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란다 원칙.



당신은 묵비권을 행사할 권리가 있으며, 변호인을 선임 할 권리가 있다. 당신이 말하는 모든 것은 법정에서 불리하게 적용될 수 있다.



 베이지색 소파가 놓인 매니저도 없는 대기실에서 유진은 차분하게 미란다 원칙을 얘기했다. 자문 같은 거 처음이라서 뭘 배우고 싶으신 지 정확히 모르겠다는 얘기도 같이. 유진이 말하는 미란다 원칙을 들으면서 원영은 아무 말 한 마디를 못하고 침묵하고 있다. 마치 죄인인 양.



" 보통 미란다 원칙부터 알려준다던데 아까 매니저님한테 들으니까 수갑 사용법을 배우셔야 한다고 하더라고요. "


 목소리가 떨릴까 봐 말 한 마디 못하겠는 건 원영 하나인 것 같았다. 덤덤한 말투와 목소리로 유진은 얘기하고 있었다. 이십 대 중반 때보다 더 다부져진 몸은 경찰 일 하면서 달라진 것이겠지. 그때는 허리만큼 길었던 머리도 중단발 만큼 짧아져 있었다. 태권도나 달리기 그런 거 잘 한다고 체력 좋다고 집 앞까지 한 시간을 걸어 데려다주고 가거나 마로니에 공원 계단을 가위바위보 하면서 오르내리던 게 문득 떠올랐다. 매번 그 가위바위보에서 져주던 것도.





" 원영씨가 형사 역할이 신가 보죠? "



 유진이 수갑을 꺼내서는 눈앞에 들어 보였다. 이렇게 생긴 게 실제 수갑인데, 보통은 제작해서 소품용을 따로 쓸 텐데 아무래도 아주 정교하게 만드시려나 보네요. 여기 보면 끝에 가 조금 얇아요. 여길 잡고 손목에 대면됩니다. 악수하기 전에 쥐는 것처럼 잡으면 되는데, 세게 칠 필요는 없어요. 그냥 가볍게 스냅으로 밀면 탁 하고 들어가기 때문에 끝에 걸리면 바로 채워지니까 그때 눌러야 합니다. 유진은 본인 손목에 대고 수갑을 가볍게 밀어 눌러 채웠다. 표정 관리하기도 버거운 원영과는 사뭇 다른 덤덤하고 여유로운 자세. 한 공간에서 이렇게나 둘이 다를 수 있을까.




" 억지로 빼려고 해도 절대 안 빠지니까 열쇠 잃어버리면 안 됩니다. 아무리 손목이 얇아도 성인은 절대 안 빠져요. "




 유진이 왼쪽 손목에 걸린 수갑에서 손을 빼려는 시늉을 했다. 찰각찰각 하고 수갑에서 소리가 났다. 수갑을 손목에 찬 건 유진인데 원영은 자신의 목에 수갑이 채워 진 것만 같다. 단어 하나도 입 밖으로 낼 수가 없다. 원영이 아무 답을 하지 않는데도 유진은 태연하게 이내 주머니에서 열쇠를 꺼내서는 원영씨가 열어보세요 하고 열쇠를 내밀었다. 차마 눈을 바라볼 여유가 없어서 수갑이 채워진 왼 손목만 가만히 내려다봤다. 

 은색 수갑이 걸린 손목을 가만히 내려보다가 열쇠를 꽂아 이내 그 수갑을 다시 풀어냈다. 손목에 걸린 수갑을 잡은 손을 떨지 않으려고 이를 몰래 악물었다. 손이 닿았다가는 이 자리에서 주저 앉게 될지도 몰랐다. 빨갛게 자국이 난 손목이 그때 여름에 그 손목에 걸려있던 머리 끈 같은 걸 떠오르게 해서 순간 아찔해졌다. 가끔 머리 묶고 싶다고 더워하는 제게 내밀던 그 머리 끈.





" ...언제부터 날 원영씨라고 불렀어? 존댓말은 또 뭐야. "

 

까무러칠 것 같아서 설명하는 내내 아무 대꾸를 못하다가, 겨우 진정이 되어 말을 꺼냈다. 아무렇지 않은 듯 떨지 않고 말하고 싶어서 목소리에도 가득 힘을 줬다. 수갑에 붙어있던 유진의 시선이 원영에게로 옮겨왔다.




