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 금요일 6시 정문.





 유진은 '사채업자'라고 저장된 연락처에서 온 문자를 보고 다시 휴대폰을 내려놨다. 학교 앞 햇살분식에서 마주 앉아 우동을 먹던 친구가 또야? 하고 물었다.



" 어 뭐... 늘 똑같지. "

" 걍 한 번에 갚아버리지."

" 그냥, 주마다 얼마씩 까는 게 더 좋은 거 같아서. "



 곰곰히 속으로 세보니까 수금이랍시고 돈을 까기 시작한 것도 얼마 안 된 것 같다. 새카맣게 돈 빌린 걸 까먹어버린 탓에 눈덩이 처럼 이자가 불어나서 대학교 2학년밖에 안됐는데 머리에 피도 안 마른 사채업자한테 추심 문자를 받고 있었다. 


 올 초에 학교 정문에 찾아와서는 돈 빌린 거 언제 갚을 거냐고 독촉을 했다. 물론 유진이 학교가 어딘지 대충 힌트를 주긴 했다. 그래도 그동안 돈 갚으라고 한 마디도 안 했으면서 갑자기 이렇게 눈덩이 처럼 불어난 걸 갚으라고 하는 게 어디 법인가. 법정 최고이율을 넘는 이자에 이건 좀 너무한 거 아니냐고 구시렁거려봤는데 들어줄 턱이 없었다. 


 저도 모르는 사이에 달마다 원금만큼 이자가 붙어서 원금은 달랑 몇 장인데 갚아야 할 돈은 백 장이 훌쩍 넘었다. 그것도 주마다 딱 한 장씩 받는다고 해서 그러십시오 하고 그 말을 따라서 갚고 있다. 안 갚으면 부모님을 찾아가서 어쩌구 으름장을 놓길래 네네 알겠습니다 하고 받아들였다.


 갚기 시작한다니까 달 마다 원금만큼 붙던 이자는 멈췄다가도 수금 날을 하루라도 어기면 다시 또 원금만큼 이자가 붙었다. 수금 날도 완전 제 멋대로라서 언제는 금요일, 언제는 수요일, 언제는 월요일 그냥 코에 걸면 코걸이, 귀에 걸면 귀걸이 지 맘대로였다. 


 학교 앞 분식집에 김밥을 입안으로 넣었다. 금요일에 알바가 있는데 깜박할 뻔했다. 사채업자한테 금요일에 알바가 있다고 다음에 보면 안되냐고 문장을 넣고는 세상 태평하게 친구 거 우동까지 몇 젓가락 뺏어 먹었다. 사채업자도 제멋대로고 돈 빌린 사람도 제멋대로였다.




그럼 금요일 알바 끝나고.




알바 끝나고? 집에 어떻게 가려고 그러지.

처음 돈을 빌린 게 언제였더라. 왜 빌렸더라. 김밥을 먹다 말고 기억 속 어딘가 어렴풋한 그 첫 대출을 되짚어봤다. 꽤 오래전이었던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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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돈을 빌린 건 아마 중1 때였을 거다. 완전 까먹었다가 기억을 더듬어보니까. 그래, 중1 때가 맞는 거 같다.





 중학교 진학해서 1학기를 겨우겨우 마치고 이제 머리 좀 컸다고 추석에 할머니 댁 안 갈 거야 사춘기 고집질 부렸다. 엄마한테 뒷덜미 잡혀서 아빠한테 혼나고 할머니 댁에 갔던 그 중1 때였다.


1학기 중간기말을 다 망쳐서 추석에 남아서 공부하겠다는 스킬을 썼는데 씨알도 안 먹혔다. 니가 집에 있어 봐야 공부하겠니. 엄마말이 맞는 말이라서 말대꾸도 못 하고 아빠차 뒷좌석에 머리만 박았다.



 손끝이 야무지지도 않은데 티셔츠에 밀가루 덕지덕지 묻히면서 엄마한테 등짝 맞아가며 만두를 빚었다. 유진아 만두 예쁘게 빚어야 나중에 예쁜 딸 낳는다. 으- 극혐 속으로 할머니의 말에 극혐극혐극혐 세 번 외우고 거실에서 게임을 하는 사촌오빠들한테 눈빛으로 레이저를 쏘아대면서 엉망진창으로 만두를 빚었다. 

