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이상하게 아침부터 재수가 없었다. 차 앞에 기어를 올려놓은 가로 주차 차량으로 헐레벌떡 뛰어서 지하철을 타러 와야 했고, 분명 7시 48분으로 표시되어있는 시간표는 어찌 된 건지 지하철은 황망하게 유진을 남겨두고 먼저 떠나버렸다. 난감하구만. 다음 7시 55분으로 표시된 열차를 기다리면서 유진은 아침 커피를 스킵해야하는지 시간을 계산했다. 월요일 오전을 카페인 없이 과연 버틸 수 있을까 어림도 없지. 


 손목에 시계는 어느새 7시 50분, 55분 차를 타도 대략 8시 40분에는 도착할 테니까 1층 카페에 들러서 커피 한 잔 테이크아웃할 시간은 있을 터였다. 오전에 새로운 본부장 소개하는 자리가 있댔는데 행여나 늦을 바엔 그냥 커피를 스킵하는게 좋을까. 신임 본부장 소개하는 자리에 뒷문을 열고 들어갔다가는 모두에게 주목이나 당하는 꼴인데. 200명은 족히 들어가는 대회의실에 쭈뼛쭈뼛 고개를 숙이고 들어가는 장면을 상상하니 그새 식은땀이 나는 듯 아찔해지다가 심장이 쿵쾅댔다. 아침엔 분명 1층 카페가 북적일 텐데 열차를 기다리면서 머리를 굴리다가 그래도 단골인 유진에게 1층 카페 사장님이 빠르게 한 샷 주시지 않을까 하는 기대를 걸어보기로 했다. 그런 생각을 하는 사이 55분 열차가 들어왔다.






"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잔이요. 샷 추가해주세요. "


 손 빠른 1층 카페 사장님이 오실 줄 알았다는 듯 주문과 동시에 유진 앞에 테이크아웃 잔을 내밀었다. 평소보다 좀 늦게 출근하시네요. 말도 마세요, 재수 없는 아침이었어요. 아침마다 매일 얼굴을 보는 사장님이 앞에 밀려있는 주문을 앞질러준 커피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낑겨탔다. 지겨운 월요일. 차에 지하철에 재수 없다 했는데 그래도 딱 맞춰 나오는 커피 한잔이 위안이 되는 게 저도 이제 이 서울에 늙은이가 다 된 건지. 16층까지 오르는 엘리베이터 안에서 오늘 새로 온다는 본부장 얘기가 귓바퀴 틈을 비집었다. 유학파라더라, 몇살이라더라, 여자라더라, 그런 시시콜콜한 얘기들. 










" 새로 오는 본부장 미국 유학파라던데? "

" 뭐 사장 딸이라는 말도 있더라고요. 작년에 이혼하고 한국으로 왔댔나 아무튼 서른 하나랬나 서른둘이랬나 너무 어리지 않아요? "

" 엥, 아니라던데 계열사 이사 딸이래 "


 사무실안에서도 또 저 얘기, 어차피 곧 있으면 얼굴 보게 될 건데 뭐가 저렇게들 궁금들 한 건지. 어차피 도는 소문 중에 9할은 헛소문일게 뻔했다. 본부장이 유학파든 국내파든 사장 아들이든 딸이든 주워 왔든 우리 같은 일개미들과 무슨 상관이 있을까. 유진은 지난 밤 쌓인 메일을 옅은 한숨을 내쉬면서 슥슥 훑다가 마우스를 굴렸다. 아, 마우스가 왜이래... 마우스를 흔들어도 아래로 내려오지 않는 커서에 진짜 오늘 아침 일진이 왜 이러나 마우스를 또 총무과에 신청할 생각하니 귀찮음으로 한숨이 더 크게 나왔다. 








 신임 본부장 부임 행사인지 뭔지. 그럴듯하게 그래픽 작업을 한 현수막을 달아놓은 대회의실에 몸을 들이밀었다. 해외에서만 일하다가 한국에 오랜만에 들어온 거라고 했던가, 회사 정치에 까막눈인 유진은 그냥 대충 뒷자리에 자리나 채울 요량이었다. 앞쪽에 앉아 얼굴도장이라도 찍어보려는 아저씨들 뒤로 최대한 뒷줄에 앉으려고 몸을 빼던 게 무색하게도 자리를 맡아놨다고 손짓을 하는 최 대리 덕에 팔자에도 없는 3열 중앙에 앉게 됐다. 기왕이면 본부장이 우리 얼굴이라도 알면 좋잖아요. 본부장이 일개 대리 얼굴 알아서 좋을 일이 있을까요. 혹시 알아요? 나중에 우리 팀 쪽 사무실 쓰실지? 이때까지는 최 대리의 이 말이 씨가 될 줄 몰랐다. 


 선착순 자리 맡기도 아니고 뭐하러 자리까지 맡아주고 그러는지 뮤지컬로 치면 중앙 VIP 같은 석에 앉는 게 말이 되나. 본부장 소개 전에, 새로 발령 나는 팀장들을 차례로 소개하는 걸 들으며 30분째 박수를 치고 있으니 이제 손바닥이 아프고 슬슬 아침에 마신 투 샷 카페인도 바닥이 나는 듯 지루하던 찰나. 신임 본부장님 소개합니다. 쩌렁쩌렁 울리는 소리에 유진은 머리가 웅웅 거리다가 오늘 아침 자잘하게 재수 없는 일과가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스쳐 지나갔다.




