으로 하는 건 뭐든 잘하겠다는 느낌이 들더라고요. 한국 적응력은 빠르겠구나 싶었죠. 캐세레스는 젓가락을 사용해본 적이 있다고 하더니 아무리 설명해도 안 되더라고요. 결국 어린이처럼 쥐더라고요.”
조 부장은 우즈의 손재주와 적응력에 깜짝 놀랐다.
메이저리그 무대를 경험해 보지 못하고 트리플A까지만 활약한 선수. 그러다 보니 스포트라이트에서 비켜나 있었다. 몸값도 상한선(12만 달러에) 못 미치는 9만4000달러(계약금 2만 달러+연봉 7만4000달러)만 받았다.
1998년 KBO가 처음으로 외국인선수 제도를 도입했을 때 우즈는 2라운드(전체 11번)에서 OB 베어스에 지명된 선수였다. 당시는 지금처럼 구단이 자유롭게 외국인선수와 계약하는 시스템이 아니었다. 트라이아웃 캠프를 열어 최근 3년간(1995~1997년) 성적 역순으로 1라운드를 지명했다. 그리고는 1라운드 최하위 지명 구단이 우선권을 갖는 ‘ㄹ’ 자 지명 방식을 택했다.
쌍방울이 재정난으로 외국인선수 선발을 포기한 가운데 7개 구단만 지명에 나섰다. 당시 전체 1순위 지명권을 가진 현대 유니콘스는 투수 조 스트롱을 호명했다. 이어 2순위의 한화 이글스가 마이크 부시를 지명했다. 부시는 1996년 LA 다저스 시절 박찬호와 한솥밥을 먹었을 정도로 경력 면에서 가장 화려한 타자였다. 그러나 한국야구를 얕보는 태도로 일관하다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성적(76경기 타율 0.213, 10홈런, 28타점)만 남긴 채 퇴출됐다.
이에 반해 우즈는 단번에 젓가락질에 적응한 것처럼, 한국에서 성공하기 위해 뭐든지 다 받아들였다. 특타(특별타격훈련)도 불사하고, 언어소통을 위해 한국어 테이프를 사서 들을 정도로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더니 첫해 KBO리그 단일시즌 최다홈런 신기록 작성과 함께 외국인선수 최초로 정규시즌 MVP까지 차지하는 대역사를 썼다.
우여곡절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베팬알백] ‘시즌1-OB 베어스 시대’ 마지막 50번째 이야기에서 소개했듯이, 우즈는 1998년 정규시즌 개막전(4월 11일 광주 해태전)에서 5번 1루수로 선발출장한 뒤 2회초 데뷔 첫 타석에서 홈런포(상대투수 이대진)로 강렬한 신고식을 했다.
그러나 바깥쪽 공과 변화구에 약점을 드러내면서 시즌 초반 슬럼프에 빠지기도 했다. 워낙 힘이 좋아 '맞으면 홈런'이었지만 맞지 않는 게 문제였다. 성급한 전문가들과 팬들 사이에서는 “당장 퇴출하라”거나 “2군 보내라”는 목소리도 나왔다. 하지만 ‘믿음의 야구’를 펼치는 김인식 감독은 인내심을 발휘하며 뚝심 있게 우즈를 중심타선에 배치하고 때를 기다렸다.
두산 타이론 우즈가 2000년 9월 1일 감독 1000경기 출장을 달성한 김인식 감독에게 축하 꽃다발을 전하고 있다. 우즈에게 김인식 감독은 인생의 스승이었다. ⓒ두산베어스
185㎝의 작지 않은 키와 팔길이, 보통 타자보다 2인치 정도 긴 35인치짜리 무거운 방망이(무게 920g)를 사용해 바깥쪽 공 커버리지는 매우 넓었다. 게다가 배트 노브(knob·방망이 끝에 달린 둥근 손잡이)를 왼손바닥 안에 감싸 쥐는 독특한 타법. 홈플레이트에서 다소 멀리 떨어져서 치기는 했지만 바깥쪽을 충분히 커버할 수 있는 우타자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초반에 바깥쪽 공에 약점을 보인 건 엄밀히 말하자면 KBO리그의 바깥쪽 스트라이크존에 애를 먹었기 때문이다. 의외로 선구안을 갖춘 우즈는 웬만한 볼에는 배트를 휘두르지 않았다. 그러나 미국에서 경험해온 것과는 달리 바깥쪽 공에 스트라이크 판정이 후했다. 한두 개 빠진 공도 자꾸 스트라이크 판정을 받자 나중에는 바깥쪽으로 형성되는 공에는 그냥 휘두를 수밖에 없었다.
