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주 월요일, 목요일 오전 11시 / 14시
딱 3개월만 부탁하자 원영아 갑자기 내가 손가락이랑 손목이 나간걸 어떡해. 진짜 내 소원 부탁 플리즈
딱 3개월만 부탁한다는 지원의 불쌍한 큰 눈망울을 못 이겨서 용산에 살면서 대전 서구 문화센터까지 매주 월, 목 필라테스 출강을 하고 있는 원영은 문화센터 앞 카페에서 주문한 아메리카노를 기다렸다. 아침 11시 강의를 하려고 서울역에서 9시 KTX 타는 게 스스로 생각해도 실로 엄청난 우정이었다. KTX를 1시간 타고 심지어 지하철도 20분 타고 가야 하는 대전 출강을 해주는 친구가 어딨니 지원아. 20년지기만 아니었어도 저런 부탁은 그냥 씹어서 삼켰을 텐데 원수가 따로 없어요. 누가 세상에 게임을 한다고 마우스 광클하느라 손가락이랑 손목에 인대가 나가는 게 말이 되냐고 게임이 너 밥 먹여 주니 밤새 게임을 한다고 할 때 알아봤다. 하여튼 김지원. 눈앞에 깁스한 손을 들이밀면서 우리 초등학교 때 내가 너 우산 오십번 씌워줬는데 중고등학교 수학여행 때 장기자랑에서 느끼한 발라드로 고백 공격 당할 때마다 내가 구해줬는데 어쩌고저쩌고 친구라서 해준 건지 눈앞에 들이미는 깁스가 꼴 보기 싫어서 해준 건지 아무튼 원영은 매주 월, 목 대전 서구 문화센터로 출근을 했다.
문화센터 근처 카페 쿠폰에 도장이 벌써 8개, 이번 주가 한 달 째. 같이 밥 먹을 사람도 없고 그렇다고 꼴랑 3개월 다닐 건데 붙임성 있게 사람 사귀기도 뭐하고 그냥 아침에 출근하면서 아메리카노 한잔 점심시간에 점심 겸 라떼 한잔 이러다 보니 쿠폰에 도장이 벌써 빼곡. 도장 열 개면 아메리카노 한 잔 무료인데 이제 두 번만 더 오시면 되네요. 웃는 얼굴로 말하는 인상 좋은 아니 얼굴이 좋은 카페 사장님에게 눈인사를 하곤 테이크아웃 잔을 받아들였다. 요즘 프렌차이즈 저가 카페들 사이에서 살아남는 개인 카페 보기 쉽지 않다던데 문화센터 10분 거리에 위치해서 그런지 곧잘 살아남은 것 같은 이 카페는 커피 낫 베드 인심 좋은 사장님이 서비스로 주시는 스콘 낫 베드 그리고 그런 사장님 얼굴은 쏘 굳인 원영의 아침 아메리카노와 점심 라떼를 책임지는 유일한 대전의 단골 카페였다.
" 스콘 하나 드릴게요. 오전에 바로 구운 거라 맛있을 거예요. 얼그레이랑 치즈 중에 뭐로 드릴까요? "
" 매번 이렇게 주시면 파실 것도 없겠어요. "
웃는 낯의 호감상 카페 사장님이 앞에 깔끔히 포장해서 내미는 치즈 스콘을 받으면서 원영도 웃는 낯을 했다. 훈훈한 얼굴에 훈훈한 인심이라 절로 얼굴에 미소가 지어졌다. 어쩜 이렇게 매번 스콘이니 쿠키니 하나씩 끼워주는지 혼자 설렐라 그러네. 서울 집 근처에 이런 카페 있으면 좋겠다 아니 이런 카페 사장님이 있었으면. 원영이 기분 좋게 카페를 나서는 찰나에 낯이 익은 문화센터 인포 직원분이 카페에 들어섰다, 카페 사장님이 또 친절한 목소리로 스콘 하나 드릴까요? 하는 소리가 뒤로 들렸다.
" 선생님. 진짜로 소개팅 안 해요? 우리 조카 괜찮다니까 "
" 마음은 감사한데요, 괜찮습니다 어머님 "
오후반 어머님 중 한 분이 끈질기게 원영에게 본인 조카를 소개해주고싶다고 들이대시는 통에 진심 김지원이 이분 때문에 혹시 깁스 핑계를 대고 출강을 떠넘긴 건 아닐까 원영은 합리적인 의심을 했다. 중고등학교 때 고백 공격에서 지켜줬다고 생색내더니 소개팅 판에는 나를 밀어 넣었다 이거지 가만 안 둬 김지원. 본인 조카가 키도 180이 넘고 번듯하고 대전에서 회사를 다닌다고 서른 넷인데 한번 만나보지 않겠냐고 계속 말을 거시는데 정말 어떻게해야하나. 아니 어머님 저 스물 일곱인데 4살 이상 많은 사람은 극혐이고 일단 무엇보다 남자, 그러니까 XY 염색체에는 일절 관심이 없어요. 라고 냅다 커밍아웃 할 수도 없어서 몇 주째 괜찮아요 괜찮습니다 생각이 없어서요 자만추 스타일이라서요 롱디는 별로라서요 등으로 웃는 얼굴로 거절할 말도 이젠 완전 바닥 났다.
수업중에도 이글이글한 눈빛으로 원영을 쳐다보다가 수업이 끝나기가 무섭게 달려오셔서는 진짜 소개팅을 안 할 거냐고 말을 거시는 게 벌써 열 두 번은 되는 거 같은데. 이러다 문화센터 앞으로 그 키 180 넘는 그 조카를 일단 부르실 것 같은 불안감이 드는데 이걸 진짜 어쩌나.
" 선생님 진짜 넘 예뻐서 그래요. 우리 조카 딱 한 번만 만나봐 "
" 어머님 저 진짜 소개팅 생각이 없어요.. "
" 아니 진짜로 한 번만 만나보라니까요 괜찮은 남자라니까 다음에 한번 앞에 부를 테니까 얼굴만 볼래요? "
" 저기 어머님... 저 여자 좋아해요 "
에라 모르겠다. 여자 좋아한다고 하면 더 이상 조카 소개해준다 어쩐다 그런 말 안 하시겠지. 뭐 거짓말도 아니고 사실이니까.