" 아, 나 기억 못 할 줄 알았는데... 기억하네요? "

" ...언니는 나 기억 못 할 거였어? "



 끝까지 존댓말인 유진의 말끄트머리가 어이가 없다. 누가 누굴 잊어버리는데. 절대 잊혀지지가 않아서 문제인 사람이 자길 기억 못 할 줄 알았다는 말을 하는 거는 도대체 어떻게 생긴 속이길래. 신이 제 속을 뒤집으려고 하는 게 틀림없었다.




" 6년 만에 만나서 말 놓기도 뭐하고... 사람들 눈도 있으니까 그냥 원영씨라고 할게요. "

" ...안 형사님 편한 대로 하세요. 그럼 저도 말 높이구요. "


 눈썹을 까딱하고 열쇠를 홈에 다시 끼우는 게 기어이 원영씨라고 부르겠다는 얘기다. 존댓말도 할 거라는 얘기고. 싫다고 하는 말이 통할 리가 없어서 입 안으로 아랫입술만 깨물었다. 전에는 가위바위보 처럼 유진이 늘 져줬던 거 같은데 6년 만에 만난 안유진은 다를 건가 보다. 이제는 져달라고 칭얼거릴 수 있는 사이도 아닌지라 바로 순응하듯이 받아들였다. 언니라는 말을 입 밖으로 더 내지 못하고 입에 아직 붙지 않는 안 형사님- 이라는 호칭을 올렸다.




" 언제부터 형사 하셨어요? "


 궁금했다. 언제 시험은 합격했는지 언제부터 형사 하게 됐는지. 원영은 TV며 스크린이며 얼굴을 비추는 사람이라 근황이 공개되어있었지만 유진의 근황을 원영은 알 수 없었다



" 몇 년 됐어요. "


 두루뭉술하게 답이 돌아온다. 아주 구체적인 걸 알려줄 거라고 기대한 건 아니었지만 저렇게까지 미온적으로 나올 줄도 몰랐다.


 정확히 언제 시험 붙었는데? 몇 년이라는 게 얼마나 형사를 한 건데? 3년? 5년? 계속 방배경찰서에 있었어? 거기 우리 집에서 엄청 가까운데... 차로 몇 분 안 걸리는데... 위험한 범죄자 같은 사람들 잡으러 다녀? 다칠 위험은 없어? 다친 적은? 이거 끝나면 다시 경찰서로 가? 어디 살아? 이런 거침없이 쏟아지는 질문들은 속으로만 수십번 하고 입 밖으로는 한 마디를 못 했다.






 수갑부터 간단한 형사법 용어까지 배웠다. 이미 처음 시범을 보였을 때 사용법을 다 익혔는데도 자꾸 뭐 하나씩 빠트린 척을 하게 됐다. 직접 채워보고 싶다고, 유진이 내민 손목에 수갑을 채웠다. 왼 손목 위로 가볍게 눌러서 딸깍하고 감기는 대로.



" 이렇게 수갑 채우면 아프지는 않아요? "



 수갑이 꽉 눌러 닫혀서 닿은 자리, 빨갛게 일어나는 곳을 차마 손으로 누르진 못하고 눈으로 살살 눌러 올라가다보면 손목 위로 군데군데 옅은 멍이 남은 피부가 보인다. 범인이랑 싸움 같은걸 하다가 드는 멍일까 아니면 추격전 같은걸 하다가.


" 어차피 용의자가 차는 건데 아프거나 그런 건 원래 경찰은 신경 안 써요. 원영씨 상대 배우가 좀 아플 순 있겠죠? 촬영 때 너무 세게 채우진 마시고요. "



 대본은 두 번만 읽어도 잘만 외우면서, 형사법 용어는 세 번을 더 들었다. 한 시간도 채 안 되어 궁금한 게 더 있으시면 연락을 주시라고 건네는 명함을 가만히 받아들었다. 안유진이라는 이름 아래 적힌 번호를 보는데 아는 번호랑 달라서 저도 모르게 또 입술을 깨물었다. 자꾸 깨물어서 퉁퉁 부을 것 같다. 헤어지고 나서 한 번을 문자도 보낸 적이 없으면서 잊어버린 적 없는 그 번호. 둘의 생일 네 자리 더하면 1732가 된다고 뒤에 네 자리를 맞춰 쓰던 휴대폰 번호. 안 바꿨을 리가 없는데 바뀐 것이 못내 서운한 게 스스로 착잡하다. 그 번호를 계속 쓸리가 없지. 누가 이미 헤어진 전 연인이랑 맞춘 번호를 아직까지 쓰겠어. 나도 도망치듯이 휴대폰 번호 다 바꿨는데. 그 번호를 놓는 게 아쉬워서 집 현관 번호로만 겨우 쓰는 건 저 하나 뿐일 것 같았다.