한번은 스스로 바깥쪽으로 벗어난 볼이라고 판단한 공이 스트라이크로 판정되자 심판에게 자신의 긴 방망이를 건네며 “한번 타석에서 쳐 보라”며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기도 했다.
그러나 스스로 변했다. 자신이 한국의 스트라이크존에 적응하려고 노력하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곧바로 괴력의 홈런포를 가동했다. 4월 4개의 홈런으로 시작해 5월에 6개의 홈런포를 추가했다. 6, 7, 8월엔 7개씩의 홈런을 생산해 시즌 31호를 기록했고, 9월엔 무려 10방을 몰아쳐 시즌 41호에 도달했다.
41개의 홈런은 KBO리그 전설의 홈런왕 장종훈(빙그레 이글스)이 1992년 작성한 홈런수와 타이 기록. 당시 41홈런은 장종훈 외에는 누구도 범접하기 힘든 신의 영역처럼 여겨지던 시절이다.
우즈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10월 1일 잠실 현대전에서 당대 최고 투수 정민태를 상대로 4회말 무사 1루서 4구째 슬라이더(시속 130㎞)를 받아쳐 대망의 시즌 42호 홈런(중월 2점)을 날렸다. 비거리 140m로 1998년 공식기록 최장거리 홈런. 이로써 우즈는 마침내 장종훈을 넘어 KBO리그 한 시즌 최다홈런 신기록의 주인공이 됐다.
그해 삼성 이승엽과 다툰 홈런왕 경쟁은 지금도 회자되는 전설이다. 우즈는 8월 한때 7개 차이로 이승엽에게 뒤처졌지만, 곰 같은 우직한 발걸음으로 홈런수를 적립하더니 슬럼프에 빠진 이승엽(38홈런)을 막판에 추월하면서 홈런왕에 올랐다. 우즈는 1998년 3할대 타율(0.305)에 홈런왕(42개)과 타점왕(103개)을 차지했다. 그리고는 정규시즌 MVP 투표에서 그해 다승(18승)과 승률(0.750) 2관왕에 오른 LG 김용수와 경쟁을 벌였다. 우즈가 총 유효표 75표 중 26표를 얻어 김용수(24표)를 2표 차이로 앞섰지만 과반수에 미달돼 MVP 투표 역사상 최초로 2차 투표까지 진행됐다. 결국 우즈가 현장에서 진행된 2차 투표에서 유효표 50표 가운데 29표를 얻어 김용수(21표)를 제치고 영광을 안았다.
원년부터 수많은 ‘최초’ 역사를 써온 베어스답게 ‘KBO 최초 외국인선수 MVP’를 배출하는 순간이었다. 1982년 원년 최고 스타 박철순과 1995년 김상호에 이어 구단 역사상 3번째 정규시즌 MVP를 탄생시켰다.
1998년 외국인선수 최초로 정규시즌 MVP에 오른 타이론 우즈 ⓒ두산베어스
◆ 2001년 외국인 최초 올스타전 MVP와 한국시리즈 MVP
『두산 타이론 우즈(32)의 ‘코리안 드림’은 올스타전까지 이어졌다. 우즈가 2001 프로야구 ‘별중의 별’로 한여름 밤하늘에 높이 떴다. 17일 잠실구장에서 열린 올스타전에서 우즈는 1점홈런 포함, 4타수 4안타 1타점의 불방망이를 휘둘러 대망의 올스타 최우수선수(MVP)로 등극했다.』 <동아일보 2001년 7월 17일자>
2001년 올스타전은 우즈의 원맨쇼였다. 안방 잠실구장에서 펼쳐진 ‘별들의 잔치’ 올스타전에서 우즈는 1회초 시작하자마자 동군 3번타자로 등장해 서군 선발투수 김수경(현대)을 상대로 우월 솔로홈런을 날렸다. 그러자 동군 4번타자로 나선 이승엽이 백투백 홈런을 터뜨리는 귀한 장면을 연출했다.