" 어머, 그래요? "
" 네 그러니까 이제 소개팅 얘기는.. "
" 잘됐다. 그럼 우리 딸 한번 만나봐 "
" ...네...? "
" 우리 딸 괜찮아. 키도 커요 선생님이랑 비슷한 거 같아. 그리고 내 딸이라서가 아니라 얼굴도 솔찮여"
학교 다닐 때 훤칠하고 반반해가지고 선물도 많이 받아왔어. 사고도 안치고 막 일진 학폭 그런 거랑은 척지고 산 애라니까 공부는 뒤에서 일이등 했는데 그래도 애가 도덕적이야. 담배도 안 피고 술은 맥주 좀 하는데 아무튼 됨됨이는 괜찮아 교도소는 안 갈 거니깐 내 딸이니까 내가 잘 알지. 내가 보장해요. 밥벌이도 곧 잘 하니까 남자 말고 여자 좋아하면 우리 딸 한번 만나 봐 그럼. 내가 진짜 선생님 너무 예뻐서 그래.
-
' 자기 딸을 소개해준다 하셨다고? '
' 어... 진짜 나 이런 경우는 또 처음이야 '
통화 너머 지원이 원영의 말을 듣고 깔깔 거렸다. 아 웃겨 니가 엄청 맘에 드시나 봐 어떻게든 너와 어떠한 관계로든 얽히고 싶으신가보다. 웃지 마 하나도 안 웃기거든.
' 본인 따님, 성적지향을 알고는 계신대? '
' 야... 진짜 말이 되냐고 '
소개시켜달라그래 키도 크고 얼굴도 괜찮다고 하셨다며. 자기 딸은 다 그렇게 말하지 아니 그리고 그걸 떠나서 누가 회원 딸을 소개받아 미쳤니? 언성을 높이는 원영의 반응에 지원은 연신 킥킥 거렸다. 야 웃지 마 심각한 상황이야 지금 이거 다 너 때문이잖아. 원영아 오죽 니가 맘에 드시면 어머님이 그러시겠니.
' 전에 너 있을 때는 그러신 적 없어? '
' 어, 없는데? 그냥 니가 맘에 드신거라니까 '
' 하... 진짜 이게 무슨 일이야 '
자만추 꿈 깨고 한번 만나봐 혹시 아냐 끝내주게 괜찮을지? 동성 소개팅이 얼마나 주선자 구하기가 힘든데 뭘 가리고 앉았어. 뭔 말도 안 되는 소리해 그 딸이 여자 좋아하는지는 또 어떻게 아는데 야 끊어. 속을 살살 긁는 지원 때문에 울화통만 쌓인 원영이 끊으라고 으름장을 놨다.
' 근데 너 지난번에 그 카페 사장 맘에 들었다며 '
' 아아 그 사장님. 얼굴이 내 스타일이야 '
' 그럼 그냥 어머님께 좋아하는 사람 있다 해보든가 '
' 아니 또 뭐 그렇게 좋아하는 정도까진 아니야 그냥 아침이랑 점심에 얼굴 보면 기분 좋다 그런 거지 '
자만추라메 그럼 그 카페 사장이랑 자만추 하라고. 넌 그게 쉽니? 그 사람 헤녀일 수도 있는데. 그런 레이더도 안 돌면서 무슨 자만추을 해 글렀다 넌. 진짜 김지원 끊어 지는 애인 있다고 남 속만 긁지 아주... 끊어라. 혹시 카페 사장님 네일 하셨디? 야, 적당히 해
' 아니 원영아 그 사장님이 너한테 맨날 스콘 끼워줘 쿠키 끼워줘 그런 거 약간 그린라이트 아니야? '
' 개인 카페로 동네 장사하면서 단골한테 그렇게 잘 하니까 살아남았겠지 그걸 뭘 그린라이트라고 해 '
' 그래도 모든 사람한테 그러진 않을 거 아니야 '
' 원래 그런 사장님이야 전에 다른 분한테도 스콘 주고 그러시더라고 '
' 아, 그래? '
그럼 과잉 친절하신 단골 관리 잘하는 사장님이시네 그걸로 괜히 너 설레게 하시고. 야 진짜 끊어 짜증 난다.
" 유진아, 필라테스 선생님 한번 보러 문화센터 올래? "
" 갑자기 무슨 소리야 "
유진은 엄마표 집된장찌개를 밥에 비벼 먹다가 의아하게 고개를 들었다.
" 우리 문화센터에 필라테스 선생님이 예뻐 "
" 아니 무슨... 뭔 소리야 "
생긴것도 너무 예쁘시고 사근사근해서 내가 너희 사촌 소개해줄라 했는데 몇 번을 물어봐도 선생님이 소개팅을 안 한다는 거야. 근데 엊그제 여자 좋아한다고 하길래 내가 너 소개해준다 했지. 내 딸 한번 만나보라고. 유진은 퍼먹던 숟가락을 든 채로 입도 못 다물고 그대로 굳었다.
" 엄마 미쳤어...? "
" 아니 왜 너도 여자 좋아하잖아 "
엄마 그게 진짜 그 선생님이 여자를 좋아한다는 말이 아니잖아. 엄마가 자꾸 소개팅 시켜준다고 하니까 거절을 하다 하다 못해서 그냥 여자 좋아한다고 더 물어보지 말라고 철벽 친 거지. 우리 엄마 눈치 왜 이러지? 유진은 경악한 표정으로 말을 우다다 내뱉고는 고개만 절레절레 저었다.
" 아니야 여자 좋아한다고 나한테 직접 말씀하셨다니까 뭔 사람말을 그렇게 꼬아 듣고 그러냐 있는 그대로 들어야지 "
" 아, 그러니까 그게 진짜 여자를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 "
됐어 그냥 밥 먹어. 유진은 한숨을 쉬곤 다시 숟가락을 들었다. 유진아 너 연애 안 하잖아 요즘 모쏠이 흠이라던데 너 정도면 걍 혼자 죽을라는가 싶어져. 아, 엄마 왜 얘기가 또 내 연애 얘기로 가는데... 멸치볶음 맛있다. 유진은 대충 엄마표 고추장 멸치볶음이 맛있다는 얘기로 말을 돌렸다. 말 돌릴라 하지 말고 연애 좀 해 이제 남자 여자 상관없으니까 좀 해라. 아니 뭐 언제는 남자 아니면 안 된다고 눈에 쌍심지를 켜더니 이젠 여자도 된대. 아휴, 이제 엄마는 다 된다 그러니까 문화센터 선생님 한번 볼 거야? 아! 엄마 진짜 그거 그 선생님이 여자 좋아한다는 게 아니라니까.
