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가교환. 아니 어쩌면 아주 큰 대가.
원영은 손에 쥐어진 트로피를 가만히 내려다봤다. 조금 전 마무리된 유명 시상식에서 손에 쥐여준 대상이라는 두 글자가 박힌 트로피였다. 처음도 아닌 상, 대상은 두 번째 였나. 여우주연상, 최우수상 이런 것들까지 하면 대여섯개는 될 텐데. 천만 영화가 두 작품, 30%가 넘는 드라마가 네편. 갤럽 배우 인지도 조사에서 5년 연속 1위를 한다는 그 이름값.
누구는 상을 받을 때마다 감격에 차서 눈물이 나고 감동과 환희가 복받친다던데, 원영은 혀를 내두르는 연기력으로 간신히 감동한 척 그렁그렁하고 울먹거리는 소감을 했다. 감동, 환희, 희열, 성취감 그런건 신인상과 처음 대상 그렇게 딱 두개에서 그쳤다. 그 후로는 그런 영광이나 인기 대신 잃은 것만 눈 앞에 아른거려서 이런 반짝거리는 것들이 싫어져버렸다. 안 받겠다 할 수 도 없는 그런 것들. 늘 주위에 반짝거리고 휘황찬란한 것들. 갖고싶다고 발버둥쳤고 그렇게 고팠는데 지금은 갖지 못한 다른 것에 속이 쓰렸다.
가만히 트로피를 내려다보는 원영을 룸미러로 매니저가 흘끔거렸다. 눈치를 보는 것일테지. 아마 스탭들 어딘가엔 장원영이 상 받을 때마다 회사며 스탭들한테 히스테리를 부린다고 소문이 나 있을지도 모를 터였다. 상 받는 거 좋은 일인데, 좋은 일에 히스테리 부린다고 미친년 소리 듣고 있을지도. 원영은 이내 차창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손에 쥐었던 반짝거리던 건 어딘가로 차 뒷좌석에 던져놨다.
차창 밖으로는 빗방울이 한 두 방울씩 떨어지기 시작했다. 연말 분위기가 눈으로 전해지는 서울의 거리. 창밖으로 보이는 주머니에 손을 넣고 걷는 연인부터 드문드문 늘어선 트리까지 뭐 하나 속을 긁지 않는 게 없다. 트리 저건 뭔데 저렇게 또 반짝거려. 안개가 끼인 듯 뿌연 창을 손으로 두어번 닦다가 빨개진 손바닥을 내려다봤다.
' 손이 이렇게 맨날 차가워서 어떡해. '
' 언니가 맨날 잡아주면 되지. '
쓸쓸한 제 오른손을 그냥 다시 거둬들여 턱을 괴고 창밖을 봤다. 손등으로 닿아오는 창은 여전히 차갑고 시렸다. 마음도 시린 원영을 태운 차는 다시 다닥다닥 붙은 헤드라이트가 즐비한 강변북로를 벗어나 사무실로 향하고 있었다.
" 축하주를 줄랬더니 상 받았다고 또 우울해졌네. "
가을은 대표실에 앉아 원영에게 와인을 내밀었다. 밖에서는 보는 눈도 많고 술 못 마시니까 이런 데서라도 한잔하자. 상 받는 거 질색하지만 배우로서는 좋은 일이니까. 늘 하나 틀린 게 없는 말을 하는 가을의 말에 원영은 잔을 받아들었다. 원영아, 상 받는 거로 우울해 하는 배우는 너 하나일걸.
" 언니, 나 이제 상 같은 건 안 받으러 다녀도 되지 않나. "
좀 처럼 펴지지 않는 얼굴처럼 원영의 말투가 꼬깃꼬깃 구겨졌다. 어리광의 행세를 한 군데군데 꾸덕꾸덕 비아냥이 들러붙은 말투들을 가을은 예상했다는 듯 가볍게 웃었다. 원영을 잘 알고 이 바닥에 잔뼈가 굵은 연예기획사 대표는 언제나 여유가 있는 법이었다.