우즈는 이날 1회 홈런 이후 3, 4, 8회 안타를 때려냈다. 4안타는 지금까지도 역대 올스타전 한 경기 최다안타 타이기록. 특히 7회엔 볼넷을 골라 나간 뒤 육중한 몸으로 상대의 허를 찌르는 기습 2루 도루까지 성공하는 ‘발야구’를 선보여 팬들의 박수갈채를 받았다.
이날 5차례 타석에 나서 4안타와 1볼넷을 기록하며 100% 출루를 기록한 우즈는 기자단 투표에서 총 56표 가운데 53표를 쓸어 담았다. 이로써 외국인선수로는 사상 최초로 올스타전 MVP까지 오르는 기쁨을 누렸다. 전년도 2000년에는 한국에 온 지 3년 만에 처음 올스타전에 참가해 홈런 레이스 1위를 차지하더니 다시 1년 만에 '가장 빛난 별'로 우뚝 섰다.
외국인선수 역사상 최초의 올스타전 MVP였다. 베어스 선수로는 1983년 신경식에 이어 역대 두 번째이자 두산으로 구단 이름이 바뀐 뒤로는 최초로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되는 역사를 썼다.
2001년 올스타전 MVP를 수상한 타이론 우즈 ⓒ두산베어스
◆2001년 KS MVP…사상 최초 MVP 트리플 크라운
우즈는 2001년 두산이 세 번째 한국시리즈 우승을 차지하는 데 일등공신이 됐다. 앞서 [베팬알백] ‘시즌2’ 두산 베어스 시대 ⑩편과 ⑪편에서 자세히 기술했듯이, 우즈는 1차전부터 홈런포를 가동하더니 3차전과 4차전 그리고 우승을 확정한 6차전까지 다련장포를 폭발시키며 당시 최강 전력을 자랑하던 삼성을 격파하는 데 선봉에 섰다.
우즈는 2001년 한국시리즈 6경기에서 4개의 홈런을 포함해 23타수 9안타로 타율 0.391, 8타점을 올리는 맹활약을 펼쳐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기자단 투표에서 총 59표 중 55표의 몰표를 얻어 팀 동료 정수근(3표)과 홍성흔(1표)을 압도적 표차로 따돌렸다.
이로써 우즈는 베어스 역사상 1982년 김유동, 1995년 김민호에 이어 3번째 한국시리즈 MVP의 주인공이 됐다.
아울러 KBO 역사에서 정규시즌(1998년), 올스타전(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모두 MVP에 오른 최초의 선수가 됐다. MVP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하는 새 역사를 썼다.
그 후 ‘바람의 아들’ 이종범이 우즈에 이어 사상 두 번째 MVP 트리플 크라운을 완성하게 된다. 이종범은 해태 신인 시절이던 1993년에 이어 1997년까지 두 차례나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했고, 1994년에는 정규시즌 MVP에 오른 바 있다. 이어 일본프로야구(NPB)에서 돌아온 뒤 2003년 KIA 소속으로 ‘미스터 올스타’에 선정돼 MVP 3관왕을 달성했다. 지금까지 정규시즌-올스타전-한국시리즈 3대 MVP를 모두 석권한 인물은 우즈와 이종범 2명뿐이다.
2001년 한국시리즈 MVP를 차지한 타이론 우즈가 포즈를 취하고 있다. 정규시즌-올스타전-한국시리즈 MVP 3관왕이 달성된 순간이다 ⓒ두산베어스
우즈는 이밖에도 아직도 깨지지 않는 갖가지 가을야구 홈런 기록도 작성했다.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만 홈런 4개를 터뜨렸다. 역대 단일 한국시리즈 최다 홈런 신기록. 1982년 OB 김유동, 1986년 삼성 김성래, 1997년 해태 이종범이 공동으로 보유하고 있던 3홈런을 역사의 뒤안길로 밀어냈다. 훗날 2014년 한국시리즈에서 삼성 야마이코 나바로가 4개의 홈런포를 가동해 우즈와 타이기록까지 작성했지만, 아직 이를 넘어선 기록은 나오지 않고 있다.