" 안녕하세요. 장원영입니다. "




 아침부터 자잘하게 재수가 없더라니, 이러려고 그랬나보다. 하필이면 3열 중앙에 앉아서 저 단상 위에서 또랑또랑하게 말하고 있는 원영과 눈을 대번에 마주하게 된 것은 더 재수가 없는 일이었다. 내 표정은 지금 어땠을까. 유진은 제 표정이 태연했길 바라면서 아무렇지 않은 척 무거운 손을 끌어올려 박수를 쳤다. 머릿속으로 옆자리에 앉은 최 대리의 멱살을 잡고 너댓번 흔들었다.



 







" 본부장님 엄청 미인이시던데요. "

" 미국 유학파시라잖어 "

" 유학이랑 예쁜 거랑 무슨 상관이에요? "

" 영어 쏼라쏼라하면 더 예뻐 보이고 그런 거 아니야? "

" 과장님, 진짜 아저씨 같은 소리 하신다. "


 구내식당에서 하는 팀원들의 얘기가 빤하디 빤했다. 감자채볶음에 들어있는 당근을 골라내다가 이내 귀찮아진 유진은 그냥 감자를 먹길 포기하곤 어묵국이나 퍼먹었다. 국이 짜네요. 그래요? 전 괜찮은데 안 대리님 좀 싱겁게 드시나? 옆에서 다시 또 호들갑 떨면서 최 대리가 그새 본부장에서 주제를 짜고 달게 먹는 식습관으로 가져왔다. 요즘 저속노화밥 그런 게 있다잖아요. 서른넷부터 본격적인 노화가 시작이래요. 최 대리랑 안 대리도 내일모레면 서른 넷이니까 그럼 저속노화밥 먹어야겠다는 과장님의 말에 대충 맞장구나 쳤다. 저는 입맛이 고속노화 스타일이라서요. 최 대리는 아직 서른셋인데 무슨 말씀이시냐고 과장님도 누가 과장님 나이 올려 말하면 기분 나쁘실걸요? 과장님은 그럼 내일모레 마흔 하고 받아치는 게 퍽 웃겼다. 하여튼 웃긴 사람들.




" 주말에 소개팅 할 사람? 안 대리랑 최 대리 둘 다 솔로잖아 "

" 에이, 안 대리님은 안 하실 테니까 제가 하겠습니다 "

" 그래? 안 대리는 관심 없어? 나 아는 후배 동생이야 약사고 서른인데 연하는 별론가? "


 안 대리님 연애 안 한다고 벌써 스무 번은 말씀하셨는데 과장님은 꼭 안 대리님까지 껴서 말씀하시더라. 최 대리는 제가 급하다고 손을 들고는 유진이 신입 때부터 팀원들에게 딱지 앉게 한 말을 또 다시 했다. 안 대리님은 첫사랑을 거하게 실패하셔서 연애는 이제 거들떠도 안 보신다고 했었잖아요. 실 없이 웃긴 최 대리가 유진이 할 말을 대신 팀원들에게 앵무새처럼 반복했다. 첫사랑에 성공한 사람이 어딨어. 끝사랑이 중요하지 첫사랑은 그거 뭐 아무것도 아니라고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는 게 대한민국 국룰 아니야 김 과장의 말을 곱씹었다.






첫사랑은 이뤄지지 않는다. 

이뤄지지 않는 정도였으면 좋았을 텐데 그보다는 처참한 끝이어서 또 관자놀이 끝이 욱신댔다. 아련한 어린날의 풋사랑 같은 설렘과 떨림만 가득한, 그러면서도 가슴 한켠이 저린 그런 첫사랑 같은 거라면 좋았을까. 그런 첫사랑이라면 지금쯤은 술자리 안주처럼 올라오는 감자튀김 같이 가벼운 어린날의 추억이 되었겠지. 무겁게도 유진의 첫사랑은 스물둘부터 시작한 5년의 연애 끝에, 헤어지자는 말 대신 하얀 눈사람이 그려진 청첩장을 받게 되는 그런 엔딩이었다.











그 날, 그 순간 이 생생했다.

 

밖에는 첫 눈이 폴폴 나렸고 구세군 종이 흔들리는 소리가 창을 타고 넘는 한적한 카페 였다. 크리스마스에 첫눈이니까 완전 화이트크리스마스야 원영아. 별 다른 대꾸없이 겨울만 되면 더 빨개지는 작은 손으로 잔을 쥐고는 가만히 저를 바라보던 그 눈. 미안하다는 말은 하지 않겠다고 한 게 첫 마디였고 그동안 고마웠다는 게 마지막 마디였다. 그 두 마디의 간극 동안 유진은 입술을 떼지 못했다. 마주한 눈이 당당했고 오히려 제가 초라했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이런 상황을 예상했었는지 이상하게 눈물이 나지는 않았다. 예상한 성적표를 받아들이는 듯 앞에 내민 하얀 청첩장만 가만히 받아들었다. 만나는 내내 걔 어디 중견기업 3세라던데 그런 소문을 흘려들으면서도 어디 한켠에 묻어둔 결과였던 것 같다. 모든 것은 저의 탓인것 같다고.






 카페에 홀로 남겨져 창 밖에 눈을 등지고 그 청첩장의 글귀를 외울 정도로 들여다봤었다. 둘이 직접 지은 것 같은 글귀. 가운데 줄맞춤으로 까맣게 몰드가 되어박힌 글씨를 하나부터 열까지 꼼꼼하게 보고 또 봤다.




서로가 마주 보며 걸어온 사랑을 이제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는 사랑으로 키우고자 합니다.

