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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63화. 아프지만 행복한 날2025.01.05.

  처음 내 병문안을 온 건 그레텔이었다.

“아가씨. 레이디 상파뉴께서 병문안 오셨어요.”

마사의 목소리에 눈을 뜨자 열에 들떠 비몽사몽인 시야로 침대 가에 앉아 나를 바라보는 익숙한 얼굴이 보였다.

“……아, 그레텔?”

그레텔은 익숙하게 물수건으로 식은땀이 송골송골 맺혔을 내 이마를 닦아 주었다. 보육원에서 아픈 아이들을 돌봤다더니 능숙한 손놀림이었다.

“페르디아 저택은 언제 와도 무서워요. 들어오는 길에 갑자기 독 분수가 역류해서 큰일 날 뻔했지 뭐예요.”

“하하……. 그 분수는, 해독제가 있어서 괜찮아요.”

힘없이 웃으며 대답하자 그레텔이 시무룩한 얼굴을 했다.

“제가 도울 수 있는 게 있으면 좋겠어요, 리리. 아무것도 할 수 없다는 게 정말 속상해요…….”

“마찬가지예요, 그레텔. 나도 그레텔이 아프면, 속상할 거야.”

콜록, 콜록. 기침이 터져 나오는 데다 멍하기까지 해서 정신이 없었다. 그래도 문병까지 온 그레텔을 그냥 보내고 싶지 않아서 괜히 농담을 내뱉었다.

“저번에 보니까…… 카를이 그레텔 연락 기다리던데, 알고 있죠……?”

“네, 네?!”

그레텔의 얼굴이 금세 새빨개졌다. 그런 반응을 보고 있자니 문득 궁금해졌다.

‘왜 안 사귀는 걸까……?’

아니면 이미 비밀 연애 중인데 내가 눈치가 없어서 모르고 있는 거라든가. 그레텔이 돌아간 후 묽은 수프로 간단히 식사를 마치고 침대 머리받이에 상체를 기대며 잠깐 쉬고 있을 때였다. 이번에는 크룬델 가문의 남매가 병문안을 왔다.

“감기에 좋다는 약재를 좀 챙겨 왔습니다, 엘로디 양.”

“엘로디 양한테 약은 소용없다고 말했는데도, 듣지를 않네요. 구제 불능 오빠가.”

내가 돌아간 후에 대화를 더 나누었는지 두 사람은 전보다 더 친밀해진 분위기였다.

“그래도 몸에 좋은 걸 먹으면 면역력이 좋아지잖아, 벨리사.”

“그래, 알겠다니까.”

나는 티격태격 싸우는 남매를 흐뭇하게 바라보았다.

“두 분…… 이제야 진짜 남매 같네요.”

색색 거친 숨을 내쉬며 그렇게 말하자 두 사람이 얼떨떨한 표정을 했다. 비슷한 표정을 짓고 있는 모습은 영락없는 남매였다. 물론 이번에도 닮았다는 말은 속에만 간직하기로 했다. 남매에게 닮았다는 말은 금기어니까. 그리고 다음 날, 잠깐 잠이 들었다 깼을 때 서늘한 손길이 느껴져 눈을 떴다.

“앓아누을 만도 하지. 너무 미련한 것도 좋지 않단다, 리리.”

무심한 어머니의 말에는 나를 향한 걱정이 담겨 있었다. 나는 어머니의 눈동자를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아, 이 얼굴.’

알고 있었다. 어릴 적, 열에 들떠 앓아누웠을 때, 나를 지켜보던 어머니의 얼굴이었다. 당연히 공작 부인이 나를 싫어할 거라 여겼던 나는 그 표정을 내 마음대로 해석했다. 차갑고 싸늘한 얼굴로 나를 내려다보았다고.

‘아니, 어머니는 원래 이런 분이셔.’

언뜻 차가워 보이지만, 사실은 누구보다 세심하며 배려 넘치는 분. 그때도 나를 걱정하셨던 거였구나. 새삼스러운 깨달음에 괜히 배시시 웃음이 나왔다.