갈비찜에 야들야들하고 맛있는 고기는 다 사촌오빠들 주고 저한테는 질기고 질긴 뼈 붙은 거만 줘서, 나도 갈비찜 좋아하는데 이럴 거면 날 여길 왜 오라고 했어 할머니도 싫고 큰 엄마 큰 아빠도 싫고 엄마아빠도 싫은 그런 사춘기의 시작 즈음이었다. 

유진의 만둣국은 유진이 빚은 엉망진창 불어 터진 만두로만 그득하고 또 사촌오빠들 만둣국은 엄마랑 할머니가 빚은 예쁜 만두만 그득해서 대충 만둣국을 숟가락으로 휘저어 먹는 둥 마는 둥 했다. 저녁을 다 먹자마자 설거지하라는 소리에 못 들은 척 삼선 슬리퍼를 신고 밖으로 튀었다. 어디 자기들만 입이라고 고기 처먹었으면 설거지는 사촌오빠들더러 좀 하라고 하시지 흥.


진짜 명절 극혐. 집에 있으면 게임하고 티비보고 그랬을 텐데 괜히 붙잡혀 와서 만두나 빚고 맛 없는 건 다 내가 먹고 티비도 보고 싶은 거 못 보고 이게 뭐람.




 대전 집에서 역귀성을 해서 올라온 서울 목동 구도심에 다닥다닥 붙은 구축 주공아파트 단지를 가로질러 걸었다. 후문 앞 놀이터까지 슬리퍼를 좍좍 끌었다. 슈퍼마켓이랑 세탁소, 미용실이 있는 단지 후문 상가를 끼고 돌면 낡은 놀이터가 나왔다. 4개짜리 그네가 그나마 제일 그럴듯하고, 시소랑 뺑뺑이는 누가 봐도 완전 낡아빠진 옛날 주공아파트의 뻔한 놀이터였다. 한가위 동그란 달이 떠 있는 그 아래 그네에 앉아서 아오 뭐 만두는 여자만 빚고 설거지도 여자만하고 갈비찜에 맛있는 건 사촌오빠들만 입이라고 처먹고 난 뭐 주둥이야? 시불탱 모래만 발로 퍽퍽 걷어찼다. 그렇게 모래를 걷어차다가 발에서 슬리퍼가 슝 하고 빠져서 앞에 걸어오던 어떤 여자애 얼굴을 포물선을 그려 강타했다.



" 아! "



엄청나게 큰 아! 소리가 놀이터를 쩌렁쩌렁. 너무 놀라서 벙쪄있는데, 그 애는 슬리퍼에 맞아 벌게진 얼굴을 하고 저를 노려보다가 바닥에 구르는 슬리퍼를 주워 들고 앞으로 씩씩대며 걸어왔다. 어찌나 열이 받은 모양새인지 머리에서 김이 나는 것 같은 애가 앞에 서서 벌 같이 쏘아붙였다.



" 저기요. 사과 안 하세요? "


 너무 놀라 사과를 미쳐 못했는데 그거 때문에 더 열을 받았는지 앞에서 완전 씩씩대고 있다. 딱 보니까 얼추 또래 같은데 아니다 얘는 초딩 같은데, 키는 비슷한 거 같아도 그 초딩이 주는 느낌적인 느낌이 있다. 내 키가 167인데 대충 눈높이가 비슷한 거 보면 이 정도 크려면 초6인가? 와, 인상을 쓰고 눈에서 레이저를 쏴서 개무섭다. 볼살은 오동통해서 어찌나 열을 받았는지 얼굴이 시뻘겋다. 슬리퍼로 안면 강타한 건 무조건 제 잘못이라서 미안합니다 미안합니다 그네에서 일어나 굽신댔다.



" 왜 거기서 발길질을 하세요? 미치셨어요? "


 아니 뭐 미치셨다고 할거까지야. 쪼그만 게 미안하다고 했음 됐지 왜 이래. 아까까지 진심 가득하게 미안하다고 사과했는데, 두 번째 미안합니다는 대충 네네 미안합니다 대충 하는 척 만하고 손에서 슬리퍼를 턱 뺏어다 신었다.


다시 그네에 앉아서 언제 들어가야 설거지가 다 끝난 다음에 들어갈 수 있는지 대충 시간이나 가늠하고 있는데 아까 그 애가 계속 앞에서 저를 째려보고 있다.



" 왜? 사과했잖아. "

" 그게 사과한 거에요? 엄청 대충? "

" 미안하다고 했잖아. 뭐 석고대죄라도해? "

" 아니 근데 왜 말을 놔요? 저 아세요? "



딱 봐도 초딩인 게 뭐래. 



