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관계는 사랑인지 습관인지 구별되지 않는다.




 매일 아침 7시 같은 시간이 기상해서, 출근 준비를 하고 현관문을 7시 30분에 나서 사무실에 8시 30분에 도착하는 그런 평범하고 똑같은 나날. 현관문을 나서면서 다녀온다고 말하거나, 이따 저녁 같이 먹을까? 같은 말은 더 이상 하지 않게 되었다. 대학교 CC로 시작해서 연애를 한지가 벌써 8년, 같이 산 지는 6년이 넘어가는 이 안정적이라면 안정적인 어떻게 말하면 재미없고 미지근한 연애. 누군가는 롤러코스터를 타는 아찔하고 설레고 짜릿한 연애가 좋은가 하면 누군가는 안정적이고 차분하고 안락한 연애를 꿈꾼다고 했다. 유진은 그럼 어느 쪽인가, 무신경하고 무덤덤하고 무관심한 삼무유진에게 과연 어느 쪽이 더 끌리고 맞는 연애인가.






" 안대리님, 이지영씨 애인이랑 헤어진 다나 봐요 "


" 오래 만났다고 하지 않았어요? 결혼하시는 줄 알았는데 "

" 연인 사이라는 게 다 그런 거 아니겠어요? 오래 만나면 뭐해요 헤어지면 도로 남인데 "


 오래 만나면 재미가 없어지잖아요. 연애라는 게 설레는 맛도 있고 오르락내리락 하는 맛이 있어야지 맨날 똑같으면 그게 연애에요? 그냥 가족이지. 자고로 연애는 도파민이 기반이라는 최 대리의 말에 유진은 이제 나이 들어서 도파민 같은 건 뭔지 모르겠다고 적당히 맞장구를 치고 아침 겸 테이크아웃으로 받아온 바닐라라떼를 마셨다. 아침엔 도파민보다 카페인이 필수니까. 마치 보고 있다는 듯 귀신같이 원영에게서 커피 많이 마시지 말라는 문자가 왔다. 본인은 에스프레소를 마시면서도 원영은 꼭 커피 많이 마시지 말라는 말을 유진에게 했다.



 지난주와 다를 바 없는 똑같은 보고서를 들여다보면서 오늘은 또 오후에 회의가 얼마나 늘어질까 걱정이나 하는 평범한 일상. 평범한 게 제일 어렵다고 했는데 그 말을 한 사람에게 평범함과 지겨움은 반대되는 것이었을까. 적당히 시간이 가기를 기다리다가 퇴근할 때 우유를 사 오라는 원영의 문자를 보고 이따 마트에나 들러야겠다는 시시콜콜한 생각을 했다. 우유를 사 오라는걸 보니 원영인 샐러드를 먹을 건가 난 뭔가 매콤한 게 당기는데 저녁을 뭘 사 가지. 문자함을 가만히 내려다 보는데, 원영은 주로 저녁을 먹고 올 거냐 거나, 퇴근길에 우유를 사다 달라거나, 오늘 늦냐는 문자를 보냈고. 유진의 답은 주로 '응' 이었다. 그러다 가끔 커피 많이 마시지 말라는 문자를 하거나, 보고 싶은 영화가 생겼다는 말도 원영은 종종 했다. 그 영화를 우리가 같이 봤던가 유진은 기억이 나질 않았다. 그래도 아마 뭔가 본 영화가 있다면 원영이랑 봤겠지 다른 사람이랑은 영화관 갈 일이 없으니까. 네 번의 스크롤을 올려도 달라지지 않는 반복되는 패턴의 문자를 보다가 평범함 그 자체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그 누군가가 말하는 평범하고 안락한 일상을 누리고 있는 걸지도.







" 안대리님, 혹시 저 좀 태워주실래요? "

" 아, 지영씨 마포 갈 일 있어요? "

" 네, 저 그쪽으로 이사했어요. 근데 아직 노선 같은 거를 잘 몰라가지구요. "

" 네, 타셔도 되긴 하는데 퇴근 시간이라 좀 막힐 거예요. "



 러시아워에 막히는 올림픽대로, 주차장 같은 도로를 기어가는데, 어디 사고라도 난 건지 평소보다 더 거북이 행렬이었다. 이 좁아 터진 서울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사는지 다닥다닥 붙은 레드라이트가 지긋지긋했다.


" 차가 되게 깨끗하네요. 세차를 자주 하시나 봐요. 향도 엄청 좋아요 "

" 아, 애인이 깔끔한 편이에요. 더러운걸 싫어해서 "


 애인이 있으셨는지 몰랐다는 말에 만난 지 오래돼서 알만한 사람은 다 아는데 아마 지영씨가 입사한 지 얼마 안 되어 못 들은 거 같다고 하면서 라디오 퇴근길 도로교통 정보 채널로 주파수를 돌렸다. 작은 접촉 사고가 앞에 있다는 방송을 들으면서 그럼 그렇지 어쩐지 너무 막힌다는 생각을 했다. 차량 방향제 함이 바닥을 드러내는 게 눈에 걸렸다. 향이 다 떨어지기 전에 새로 주문을 해야 하는데 원영이 좋아하던 향이 뭐였는지 기억이 나질 않는다. 메모장 어딘가에 있을 텐데 조각조각 기억을 더듬다가 그냥 나중에 원영이 주문해주는 게 빠를 거라는걸 유진도 이제 안다.


