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젠가 펨코에 이런 글을 써보고자 했는데, 오늘이 마침 그 날이네요.
별거 없고, 나름 펨코를 좋아하고 자주 들어오는 평범한 30대 펨붕이 입니다.
오늘 휴가기도 하고 해서 어제 부모님 집에 내려갔다가 금일 아침에 올라왔습니다.
부모님 집에 가서 와이프와 함께 옛날 사진첩들을 보며 저의 어린 시절을 잠시 여행했습니다.
그러다가 엄마가 와이프에게 이런 일이 있었단다 하며 이야기를 풀어주셨는데요.
와이프도 어제 이 이야기를 듣고 꽤 많이 울었습니다.
어머니, 아버지가 고생을 너무 하셨다며 너무 안타깝다는 이야기를 했죠.
어머니가 시작한 이야기는 혜화동 무장 탈영병 사건에 관련된 이야기 였습니다.
지금도 나무위키에 치면 나오는 사건으로, 당시에 꽤나 크게 화제가 되었던 사건 이었다고 합니다.
바로 탈영병이 철원에서 탈영해 서울 혜화동까지 와서 총격과 수류탄을 던지는 난동을 피웠었죠.
저희 아버지는 3사관학교 출신이시고, 병과는 기갑 이십니다.
대부분의 남성분들이 아시겠지만 이 나라는 포병과 보병에 대한 TO가 많아 그 외 병과는 진급이 더더욱 힘들죠.
당시 아버지께서는 중대장으로 근무하셨고, 당시 해당 중대는 독립 중대 였을 정도로 외딴 중대였다고 합니다.
어렸을 때 기억이 몇 차례 납니다.
차를 타고 산 속으로 들어가야 우리집(관사)이 나왔던 걸로요.
그곳에서 아복다복 여동생 두명과 저 이렇게 살았던 걸로 기억합니다.
아버지께서는 꽤나 중대 운영에 진심이셨고 열정적이셨다고 합니다.
때문에 중대원들을 간부, 병사할 것 없이 돌아가며 한명, 한명 저녁식사를 챙겨주셨다고 해요.
생각해보면, 저희 어머니가 거의 그 분들을 위한 저녁 대접을 준비하셨다는 건데, 노고가 참 많으셨을 것 같아요.
그 날도 아마 그랬을거라고 생각했습니다. 그 임채성 일병이 저녁식사를 끝내고 저를 참 귀여워 하며 잘 놀아줬다고 했습니다.
관심병사였던 그를 아버지는 더 신경을 썼었고, 늘 불안한 마음으로 생각해, 그 날 저녁도 정말 잘 먹이고 앞으로 군생활 잘해보자고 다독였다고 합니다.
그렇지만 무슨 일이었을까요?
어머니도 아버지도 기억이 정확히 나질 않지만, 식사 후 복귀한 뒤 탈영이었는지, 식사 후 며칠 뒤 탈영이었는지 모르겠으나
무장탈영을 했다고 합니다.
그때 어머니의 표현에 의하면, 살면서 눈 앞이 노래질 수 있다는게 이런 거구나 싶었다고 하셨어요.
아버지는 곧바로 구속되셨고, 어머니는 제 여동생들을 친정에 맡기시고, 저는 큰아버지댁에 맡긴 뒤 발로 뛰며 아버지의 선배들을 찾아다녔다고 합니다.
군가족들은 부인들끼리도 굉장히 나이를 떠나 남편의 계급이 깡패인 커뮤니티 입니다.
나이가 어려도 사모님 사모님 하며 그 댁 김장도 담그러 가고 알아서 기고 해야 했답니다.
나름 어머니께서는 그런 걸 잘하셨다고 생각하시고 정말 전화통을 부여 잡고 도움을 호소했고, 연락이 되질 않으면 매일 같이 도움을 줄 수 있을 만한 자리에 계신 사모님들을 찾아다니셨다고 해요.
그러면서 문전박대도 당하시고, 많은 무시도 당하시고 그러셨다고 합니다.
그때 아마 어머니 나이가 서른이 채 안되셨을 겁니다. (지금 계산해보니 29살이네요.)
할아버지께서 살아계셨을 때 큰아버지와 아버지 면회를 가면 그렇게 제가 아빠를 좋아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아빠는 왜 집에 안오냐며 곧 자지러지게 울었다고 합니다. (꼭 이 이야기 하실 때 큰아버지는 늘 눈물지으셨음)
어머니의 노력 덕분일까요? 딱 두 분께서 최대한 힘써보겠다며 도움을 주신다고 확답을 주셨답니다.
솔직히 말하면 탈영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중대장이 군복 벗는 거 당연한 거 아닐까 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1차적인 책임을 물 수 있는 지위니까요.
