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학내일 2019> 소장본에 수록된 외전을 유료 발행합니다.




진짜 실물이 훨씬 낫네.

그동안 대학 홍보물에서 질리도록 보던 무수한 소문 속 정재현의 얼굴을 실제로 마주한 해원의 첫 감상이었다. 때는 무역학과 2학기 개총이 있는 날이었고 작년에 복학해서 참석한 정재현이 자연스레 새내기를 제치고 자리의 주인공이 됐다. 어쩌다 보니 우연히 앞자리에 배치된 무역학과 간판으로 유명한 그 선배의 실물을 저도 모르게 멍하니 바라보며 해원이 물었다. 저 선배가…정재현 선배 맞죠?


“어 맞아. 참, 그러고 보니 23학번 애들은 재현이 처음 보겠네.”

“…….”

“야 재현아 뭐하냐. 이삼 애기들한테도 네가 인사 좀 해라.”


안 그래도 목청 큰 19학번 남자 선배의 오지랖에 한창 여기저기서 주는 술을 빠짐없이 받아 마시고 있던 재현의 시선이 옮겨졌다. 곧 자연히 바로 앞에 마주 앉아 있는 해원과 시선이 맞부딪혔다. 맞네. 다들 안녕. 별거 없는 짤막한 인사였는데도 모두 등장한 순간부터 지지부진한 술자리의 공기 결부터 바꿔놓은 정재현을 향해 우르르 마주 인사했다. 네, 선배 안녕하세요!


“뭐야. 그냥 다들 말 편하게 해.”

“어, 그래도..”

“괜찮아. 어차피 술자리 자주 오지도 못하는데. 이렇게 가끔 볼 때라도 편하게 얘기하자.”


역시 복학생이라 해도 졸업을 앞둔 고학번이라 그런 거겠지. 해원은 별거 없이 그냥 마주 앉아 있는 거뿐인데도 소맥 잔을 잡은 손끝이 긴장으로 살짝 굳어져 있는 걸 느꼈다. 재현은 제법 능숙하게 해원을 포함한 제 주변에 앉은 새내기들과 짤막한 인적사항을 공유했다. 오바스럽게 리액션을 하지는 않았지만 계속 웃고 있었고 부담스럽지 않은 선에서 어느 정도 분위기를 유연하게 풀어주는 잔잔한 화법이었다. 신기해. 잘 생겼는데 성격도 좋은 것 같아. 진짜 괜히 군대 가서도 캠퍼스 간판으로 계속 소문나는 게 아니구나. 


“야 근데 재현이 너 오늘 개파 어케 왔냐?”

“잠시 시간 비어서.“

“네가? 아 글고보니 오늘…그렇구먼.”


무언갈 말하려다 곧 떠올랐다는 듯 다른 19학번 선배가 고개를 끄덕였다. 온 김에 그럼 애들이 주는 술이라도 다 마시고 가라. 자주 오는 것도 아니니까. 농담 반 진담 반의 장난에도 재현은 능청스럽게 너스레 떨었다. 이거 다 마시면 나 오늘 집 못 들어간다. 


이후 5분 같은 50분 동안 재현은 새내기가 앉아있는 테이블에서 끊임없이 새내기들에게 말을 걸어줬다. 특히 가장 가까이 앉아있던 해원과 꽤 많은 말들을 주고받았다. 과 공부는 힘들지 않은지. 혹시 옆에 있는 애 같은 선배가 괴롭히지는 않는지. 술자리는 재미있는지. 사실 별로 친밀하지 않은 상태일 때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질문들에 불과했지만 그걸 정재현 얼굴로 하니까 새삼 특별하게 느껴졌다. 워낙에 활발한 성격으로 부과대에 재현과 동갑 선배들과도 스스럼없이 잘 지내오던 해원은 어쩐지 저 선배 앞에서는 계속 눈을 똑바로 바라보고 말할 수가 없어서 개미만 한 목소리로 대답만 겨우겨우 했다. 마음 같아서는 늘 그랬던 것처럼 먼저 오바 떨면서 친한 척하고 번호도 따고 싶은데…혼자 난리 난 속으로만 그렇게 생각할 뿐 마음대로 움직여주지 않는 손발은 꼭 기름칠 덜된 로봇처럼 괴상하게 삐걱댔다. 아 씨. 나 진짜 왜 이래….


“아 진짜? 그럼 나중에 족보 받아서…어, 잠깐만.”


한창 악명높은 교양 수업에 대해 대화하던 중에 엎어둔 재현의 핸드폰이 길게 진동했다. 잠시 말을 끊고 곧바로 핸드폰 화면에 찍힌 발신인을 확인한 재현이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동시에 옆자리 테이블에 놔뒀던 겉옷과 가방을 부산스레 챙기며 앉아있던 테이블을 향해 미안하단 듯 눈가를 구겼다. 미안. 나 이제 가봐야겠다.  


“헐. 선배 벌써 가세요?”

“응. 다음에 기회 되면 또 보자.”

“뭐야 재현이 너 이제 가냐?”


옆에서 한창 안주 주워 먹고 있던 다른 19학번 동기의 말에 재현이 전화를 받으며 조용히 핸드폰을 가리켰다. 그 손짓의 의미를 눈치챈 동기가 곧바로 알아먹었다는 듯 끄덕였다. 아 슬슬 끝났겠구나. 쩔수없지. 야. 다들 재현이 잡지 말고 걍 보내줘. 낼 보자.


“선배….”

“미안. 다들 재밌게 놀아.”

“선배 재밌었어요. 안녕히 가세요.”

“응. 앞으로 학교에서 보면 인사하자. 여보세요? 어 아냐 아냐. 나 이제 나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