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이 계속되지 않으면 어떻게 해야 할까? 서울은 넓기만 하고 혼자 남은 놀이터도 넓기만 하다.


 낡은 주공아파트 단지의 추석 하늘은 여전히 높고 달은 여전히 동그랗게 밝았다. 집 안에 있는 손자손녀중에 유일하게 인서울을 했다고 웬일로 명절에 유진도 갈비찜을 먹었다. 갈비찜을 먹고 느글느글한 속을 달랠 겸 늘 걷던 코스로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야들야들한 고기를 먹었는데도 이상하게 계속 속이 느끼해서 놀이터를 계속 빙글빙글 돌았다. 후문 상가 쪽 놀이터로 걷는데 그 사이 많이 달라진 놀이터랑 상가가 눈에 들어왔다. 여기 뺑뺑이랑 시소도 다 없어졌네. 싹 다 바꿀 기세더니, 재건축 확정됐다고 현수막이 붙자마자 놀이터 리모델링은 멈추고 그냥 죄다 없애는 듯했다. 


 휑한 뺑뺑이 있던 자리며 나무 시소가 있던 자리엔 달빛만 휘영청 쏟아지고 있었다. 예전에 뺑뺑이 위에 원영이 올려놓고 토할 때까지 돌렸는데. 진짜 그러다가 제가 토할 뻔했던 게 기억났다. 지금은 체력이 더 좋아서 그때보다 더 잘 돌릴 수 있을 거 같은데 돌릴 기회도 없이 뺑뺑이는 없어졌다. 뺑뺑이 타던 장원영도. 새삼 없어진 것들로 인하여 들인 수고들이 다 공허해졌다. 


 무슨 수를 쓰든 인서울을 해야만 해서 체육특기생 입시 고1 때부터 빡세게 준비했다. 입시 때문에 인스타를 없애면서 뭘 잘못 눌렀는지 걍 싹 다 인스타고 뭐고 날아가 버려서 원영이랑은 이제 연락 닿을 길이 없었다. 저번에 보니까 분식집에 ' 장원영 왔다 감 ' 하고 적어놨던데 이번 추석에는 고3이라 아마 안 오겠지. 공부 잘 한다고 했었으니까 수능 코앞인 추석에 올 리는 없었다. 우연히 마주치는 건 두 번이 전부였을지도 모른다. 고등학교 가면 뭐 해야지 대학교 가면 뭐 해야지 이런 결심들은 결국 뭐라도 기회가 있어야 하는 것인데 그 세 번째 우연이 오질 않았다.




 분식집도 명절 코스니까, 라면 하나 시키고 구석자리에 앉아서 벽이나 슬슬 훑었다. 이제는 더 글씨를 적을 곳도 없을 만큼 빼곡하게 낙서가 들어차 있었다. 배불러서 면은 못 먹겠고 국물이나 후룩후룩 마시다가 읽어내리던 벽면에. 뺑뺑이 타고 싶다. 시소 타고 싶다. 쌍쌍바 먹고 싶다. 이런 초딩 글씨가 눈에 들어왔다. 보자마자 누가 쓴 건지 알 것만 같은 말. 진짜 쪼그만 게 귀여운 소리하고 있네. 엇갈린 날 동안 여기서 끄적끄적 적고 있었을 걸 생각하면 또 보고 싶어지는 것이었다. 그러다 밑에 좁쌀만 하게 적힌 글씨를 한참 들여다봤다. 유진은 주섬주섬 펜을 들어서 같은 좁쌀만 한 글씨로 적었다. 






나도 너 보고 싶다. 

PS: 나 안암 호랑이 됨. 







서울이 좁았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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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영은 원하던 대학 문을 발로 박차고 들어갔다. 구정에 할머니 댁에서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다 기특하다고 쓰담쓰담해서 또 기가 빨렸다. '우리 강아지'가 모든 문장의 시작인 할머니랑 할아버지가 원영을 말로 물고 빨아 재끼셨다. 신촌 라이프를 꿈꿨으니까 그냥 빨리 입학했으면 하는 마음이었다. 중학교도 너무 지루하고 고등학교도 너무 지루했다. 