“아픈데 뭐가 그렇게 즐겁니?”

“히히, 그냥요…….”

“빨리 낫기나 하렴. 카를이 당장 솜니아로 오겠다는 거 얀시가 막느라 고생이라고 하더구나.”

“네, 빨리 나을게요…….”

“더 자렴.”

차가운 손이 내 눈두덩을 덮었다. 서늘한 감각이 기분 좋아서 금세 잠들 수 있었다. 그다음으로 내 병문안을 온 사람들은 레이안과 아덴미르였다. 하필 두 사람이 같은 시간에 도착한 탓에, 함께 나를 만나러 들어오게 되었다. 그렇지 않아도 기운 없는데 삭막한 얼굴로 서로를 견제하는 두 남자 사이에 끼어 있으니 숨이 막혔다.

“병문안하러 와 줘서 고마워, 레이안. 전하도 감사해요.”

“안색이 좋지 않군. 식사는 했나?”

“네…….”

“누워도 돼.”

그래도 황족 앞이라 몸 정도는 일으키고 있었는데, 아덴미르가 편하게 있는 걸 허락했다. 친절히 물을 따라 침대 협탁 위에 올려 둔 아덴미르는 그 옆에 두었던 종이와 펜을 보더니 미간을 좁혔다.

“이게 뭐지?”

“아……. 그건…… 해야 할 일이 좀 있어서요.”

아프다며 아무것도 하지 않고 있는 게 왠지 불안해서 뭐라도 계획을 짜 보려고 둔 거였다. 머리가 지끈거려서 제대로 하지는 못했지만.

“그대는 그런 거 생각하지 말고 푹 쉬어야 해.”

“지금이 중요한 시기인 걸요……. 콜록.”

하필 그 타이밍에 기침이 터져 나오자 레이안과 아덴미르가 똑같이 동작을 멈췄다. 아픈 게 뭐라고 두 사람 다 고장 난 모습이 제법 재미있었다. 침대에 걸터앉은 아덴미르가 나를 가만히 응시했다.

“내가 뭘 하면 좋을지 말해 줘. 대신 할 테니까.”

“나도 하겠습니다.”

줄곧 아무 말도 없던 레이안까지 나섰다. 아픈 내가 움직이는 것보다 대신해 주는 게 차라리 낫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렇지 않아도 해야 하는 일이 있긴 했다.

“두 번째 서랍에 서류…… 이시스 님한테…… 콜록.”

레이안이 서랍을 열어 서류를 꺼냈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말을 덧붙였다.

“레이안, 전하, 사이좋게 손잡고…….”

싸우지 말고 사이좋게 다녀오라는 뜻이었는데, 두 남자의 표정이 심각하게 굳었다.

‘어라? 진짜 손잡고 가겠는데……?’

아픈 와중에도 장난기가 샘솟은 나는 심하게 콜록대며 두 사람에게 눈치를 주었다.

“콜록콜록, 부탁드려요……. 저는 너무 피곤해서 이만, 자야겠어요…….”

그리고 바로 자는 척.

“…….”

“…….”

레이안과 아덴미르가 서로의 손을 죽일 듯이 노려보았다. 실눈을 뜨고 몰래 훔쳐보는데, 두 남자가 서로 손끝만 부딪힌 채 나가는 장면을 목격하고 말았다. 달칵. 문이 닫히고, 나는 아픈 와중에도 폭소할 수밖에 없었다.

“풉, 푸흐흑……. 콜록, 콜록!”

올해 들어 본 제일 웃긴 광경이라고 할 수 있었다. . . . 열이 많이 떨어진 어느 밤. 침실 안을 어슬렁거리던 블랙이 침대 위로 폴짝 뛰어 올라왔다.

[내가 추워서 그런 거임! 딱히 주인 추울까 봐 그런 거 아니니까, 착각하지 마셈.]

블랙은 내 옆에 딱 붙어서 동그랗게 몸을 말고 눕더니 내 옆구리에 코를 콕 박았다. 보들보들하고 따끈따끈해서 기분이 좋았다.