" 딱 봐도 내가 너보다 나이 많아서 놨다 왜? 너 초딩이지? "

" 하, 진짜 어이없어. 그쪽은 뭐 어른이세요? "

" 뭐래. 난 중학생이거든. "

" 네- 나이 많아서 좋으시겠어요. "



어이없다고 콧방귀를 뀌더니 모랫바닥을 탁탁 걸어서 옆으로 두 칸 떨어진 그네에 앉았다. 나 참, 뭔 사과를 몇번을 해. 어이없는 건 나거든. 사람이 말이야 진심으로 사과를 하면 바로 탁 받아주고 그래야지. 안 그래도 명절에 갈비찜도 제대로 못 먹고 화나는데 쪼그마한 게 세상 깍쟁이 같았다. 그래도 벌게진 작은 얼굴에 혹시 어디 흉이라도 났나 힐끔거렸다.





 끼익끼익- 끼익끼익- 전혀 박자가 안 맞게 그네 두 개가 흔들렸다. 엇박자로 끼익 대는 소리가 놀이터에 그득 들어찼다. 아, 혼자 있고 싶었는데 갑자기 등장한 초딩 때문에 놀이터에 둘이 있어서 심기가 불편하다. 이런 명절에 놀이터는 사람이 하나 없는 게 맛인 건데 괜히 공간을 침범당한 기분. 아파트 단지 사이사이로 솟아있는 전신주 전깃줄을 눈으로 죽죽 훑어서 어디까지 연결되나 보다가 만둣국만 한 그릇 먹고 나왔더니 입이 좀 텁텁했다. 아이스크림이나 하나 슈퍼에서 사 먹을까 하는데 주머니를 뒤적였더니 휴대폰만 있고 십 원짜리 한장이 없다. 망했네 구닥다리 슈퍼마켓에 뭔 페이 같은 거 될 리도 없는데 다시 집에 들어가자니 지금 들어가면 백퍼 설거지 행이다. 그럼 사촌오빠들 누워서 티비보고 사과 집어먹는 동안 나는 또 엄마랑 설거지해야 되는데 개망삘.


흠. 그래도 아이스크림이 너무 땡겨서 옆에 그네를 끼익 거리는 그 애한테 슬쩍 말을 붙였다. 



" 저기요. "

" 왜요. "

" 혹시 천 원 있어요? "


쳐다보는 표정이 어이없음을 넘어서 경악하는 표정이다.


" 지금 삥 뜯는 거예요? "

" 아니... 아니 그게 아니고요. "


아니 뭔 삥 뜯는다고까지 해. 내가 공부는 못해도 얼마나 모범생인데. 그래도 부탁하는 입장이라 아까랑 다르게 말을 높였는데, 아니라고 하는데도 경악한 저 표정이 풀어질 생각을 않는다.



" 그쪽 중학생이라면서. 지금 중학생이 초등학생한테 삥 뜯는거??? "

" 아니, 제가 지금 돈을 안 가지고 나와서 그래요. 삥 뜯는거 진짜 아니고 이따가 갚을게요. 저희 할머니 댁이 저기 503동이거든요 "

" 그걸 어떻게 믿어요. "

" 지금 딱 봐도 제가 막 날라리같이 생기진 않았잖아요 "

" 날라리 같이 생겼어요. "

" 엥? 어디가? "




 날카로운 눈으로 위에서부터 아래 슬리퍼 까지 쭉 훑었다가 다시 올라오는데, 생각해보니까 삼선 슬리퍼 신고 있고 츄리닝 차림에 만두 빚다가 밀가루 묻은 티셔츠를 입고 있긴 했다. 그래도 지금 중학교 막 들어와서 머리도 단정하고 친구들이 나 좀 신뢰감 있게 생긴 얼굴이라고 했는데 그렇게 날라리상은 아니었다. 안경도 쓰고 있어서 꽤 범생이 같아 보일 텐데. 제 안경은 도수도 엄청 높았다.


안경을 싹 벗고는 얼굴을 여기저기 돌려서 보여줬다. 봐봐라 어디가 날라리 같은가. 


" 봐봐요. 얼굴이 날라리 같진 않잖아요. 진짜로 갚는다니까요. "

" ...진짜 갚을 거예요? "

" 아, 진짜. 천 원가지고 겁나 쩨쩨하게 그러네. "

" 삥 뜯는 사람보다는 안 쩨쩨하겠죠. "

" 삥 뜯는거 아니라니까. "


에휴 됐다 걍. 말을 더 해서 뭐하냐. 아주 초딩이 말을 따박따박 잘도 받아친다. 그냥 관두고 다시 그넷줄이나 잡고 모래만 굴렸다. 하여튼 요즘 초딩들은 말이 안 통해요.