답답하네 정말. 저 말을 진짜로 여자 좋아한다고 받아들이는 사람이 어딨어. 입에선 한숨이 푹푹 나왔다. 아무리 딸이 레즈비언이라고 편견이 없어져도 그렇지. 유진은 구시렁거리면서 반찬이나 계속 집어 먹었다. 오늘따라 반찬은 왜 이렇게 입에 짠 거 같은지 이 상황에 엄마한테 반찬 투정 할 수도 없고. 선생님이 진짜 괜찮다니깐 키도 크고 엄마는 그렇게 예쁜 여자 처음 봤다 분명 너도 보면 예쁘다고 할걸 같이 수업 듣는 엄마들이 다 예쁘다고 난리야 근데 여자 좋아한다니까 엄마가 얼마나 기쁘니 내 딸도 여자 좋아하는데 이게 웬 떡이냐 싶지.
엄마 말고도 다른 회원들도 그 선생님께 남자 소개해준다고 두 명이나 물어봤다더라 스물 일곱인가 여섯인가 그렇다는데 집은 서울이고 아무튼 예뻐서 엄마들이 다들 난린데 너도 한번 일단 엄마 수업 들을 때 와서 보기라도 하라는 말을 그냥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리려다가도 자꾸 예쁘다고 하니까 또 그 말만 살짝 남는 게 유진은 스스로 이게 바로 여미새구나 혀를 찼다.
" 엄마, 일단 그 선생님은 진짜 여자 좋아하는 것도 당연히 아닐 거고. 사람 그렇게 막 무턱대고 가서 얼굴부터 냅다 보고 그러는 거 굉장히 실례야 "
" 뭐가 실례야 그냥 엄마 데리러 오는 김에 한번 보기만 하라는 건데 "
" 실례라니까. 그리고 막말로 그 선생님이 그렇게 보고 나 별로라고 하면 어쩔 건데? "
사실 엄마도 그게 걱정이야. 니가 내 딸이긴 한데 그래도 그 선생님이 좀 진짜 많이 예뻐. 진짜 누구 엄마야 너무하네 나도 인기 많거든? 그러면 왜 진작에 연애를 안 하고 방구석에 쳐 말라비틀어져 가고 있데 어쨌든 한번 보러온다는 거지? 아, 진짜 안 간다고. 유진은 이젠 짜다 못해 입이 써져서 숟가락을 내려놨다.
" 근데 자만추가 뭐야? "
" 자만추? "
" 그 선생님이 자꾸 자기는 자만추 스타일이라는 거야 그게 무슨 이상형 같은 건가? "
자연스러운 만남 추구. 그냥 소개팅 안 한다는 소리야 엄마 그냥 꿈 깨. 아휴 증말
아침부터 출근을 해 스콘을 구웠다. 다들 월요일을 혐요일이라고 부른다는데 요 몇 주간 유진에게는 즐거운 월요일이었다. 오늘은 월요일이니까 아마도 기다리는 손님이 올 것 같아서. 얼그레이 스콘이랑 치즈 스콘 중에 어떤 걸 더 좋아하는지 궁금한데 오늘은 그 손님이 오면 아홉번째 쿠폰 도장을 찍어주면서 물어볼 참이다.
" 아이스아메리카노 한잔 테이크아웃이요 "
카드를 받아 포스기에 찍으면서 얼그레이 스콘하고 치즈 스콘 중에 어떤 거로 하나 드릴지 물었다.
" 스콘도 같이 결제해주세요. 매번 그냥 주시니까 제가 너무 죄송하잖아요. "
" 아침마다 많이 구워서 괜찮아요. 원래 아침 손님들께는 자주 드려요. "
얼그레이? 치즈? 하고 묻는데 둘 다 맛있어요 아무거나 주세요 하는 웃는 얼굴에 절로 같이 따라 웃어진다.
" 그럼 두 개 다 드릴게요. "
얼그레이 스콘이랑 치즈 스콘을 포장해서 내미는데 이렇게 많이 주시면 부담돼서 저 어떻게 와요 하는 얼굴에 저도 모르게 풀 죽어서 눈썹이 내려진다. 서비스 주는데 오히려 안 온다고 하시기 있나요 너무해요. 농담이에요 잘 먹을게요 하는 게 와... 예쁜 여자는 진짜 사람 맘도 쉽게 들었다 놓는가.
매주 월요일이랑 목요일에만 오시네요 라는 말을 하려다가 문득 손님한테 너무 많이 아는 척하면 오히려 자기를 기억한다고 부담스러워서 안 온다고 하는 인터넷 어디선가 본 말이 생각나서 그냥 모두에게 친절한 사장 코스프레를 하기로 했다.
" 스콘이 10시쯤 나와서 오전 11시 전에 오시는 손님들은 다 드리니까 부담 갖지 말고 드세요. "
그리곤 다음에 오신 손님 드릴 거라고 스콘을 하나 더 포장했다.
" 여기 카페 오픈하신 지 오래되셨어요? 지난번에 보니까 단골이 많은 거 같아서 "
" 이제 2년 정도 됐죠? 여기서 학교 나오고 집도 근처고 하다 보니까 그냥 동네에 다 아는 사람들이라서 많이 들러줘서 그런가 봐요 "
물어보지도 않았는데 근처 주민센터, 문화센터에 근무하는 친구도 많고 이 건물 5층 피시방 매니저도 친구라고 저도 모르게 술술 말을 해놓고는 유진은 아차 싶어서 다시 입을 다물었다. 이 사장님 왜 이렇게 물어보지도 않은 TMI 남발한다고 생각하면 어떡하지.
" 그러시구나. 저도 문화센터에서 일하는데 "
그럼 오늘도 좋은 하루 되세요. 가볍게 인사를 하고 돌아서는 모습을 가만 보다가 네, 손님도 좋은 하루 되세요. 인사를 주고받았다. 아차, 쿠폰에 도장 찍어주는걸 깜박했네
비 온다는 예보가 없었는데 슬슬 비가 내리는 카페 창밖을 내다 보다가 엄마가 문화센터에 우산을 가지고 갔는지, 엄마 마중 갈 요량으로 우산을 쓰고 문화센터 앞을 서성였다. 비가 꽤 많이 오네 하나로는 둘이 쓰기 좀 어렵겠는데.