 후식으로 딸기까지 야무지게 먹고 낡은 아파트 단지를 걸었다. 이제는 어릴 때보다 조금 한산해진 주차장이며 군데군데 나간 가로등이 갈수록 이 아파트의 은퇴 연도가 가까워져 옴을 알 수 있었다. 재건축은 결정이 됐는지 아파트 벽면에 재건축 확정 하고 커다랗게 현수막이 걸려있었다.


 재건축은 전에 유진이 설명해준 거 보면 낡은 아파트 부수고 다시 짓는 거라고 했었다. 그래서 놀이터에 오래된 것들을 죄다 없앤 걸까. 다들 새것만 좋아한다는데 정작 원영은 그 오래된 것들이 재밌고 오래 알고 지낸 것들이 더 좋았다.

 

 놀이터는 뺑뺑이도 없어지고 시소도 없어지고 이젠 마지막으로 남아있던 그네도 없어졌다. 예전에 나무 시소가 있었던 자리에 타이어만 콕콕 2개 박혀있었다. 놀이터는 텅 비어도 자꾸 그 놀이터에 누가 있을 것만 같았다. 슬리퍼를 끌고 티셔츠에 밀가루를 묻힌 누군가가. 나 뺑뺑이 잘 돌려 하고 전력 질주를 할 것 같은 누군가가. 자꾸만 저 하늘 높이 저를 올려줄 것 같은 누군가가. 그런 없어진 것들이 좋아져 버려서 속상했다. 유치원 때까진 한 번도 안 탔던 뺑뺑이랑 시소 그네 뭐 그런 것들. 뒤 늦게 맘에 쏙 들더니 다 없어져 버렸다. 텅 비어서 모래만 남아있는 놀이터 울타리에 서서 모래를 슥슥 긁었다. 놀이터는 텅 비었는데 원영의 맘은 좀 처럼 비워지질 않았다. 



 후문 상가에 분식집에 갔다. 분식집 사장님이 여기도 재건축 삽 뜨면 이제 비워줄 거라고 내년 초쯤 되면 문 닫지 않겠냐고 하셨다. 벽에 가득한 낙서를 보다가 명절에만 오는 곳인데도 괜히 없어진다니까 서운했다. 


 분식집도 없어지고 아파트도 부수면 이러다가는 안유진이랑은 평생 볼 일이 없겠지. 우연도 계속되면 인연이라던데. 우연히 얼굴에 슬리퍼 맞고 우연히 놀이터에서 보고 이런 우연이 겨우 우린 두 번이라서 인연으로까지 가진 못 했나보다. 한 번만 더 우연히 마주치지. 딱 한 번만 더. 그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계속 마주치게 내가 할 텐데.



 배고픈 것도 아닌데 김치볶음밥 하나 주문하고선 벽이나 또 훑었다. 뺑뺑이 타고 싶다. 시소 타고 싶다. 쌍쌍바 먹고 싶다... 보고 싶다. 그런 거 적어놓은 데가 있었는데. 벽에 코를 박고 글자 틈마다 눈을 굴려서 찾았다. 작년 구정에 적어놓은 좁쌀만 한 원영의 글씨 아래로 적힌 글귀를 보았다. 






나도 너 보고 싶다. 

PS: 나 안암 호랑이 됨. 






누가 쓴 건지 너무 알겠어서, 약간 울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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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진은 학교 근처 참살이길에 위치한 주점 주방에서 대충 사장님이 알려준 레시피대로 무뼈 닭발, 참치마요 주먹밥 같은 걸 맡아 만들었다. 매주 금 6시부터 자정까지 알바를 하고 있는데 워낙 시끄럽고 손님 많은 주점이라 시급도 최저시급에 2배를 주셨다. 그러니까 주에 하루만 6시간 뛰면 대충 월 50만원짜리 꿀알바였다. 체력이 좋으니까 6시간 주방에 서 있는 거야 뭐 껌이지. 


 오늘은 축제 전에 뭔 모임이 있다고 학과 애들이 홀에 와있어서 적잖이 주방에서 불려 나갔다. 이제 2학년이 되어서 술자리 불려 나갈 일도 줄어들고 알바로 돈이나 벌고 있는데 도움 안 되는 학과 애들이 자꾸만 알바하는 데 와서 알짱거린다.