" 이따가 갚아요. "



언제 앞으로 왔는지 눈앞으로 내민 파란 천 원짜리 한장을 받아서 오 땡큐 하고 그네에서 일어섰다. 이따 밤에 10시쯤? 놀이터로 다시 나와서 갚겠다고 호언장담했다.


" 이름 뭐야? "

" 이름 왜요. "

" 돈 빌려줬는데 이름은 알아야지. "





 그렇게해서 천 원짜리 한장을 받으면서 놀이터에서 통성명을 했다. 나 안유진이고 여기 추석이라 할머니 댁에 왔어 503동. 중학교 1학년이고 원래 집은 대전임. 대전 알아? 초딩은 대전 모르나?


천원 빌려준 걔 이름은 장원영이었다.

예상했던대로 초등학교 6학년이고, 할머니 댁에 왔고 501동이었다. 용산 산다고 했다. 대전도 안다고 했다.




유진은 원영에게 빌린 천원으로 후문에 낡은 슈퍼마켓에서 쌍쌍바를 하나 사서 반쪽은 원영에게 떼줬다. 깔끔하게 반으로 갈라진 쌍쌍바였다.



" 쌍쌍바 달인처럼 자르네요. "

" 특기야. 돈 빌려줬으니까 이거 절반 너 줄게. "

" 그거 제 돈인데 내돈내산아니에요? "

" 아, 안 먹을 거면 말고. "

" 언제 안 먹는댔어요. "





 입에 쌍쌍바를 절반씩 물고 놀이터 그네에 앉아 베어 먹다가, 원영이 돈 빌려줬으니까 뺑뺑이 좀 돌려달라고 한 거에 아주 사채업자 나셨네 별걸 다 해달라고 하네 구시렁거렸다. 다 먹은 쌍쌍바 스틱을 원영 것도 가져다가 주머니에 넣고 열심히 힘을 써서 뺑뺑이를 돌려줬다.


야 나 뺑뺑이 잘 돌려. 이런 말 하면서 뺑뺑이를 쌩쌩 돌렸는데 쪼그마한 게 돌려주는 뺑뺑이를 타서는 그렇게 빠르진 않은데요? 이런 소릴 해서 승부욕이 불타올라 더 빨리 돌렸다. 너 아주 내가 토하게 만든다. 하고 돌렸는데 탄 원영은 신나하고 돌린 제가 더 토할 거 같아서 돌리다 말고 옆에 나무 시소에나 털썩 앉았다.


뺑뺑이를 얼마나 열심히 돌렸는지 시소에 앉아 가쁜 숨을 내뱉었다. 어느새 뺑뺑이에서 폴짝 내려와서 시소 앞에 올라탄 원영이 시소도 타요-저 시소 안 타봤어요- 해서 초딩이랑 놀아주기 힘들다 천원이 뭐라고 이런 생각이나 하면서 시소를 오르락내리락했다.


" 중학교 가면 뭐가 달라요. "

" 완전 다르지. 그냥 공기가 다름. "

" 교복 입는 건 좀 별로죠? "

" 걍 괜찮은데? 디자인이 구리면 구리겠지. "


내년에 중학교를 아마 용산 어디 있는 중학교 갈 거 같다고, 휴대폰으로 교복을 하나 검색해서 보여준다.



" 이 교복은 어떤 편이에요? "


흠. 막 엄청 예쁘진 않은데 또 그렇다고 막 구리진 않고. 구리다고 하면 괜히 초딩이 나중에 중학교 갈 때 입기 싫을까 봐 괜찮은 거 같은데- 너 입으면 예쁠지도- 하고 말았다.



" 언니 공부 잘해요? "

" 엉, 넌 잘해? "

" 당연한 거 아니에요? "


어쭈. 당연한 게 어딨어. 유진은 제가 뻥을 치는 것 처럼 원영도 뻥 치는 거라고 생각했다.


