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 들어가면서
내가 블랑카의 「트랜스페미닌 다양체」(https://blog.naver.com/queer_fly/223376428243)라는 글에 대해 무엇을 하려고 하는지부터 설명해야 할 것 같다. 우선, 내가 보기에 「트랜스페미닌 다양체」의 목적은 단지 시디나 러버와 트랜스젠더가 연속적이라고 얘기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시디-러버 등의 집단과 트위터 등에서의 트랜스젠더 집단 사이에 더 많은 연결을 수립함으로써 상호 이해를 증진하자는 것이다. 그런데 그것을 「트랜스페미닌 다양체」는, (미분)기하학에서 빌려온 개념적 은유를 통해 묘사하고 있다. (그렇기에 이는 양적 접근이나 방법론과는 조금 다르다고 나는 본다)
이에 대해 말해볼 수 있는 것으로는 무엇이 있을까? 먼저 시디와 러버와 트랜스젠더 등등과 관련된 사실적 차원에 대해 얘기할 수도 있고, 두 번째로는 글의 주장(더 많은 연결을 수립함으로써 상호 이해를 증진하자)에 대해 검토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내가 하려는 것은 그러한 것들이 아니다. 대신 나는, 「트랜스페미닌 다양체」가 사용하는 개념적 은유를 보다 명료하게 정리해 보려고 한다. 이는 어느 정도는 주해 작업에 비견될 수도 있을 것이다.(다만 그 개념적 은유가 어느 정도로 설득력이 있고 성공적인지에 대해서까지는 그다지 논하지 않았다. 아래의 4절에서 'p로부터 q까지 연결이 있다'에 대해, 만약 p와 q가 너무 멀다면 연결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이해의 가능성은 미약해질 것 같다고 누군가는 생각할지도 모르지만, 여기서는 그런 것들에 대한 논의를 더 진행하지는 않았다.)
한편, '수학으로부터 빌려온 개념적 은유'라는 것 일반이나 그 자체에 대해서도 여러 관점이 있을 수 있겠다. 그에 대해서 여기서 따로 논의하지는 않고, 특별히 긍정(또는 열광?)하거나 특별히 부정(또는 냉소?)하거나 하지 않으면서 찬찬히 살펴보려고 한다. 다만, 과학적 진술과 은유적 표현이 흔히 생각하는 것만큼 배치되는 것은 아니라는 주장이 있음을 말해 두고 싶다.
아울러, 나 역시 미분기하학의 내용에 대해 착오를 범할 수 있으므로 혹시 내가 잘못 생각하거나 쓴 곳이 있다면 알려주면 좋겠다. 또한 1절에서 4절까지 「트랜스페미닌 다양체」가 사용하는 개념적 은유의 "중심부"에 대해 얘기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때때로 「트랜스페미닌 다양체」의 내용을 내 방식대로 재진술하기도 할 것이다. 마지막 5절이 약간의 후기이고 그 다음에는 "중심부"는 아니지만 몇 가지 말해 볼 만한 것들을 일종의 부록으로 실었다.
1.
「트랜스페미닌 다양체」에서는 '여성성을 체현하고 싶음'에 해당하는 가능한 정체성들의 공간을 생각해 보라고 제안한다. 공간 개념에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예를 들어 표본공간 같은 것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다양체라는 것도 있다. 그렇다면 여기서 제안하고자 하는 그 공간은 어떤 종류에 해당할까. 글쓴이는 다양체를 선택하였고, 그렇게 해서 트랜스페미닌 다양체 M이 등장한다.
그렇다면 각각의 트랜스펨('여성성을 체현하고 싶음'에 해당하는 사람들)들은 트랜스페미닌 다양체 M 위의 점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가진다고 말할 수 있겠다. 그리고 이는 트랜스펨의 집합 P로부터 트랜스페미닌 다양체 M으로의 함수 Φ를 통해 나타내어질 수 있다. 트랜스펨 p의 정체성은 점 Φ(p)가 되는 식으로 말이다. 이 때 P는 유한집합이지만 M은 그렇지 않다.
한편, 여기서 다음을 덧붙이는 게 좋겠다. "사람 p와 q의 정체성이 가깝다"와 "사람 p와 q가 가깝다"는 같지 않다는 것이다. 정체성이 가까운 두 사람이 서로를 모른 채 각기 다른 자리에서 살아가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거꾸로, 물리적인 거리는 가까우면서도 정체성 사이의 거리는 먼 경우도 있을 수 있겠다.)