" 저... 노래 들어도 돼요? "

" 그럼요. 들으셔도 되죠. 블루투스? "

" 애인분이 싫어하시는 거 아니에요? "

" 그런 거 신경 쓰는 사람 아니에요. 괜찮아요. "



 가다 서기를 반복하는 차 안에서 겨우겨우 블루투스 연결을 하는데 휴대폰 이름이 죵이라고 떠오른 게 웃겼다. 죵's 리스트라 요즘 친구들은 무슨 노래를 듣나, 새로운 노래면 좀 재밌을지도. 원영이 플레이리스트는 녕인데 영으로 끝나는 이름들은 다 저렇게 줄이는 게 트랜드인 건지.


" 이름이 지영이라서 죵이에요? "

" 네, 친구들이 그렇게 줄여서 불러요. 회사 분들도 죵이라고 부르시는데 대리님도 그렇게 부르셔도 돼요. "

" 끝 이름이 영으로 끝나면 그렇게들 많이 줄이나 봐요 "


 주변에 영으로 끝나는 사람이 또 있어요? 아, 한명 있어요. 지영씨 말고. 대리님 이거 노래 좋죠 제 최애곡!!, 지영씨 힙합 좋아하나 보네요 노래가 좋네, 저 힙합 러버에요, 시답잖은 얘기에 죵's 리스트로 흘러나오는 음악을 들으면서 노란 불빛이 흐드러진 한강 변을 따라 차를 몰았다. 다행히 차츰 풀린 정체로 너무 늦지 않게 동네로 접어들었다.



" 오늘 태워다 주셔서 감사해요. "

" 네, 들어가세요 "

" 제가 내일 커피 살게요 대리님 "


 괜찮다고 들여보내고는 곧바로 집 근처 족발집에 들러 매운 족발과 막국수를 샀다. 주에 한번은 먹는 것 같은데 이 집은 1인분을 팔지 않는 게 늘 아쉽다. 혼자 먹기엔 제일 작은 것도 많은걸 족발 메이트라도 동네에 구해야 할 판이다.









" 아, 맞다. 미안. 우유 깜박했다. "

" 괜찮아. 언니 그럴 거 같아서 내가 올 때 사 왔어 "

" 회사는? "

" 맨날 똑같지. 별일 있을 게 뭐 있겠어. 언니는? "

" 나도 아무 일 없었어 "


 언니는 그 매운 족발을 좋아하더라. 응 맛있더라고 여기. 매운 거 먹으니까 맨날 속이 안 좋지 하고는 샐러드를 오물거리면서 먹는 원영을 보는데, 그저께도 이런 대화를 했던 거 같은 기시감이 들었다. 그저께는 매운 족발이 아니라 짜장면이었나. 기름진 거 먹으면 속에 안 좋다는 잔소리였던 거 같은데. 회사는 어땠냐, 그건 속에 안 좋다 그런 매일 같은 대화 패턴은 이제 외울 수도 있을 정도였다.


 마주 보고 저녁을 먹지만 매일 서로 다른 메뉴를 먹는 커플이라, 연애 초반에는 제법 맞춰서 먹어보기도 했었다. 원영이 좋아하는 연어 아보카도 샐러드라거나 달달한 디저트 같은 것들을 제가 먹기도 했고, 제가 좋아하는 돼지국밥이나 삼겹살 같은 걸 원영이 같이 먹는다고 마주 앉아주기도 했었다. 그것도 하루 이틀이지 타고난 입맛을 바꿀 순 없는 법이었다. 8년을 만나면서 터득한 건 다른 건 다른 데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입맛이 다른 데로 취향이 다른 데로 넌 그렇구나 하고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 많은 사람들은 취향이 다르고 반대면 연애하기가 힘들다던데, 유진은 그런 부분에 공감을 못했다. 그냥 그런 거니까 그러려니 하면 되는 것 아닌가 하고. 모든 것을 꼭 같이 할 필요도 없고 전부 다 함께 같은 마음으로 겪어야 하는 건 또 아니지 않은가.


" 어머님께 전화 드렸어? 생신이셨잖아 "

" 아, 까먹었네. 늦었으니까 내일 드리지 뭐 "

" 점심때 내가 전화드리긴 했는데, 언니도 내일 꼭 드려 "


 엄마 생일은 맨날 까먹게 되더라. 언니가 안 까먹는 게 있긴 하냐고 은근히 타박을 하는 원영에게 새삼스럽다는 말을 하고는 씻으러 일어났다.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서 원영은 좋아하는 드라마를 보고, 씻고 나온 유진은 먼저 침실로 들어갔다. 오늘도 원영은 아마 로맨스 코미디 드라마를 보겠지. 전에는 옆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서 같이 봤었고, 그러다가 언제부터는 식탁에 턱을 괴고 줄거리를 듣게 되는 그런 드라마들 중의 하나가 될 게 뻔했다. 굳이 지금 안 봐도 원영이 귀에 딱지가 앉게 곧 말 할 테니까.


" 나 먼저 잔다. "

" 벌써? "

" 응, 오늘 퇴근길에 차가 좀 막혀서 피곤하네 "



오늘 하루도 큰 탈 없이 똑같은 하루가 가고 있었다. 매일 반복되는 1년 365일 중에 한 치도 다르지 않은 하루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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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퇴근을 하려는데 책상에 마카롱이랑 쪽지가 놓여있었다. 태워주셔서 감사합니다 ><. 아, 지영씨가 놓고 간 건가 보지. 별것도 아닌 일에 고마워하네 붙임성이 좋은 성격인가. 마카롱 같은 달달한 디저트는 안 먹지만 원영인 좋아하니까 집엔 가져가야겠다 싶었다. 오늘은 저녁으로 뭘 먹을지를 생각하다가 간만에 선배나 만나서 술이나 한잔하기로 했다. 약속 같은걸 나간 지도 꽤 오래된 거 같으니까. 대충 선배를 만난다고 원영한테는 말하고 회사 근처 삼겹살집에서 술잔을 기울였다.


