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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재국의 베팬알백] 별책부록 <5> 김우열부터 양석환까지…베어스 토종 우타거포 계보와 최다홈런 이야기

2024-09-19

두산 베어스 토종 우타거포 역대 한 시즌 최다 31홈런 기록의 주인공들. 1999년 심정수, 2000년 김동주, 2024년 양석환(왼쪽부터). ⓒ두산베어스


“네, 지금의 이 홈런은 어제의 경기만큼 굉장히 의미가 있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9월 17일 잠실구장. 두산 양석환이 4-2로 앞선 4회말 삼성 선발투수 황동재를 상대로 좌월 투런포를 쏘아올렸다. 그러자 MBC스포츠플러스의 김선우 해설위원은 이같은 코멘트로 상황을 설명해 나갔다.


김 위원의 말처럼 양석환의 홈런은 의미가 있었다. 이날 승부의 무게추를 두산에게로 향하게 만드는, 그런 값진 의미가 있었다. 흔한 말로 승부에 쐐기를 박는 홈런이었다. 이 홈런을 발판 삼아 두산은 8-4 승리를 거뒀다.


양석환은 전날(16일) 잠실 키움전에서도 홈런을 쳤다. 연장 10회말 천금 같은 동점 솔로홈런. 앞서 연장 10회초 점수를 내주면서 팀이 낭패감에 휩싸일 때 터진 홈런포였고, 패배의 그림자를 걷어내고 승리에 대한 자신감과 활력을 불어넣는 아치였다. 결국 연장 10회말 정수빈의 끝내기 희생플라이로 팀은 5-4로 역전승했다.


시즌 30호와 31호 홈런. 때에 따라서는 ‘이게 뭐 대수냐’ 싶을지 모르겠다. 홈런 좀 치는 타자들이 해마다 기록하는 숫자쯤일 수도 있겠다. 이 수치를 대할 때 별다른 감흥이 없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두산 베어스 구단 역사에서 토종 우타자로 본다면, 30호와 31호는 다소 각별하다. 전설과 마주하는 숫자들이다.


그러니까 이 홈런의 가치는 단순히 승부에만 국한할 수 없는, 역사적 의미까지 내포하고 있었다. ‘헤라클레스’ 심정수와 ‘두목곰’ 김동주를 소환하는 베어스 구단의 역대 우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 타이기록이기 때문이다. 두산뿐만 아니라 LG 구단까지 합쳐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팀의 한국인 우타자 최다홈런 기록이기도 하다.


[베펜알기-베어스 팬이라면 알아야 할 기록 이야기] 이번 주제는 양석환의 홈런 기록으로 돌아보는 베어스 토종 우타자들의 홈런 역사와 우타거포 계보 이야기다.


두산 베어스 토종 우타거포의 낭만을 안겨준 심정수(왼쪽)와 김동주. 동갑내기 두 친구는 외국인타자 타이론 우즈와 함께 '우동수 트리오'를 형성해 베어스를 홈런 군단으로 만들었다. ⓒ두산베어스


◆ 심정수 김동주 이후 24년…양석환, 아홉수 뚫고 전설과 나란히


사실 양석환은 시즌 서른 번째 홈런을 치기 전까지 지독한 아홉수에 시달리고 있었다. 시즌 29호 홈런이 터진 것이 8월 31일 잠실 롯데전. 하지만 9월 들어서는 좀처럼 홈런포를 가동하지 못했다. 날짜로는 보름, 경기수로는 6경기 동안 침묵했다.


전설은 쉽게 곁을 내주지 않았다. 그러다 16일(7경기) 만에 시즌 30홈런 고지를 허락하더니 이튿날 곧바로 시즌 31호까지 문을 개방했다.


시즌 30홈런은 양석환 개인적으로도 생애 처음 밟아보는 고지였다. 종전 2021년 28홈런이 개인 한 시즌 최다홈런 기록이었다.


시즌 31홈런은 큰 의미가 있다. 1999년 ‘헤라클레스’ 심정수가 두산 베어스 시절 토종 타자로는 최초로 31홈런을 기록했고, 2000년 ‘두목곰’ 김동주가 타이기록을 작성했다.


