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명 그날 잤다.
잔 것 같은 기분이 든다는 게 아니라.
대서사시, 엄청난 히스토리가 써진 게 틀림없다 이 말이다.
이건 단순한 촉이나 기분 그딴 게 아니고 분명 명확한 근거가 있는 그런 거란 말이다. 분명 제 몸에 쇄골이며 목이며 자욱이 선명했고 어깨와 허리는 PT 받은 다음날 만큼이나 욱신거렸으며 온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상태였다. 그리고 침대 시트는 또 어떻고? 아주 눅눅하다 못해 축축하기까지했다 이 말이다. 그래서 뭐 혈기왕성한 대학생이 제 자취방에서 그깟 원나잇 좀 한 게 뭐가 문제냐 하면은 그날 이후 일주일이 지난 지금까지 누구와 도대체 왜 어쩌다가 잤는지 기억이 전혀 안 난다는 데 있다. 아주 깔끔하게 도토리묵 잘라내듯이 기억이 댕강 잘려 나갔다. 누가 내 기억으로 묵사발이라도 맛깔나게 만들어 먹었나 진짜. 보통 다음날 연락이 오거나 그래야 하는 상황인 거 같은데 일주일째 누군지도 모르고 유진은 기가 막혔다. 쌍방으로 필름이 작살이 났나. 아니면 대단하신 분이 저를 가지고 노시나. 이미 일주일이나 지났는데 뭐 고민한다고 생각 나는 것도 아닌걸 뻔히 알면서 자꾸 기억을 되짚어 보게 되는 찝찝함. 유진은 자대 앞 벤치에서 아아를 쪽쪽 빨다가 빨대도 잘근잘근 씹었다.
" 또 빨대 씹고 있네. 아직도 그 생각 중? "
" 아, 진짜 누구지? 그날 술자리에 온 여자 몇 명 없는데 "
" 왜 여자라고 생각해? "
" 원영아. 넌 남자랑 잤는지 여자랑 잤는지 구분 안 되냐? "
" 남자랑 자본 적이 없어서 모르겠네. 나 도서관 자리맡으로 갈 건데 같이 갈 거야? "
기말이 코앞인데 도서관 가야지가야지. 벤치 앞에 서서 도서관 갈 거냐고 말 거냐고 운동화코로 콕콕 채근하는 원영을 따라 유진이 찝찝한 생각을 접고 몸을 일으켰다.
벚꽃놀이 명소라고 중앙도서관 앞에 벚꽃이 흐드러지게 펴있던 게 엊그제 같은데 벌써 기말이 코앞에 다가왔다니. 중간고사 기간에는 남의 캠퍼스에 벚꽃놀이하러 오는 인간들이 그렇게 꼴 보기 싫었었는데 시간도 빠르지. 유진은 광장을 가로질러 가려는 원영을 잡아끌어 굳이 굳이 캠퍼스 중앙에 떡하니 자리 잡은 연못을 빙 둘러서 도서관을 향해 걸었다. 공부하기 싫어서는 절대 아니었는데 그냥 날도 좋고 조금 더 걷고 싶은 마음. 이 속도로 도서관을 갔다가는 자리가 하나도 없겠다고 공부가 하기 싫으면 도서관에 가질 말지 그냥 혼자 갈걸 어쩌고 언니처럼 공부해서는 학고 맞는 건 순식간이다, 또 나한테 레포트 대신 써달라고 하기만 해봐라 아줌마한테 다 이를 거다 이 정도면 언니는 나한테 과외비 줘야 해 구시렁거리는 원영의 머리나 쓱쓱 쓰다듬어주면서 자리 없으면 언니가 어깨빵으로 밀쳐내고 자리 구해주지 나 싸움 잘하는 거 알지? 등등 속 편한 소리나 했다. 내가 초등학교 3학년 때 우리 원영이 괴롭히던 남자애 뒤통수에 땜빵 내줬잖아 나 같은 언니가 어딨냐? 까지 얘기를 할 때쯤엔 '손 치워' 하고 손은 내쳐졌지만. 아, 날이 너무 좋은데 그냥 원영이한테 달달한거나 먹으러 가자고 할까 학교 앞에 젤라또집이 새로 열었다는데.