그런데 앞선 도움을 주신다는 선배님들 덕분인지, 아버지께서는 꽤 오랜 기간 동안 육군 교도소에 계셨지만, 다행히, 정말 다행히 군복을 벗지 않으실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이런 크리티컬한 사건이 커리어에 생긴다면, 군이라는 폐쇄적인 조직에서 진급길은 막혔다고 보는 게 맞죠.
아버지께서는 꽃대위 시절 발생한 사건으로 인해, 정말 정말 정말 오랫동안 대위로 남아계셨습니다.
아직도 기억이 나는게 제가 초등학교 4학년으로 기억합니다.
자다가 화장실에 가고자 일어났던 저는 아버지께서 거실에서 흐느껴 우시고 그런 아버지를 달래는 어머니를 본 기억이 납니다.
아마도 정말 아마도 그 날은 아버지가 또 진급에 떨어진 날이었겠죠.
(원주에 살았을 때 였어요, 그때 아버지 부대가 1군지원사령부 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그래도 아버지는 또 열심히 군생활을 하시다 대략 1년 정도 공부를 하셔서 예비군 지휘관으로 부임하셨습니다.
그때 어머니가 정말 너무 기뻐하며 눈물지으셨던게 아직도 생각납니다.
어린 저는 '왜 저렇게 우시지?' 하며 일단 좋아했었던 기억이 생생하네요.
저희는 강릉으로 이사했고 그곳에서 남은 초,중,고를 모두 마칠 수 있었습니다.
어머니는 저 때의 일을 잊지 않으시고 후에 국방일보에서 진행하는 군가족 백일장에 수필 부문에 제출하셨고, 대상을 받으셔서 하교 하고 집에 오니 국방일보 기자들이 와 있었던 게 기억이 납니다.
그리고 작년 12월 31일 아버지께서는 퇴임을 하셨습니다.
그런데 참.. 가슴이 아팠던 것이 보통 근속을 30년 이상하게 되면 퇴임식 때 훈장을 줍니다.
별다른 혜택도 없고 말 그대로 명예적인 부분이죠.
아버지의 동기들과 함께 퇴임을 하는 것이니 많은 분들이 계신데, 아버지께서는 그 훈장을 받지 못하시더라고요.
나중에 물어보니 어머니는 그게 혜화동 탈영 사건 때문이라고 하셔서 많이 아쉬워 하셨습니다. 아버지 역시 낙담하셨다고 하네요.
지금은 소일거리를 하시고 자격증 취득도 하시고 또다른 인생을 어떻게 사는게 좋을지 늘 어머니와 이야기한다고 하십니다.
자아가 생기고 기억을 잘 하게 됐을 무렵, 저는 그래서인지 누구보다 군 관련 문제에 진심이었고 아마도 누구보다 더 분노하지 않았을까 합니다.
실제로 제가 군대를 갔을 때도 정말 이따위 업무 프로세스를 견디면서 일을 하고 있는 간부들이 불쌍하다고 느낄 정도였죠.
그래도 아버지께서는 제가 군대의 이상한 프로세스와 절차에 대해 욕하는 것을 싫어하셨습니다.
아버지가 올해 환갑이십니다. 오늘 아침 서울로 올라가는 차를 타기 전 아버지께 고생 정말 많았다는 말을 뜬금없이 했습니다.
아버지는 "추석 때 여행이나 가자." 며 제 와이프 어깨를 토닥여주셨죠.
이상하게 운전을 하는데 코 끝이 계속 찡했습니다.
어제 이야기의 여운이었을까요.
제가 글을 쓰는 이유는 이 이야기의 말미에 어머니가 해주신 말 때문입니다.
"누구나 인생에 있어서 말도 안된다고 생각하는 고생스러운 시기가 한 번 이상은 온단다. 엄마는 너희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가 첫번째였고, 탈영사건이 발생했을 때가 두번째였던 것 같아. 그 이후에도 엄마 친구한테 사기당했을 때, 작게 하던 엄마 가게가 폐업했을 때, 그런데 정말 너무 힘들었지만 많이 노력해서 지금은 웃으면서 살고 있잖니, 네 아버지도 몇 번의 그런 시기가 계속 있었어.
너무 힘들다고 슬퍼만 하지 말고 나아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살렴. 나중에 이렇게 이야기할 수 있는 날이 올거야."
어머니라서가 아니라, 선배가 해주는 말로 생각하고 들어도 맞는 것 같더라구요.
우리 펨붕이 분들도 지금 대단히 힘드시고 고생스러운 시기를 겪고 계신 분들이 있을텐데요.
나아질 거라는 생각을 가지고 살아보면 어떨까요?
주제넘게 어머니의 말을 인용해서 이야기해봤습니다.
날이 많이 찹니다.
오늘도 힘내시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