외국인 타자를 제외하면 지금까지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토종 우타자 중에 이 숫자를 넘긴 선수는 없었다. 이들 외에 24년간 함락을 허락하지 않던 불가침의 영역이었다.


그런데 양석환이 ‘헤라클레스’와 ‘두목곰’과 어깨를 나란히 하게 됐다. 이제 홈런 한 방만 더 날리면 전설의 우타거포 심정수와 김동주를 밀어내고 단독 1위에 오르게 된다.





잠실야구장은 KBO리그 10개 구단 중 구장 규모가 가장 커 홈런이 잘 나오지 않는 구장으로 유명하다. ⓒ두산베어스


◆ 잠실구장 거포에겐 불리한 홈런 환경


잠실구장은 KBO리그 10개 구단 홈구장 중 그라운드 규모가 가장 크다. 홈플레이트에서 좌우 펜스까지 100m, 중앙 펜스까지 125m에 이른다.


이렇다 보니 잠실구장을 홈구장으로 사용하는 두산 베어스(OB 베어스 포함)와 LG 트윈스(MBC 청룡 포함) 역대 타자들은 홈런 생산에 불리함을 안고 싸워야했다.


좌·우 타자, 외국인 타자를 막론하고 두산 선수 중 지금까지 30홈런 이상 기록한 타자는 5명뿐이다.


그 중 특출난 2명이 사실상 30홈런 이상 기록을 독점하다시피 했다. 김재환이 2018년 44홈런으로 홈런왕에 올랐고, 2016년 37홈런, 2017년 35홈런, 2020년 30홈런으로 4차례나 30홈런 고지를 넘어섰다. 여기에 레전드 외국인 타자 타이론 우즈가 4차례(1998년 42홈런, 2000년 39홈런, 1999년 34홈런, 2001년 34홈런) 달성한 바 있다.


이 둘을 제외하면 1999년의 심정수, 2001년의 김동주 그리고 2024년의 양석환 3명이 추가될 뿐이다.


사정이 이렇다 보니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선수 중 홈런왕을 차지한 타자도 딱 3명밖에 없었다. 1995년 OB 베어스의 김상호(25홈런)와 1998년 OB 베어스의 타이론 우즈(42홈런), 2018년 두산 베어스의 김재환(44홈런)뿐이다. MBC 청룡과 LG 트윈스 소속 선수가 홈런왕에 오른 적은 없었다.


베어스의 원조 우타거포 김우열의 타격 모습. 1980년대 홈런을 추억하자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인물이다


◆ 1980년대 ‘우타거포’의 상징 김우열


두산 베어스(OB 베어스 포함)는 ‘KBO 원년 우승팀’이라는 빛나는 훈장을 달긴 했지만, 사실 1980년대까지는 홈런과 거리가 먼 구단이었다. 1982년 팀홈런이 57개로 삼미 슈퍼스타즈(40홈런) 다음으로 적었다. 1987년 팀홈런 30개로 최하위로 처지기도 했다.


그런 가운데에서도 베어스의 홈런 자존심을 지켜준 선수가 있었다. 주인공은 김우열이었다. 프로야구 출범 이전 실업야구를 평정했던 홈런왕 출신. 하지만 1982년 프로야구 출범 당시 나이는 33세였다. 20대 후반이면 은퇴를 준비하던 시절. 윤동균과 최고령 선수였기에 이미 선수로선 환갑을 지난 나이였다. 33세라면 요즘으로 치면 43세처럼 느껴지던 시절이다.


김우열은 1982년 전기리그에서만 11홈런으로 홈런 1위를 달렸지만 부상으로 그해 13홈런에 그쳤다. 왼쪽은 삼성 거포 포수인 이만수. ⓒ두산베어스


그래도 홈런 생산 기술은 녹슬지 않았다. 헛스윙을 하면 입을 쩍 벌린다고 해서 ‘아가리’ 혹은 ‘죠스’라는 별명으로 불렸던 구레나룻 아저씨. 체격(키 170㎝)은 작았지만 호쾌한 홈런방망이를 휘둘렀고, 김봉연과 이만수 등 후배 거포들 틈바구니에서 우리에게 알싸한 홈런의 맛을 선물했다.