내년이면 취준해야 하는 판에 학점관리도 엉망진창인데 저 멀리 떠내려간 전공 기억만큼이나 기억도 나지 않는 그날 밤일을 붙들고 있어봤자 그 여자(사실 여잔지 남잔지 모르는데 왠지 여자같다)가 내 학점 메꿔주는 것도 아닌데 그냥 잊어버려야지. 기억은 가물가물, 남은 건 코끝에 남은 달달한 향 하나 뿐이다. 그러니까 여자인 건 확실해 남자가 그런 달달한 향을 쓸 거 같진 않으니까. 아, 이것도 편견인가. 원영이가 나더러 편견 있는 편이라고 했는데 씁. 근데 진짜 머리에서 떠나질 않네 그 여자분. 누구세요 대체.
" 그날 여자가 네명이었거든? 지영선배, 지민선배, 지안이, 민정이. 그리고 나머진 다 남자였단 말이야 "
" 네명이었다고? "
" 아니 그니까. 그 넷 중에 있을 거 같다 이 말이지 내 말은. 내가 뭐 길거리에서 안면도 없는 여자 붙잡고 자취방 데려와서 자진 않았을 거 아니야. 나 레즈도 아닌데 "
" 진짜, 뭐라는 거야 "
" 원영아. 왜 화를 내냐 "
" 내가 언제 화냈어 "
" 지금 내고 있는데? "
" 아니거든? 도서관에 자리 없을까 봐 짜증 난 거거든? "
" 아, 내가 자리 구해준다니까. 근데 그날 나 너한테 전화 안 했더라? "
" 술 먹고 전화 거는 게 자랑이다. "
거참, 원영이 눈을 세모나게 뜨고 얘기하는데 술만 마시면 전화 거는 술버릇이 있는 게 미안해서 더 얘기도 못하겠고. 유진은 머쓱해 하면서 날씨 좋다는 얘기로 주제를 전환해 마저 도서관까지 걸었다. 원영아 젤라또 사줘어어. 왠지 날씨가 좋아서 공부가 잘될 것 같은 그런 느낌적인 느낌이 든다 원영아. 이따 공부 끝나고 된찌 고고? 라는 말엔 쓸데없는 소리하지 말고 걷기나 하라는 핀잔을 들었다.
" 내가 이럴 줄 알았어. 자리 없다고 했지? "
하도 밍기적거리면서 도서관에 왔더니 원영이 걱정했던 대로 자리가 없었다. 어깨빵으로 자리를 구해준다고 큰소리치면서 왔는데 막상 자리가 없으니까 원영의 눈치가 보여서 큰 눈동자만 도륵도륵 굴리던 와중에 눈에 떡하니 지영선배가 걸려서 이건 분명 원영이 자리도 구해주고 원영이에게서 나도 구해주는 구세주일까, 겸사겸사 그 날일도 슬쩍 떠볼까. 이건 기회일 거라는 생각이 미칠 즈음 정말 구세주처럼 지영이 몸을 일으켰다.
" 나 지금 일어날 건데. 원영이 여기서 해. 근데 자리가 하나라서 어떡하지? "
" 선배 저는 공부 안 할 참이었어요. "
" 그럼 유진이는 나랑 놀아주면 되겠다 "
수플레 팬케이크 먹으러 갈래? 하곤 팔짱을 껴오는 지영이 이끄는 대로 유진은 도서관을 따라나섰다. 공부는 어떻게든 되겠지 뭐. 원영에게 '거봐 내가 자리 구해준댔지?' 하고 입 모양으로 말하면서 지영에게 이끌려가는 동안 원영은 그런 유진은 본 체도 안 하고 자리에 앉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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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날 너 그렇게 술 많이 마셨었나? "
" 그런가 봐요. 기억이 하나도 안 나서.. 선배 혹시 제가 마지막에 어떻게 술집에서 나갔는지 기억하세요? "
" 글쎄.. 너 멀쩡해 보였는데. 취기가 늦게 올랐나. "
" 선배랑 지민선배랑 지안이랑 민정이랑.. 또 누구 있었나요? 하, 진짜 기억이 안 나요 "
별다른 대꾸 없이 뽀얗게 생크림이 올라간 수플레 팬케이크 사진을 찍는 지영을 앞에 두고 태연한 척 말을 붙이는데 지영은 놀라는 기색이나 아무런 감정의 변곡이 없었다. 누구랑 잤는데 기억이 안 나서요 라는 말은 너무 발랑까진 애 같아서 할 수는 없고 그게 또 지영이면 괜히 잤는데 기억 안 난다는 말이 제 목에 칼일까 봐 그냥 기억만 도토리 묵사발되어 사라졌음다 하곤 찬찬히 지영의 표정을 뜯어봤다.