" 언니는 회사 어때? "

" 너 만나서도 회사 얘기하고 싶지 않다. 부장 죽이고 싶어 "

" 사람 사는 거 다 똑같구만? "


 그럼 뭐 나는 다르게 사는 줄 알았냐며 소주를 털어 넣은 가을이 삼겹살을 뒤집었다. 근데 원영이도 오라고 하지 원영이 회사가 먼가? 응 원영이 회사가 여기서 좀 멀어 공덕 쪽에 더 가깝지 그리고 걔 삼겹살 별로 안 좋아해. 그랬나? 학교 다닐 땐 잘 먹지 않았냐고 가을이 갸우뚱했다.




" 인생이 재미가 없어 요즘 "

" 야 재밌는 인생이 어디 있냐. 다 그러고 사는 거지. 안정적인 게 좋은 거야. 오히려 버라이어티한 게 더 최악의 인생이야."


 그냥 회사 다니고 주말에 데이트도 하고 그러고 사는 건데 뭐 별거 있냐. 원영이랑 여행이라도 가 요즘 일본 여행 많이 간다더라 항공권도 많이 풀리고, 얼마 전에 특가 뜬 거 캡처해놓은 걸 보내주겠다는 가을에게 됐다고 여행 가려면 또 일정 짜야 하고 귀찮기만 하지 고개를 저었다.


" 니가 뭐가 귀찮아? 어차피 원영이가 다 알아보고 일정도 다 짤 텐데 "

" 원영이도 그거 하는 거 귀찮겠지 "

" 지가 할 생각은 안 하고 하여튼 "


 너 같이 무신경한 애를 장원영이 어떻게 8년을 만나고 있냐는 구박을 들으면서 그렇게 구박 할 거면 삼겹살을 언니가 사라고 받아쳤다. 뭐라도 사주고 구박을 하시던가. 타고나길 무던하고 무신경한걸 어떻게 하란 거야. 중고등학교 때부터 달고 살던 삼무유진이라는 별명만큼 타고난 무신경함은 서른줄에 접어들어서도 예리해질 줄 몰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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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웬 마카롱이야? 언니 마카롱 안 먹잖아 "


 유진의 옷을 받아서 정리하던 원영이 주머니에 마카롱을 발견하고 말했다. 쪽지도 있네? 차를 태워줬어?


" 아, 후배가 태워줘서 고맙다고 사줬어 "

" 여자 후배인가 봐? "


 유진이 사 온 아이스크림을 냉동실에 넣으면서 여자 후배라고 대답했다. 스물셋인가 넷인가 붙임성이 좋더라 요즘 애들은 다 그렇게 붙임성이 좋은 건지 말을 잘 걸더라는 얘기를 원영에게 했다. 우리 동네 근처로 이사를 왔다고 하더라고 종종 태울 일이 있지 않겠냐고 하고는 씻고 나왔다. 원영은 그새 드라마를 본다고 거실에 자리를 잡고 앉아있다가 유진에게 요새 인기 많은 거라고 같이 보자고 했다. 좋아하는 드라마라고 하면서.


" 나중에 완결 나면 보던지 할게. 나 먼저 잔다 "









 일찍 자려고 누웠는데. 아, 오랜만에 삼겹살을 먹어서 그런지 좀 속이 더부룩한 것 같기도, 속은 메스껍고 쉽사리 오지 않는 잠 때문에 잠시 뒤척거리는데 어떻게 알았는지 방에 들어온 원영이 바로 손을 눌러준다.


" 체한 거 같아? "

" 모르겠네... 술 때문인지 체한 건지.. "

" 손 차가운 거 보니까 체한 거 같아. 소화제 줄게 "


 원영이 거실 장에서 꺼내온 소화제 한 알을 겨우 넘기고 이불을 끌어올리는데 옆에 누운 원영이 계속 손을 눌러준다. 너 피곤한데 그만해도 괜찮다고 해도 언니는 소화제 잘 안 들어서 손 눌러야 한다고 꾹꾹 누르는데 누르는 자리마다 아파서 아아- 소리가 나온다. 된통 체했나보다. 체하기만 하면 올라오는 뻐근해진 뒷목을 원영이 새벽 내내 만져줬다. 미안하다고 할 때마다 뭐가 미안하냐는 말이 매번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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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간만에 주말에 수목원을 가기로 해 이른 오전부터 출발을 했는데, 아니나 다를까 주말 고속도로가 꽉꽉 막혔다. 사람들이 죄다 가평을 가나 보네 거기 뭐 대단한 거 있나. 아, 나도 수목원가지. 가다서다는 반복하는 차 안에서 한숨을 쉬었다. 그냥 집에서 배달이나 시켜 먹고 TV나 보는 게 나을 거 같은데 원영은 가끔 주말에 꼭 밖에 나가자고 했다. 이것 또한 매우 다른 우리의 취향 차이 중 하나겠거니 하고 말았다. 유진이 안 가겠다고 하면 또 거기에 원영도 맞춰주니까 내가 맞춰서 나오는 날도 있어야지.


" 수목원 거기가 뭐 유명한데야? "

" 뭐 엄청 유명하고 그런 건 아니구... 주말인데 바람 쐬면 좋잖아. 거기 근처에 바닐라라떼 맛있는 카페도 있대 "


 넌 바닐라라떼 마시지도 않으면서 바닐라라떼가 다 거기서 거기지 뭐 맛집이 따로 있냐고 구시렁거렸다. 운전할 때 노래 들으면 좀 덜 지루하지 않겠냐고 원영이 능숙하게 노래를 틀었다.