" 초딩때는 다 잘한다고 생각해. 중학생 되면 이제 바로 성적 추락이지. "

" 전 그럴 리 없어서. "

" 진짜 어디서 나오는 자신감? "




 키는 비슷한데 유진보다 얼마나 가벼운 건지 자꾸만 유진은 아래로 내려앉고 원영은 위로 올라가는 시소를 유진만 발을 굴려서 올렸다 내렸다. 위로 올라간 원영의 옆으로 달이 나란히 떴다. 꽤 재밌는지 신난 표정이다. 여기 위 공기가 상쾌하고 좋네요. 너 내가 초딩이라 이거 해주는 거야. 네 역시 중학생 최고. 아무리 생각해도 영혼이 1도 없는 거 같아서 어이없었다. 





" 이따 10시에 놀이터에서 만나. 돈 갚을게. "

" 삥 뜯은거면서. "

" 아니라니까. "

" 갚으면 삥 뜯은거 아니라고 정정해줄게요. "

" 갚으면 어떡할 거야. "

" 안 갚으면 어떡할 건데요? "

" 이자 그럼 원금에 천배로 줌. "

" 거짓말. "




진짜 한 마디를 안 지는 요즘 초딩. 아니 내가 삥 뜯는 그런 무시무시한 사람이었으면 니가 지금 나한테 이렇게 따박따박 말로 날 두들겨 패고 있겠냐고. 저 말을 차마 하진 못하고 어휴 걍 말을 말자 하고 놀이터를 나섰다.





 적당히 설거지 타임도 끝난 거 같고 유진은 할머니 댁으로 슬그머니 복귀했다가 어디 갔다 왔냐고 잔소리를 들었다. 사촌오빠들은 여전히 거실에서 게임을 한다고 뒹굴고 저녁상 설거지는 끝났는데 과일 접시 설거지는 여전히 남은 상태였다. 아오 극혐. 사과니 배니 저는 한점도 먹지 않은 과일이 담겼던 접시를 닦고 아빠말씀 잘들어야한다 나쁜 애들이랑 어울려 놀면 안된다 이런 말이나 심드렁하게 들었다. 할머니가 저한테 제일 나빠요.


큰 사촌오빠가 내년에 고3이 된다고 서연고중경외시 어쩌구 입시 얘기까지 줄줄 늘어지는걸 들었다. 개뿔 오빠는 인서울도 못 할 거 같은데 했다가 할머니한테 등짝을 맞았다. 내 말이 틀리나 봐라 날라리 큰 오빠가 인서울 하면 내 손에 장을 지진다. 큰 오빠가 인서울 하는 것보다 차라리 체육특기생으로 제가 인서울 하는 게 빠를 것이다. 


거실에 있어 봐야 좋은 말 들을 거도 없고 이거 가지고 와라 저거 가지고 와라 엉덩이 뗄 일만 잔뜩이라, 유진은 작은 방구석에 틀어박혀서 없는 사람인 양 쥐 죽은 듯이 휴대폰 게임을 하다가 10시에 놀이터에 나가는 건 완전 까먹어버렸다.



그리고 장원영도 까먹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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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영을 완전 까먹었었다가 다시 마주친 거는 대충 중3 때였나 그랬었다. 이게 두 번째 채무 관계 시점이다. 



 재수를 하고도 인서울에 보기 좋게 실패한 큰 사촌오빠가 히스테리를 부리고 있을 즘이었다. 거봐 내가 인서울 하면 손에 장을 지진댔지. 장손이 인서울을 못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 할머니가 속절없이 다 집 자리가 안 좋아서 그런 거 같다고 한탄을 하셨다. 부적을 잘 썼어야 하는데 돈 그거 몇 푼이나 한다고 부적을 안 썼냐 큰 엄마를 구정에도 추석에도 이 잡듯이 타박하고 계셨다. 공부를 큰 오빠가 하지 큰 엄마가 하나 어이없었다. 속으로 부적이 다 무슨 소용이람 큰 오빠가 용돈만 날름 받아 먹고 노래방이니 피씨방이니 놀러 다닌 거 큰 엄마가 제일 잘 알 텐데 하고 말았다. 재수시킬 돈을 다른 데 쓰시는 것이 남는 장사였을 것이다. 둘째 사촌오빠라도 인서울 좀 해야 아들바라기 할머니가 속을 푸실 텐데. 어차피 여자애가 공부해봤자라고 유진의 성적에는 관심도 없으셔서 유진은 명절 때 공부 잔소리는 안 들었다. 그래도 공부로 저도 인서울은 어림도 없어서 진작에 육상부나 뛰었다. 