' 어 엄마. 어디야? '
' 뭘 어디야? '
' 아니 우산 가져갔어? 나 문화센터 앞에 마중 나왔는데 '
' 얘는 엄마 오늘 문화센터 안갔어, 세정 엄마 아파가지고 거기 왔다 얘. 글쎄 세정 엄마가 지하철 에스컬레이터에서 미끄러져서 꼬리뼈가 나갔댄다. 나이 내일모레 육십인데 이게 무슨 일이라니. '
' 아이고 크게 다치셨네. 세정이가 별말 안 해서 몰랐네. 어디 병원이셔? 이따 앞으로가? '
' 됐어 내가 애니, 저녁이나 알아서 챙겨 먹어 늦게 갈란다 '
괜히 빗속을 뚫고 효녀 노릇을 하겠답시고 문화센터까지 10분을 걸어왔네. 유진은 통화를 끊고 척척하게 젖은 제 바지를 내려다봤다. 이 차림으로 카페 다시 돌아가서 장사 할 수도 없고 그냥 마감하고 집으로 가야겠네. 젖은 바지랑 티셔츠에 앞머리까지 탈탈 털다가 옆을 돌아보니, 밖을 올려다보고 있는 낯익은 얼굴.
" 어? 안녕하세요. "
" 어머, 안녕하세요 사장님. 문화센터에는 어쩐 일이세요? "
아, 비가 너무 많이 와서 엄마 마중 나왔는데 엇갈려버렸네요. 유진은 태연하게 말을 하면서도 하필 비 오는 길을 걸어온답시고 맨발에 슬리퍼를 신었는데 게다가 지금 바지도 다 젖고 꼴이 아주 추접스러운데 여기서 그 손님을 마주칠 줄이야. 문화센터 현관에서 둘이 마주하고 있는 모습이 하나는 맨발에 슬리퍼 다 젖은 바지에 척척하고, 하나는 멀끔한 차림이라니.
" 어... 우산 없으시면 제가 씌워드릴까요? "
" 아, 그럼 지하철역까지만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
태풍은 아닌데, 태풍 비스무리하게 비를 쏟아내는 길을 우산 하나에 둘이 어깨를 붙이고 걸으려니 유진은 어차피 다 젖은 김에 옆쪽으로 우산을 계속 기울였다. 난 이미 젖었으니까 한 명이라도 덜 젖어야지.
마땅히 할 말도 없고, 카페에서 봤으면 스콘 얘기라도 했을 텐데 멀뚱멀뚱 앞만 보고 걸으면서 눈만 도륵도륵 굴렸다.
" 지난번에 이 동네 사신다더니 집이 가까우신가 봐요? "
꽤 오랜 어색함 끝에 유진보다 먼저 원영이 입을 뗐다.
" 아, 저는 남선공원 근처 아파트 살아요. 여기서 10분 정도 걸리는데 엄마랑 같이 살고요. 오늘 친구분이 꼬리뼈를 다치셔서 엄마가 거기 병문안을 가셨다네요 그래서 엇갈려서... "
" 어머님 친구분이 꼬리뼈를 다치셨어요? "
되물어오는 말을 듣고 또 아뿔싸. 묻지도 않은 TMI를 또 너무 말했다 싶어서 유진은 머리만 긁적이면서 끄덕거렸다. 영 대화를 나누는 게 쉽지가 않네. 어색하면서도 가까워지는 지하철이 좀 싫어서 늦게 걷고싶은거는 이런건 무슨 기분이라고하나.
" 다 왔네요. 우산 씌워주신 거 너무 감사해요. "
" 아... 집이 어디세요...? 그냥 제가 집 앞 까지 우산 씌워드릴게요. 지금 거의 태풍인데. 미끄러졌다가 꼬리뼈 다칠 수도 있고.. "
지하철 역에 도착해서 인사를 건네는 원영에게 갑자기 집이 어디냐고 급발진이란걸 해버렸다.
" 저 서울 살아요. "
" 예 제가 그럼 서울까지... 예...? 서울이요? "
네 저 서울 살아요 용산. 여기서 1시간 반 걸려요. 손으로 숫자 1을 표시하면서 말하는 원영이 미소를 띈 얼굴로 여기까지 씌워주신 것도 감사하다는 말을 했다.
" 오늘 신세 졌으니까 다음에 제가 커피 살게요. 아니 카페 사장님한테 커피 산다는 건 좀 이상하다. 밥 살게요 "
네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미끄러져서 넘어지지 마시고. 네 사장님도 조심히 들어가세요 꼬리뼈 조심하시구요. 꼬리뼈 얘길 하면서 쿡쿡 웃은 원영은 가볍게 인사를 하곤 에스컬레이터 아래로 내려갔다. 유진은 내려가는걸 가만히 쳐다보다가 이제 보이지 않을 때 즈음부터 머리를 쥐어 뜯었다. 미친 꼬리뼈 얘길 하다니 도라이야 이 도른자야. 진짜 모쏠인 이유가 있구나 내가. 미친 할 말이 그렇게 없니 남선공원 근처 산단 말을 또 왜 해 진짜 완전 TMI 아오. 서울 사는 사람이면 남선공원 얘기 했을 때 진짜 개 어이없었겠지. 남산공원이라고 생각했을지도 몰라. 아서라 유진아 니가 무슨 연애를 하냐.
' 그 어머님 딸이랑은 날 잡았어? '
' 뭔소리야. 소개팅 안 한다니까 '
' 어머님이 보장하신다며 '
' 지금 그 딸이 문제가 아니구, 나 지금 뭔가 그 카페 사장이랑 잘해봐야 할 거 같애 '
' 갑자기? '
' 아니 오늘 아까 퇴근하는데, 문화센터 입구에서 우산을 들고 서 있더라? '
거짓말치네. 믿을 수 없다는 휴대폰 너머 지원의 심드렁한 대꾸에 원영이 아니 진짜라니까 하고 말했다.
' 어머님 마중 나왔다가 엇갈렸대 '
' 야 그걸 먼저 말해야지, 난 또 널 데리러 왔다는 줄 '
' 아무튼 지하철역까지 우산 씌워주더라고 '
오늘 대전에 비 진짜 많이 왔는데 자기는 다 젖는데 계속 내 쪽으로 우산 씌워주더라. 그냥 본인이 이미 다 젖어있어서 그런 거 아니고? 야 김지원 너 자꾸 초칠거야? 원영은 이제 침대에서 몸을 아예 일으켜 앉았다.