뭔가 숨기는 거 같진 않고 동요하는 것 같지도 않고 지영선배는 아닌가. 하긴 지영선배가 애교 많고 친절하고 그렇긴 해도 또 레즈비언인 거 같진 않은데 근데 이것 또한 편견일 수 있다. 원영이가 난 편견 있는 편이라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나도 레즈비언 아닌데 그날 여자랑 잤으니까 그건 뭐 모르는 일인 거다. 불현듯 지영이 얼굴 앞에 포크로 내민 팬케이크를 괜찮다고 손을 저으면서 생각해보니 그날 밤이 그럼 여자(이미 여자라고 결론을 내렸다)와의 첫 경험인 건가 벼락같은 충격이 왔다. 그러니까 내가 지금 내 첫 여자를 찾는 중인 거네. 진짜 누구세요.
" 기말 얼마 안 남았는데 유진이 공부 안 하고 나랑 놀아서 어떻게 해. 우리 과는 족보 이런 것도 없잖아 "
" 괜찮아요. 원영이가 공부 잘하잖아요 "
원영이가 공부 잘하는 거랑 유진이가 무슨 상관이 있는 거냐고 웃는 지영에게 어차피 원영이가 문제은행처럼 시험에 나올만한 거도 집어줄 거고 레포트도 거의 도와준다고 종알거리면서 팬케이크를 먹었다.
" 원영이는 원래 공부 잘했었나? 1학년 때부터 늘 잘한다는 소리만 들었던 거 같아 "
" 아, 걔는 뭐 어릴 때부터 잘했어요. 완전 범생이. 초딩때 받아쓰기도 잘했고 중고딩 때도 맨날 1등만 했고... 입학도 우선선발로 했잖아요. 지금도 전장일걸요? "
" 아, 귀여워. 초딩때 받아쓰기 잘한 것도 알아? "
" 같은 초중고를 나왔어요. 바로 옆 동 살아서 부모님끼리도 친하시고... 저는 재수해서 여기 추합으로 왔는데 원영이는 우선선발 되어서 저희 엄마가 아주 저더러 원영이한테 언니라고 부르라고 했다니까요. 딸래미 기를 죽이셔도 정도가 있지 "
아무리 그래도 제가 무려 '한 살'이나 언니인데 원영이한테 언니라고 부르라는걸 좀 아니지 않냐고 레모네이드를 쪽쪽 빨면서 말하는 유진에게 지영은 지금도 시험문제 집어주고 레포트도 도와주는 정도면 언니라고 불러야 하는 게 맞는 거 아니냐면서 놀렸다.
" 취준도 해야 할 텐데 원영이 너무 귀찮게 하지말구. 공부하는데 방해하면 안되니까 모르는 거 나한테 물어 보러와. "
" 선배는 취준안하세요? "
" 난 랩실 갈 거라서 괜찮아. 그리고 유진이면 알려줘야지 "
유진이는 주변에 공부 잘하는 사람 많아서 좋겠다. 다 알려준다고 하구. 하고 웃는 지영에게 원영이는 맨날 안 알려준다고 하는데 역시 선배가 최고예요. 라는 대화를 하느라 앞에 앉은 지영이 그날 밤 그녀인가 더 떠보려는 마음은 그쯤에서 그만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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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 끝에 부드럽고 말랑말랑한 촉감
입에 가져다 물면 또 가득 차는듯하면서 끝이 단단해지는 그런 삼키고 싶은 맛이..혀 끝에 느껴지는 것 같은데
강의도 없는 토요일, 유진이 침대에서 소스라쳐 몸을 벌떡 일으켰다. 꿈이야? 분명히 손에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촉감이 쥐어졌었는데. 옆에 놓인 베개를 손으로 쥐어보는데 이 촉감이 아니다. 양손을 쥐었다 폈다 시트를 뭉쳐서 쥐어본다. 아, 이게 아닌데. 도대체 뭐지 손에 그 느낌은. 굉장히 말랑말랑하고 부드럽고 그래서 손이 녹을 거 같고 막... 막.. 입으로 가져가고 싶은 그런... 또 입에 가득하면서 삼키고 싶은 그런.. 엥? 입으로 가져가고 싶은...? 이 생각은 또 뭐람. 손을 팍팍 쥐었다 폈다 하면서 페트병도 쥐었다가 가방도 쥐었다가 하고 있는데 휴대폰 진동과 함께 화면에 '장원영' 세글자 가 떴다.