우즈는 1년 전 현대와 맞붙은 한국시리즈에서도 3개의 홈런을 때린 바 있다. 2001년 4개까지 합쳐서 한국시리즈 통산 7홈런. 이 역시 KBO 역사상 최다 기록이다. SSG 최정(2008년 1홈런, 2010년 2홈런, 2012년 1홈런, 2018년 1홈런, 2022년 2홈런)이 현재 우즈와 공동 1위가 됐다.
포스트시즌 전체로 영역을 넓히면 우즈는 가을야구에서 통산 13개의 홈런(준PO 1개, PO 5개, KS 7개)을 뽑아냈다. 이는 한동안 포스트시즌 통산 최다홈런 기록이었다. 그러나 이승엽이 일본 무대에서 돌아와 포스트시즌 통산 홈런수를 14개(준PO 2개, PO 6개, 한국시리즈 6개)로 늘리면서 우즈는 역대 2위에 랭크됐다. 3위가 박정권의 11개(PO 7개, KS 4개)다. 그만큼 우즈는 가을에도 깊은 인상을 남겼다.
◆ 우즈를 추억하며
“우~~즈! 우~~즈!”
두산 팬들은 우즈가 타석에 등장하면 하얀 막대풍선을 머리 위로 빙빙 돌리며 주술처럼 “우~~즈! 우~~즈!”를 외쳤다. 그러면 등번호 33번의 괴력의 타자는 공을 쪼갤듯한 파워풀한 타격으로 홈런포를 터뜨려 팬들의 응원에 화답한 뒤 홈플레이트를 밟기 전 오른손으로 성호를 긋고 입술에 갖다대는 세리머니를 펼쳤다. 우리가 우즈를 추억할 때 아련히 떠오르는 장면이다.
본명 타이론 윌리엄 우즈(Tyrone William Woods). 1969년생으로 1998년 한국에 올 때 나이는 29살이었다.
이제는 김태형(전 두산 감독)이 커튼 뒤로 우즈를 불러 혼을 낸 일화가 잘 알려졌지만, 우즈는 당시 경기 수훈선수로 선정돼 상금을 받으면 혼자 다 가져가려고 했다. 상금을 공평하게 동료들과 나눠 갖는 두산만의 관행에 거부감을 나타냈다. 김태형 주장은 통역을 대동하고 커튼을 친 뒤 “앞으로 네가 받은 상금은 전부 네가 가진다. 단, 다른 선수들이 상금을 탔을 때는 너만 빼고 나눠준다”고 하자 우즈는 그 자리에서 고개를 숙였다.
미국 플로리다에서 9남매 중 여덟째로 태어난 우즈. 그가 돈에 대해 집착했던 것은 어쩌면 어린 시절 겪었던 가난과 대가족의 생계를 책임지기 위한 본능이었는지 모른다.
[베팬알백] ‘시즌1-OB 베어스 시대’ 마지막 50번째 이야기에 소개했듯이, 우즈는 한국에 오기 전 가난한 마이너리거였다. 오죽했으면 OB에 지명된 뒤 조성일 통역이 자신의 전화기를 빌려 볼티모어에 있는 에이전트와 몸값 협상을 벌일 당시 통화가 길어지자 “전화요금 많이 나온다”며 “빨리 끊으라”고 재촉했을까.
2001년 한국시리즈에서 우즈가 호쾌하게 타격하는 모습을 그라운드 상공에서 찍었다. ⓒ두산베어스
우즈는 첫해의 성공을 발판 삼아 2002년까지 KBO리그 최초로 5년 연속 계약에 성공한 최초의 외국인선수가 됐다. 그러나 마지막 해인 2002년에는 앞선 4시즌에 비해 성적이 뚝 떨어졌다. 타율은 가장 저조한 0.256에 그쳤고, 25홈런 82타점에 그쳤다. 30개의 홈런과 100타점을 넘기지 못한 유일한 시즌이었다.
여기에도 일화가 있다. 2001년 우승 보너스가 화근이었다. 당시 곽홍규 단장은 포스트시즌을 앞두고 우즈를 불러 격려를 하면서 “우승을 하면 5만 달러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조금 더 힘을 내서 팀을 우승으로 이끌어달라는 주문이었다.
우즈는 한국시리즈 들어 실제로 맹활약을 펼쳤고, 팀을 우승으로 이끌며 한국시리즈 MVP에 올랐다.