' 집 어디냐구 물어보면서 집까지 우산 씌워준다는 거야. 미끄러지면 어떡하냐고 그러면서.. '
' 올 그건 좀 뭔가 있다 '
' 그지? 이거 나 혼자 괜히 설레발치는 건 아닌 거 같지? '
' 하 근데 괜히 너 혼자 들었다 놔지는거면 어떡하냐. 지난번에 말한 거 보면 걍 좀 친절한 스타일 같기도 한데 스콘 다 포장해서 하나씩 주는 그런 사장이라며 '
' 그래도 집까지 데려다준다 이건 좀 완전 다른 거잖아 그리구 막 횡설수설하고 그런 거도 엄청 귀여워서 맘에 든단 말이야. '
' 어이구, 벌써 귀엽기까지 하셨어요? '
나 혼자 설레발치는 거 아니어야 해. 분명 다른 거여야만 해 나 그 사람 맘에 든단 말이야. 꼭 단순히 친절한 거 그 이상이어야 한다고.
엄마의 열화와 같은 성화에 못이겨서 마지못해 문화센터 필라테스 원데이 클래스를 등록했다. 꼭 장원영 선생님꺼를 들어야된다고 신신당부를해서 그 장원영 선생님이라는사람이 엄마가 입이 닳도록 말하는 그분인가. 한시간 잠시 카페 문을 닫아 놓고 평생 팔자에도 없는 필라테스복까지 입고 경건한 마음으로 필라테스 룸에 깔린 4개 매트중에 하나 위에 올라가 자리를 잡았다. 필라테스 선생님이고 뭐고 난 그냥 카페에 월요일 목요일에 오는 그 손님하고나 잘해보고싶은데.
그나저나 원데이 클래스라더니 사람이 저 혼자 밖에 없어서 이게 뭔 상황인가 이정도면 이거 퍼스널트레이닝아니야? 평일 클래스라서 이런건지 갸웃하고 있는데 들어오는 선생님이 그 손님이다. 와...모녀지간이라더니 엄마랑 나랑 보는 눈 진짜 비슷한가봐.
서로 안녕하세요 이렇게 뵙네요? 안유진 회원님. 하는 어색한 인사를 주고 받는데 정말 어색하다는 생각을 할 겨를도 없이 필라테스 복 입은게 정말 예쁘다는 생각이나 했다. 엄마가 예쁘다고 노래를 부를만하다. 모녀가 한 눈에 반할 만도. 안유진 스물 여덟 인생에 얼빠라고 생각하고 살아오지 않았는데 앞으로 우리 가족이 그냥 얼빠라고 여기고 살아야겠다.
" 골반 들어올리는 자세를 해볼게요 "
제가 먼저 해 볼 테니까 회원님께서 보고 따라해보세요. 매트에서 엉덩이부터 허리까지 들어올리는 건데 한번에 들어올리는게 아니고 이렇게 엉덩이랑 골반부터 먼저 들어올리고 그 다음에 허리를 분절해서 순차적으로 들어올리셔야 해요. 하는 시범을 보는데 저걸 어떻게 하는 거야 라는 생각보다 와 이거 내가 보고있어도 되는거야 라는 생각만 드는게 유진아 넌 미쳤구나.
" 이제 회원님께서 해보세요 "
유진이 매트에 누워서 엉덩이부터 허리까지 순차적으로 들어올리는데, 유진의 허리 밑에 원영이 손을 받쳐서 살짝 들어올린다. 입에서 저도 모르게 아이고 소리가 나와서 민망해진 것도 잠시 원영이 조금 웃은 것도 같아서 유진은 다시 입을 말아물고 허리를 들어올렸다. 이걸 열번 할게요. 열번이요?
" 다음으로는 누워서 다리를 들어올리는 자세를 해볼게요 "
다시 원영이 누워서 다리를 직각으로 들어올리는 시범을 보이고는 제 허벅지랑 다리를 보시면은 이렇게 직각으로 서야 되거든요 하는데 지금 제가 저 다리를 보고있어도 되는건지 진짜 이게 맞나 유진아 너 진짜 미쳤니 너무 속이 시끄럽다.
" 자, 이제 회원님 차례에요 "
다리를 어떻게...그냥 들어요? 그냥 이렇게 직각으로? 이건 힘이 들어가지않는데. 네 맞아요 자세를 유지하면서 들고 계세요. 호흡을 유지하셔야죠 여기 숨을 뱉을 때 갈비뼈를 조이세요. 하면서 원영이 상복부에 손바닥을 대서 누르는데 또 아이고 소리가 난다. 직각으로 다리를 유지하시라고 허벅지 뒤를 손으로 받치는데 또 아이고.
" 자꾸 아이고라고 하시네... "
쿡쿡 웃던 원영이 회원님이 호흡이 잘 안되시네요. 저 호흡하는거 한번 보세요. 하곤 유진 옆에 누워서 호흡법을 다시 시범을 보였다. 손 줘보세요. 손이요...? 유진의 손을 끌어다 상복부에 대고는 마실때는 이렇게 열렸다가 뱉을때는 이렇게 갈비뼈가 닫혀야되요 느껴지시죠? 하고 눈을 맞추고 말하는데 네 선생님 너무 느껴져서 죽겠어요 라고 차마 말은 못하고 네 알겠어요 바로 고개를 숙이고 겨우 대답이나했다. 또 원영이 쿡쿡 웃은거 같은건 착각이겠지.
원영은 평소보다 조금 이르게 유진의 카페 앞에 도착했다. 10시도 안 된 시간. 이제 막 스콘이 나오는지 카페 안에 스콘 구워지는 냄새가 문밖까지 솔솔. 카페 안으로 들어서기 전에 슬쩍 창에 비춰서 옷매무새도 다듬고 립까지 고치고서는 자연스럽게 카페 문을 열었다. 카운터 앞에 서는데 뭔가 오늘따라 평소보다 앞치마를 두르고 있는 모습이 더 훤칠한 거 같기도 하고 셔츠를 입어서 그런가 괜히 더 예쁜거 같기도 하고 더 잘생긴 거 같기도 하고 기분이 이상요상
" 오늘 좀 일찍 오셨네요? 아직 스콘은 안 나왔는데 "
" 아이스 아메리카노하고 치즈 스콘 주세요. 나올 때까지 기다릴게요 "
" 테이블에 앉아서 조금만 기다리시겠어요? 커피 먼저 드릴게요. "
테이블에 앉아서 커피 내리는걸 보고 있으려니까 진작 좀 일찍 와서 앉아서 커피 마실걸. 괜히 빠듯하게 테이크아웃해서 다녀가지고 저 잘난 얼굴로 커피 내리고 베이킹하는 걸 놓쳤네. 조금 더 일찍 오면 스콘 굽는 것도 볼 수 있나. 원영은 카페 테이블에 앉아서 유진을 구경하는 제 모습이 스스로 웃기다가도 그새 다시 유진을 보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러다가 제 상복부에 손을 대고는 고개도 못들고 네 알겠어요 하던 모습도 떠올라서 또 입꼬리를 올리다가 입술만 깨물었다.