" ...이건 누구야? "

" 뭐가 "

" 죵? 이라고 목록에 있는데? "

" 아, 회사 후배. "

" 그래..? "


 전에 마카롱 준 친구. 이름이 지영이거든 그래서 줄여서 죵이라더라, 옆단지 살더라고 요즘 종종 태워준다는 말을 했다. 차도 막히는데 휴게소 들러서 국밥을 먹을까 말까 생각을 하다가 원영이 카페를 가자고 했으니 분명 종류별로 케이크를 먹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 배를 비워야겠다 싶었다. 국밥으로 배부른 상태에서 케이크를 먹으면 속이 쉽지 않을 것 같았다.


" 아, 너 리스트에 힙합도 혹시 있어? "

" 힙합? 언니가 힙합을 들어? "

" 어, 몇 번 들었는데 좋더라 "


 원영이 어느새 아무 힙합 노래를 찾아서 틀고는, 가만히 창을 내다 보다가 차가 너무 막히니까 그냥 집에 돌아가자고 했다. 괜히 계속 구시렁거려서 기분이 상했나 싶었다.


" 그 카페 가고 싶다며, 조금 더 가면 정체 풀릴 거 같으니까 일단 계속 가보자 "

" 아니야. 그냥 가기 싫어졌어. 집에 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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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럼 집에는 안 들어오겠네? "

" 아마도? 세종에서 그냥 하루 자지 않을까 싶은데 "

 갑작스럽게 잡힌 출장으로 거실에 캐리어를 펼쳐놓고 속옷이며 세면도구며 옷가지를 챙기다가, 세종에 천안까지 들르니까 기념품으로 호두과자를 사다 주냐는 말에 원영이 그걸 선물이라고 사다 준다는 거냐고 어이없게 웃었다.


" 휴게소에서 제일 맛있는 게 호두과자아냐? "

" 언니, 휴게소에서 제일 맛있는 건 소떡소떡이지. 근데 선물을 휴게소에서 사 온다는 게 모야 진짜 "



 입을 삐죽 내밀고 뾰로통한 게 영락없이 스물하나 때 같아서 참 한결같은 사람이라고 생각하다가 귀엽다고 말할 뻔한걸 말았다. 나이 서른에 주책스러운 말을 할 뻔했네.


" 갖고 싶은 거 있으면 톡해. 근데 나 또 까먹을 듯 "


 언니가 뭐 까먹고 잊어버리는 게 하루 이틀이냐는 말이 돌아왔다. 소파에 누워있다가 갑자기 일어나선 캐리어에 스킨로션이며 드라이기에 소화제까지 챙겨 넣던 원영이 언니는 나 없으면 진짜 어떻게 살 거냐고 했다. 나 서른인데 왜 못살아 애 아니라고 구시렁거리다가 등짝이나 맞았다. 등이 얼얼했다.






 대전부터 세종 천안 정신없는 출장 루트로 혼은 쏙 빠지고 출장 메이트들 끼리 호텔 방에서 맥주나 기울이는데 다들 이제 결혼을 언제 하니 그런 쓸데없는 얘기들이나 했다.


" 안 대리님은 연애 얼마나 하셨댔죠? "

" 8년째 만나고 있어요 "

" 와, 8년째 연애 중이시면 서로 모르는 거도 없겠네요 "

" 그렇지만도 않은 게... 나 맨날 까먹어서 "


 애인 서운하게 까먹으면 어떡하냐는 최 대리에 말에 무신경한 대로 또 그게 매력인 사람이 있는 거라고 지영이 유진 편을 들었다.


" 최 대리님, 츤데레 몰라요? 약간 요즘 그런 스트가 오히려 인기라니까요 "

" 츤데레 그거 뭔데 안대리 같은 거야? "

" 요즘은 대놓고 다정하면 또 질려한다니까요. 저 보세요 그런 거 딱 질렸어요 "


 최 대리랑 지영이 츤데레니 뭐니 하고 투닥거리는 게 그냥 기가 막혔다. 최대리도 한참 어린애랑 뭘 저런 거로 투닥거리고 있나 싶고. 자꾸 자기편을 들어달라고 눈짓을 하는 지영에게 대충 네네 지영씨 말이 맞는 거 같다고 해줬다.


" 전 아이스크림 좀 사러 나갔다 올게요 "

" 안대리님 아이스크림 드시고 싶으세요? "

" 어... 그냥 술 들어가니까 좀 바람 쐬고 싶어서요 "


 자기도 아이스크림이 먹고 싶다고 따라나서는 지영이랑 졸지에 둘이 편의점을 가게 됐다. 바닐라 아이스크림을 좋아한다고 대리님은 어떤 아이스크림을 좋아하냐고 묻는데 사실 딱히 아이스크림을 좋아하진 않는다고 했다. 언제부턴가 습관처럼 술 마시면 초코아이스크림 사는 게 그냥 버릇이라고. 바닐라가 더 맛있다는 일장 연설을 하는 지영의 말을 들으면서 아이스크림을 고르는데 원영에게서 전화가 왔다.


' 출장 가서 통 연락이 없어 왜 '

' 미안 바빴어 '

' 저녁은? '

' 먹었어 지금 사람들이랑 맥주 한잔하고 편의점 잠시 왔어 '


 안대리님. 아이스크림 초콜릿 맛으로 사요? 술 더 살게요? 묻는 지영의 말에 그러라고 고개를 끄덕여줬다. 아, 그거 말고 초코아이스크림이요.