 하여튼 체교과 새끼들은 술도 말술이어서 과 애들이 앉은 테이블에 인당 서너병씩은 소주병을 쌓아놓고 마셨다. 마감 시간인 새벽 3시까지 알바 안 하는 게 다행이었다. 또 얼마나 지랄을 떨어댈지 눈에 선했다. 


 퇴근 시간이 가까워져서 매고 있던 빨간 앞치마를 걸어놓고 밖으로 나오니까 여기서 보기 드문 퍼런 과잠을 입은 뒤태가 보인다. 키 173센치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스무살짜리 사채업자다. 





' PS: 나 안암 호랑이 됨.' 


이라고 적어놓은 걸 보고 학기 시작하자마자 학교 정문에서 저를 마주칠 때까지 하루종일 기다린, 아주 돈을 받아내겠다는 의지가 대단한 사채업자. 


 정문에서 기다리는 걸 마주쳤을 땐 귀신인 줄 알았다. 서울이 좁았으면 좋겠다고 매일 생각했더니 헛것을 보나. 얼굴은 그 사이 젖살이 싹 빠져서 볼살은 반토막 나고 키도 더 커 있었다. 나도 키 더 커서 173이 됐는데, 세상에 또 비슷해져서 대박 신기했다. 중2 때 이후로 본 거니까 얼굴은 대략 5년 만에 본 거였다. 그 사이엔 분식집 벽에 동글동글 초딩 글씨 남겨 놓은 거 본 게 다였다. 글씨가 여전히 초딩이라 하나도 안 컸을 줄 알았더니 쑥쑥 커서 그때 그 초딩이 맞나 의구심이 들었다.




' 언니, 돈 언제 갚아요? '


 5년 만에 얼굴 보고 한 첫 마디가 저거였다. 유진은 보고 싶었다고 첫마디를 하려다가 저 말에 그냥 말도 못하고 아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맞다 내가 천 배로 갚는댔지. 


' 안 갚으면 삥 뜯었다고 이를 거예요. 당장 번호 내놔요. '


 안 갚겠다고 한 적도 없는데 선수를 쳤다. 번호도 내가 먼저 줄랬는데 더 빨리 달라고 해서 또 아하하하하- 하고 웃었다. 자꾸만 속절없이 선수를 뺏기고 있었다.
















" 여기서 그 과잠있고있는 건 어지간한 관종 아니면 어려운데 "


 호랑이들이 득실득실한 학교 근처 참살이길 주점 입구에, 아직 학교 뽕이 덜 빠진 퍼런 피 신입생이 Y자가 떡하니 박혀있는 과잠입고있는거에 관종이라고 톡 쏴붙여 줬다. 하여튼 아직도 과잠만 입고 다니는 게 진짜 1학년 냄새가 풀풀 났다.



" 전에 정문에서 언니 기다릴 때 보니까 이거 안 입어도 다 쳐다보던데요. "  

" 머리 치렁치렁하고 다녀서 쳐다본 거 아니고? "

" 머리는 지금 언니가 더 산발이에요. "


 반박은 못하고 주방에서 요리해서 그런가 하고 머쓱하게 머리를 슥슥 정리했다. 사실 요리라고 할 것도 없는 사장님이 다 만들어 놓으신 거 양푼에 덜어서 익히기만 하는 거였다. 그래도 불 앞에 서 있긴 하니까.


" 너 과외 몇시에 끝났는데 이 시간까지 안암에 있어? "

" 6시요. "

" 그럼 그냥 주말에 수금하러 오지, 이 시간에 오면 너 집에 어떻게 가. "

" 안 갈 건데요? "

" 안 가면 어디서 잘 건데. "

" 언니 자취방. "

" 숙박비 수금에서 까줄 거야? "

" 전혀요. 줘요 천원. "



 작은 손을 내밀고는 까딱까딱 하는데 유진은 주머니에서 천 원짜리 한장을 꺼내서 원영에게 내밀었다. 요즘 시대에 누가 현금을 가지고 다닌다고 따박따박 현금으로 받아 가는 통에 현금 쓸 일 생길 때마다 잔돈으로 바꿔서 주머니에 천 원짜릴 몇 장씩 넣어 다녔다. 그 천 원짜리 중에서도 그나마 제일 깨끗하고 덜 지저분한 것들로만 골라서 원영에게 한 장씩 줬다. 하여튼 초딩때부터 따박따박 따지고 말꼬리 잡고 골 때리게 굴더니 스무살 돼서도 골 때렸다.