" 광고주도 좋아하고 네 팬도 좋아하고. 상 받으러 다니는 것도 다 일이야. 열심히 해야 하는 일. "
" 알아. 그래서 상 받으러 얌전히 가잖아. 매운 거 먹고 싶다. 스트레스 받아서. "
가을이 맞는 말을 하든지 말든지 이미 관심이 없어진 원영은 와인잔만 홀짝 거리다가 대표실 소파에 금방 뒤로 늘어졌다. 매운 거 먹고싶어어.
" 매운 건 한 입도 못하는 맵찔이가 스트레스 받을 때 매운 거 먹는 건 어디서 들었나 몰라. 막상 매운 거 앞에 대령하면 한 입도 못 먹으면서. "
" 그러게, 누가 그랬는데 잊어먹지도 않네. "
" 스파이시한 치즈는 있는데 그거라도 줘? "
누가 그런 거 먹고 싶대. 얼큰한 국밥이나 엄청 매운 카레 그런 거면 모를까. 원영은 고개를 저었다. 하여튼 네 입에서 그런 음식 얘기 나올 때마다 난 당황스럽다. 장원영 인생에 생전 한번 안 먹을 거 같은 음식을 어디서 배웠나 몰라. 가을은 어느새 비어버린 원영의 잔에 와인을 채우는 것으로 매운 걸 찾는 저 어리광을 받아주기로 한다.
" 나도 먹어본 적 있지. 대학교 다닐 때는. "
" 그래. 그 얘길 또 왜 안 하나 했어. 누구랑 드셨는데요. "
" 아니야, 먹어본 건 거짓말이야. "
" 이래서 어릴 때 곁눈질로 배운 게 무섭다니까. "
와인 두잔을 다 비운 원영이 세 잔째를 달라고 그새 손끝으로 채근한다. 마지막 잔이다. 축하주도 세 잔이 끝이라고. 이럴 때도 가을은 칼 같다.
" 언니,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 믿어? "
" 넌 상 받을 때 마다 그 얘길 하네. "
" 그랬나? "
" 내 대답이 늘 같은 것도 기억 안 나지? "
사랑해서 헤어진다는 말 난 믿는다고. 네가 그 얘길 왜 하는지 모르겠지만 난 그 말 믿는다. 저 말을 왜 상을 받을 때마다 하는지 가을은 굳이 묻지 않았다. 물어도 솔직한 대답이 돌아오지 않을 걸 알았다. 그래도 언젠가 그 속 얘길 하고 싶어진다 하면 들어 줄 용의가 넘치게 있었다.
" 상을 받으면 기분이 거지같애. "
" 그냥 하고 싶은 작품이 또 들어오겠구나 하고 넘기라니까. 광고주가 재계약을 하자고 하겠구나 하고 좋은 생각만 하라고. "
대상 수상이 전파를 타자마자 하고있는 모든 브랜드에서 재계약 문의가 들어왔다는 걸 가을이 넌지시 꺼냈다. 뭐라도 긍정적인 소식이 필요할 터였다.
" 네가 고생해서 연기했고 열심히 식단도 했고 죽어라 관리했고 그런 거에 보상이라고 생각하면 될 것을. "
원영은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입가로 다시 와인잔을 가져가면서 대표실에 파노라마 창으로 펼쳐지는 야경으로만 시선을 두었다. 밖에서 술 한잔을 못 하는 대한민국에서 누구나 알아보는 배우라서, 여기서라도 같이 마시자고 통창으로 뚫어버린 대표실이었다.
가을의 말 처럼 그 반짝반짝 한 것들은 보상이었다. 간절히 원했던 그런 반짝반짝 한 것이었다. 그래서 원영은 반짝반짝한 그것과 다른 것을 바꾸었다. 성공과 사랑이라고 주어진 무게의 저울질에서 아무 망설임 없이 성공을 선택했다. 성공에 고프고 기회에 굶주려서, 합리화해서 놓은 게 무언지를 제대로 인지하지 못했다. 종국엔 이렇게 나이 서른 넘어 아이러니하게도 그때 쉬이 놓은 그것에 굶주릴 줄 모르고. 거대한 보상이라고 여긴 그 반짝반짝한 것들이, 자신이 놓은 것보다 훨씬 가벼운 고작 한푼어치 대가였다는 건 나중에서야 알았다.