새해가 밝아오듯 저희 두 사람이 사랑의 이름으로 길을 밝힐 수 있게 앞날을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장남 준형

차녀 원영


1월 1일 오후 1시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새해가 밝아오듯.. 사랑이라는 단어를 세번이나 쓴, 새해 첫날 결혼식에 맞는 글귀였다. 모든 자음과 모음이, 단어 하나하나가 다 날카로웠다. 이런 날카로운 칼로 쓰라고 세종대왕님은 훈민정음을 만드셨나. 


 청첩장을 받을 때는 담담하고 담백하게 받아놓고, 결혼식 날 그 순간까지 근 일주일을 집에서 꼼짝 없이 울었다. 낮인지 밤인지 날이 가는지 오는지 모른채로 울다가, 기억을 되감고 되감아 크리스마스를 백번 정도 같이 보냈으면 좋겠다고 울망거리면서 말하던 모습부터 전주 명소라는 은행나무 아래서 이런데서 나한테 프로포즈하라고 했던 때를 떠올렸다. 대학생이 무슨 프로포즈야. 언니 그런 말 하지말고 그냥 알았다고 해. 알았어. 롯데호텔에서하자 거기 신부대기실에 롯데월드 보일걸? 놀이공원이 보이는 신부대기실이 어딨어. 


 아마 내가 대수롭지 않게 생각한 그 언젠가 여름에 아빠가 유학가래 같은 말들이 대수롭지 않게 여기면 안되는 말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또 다시 기억을 되감아 한강대교에 듬성듬성들어온 주황등을 보다가 볼에 입을 맞췄을 때나, 처음 중앙 도서관에서 저기 죄송한데 이거 제 연락처거든요. 같은 말을 한 부분까지 기억을 더듬 었을때는 그냥 첫만남부터 잘못이었는지 저를 힐난했다.



 크리스마스를 백번 정도 같이 보냈으면 좋겠다고. 그러나 유진의 손에 원영의 청첩장이 쥐어진것은 같이 한 다섯 번째 크리스마스였다. 1월 1일 오후 1시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그날 그 시간 그 장소에는 가지도 못했다. 



 사랑하니까 축복 해줘야 하나 아니면 저주를 해야 하나 울어야 하나 울지 말아야 하나 결정하지 못했다. 어느 표정으로 서 있어야 하는지 알 수 없었기에 그냥 자리를 비우는 것을 선택했다. 비로소 원영의 마음에서 자리를 비워줘야 하는 시간이 온 것이라고.












 신임 본부장의 사무실이 저희 팀 셀에 위치한다는 소식에 김 과장은 입이 댓 발 나왔다. 최 대리의 말이 씨가 되는 순간이 온 것이었다. 오가면서 본부장 눈에 거슬리지 않으려면 신경 쓸게 한두 개가 아닐 거라고 시댁과 상사는 자고로 멀리 있는 게 좋은 거라는데 우리 팀이 전사에서 제일 구린 팀이 되었다는 게 김 과장의 주장이었다. 안 그래도 팀원도 꼴랑 4명이라서 지금 일을 인당 2인분씩은 하고 있는데 본부장 사무실까지 옆 셀로 쓰라니 이거는 아주 그냥 너무한 처사라고 김 과장이 연신 구시렁댔다. 저보다 더 하시겠어요. 전 심지어 그 상사가 청첩장을 준 첫사랑인데요. 입 밖으로 내지 못 할 말을 되뇌면서 유진은 본부장을 잘 피해서 다녀보자는 말이나 헛헛하게 했다. 저희 같은 일개 팀원들이 본부장 마주칠 일이 뭐가 있겠습니까.





" 본부장님이 커피를 사신다는데? 팀원들 다 데리고 1층 카페로  "

" 그럼 공짜 커피 마시고 오히려 좋죠? "


간재미 눈을 뜨고 안 대리가 본부장 마주칠 일이 뭐가 있겠냐고 하지 않았냐면서 구시렁거리는 김 과장을 성격 좋은 최 대리가 오히려 좋아 모드로 달래면서 유진까지 끌고 1층 카페로 갔다. 아무렇지 않은 표정을 할 수 있을까. 그냥 회사에 수두룩하게 있는 대리 하나가 높고 높아서 우러러보다가 목이 부러지는 본부장을 대하는 자세를 과연 제가 할 수 있을까. 유진은 그냥 적당히 김 과장이랑 최 대리한테 말 붙이는 건 맡겨둬야겠다고 본부장님 봐서 떨린다고 이제 다 고쳤다는 사투리가 계속 튀어나오는 막내 정윤이나 살살 진정시켰다.






 팀원 4명의 음료 취향을 꿰는 막내 정윤이 냉큼 먼저 내려가 주문해 놓은 음료를 받아 테이블로 왔다. 팀원들이 다 사이가 좋은가 봐요. 어떤 거 주문하실지 미리 다 알더라구요. 가볍게 웃으면서 말하는 원영에게 김 과장이 요즘 저희 팀처럼 친구 같은 사이인 팀도 없다면서 사회생활이란걸 하고 있었다. 본부장님, 요즘은 위아래 칼 같이 지키면서 일했다가는 다 퇴사한다고 튀어 나간다고요 MZ 그런 세대가 되어버렸습니다. 저도 같은 층에서 부대끼고 살려면 팀원분들 취향 좀 꿰야겠는걸요. 웃는 낯을 한 원영이 유진의 앞으로 바닐라 라떼를 밀어 놓았다. 아마 샷 추가한 아이스아메리카노는 김 과장님이 드시려나요?   