 매주 안암으로 과외를 하러 오면서 수금을 하러 오는 원영은 도대체 어떤 나일롱 학생을 과외를 하는 건지 과외 요일도 시간도 제멋대로였다. 대뜸 수요일에 나타나서 수금했다가 어떨 때는 금요일에 나타나서 수금했다가. 미리 준비 할 수도 없게 당일 통보식이다. 그러니까 오늘처럼 6시간씩 유진을 기다리게 되는 거였다. 괜히 유진만 원영의 눈치를 봤다. 안 보는 척 했지만 은근히 많이 눈치 보고 있는 거였다. 기다리게 한 거 미안하니까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먹일까. 



 좁은 골목을 구불구불 걸어서 자취방으로 걷다가 슈퍼마켓이 눈에 들어와 물었다. 원영아, 아이스크림 하나 먹을까. 골목 안에 불을 밝히고 있는 슈퍼마켓에서 원영이 고른 쌍쌍바를 샀다. 다른 신제품 아이스크림도 많은데 원영은 꼭 쌍쌍바를 골랐다.


" 요즘 뭔 쌍쌍바가 1200원이나 하냐. "


 예전에 원영이랑 나누어 먹을 땐 천 원도 안 했던 거 같은데 물가가 진짜 많이 올랐다. 이제는 바닐라 맛까지 나온 쌍쌍바를 오리지날이 최고라고 초코맛 그대로 사서 원영에게 한 쪽을 내밀었다. 


" 언니는 진짜 쌍쌍바 잘 자르는 거 같아요. 반으로 싹. 완전 달인이야. "

" 특기야. 근데 나 갚을 거 얼마나 남았어? "

" 한참 남았어요. "

" 그니까 얼마 남았는데. "

" 한참 남았다구요. "

" 쌍쌍바 내가 사줬으니까 600원 까줘. "

" 그럼 그게 사준 거에요? 내돈내산이지. "



 입에 쌍쌍바를 쪽쪽 빨면서 하는 저 말도 맞는 말이라 씨익 웃었다. 하여튼 맞는 말만 한다니까. 원영은 곧 죽어도 한 번에 천 원만 딱 까준다. 아이스크림도 사주고 밥도 사주고 술도 사주고 가끔 데려다주고 가끔 재워줘도 딱 천원만. 아주 고집스러워서 더 따져봐야 소용도 없다. 소용없는 거 아는데 그냥 귀여우니까 까달라고 말이나 꺼내 보는 거다.





" 나 축제 때 주점 하니까 놀러 와. "

" 뭐 하는데요? "

" 파전 부칠 거 같은데... 학과에서 하는 거라 못 빠져. 넘 멀면 말고. "

" 잔디 뜯어다 부치는 거 아니에요? "

" 사람을 진짜 뭘로 보냐. "

" 그때 한창 우리도 축제 기간이라 못 올 거 같은데, 상황 봐서요. "

" 아니다. 걍 오지 마. "

" 왜요? "

" 그냥. 생각해보니까 안 오는 게 나을 듯. "


 생각해보니 우리 과 주점은 말술들로 득실득실할 게 뻔해서 와봤자 좋은 꼴 볼게 없었다. 가로등도 없는 골목길을 아웅다웅하면서 걸었다. 원룸촌에 주차난으로 차들이 빼곡하게 찬 길을 걸으면서 주차할 데가 없으면 차를 못 사게 해야 한다고 본다. 맞아요 주차할 데도 없으면서 차를 왜 사. 아웅다웅 와중에 저렇게 서로 맞장구도 치면서. 






" 제가 침대에서 잘 거예요. "

" 침대에서 자면 만원인데 원영아. "


 어차피 안 까줄 거 알고 한 번도 바닥에서 재운 적 없으면서 그냥 말해보는 거다. 베개 베면 이만원, 이불 덮으면 삼만원 하고. 저러면 이제 곧 원영이 바닥에 누운 저를 내려다보면서 언니 때리게 해주면 천원 더 까줄게요 한다. 어디 언니를 때린다고 쪼그마한 게. 키도 똑같은데? 제가 어디가 쪼그마한데요.




하여튼 한마디를 안 져요.