' 어, 왜? '
' 아직 자고 있나 해서. 해가 중천이야 밥 먹자 '
' 어어- 먹어야지 '
' 내려와. 나 밑에 써브웨이 '
' 밥 먹자며? '
' 써브웨이가 밥이지 그럼 뭐야? '
' 어어 그렇지 '
대충 눈곱만 떼고 모자를 눌러쓰고 내려갔더니 날씨가 아주 여름이다 못해 더워 뒤질 지경이었다. 다이나믹 코리아는 이제 여름이 5월부터 10월이라더니 민소매 입길 참 잘했지. 슬리퍼를 끌고 상가 앞으로 돌아갔더니 오피스텔 1층 써브웨이 창가 에어컨 제일 잘 나오는 자리에 원영이 앉아 샌드위치를 오물거리고 있었다. 성격도 급하지 벌써 시켜서 먹고 있네.
" 뭐 시켰어? "
" 이탈리안 비엠티. 언니 거는 피망이랑 토마토 뺏어 "
" 역시 센스 땡큐. 근데 너 왜 여기까지 왔어 "
" 왜? 나랑 같이 먹기 싫어? "
" 야, 넌 뭔 말을. 너 자취방에서 여기까지 이 날씨에 굳이, 그냥 나한테 오라고 하지 날도 엄청 덥구만 "
" 언니도 덥잖아. 5분 거리 밖에 안 되는데 뭐 "
블록 하나를 맞대고 있는 오피스텔 2개. 딱 성인 여성 걸음으로 걸어서 5분 거리. 원영과 유진의 자취방은 딱 그렇게 5분 거리에 있었다. 어차피 같은 학교 같은 과인데 그냥 투룸 구해서 같이 자취하자니까 원영은 절대 안 된다고 아득바득 우겨댔다. 안되는 이유도 가지각색. 여자애들 각자 자취방 구해주자니 치안이 어쩌고 불안하시다고 하던 부모님들도 원영이 절대 안 된다고 나오니까 별수 없어져서, 대신 바로 5분 거리에 붙어있는 오피스텔로 자취란걸 하게 됐다.
절.대.로 안된다고 무조건 따로 자취할 거라고 온점 찍어가면서 말한 장원영한테 그땐 좀 서운했었는데 막상 입학하고 나니깐 옳다구나 잘된 일이었다. 원영이 공부를 하는 기간에도 유진은 열심히 술 마시고 노래방 가고 친구들과 으쌰으쌰 우정을 다져야 했으니까. 원영이의 선견지명이 틀림없었다. 그래도 꼭 아침은 같이 먹었다. 전날 술을 진탕 마시고 해장을 못해도 아침을 거르면 또 엄마한테 이른다고 원영이가 잔소리를 할까 봐 엄마한테 일러지는게 무서워서 원영이 앞에 앉아서 꾸벅꾸벅 졸아 고개를 떨구면서도 아침을 먹었다.
5분 거리 자취방을 원영이 제집처럼 드나들었다. 둘이 꼭 맞춰진 똑같은 시간표로 내리 여섯 학기를 들었다. 중고등학교때도 이렇게는 안 붙어 있었는데 오히려 대학을 오니까 같은 학번이라서 그런가 더 붙어있게되는 아이러니. 자기는 제집 드나들듯이 드나들면서도 원영은 자기 자취방에는 유진을 한번을 못 오게해서 입만 댓 발 튀어나와 있으면 자기가 가면 되는데 언니가 왜 굳이 오냐고 해서 또 암말을 못 했다. 하여튼 유진이 이길 생각도 안 했지만 절대 져 줄 생각 안 하는 게 또 장원영이니까.
햇빛이 쨍하게 내리쬐다 못해 태양열 발전을 돌려야 할 것 같은 창밖을 보면서 원영이 시켜놓은 샌드위치를 먹다가 이거 소스 이름 뭐냐 물었는데 소스 이름이 뭐 랜치라나 뭐라나. 랜치는 공구 아니야? 하는 제 말이 웃겼는지 원영이 깔깔대고 웃었다. 원영이 없으면 써브웨이는 이름도 몰라서 못 시켜 먹겠네. 빵도 골라야 되고 야채도 빼야 되고 종류는 뭐가 그렇게 많고 소스는 또 뭐야 그게, 국밥집 가면 돼지국밥 살코기 국밥 두종류만 구별하면 되는데. 아 얼큰이 국밥도 있으니까 세 종류지.