' 옆에 누구야? '

' 어, 출장 같이 온 후배 '

' 같이 술 마셨어? '

' 응, 맥주 마셨어 '


 너무 많이 마시진 말라고 하는 원영의 말을 뒤로하고는 다시 호텔 방으로 올라갔다. 이미 테이블에 코 박고 딥슬립 중인 최대리를 보고 진짜 가관이라고 생각하면서 방에 들쳐 옮겼다. 지영이 한창 재밌을 타이밍인데 파해서 아쉽다고 꿍얼거렸다.


" 대리님 저희 한 잔만 더해요. 저 지금 딱 재밌다고 생각했단 말이에요 "


" 다음에 해요. 오늘 너무 늦었으니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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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출장에서 복귀하는 길에 음료 한 잔을 사려고 기다리는 사이, 지영이 유진을 알아보고 옆에와 섰다. 원영이 할 말이 있다고 언제 오냐는 문자를 남긴 걸 보고 답변을 하려다가, 제 커피까지 결제하는 지영을 신경 쓰는 통에 미처 문자를 못 보냈다. 집까지 차 태워주시니까 커피를 사겠다고 하는데, 대리가 되어서 사원한테 커피를 얻어 마실 순 없고 이따 줘야겠다 생각하면서 마카롱을 샀다.



" 근데 대리님, 동네에 매운 족발 맛집은 없어요 혹시? "

" 매운 족발 좋아해요? "

 너무 좋아하는데 동네에 어디가 맛집인지 모르겠어요. 혼자 사니까 제일 작은 거 시켜도 너무 많고 딱 1인분만 포장해주는데 있으면 좋겠다고 하는데 단골집을 추천했다. 저도 매운 족발 좋아하는데 거기 포장도 되고 맛있어요. 테이블도 있어서 먹고 갈 수도 있어요 1인분만은 안 팔지만.


" 대리님도 매운 족발 좋아하세요? "

" 네, 좋아하는 편이에요 "

" 그럼 거기 좀 데려가 주세요. 혼자 가면 남는 거 너무 아깝잖아요 다 못 먹구 "


 다음에 한번 같이 가자는 의례적인 인사말을 했는데 대뜸 오늘 먹으면 안되냐고 해서 약간 당황했다. 출장 뒤풀이라는 그럴듯한 말을 갖다 붙이는 게 어이없으면서도 웃겼다. 어제 술 마시자 한걸 거절한 게 맘에 걸려서 그러자고 했다. 젤 작은 거 하나 시켜서 둘이 먹으면 될 것 같았다.






" 어머, 여기 진짜 맛집인가 보네요? 사람 짱 많다 "

" 이 동네에서 유명해요. 작은 거 하나 시킬게요 "


 족발에 소주가 빠질 수 있냐며 소주도 한잔하자고 해서 생각에도 없던 술을 하게 됐다. 어려서 그런지 제가 별 대꾸를 안 해도 쫑알쫑알 잘도 얘기를 했다. 최근 '연인'이라는 드라마가 엄청 재밌다면서 완전 지금 '연인' 홀릭이라고, 남자주인공이랑 여자주인공 둘 케미가 미쳤다고 대리님도 보라는 얘기를 했다. TV를 잘 안 봐서 드라마 잘 모른다고 근데 지영씨가 그렇게 얘기하는 거 보니까 재밌는 드라마인가 보다 하면서 대충 맞장구를 쳐줬다. 한잔 두잔 하다 보니 시간이 가는 걸 모르다가 집에 들어가니 10시가 넘은 시각이었다.










" 내가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저녁 먹고 올 거면 말해주지 "

" 미안. 연락하는걸 깜빡했어 "

" 술 마셨어? "

" 어, 후배 혼자 마시게 하긴 뭐해서 그냥 거들었어 "


 살짝 휘청이는 유진을 부축한 원영이 유진의 자켓이랑 캐리어를 받아 옮겼다. 웬 마카롱이야? 이것도 그 후배가 줬어?


" 아, 그거 내가 줄라고 산 건데 깜박했네. 아까 커피를 얻어 마셨거든 "

" 언니가 샀다구? "

" 아까 겸사겸사 "

" 지금 밥 같이 먹은 것도 그 후배야? "

" 응 "


 원영이 가만히 마카롱을 식탁에 내려놓았다. 유진이 냉동실에 사 온 아이스크림을 넣으면서 어지럽다고 구시렁거리고는 차 태워주는 그 후배인데 뭔 드라마 얘기를 한 시간을 하더라고, '연인' 이라는 드라마가 요즘 유행인가 보더라는 말을 하면서 하도 재밌게 얘기를 하길래 들어주고 왔다고 하는데 얘기를 잘 듣고 있는 줄 알았던 원영이 식탁 의자에 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리고 고개를 숙였다.




" 왜.. 할 말 뭐 였는데? 무슨 일 있었어? "

" 아니... 무슨 일은 언니한테 있었네 "



한숨을 길게 내쉰 원영의 목소리가 떨리고 있었다.









" 언니 나는... 이 집에 있는 가구가 된 거 같아 "





 무슨 말을 하는 거지. 마주 앉아서 무슨 말을 하는 건지 물었다. 무슨 말 인지 이해를 못하겠다고. 원영이 건조하게 말하는데 무슨 말인지 알아 들을 수가 없었다. 언니 차에 지영인지 지현인지 그 사람 휴대폰 연결 돼 있는 거도 싫고 그 사람을 태워주는 거도 싫다고 말 하는데 어안이 벙벙했다. 너 그런 거 신경을 안 쓰는 거 아니었냐는 제 말에 원영은 또 다시 한숨을 쉬었다. 나 그런 거 신경 써, 대학교 때도 싫어했잖아 그런 거. 언니가 그냥 까먹은 거지. 그 후배가 말했다는 드라마도 내가 계속 같이 보자고 한 거였잖아. 근데 언니 관심도 없었잖아. 아, 그 드라마가 같은 드라마 였는지 미처 몰랐다.