" 집으로 보내주려고 했는데, 브랜드에서 선물을 보냈더라. "
가을이 건네는 걸 뜯어보니 짜임이 촘촘한 머플러가 들어있었다. 앰버서더로 있는 브랜드에서 상 받을 걸 예상했는지 겨울이랍시고 머플러랑 한정판 백 같은 걸 보낸 모양이었다. 겨울이 오긴 왔네 머플러를 주는걸 보니. 한번 해서 인스타에 올려주길 바라고 주는 걸 테지만. 부들부들한 촉감의 머플러를 슬슬 만져보다가 창에 내리는 비인지 눈인지 이제 구별이 가지 않는 무엇 때문에 괜시리 눈이 따가워졌다. 잠은 집에 가서 자야 된다. 가을의 말은 귓가로 흘리고 원영은 머플러를 얼굴에 덮어둔 채로 그냥 소파에 깊게 늘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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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간 공연이 끝나고 이미 새벽에 가까워진 시각. 혜화동로터리 대학로 뒷 골목 소극장 출구에 하나 겨우 서있는 가로등이 불을 밝히고 있었다. 청록색 다 낡은 간판에 하얀글씨로 불빛극장이라고 새겨진 소극장. 극장이름은 불빛인데 그 어느곳 하나 밝거나 화사하지않은. 무대와 객석이 붙어있는 무대 좌측 끝에서 우측 끝까지 채 열걸음이 되지 않을 것 같은 그런 작은 소극장. 그런 소극장에서 원영은 막회차 야간공연을 끝마치고 퇴근하고 있었다.
연극영화과 4학년으로 연기를 한지는 몇 년 되지도 않았는데 곧잘 연기 잘한다 소리를 듣던 터라 연극에서도 꽤 비중이 있는 역을 맡게 되었던 게 그즈음이었다. 막차가 곧 끊길 것 같은데, 막차를 놓치면 겨울 날씨에 40분은 걸어야 해서 손을 재촉했다. 오늘은 뒷정리 담당이어서 선배들은 이미 다 퇴근을 하고 원영이 퇴근 막번 이다. 비인지 눈인지 모를게 흩날리는 출구 밖으로 원영이 몸을 내기가 무섭게 가로등 아래에 선 실루엣이 보인다. 입김이 부서져 흩날리고 코트에 머플러를 한 그 실루엣은 가로등 아래 벽에 기대 서 있다가 원영이 출구로 모습을 드러내자 이내 가까이 다가왔다.
" 감기 걸리겠다. "
" 오래 기다렸어? 오늘 정리할게 많아가지구. "
기다리느라 추웠지. 아니 안 추웠어. 유진은 하고 있던 옅은 하늘색 머플러를 금세 원영의 목으로 둘렀다. 조금 전까지 비인지 눈인지 구별되지 않던 것들은 이제는 눈으로 형체를 바꾸었다.
" 언니 하라고 머플러 떠준 건데 언니보다 내가 이 머플러 더 많이 하는 거 같애. "
" 네가 하면 내가 하는 거야. "
" 맨날 나 이 시간에 데려다주면 언니 너무 피곤하겠다. 아침에 강의가 9시인데. "
" 체력 좋아서 괜찮아. 운동되고 좋지 뭐. "
막차 시간이 간당간당하더니 조금 전에 떠난 버스가 마지막이었는지 버스 도착 알리미는 이미 꺼진 상태였다. 사람이 오가지 않는 까맣게 밤이 내려앉은 대학로 거리를 둘이 걸었다. 경찰 간부후보생 준비 2년 차. 아침마다 9시에 강의를 듣는 유진은 경찰 준비하는 사람이 가진 게 체력 말고 뭐가 있냐고 맨날 엉덩이 붙이고 앉아서 공부만 하는데 오히려 좋다고 했다. 유진의 코트 주머니 안으로 잡은 손을 넣고 걷다가 하아- 하고 앞으로 입김을 뱉었다. 유진의 코트 주머니엔 늘 따끈따끈한 캔이 들어있었다. 연말도 다 지났는데 아직 정리하지 않은 커다란 카페의 트리를 끼고 돌아 어둑어둑하게 가로등이 채 들지 않는 골목을 지름길이랍시고 걸었다.