" 바닐라 라떼가 김 과장님, 아아에 샷 추가한 건 안 대리님 거예요 "


 정윤이 헤헤- 제가 다 아는 황금 막내 아닙니까? 안 대리님은 단걸 안 드셔서 하고는 김 과장 앞에 놓인 것과 유진의 앞에 놓인 바닐라 라떼를 바꿔주었다. 김 과장님은 단걸 좋아하셔서 당뇨가 걱정이고 안 대리는 카페인 중독이라서 저러다 언젠가 심장마비가 올지도 모른다는 실 없는 소릴 최 대리가 하는걸 유진은 가만히 듣고 있었다. 김 과장이나 최 대리나 정윤이나 하나 같이 다 붙임성 좋고 말 많은 스타일인 게 오늘은 참 다행이었다. 팀원 넷 중에 유진만 MBTI가 I라고 저희같이 EEEE인 인간들 틈에서 얼마나 힘들겠냐고 회식 때마다 쩌렁쩌렁거리던게 이렇게 고마울수가없었다. 호구 조사를 하듯이 팀원들 사이는 어떻고 일은 어떻고 묻는 것에 최 대리가 유진과 동기라고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는데 저만 안 대리를 사랑하는 것 같다는 얘기까지 나왔을 때는 비로소 유진도 어이없어서 실소가 나왔다. 저희 층에 복사기가 가끔 고장 나서 바꿨으면 좋겠다, 다른 팀은 총무과에서 기계식 키보드로 바꾼다는 소문이 있던데 우린 바밀로 적축 키보드 정도는 쓰게 해주셔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최 대리도 참 보통 넉살의 인간은 아니었다. 최 대리가 유진 대신에 말을 두배는 하고 있으니 그동안 최 대리가 해준 어떤 동기 사랑 나라 사랑보다도 오늘이 더 유진을 사랑해준 날이었다.




" 안 대리님은 뭐 하실 말씀 없으세요? "

" 아...없어요. 앞에 최 대리님이 다 말씀하셔서 "


동기끼리는 할 말도 다 통하고 그런 거예요? 네,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서요. 유진의 말에 최 대리가 드디어 제 동기가 저를 사랑하게 되었다고 또 한바탕 테이블을 뒤집어놨다. 정말 지금, 원영이 제게 말을 건 이 순간 최 대리가 동기라서 다행이었다.















 결혼식 이후로도 종종 원영의 소식이 들렸다. 굳이 알려고 하지는 않았으나, 주변 친구들로부터 결혼식에 오지 그랬냐, 호텔 결혼식이라 지정석에 니 이름이 있었다는 등의 얘길 들었다. 내 이름이 있었다라. 


 그냥 유진은 연인과 헤어진 이가 으레 그러듯이 휴대폰 번호를 바꿨고 인스타 계정을 없앴다. 궁상맞게도 인스타를 지우면서 갤러리를 하나하나 들여다보았었다. 예전에 어느 발라더의 '삭제'라는 노래가 있었는데, 한장씩 너를 지울때마다 가슴이 아린다는 가사가 있었더랬다. 이미 일주일을 넘게 울어서 눈물을 다 쓴줄 알았는데 다시 또 사진을 지운다고 눈물이 났다. 둘중에 누구도 손에 쥔 추억이 이제 없으니 정말 완벽히 지워진 5년이 되는 거였다. 


 그 후로는 취업 준비를 한다고 혼이 빠져있었던 것 같기도 했고 아무렇지 않은 척해야 아무렇지 않은 듯 지나갈 수 있을 듯도 했다. 가끔 동문회를 한다고 연락이 오는 친구들이 원영이도 온다더라 그런 말을 단톡에 하기는 했었다. 그런 말들사이에 원영이 졸업하고 남편을 따라 미국으로 간다고 미국으로 떠나기전에 마지막 동문회에 오는거라거나 이제 결혼 2년차인데 슬슬 아이 가질 때 됐다고 했던거 같다는 말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런 말을 감당 할 수 가 없어서 친구 단톡방을 나왔다. CC에서 파생된 이별이 그렇듯 예견된 인맥의 단절이었다. 그러면서도 서랍 안 한켠에 그 청첩장은 색이 바래는 줄 모르고 들어서 있었다. 가끔 열어서 봤다가 다시 닫고 또 한 번 열어서 봤다가 또 닫고. 그렇게 이제 끝이 뭉툭해지고 문구를 달달 외워버린 봉투 끝은 뜯어진 청첩장을 버리려다가 버리진 못했다. 동그랗게 박혀있는 원영이라는 글자가 동그라미만 세개인데도 날카롭고 모가 나있었다.









 걱정했던 것보다 나쁘진 않았다. 본부장으로 제 앞에 선 원영을 보는 것도 꽤 견딜만한 일이었다. 그래도 이제 나이가 서른셋이라고 이십 대 때보다는 한 뼘은 어른이 된 것이겠지. 청첩장을 받아서 들던 그날 이후 다시 테이블에 마주 앉아 카페에서 얘기를 하게 될 거란 건 생각하지 못했었다. 한 얘기라곤 없어요- 앞에 최 대리님이 다 말씀하셔서- , 동기 사랑 나라 사랑-  이런 거긴 했지만 그래도 나쁘진 않았다. 그냥 적당히 본부장에게 낯가리는 대리처럼 보였을 것이라고. 기껏해야 일로는 부딪힐 일도 없을 테고, 앞으로 한 두 번 환영회식이나 하면 복도에서 말고는 얼굴 볼일 없는 그 전과 동일한 회사 생활이 기다리고 있을 테니까. 우리 사이에 무언가가 있을거라는 걸 떠올리지 않기로했다. 유진이 5년을 지우고 이제 겨우 딱지가 졌듯이, 원영도 새로운 삶이 있었을 것이고, 남편의 울타리가 있었을 거였다. 서로 이제 다른 6년을 지냈고 그때와는 다른 사람으로 그때와는 다른 사람의 곁에서 둘의 시간은 흘렀다. 