" 출장 가서도 내가 먼저 연락 할 때까지 언니 문자 한 통도 안 한 거 알아? 그 후배랑 밥 먹으러 갈 때, 언니 내 생각은 하나도 안 했지? "

" 원영아 이게... 내가 걔랑 뭘 한 게 아니야..."

" 알아. 근데 언니... 나 집에서 언니 기다리고 있었잖아 "



 언니가 그 후배랑 밖에서 밥 먹고 드라마 얘기하고 술 마시는 동안 난 집에서 혼자 언니 기다리고 있었잖아, 근데 언니는 내가 마치 집에 있는 소파처럼 그냥 가만히 있는 거라고 생각하잖아. 내 생각은 조금도 안 하잖아. 원영의 눈에서 눈물이 솟아서 작은 얼굴을 타고 흘렀다. 미안하다고 왜 우냐고 울지 말라고 하고 싶은데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정말 내가 그랬던 것 같기도 했다. 원영의 말이 하나도 틀리지 않는 것 같기도. 당연히 집에 늘 원영이 있을 거라고 생각했다. 내가 늦거나 뭔가를 까먹어도 그냥 이해하고 알았다고 할 거라고 생각했다. 원영의 어깨가 연신 떨리고 시계 초침 소리만 나는 집안에 흐느끼는 소리만이 있었다.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 정신이 아득해졌다.


 그렇게 한참을 울고 나서는 원영의 입에서 그만하자는 말이 나왔다. 그만하는 게 맞는 거 같다고. 껍데기만 남은 나를 붙들고 사는 거 같다고. 그리고는 그대로 일어나서 나갔다.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서 그냥 혼자 덩그러니 앉아있었다. 무슨 일이 지금 일어난 건지 모르겠고 아직 내가 말을 다 못했는데 혼란스러웠다. 술에 취해서 지금 꿈을 꾸는 건가. 귀가 멍멍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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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영은 사흘이 넘게 집에 안 들어왔다. 처음에는 곧 들어올 거고, 그럼 잘 얘기를 해서 풀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오해가 서로 있는 것 같으니까 내가 지영이란 후배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고 해명을 잘 하면 될 것 같았다. 본가에 가 있겠거니 화가 풀리면 잘 얘기하면 될 거라고 생각했다.



[ 짐은 주말에 가지러 갈게 ]


 짐을 가지러 온다는 게 무슨 말이지. 아예 나가겠다는 건가. 그만하자는 말이 정말 그만하자는 말이었나. 사무실 복도를 걸어가면서 원영의 본가에 한번 가봐야 하는지, 회사로 가서 얘기를 한번 해봐야 하는지 오만 생각을 했다. 회사로 가면 싫어할 거 같은데 근데 전화를 하자니 마지막에 울면서 나가던 게 생각나서 더 정떨어져야 할 것 같았다. 문자로 구구절절 남길 수도 없고 마땅한 방법이 없는데 어떻게 해야 하지.



" 안대리님? 안대리님?! "

" 아, 네네 "

" 무슨 일 있으세요? 정신이 요즘 통 없으시네. 사무실 반대 방향이에요 "


 엄한 마케팅 사무실로 가는 입구에서 최 대리랑 딱 마주쳤나보다. 아, 내가 길을 또 잘 못 들었구나. 최 대리한테 고맙다는 말을 하고는 다시 돌아가 사무실 자리에 앉았다. 옆자리 김 대리가 다음 주에 있을 회의 아젠다에 대해서 뭐라 뭐라 말을 하고는 있는데 하나도 귀에 들어오지를 않았다.


 마침 정신없는 타이밍에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복도로 나와서 전화를 받는데 까랑까랑한 엄마 목소리가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 너는 어쩜 엄마 생일에 전화를 한번 안 하니 '

' 아, 정신이 없어서 깜박했어요 '

' 자식 키워봐야 소용 하나도 없다더니, 내 딸은 뭐하고 원영이만 내 생각을 해 아주 '

' 죄송해요. '

' 원영이한테 고맙다고 해라. 집으로 홍삼이랑 이것저것 보냈더라. 내 딸이 넌지 원영인지 모르겠다. '


 하여튼 무신경한 너를 낳은 자기가 죄가 많다고 주말에 같이 와서 밥이나 먹으라고 하고는 냅다 전화를 끊어버리셨다. 엄마 딸이 죄가 많아서 지금 원영이랑 같이 밥을 먹으러 못 갈 상황이라는 건 말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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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반차를 쓰고 무작정 원영의 회사로 차를 몰았다. 원영의 퇴근 시간이 저보다 빠르니 어떻게든 마주치려면 빨리 회사 앞으로 가 있어야 했다. 신호에 걸리는 걸 틈타 차량 블루투스 연결 목록에 죵이라고 등록되어있는 걸 삭제했다. 진짜 이게 뭐라고 이걸 아무 생각 없이 진짜 미쳤지 내가. 이제 다시 유진의 차 블루투스 목록에는 원영의 이름만이 남았다. 너무 늦은 건지는 모르겠지만.



 원영의 회사 앞에 주차를 해놓고 기다리면서, 수목원 가던 날이 생각이 났다. 블루투스 때문이었겠구나 그날은, 진짜 나는 바보 천치에 머저리구나. 익숙해져서 놓치고 잊은 게 너무 많았다. 대학생 때 원영은 제가 밥 먹을 때 후배 깻잎을 잡아주는 것도 싫어했었는데 왜 블루투스 같은걸 아무렇지 않아 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잘 까먹는다 하더니 까먹으면 안되는 것도 까먹는 등신이다.