" 레포트는 이거 다 먹고 할 거야? 모레까지야"
" 이따 지영 선배랑 하려고 했는데? "
" 왜? "
" 왜라니 그냥 지영 선배가 알려준다고 했으니까 그렇지 "
" 맨날 나랑 했잖아 "
" 아, 내가 언니로서 언제까지 너한테 그러냐 "
" 이제와서? 언제부터 그런 거 신경 썼다고"
" 나 신경 쓰거든? 그리고 지영 선배가 취준 앞두고있는데 너 귀찮게 하지 말래"
" 그동안 지영 선배 말 되게 잘 들었나 봐? 웃겨 "
이탈리안비엠티 15센치 하나를 다 먹고, 원영이 배부르다고 앞에 두 입 정도 남겨놓은 샌드위치를 마저 먹었다. 날이 너무 더운데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딱 먹고 올라가서 씻고 지영 선배를 만나러 가면 될 것 같은데. 편의점 아이스크림 먹기는 또 싫고 입이 텁텁해졌다.
" 정문 앞에 공사하던 젤라또 집 문 열었대. 갈래? "
" 언니 거기 안 가봤어? "
" 엉. 너랑 가려고 했지. 넌 가봤어? "
" 아니 나도 안 가봤어 "
그럼 가자. 가뿐하게 트레이를 반납하고 원영이 가방까지 어깨에 걸곤 정문으로 걸었다. 얜 왜 맨날 가방이 이렇게 무거운 거야? 그늘이 어째 하나도 없냐. 상가 틈새에 걸린 작은 그늘 사이로 원영을 밀어 넣으면서 그늘 끝을 밟고 걸었다. 아니 근데 생각해보니까 선크림을 안 바르고 나온 거 같네 망했네. 혼잣말로 중얼거리는데 원영이 선크림을 꺼내다가 얼굴에 발라줘서 길가다 말고 가만히 얼굴이나 대줬다.
" 선크림을 가지고 다녀? "
" 여름이잖아. "
볼이랑 턱이랑 꼼꼼히 발라주는데 괜히 민망해서 나 얼굴 쪼그마해서 크림 얼마 안 들어가니까 선크림 사주진 않는다- 예쁜 얼굴에 스크래치 내지 말고 잘 발라줘- 하고 얼굴을 맡겨놓은 채 너스레나 떨었다.
" 진짜 강아지 같애 "
" 나? "
" 응. 진짜 강아지 같애 "
뭐 강아지 같은 게 하루 이틀도 아니구. 사모예드, 골드리트리버, 시베리안허스키 종류도 많이 닮았는데 새삼스럽다.
" 오늘도? 무슨 강아지? "
" 음.. 오늘 약간 알래스카 말라뮤트? "
" 그건 또 새로운 종이네 "
" 허스키랑 비슷한데 조금 더 귀엽구 순하게 생긴 거야. "
" 언니한테 귀엽다는 게 무슨 소리야. "
" 언니한테 귀엽다고는 안 했는데? "
가만히 얼굴에 선크림 발라주는 원영을 보는데 오늘 무슨 약속이라도 있나 원피스를 입었네. 화장도 했고.
" 근데 너 오늘 무슨 약속 있어? "
" 왜? "
" 아니, 예쁘길래 "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선크림 다 발랐다고 원영이 손을 떼어냈다.
" 약속 없어 "
" 엉. 다 바른 거 맞아? 백탁 있는 거 아니지? 백탁 있으면 말라비틀아니고 백구 된다"
" 말라비틀아니고 말라뮤트 "
" 그게 그거지 뭐 "
" 지영 선배는 언제 만나기로했어? "
" 아직 안 정했는데. 너랑 젤라또 먹고 뭐 씻고 어쩌고 하면 5시는 되야 보지 않을까, 근데 뭐 지영 선배 안 된다고 하면 말고 "
젤라또 집에 도착해서는 16종류나 되는 젤라또 사이에서 고르느라 눈이 돌아갈 뻔했다. 배스킨라빈스 써리원 못지않은 젤라또들 사이에서 뭐가 맛있는 건지 훑어보고 있는데 원영도 고르기가 쉽지 않은지 둘 다 젤라또만 쳐다보고 있는 상황이 웃겼다. 그냥 딸기 같은 게 무난한 거 아닌가 아니면 요거트 뭐 그런 거.