근데 어차피 이길 생각도 없었다.










-







 잔디를 뜯어다 부치고 싶을 만큼 손님이 밀려드는 축제 주점 주방에서 유진은 파전을 대략 100개쯤 뒤집었다. 앞치마를 두르고 파전을 뒤집는 중간중간에 땀이 삐질삐질 나서 연신 물수건으로 땀을 닦았다. 그냥 애들이 서빙 할 거냐고 했을 때 서빙한다 할 걸 괜히 얼굴 팔리는 거 싫다고 주방한다고 한 걸 조금 후회했다. 파전을 열심히 뒤집고 대왕 계란말이를 슥슥 말아서 접시에 내놓는데 밖이 시끌벅적해진다. 자기들끼리 뭐 게임을 하다가 번호따기나 하고 있겠지 싶었다. 


 오늘 이 캠퍼스에 술 마시는 놈들은 다 여기로 오나. 계란말이를 하려고 계란을 수십 개 퍽퍽 깼다. 하도 계란을 많이 깼더니 이젠 큰 손에 두 알씩 쥐고 탁탁 깰 수 있는 달인의 경지에 올랐다. 서빙과 주방을 오가는 동기가 밖에 개 예쁜 애가 섞여서 술 마시고 있다고 서비스주게 계란말이 하나 가져간다고 호들갑을 떨고 나갔다. 체교과 주점에 개 예쁜 애가 섞여서 술을... 



 앞치마를 탁 벗어놓고 밖을 내다봤더니 혹시나가 역시나로 원영이 체교과 애들 틈에 술을 마시고 있었다. 언제 왔대. 체교 애들이랑 섞여서 술 마시는 건 진짜 배짱도 좋다. 4명이 둘러 앉은 테이블에 앉아있는 원영을 봤다. 지네 학교 축제 준비 때문에 못 온다더니 신촌에서 여기까지 어떻게 와서 술을 마시고 있는지 모를 일이다. 온다고 진작 말했으면 주방한다고 안 하고 그냥 서빙하고 있었을 텐데. 딱 봐도 같은 테이블에 앉은 4명 중에 원영의 지인으로 보이는 애는 없었다. 누가 봐도 그냥 번호나 따보려는 시답잖은 우리 과 애들이다. 



 유진이 내다보는 건 모르고 원영은 계속 옆에 애들이 내미는 술잔을 받니 마니 하고 있었다. 아직 주방 교체 타이밍은 멀어서 멋대로 나갈 수도 없고 그냥 에휴 하고 보다가 나 파전 딱 5개만 더 뒤집고 집 갈 거다- 동기들에게 말하고는 서둘러 주방으로 들어가 파전을 뒤집었다.










  



 조금 전에 주방에서 빼꼼 내다보는 것 같았는데 다시 주방으로 쏙 들어가 버려서 유진은 언제 서빙 파트로 나오는 건지 원영은 주방 쪽만 힐끔댔다. 옆에 돌아가면서 앉는 애들이 자꾸 술을 내미는데 적당히 저어 거절했다.


한 잔 드릴까요? 아뇨. 


 분명 혼자 자리에 앉아서 적당히 이것저것 시켜서 홀짝거리고 있었는데 하나둘씩 의자를 붙여서 껴들더니, 신촌에서 안암까지 어떻게 오셨어요? 여기서 만날 운명인가. 반대가 끌리는 이유 알죠. 저딴 세상 느끼한 말을 돌아가면서 해대서 비위가 좋은데도 토할 거 같았다. 지금 자리가 주방 옆에 계란 깨는 곳이 보이는 명당이라 자릴 뜰 수가 없어서 참아주고 있었다. 


 아까 막 도착했을 때는 도대체 어디 있는 건지 코빼기도 안 보여서 주점한다고 해놓고 어디 다른 데 가서 노는 거 아니야 했는데, 좀 앉아있으니까 저 구석에서 계란을 깨기도 하고 미간을 구기고 파를 다듬기도 하길래 주방에서 고생하는구나 했다. 빨리 나오면 오늘은 만원 까준다고 해야지. 신촌에서 안암까지 러시아워에 지옥철을 40분 타고 오고, 여기서 토할 것 같은 추파도 두 시간째 참으면서도 정작 빨리만 나오면 다른데 구경하러 가자고 해야지 재밌겠다 이런 생각이나 들어서 기분이 썩 좋았다.