 명절이라고 또 잘 빚지도 못하는 만두를 빚고 잡채랑 전 같은 느끼한 것들만 주워 먹었다. 그마저도 예쁘게 부친걸 먹은 것도 아니었다. 예쁘게 모양이 난 전은 제사상에 올리느라 못 먹고 그럴듯한 건 오빠들한테만 준다고 하고 저한테는 누가 봐도 모양이 뭐한 거만 할머니가 줘서 그런 거나 먹었다. 못생긴 거 먹어서 그런가 속은 느끼하고, 어차피 제사 때 저는 절도 못하게 하는 거 근처 소화나 시킬까 하고 냅다 튀어서 단지 안을 슬렁슬렁 걸었다. 후문 상가까지 가보니까 슈퍼마켓 빨간 간판이 슬슬 벗겨지기 시작하고, 예전에 미용실이 있던 자리에 분식집이 들어와 있었다. 느끼한 속도 내릴 겸 놀이터를 슬리퍼를 끌고 돌고 있는데 자꾸 누가 노려보는 거 같아서 뭐야 하고 보니까 그네에 앉은 원영이 저를 노려보고 있었다. 

그때가 되어서야 2년 만에 아뿔싸 쟤 그때 걔다. 그 한마디를 안 지는 초딩 하고 기억이 났다.






 이름이 잘 기억이 안 나는데 이름도 기억 안 난다고 하면은 절대 안 될 것 같은 분위기라 기억 나는 척 했다. 그때는 미안하다고 까먹었다 오래 기다렸어? 하는데 아뇨 저도 안 나왔어요. 하는 표정이 살벌했다. 안 나왔을리가. 안 기다렸으면 지금처럼 그렇게 죽일 것 같은 표정으로 보고 있지도 않았겠지. 머쓱해져서 그네 밀어줄까? 했는데 됐어요 엄마가 삥 뜯는 사람이랑 말 섞지 말라고 했어요. 해서 또 큼큼 헛기침하고 바로 옆 그네에 앉았다.



가만 계산을 해보니까 그때 초등학교 6학년이었으니까 지금은 중학교 2학년이겠네. 큰일이다. 세상에서 제일 무서운 역병이라는 중2병이 지금 내 옆에 앉아있는 거다. 


눈을 끔벅끔벅하다가 이름을 그래도 알아야 뭐라도 말을 붙이겠다 싶어서 머리를 굴려서 너 한자 뭐써? 하고 물어봤다. 이름 까먹은 거 티 안 내려고.


" 남의 이름 한자는 왜 궁금한데요? "

" 아니 그냥. "

" ...이름 까먹었죠. "

" ...아니. "

" 제 이름 뭔데요. "

" ...공기 좋다. "


저도 이름 까먹었어요. 하고 뾰로통하게 말한다. 기름진 입 때문에 자꾸 라면이 땡기는데 후문에 연 분식집이나 가자고 살살 꼬드겼다. 내가 지난번에 기다리게 했으니까 라면 사줄게. 









 미용실이 문 닫고, 새로 문 연지 얼마 안 된 분식집 구석에 둘이 앉았다. 하얀 벽에 군데군데 누구누구 왔다 감 하고 낙서가 되어있었다. 유진은 떡 라면, 원영은 김치볶음밥을 시켜서 나오는 걸 기다리는데 벽에 붙어있는 펜을 가지고 끄적거리더니 ' 안유진 장원영 왔다 감 ' 하고 군데군데 적힌 이름들 틈에 적어놨다. 글씨가 완전 초딩. 그제야 맞다 얘 이름 장원영이었지 하고 기억이 났다. 내 이름 기억 안 난다더니 잘도 ' 안유진 장원영 왔다 감 ' 하고 적었네.



" 너 큰데 키 컸다. "

" 언니도요. "

" 키 몇이야? "

" 169? 그 정도 될 걸요. "

" 나도 그 정도 되는데. "





 테이블에 놓여있는 일회용 젓가락을 탁하고 반으로 갈라서 쓱쓱 비벼 나무재를 털었다. 맨질맨질해진 젓가락을 원영이랑 제 앞에 한 짝씩 놓았다. 둘이 마주 앉아서 떡 라면이랑 김치볶음밥을 먹었다. 김치볶음밥 한 입만 달라고 했더니 한 입만 달라고 하는 게 제일 별로예요 라고 해서 그거 어차피 남길 거 같은데 하여튼 중2병은... 하고 말았다. 구시렁거리는 앞으로 원영이 앞접시에 김치볶음밥을 덜면서 언니 계란후라이 좋아해요? 했다. 엄청 좋아하지. 말이 끝나자마자 하나 올려진 계란후라이도 덜어서 밀어줬다. 계란후라이를 안 좋아하나 원래 저게 감초라 맛있는 건데.