마찬가지로, "사람 p의 정체성을 이해하다"와 "사람 p를 이해하다" 역시 같지는 않다. 정의상, 트랜스페미닌 다양체 M은 정체성들로 이루어진 공간이니까, 그와 관련 없는 내용이 M에 있지는 않을 것이다. 따라서 "사람 p를 이해하다"를 트랜스페미닌 다양체 M을 가지고 논하기는 어렵다.(불충분하다는 의미에서) 그렇지만 '정체성을 이해하다'에 대해서는, 트랜스페미닌 다양체 M을 가지고 뭔가 얘기해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그 얘기가 실재를 100% 반영하기보다는 좋은 모형이나 추상화 정도일 수도 있겠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의의가 있을 것이다.
2.
앞서 트랜스펨의 집합 P를 얘기했었다. 이제 P를 정의역으로 하는 새로운 함수 Ψ가 있고, 이는 다음과 같다.
Ψ(p) = { x ∈ M | p는 x의 존재를 인지하고 있고, x를 부정하지 않음 }
정체성에 대해서 대략 세 가지가 가능할 것이다. '인지하지 않음', '인지하지만 부정함', '인지하고, 부정하지 않음'. 첫 번째와 두 번째는 혐오에 속할 가능성이 크고, 세 번째의 태도로 p가 대하는 정체성들의 모임이 Ψ(p)이다.
이것만으로는 너무 추상적이어서, 조금 막연할 수 있다. 따라서 글쓴이는 함수 Ψ에 대해 뭔가 제약을 암묵적으로 가했는데, 바로 집합 Ψ(p)는 점 Φ(p)를 포함하는 어떤 연결된 영역이라는 것이다.
(나는 여기서 조금 흥미로웠다. 이 제약을 글자 그대로 따른다면, '자신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트랜스펨'이나 '자신의 정체성을 인지하지 못한 트랜스펨'을 배제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트랜스페미닌 다양체」의 다른 부분을 찬찬히 읽어보면 이 글이 그것을 배제하지 않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여기서 나는, 글에서 의도한 바와 글에서 사용된 도식, 은유 등등을 주의해서 읽자고 말하고 싶다. 왜냐하면, 모순은 그 자체로 파국인 것이 아니라 모순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에 따라서 파국으로 간주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는 무엇이기 때문이다. 달리 말해, 모순이 보인다고 해서 어떤 전체를 바로 폐기하기보다는, 보완할 여지가 있는 것으로 바라보자는 것이다.)
3.
어쨌거나 함수 Ψ의 치역은 이런저런 영역들의 집합이다. 그리고 Ψ의 치역의 원소인 영역들의 합집합을, ∪Ψ(P)라고 쓰자. 그러면,
∪Ψ(P) = { x ∈ M | 어떤 트랜스펨 p는 x를 인지하고, 부정하지 않는다 }
이고, 물론 ∪Ψ(P) ⊆ M 이다. 그런 다음에, 「트랜스페미닌 다양체」에서는 차집합 M - ∪Ψ(P) 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지 묻는다. 가능한 정체성이기는 하지만 누구에게도 인지되지 않거나 누구에게도 긍정되지 않는 정체성. 그것은 사실 존재하지 않는 것과 거의 마찬가지가 아닐까? 그래서인지, 글쓴이는 M 전체를 고려하기보다는 ∪Ψ(P)를 타깃으로 삼자고 말한다. 물론 ∪Ψ(P)는 엄청나게 많은 수의 구멍을 가지고 있을지도 모르고, 그로 인해 지나치게 복잡한 무언가일지도 모른다. 이에 대해서는, "M의 부분인 N은 ∪Ψ(P)를 부분으로 가지고, ∪Ψ(P)과 지나치게 다르지 않고, 구멍의 수는 너무 많지 않고, 다루기 용이함"을 만족하는 "좋은" N을 생각하겠다고 글쓴이는 쓴다. (이 또한 아마도 모델링이나 추상화의 일환일 것이다.)
4.
이쯤에서 "이해"라는 키워드로 돌아가자. 만약 집합 Ψ(p)가 점 Φ(q)를 포함한다면, 이는 트랜스펨 p가 트랜스펨 q의 정체성을 인지하고 또한 부정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것을 우리는 소극적 의미로서의 이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리고 글쓴이는, 좀 더 나아가서, 다음과 같은 개념을 제안한다.