" 이 날씨에 언니 공부해야 되는데 감기 걸리면 어떡해 나 안 데려다주러 와도 되는데. "
" 맨날 막차 끊기는 시간에 끝나는데 혼자 걸어가면 무섭잖아 위험하고. "
" 언니도 위험하지. 나 데려다주고 언제 또 집에 가. "
" 난 괜찮다니까. "
데이트랄게 딱히 없는, 그냥 둘이 걷는 게 데이트인 그런 시절이었다. 배우가 꿈인 연극을 하는 대학생이랑 경찰이 꿈인 대학생이 하는 그런 소소한 퇴근길 데이트. 겨울엔 코트 주머니에 손을 넣어 서로의 온기를 나누며 걷고, 여름엔 제일 달다는 이디야 수박 주스를 빨대 하나로 나눠 먹으면서 걸었다. 이러다 언니 내 감기 옮는다. 감기는 원래 옮겨야 낫는 거야. 저런 유진의 말에 언니가 그럼 내 감기도 나눠마시는 거네 이런 닭살 돋는 애교 섞인 말을 하면서.
그렇게 조금씩 더뎌도 각자의 꿈에 가까이 다가간다고 생각하면서 3년을 넘게 만났다. 같은 속도로 매일 대학로를 걸었어도, 둘의 꿈을 향한 속도가 다른 건 늘 원영의 성격이 더 급한 탓이었을 지도. 기회라는 게 딱 정해져 있지 않은 그런 업계 특성 때문이었는지, 그래서 원영이 더 조바심이 났는지 모를 일이었다.
" 마스크도 좋고 연기도 좋아서. 카메라 테스트 한번 하러 와요. 제작하는 드라마에 딱 맞아 보여서요. "
" 테스트 언제 받으러 가면 되요? "
언제나처럼 막번으로 퇴근하던 그 겨울에, 그날따라 유진이 조금 늦어서 출구 앞에 서 있던 차였다. 앞으로 내민 명함을 원영을 받아들었다. 아까 야간 공연에서 보고 인상 깊어서 기다렸다고. 그 하얀 명함에는 국내 유명 배우 기획사에 이름이 박혀있었다. 연극영화과 진학하고 대학로에서 연극을 한지 4년 만에 처음 오는 기회였다. 그 하얀 명함을 받아 드는데 무엇이든 다 할 수 있을 것 만 같았다. 그게 무엇이든.
" 테스트는 편할 때 받으러 와요. 만나는 사람은 없죠? 요즘은 배우도 다 팬 장사라서. 신인배우는 아이돌이랑 크게 다를 바 없거든요. "
" ...만나는 사람 없어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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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상식 이후 간만에 온 공백기로 원영은 집 소파에 늘어져 낮잠을 자다가 겨우 몸을 일으켰다. 눈꺼풀 위로 덕지덕지 피곤과 지겨움이 앉아서 꾹 닫았던 무료해진 눈을 겨우 떴다. 집 한쪽에는 각종 브랜드에서 대상 수상 축하로 보내온 선물들이 뜯지도 않은 채 차례를 기다리고 있었다. 현란한 형형색색의 포장지 안에 뭐가 들었는지 그런 건 궁금하지도 않았다. 그럴듯한 거 보기 좋은 거 그런 것들이겠지.
어느새 대본을 들고 온 매니저가 원영씨 대표님께서 다음작품은 둘중에 골라보라고 하셨다고. 하나는 수사물이고 하나는 로맨스 코미디라고 하면서 옆에 바로 대본을 내려놓았다.