 그 사이에 얘가 여기서 제일 멋있는 애라는 둥하면서 이 친구랑 말 세 마디만 섞으시면 대왕 치즈계란말이를 서비스로 준다는 어이없는 소릴 들었다. 원영 앞으로 맥주잔에 소주를 그득하게 따라 보이고는 이거 제가 원샷하면 저랑 나가서 맥주 콜? 제가 맥주 살게요 딱. 하는 게 진짜 술 잘 마시면 멋있어 보이는 줄 아나 봐 별꼴이네. 앞에 하트 모양으로 케첩이 뿌려진 계란말이를 눈살을 찌푸리고 내려다봤다. 여기서 제일 멋있는 사람 누군지 내가 아는데 하고 무시하려던 차였다.



" 얘 계란말이 안 좋아해. "


 테이블에 올려져 있던 맥주잔에 가득한 소주는 언제 옆에 섰는지 유진이 한 번에 마셨다. 고개를 확 젖혀서 원샷으로 망설임 없이 쭉 넘기는 걸 올려다봤다. 입가로 투명하게 흐르는 것도. 미간을 조금 구긴채 으- 하고 입가에 흐르던 걸 닦아 빈 잔을 내려놓더니 하트 모양으로 케첩이 뿌려진 계란말이도 하나 쏙 집어먹었다. 하트 모양 정 가운데 조각으로. 나가자 맥주는 내가 사줄게. 해서 엉덩이를 겨우 붙이고 앉아있던 플라스틱 의자에서 홀린듯이 냉큼 일어났다. 아까 앞에 앉아있던 애가 왜 맥주잔에 소주 가득 따라 원샷으로 마시겠다고 허세를 부렸는지 알 것 같았다. 이래서 그랬구나. 









" 언니 학교 축제 재밌는 거 같아요. 좋아요. "

" 진짜? 아까 애들이랑 술 마신 거 재밌었어? "

" 아뇨. 그거 말구요. "



진짜 재밌는 거, 좋은 거, 멋있는 건 따로있었다.


 아, 맞다. 진짜 재밌는 데 알아. 하고는 가자고 하는 유진을 따라갔다. 재밌는 데라고 맥주도 사준다고 해서 어디 유명한 호프집에라도 데려가려나 했는데, 편의점에서 만원에 4캔짜리 맥주를 샀다. 마시고 싶은 맥주 있어? 하는 말에 딱히 잘 모르겠다고 우물쭈물했다. 향 없는 거 마셔 그럼 향 있는 거 빨리 취해서 안 좋아- 하고는 초록색 뚱뚱한 하이네켄만 4캔을 사서 비닐봉지에 넣고 걸었다. 

 

 어디를 가는 건지 유진을 따라 걸었는데, 학교 캠퍼스는 진작에 빠져나가고 지하철역을 좀 지나서 웬 아파트 단지 안으로 들어갔다. 안암골 어쩌구 쓰여 있는 아파트 단지 후문을 둘이 나란히 걸어 올랐다. 은근히 오르막길이어서 여기 왜 가는 거예요? 하고 물었다. 일단 따라와 봐 봐. 뭔지는 몰라도 유진을 쫄래쫄래 따라갔다. 




 갑자기 오르막을 걸어서 숨이 슬슬 차올라도 단지 내부는 또 나름 평지여서 슬렁슬렁 걷기 좋았다. 아파트 단지 네모난 하늘에 동그란 달이 떴다. 관리사무소를 끼고돌자 까만 우레탄 폼으로 바닥이 채워진, 가로등이 하나 겨우 밝혀져 있는 놀이터가 나왔다. 옆으로 정자가 하나 서 있고 벤치랑 운동기구들도 두어개 설치되어있는 놀이터. 놀이기구가 신식이라 예전처럼 칠이 벗겨지지 않은 코끼리 사슴 이런 그림도 그려진 놀이터였다. 





" 요즘은 뺑뺑이 있는 놀이터는 잘 없더라. 근데 여기 시소랑 그네는 있어. "




시소 태워줄게 하는 얼굴을 보는데 코 끝이 시큰해졌다.