스콘이 드디어 나왔는지 스콘까지 말끔하게 포장해서 테이블로 가져다주는 걸 받아서 원영이 일어났다.
" 밥은 언제 살까요? 제가 우산 신세 져서 밥 사기로 했잖아요. "
" 신세랄 것도 없는데요. 밥까지 사진 않으셔도 되는데... "
원데이 클래스 때도 그렇고 분명 저한테 관심이 있는 것 같은데 이러는 건 쑥맥이라고 해야 하는지 아니면 그냥 제가 착각한 거고 단순히 친절한 거라 밥까진 안 사도 된다는 건지. 나만 자꾸 지금 당기나 이건 밀당을 하는거야 뭐야. 대답을 못 듣고 미적거리면서 카페를 나서려는데 그 사이 전화가 왔는지 휴대폰을 든 유진의 통화 소리가 너머로 들렸다.
' 아니 엄마 알아서할게... 굳이 뭐 소개팅이라고 할것 까진.. 아니 이미 이름도 알고 얘기도 했다니까 알아서 한다고 뭘 소개를 해줘... '
' 하...알았어 갈게 '
-
그러니까 소개팅을 하러 간다는 얘기네. 오전 오후 수업을 하는 내내 정신이 어디에 팔렸는지 유진의 소개팅 생각만 원영의 머릿속을 헤집었다. 진짜 나만 관심 있는 거야? 진짜로 나만? 아니 원데이 클래스때도 그렇고 나만 관심있을리가 없는데 내가 이렇게까지 촉이 안 좋은 여자였다고? 속이 박박 긁어지는데 진짜 소개팅하냐고 가서 물어볼 수도 없고, 매트에 올라간 회원님들 자세나 잡아주면서 인상만 썼다. 소개팅을 오늘 하는 건 아니겠지 오늘따라 셔츠를 입고 온 게 그래서 입고 온 건 아닐 거야. 안 한다고 처음에 뺏던걸 보면 이번 주말에 하나. 이게 셔츠 착을 좋아하는 게 아니라 티셔츠를 입었을 때도 맘에는 들었었는데 왠지 셔츠 입고 소개팅에 나가는걸 상상하니까 더욱 속이 베베 꼬인다. 아니 연애를 말이야 자만추를 해야지 누가 소개팅을 하고 그래. 나도 그냥 소개팅이나 할까 진짜 짜증나.
" 선생님. 제가 지난번에 말했던 우리 딸 혹시 진짜 관심 없어요? 우리 딸은 선생님한테 관심있대 "
아휴, 어머님 또 이러시네. 원영은 다시 거절을 하려다가 문득 유진도 소개팅한다는데 나라고 뭐 맨날 자만추하냐. 그러다가 아니다 괜히 회원 따님이랑 엮였다가 무슨 안 좋은 꼴을 보려고.
" 이따 우리 딸이 나 데리러 오는데 얼굴만 잠깐 봐요. 진짜 괜찮다니까. 인사만 딱 해요 내가 인사 시켜줄게 "
선생님이 딱 보고 진짜 너무 별로고 맘에 안 든다 하면은 내가 더 이상 얘기 안 할게. 그냥 우리 딸 얼굴만 한번 보라니까요. 내가 뭐 커피를 마시라고 해 밥을 먹으라고 해. 딱 인사만해요. 저렇게 말씀하시는데 얼굴이고 뭐고 됐다고 거절 할 수도 없고 그냥 예 알겠어요. 이따 데리러 오시면 인사 할게요 됐죠 어머님?
하여튼 알아서 한다니까 굳이 인사를 또 시켜준다고. 그와중에 인사 시켜주는것도 소개팅이라고 하는거 아니냐고 하는 엄마가 진짜 웃기다. 유진은 마지못해 엄마의 필라테스 강의 끝나는 시간에 맞추어 문화센터 3층 필라테스 룸으로 걸어 올라갔다. 아까 오전에 엄마가 전화를 갑자기 걸어오는 통에 원영씨랑 식사 약속도 제대로 못 잡았는데, 엄마는 제 속은 아는지 모르는지. 지금 엄마 딸이 소개고 나발이고 썸이라도 타보려고 지금 그러고 있는데 도움은 못 될 망정. 목요일이라 잘보이려고 잘 안 입는 셔츠도 꺼내입고 왔는데 괜한 짓을 한 건 아니겠지. 유진은 수업이 끝나기 직전에 3층 필라테스 룸 문 창에 얼굴을 대고 안을 보다가 머리를 올려묶은 필라테스 복 차림의 원영을 발견하고는 아이고- 다시 문 옆으로 몸을 숨겼다. 전에는 손이 닿아야 소리가 나더니 이젠 목선만 봐도 아이고 소리가 입밖으로 나와버렸다.
숨긴 몸이 무색하게 곧바로 열린 문 안에서 다른 회원들과 유진의 엄마 그리고 원영도 나왔다.
" 어머, 우리 딸이 나 데리러 왔네 "
선생님 여기 우리 막내딸. 나 데리러 왔지 뭐에요. 유진은 멋쩍게 원영에게 인사를 했다.