김우열은 원년 전기리그만 하더라도 홈런 11개로 1위를 달려 초대 홈런왕에 대한 기대감을 부풀렸지만, 어깨 부상(6월 22일 삼성전 홈스틸을 감행하다 포수 이만수와 충돌) 후유증으로 그해 13홈런(4위)으로 마감한 게 아쉬울 따름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1980년대를 통틀어서 베어스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으로 남았다. 역설적으로 베어스에서 김우열을 능가하는 홈런타자가 배출되지 않았다는 방증이기도 하다. 김우열은 1984년 12홈런을 기록하면서 다시 한 번 두 자릿수 홈런을 때렸지만 원년의 기록을 넘어서지 못했다.


대전에서 출발한 OB 베어스는 1985년 서울(동대문구장)로 입성한 뒤 1986년부터 잠실구장을 LG와 함께 공동으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재일교포 송재박이 1988년 13홈런으로 김우열과 타이기록까지 갔지만 더 전진하지는 못했다.




임형석은 호리호리한 몸매였지만 1992년 26홈런으로 서울팀 최초 20홈런 시대를 개척했다. ⓒ두산베어스


◆ 1990년대 서울홈런왕 임형석-잠실 최초 KBO 홈런왕 김상호


1990년대 들어서면서 우타거포가 나타났다. 1990년 개막을 앞두고 재일교포 투수 최일언을 LG에 내주고 받아온 김상호가 이적 첫해 14홈런을 날리며 김우열의 기록을 넘어 베어스 구단은 물론 서울 팀의 한 시즌 최다 홈런 신기록을 작성하게 된다.


뒤이어 1992년 예상 못한 반전이 일어났다. 비쩍 마른 체형의 ‘헐렝이’ 임형석이 입단 3년차에 무려 26개의 홈런을 날렸다. 그해 홈런 부문 3위에 올랐다. 구단 역사상 최초 20홈런 타자의 탄생. 임형석은 그해 8월 23일 잠실 롯데전에서 구단 역사상 최초 사이클링히트를 완성하기도 했다.


하지만 히트곡 한 개만 유행시키고 사라지는 ‘원 히트 원더(one-hit wonder)’ 가수처럼 임형석은 그해의 반짝 활약이 선수 생활의 처음이자 마지막 불꽃이었다.


'터미네이터' 김상호는 호쾌한 스윙으로 1995년 25홈런을 기록하면서 서울팀 최초 홈런왕에 올랐다. ⓒ두산베어스


그리고 1995년 마침내 구단 역사상 첫 홈런왕을 탄생시키게 된다. 1990년 트레이드로 데려온 ‘터미네이터’ 김상호가 25홈런을 날리면서 서울 팀 최초 홈런왕과 타점왕(101)에 오르면서 MVP까지 차지하는 기염을 토했다. 김상호는 이듬해에도 20홈런을 기록하면서 구단 최초 2년 연속 20홈런 타자의 역사를 썼고, 1990년대 서울팀 우타거포의 상징 인물이 됐다.


타이론 우즈는 외국인선수 제도가 도입된 1998년 KBO 홈런 신기록 42홈런을 때리며 홈런왕에 올랐다. ⓒ두산베어스


◆심정수 김동주 우즈…우동수 트리오의 시대


김상호는 홈런왕에 오르긴 했지만 임형석이 보유한 구단 한 시즌 최다 홈런 26개를 깨는 데는 실패했다.


이 기록을 넘어선 것은 1998년. 외국인선수 제도 도입 첫해 OB 베어스 유니폼을 입은 외국인 우타자 타이론 우즈가 주인공이었다. 우즈는 1998년 42홈런으로 KBO 한 시즌 최다홈런(종전 장종훈 41홈런) 신기록을 썼고, 이후에도 3차례 더 30홈런 이상을 때리면서 베어스의 간판 거포로 자리 잡았다. 2002년까지 5년간 작성한 통산 174홈런은 지금까지 깨지지 않는 역대 외국인 최다 홈런 기록이기도 하다.