문제는 그 다음이었다. 두산은 그해 운 좋게도 시즌에 앞서 10억 원에 달하는 우승보험을 처음 들었는데, 곧바로 우승을 하면서 재미를 봤다(보험사로서는 불운이었다). 우승보험 10억 원과 포스트시즌 배당금을 합쳐 진행된 논공행상. 그런데 우즈가 갑자기 토라지고 말았다. "제너럴 매니저(단장)이 약속한 5만 달러를 주지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이는 서로간의 오해에서 비롯된 일이었다. 구단에서는 당연히 22% 가량의 세금을 제한 뒤 우즈에게 입금했으나 우즈는 약속과 다른 금액이라는 주장을 했다. 문서로 남기지 않고 구두상으로 한 약속. 결국 ‘세전 5만 달러’냐, ‘세후 5만 달러’냐에 대해 미리 언급을 하지 않은 것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통장에 5만 달러가 아니라 3만 달러대의 보너스가 입금되자 우즈는 단장을 향해 “라이어(liar·거짓말쟁이)”라며 씩씩거렸다.
그 때문일까. 우즈는 2002시즌 들어 종전과 달리 의욕이 많이 떨어져 있었다. 태업설도 나왔다. 우즈는 시즌 도중 자신의 에이전트에게 일본행을 추진해 달라고 요구했다. 결국 우즈는 2001시즌 후 요코하마 베이스타스와 연봉 5000만 엔(당시 환율 약 5억3000만 원)의 조건에 일본프로야구(NPB)에 진출하게 된다.
KBO리그 5년간 우즈가 기록한 통산홈런 174개는 역대 외국인타자 최다 홈런 기록이다. 지금까지도 누구도 깨지 못하고 있다. 2위는 한화에서 7년(1999~2002년, 2004~2006년) 동안 활약한 제이 데이비스의 167홈런, 3위는 SK와 SSG에서 5시즌(2017~2021년) 활약한 제이미 로맥의 155홈런이다. 우즈가 대표적인 투수 친화적 구장인 잠실을 홈으로 쓰면서 이런 퍼포먼스와 기록을 냈다는 점에서 더 높은 평가를 받을 수밖에 없다.
2002년 어린이 팬들과 사진을 찍는 우즈. 우즈는 이제 50대 중반의 나이가 됐고, 이 어린이들도 이제 성인이 됐을 듯하다. ⓒ두산베어스
한국에서만 홈런왕에 오른 건 아니다. KBO리그보다 한 수 위인 NPB에서도 홈런의 전설을 썼다. 2003년 요코하마에 입단해 40홈런(요코하마 구단 역사상 최초 40홈런 타자)을 때리더니 이듬해 45홈런을 날리며 2년 연속 센트럴리그 홈런왕에 올랐다. 2005년 주니치 드래건스로 이적해 38홈런을 기록한 뒤 2006년에는 이승엽(요미우리 4번타자)과 홈런왕 경쟁을 펼치다 47홈런 144타점으로 센트럴리그 홈런왕과 타점왕을 차지했다. 우즈는 2008년까지 NPB에서 6년 동안 3차례나 홈런왕에 오르면서 통산 240홈런을 기록했다.
요코하마와 계약 당시 5000만 엔(당시 약 5억 원)이던 연봉은 수직 상승을 이어갔고, 주니치 시절엔 연봉으로만 6억 엔(약 60억 원)을 받았을 정도로 돈방석에 앉았다.
우즈는 2001년 두산 소속으로 KBO리그에서 우승한 뒤 2007년 주니치 시절엔 ‘적토마’ 이병규와 함께 NPB에서도 우승하며 성공시대를 열었다. 무엇보다 KBO와 NPB에서 홈런왕에 오른 최초의 선수로 이름을 남겼다.
KBO리그에서 활약한 역대 최고 외국인타자를 꼽으라면 펠릭스 호세, 제이 데이비스, 야마이코 나바로, 에릭 테임즈 등등을 떠올릴 수 있겠지만, 통산기록 면에서 우즈가 역대 최고의 외국인타자라는 평가에는 이견이 없다. 지난해 KBO가 출범 40주년을 맞아 야구 전문가와 팬 투표로 ‘레전드 40인’을 뽑았는데, 외국인선수로는 투수 더스틴 니퍼트와 함께 둘만 선정됐다. 우즈가 우리의 가슴과 추억 속에 남긴 임팩트는 강렬했다.