 옥상 공원에서 연초를 태우다가 문득 담배를 언제부터 피웠던가 그날 부터였던가 그날보다 몇 달 지나고 부터였던가. 평소에는 한 개비 태우던 걸 다시 하나 더 꺼내 물었다. 오늘은 하나로는 안 될 것 같아. 사무실이 16층이어서 좋은 점이 한 계단만 올라오면 바로 옥상이라는 점이었다. 조각구름이 걸린 건너편 백화점 건물이 시야에 걸렸다. 입사 초에는 저 백화점이 없었는데 흐른 시간 만큼이나 빠르게 건물도 올라와 버렸네. 오픈한지 꽤 됐는데 한 번도 저 백화점은 가지 않은 게 회사 근처여서 출근하는 기분이 들어서 였던가, 다음에 정윤에게 저 백화점 맛집이나 추천받아볼까. 









" 담배도 피우는 줄 몰랐어요 "


담배에 채 불을 붙이기 전에 돌아본 옆에는 원영이 서 있었다. 손에 테이크아웃 잔을 든 걸 보니 일 하던 중 잠시 머리를 식히러 올라온 건지. 옥상 공원이 휴식에는 명소긴 한데, 그 새 원영의 귀에까지 그 명소 소문이 들어 갔을 거란 건 예상 못했다. 이제 담배 태우기도 글렀네. 



" 다 피웠어요. 이제 다시 내려가려던 참입니다. "


유진은 입술로 간신히 물고 있던 두번째 담배를 다시 집어넣었다. 


" 그 담배는 아직 불도 안 붙였잖아요. "

" 이건 안 피우려던 거였어요. " 

" 거짓말 "

" ... "

" 거짓말할 때 거짓말인 거 티 나요. "


왜 거짓말이라고 생각하시지. 유진은 사회생활을 하는 밋밋하게 웃는 낯을 하곤 아직 연기가 다 빠지지 않은 재떨이를 정리했다. 저는 안 대리님 많이 안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닐걸요. 그새 구름이 해를 가려 옥상으로 그늘이 떨어지고 있었다. 




" 그냥 있어요 "

" ... "

" 쉬는 곳 뺏고 싶지 않아요. 제가 내려갈게요. "


제가 너무 뺏은 게 많으니까. 본부장님이 뺏은 거 없어요, 그냥 제가 그러고 싶은 거지 뭐 대단한 것도 아닌데요. 가볍게 고개를 숙인 유진이 이내 원영을 지나쳐 계단으로 걸었다. 






 계단을 내려오면서 주저앉을 거란 생각과 달리 제 다리는 튼튼했다. 눈을 마주하고 대화하는 게 힘들지 않았다. 그냥 아주 조금 씁쓸하게 로스팅이 된 쓰리 샷 아메리카노를 마신 것 같은 느낌 딱 그 정도였다. 그동안 저를 과소평가했나. 다시 만나면 무너져서 주저앉을 것만 같았는데, 사람이란 것은 망각의 동물이라고 조금은 무뎌진 것 같기도 했고 후련한 것 같기도 했다. 오히려 옥상을 오르기 전보다 한결 가벼워졌다. 자주 마주치고 아무렇지 않게 지내다 보면 한 뼘 더 괜찮아지고, 또 한 뼘 더 괜찮아질까. 그러다 보면 이끼처럼 마음 틈새마다 끼워 붙어 있는 마음도 씻겨나갈지도. 틈바구니에 뿌리를 내린 그 마음을 다 뜯어 뿌리 깊은 곳까지 발라내면 이제 서랍 장 안에 색이 바랠 정도로 묵혀둔 그것도 가져다 버릴 수 있을까.  












 신제품 출시를 앞둔 회사는 하루도 조용할 날이 없는 게 국룰이라는 김 과장의 예언 처럼, 회사가 바람 잘 날이 없는 것은 분명했다. 테이크아웃 커피를 들고 엘리베이터를 오르는 내내 신임 본부장이랑 타 본부장이 대판 했다고 그래서 뭐 어디로 본부장이 직접 신제품 설명회를 간대나 그런 얘기나 오갔다. 


 1년을 넘게 준비한 신제품인데 안 그래도 타 본부에서 슬슬 입질로 간을 보던 게 이럴 줄 알았다고 김 과장은 버럭버럭 날뛰었다. 거기에 들어간 최 대리나 안 대리나 땀이 몇 방울 아니 태평양인데 그 놈들이 감히. 조용히 숟가락이나 얹어서 쏠랑 빼먹으려다가 신임 본부장이 만만찮으니까 나이빨로 누르려던 게 잘 안됐는지 크게 본부장들끼리 한판 한 것 같다는 말이었다. 제품 잘 아는 사람이 설명회를 따라가야 하니까 준비를 단단히들 하라는 김 과장의 명령이 떨어졌다. 