" 아... 안녕하세요... "
" 안녕하세요. "
선생님 우리 딸이에요 이름은 안유진. 네 성함은 전에 원데이 오셨어서 알아요. 어머님 따님이셨구나. 그 전에도 비 오는 날에 우산 가지고 오셨을 때 한 번 만났었다는 얘길 하고는 그럼 어서 들어가시라고 원영이 인사를 하고 이내 탈의실로 옷을 갈아입으러 들어갔다. 아주 찰나의 인사. 뭐가 이렇게 짧아 아쉽게
그래도 나름 훤칠하게 잘 낳아놨다고 생각했는데 영 선생님 맘엔 안드나보네 너 인기 많았던 거 맞아? 너 중고등학교 때 여자애들한테 받아온 초콜릿 그런 거 다 편의점에서 니가 돈 주고 사온겨? 계단을 내려가 주차장을 가는 사이에 엄마가 연신 하는 말이 마음에 콕콕. 방금 마주한 원영의 표정이 영 탐탁지 않아 보이는 게 진짜 나 그렇게 별론가. 막 그렇게까지 별로라고? 속이 시끄럽다. 원데이클래스때 내가 너무 수상스러워보였나 아니면 너무 횡설수설하고 그래서 좀 이상해보이나. 문화센터 앞 지상 주차장 끄트머리까지 걸어갔다가 엄마 먼저 가요 나 일이 좀 있어서. 유진은 주차장을 가로질러 내달렸다. 다시 3층 필라테스 룸 탈의실 앞까지 계단을 두 계단씩 성큼 뛰어올라 막 탈의실에서 평상복으로 갈아입고 나온 원영 앞에 서서 차오른 숨을 몰아서 내뱉고 숨을 골랐다.
" ... 저 그렇게 별로예요? "
무슨 말인지 영문을 모르겠다는 원영의 눈빛에 대고 저 그렇게 별로냐고요. 두 번을 되물었다.
" 저는 원영 씨 맘에 드는데 "
원영 씨한테 저는 되게 별론가요. 얼굴은 조막만 해서 빤히 쳐다보는 원영의 눈에 얼굴이 뚫어질 거 같다.
저는 되게 맘에 들거든요. 그래서 스콘도 드리고 그런 거거든요. 원래 스콘 주고 그런 거 안 해요. 쿠키도 안주고요. 생색내는거 진짜 아니고... 아니 그니까 제가 좀 횡설수설하고 막 꼬리뼈 그런 얘기하고 그래서 이상해 보였을 수 있어요 인정해요... 그게 근데 제가 원영 씨가 맘에 드는데 뭐 어떻게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어서 그런 거거든요... 아니면 막 제가 원데이 듣고 그럴때 좀 수상했나요? 그때도 그냥 제가 어떻게 해야 할 지 모르겠어서 그런거거든요... 암튼 제가 마뜩잖으신 건 알겠는데 그래도 제가 그렇게까지 별론가요? 막 일말의 여지가 없나요? 조금도? 손톱만큼도요?
" 소개팅 한다면서요 "
" 네...? "
" 아까 오전에 통화하는 거 들었거든요. 소개팅 하신다고 "
" 아니 그거는... 소개팅을 제가 누구랑 한다는 게 아니고 그게... 원영 씨거든요 엄마가 인사를 시켜준다고... 다른 사람이랑 소개팅을 하는게 아니라 그냥 원영 씨랑 인사시켜준다는걸 엄마가 소개팅이라 표현을 하셔가지고.. "
변명을 구구절절 늘어놓다가 이걸 왜 변명을 하는 건지 다시 원영을 빤히 바라봤다. 이거 혹시 지금...
" 제가 맘에 안 드는 거에요 아니면 제가 다른 여자랑 소개팅 한다는 게 맘에 안 드는 거에요? "
가만히 서 있는 원영의 앞으로 한 걸음을 더 다가섰다. 그리고 또 한 걸음 더. 이제는 겨우 두 걸음도 떨어지지 않은 사이로 대답이 없는 원영에게 유진이 다시 한번 더 물었다.
" 나랑 내가 다른 여자랑 소개팅 하는 거. 둘 중에 뭐가 맘에 안 들었어요? "
둘 중에 대답이 어떤 거냐에 따라 유진의 그 다음 스텝은 매우 다를 거였다. 원영이 입을 뭐라 떼기도 전에 마른 입술만 바짝 탔다. 혹시 지금 유진의 생각이 맞다면 그렇다면.
" 유진 씨가 다른 여자랑 소개팅 하는 거요. "
그럼... 저랑 저녁 식사하실래요 아까 오전에 식사 약속 정하다가 못 정했잖아요. 아직 4시도 안됐으니까 일단 그... 혹시 성심당은 가보셨어요? 서울 사시니까 안 가보셨을까봐 여기서 지하철로 본점이 몇 정거장 안 가면 있거든요. 성심당에선 보문산 메아리를 먹어야 하는데. 아, 보문산 메아리라고 대전에 보문산 있는데 그거 이름 딴 빵이 있거든요. 튀김소보루 보다 그게 맛있는 거라서 대전사람들은 그걸 먹거든요. 그리고 그 대전에 시립미술관도 있거든요 미술관 가는 거 좋아하시면 거기 가도 되고요. 미술관 바로 뒤에 한밭수목원도 있는데 산책하기도 좋거든요. 아, 근데 서울 가셔야 하지... 몇시 기차세요? 아니면 아예 저녁을 서울로 가서 먹을까요? 저는 다 괜찮은데... 용산 사신다고 하셨었죠?
다시 횡설수설 주절거리는 유진을 보고 이제는 원영이 또 쿡쿡 웃다가 유진의 소매를 살짝 잡았다. 아이고 또 정신이 하나도 없다.
" 성심당 저 안 가봤어요. "
저저저번주에 성심당은 이미 갔다 왔고. 토요일에 데이트 겸 대전을 당일치기로 내려오기로 한 원영 맞이 데이트 코스를 짜느라 머리를 싸맸다.
두부두루치기를 먹어야겠지. 매운 거 못 먹는다고 했으면서 그래도 두부두루치기는 먹고 싶다고 해서 지금 주말 웨이팅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원영이 자기가 데이트 코스를 짜겠다고 했는데 또 대전에서 나고 자라서 서울 사람한테 대전 당일치기 데이트 코스 짜라고 하기도 좀 그렇고 노잼도시 오명을 벗어야 할 텐데. 두루치기는 중앙로역 근처에 맛집 있다고 엄마가 그새 마주 앉아 훈수를 뒀다.