점 Φ(p)와 Φ(q)에 대해, 점 Φ(p)에서 시작해서 점 Φ(q)에서 끝나는 곡선이면서 N에 포함되는 곡선이 존재한다.
이 개념을 글쓴이는 잠정적으로는 'p가 q를 이해'라고 불렀고, 결론부에서는 이해를 위한 어떤 조건이라고 말한다. 내가 보기에 이것과 몇몇 현상학적 개념과의 유사성을 파헤쳐 보는 것이 가능할 것 같은데, 그것을 여기서 수행하지는 않겠다. (일단 내가 현상학을 잘 아는 것이 아니고, 그렇기 때문에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가능하다고 하기 어렵다고 부연할 수도 있다.) 어쨌든...... 일단은 'p로부터 q까지의 연결이 있다'라는 용어로 부르겠다.
그런 다음에, p로부터 q까지의 연결이 둘 있고 그것을 c_1, c_2라고 하자. 달리 말해, Φ(p)에서 시작해서 점 Φ(q)에서 끝나는 N에 포함되는 곡선이 둘 있고 그것을 c_1, c_2라고 하자. 이 때 c_1을 연속적으로 변화시켜서 c_2가 되게 할 수 있다면, 이런 것을 위상수학에서는 c_1과 c_2가 호모토픽하다고 한다. 그리고 글쓴이는, 이 호모토피 개념을 이용해서 "이해의 간극"이라는 무언가를 묘사하려고 시도한다. ("호모토피"나 "호모토픽"이라는 낱말은 등장하지 않았지만 말이다. 그리고 아래에서도 조금 이야기하겠지만, 여기서 "이해의 간극"이 이해불가능을 의도하는 것 같지는 않다. 이해의 가능성이 어느 정도로 존재하는지에 대해 얘기하려는 것으로 보인다.)
이는 이런 의도일 것이다. 최소한, p로부터 q까지의 연결이 있는 경우들이 모두 수학적으로 동등한 것은 아니다. 예를 들어. 점 Φ(p)와 Φ(q) 사이에 무언가 구멍이 있지만 그 구멍을 우회하면서 두 점을 잇는 곡선이 있는 경우라고 하자. 특히, 이 때 구멍 '위쪽으로' 우회하는 곡선이 있고 구멍 '아래쪽으로' 우회하는 곡선이 있다면, 곡선 하나를 연속적으로 변화시켜서 다른 곡선이 되게 할 수 없는 경우가 많다. 그 때에 두 곡선은 호모토픽하지 않다.
반면, 이번에는 점 Φ(p)와 점 Φ(q) 사이에 별다른 구멍이 있지 않으면서 두 점을 잇는 곡선이 있다고 하자. 이 때는 두 점을 잇는 곡선 하나를 연속적으로 변화시켜서 두 점을 잇는 다른 곡선이 되게 할 수 있는 경우가 많고, 두 곡선은 호모토픽하다.
이를 단순화로 인한 위험을 감수하고 말한다면, "어떤 연결은 더 긴밀하고 어떤 연결은 덜 긴밀하다"라는 것을 수학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런 다음, 글에서는 점 Φ(p)와 Φ(q)가 단일 연결인 영역에 포함될 때가 그렇지 않을 때보다 p와 q 사이의 이해의 가능성이 더 크다고 의미부여한다.
이것은, 찬찬히 음미해보면, 의미심장한 내용이기도 하다. 직접적으로 말한다면, 내가 누군가를 이해하는지는 완전히 내 뜻대로 되는 것이 아니라, 가능한 정체성들의 "구조" 또는 분포에 의해 (그 가능성이) 어느 정도 제약된다는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는 변혁의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는다. 말하자면 이해의 가능성은 ∪Ψ(P)라는 "구조"에 의해(또는 그것을 포함하는 "좋은" N에 의해) 어느 정도 제약되는데, ∪Ψ(P)는 '우리가 무엇을 하는지'에 의해 충분히 변화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다 자세히는, 다양체 M 내에서 "아직 탐색되지 않은 지역"을 향하여 트랜스펨들이 조금씩 나아가는 것으로도 ∪Ψ(P)가 조금씩 변하게 되고, 그것을 반복함으로써 상호 이해의 증진을 도모할 수 있다고 글쓴이는 제안하고 있다.