" 수사물이랑 로코면 둘이 너무 극과 극인데. "
" 잘하던 거 계속하고 싶으면 로코하고, 새로운 거 해보고 싶으면 수사물하고. 라고 대표님이 그러시던데요. "
딱딱하면서 부드러운 가을의 말투를 흉내 내면서 매니저가 말하는 거에 단박에 받아쳤다.
" 로코 지겨워. "
" 지겨우면 로코 하지 말고 수사물 해. 라고 대표님이 그러셨습니다. "
" 내가 지겹다고 말 할 줄 어떻게 알고 미리 그랬는데? 그냥 지금 네가 지어내서 말한 거 아니야? "
" 아니에요... 몇 가지 상황에 맞춰서 이미 대답을 보내셨어요... "
하여튼 원영을 손바닥에 올려놓은 것 처럼 들여다보는 가을이 직접 오지 않았는데도 직접 온 것 처럼 느껴졌다.
" 수사물은 몸 써야 되잖아. "
" 스킨쉽 싫어하는데 안 해도 되고, 식단도 좀 덜 해도 되고, 겸사겸사 운동하고 일석삼조 아닌가? 라고 하셨습니다. 이것도 미리 말씀하셨어요. "
" 그냥 수사물 하라는 거네 언니는. "
" 키스씬 찍을 때마다 나한테 화풀이 안 한다고 약속하면 로코해도 되. 라고 하셨어요. "
화풀이 안 할 수 있을 리가. 멜로니 로맨스니 그런 거 지긋지긋한데. 그럴 수 없는 걸 뻔히 알면서 저렇게 가을이 나온다는 건 원영이 싫다고 해도 결국 수사물을 하게 어떻게든 구워삶을 거란 거였다. 원영도 결국에 하겠다는 말을 하게 될 거라는 걸 이미 알았다. 나쁘지 않지 가을 언니는 작품 보는 눈이 좋으니까. 원영은 수사물이랍시고 내민 대본을 받아들었다.
빠르게 훑어본 시놉에 형사라고 적혀있었다. 이러면 액션 스쿨도 다녀야 하는 거 아닌가. 몸 많이 쓰는 귀찮은 캐릭터네. 전에 영화에서 와이어 달고 벽 타는 스파이 역은 해봤어도 발차기하는 형사역은 안 해봤는데. 날렵하게 움직이는 건 잘해도 격투는 영 소질이 없었다. 스파이, 국정원 이런 역할보다 경찰이 오히려 더 할게 많았다. 각종 법률적인 것도 깨잘깨잘하게 외워야 하고 수갑 쓰는 것도 배워야 하고. 스파이랑 국정원은 총만 배우면 됐는데 법률 용어도 안 외워도 되고. 이걸 해 말아.
" 영화가 좋아, 단순 수사물 아니고 수사물과 타임리프 물이 결합되어있는 작품이야. 로맨스도 전혀 없는 완전 장르물. 인기 감독 거라서 하고 싶은 사람 줄 섰는데 그 감독이 꼭 너랑 하고 싶대. 라고 하셨습니다. "
" 가을 언니 말을 토씨 하나 안 틀리고 잘 외워 오네. 너 그거 특기다. 나보다 대본 잘 외우겠어. "
" 괜히 잘못 없는 애 구박하지 말고, 어차피 할 거면 빨리한다고 하지-라고 하셨습니다... "
" 하, 진짜... 알겠다구. 누가 보면 김가을이 우리 집에 와있는 줄 알겠네. "
" 감사합니다. 대표님께 하신다고 하셨다고 바로 전달할게요. "
자리를 잡고 앉아 꼼꼼히 들여다본 시놉에 역할은 강력계 형사 역할이었다. 서에 단 한명 있는 여자형사 역할. 이 범죄자들 내가 다 때려잡아야지 하는 정의감과 직업의식이 아주 투철한 캐릭터, 근데 이제 미모를 곁들인.
형사 역할이라...