" 계란후라이 안 좋아해? "

" 네, 계란을 별로 안 좋아해요. "

" 계란 맛있는데... 명절에 할머니 댁 오면 뭐해? 너네도 만두 빚고 그래? "

" 언니는 만두 빚어요? "

" 응. 맨날 사촌오빠만 갈비찜 먹고 난 만두 빚어. "

" 전 그냥 기 빨려요. "


갈비찜 좋아하는데도 갈비찜은 제대로 못 먹고 만두만 빚는다고 한탄했는데, 원영은 달랑 딸 하나라서 할머니 할아버지 고모 할 거 없이 예뻐한단다. 그래 거참 좋겠다. 누구는 남아선호사상 있는 집에서 만두 빚고 왔는데 앞에서 외동 손녀여서 하도 예쁘다고 해서 기 빨린다는 얘길 들으니까 내가 더 기 빨렸다. 근데 왜 자꾸 밖에 나와서 싸돌아다녀 예쁨받으면 그냥 집에 있지. 하니까 혼자라 심심하고 지루하고 재미없단다.



" 그럼 집이 아예 만두를 안 빚어? 사 먹어? "

" 네, 그냥 만두를 잘 안 먹는데요. "

" 신기하네. 뭔가 너희 어머니 만두 예쁘게 잘 빚으실 거 같았는데. "



빤히 쳐다보는 원영한테 왜- 뭐- 하고 라면을 후룩후룩 먹었다. 다 먹고 계산을 하려고보니 카드지갑을 놓고 왔다. 뻘쭘하게 원영을 봤더니 원영이 어이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 일부러 그러는 거죠? 두 번이나 삥 뜯고. "

" 아니 진짜 절대로 아니야. 내가 이따 돈 보내줄게. "

" 나중에 갚아요. 아이스크림이나 먹으러 가요. "





 폰 번호 달라기도 뭐하고, 인스타 아이디나 우물쭈물 알려줬다. 분식집 옆 슈퍼마켓에서 원영이 고른 쌍쌍바를 하나 반 갈라서 나눠먹었다. 그럴듯하게 싹 반으로 잘 잘라서 내미니까 언니 진짜 쌍쌍바 달인이네요 하고 받아서 냉큼 베어먹는다. 딱 적당히 입가심 하기 좋은 반절짜리 쌍쌍바를 먹고 마주 앉아서 나무 시소를 탔다. 2년이 지났는데도 위 공기는 또 원영 몫이었다. 시소를 오르락내리락하고 아래서 올려다보는 원영의 얼굴 옆으로 또 달이 떴다.



" 내년 구정에도 와요? "

" 몰라. 예비 고1이라 어떻게 될지. "



고등학교가면 보통 명절 잘 안 오니까. 그리고 육상부 뛰고 체육으로 대학교 가야 해서 어떻게 될지 모른다고 했다. 



" 언니 공부 잘한다면서요. "

" 아, 그거 뻥이야. 운동은 잘해. "

" 인스타 아이디는 뻥 아니죠? 또 돈 안 갚으려고 막 계정 없앤다거나... "

" 사람을 진짜 뭘로 보고. "

" 삥 뜯는 사람? "

" 야. "





 자꾸 삥 뜯었다고해서 체면을 구기는데 엄마한테 전화가 왔다. 언제 들어오냐고. 501동 503동이 같은 방향이라 할머니 댁을 향해서 나란히 걸었다. 지하 주차장이 없는 옛날 주공아파트 지상에 이중주차 삼중주차 명절을 맞아 온 차들이 우글댔다. 아파트 벽면에 재건축을 심사를 받는다는 커다란 현수막이 동마다 걸려있었다. 원영이 재건축이 뭐냐고 물었다. 사실 잘 몰라서 그냥 뭐 대충 낡은 아파트 부수고 다시 새로 짓는 건가 봐 하고 얼버무렸다.







 집에 들어와서 엄마랑 유진만 설거지를 하고 사촌오빠들은 거실에서 송편이나 주워 먹고 있었다. 자기들만 입인지 맛있는 깨 송편은 자기들이 다 먹고 콩 송편만 남겨놔서 또 속으로 시불탱 거렸다. 내가 내년 구정에 다시 오나 봐라 씩씩 거리는데 원영에게서 디엠이 들어왔다.

 





언니, 돈 안 갚아도 돼요. 

대신 구정에 또 분식집 먹으러 가요. 쌍쌍바도요.