" 주말에 선생님이랑 데이트하냐? "
" 엉... 여기 웨이팅 너무 심한 집 아니야? "
" 웨이팅 있긴 한데 그 집이 방송도 나오고 엄청 큰 집이야 겉에선 안 그래 보여도 2층도 있고 "
" 그래? 아, 근데 원영 씨가 매운걸 잘 못 먹는다 해가지고 "
" 거기 수육도 팔아. 수육 소짜 하나 시키고 두부두루치기에 면 사리 넣어서 먹고 그럼 된다. "
웨이팅 이름 써놓고 그 옆에 뭐 카페랑 귀여운 거 파는데 많어 그런데 돌아댕기면 되잖어 귀여운 거 하나 사주고 하나씩 나눠 갖자 뭐 그런 거 하면 되지. 연애에서 나보다 엄마가 낫네. 당연한 소릴해 넌 모태솔로고 난 결혼한 여잔데. 엄마 나 지금 돌려 까는 거야? 알면 됐어 아주 데이트코스를 내년까지 짜겄어 선생님 내년에 오시라고 해라. 엄마 아주 그냥 딸래미한테 연애도 내년부터 하라고 하지 왜.
9시 58분 서울발. 대전역에 11시 02분에 도착하는 원영이 탄 KTX를 운동화를 콕콕 치면서 기다렸다. 보고 싶어 죽겠는데 그 와중에 5분 지연 도착 미쳤니. KTX가 무슨 사람이 노 저어 오는 것도 아니고.
" 기다렸죠. 기차가 조금 늦게 도착했어요 "
" 늦은 줄도 몰랐어요. 아침 일찍 출발해서 피곤하겠다 "
하나도 안 피곤한데 하고 팔짱을 끼는 원영 때문에 입에서 아이고 소리가 나온다. 왜 자꾸 아이고라고 해요. 몰라요 그냥 입에서 나와요.
중앙로역 두부두루치기 맛집이란 곳에 웨이팅에 안유진 이라고 이름을 적어 놓고 근처 소품샵을 구경했다. 소품샵 입구에 떡하니 엎드려서 식빵을 굽고 있는 고양이 옆에 앉은 원영의 사진을 8장 정도 찍고 유진도 고양이 옆에 앉아서 사진을 찍었다.
책갈피 하나 할래요? 전에 책 읽는 거 좋아한다고 해서... 고래랑 강아지랑 고양이랑 토끼 있는데 하나 골라봐요. 두 개 고르면 안 돼요? 당연히 두 개 골라도 되죠. 원영이 강아지랑 고양이 책갈피를 골라서는 유진에게 고양이 책갈피를 하나 내밀었다. 강아지는 제가 하고 유진 씨는 고양이해요. 엥 고양이? 토끼가지면 안 돼요? 원영 씨는 토끼같은데. 토끼해요 그럼. 자꾸 웃어서 보조개 자리가 이젠 좀 아픈거 같다.
" 수육 소짜 하나랑 두부 두루치기 주세요. 면 사리도요 "
유진은 엄마한테 전수 받은 그대로 주문을 넣고 원영과 마주 앉았다. 가게가 은근히 크네요 겉에서 보기보다. 2층까지 있다고 하더라고요.
" 엄마가, 이 집이 맛집이라고 여기 가야 한다고 하셔서. 면 사리도 꼭 시키라고 하시더라고요 "
" 데이트 코스를 어머님이 다 짜주신 건 아니죠? "
쿡쿡 웃는 원영을 보고는 머쓱해진 유진이 다는 아니고 훈수를 좀 두신 정도? 제가 너무 답답하다고 원영씨 내년에 와야 할 것 같다고 하시더란 말을 하면서 앞으로 물을 따라줬다. 어머님 덕분에 올해 유진씨 보러왔네요, 저 성격 엄청 급해서 내년까진 못 기다려요. 얼마나 급한데요? 엄청 급해요 뭐든 더는 못 기다려요.
" 이거 먹고 이응노 미술관 갈 건데 거긴 제가 짠 코스에요. 진짜로 순도 백프로 제가 짠 코스 엄마 의견 1도 안 들어갔어요 "
" 저 거기 가고 싶었는데. 저 미술관 엄청 좋아해요 "
이제 대전 출강 얼마나 남았죠? 친구가 부탁한 거는 한 달 정도요. 그럼 그때부턴 완전 롱디네요 우리. 유진 씨는 서울이랑 대전도 롱디로 쳐요?
뭔가 롱디라고하면 안 될 것 같은 타이밍. 유진은 황급히 손을 저었다. 아뇨? 걍 근처죠 그냥 인근이죠 완전 집 앞이지, 제가 주말에 필라테스를 서울로 받으러 다녀볼까 봐요. 이 어이없는 능청에도 쿡쿡 웃는 원영이 좋다.
" 주말에 필라테스를 어디서 배울 건데요 "
" 아, 제 여자친구가 서울에서 필라테스 학원을 해가지고 "
" 그래요? 저는 주말엔 대전 서구 문화센터에 출강 나올 거 같은데 도대체 어느 여자친구를 말하는 거야 "
" 여기 문화센터 계속 올 거라고요? 친구가 부탁한 거 한 달 남았다면서요. "
" 그거 끝나면 새로 주말반 하려구요. 제 여자친구가 대전 살아가지고.. 노잼도시라더니 지금 대전이 완전 대유잼도시거든요. "
" 그럼 저는 문화센터 필라테스 반을 등록해야겠네요 주말에 여자친구랑 한 시간이라도 더 같이 있으려면. "
유진이 나름의 능청을 떨고있는 사이 엄마에게서 온 문자가 화면으로 번뜩였다.
[ 너 오늘 집에 들어오지 마 ]
이게 또 무슨 소리야. 집엘 왜 들어오지말래 쫒아내는건가.
[ 왜? 나 뭐 잘못했어? ]
[ 으이구 맹꽁아 넌 진짜 연애 내년에 해라 ]
" 왜요? "
" 아, 엄마가 문자로 맹꽁이라고 하셔가지고 "
뭐라고 했길래 맹꽁이 소릴 들었어요 하는 얼굴을 들여다보다가 다시 엄마의 문자를 보다가 다시 원영을 보다가 다시 아이고 소리가 나온다. 우리 엄마 진짜 미쳤나봐.
왜요 뭔데... 자꾸 혼자 아이고 하지말고 나도 알려줘요. 아니 아무것도 아니에요. 뭐야 그럼 내가 어머님한테 연락해서 물어볼거에요. 아니아니 안 돼요. 그러니까 뭔데 뭐냐구요. 손을 뻗어서 휴대폰을 달라고 하는데 또 손이 잡혀서 다시 또
아이고
fin.
=====================
가요대전도 대전이다.. 대전의 딸 안유진을 생각하면서 썼습니다.
모두 윶녕하세요...!
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늘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