유진의 꿈이 형사였다. 그것도 강력계 형사. 딱 이 시놉에 있는 거 같은 그런 형사. 범죄자 때려잡는 게 꿈이라고 했었는데. 범죄자 때려잡는 건 못 봤어도, 그때도 유진은 대중교통에서 벌떡 일어나 자리를 양보하거나 무거운 짐을 들어주거나 그러는 늘상 좋은 사람이었다. 권선징악을 좋아하고 늘 선이 이긴다고 믿는, 정의로운 그런 계열의 사람. 책이나 영화 같은데 '좋은 사람' 이라고 하는 표본을 쓴다고 하면 안유진이어야 할 것 같은 그런 사람. 그 올곧은 바름이 좋아서 언니 아니면 누가 경찰해 같은 말을 입에 붙이고 살았다.
그런 유진이 두 번째 경찰 간부후보생 시험에서 떨어졌을 때 대학로 구석에 있는 어떤 국밥집에서 국밥에 소주를 마셨다. 겨울이 다 지났다는데 여전히 춥고 손이 아린 그런 추운날이었다. 언니 같은 사람이 꼭 경찰 되야하는데. 내일 공연이 있어서 원영은 술 한잔을 못 거들고 앞에 앉아 위로랍시고 습관적인 말을 하면서 뽀얀 살코기 국밥만 뒤적거렸다.
마주 앉은 유진에게 하지 못한 말이 너무 많아서 거짓말만 줄줄 내는 신세가 된게 몇주째였다. 카메라 테스트니 계약이니 소속사니 아무 것도 말을 못 꺼낸 상태였으니 당연한 일이었다.
그냥 처음에 바로 명함 받았다고 말을 할 걸. 그 명함을 받으면서 만나는 사람 없다고 말한 게 미안하고 자꾸만 생각이 나서 이상하게 말을 한 마디를 못 꺼냈다.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걸, 그런 생각을 은연중에 갖고 있었다는 걸 유진이 알리도 없는데 혼자 찔려서 관련된 모든 일에 입을 다물었다. 말 안 한 게 너무 많아서 위로조차 함부로 입 밖으로 못 내게 돼버렸다. 저의 위선에 제가 소름이 끼쳤다.
프로필을 찍고, 중간중간 레슨을 가는 통에 약속을 바꾸면서도 유진이 묻지 않는 거에만 다행이라 여겼다. 언니- 나 오늘 갑자기 연습이 생겨서, 엄마가 갑자기 집에 오라고 해서- 이런 되도않는 핑계랑 거짓말을 해도 유진은 따져 묻지 않고 알았다고만 했다.
유진과의 약속을 미루는 것 처럼, 유진을 자꾸 맘속에서 다음으로 그 다음으로 미뤘다. 프로필을 찍고난 다음에, 레슨을 받고 난 다음에. 그 다음에. 그 다음 다음에.
앞에서 소주잔을 기울이는 유진보다 명함을 주던 실장이라는 사람이 했던 말이 머리를 계속 잠식했다. 만나는 사람 있냐고 물었던 그런 말들. 그래서 중간중간 유진의 말을 놓치다가 응? 하고 두어번 되물었다.
유진은 빨갛게 다대기가 풀어진 얼큰한 모듬 국밥을 먹었다. 청양고추를 가득 넣어서. 처음부터 청양고추를 넣어 먹는 건 평시랑은 아주 다른 모습이었는데 원영의 마음도 뒤숭숭해서 그걸 모른 척 했다. 소주를 두어병 비우는 동안 그 테이블에 마주앉아서 서로 같은 생각을 했던 것 같다. 먼저 말을 꺼내진 못하고 손 끝만 쳐다봤다. 옅은 술 냄새를 풍기면서 먼저 말을 꺼낸 건 유진이었다.
" 원영아, 우리 헤어질래? 아무래도 시험에 난 더 집중해야되는 시기인거 같아. "
안유진은 거짓말을 할 때 눈을 잘 보지 못했다. 그런 안유진이 제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하는 그 이별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어 받아들였다. 아니 믿고 싶었다. 거짓말 하지 말라거나 이유가 그게 전부인지 이제 날 사랑하지 않는지 그런 건 물어 볼 생각도 안 했다. 중요하지 않다고 생각했다. 헤어지자는 말을 내가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얕은 생각이 전부여서 기다렸다는 듯이 그 이별을 받아들였다. 언니 진짜 고마워. 내가 말하지 않게 해줘서.