 명절 음식 너무 질려요.


ㅇㅇ






-







 구정에 온다고 했던 거 같은데, 그 후에 구정에도 그 후에 추석에도 유진은 할머니 댁에 안 왔다. 명절 음식에 질려서 혼자 분식집에 가서 김치볶음밥을 먹다가 벽에 색이 다 흐려진  ' 안유진 장원영 왔다 감 ' 이라고 써놓은 글자 밑에다 ' 장원영 왔다 감 ' 하고 새로 진하게 적어놨다. 인스타로 왜 안 오냐고 물어봤는데 엄마가 할머니랑 싸웠대-그래서 아빠가 안간데- 해서 뭐라고 더 물어볼 수가 없었다. 집이 대전이라고 했으니까 명절에 서울 안 올라오면 볼 일은 전혀 없을 것 같았다. 명절에만 딱 두 번 본 사이에 뭐 얼마나 친하다고 따로 보자고 할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냥 잘 지내죠? 하고 두어번 디엠으로 말 걸었다가 며칠 뒤에 ㅇㅇ 하고 오는 답변이나 받았다. 그리곤 유진은 인스타엔 별 흥미가 없는지 얼마 지나지 않아 계정이 없어졌다. 




 그 다음 명절에도 그 다음 명절에도 어른들 틈에 혼자라 심심하고 놀이터에 나와도 혼자 그네 타서 심심했다. 놀이터에서 누구랑 놀 일도 없으니까 영어단어도 외우고 수학 문제집도 풀려고 한권씩 더 가지고 왔는데, 그런데도 괜히 놀이터 근처를 더 자주 알짱거렸다. 예전에 뺑뺑이가 있던 자리에 칠이 벗겨졌던 낡은 뺑뺑이는 없어지고 아래 부식된 부자재 같은 걸 다다음주까지 폐기한다는 안내문이 붙어있었다. 끼익끼익- 해 마다 소리가 커지는 그네를 혼자 타다가, 마주 앉을 사람이 없는 시소도 탔다. 가만히 혼자 올라갔다 내려갔다 앉아있으려니까 더 높게 오르지 못 하는 시소 공기가 맑지가 않아서 그냥 노잼이었다. 빨간 색칠이 벗겨진 간판이 있던 슈퍼마켓 자리엔 포인트 카드로 할인도 되는 24시간 편의점이 들어왔다. 편의점에서 아이스크림을 사 먹으려다 바뀐 그 24시간 편의점엔 쌍쌍바가 없어서 브라보콘을 먹었다. 


 



그리고 고3 올라가는 구정에는 올 추석은 원영이 수능 전이라 안 온다고 추석에 못 봐서 아쉬워서 어떡하냐는 할머니한테 안겨있었다. 할머니가 반절씩 예쁘게 잘라주시는 송편을 먹고 고등학생 때 마지막으로 들린 분식집에서 혼자 또 김치볶음밥을 주문했다. 아까 걸어오다가 본 놀이터는 작년까지 있던 나무 시소도 없어지고 4개짜리 그네만 덩그러니 남아있었다. 뺑뺑이도 타고 싶고 시소도 또 타고 싶었다. 벽면이 낙서로 가득 차서 어디에 적어놨는지 잘 보이지도 않는 분식집 벽에 겨우겨우 전에 적어놨던 자리를 찾아서 ' 장원영 왔다 감 ' 하고 적었는데, 그 옆에 ' 안유진 왔다 감 ' 하고 적혀있었다. 안 온 줄 알았는데 언젠가 한 번 엇갈렸나보다. 그러니까 인스타를 왜 없애가지구... 차라리 그때 인스타 말고 폰 번호를 받을 걸 조금 많이 후회가 됐다. 번호를 알고 있으면 어떻게 한번 연락해 볼 수도 있는 건데 인스타는 아예 계정이 없어져 버리니까 도통 원영이 먼저 연락 할 방법이 없었다.


' 장원영 왔다 감' 하고 조금 전 새로 적어놓은 곳 옆에 새로 펜으로 적었다. 뺑뺑이 타고 싶다. 시소 타고 싶다. 쌍쌍바 먹고 싶다. 안유진 보고 싶다. 까지 쓰려다가 너무 좀 낯부끄러워서 혼자 만 아는 말로 아주 작게 적었다. 




쌍쌍바 달인 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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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절 2부작으로 추석 연휴 간 완결 납니다.

즐거운 추석 보내시고, 추석에도 윶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