" 안 대리가 본부장님하고 같이 다녀와 "

" 제가요? "

" 나랑 최 대리는 오늘부터 이틀 연속 외근이라 자료 준비를 할 수가 없어 "


본부장님이 큰 준비는 다 하신다고 했으니까, 기본 보도 자료만 작성해서 따라가면 될 거라는 말에 그러겠다고 답했다. 그래도 보도자료면 저 무조건 야근 아닐까요 과장님. 법카로 저녁 먹어 정윤아 안 대리한테 회사 근처 배달 맛집 좀 찍어줘라. 






 외근, 퇴근으로 다 팀원들이 사라진 어두운 사무실에 유진은 혼자 자리에 불을 켜고 앉았다. 지금은 입맛이 없으니까 이따 8시쯤에나 정윤이 찍어준 회사 근처 유명 초밥집에 고등어봉초밥을 시켜 먹어 볼 셈이었다. 야근 할 때마다 최 대리가 미스터 봉초밥 미스터 봉초밥에 우니 추가 3만원- 노래를 불렀더랬다. 그동안 동기 사랑 나라 사랑이라고 유진 대신 야근을 도맡아 한 최 대리가 새삼 정말 좋은 사람이었다. 미안해하면서 퇴근하던 유진한테 저는 회삿돈으로 저녁 먹는 게 좋아서 야근하는 거거든요- 야근비 받고 저녁값 아끼고 일석이조 라고 하는 그런 좋은 동기.






" 저녁 안 먹어요? 설명회 땜에 야근하는 거죠? "


퇴근 한 줄 알았는데, 고개를 올려보니 원영이 유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 저녁 같이 먹어요. 전 아직 생각이 없어서요. 지금 배달 받았는데 양이 많아서 혼자 다 못 먹어요 같이 먹어요. 제 사무실로 오라는 원영의 말에 마지못해 유진은 자리에서 일어나 사무실로 향했다.








" 혼자 먹기엔 너무 많은 양을 시키셨네요 "


테이블에 놓인 걸 보니 고등어봉초밥에 우니에 사케동 스테이크동 누가 봐도 한명분은 아닌 식사. 다른 층에 야근하는 사람도 불러서 먹어도 되겠는데요. 정윤씨가 여기가 맛있는 집이라고 야근 할 때 여기서 시켜 먹는다고 하더라구요 근데 어떤 메뉴를 좋아하는지 모르겠어서 제가 이제 생각보다 아는 게 없어서.. 그렇게 됐어요.




" 내일 신제품 설명회 장소는 어디에요? "


유진은 초밥을 집어먹으면서 으레 상사와 식사를 하는 자리에서 할 법한 질문을 골랐다. 내일 같이 설명회를 가야 하는 상황이니까 자연스러울 것이라고. 어려운 질문도 아닌데 원영이 멈칫하는 듯했다. 장소를 잘 모르나 그럼 그냥 내일 출근해서 김 과장한테 다시 물어보면 되는 일이다. 어차피 오후 세번째 순서라고 했으니까.



" 내일 오후 1시 롯데호텔이에요 "

" ... 크리스탈 볼룸? "


원영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오후 1시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유진은 가만히 다시 한번 읊조렸다. 제 목소리가 조금 가라앉았던 것 같았다.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 사이로 이미 다 외워버린 청첩장의 문구가 다시 머릿속에 떠올랐다. ' 1월 1일 오후 1시 롯데호텔 크리스탈 볼룸'  제 손은 태연하게 젓가락질을 하는데 눈앞에 젓가락을 쥔 원영의 손이 떨렸다. 손은 덜덜 떨면서도 떨지 않는 차분한 목소리로 안 대리님 힘들면 안 가셔도 괜찮아요, 저 혼자 갈게요 란 말을 잘도 하는 당당한 눈동자를 마주 들여다봤다. 제가 왜 힘들어요, 내일 같이 가요. 문득, 그날도 원영이 손을 떨었던가. 그 순간을 선명하고 생생히 기억한다고 했는데 당당하던 원영의 눈동자 아래 청첩장을 건네던 손이 떨고 있었던가는 기억나지 않았다.








 








 업계에서 손으로 꼽힌다는 회사들이 참석하는 신제품 발표회라고하니 기자들이며 관련 업계 종사자들이며 가득 홀을 채우고 있었다. 순서는 세번째, 잠시 둘러볼 시간은 충분했다. 설명회 뒤로 늦은 오후 결혼식이 하나 있다고, 로비에서부터 미리 도착한 하객들로 북적였다. 1층로비에서부터 오후 결혼식을 하는 신랑 신부의 커다란 현수막이 아래로 내려진 걸 보았다. 신랑 신부 얼굴을 저렇게 큰 현수막으로 걸어주는 거였구나 누가봐도 부부라는걸 알수 있게. 2층에서 설명회 준비를 하면서 창 밖으로 롯데월드가 보이는 생화향이 가득한 신부대기실을 마주했을때는 괜히 여길 온다고 했나 조금 후회를 했다. 창 밖으로 놀이공원이 보이는 신부대기실이 있을리가 없다고 생각했는데 그런게 정말 있었네. 원영아 그날 넌 여기 앉아서 무슨 생각을 했니.