 회사 로비만 쳐다보고 있는데 단정하게 슬랙스에 롱코트를 받쳐입은 원영의 모습이 보였다. 급격히 쌀쌀해진 날씨에 원영 앞으로 입김이 부서져 흩날렸다. 쌀쌀한데 머플러라도 하지 추위도 많이 타면서. 머플러를 챙겨서 차에서 내리려다가 그러지 못했다. 동료로 보이는 사람이 무슨 말을 건네면서 원영에게 꽃을 안겨주고 있었다. 무슨 대화인지 들리지는 않지만 원영이 끄덕이면서 환하게 웃는데, 저렇게 웃는 걸 본지가 너무 오래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 천천히 좀 마셔라 이 집 술을 니가 다 마실 거니?"


 가을이 유진의 소주잔을 잡아챘다. 안유진 이게 아주 차이고 진상을 떨고 있네 그러게 진작 좀 잘하지 밥팅아. 가을의 말은 듣는 둥 마는 둥 하면서 유진은 계속해서 잔을 들었다. 그러니까 외간 여자를 차에는 왜 태우고 다니냐는 타박이 연신 유진에게 화살처럼 꽂혔다.


" 지영인지 나발인지랑은 아무 사이도 아니라며 "

" 당연히 아무 사이 아니지... 근데 더 큰 문제가 있더라고 "

" 뭐가 또 문젠데. 아주 문제 덩어리네 니가 "

" 언니, 그거 알아...? 원영이 꽃 좋아하거든. 근데 내가 생각해보니까... 내가 원영이 꽃 사준 적이 8년 동안 딱 한 번 밖에 없더라고. "

" 자랑이다 그게 "


 너는 뭐 도대체 어떻게 된 인간이냐고, 원영이가 8년 동안 만난 게 용하다 나였으면 1년 만에 헤어졌다면서 가을이 혀를 찼다. 생일에도 꽃 한번을 안 사주면서 외간 여자 차에 태우고 술 마시고 다니는 게 바로 내 앞에 앉아있는 안유진이라니 네이트판에 올라왔으면 댓글로 욕이 300개 달렸을 거라고 유진을 씹어댔다.


" ...진짜 거지 같지. 알고도 8년을 못 해주는 나 같은 미친년이 있는데... 그걸 바로 해주는 사람도 있으니까 "


원영이는 진짜 나를 왜 만났을까








 대리기사님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면서 차창에 이마를 댔다. 차가운 창에 머리가 또렷해지긴 거녕 더 지끈대고, 뿌예진 한강 변의 불빛이 눈 안에서 일렁거렸다. 원영이 나보다 더 좋은 사람을 만나는 게 낫다는 생각을 했다. 애초에 8년이나 이 지경이었으면 난 더 나아질 구석이 없는 인간인 거다. 타고나길 하자가 있는 것처럼 어딘가 나사가 하나가 빠진 게 분명했다. 정 떨어질 만한 종족인 거지, 1년을 이랬어도 정 떨어질 텐데 8년을 이 꼴을 하고 있으니. 대리기사님이 룸미러로 보면서 휴지를 드리냐고 물었다. 창에 머리를 대고 그냥 감정을 쏟아냈다. 전부 다 내가 잘못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원영에게 닿는 게 미안해지는 감정이었다.





[ 토요일에 5시까지 집에 없을거야. 짐 편할 때 와서 가져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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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뿌예지는 시야에 흔들리는 몸을 이끌고 겨우겨우 현관 비밀번호를 눌렀다. 원영의 생일이랑 제 생일을 섞어 쓰는 비밀번호. 헛웃음이 나왔다. 언니는 잘 까먹으니까 번호 기억하기 쉽게 생일로 하자고 내 생일은 안 까먹을 거지? 원영이 설정하던 게 엊그제 일 같다. 올해 원영의 생일엔 뭘 했던가. 그건 기억이 나질 않는다. 분명 내가 또 한심한 짓이나 하고 있었겠지. 힘겹게 신발을 벗고 집안으로 들어서는데, 불을 켜놓고 간 건지 집안이 환했다. 요즘 정신이 없어서 아침에 불 끄고 가는 것도 잊었었나. 내가 그렇지 뭐



" 술 마셨어? "

 원영의 목소리인 것 같은데 그럴 리가 없어서 인상을 썼다. 초점이 맞지 않는 시야 때문에 형체도 잘 구별이 되지 않았다. 하, 취해서 환청이라도 듣는 건지 머리를 여러 차례 흔들고는 입고 있던 자켓을 벗어 바닥에 놨다. 아, 이거 원영이가 싫어하는데. 다시 거실 바닥에 자켓을 주우려다가 그대로 고꾸라져서 대자로 누워버렸다. 잘 떠지지 않는 눈을 겨우 치켜뜨고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시야에 뿌옇게 원영이 들어왔다. 꿈이 아니었나. 보고 싶었다 그 며칠 새에도. 제 옆에 쪼그리고 앉아서 술을 이렇게 마실 거면서 왜 연락을 안 했냐고 물었다.


" ..더 정떨어져 할까 봐 그래서 안 했어..."

" 회사 앞까지 왔으면 말을 해야지 왜 그냥 갔는데? "

 아, 내 차를 봤구나 싶으면서도 왜 그냥 갔는지 입 밖으로 나오질 않았다. 뭐라 말할까. 너 웃는 거 본지 너무 오래됐다고? 근데 그 사람은 너무 쉽게 웃게 해주더라고? 스스로 너무 한심했다. 그냥 제가 못난 거를 뭐라 말해야 할지 모르겠다. 할 말을 고르면 고를 수록 원영의 말이 맞다는 생각만 머릿속을 가득 채웠다. 너는 나보다 더 나은 사람을 만나야 하는 사람이라고 말을 해야 할까. 취해서 자꾸 뒤로 넘어가는 몸을 힘겹게 일으켜서 겨우 몸을 세우고 앉았다.