“말랑말랑해…….”

블랙의 뱃살을 만지작거리자 마음에 들지 않는 건지 들썩거리다가도 녀석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오늘만 봐주는 거임.]

노곤한 기분으로 털반려여우를 안고 누워 있다니, 아프지만 행복했다.

‘일주일 동안 많은 사람이 내가 낫기를 바라며 병문안을 와 준 것도 좋았어.’

행복의 이면에는 불행이 있다고 했던가. 분에 넘치게 행복할수록 부정적인 생각은 꼬리를 물고 따라왔다.

‘그래도 되는 걸까?’

그럴수록 나는 더욱 강한 마음으로 행복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아니, 의심하지 말자. 내게 주어진 이 행복을. 나는 행복할 자격이 충분한 사람이니까.  

  *** 엘그리울 요새, 게이브 제나이드의 실험실.

“탑주님, 여기 연구 자료입니다.”

“이걸 자료라고 들고 온 건가? 진척된 게 없잖아, 멍청한 것들!”

자료를 넘겨 보던 게이브가 노성을 터트리며 종이 뭉치를 집어던졌다. 많은 양의 자료 낱장이 팔락팔락 흩날렸다. 자료를 들고 온 마법사의 얼굴에 핏기가 가셨다.

“죄, 죄송합니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사과 말고 당장 눈에 보이는 성과를 들고 오란 말이다. 사지가 터져 죽고 싶지 않으면…….”

“알겠습니다……!”

게이브의 수하 마법사가 허둥지둥 연구 자료 낱장들을 주워 모은 후 게이브의 실험실을 빠져나갔다. 이상한 몰골로 엘그리울 요새에 귀환한 그날부터 게이브의 심기가 불편했다. 예민한 데다 조금만 자극받아도 불같이 화를 내는 통에 요새의 모든 사람은 숨죽이고 게이브의 눈치만 보고 있는 형국이었다. 그들로서는 그럴 수밖에 없었다. 멋모르고 멍청하게 맺은 게이브와의 금제 탓에 자유를 빼앗기고 말았으니까. 그렇게 며칠이 흐른 후, 수하 마법사들에게 숨통이 트이는 소식이 들려왔다.

“이틀 후에 페르디아 두 공자가 솜니아로 귀환한다는 첩보를 입수했습니다!”

소식을 들은 게이브의 표정이 아주 약간 온화해졌다.

“확실한 정보인가?”

“예. 황군에 심어 둔 우리 측 교도가 전해 온 소식입니다.”

게이브가 비죽 웃었다. 어렵게 손에 넣은 분노가 무용지물이 되었다는 사실에 감정을 주체할 수 없었는데, 때마침 좋은 소식이 들려오지 않았는가. 현재 게이브가 대형 균열 근방의 땅을 완전히 차지하지 못하는 건 그 앞을 가로막고 있는 페르디아의 공자들 때문이었다. 특히 가장 거슬리는 건 대규모 전투에 특화된 카를로트 페르디아의 지반 붕괴 권능이었다. 그러니 그 두 놈만 없다면 그의 마수와 키메라 대군으로 밀어붙여 탐내던 땅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

“이틀, 이틀 후라.”

그동안 의욕 없이 실험실에 틀어박혀 있기만 하던 게이브가 비로소 몸을 움직였다. 분노가 있다면 수월하긴 하겠지만 없어도 충분히 해낼 수 있었다. 그에게는 이르칼라의 권능이 있으니까. 잠깐 멈추었던 실험을 개시하며 게이브는 연신 웃음을 터트렸다. 정말로 머지않았다. 이 지상을 집어삼킬 날이. *** 일주일 후. 드디어 열이 완전히 떨어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자 푹 자고 일어난 것처럼 개운했다. 일주일이나 앓아눕는 탓에 계획했던 일을 하나도 하지 못했다.

‘그래도 게이브가 잠잠하다니 다행이야.’