" 언니는 피스타치오랑 초콜릿 둘 중에 뭐가 더 맛있을 거 같아? "
" 글쎄... 네가 나보다 젤라또 잘 알 아니야? 난 딸기나 요거트 먹을랬는데 "
코카콜라맛있다의 계시를 받은 원영이 고심 끝에 피스타치오를 고르고, 저는 초콜릿요-하고 초콜릿 맛 젤라또를 하나 받아들였다.
" 딸기나 요거트 먹는다더니 "
" 아니 네가 피스타치오랑 초콜릿 중에 고민하길래 그 두 개가 맛있는 건가보다 했지 "
언니 나 초콜릿도 먹어보고 싶어- 하는 원영한테 그럴줄 알았다- 한 입 먹은 제 초코릿 젤라또가 든 컵을 앞으로 밀어주면서 여기 젤라또집 인테리어가 꽤 요즘 스타일이라는 얘길 하는데, 원영은 소개팅하거나 데이트하면 밥 먹고 디저트 먹으러 여기 많이 오겠다는 소리나 했다. 원영은 이제 아예 유진의 젤라또컵을 가져다가 젤라또를 먹었다.
" 원영아. 누가 학교 정문 앞에서 데이트를 하냐 "
" 못 할 건 또 뭐야. 그냥 좋아하는 사람이랑 있으면 어디든 데이트지 "
" 에이, 그래도 데이트면 서울숲 이런 데는 가야지 "
" 데이트하러 거기 가봤어? "
" 넌 안 가봤어? "
" 몰라. "
" 데이트랍시고 정문 앞에 젤라또집 데려오는 사람이랑 연애하지 마라. 아주 후지다. "
" 알아서 할게. "
아, 그러고 보니까 원영이한테 연애한다는 얘기는 못 들었던 거 같긴 했다. 내 연애 얘기는 중학생일 때부터 미주알고주알 다 들으면서 자기 연애 얘기는 한 마디를 안 해주네. 연애 얘기가 뭐야 도토리묵사발로 잘려 나간 원나잇 얘기까지 지는 다 들어놓고 나만 프라이버시가 없지 아주. 원영이 초콜릿 젤라또를 한 스푼 떠서 눈앞에 내밀은 걸 받아먹다가 문득 아까 꾼 꿈이 떠올랐다.
" 맞다. 내가 어제 꿈을 꿨단 말이야 "
" 무슨 꿈? "
" 그게 근데 꿈인지, 아니면 그날 밤 기억인지 헷갈린단 말이야 "
분명히 뭔가 엄청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뭔가를 내가 손에 쥐었었거든 근데 그게 뭔지 모르겠다니까. 근데 진짜 이상하게 자꾸 입으로 가져가고 싶더라니까. 막 삼키고싶은 그런 충동이 일고 그 와중에 또 딱딱해지는 게 막 진짜 뭐였지 그게. 오른손을 쥐었다 폈다 하면서 얘기를 하는데 원영이 대뜸 그 손에 다 먹은 초콜릿 젤라또컵을 쥐여줬다.
" 뭐야? "
" 손 좀 가만히 둬. 정신 사나워 "
" 엉? 미안. 왜 화가 났어? "
" 내가 왜 화가나? "
" 아니, 아니면 말고. 목소리가 화난 줄 "
세모난 눈으로 말하는 원영을 보다가 지영 선배에게서 온 톡을 이제서야 확인했다. 자취방 주소를 찍어놓은 게 도서관보다는 자취방이 편하다고 생각하신 모양이지.
" 원영아 그만 가자. 지영 선배가 자취방으로 오라구하네 "
무슨 레포트를 도서관도 동방도 아니고 자취방에서 하냐고 하는 원영한테 무슨 소리냐고 엄청 잘됐다고 겸사겸사 가서 슬쩍 한 번 더 확인을 해봐야겠다는 얘기를 했다. 그리고 너도 맨날 레포트 쓰러 내 자취방 오면서 뭔 차이람. 나 진짜 궁금해서 못 참아. 어릴 때부터 궁금한 건 알아내야 직성이 풀리는 안유진의 성미가 어디 가냐고.
" 누군지 찾으면 어떻게 할 건데? "
" 그거까진 생각 안 해봤는데. 거리두기를 해야되나 싶기도하고? "
" 뭘.. 그렇게까지? "
" 아니 일단 나는 레즈가 아니니까 "
" 어련하시겠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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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볍게 노트북을 챙겨서 온 지영의 자취방은 무려 복층이었다. 채광이 좋은 창으로 거리가 내려다 보이는데 뷰가 좋은 오피스텔. 지영이 내준 오렌지주스를 홀짝거리면서 깔끔하게 정돈된 방만 멀뚱히 눈으로 훑었다. 되게 깔끔하신 편인가 보네 정리 정돈이 착착 되어있는 방에 너무 제 가방을 던져둔 게 아닌지 민망해져서 슬쩍 가방을 탁자 옆으로 세웠다.