 아파트 단지 안 가로등이 하나 겨우 켜진 놀이터 시소에 둘이 마주 앉아서 맥주를 마셨다. 둘 다 술기운이 슬슬 오르고, 땅에 발을 붙이고 있다가 가끔 원영이 저 만큼 위로 올라갔다.





" 여긴 어떻게 찾았어요? "

" 검색했지. 우리 학교 근처 놀이터. 너 근데 뺑뺑이 원래 이름이 회전무대인 거 알았어? 검색하다 보니까 그거 정식 이름이 회전무대더라. 한 평생 뺑뺑이 인 줄 알고 살았는데. "



 스무살 먹고 이젠 초등학생도 중학생도 아닌데 유진이 태우는 시소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맘이 오르락내리락했다. 뺑뺑이인지 회전무대인지 유진의 얘길 듣는 와중에도 오르락내리락하다 못해 이제 맘이 뺑뺑이 탄 거 처럼 빙글빙글 돌았다. 이 놀이터엔 뺑뺑이가 없댔으면서 본인이 뺑뺑이를 돌리고 있었다. 이 회전하는 무대에서 먼저 말의 물꼬를 터야하는 게 저 인것만 같다. 인터넷에서 누가 말하는 거 보니까, 고백할 때 상대방에 싸인이 있어야 한다고 하던데. 맘에서 머리를 안 거치고 바로 툭 그 말이 튀어나왔다.





" 언니, 우리 무슨 사이에요? "



 이런 싸인. 유진이 원영을 한참 올려다봤다. 어릴 때 명절에만 보던 사이라거나 사채업자랑 채무자 사이라거나 언니동생 사이 이런 말이 나오면 오늘은 한 푼도 안 까줘야지.


 언니도 나 보고 싶다고 했었으니까 그리고 내가 말도 안 되게 천 원씩 달라고 해도 꼬박꼬박 천 원짜리 챙겨 다니면서 주니까 그리고 이런 놀이터에 나 데리고 오니까 그렇게까지 혼자 삽질하거나 한 건 아닐 것 같았다. 놀이터 데려온 지금이 그때 일지도 몰라.


 유진은 아무 말 없이 시소를 내렸다가 다시 올렸다. 두어번 원영은 시소 위에서 오르락내리락하면서 그 오르내리는 시간이 엄청 길어서 다시 한번 무슨 사이냐고 묻고 싶은걸 겨우 참았다. 뜸을 들이는 걸까.



" 니가 생각하는 그런 사이지. "

" 그런 사이가 뭔데요. "

" ... 너 이러다가 내가 돈 한 번에 다 갚는다고 하면 어떻게 할 거야. "


 싸인을 냈는데도 저런 말을 하면 더 채근 할 수도 없고 입을 다물어야겠다. 갑자기 돈 싹 갚고 주마다 볼 일 없다고 도망칠 수도 있으니까. 원영은 시소에서 위 공기를 마시다가 입술을 꾹 말았다가 다시 아래로 내려져서 발이 닿을 때 시소에서 내려왔다. 


 그네에 앉아서 모래 한 알이 없는 우레탄 바닥만 내려다봤다. 유진은 터벅터벅 앞에 걸어와서는 원영 앞 우레탄 바닥에 털썩 앉아서 또 맥주를 마셨다. 한 캔을 더 까서 쭉 원샷으로 마시고 가만히 또 원영을 봐서, 원영은 그넷줄을 쥐고 한숨만 작게 내쉬었다. 단지 안 가로등이 유진에게로 떨어지고 있었다. 


 딱히 표정이 없어서 유진이 무슨 생각하는지 모르겠다. 초등학교 6학년 때 처음 봤을 때부터 제 속을 뒤집더니 다 커서 이렇게 앞에 앉아 가지고도 자꾸 속을 뒤집는다. 



 저렇게 알 수 없게 굴 거면 해달라는 대로 다 해주지 말지. 뺑뺑이도 시소도 태워주지 말지. 그때 분식집 벽에 그런 거 적어놓지 말지. 자꾸 천 원씩 달라고 하는 어리광도 받아주지 말지. 술자리에서 멋있게 술 마시고 그런 거도 하지 말지. 굳이 검색해서 이런 놀이터도 데려오지 말지. 속이 속이 아니어져서 목소리가 높아졌다.




