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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18 화요일
엄마는 아침부터 볼일이 있다고 해서 아마 내가 일어날때쯤에는 이미 없을거라고 했다. 그런데 11시쯤 늦게 일어났는데도 집에 엄마가 아직 있었다. 아직 할 말이 남아있던걸까?
아무래도 어제 밤에 병원에서 받았던 여성화 호르몬 치료 설명서를 엄마에게 주었는데, 밤새 그걸 자세히 읽어본 모양이었다. 생각했던 것보다 부작용이나 비가역적인 변화들이 많다고 걱정하면서 조금만 생각할 시간을 가져보자고 호르몬치료를 잠시 중단하면 안되겠냐고 말하기 시작했다.
솔직히 너무 당황스러웠다. 내가 지금까지 제일 후회되는 것들이 어렸을 때 위화감을 느꼈음에도 그것을 깊이 알아보거나 고민하지 않았던 것, 그리고 정체화를 했음에도 그냥 남자로 살아가려고 했던 시간들이었다. 그렇기에 엄마에게 호르몬치료를 중단하자는 말을 들었을 때 조금 많이 당황스러웠다.
내가 처음에 이 말에 거부를하자 엄마는 걱정되는 이유를 하나 둘 늘어놓으면서 급기야 울먹이면서 제발 엄마에게도 받아들일 시간을 좀 달라고 애원하기 시작했다.
내가 호르몬 치료 중단은 절대 못하겠다고 했음에도 이후 몇 시간동안이나 계속 같은 부탁을 했다. 나는 생각할 시간을 이미 충분히가졌고 무엇보다 현재까지 호르몬 치료 효과에 만족 중이고, 부작용을 방지하기 위해서 운동 및 체중 조절을 열심히 하고 있다고 설득해보려 해도 계속 똑같은 대화가 반복되었다.
그렇게 점점 힘들어질 때 쯤 생각지도 못한 일이 일어났다. 아빠가 찾아온 것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화 조차 내지 못했다. 말로는 엄마도 올줄 물랐다고는 하는데, 아빠와 눈빛 교환하는걸 보고 원래부터 오기로 했단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배신감이 들었다. 분명 이번에는 엄마 단둘이서만 보기로 약속을 했으면서도 나를 속인 이유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겨우 정신을 부여잡고 아빠랑도 대화를 이어가려했다.
결론적으론 엄마와 했던 얘기에서 진전이 되지를 않았다. '여러가지로 걱정이 되고 되돌릴 수 없으니 호르몬 치료를 잠시 중단하고 생각할 시간을 가지자' vs '나는 위험성을 인지하고 충분히 생각할 시간을 가졌으며 호르몬 치료를 중단할 수 없다' 의 무한반복이었다.
오늘 주사 맞으러 가는 날이었고 시간도 늦어지고 있었기 때문에 병원 다녀온 다음에 얘기하자고 했다. 그러자 아빠는 내가 병원가는 것을 막으려하기 시작했다. 이미 심리적으로 많이 위축된 상태에서 그런일이 일어나니 더 이상 감정을 억누르기 못했다.
그 뒤로 무슨말을 했는지도 모르겠다. 별로 기억하고 싶지도 않다. 결론은 병원은 엄마랑 같이 가보기로 했다. 그렇게 씻고 나갈 준비를 했다.
병원에서 정말 혹시나하는 심정에 유전자 검사를 받아보기로했고, 피뽑고 데포 주사 맞으러 간 사이에 엄마는 원장님과 더 이야기하기로 했다. 조금 걱정 됐지만 다행이도 원장님께서 여러가지로 잘 설명해주신 모양이었다.
집에와서 아빠까지해서 셋이서 저녁을 먹으러 갔다. 아빠는 술도 마셔서인지 밥 먹으면서 술김에 이런 저런 소리를 내게 했다. 하지만 주변 소음과 사이에 있던 불판 소리 때문에 잘 안들렸다. 안들려서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오늘은 더이상 감정섞인 말을 듣기에는 너무 힘들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그래도 병원 갔다오고 어느정도 납득한 것 같았지만, 아빠는 아직 시간이 필요한 모양이다. 아마 앞으로 더 행복해지는 모습들을 보여주면 서서히 마음을 풀거라고 생각한다.
그렇게 밥먹고 엄마 아빠를 보내드렸다. 그리고는 집에와서 힘든나머지 그대로 잠들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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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상치 못한 일들도 있었지만 결과적으로는 나쁘지 않게 끝난 것 같아서 정말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엄마 아빠가 억지로 앞길을 막으려 들지 않은 것 만으로도 너무 감사하게 생각하고 있어요! 앞으로도 계속 엄마 아빠와 천천히 대화해볼 필요성이 느껴지는 하루였습니다
누구에게 도움이 됐을지는 모르겠지만.. 긴 글 끝까지 읽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오느레 tmi
방금 팔 소매 걷어올리려다 소매 놓쳐서 찌쭈에 펀치를 날려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