" 최 교수님은 기말시험 걱정할 거 없어. 레포트만 잘 해서 내면 레포트 기반으로 학점 거의 주시더라구 "
" 그걸 제가 잘 할 수 있을까요. 저 지금 양자 꼬맹이예요 "
전공필수랍시고 양자역학을 듣긴 듣고 있는데 슈뢰딩거의 고양이가 나오는 순간부터 이미 학점과의 인연이란 것은 사라진 거나 다름없었다. 태어날 때부터 강아지상이라고 고양이랑 척지고 살아서 그런지 도대체가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아무래도 저와는 척진 고양이인 게 틀림없다고 유진은 생각했다. 그래도 고양이는 좀 낫지, 그 다음에 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 원리에 다다르자마자 예 교수님! 저는 학고를 맡아놨어요! 하고 손들고 싶었으니까. 물리학과를 괜히 왔어.
열심히 밑줄을 그어가며 설명을 해주는 지영을 뒤로하고 꾸벅꾸벅 감기는 눈 때문에 기어이 일어나 화장실에서 세수 좀 하고 오겠다고 몸을 일으켰다. 아, 이렇게 공부만 할 때가 아닌데. 지영 선배가 맞는지 촉 좀 세워봐야 하는데 영 마음처럼 되지 않았다. 세면대 앞에 서서 찬물로 세수부터 하는데 옅은 샤워 후 온기가 남은 화장실에서 그날 밤 맡은 것과 완전 똑같은 달달한 향이 났다는 게 문제다. 그리고 그 향을 인지하자마자 정신이 번쩍 들어서 잠이 다 달아났다는 것도. 그 향을 맡자마자 꿈인 줄 알았던 지난 밤이 다시 솟아났다. 아주 찰나의 조각조각. 말랑말랑하고 부드러운.. 아. 수건으로 얼굴도 채 못 닦고 티셔츠를 끌어올려 겨우 물기를 닦아냈다. 아, 말랑말랑한 그게.. 유진이 아직 물기가 흥건히 남은 오른손바닥을 내려다봤다. 어렴풋하기만 했던 촉감은 선명해져 이제 무엇이었는지 혀 끝에 그 단어가 맴돌았다. 입안에 담을뻔한 단어 만큼이나 단단해진 촉감은 또 혀 끝에 정점으로 솟아 또렷해졌다.
" 저.. 선배. 화장실에 혹시 디퓨저 같은 거 쓰세요? "
" 아니. 그런 거 안 쓰는데. 왜? "
" 아, 뭔가... 달콤한 향 같은 게 나서 뭔가 하구요. "
" 달달한거면 바디워시인가 보다. 빅토리아 시크릿 거야. 너 오기 바로 전에 샤워를 해서 "
" 아.. 바디워시구나 "
" 유진이 그 향 좋아해? "
좋아한다고 해야 하나 아니라고 해야 하나 어버버 거리다가 잘 모르겠다고 했다. 갑자기 뚝딱거리면 지영 선배가 이상하게 생각할 텐데 큰일인데 자리를 피해야 하나. 그렇다고 레포트 하겠다고 온 지 한 시간 밖에 안됐는데 대뜸 공부 그만해야겠다고 집에 가야겠다고 할 수도 없는 노릇. 유진은 대충 얼버무리면서 가방 속으로 폰을 넣어 원영에게 SOS를 쳤다. 원영아 언니 좀 살려주라. 전화 한 통만 주실? 플리즈
" 유진이 그때, 술 먹고 필름 끊겼다는 날. 기억은 났어? "
" 네? 어떤 날이요? "
" 전에 수플레 먹으면서 말한 거. 그날 기억났어? "
" 아.. 아뇨 기억 안 났어요. 전혀 안 나요. 완전 안나요. 그냥 기억 상실이에요 "
" 그래? 그렇구나. 그럼 다음부터는 술자리에서 술 조심해서 마셔야겠다 유진이는 "
유진만 당황하고, 가까이 앉은 지영은 태연했다. 불순불순열매를 먹은 것 처럼 지영의 단추가 세 개 풀린 셔츠 앞으로 자꾸 시선이 내려가는데. 원래 내가 왔을 때 처음부터 단추가 세 개 풀려있었나? 장원영은 대체 전화를 언제 주는 거야.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아니 전화를 건다고 등줄기에 식은땀이 나는 타이밍에 '장원영' 세글자가 화면에 떴다.