" 언니 원래 다른 사람들한테도 이렇게 해줘요? "

" 이런 게 뭔데. 돈 한 번에 갚는다니까 딴 소릴 해. "

" 누가 한 번에 갚으랬어요? 주마다 천 원씩인데... 언니가 그때 안 갚으면 천배로 갚는다고 했잖아. "

"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던데? "


 누가 말 한마디로 빚 다 까준대요? 전 안 그럴 거거든요. 갚을 돈 엄청 많아서 언니는 절대로 한 번에 안 갚아지거든요? 천 배 받으려고 했는데 만 배 받을 거예요. 하고 코끝 빨개지며 불퉁하게 말하는데, 채 말끝을 다 여미기도 전에 유진이 치고 들어왔다. 예상치는 못했어도 너무나 듣고 싶던 말로.




" 좋아해. "




 

 담담하게 말하면서 올려다보는 눈을 보는데 말문이 막혀서 울 것 같았다. 분식집 벽에 쓰여 있던 보고 싶다는 말을 보았을 때 처럼. 그리고 학교 정문에서 하루종일 기다렸다 마침내 만났을 때 처럼. 시소 태워준다고 했을 때 처럼.


 말 한 마디로 천 냥 빚 갚는다더니 안유진은 진짜 말 한 마디로 빚을 다 갚았다. 수년 동안 쌓인 거에 천 배,만 배 그리고 내가 준 맘에 대한 이자까지 전부 다.













 집에 데려다준다는 걸 한사코 거절하고는 유진의 자취방을 향해 걸었다. 골목에 있는 슈퍼마켓에서 쌍쌍바를 사달라고 해서 유진이 반으로 예쁘게 잘라준 쌍쌍바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이걸 녹여 먹을까 베어먹을까.



" 왜 안 먹고 보고 있어? "

" ...언니, 나 쌍쌍바 녹여 먹는 거 몰랐죠. "

" 그랬어? 난 베어먹는데. "

" 전 녹여 먹었어요. "



 모를 줄은 알았는데 진짜 몰라서 말해주는 거다. 내가 언니가 잘라주던 쌍쌍바를 아까워서 녹여 먹었다고. 코앞에서 냉큼 베어먹는 척 하면서, 언니가 뒤 돌 때마다 녹여 먹었다고. 입안에서 살살 녹아서 조금씩 사라질 때마다 너무 아까웠다고.


" 몰랐네... 나도 너 모르는 거 하나 말해줄게. "

" 뭔데요? "

" 사실, 나 쌍쌍바 잘 못 잘라. 너 잘라줄 때만 우연히 잘 잘렸던 건데 특기라고 뻥친 거야. "


 원영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예쁘고 반듯하게 잘린 쌍쌍바를 내려다봤다. 너무 놀라서 유진과 쌍쌍바를 두어번 번갈아봤다.


" 진짜? 완전 반듯하게 잘렸는데? "

" 우연히 자꾸 반듯하게 잘렸는데.. 니가 달인이라고 하니까 특기라고 계속 뻥쳤어. "



 엉망으로 잘릴까 봐 니가 쌍쌍바 먹자고 할 때마다 엄청 쫄렸는데, 우연히 계속 그러다 보니까 이젠 정말 잘 자르게 됐어. 그러니까 이젠 녹여 먹지 말고 베어먹어 내가 계속 예쁘게 잘라줄게. 라는 말이 끝나자마자 원영은 한 입 크게 베어 물었다. 혀끝으로 굴려지는 차갑고 달달한 초코맛이 입안으로 녹아들었다. 한 입 더 크게 와앙.





언니, 사실 저 안암에 과외하러 온다는 거 뻥이에요. 그냥 언니 보러왔어요.

그건 그럴 줄 알았어.

치, 언니는 또 뭐 말할 거 없어요?

없는데.

진짜 끝이에요? 진짜로 더 없어?

...인서울 했어.

대박... 지금 저 기분 진짜 좋아졌어요.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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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암 참살이길에서 알바하는 체교 유진이랑 신촌에서 안암까지 수금하러 오는 원영이 약간 이런 느낌..

둘이 연애하다가 만우절에 교복 입고 중짜(중앙광장에서 짜장면 먹기) 할 듯요.





즐거운 추석보내시고, 늘 윶녕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