하지만 외국인 선수를 제외하더라도 베어스는 그 시절 최고의 거포, 특히 우타거포를 두 명이나 보유하게 된다. 바로 심정수와 김동주다.


'헤라클레스' 심정수는 '운동 중독증'에 걸릴 만큼 몸 만들기에 열중하면서 홈런타자로 거듭났다.


1994년 고졸(동대문상고)로 곧바로 프로에 뛰어든 심정수가 입단 2년째에 21홈런을 날려 원조 ‘소년장사’의 별명을 얻으면서 차세대 거포로 주목 받았다. 이어 1998년 대졸(배명고-고려대) 김동주가 입단하자마자 24홈런을 날리면서 구단 역대 신인 최다홈런을 기록했다.


동갑내기 심정수와 김동주는 베어스를 대표하는 토종 우타거포 쌍두마차로 자리매김하면서 선의의 경쟁을 펼쳤다.


베어스 토종 타자 중 가장 먼저 30홈런을 돌파한 선수는 심정수였다. OB 베어스에서 두산 베어스로 바뀐 첫해인 1999년 31홈런을 날렸다. 그러자 이에 뒤질세라 이듬해인 2000년 김동주가 31홈런을 뽑아내면서 타이기록을 만들었다.


'두목곰' 김동주는 2000년 31홈런을 기록하면서 전년도 심정수의 홈런수와 타이기록을 세웠다. 통산 273홈런을 기록하면서 잠실 우타거포의 상징 인물이 됐다. ⓒ두산베어스



◆ ‘마의 벽’ 31홈런 넘어…잠실 우타거포 새로운 이정표


1990년대까지만 해도 오른손잡이는 우타자, 왼손잡이는 좌타자가 되는 게 자연스러운 길처럼 여겨졌다. 간혹 ‘우투좌타’나‘스위치히터’가 나타나긴 했지만 대세를 이루지 못했다.


한국 프로야구에 우투좌타가 본격적으로 득세하기 시작한 것은 2000년대 접어들면서부터다. 야구는 좌타가가 1루까지 달리는 데 유리한 스포츠. 박용택 해설위원 또래의 선수들이 1990년대부터 그런 시대적 흐름을 타고 성장해 2000년대부터 한국프로야구에서 우투좌타 전성시대를 열기 시작했다.


처음엔 발 빠른 선수들이 우투좌타의 길로 들어섰지만, 점차 우투좌타 거포들도 생겨나기 시작했다. 김재환이 대표적이다.


그러다 보니 현대 야구에서는 오히려 우타거포에 대한 갈증이 커지고 있다. 잠실구장을 홈으로 사용하는 두산과 LG는 늘 토종 우타거포에 대한 로망을 안고 있다.



그나마 두산은 1990년대 후반 등장한 심정수와 김동주로 인해 30홈런을 친 토종 우타거포를 보유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LG는 지금까지 한 명도 없다. 2010년 포수 조인성이 기록한 28홈런이 한국인 우타자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 2위가 채은성이 LG 유니폼을 입고 있던 시절이던 2018년의 25홈런이다.


‘우투좌타’들이 득세하는 현대 야구. ‘우타거포’가 오히려 낭만처럼 느껴지는 시대다. 특히 잠실구장을 사용하는 팀으로선 더욱 그렇다.


잠실 우타거포의 전설 심정수 김동주가 작성한 ‘시즌 31홈런’을 따라잡는 데까지 무려 24년이 걸렸다. 이제 양석환이 우타거포의 새로운 이정표에 도전한다.


두산 우타거포 양석환이 9월 17일 시즌 31호 홈런을 날린 뒤 좌타거포 김재환과 하이파이브를 하고 있다. 1999년 심정수와 2000년 김동주가 작성한 잠실 토종 우타자 최다홈런 타이기록을 세운 양석환은 이제 새 역사에 도전한다. ⓒ두산베어스


이재국


야구 하나만을 바라보고 사는 ‘야구덕후’ 출신의 야구전문기자. 인생이 야구여행이라고 말하는 야구운명론자.


현 스포팅제국(스포츠콘텐츠연구소) 대표


전 스포츠서울~스포츠동아~스포티비뉴스 야구전문기자 / SPOTV 고교야구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