잠실구장 오른쪽 외야 관중석에는 항상 '우즈 홈런존'이 만들어졌다. 팬들이 이곳에 늘 플래카드를 펼쳐졌다. ⓒ두산베어스
이밖에도 우즈에 대한 추억은 많다. 두산 시절 잠실 홈경기 때면 우중간 외야석에는 항상 ‘WOODS HOMERUN’이라는 플래카드가 걸려있던 것도 잊을 수 없다. 처음엔 바깥쪽 공에 약점을 보였던 우즈지만 나중에는 오히려 밀어 쳐서 우중간을 넘기는 홈런을 많이 날렸기 때문이었다. 이 모든 것은 KBO리그에 대한 존중과 노력으로 만든 것이었다.
외국인선수들은 대개 한국식 문화인 고사에 대해 거부감을 나타내기도 한다. 그러나 “선수단 안전을 빌고 우승을 기원하는 의미”라는 설명을 들은 우즈는 먼저 나서서 돼지 코에 돈을 꽂아 넣어 웃음을 선사하기도 했다. 야구로 성공하려는 의지가 강해 평소엔 술 한 모금 입에 대지 않는 모범생이지만, 회식 자리에서는 폭탄주까지 사양하지 않을 정도로 친화력이 빼어났다.
불우이웃돕기를 위해 자신의 팬클럽과 함께 홈런 1개당 10만 원씩 적립하며 사랑을 실천하기도 했고, 그 시절 최고 인기를 구가하던 시트콤 ‘순풍 산부인과’에 카메오로 출연해 팬들에게 색다른 즐거움을 주기도 했다.
그의 아내 셰릴 블랙 우즈도 잊을 수 없다. 한국 팬들과 스스럼없이 지냈고, 신문에 난 우즈 기사를 모두 스크랩했다가 절친하게 지내는 한국 팬들에게 번역을 부탁해 우즈에게 알려줄 정도로 ‘내조의 여왕’다운 모습을 보였다.
김인식 감독이 고사를 지낸 뒤 우즈에게 막걸리를 먹여주고 있다. ⓒ두산베어스
무엇보다 우즈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우동수(우즈-김동주-심정수) 트리오’와 ‘우동학(우즈-김동주-심재학) 트리오’의 선봉에 서서 우리에게 홈런의 참맛을 제대로 알려줬다. 파괴력 넘치는 우즈의 홈런포 인해 KBO가 도입한 외국인선수 제도는 빠르게 성공적으로 정착할 수 있었다.
“우즈는 평소엔 짓궂고, 개구쟁이였어요. 팀에 융화도 잘 해서 외국인선수 같지 않았어요. 그렇지만 운동할 때는 무서웠어요. 지는 걸 싫어하고 승리욕이 대단했죠. 외국인타자들 중에 훈련을 게을리하는 선수도 많은데 우즈는 특타도 자청할 정도로 노력을 많이 했어요. 그만큼 노력하는 외국인선수는 보지 못했어요. 그런 노력 때문에 한국에서 성공했다고 봅니다.”
우즈에게 ‘코뿔소(Rhino))’라는 별명을 얻었던 김동주 얘기다. 그는 “지금도 가끔 우즈가 그리울 때가 있다”며 웃었다.
“1998년 같은 해 입단도 했고 힘들 때 서로 의지를 많이 했어요. 3번타자와 4번타자를 맡다 보니 얘기도 많이 했구요. 상대 배터리 볼배합이나 상대투수 구종 등에 대해서도 서로 알려주고 그랬죠. 한동안 메일도 주고 받았을 정도로 친하게 지냈는데 요즘엔 뭐하고 살고 있나 모르겠네요.”
우즈는 2008시즌 후 일본 주니치와 재계약에 실패한 뒤 은퇴해 고향인 미국 플로리다로 돌아가 부동산 사업을 하며 산다는 소식이 전해지기도 했다.
전설의 '우동수 트리오' 우즈(가운데)-김동주(오른쪽)-심정수가 한 자리에 모였다. 우동수 트리오는 상대팀에게 공포의 대상이었다. ⓒ두산베어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 / OBS라디오 프로야구 해설위원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