아픈 동안 주특기인 치장을 하지 못했던 마사는 오랜만에 의욕에 가득 찼다.

“오랜만이니까 제가 예쁘게 꾸며 드릴게요!”

“오늘은 수수한 차림새로 부탁할게.”

“왜요!”

“대신 내일은 하고 싶은 대로 해도 돼.”

회동용 비밀 주택에 갈 건데 화려하게 꾸미면 너무 눈에 띄었다.

“칫.”

마사는 입술을 삐쭉이면서도 내 부탁을 들어주었다. 준비가 끝나 밖으로 나가자 세베레스 아빠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아빠는 습관적으로 내 이마를 짚었다.

“열이 완전히 떨어졌네요. 다행입니다, 엘로디.”

“몸살감기 같은 건 아무것도 아니죠!”

의욕적으로 두 주먹을 불끈 쥐자 아빠가 부드럽게 웃으며 내 머리를 쓰다듬었다.

“앞으로도 너무 무리하지 않는 게 좋겠습니다. 걱정되니까.”

“네.”

나는 아빠에게 잔뜩 응석을 부리며 마차에 올랐다. 블랙은 자연스럽게 내 무릎 위에 자리를 잡았다. 몸도 다 나았겠다 더 이상 지체할 수 없어서 회동용 주택에서 회의하자고 제안한 참이었다. 그곳까지 이동하는 동안 나는 일주일간의 고민을 마무리했다. 이르칼라의 의도는 확실해졌다. 죄악이 힘을 사용하면 자신이 지상에 영향을 더 많이 끼칠 수 있으니 게이브를 이용하여 그런 상황을 유도한 것이다. 레온이 나태의 힘을 사용해 벨리사의 생사를 확인하게 된 것도 어쩌면 누군가의 개입이 있었을지도 모르겠다.

‘엄마를 만났을 때 내게 전하고자 했던 말은 아마도…….’

[봉인을 풀지 마.]

하지만 이미 탐욕의 봉인을 풀어 버린 상태였다. 나는 앞발을 핥고 있는 블랙을 내려다보았다.

“블랙아, 널 어쩌면 좋니?”

[내가 뭘 했다고 그럼?]

“그래, 네가 무슨 죄냐…….”

현재 불가피하게 능력을 사용 중인 죄악은 불사의 힘을 가진 시기였다. 음욕은 계약을 해제한 상태고, 탐욕은 봉인이 풀려 버렸으니까……. 아무래도 앞으로는 최대한 죄악의 힘을 사용하지 않는 게 좋을 듯했다.

“블랙아. 이제 거대화는 하지 마.”

[나의 이 멋진 본체를 보여 주지 말라는 뜻임?]

“응, 말라는 뜻임.”

[흥.]

블랙과 티격태격하다 보니 어느새 마차가 멈추었다. 세베레스 아빠와 함께 약속 장소인 주택에 들어선 나는 당황하고 말았다.

‘분위기가 왜 이래?’

살벌한 분위기의 주인공은 바로 아덴미르였다. 아덴미르의 못마땅한 시선의 끝에는 벨리사가 있었다.

댓글8


  • 신디(daeu****)

    에헤이 황태자 전하, 이해는 하지만 벨리사도 피해잡니다

  • TBIU(iuen****)

    아 오늘 삽화 레이안이랑 황태자랑 손 부딪히는 거였으면 진짜 웃겼겠닼ㅋㅋㅋㅋ

  • nadia(true****)

    우리 리리가 블랙이랑 누워서 저리 편하게 누워있는 삽화가 너무 소중하네요.💕

  • 환상공기소년(misz****)

    우리 애완 죄악이 뱃살 말랑말랑이라니 ㅠㅠ 만져보고 싶다아아아

  • 해달별(purp****)

    뱃살 말랑말랑~~~~^ ^

  • jis(jisu****)

    STICKER
    STICKER
  • Hee(didg****)

    녹조 머리 제발 얌전히 있어라

  • Heliy(seoj****)

    이번 삽화 넘 몽글몽글하고 귀여워요ㅠ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