5. 나오면서
어쩌다보니(?) 긴 글을 쓰게 되었는데, 읽는 분들께서 너그럽게 읽어 주었으면 좋겠다. 후기를 겸해서 몇 가지 인상을 얘기해보면 이렇게 될 것 같다. 「트랜스페미닌 다양체」는 다양체에 대한 글이면서, 그 배후에는 고전 역학의 배위 공간(configuration space)과 위상공간(phase space), 그리고 일반 상대론에서 사용하는 다양체 개념이 은은히 있는 것 같다는 인상이었다. 한편, 이와 같은 위상공간(phase space) 등을 개념적 은유로 사용한 전례로 질 들뢰즈와 펠릭스 가타리가 있고, 또한 이들은 배치(Agencement)라는 개념을 사용하기도 했다. 이 배치 개념이 어셈블리지(assemblage)라는 이름으로 다각도로 발전한 것이 아닐까 라고 추측해보기도 하고, assemblage를 '다양체'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 또한 이러한 맥락과 무관하지는 않겠지 라고 추측해본다.
위에서의 내 논의는 뭔가 개념에 관한 것이었다면, 이번에는 「트랜스페미닌 다양체」를 읽으면서 나의 눈길을 끌었던 글쓴이의 직관 두 개를 언급해 보고 싶다. 이는 다음의 둘이다.
- "이 글에서 언급하거나, 언급하지 않은 모든 존재에 대해, 연대하고 붙잡고 뭉쳐 상상하자. 그리고 그들이 모두 살아 있는 인간임을 상기해야 한다. 우리는 연결되어 있기에/연결되어야 하기에."(34쪽)
- "나도 그들과 같은 트랜스 해방을 믿지만, 동시에 불균일함과 난잡함이 다양체를 다양하고 아름답게 한다고 믿는다. 구멍을 메워야 한다고 주장하면서도 과연 모든 차이의 경계가 흐려지는 재미없는 다양체가 되는 것이 좋은 것일까 하는 의문이 든다."(35쪽)
여기서는 이 직관들을 주목한다는 것 정도에서 그치려고 한다. 다만, 위의 34쪽 인용문의 직관이 "이해는 오해보다 낫고, 할 수 있는 데까지는 이해하려고 하는 것이 낫다"를 내포하는 무엇이라면, 그에 대해 내가 완전히 동의하지는 않더라도, 대체로 동의한다고 말할 것이다.
*.1.
그 외에 몇 가지 더 살펴볼 것들은 다음과 같다.
먼저, 「트랜스페미닌 다양체」의 '시디트젠판'과 '퀴어트젠판'은 일차적으로는 글쓴이가 느꼈던 어느 정도 이질적인 두 집단을 가리킨다. 그런데 그러한 두 개의 '판'을 「트랜스페미닌 다양체」에서는 트랜스펨 다양체 M의 부분공간(부분다양체보다 약한 개념인)으로 생각하고 있다. 한편, 위에서 말했듯이, 트랜스펨 다양체 M은 가능한 정체성들에 대한 정보만을 담고 있는 것에 비해, '시디트젠판'과 '퀴어트젠판'은 그 외의 무언가들도 포함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더 적절해 보인다. 그렇기에, 나는, 두 개의 판을 바로 트랜스펨 다양체 M의 부분공간으로 간주하는 것보다는, '시디트젠판'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이 M에서 어떻게 분포하는지와 '퀴어트젠판'에 속한 사람들의 정체성이 M에서 어떻게 분포하는지를 말하는 것이 보다 낫지 않을까, 라고 생각해본다.
*.2.1.
「트랜스페미닌 다양체」의 25쪽(pdf 파일 기준) 이전까지는 고정된 시간 내에서의 이야기였다면, 그 다음부터는 트랜스펨의 정체성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어떻게 변화해가는지에 대한 얘기를 시작한다. 예를 들어 트랜스펨 p의 시간 t에서의 정체성을 Φ_t (p)라고 하면, 우리는 Φ_t (p)의 시간에 대한 미분, 그러니까 속도벡터를 생각할 수 있다. 그리고 우리는 동일한 위치에 있는 물체가 서로 다른 속도를 가지기도 한다는 것을 (물리학을 통해?) 잘 알고 있다. 이것을 암묵적으로 의식하면서, 글쓴이는 트랜스펨의 정체성은 사실 트랜스펨 다양체 M 위의 점 하나로 나타내는 것보다는 'M의 점에 있는지 그리고 그 점을 어떠한 속도벡터로 지나가는지'로 나타내는 것이 보다 적절하다고 제안한 것으로 보인다. 이는, 실질적으로, 트랜스펨의 정체성을 M의 접다발(tangent bundle) TM으로 표상하자는 제안이다.