' 어, 원영아. 뭐라고? 바퀴벌레가 나타났다고? 곱등이만하다고? 어어 갈게 '
아무 말도 안 하는 원영의 전화에 대고 청룡영화제 여우주연상 뺨치는 연기를 선보였다. 원영이 집에 곱등이만한 바퀴벌레가 나타났다네요. 제가 벌레 잡아주기로 종신계약이 되어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안 잡아주면 엄마한테 일러서 본가 가면 된통 혼나거든요. 허둥지둥 가방을 챙기면서 노트북도 서둘러 닫아 가방에 넣었다.
" 원영이 집에 벌레 나왔대? "
" 네네 아주 큰 곱등이만한게 나왔대요 "
가방을 챙기면서 서둘러 운동화에 발을 끼워 넣는 유진에게 태연하게 지영은 말을 계속 잘도 붙였다.
" 근데 너도 그렇고 원영이도 그렇고 귀엽다."
" 네..? "
" 귀엽다고. 벌레 무섭다고 전화하고 잡아주러 간다고 하고 "
" 걔가 어디가 귀여워요 "
" 왜? 원영이 귀엽게 생겼잖아 "
조심히 가. 서둘러서 가다가 넘어지지 말고. 문을 열고 나와 배웅하는 지영을 뒤로하고 버튼을 다섯번 눌러 얼른 엘리베이터를 탔다. 아아 놓고 가는 건 없겠지. 머리를 박박 긁다가 근데 장원영 귀여운가. 원영인 예쁜데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 언니, 아주 연기를 잘하더라? '
' 아아, 지금 그게 문제가 아니다 원영아 '
' 뭔데 그렇게 급하게 빠져나왔어? '
' 원영아 일단 만나. 만나서 얘기해야 되는 일이야. 통화로 못해'
' 아, 뭔데에 궁금해에 얘기하면서 만나면 되잖아 바보야'
마을버스를 기다리면서 아옹다옹했다. 도착 예정 시간이 45분 뜨는 망할 마을버스 기다리다가 애가 탈 지경. 마을버스를 타서 얘기하자니 괜히 주변에 듣는 귀만 신경 쓰이고 그냥 자취방까지 30분 거리를 걸었다.
' 그날 그 여자 말이야. 아무래도 지영 선배인 거 같아 '
' 누구? '
' 그날 그 여자. 지영 선배 같다고. 확실해 '
'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
' 아, 그런 게 있어 '
' 언니 똥 촉이잖아 '
원영은 중고등학교 때부터 대학교 엠티 때까지 마피아 게임에서 단 한 번도 마피아를 맞춰본 적 없는 유진의 흑역사를 읊어가며 그런 촉으로 뭘 찾았다고 확신하냐고 했다. 하다못해 고백을 한다고 찾아온 남자 후배를 치한으로 오해해서 발차기를 날린 과거까지 소환되기에 이르렀다.
' 원영아, 뭐 그거까지 얘길 해. 이건 증거가 있다니까 '
' 그니까 지영 선배라는 그 확신의 증거가 뭐냐구 '
' 그날 밤에 내가 기억하는 향이 있다니까. 너한테 내가 말은 안 했었는데, 엄청 달달한 향이 났거든 그날 밤에. 내가 그 향을 분명히 기억해 '
' 달달한 향..? 지영 선배랑 그 향이 무슨 상관이야..? '
' 자세한 건 만나서 얘기해. 나 지금 방으로 가는 중 '
' 내 자취방으로와 그럼 '
' 뭐? '
' 내 자취방으로 오라고. 언니 자취방까지는 5분 더 걸리잖아. 그리구 나 씻을 거라서 씻고 다시 나가기 싫어 '
그럼 자긴 씻고 나올 테니까 문은 알아서 열고 들어오라고 현관 비밀번호를 남긴 전화를 끊었다. 원영이 자취방 처음 가는데 휴지라도 사가야 하는지 잠시 생각하다가 유진은 냅다 사거리 내리막을 내달렸다. 지금 휴지고 뭐고 중요한 게 그게 아니고 내 촉이 맞다는 게 중요하니까.
이번에는 분명 똥 촉일 리가 없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