" ..그냥 너 말이 맞는 거 같아서 그랬어 "

" 무슨 말. 그만하자는 말? "

" 어 "

" 그래서 토요일에 짐 가지러 오라고 했어? "

" .... "

 원영이 눈가를 꾹꾹 누르고는 계속 유진의 어깨를 때렸다. 하나도 아프지가 않았다. 넌 힘도 없으면서... 내 어깨보다 너 손이 더 아프겠다 그만해. 원영의 가는 손목을 잡았다.


" 그럼... 나 다른 사람 만나..? "

" ... "

" 언니... 그냥 다음부터 안 그러겠다고 하면 안돼...? 그냥...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하면 안돼..?"


 이미 원영은 울고 있었다. 내가 또 해주는 것도 없이 널 울리네. 원영아 넌 날 왜 좋아해. 너가 싫어하는 것도 엄청 많이 하고 네가 좋다고 하는 건 다 까먹고 안 해주고 등신 같고 최악인데. 아, 생각만 한다는 게 입 밖으로 말을 했나보다.


" 난 그냥 언니를 좋아해... 언니도 나 좋아하잖아 맞지..? "

 다시 뒤로 누우면서 원영을 당겨 안았다. 쉬이 당겨온 가녀린 몸이 폭 안겨 왔다. 이마에 입을 맞춘 채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안겨 오는 원영의 부피감이 너무 익숙해서 유진은 마치 제 몸이 여기에 맞춰서 만들어진 것 같았다.


" 언니... 말로 해주면 안돼..? "

" ...나도 그냥 너를 좋아해 "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우유도 안 까먹고 사 오고 너 좋아하는 꽃도 사주고 그 후배 차도 이제 안태워줄게 블루투스는 진작 삭제했고 마카롱도 갖다버렸어 원영의 작은 귀에 대고 속상하게 해서 미안하다고 족발도 안 먹겠다 말했다.


원영이 알았다고 가만히 유진의 뺨에 입을 맞췄다.

 언니 근데 나 때문에 매주 세차하고 옷도 내가 싫어하니까 바닥에 안 벗어놓고 술 취하면 맨날 내가 좋아하는 아이스크림만 골라서 사 오잖아. 지금도 식탁에서 녹고 있다고 유진의 허리를 끌어안고 어깨에 얼굴을 부볐다. 그리고 언니 족발 사 올 때 나 먹으라고 막국수도 맨날 사 오면서... 언니 진짜 바보야 자기가 그러는 것도 몰랐지



" 내가 잘할게 원영아, 진짜로 "






근데..너, 그 꽃 준 남자는 누군데..?

부서 대리님. 나 특진했어. 그날 할 말 있다고 했잖아

아.. 미안해..

꽃 사줄 거야?

응.. 지금 사줄게

지금 문 연 꽃집 없어 바보야 그냥 안아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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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번에 가려다가 못 간 수목원을 다시 가기로 했다. 오늘도 차가 무지하게 막히는데 원영이 처음부터 노래를 틀었다. 원영의 플레이리스트가 차 안에 울렸다. 본인 만큼이나 달달한 노래들. 원영이 힙합 별로라는 얘길 하다가 언니는 얼마 전에 힙합 노래 좋다고 하지 않았냐고 해서 질색팔색하고 힙합은 안 듣는다고 했다. 원영이 키득키득 웃었다.


" 그 카페가 바닐라라떼가 맛있는 카페라고 했던가? "

" 웅, 거기 딸기 쇼트케이크도 있어, 이거 봐 사진 예쁘지 "


 비주얼이 그럴듯한 케이크가 인스타에 여러 장 올라와 있었다. 요즘 스타일인가 보네 사람들이 여럿 태그를 달아둔 거 보면. 원영이 좋아하는 스타일이기도 하고, 딸기 케이크를 유독 좋아하니까.


" 에스프레소도 맛있대? "

 언니는 에스프레소 안 마시지 않냐고 하는 원영에게 니가 마시지 않냐고 하면서 휴게소 들를 건지 물었다. 다음 휴게소가 좀 큰데 여기서 소떡소떡 사서 먹으면서 갈까? 차 계속 막힐 거 같은데. 원영이 좋다고 신이 나서 대답했다.


" 가평까지 가는 거면 기왕 거기까지 간 거 카페 갔다가 쭉 고속도로 타고 속초 가자. 어때? 바다 보러 간 지 오래됐잖아. "

" 당일치기로 운전하면 언니 너무 힘들지 않아? "

" 하루 자고 오면 되지 "


 그럼 호텔 알아봐야겠다. 원영이 냉큼 휴대폰을 들고 숙소 앱을 뒤졌다. 이 호텔은 인테리어는 이쁜데 주변 인프라가 별로고 이 호텔은 오션뷰인데 조식이 별로고 이 호텔은 조식은 맛있는데 뷰가 애매하다고 꿍얼 거리면서 얘기하는 게 귀여웠다. 이번엔 참지 말고 말로 할까.


" 너 왜 이렇게 귀엽냐 "

" 뭐야 갑자기.. "


 말이랑 행동이 다르게 원영이 손을 얽혀온다. 다르던 두손의 온도가 서로 맞춰진다. 아주 미지근하면서도 안락한 그런 온도로.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