한편, 글쓴이는 "트랜스펨과 이들의 정체성/욕망은 점과 벡터로 이루어진 벡터장에 훌륭하게 비유된다."라고 쓰고 있는데, 여기서 내가 벡터장의 개념에서 만족하지 않고 접다발까지 언급한 이유를 좀 더 얘기하는 게 좋을 것 같다. 우선, 벡터장은 트랜스펨 다양체 M을 정의역으로 하고 함숫값이 벡터인 (좋은) 함수이다. 그리고 트랜스펨 p와 트랜스펨 q가 현재 시간 t에서의 정체성은 일치하지만 시간 t에서의 욕망은 일치하지 않는다고 하자. 함수의 정의상, p와 q 모두에 대해 얘기하기 위해서는 최소한 두 개 이상의 벡터장이라는 함수가 필요하다.
그런데 위의 인용문 대신 "트랜스펨과 이들의 정체성/욕망은 점과 벡터로 이루어진 순서쌍에 훌륭하게 비유된다."라고 하면 어떻게 될까? 즉, 각각의 트랜스펨 p와 각각의 시간 t에 대해 순서쌍 (x, v)를 대응시키되, x는 시간 t에서 p의 정체성이 M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말해 주고, v는 시간 t에서 p의 정체성의 "속도"가 무엇인지를 말해 준다는 식이다. 이런 식으로 다양체 M에 대해 (가능한 위치, 가능한 속도) 꼴의 순서쌍을 모두 모은 것이 다양체 M의 접다발 TM이라고 하는데, 이것을 사용하면 좀 더 논의가 깔끔해지지 않을까.
(접다발에 대해 약간 더 부연설명하면 이렇다. x가 트랜스펨 다양체 M의 점일 때, x를 지나가는 곡선이 취할 수 있는 속도벡터들이 있을 것이다. 그것, 그러니까 "x를 지나가는 곡선이 취할 수 있는 (가능한) 속도벡터"를 x에서의 접벡터라고 부르고, 그것의 모임을 접공간(tangent space)이라고 하고 T_x M이라고 쓴다. 그리고 M의 각 점 x마다 그에 해당하는 접공간 T_x M가 있고, 그것을 모두 합친 것을 M의 접다발 TM이라고 한다.)
*.2.2.
그 이후에 글쓴이는 트랜스펨 다양체 M의 서로 다른 두 점 x와 y에 대해, x에서의 접벡터와 y에서의 접벡터를 어떤 방식으로 동일시할 수 있을지를 논의한다. 이는 아마도 두 사람의 트랜스펨의 욕망이 같은지 아닌지를 일반적으로 생각하기 위해서일 것이다. 그리고 트랜스펨 다양체 M의 서로 다른 두 점에서의 접벡터 사이의 동일시를 제공해주는 시스템을 메트릭(이하 계량 텐서)이라고 한다고 쓴다.
이는, 사실은, 정확하지는 않다. 다양체의 서로 다른 두 점에서의 접벡터 사이의 동일시를 제공하는 것은 접속(connection)이라고 불린다. 일반적으로 다양체 하나에 대해서도 여러 가지의 접속이 있다. 그렇지만, "다양체의 계량 텐서가 갖는 정보와 양립가능하면서 좋은 조건을 만족하도록" 서로 다른 두 접벡터 사이의 동일시를 제공하는 방법은, 계량 텐서에 의해 유일하게 결정된다. 아마 이것을 염두에 두고 계량 텐서가 접벡터의 동일시를 제공한다고 쓴 것이 아닐까 싶다.
그런데 이 대목에서 글쓴이가 논의하고 싶었던 것은, 욕망의 방향성에 대하여 시디트젠판은 보다 정렬되고 획일화되는 경향이 있는 반면 퀴어트젠판은 보다 다양하게 되는 경향이 있다고 글쓴이에게 파악된다는 내용으로 보인다. 그러한 정렬과 획일화의 경향을 「트랜스페미닌 다양체」 27쪽의 파란색 벡터로 볼 수 있다고 쓰고 있는데, 만약 우리가 트랜스펨의 욕망을 트랜스펨의 정체성의 속도벡터와 정말로 완전히 동일시한다면, 그 벡터는 트랜스펨의 정체성이 이동한 경로에 접하는 것이어야 한다. 그렇지만 27쪽 그림의 파란색 벡터들은 그렇지 않은데, 이 부분은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나로서는 잘 모르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