" 언니가 그러고 싶으면 그러자. "
" ...다른 할 말은 더 없어? "
" 없어. 일어날게. 술 적당히 마셔. "
기다렸다는 듯 대학로 좁은 골목을 빠져나와 걸으면서 그 길로 소속사에 전화를 했다. 소속사가 듣고 싶어 했던 그 말을 다시 후련하게 하려고. 그 전화를 끊고 나서는 길 한 가운데 멍하니 서 있다가 가방에 들은 옅은 하늘색 머플러 때문에 그냥 주저앉아 버렸다. 안유진 하라고 떠준 머플러인데 저한테 자꾸 둘러주는 통에 돌려준다는 게, 제가 가방에 넣고 있는 것도 잊은 채로 나와버렸다. 유진의 냄새보다 제 냄새가 더 많이 나는 머플러에 얼굴을 묻고 주저앉아 울었다. 아마 인생에 가장 많이 서럽게 울었던 적을 꼽으라고 하면 그때를 꼽았을 것이다. 그 후엔 어떤 슬픈 역할에도 어떤 슬픈 작품에서도 그만큼 슬프거나 서럽지 않았다. 오히려 눈물을 흘려야 하는 씬에 눈물이 나지 않을 때 혹은 서글픈 표정이 지어지지 않을 때마다 그날을 떠올렸다. 원초적인 슬픔. 스스로 가장 바닥인 날것의 감정, 저 스스로에 대한 실망과 합리화.
내가 헤어지자고 한 것도 아니잖아. 안유진이 먼저 헤어지자고 했잖아. 헤어지자는 말을 먼저 바랬으면서 고작 그걸로 마음에 얹어지는 무게를 덜었다. 신인상을 받고 광고를 찍고 하고 싶었던 드라마 영화를 줄을 이어 할 때마다 이건 내 꿈이니까 꿈을 위해 못 할게 없는 거였다.
참 웃기게도 그런 감정은 채 몇 년을 가지 못했다. 그래서 상이란 걸 받을 때마다 자꾸 기분이 거지 같아졌다. 거지 같은 걸 넘어 울고 싶었다가 때론 상에 화가 났다가 저도 모르게 문드러졌다. 상을 받고 또 받고, 날이 갈수록 개런티는 개런티대로 하늘 높이 치솟아도 매일 아침 매일 밤이 외로웠다. 가쁘게 달리면서 끊어진 수많은 인연 탓에, 유진의 소식은 들을 길도 없어져 버리고 난 후였다.
쉬는 날 혼자 방안에 누워 천장을 볼 때. 위로 뻗어 올린 손에 자꾸만 쥐어도 아무것도 쥔 게 없는 것처럼 손이 허전하게 비어있었다. 그래서 더 손이 시렸다. 그렇게 갖고 싶다고 되고 싶다고 안달을 냈는데 막상 상이니 인기니 다 갖고 나니까 가지지 못한 다른 것만 눈에 아른거렸다. 지금 가진 거 그 반짝거리는 것들을 다 털어서 다시 바꿀 수 있으면 좋을 텐데. 그때 놓은 것이 자꾸만 놓지 않았으면 어땠을까 하고 시절을 되감게 했다. 이제와 이런 미련이 다 무슨 소용이냐 싶다만은.
읽던 대본을 내려놓고 소파에 누워 하얀 천장을 올려다봤다. 텅 비어서 높이가 가늠되지 않을 정도로 높은 천장이 원영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저 천장엔 가끔 유진이 나타났다. 코트에 머플러를 하고 하얀 입김을 뿜거나 붕어빵 같은 걸 하나 입에 물고 붕어빵은 팥이지- 이러면서 저를 쳐다보던 모습으로. 여름엔 하얀 티셔츠에 청바지 차림으로 웃으며 뛰어오던 모습으로. 내가 들게- 이런 말을 하면서 제 손에 든 소품을 받아들던 모습으로.
안유진은 형사가 되었을까.
너무나도 보고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