 유진은 미리 준비한 자료를 화면에 띄우고는 출구 근처에 서서 가만히 프레젠테이션을 하는 원영을 보다가 직사각형의 볼룸 천장을 올려다봤다. 드리워진 붉은 띠가 있는 벨벳부터 끝에 음각 디자인이 들어간 베이지색 벽 무늬까지 찬찬히 훑었다. 낮은 층고에도 수십개의 샹들리에가 새로운 출발을 하는 부부에게 화려한 빛으로 축복을 쏟아내는 곳. 여기였구나, 니가 결혼식을 한 곳이. 평생에 여길 올 일은 없을 줄 알았다. 그날 너는 어떤 드레스를 입었을까, 그리고 어떤 마음으로 버진로드를 걸었을까. 보면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는데, 막상 본 게 없으니 상상으로도 그릴 수 있는 게 없었다. 예뻤겠지. 홀을 울리는 박수 소리가 유진의 귓바퀴를 파고들었다. 주례가 있었을까. 축가는 누가했을까, 축가를 들으면서는 어떤 표정을 지었을까. 신랑·신부 행진 이런 것도 했을 테지. 




 무슨 생각해요. 프레젠테이션 끝났어요. 손끝을 가볍게 잡아 오는 것에 정신이 퍼뜩 들어 손을 빼냈다. 설명회도 잘 마무리 되었으니 각자 집에 잘 들어가면 될 것 같다고 정윤에게 회식이나 잡으라고 할게요, 저녁 같이 먹자는 원영에게 퇴근하고 혼자 먹겠다는 얘길 하면서 아까부터 사람이 붐비는 로비로 같이 내려갔다. 로비에는 호텔 웨딩홀 프로모션 영상이 긴 전광판을 따라 송출되고 있었다. 크리스탈 볼룸 프로모션과 같이 호텔에서 준비한 청첩장 영상이 커다란 전광판에 가득 들어찼다. 벚꽃인지 눈꽃인지 모를 하얀 꽃잎이 흩날리는 그 영상에서 웨딩곡이 흘러나오고, 그 앞에 우뚝 멈춰선 유진 옆에 원영도 멈추어 섰다.









서로가 마주 보며 걸어온 사랑을 이제 함께 한 곳을 바라보며 걸어갈 수 있는 사랑으로 키우고자 합니다.

새해가 밝아오듯 저희 두 사람이 사랑의 이름으로 길을 밝힐 수 있게 앞날을 축복해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 너 결혼식 청첩장에도 저 글귀가 써있었는데 "





 니가 그날 준 청첩장에도 저거랑 똑같은 말이 써있었거든. 다시 한번 낮게 읊조리는 유진의 손끝을 원영이 다시 한번 잡아 왔다. 원영의 시선이 뺨에 닿는 게 느껴져도 돌아보지 않았다. 지금은 좀 원영의 눈을 마주할 자신이 없어져서.



 후회해. 그날 결혼식을 갈걸. 그동안은 잘한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까 그런 생각이 들더라 그래도 그냥 보는 게 낫지 않았겠나 하고. 그때는 자신이 없었거든 넌 분명히 예뻤을 텐데 드레스를 입고 다른 사람이랑 결혼을 하면서 웃는 널 볼 용기가 그땐 없었어. 행복한 날이고 축하해줘야 하는 날인데 그럴 자신이 없더라고. 내가 그땐 너무 어리석었지 아무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없으면서. 너를 지독하게 사랑했던 걸까 그런 생각을 했었어. 수년이 지났어도 원망하고 미울 만큼 사랑했던 걸까 그런 생각. 근데 이제 좀 알 것 같아. 이건 그냥 미련이야. 제대로 마무리 하지 못해서 기어코 미완이어서 남은 그런 미련을 사랑이라고 착각하고있었던거야. 어느 노래 가사에 그러더라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그래, 그 말이 맞는 것 같아.  



비로소 그제야 유진은 저를 보고 있는 원영을 마주 봤다. 눈물은 늘 유진이 많았는데 지금은 제 말을 들은 원영이 울고 있었다. 이제 와 제 눈물이 말라버려 참 다행이었다.


" 늦었지만 결혼 축하해 진심이야 "





  













 회사 근처 맛집을 구글 지도로 꿰고 있다는 정윤이 투쁠 한우 집을 회식으로 잡아 다 같이 테이블을 붙이고 앉았다. 본부장이 주관하는 회식이라고 저희 팀 뿐 아니라 14층에 품질팀부터 11층에 영업팀까지 40명이 족히 모이는 큰 자리가 되었다. 그 와중에 상품기획팀이 고생 중에 상고생을 했다고 16층 상품기획팀을 중앙자리에 앉혀준 건 오히려 노 땡큐였다. 등심부터 살치살까지 마블링이 좋게 올라온 질 좋은 투쁠 한우가 테이블마다 오르고 인당 각 1병이라고 요즘 유행이라는 제로 소주까지 세팅이 다 되고서야 원영이 자리에 얼굴을 비췄다. 


 본부장님이 제일 고생하셨다고, 진짜 다 된 밥을 타 본부에 떠먹여 주는 줄 알았다고 다시 고래고래 소리를 높이는 김 과장입에 최 대리가 연신 소주잔이나 들이댔다. 빨리 드시고 빨리 취하시고 빨리 가세요 과장님. 누가 술 좀 하는 회사 사람들 아니랄까 봐 왼쪽 1번 테이블부터 제일 바깥쪽 10번 테이블까지 네 번은 파도를 타고 나서야 김 과장이 테이블에 이마를 찧었다. 이미 주량을 한참 넘긴 이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나고 김 과장은 이미 블랙아웃이라고 정윤이 택시 태워 보내겠다고 재킷 들고 따라 나간 빈 자리에 이미 얼굴이 빨갛게 오른 원영이 앉았다. 텅 빈 상품기획팀 테이블에 원영과 유진만 마주 앉아 있는 꼴이 됐다. 



" 술은 이제 얼마나 해요? "

" 본부장님이 얼만큼을 생각하시든 그것보다 잘해요 "

" 그렇구나 "



 유진에게 한 잔을 주고, 유진이 그 한잔을 채 비우기도 전에 원영은 혼자 두잔을 마셨다. 저도 안 대리님이 얼만큼을 생각하시든 그것보다 술 잘해요. 유진이 마시지 않아도 또 한잔. 테이블에 소주 병이 일곱개째. 이제 다른 테이블도 다 비워진 식당안에 그나마 정신이 멀쩡한 최 대리가 영업팀 막내를 데려다준다고 본부장님은 안 대리가 책임지라는 말을 하고는 굿바이를 날렸다. 




" 그만 일어나시죠. 택시 불러드릴게요 "

" 나 재워줘요 "


 몸을 못 가누는 것 같지는 않은데 계속 기울어 지는 원영을 부축한 유진이 택시를 불렀다. 집 어디에요. 몰라요 안 말할 거야. 맘대로 해요. 유진은 곧이어 도착한 택시에 원영과 같이 몸을 밀어 넣었다. 래미안 공덕 5차요. 


 택시 창으로 다닥다닥 붙은 헤드라이트 등이 쏟아져 들었다. 눈을 감고 가만히 택시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노래에 귀를 기울이는데 이 타이밍에 라디오에서 나오는 게 김광석 노래라니,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음을. 그래, 너무 아픈 사랑은 사랑이 아니었다.


 차가운 감촉이 손끝을 더듬었다. 보드랍고 차가운 촉감이 원영의 손인걸 알 수 있었다. 유진의 왼손 끝을 살짝 쥐었다 펴던 원영은 이제 유진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유진은 목에 가까워지는 숨으로 눈을 더 꼭 감고 옅은 한숨을 쉬었다.





 래미안 공덕 5차.. 집도 다른데 사네 이제. 술도 나보다 못 마셨었는데. 목 아래서 울리는 원영의 저음이 슬슬 꺼지는 정신을 붙잡아냈다. 바닐라 라떼도 이제 안마시고 아메리카노 전엔 못 마셨는데.. 담배도 피고.. 원영은 이제 조금 울먹거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 이제 안 사랑한다고 하고 나한테 사랑 아니라고 하고.. 미련이라고하고, 그렇게 많이 달라졌으면서 왜... 소문에 관심 없는 거 그런 건 그때나 지금이나 똑같애 왜. 그러다가 허리를 끌어안은 손으로 유진을 두어번 흔들었다. 회사에 나 처음 올 때부터 이혼녀라고 소문 다 나 있는데 언니만 몰라.


 원영은 여전히 가만히 눈을 감은 유진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 입술에 꾹 젖은 입술을 눌렀다. 간신히 붙잡고 있던 정신은 더욱 또렷해졌다.눈꺼풀을 들어 올린 유진이 붙은 입술 떼어내 원영을 밀어냈다. 



" 너... 뭐 하는 거야 "


니가 이혼했다고 해서 이제와 달라지는 건 없어. 원영이 다시 유진의 목을 끌어안고 이제는 아예 얼굴을 묻고 울었다. 


잘못했어. 그땐 내가 할 수 있는 게 없었어, 언니 진짜 미안한데 진짜 너무너무 미안한데 나 한 번만 봐주면 안돼? 나 딱 한 번만 봐줘요. 나 언니랑 다시 시작하고 싶어 부탁이야. 나 한 번만 봐줘 제발...나 너무 늦었어? 나 다시 사랑해줘 응? 난 아직 언니 사랑해 그 결혼식장에 들어설 때도 언니만 사랑했어 언니 생각만 했어 진짜야 


 또렷하게 프레젠테이션을 하던 발음은 어디 가고 다 새는 발음으로 목에 원영의 눈물이 닿았다. 5년을 다 지워버렸다고 했는데 그것또한 부질없는 짓이었다. 아,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너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것도 나에 대한 과소평가였음을. 그저 내게 남은 게 미련이었다는 것도 내 감정에 대한 과소평가였음을. 끝을 내지 못한 미완으로 남은 미련이 아니라 있는 힘껏 양껏 다 사랑하지 못해서 아팠던 것임을 이제 인정해야겠다. 그만큼 아직도 내 안에 너에게 줄 애정이 마르지않은 샘 마냥 남아있었다. 수년을 건너온 원망과 아픔도, 다 지친 것 같은 마음도 너의 이런 말 앞에 이렇게 작고 하찮아져 아무 의미 없는 것이었다고.



 이제는 유진이 원영의 뺨을 양손으로 붙잡고 다시 입을 맞췄다. 다 젖은 입술과 눈물이 가득한 작은 얼굴 위로 또 한참을 눈물이 쏟아졌다. 수년을 건너온 그 상처 난 마음이 깊이 붙인 입술 사이로 계속 녹아들었다. 작은 숨도 놓치지않으려고 좁은 틈을 붙잡아 떨어지지않게 입술을 물었다. 원영아 원영아 장원영. 취해서 사라지는 꿈일까봐 떼지못한 입술 안으로 계속 너를 불렀다. 이번에는 그때 네가 말한 그 전주의 은행나무 아래서 그 누구보다 먼저 결혼하자 하겠다고.


결혼하기엔 언니가 너무 아까워 난 이혼녀잖아

괜찮아 나한테 다시 왔잖아












fi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