 대본 리딩을 입으로 했는지 코로 했는지 기억이 나지 않을 정도로 어떻게 했는지 모른 채 집으로 돌아왔다. 액션 스쿨에 가야 해서 두 시간 뒤면 다시 집을 나서야 하는데 늘어져 천장을 올려다보는 몸이 일어나지질 않았다. 원영의 집 하얀 천장에는 아까부터 문을 열던 유진의 실루엣부터 수갑에 빨개진 손목, ' 안유진 경위입니다. ' 하던 목소리도 연속 상영 중이었다. 

 결국 액션 스쿨에는 오늘 컨디션이 안 좋아서 못 갈 것 같다고 취소하기에 이르렀다. 천장이나 계속 올려다보면서 진짜 보고 싶었는데 보니까 더 보고 싶어지는 거구나 보고 싶다는 건 이런 거구나 그런 생각을 했다. 그동안 보고 싶다는 대사를 하면서 했던 연기는 껍데기 같은 감정이었다. 이렇게 천장에서 조차도 눈을 못 떼어내는 게 보고 싶다는 거였다. 



 총기 사용법은 따로 안 배우셔도 된다고 했으니까 추가로 배우는 건 없는 걸로 할까요? 매니저가 재차 묻는 말에는 총기 사용법도 다시 배우겠다고 말을 바꿨다. 또 보고 싶어서. 강력반에 단 한 명있는 여형사의 삶도 듣고 싶다고. 영화 캐릭터랑 똑같은 분이시라면서요. 그냥 뭐든 한 번이라도 더 만나고 그럴 구실로, 핑곗거리가 되면 좋겠다.



 문자를 보낼까. 수갑 사용 법이랑 형사법 용어 알려줘서 고맙다고. 원영씨 소리 듣는 마당에 그런 문자 보내는 건 좀 웃긴 일일까. 매니저한테 인사치레 하라는건 더 웃긴 일이다. 아까 받아둔 명함만 만지작 거리면서 쳐다봤다.

 경위라고 했는데 경위는 직급 같은 거겠지. 경찰 시험 합격하고 몇 년 있어야 경위라는 직급이 되는 건지 인터넷에 검색도 해봤다. 경찰간부후보생 시험은 임용되면 바로 경위란다. 경찰 시험 준비하는 걸 그렇게 봤으면서 그런 기본적인 것도 모르고 있었다. 내가 이렇게까지 관심이 없고 무지했었나. 그냥 유진이 해주는 대로 말해주는 것만 받아들이는 연애를 했었나보다.


 방배경찰서에서 근무하는 경위면 출근은 몇시에 할까. 경찰도 9시 출근 뭐 그런 걸까. 강력계는 위험하다던데. 가끔 대본 같은 거 보면 강력계는 늘 어디서 맞거나 다치거나 고생하는 그런 장면만 주로 나왔었다. 막 칼에 찔리고 그런 무시무시한 일을 겪는 장면들만 기억이 났다. 유진도 그런 일을 당 할 수도 있는 걸까.


 액션 스쿨도 취소하고 침대에 누워서 몇 시간 동안 고민하고 생각이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게 전부 안유진이다. 계속 천장을 쳐다보다가, 경찰이 나온 유튜브를 뒤져서 다 찾아봤다. 경찰 브이로그, 어쨌든 출근,  다큐 2일 이런 프로를 전부 다. 


 강력계는 잘 없고, 다른 과 경찰들이 주로 나왔다. 진짜 강력계면 설마 너무 험악해서 콘텐츠로도 못 나오나. 살인범, 성범죄 범 이런 나쁜 놈들 잡으러 다녀서 엄청 위험할 테니까.


 해가 다 지다 못해 새카만 밤이 되고 나서야 겨우 원영은 문자를 보냈다. 겨우 두 문장을 보내는데 저 만큼이나 시간이 걸렸다. 우스워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누구세요? 라는 문자를 받고서야 그 고민 끝에 정신없이 문자 보내면서 이름 얘기도 안 했단 걸 알았다. 유진이 제 번호를 알리도 없는데 어찌나 바보 같은지.















오늘 알려줘서 고마워요. 

시간 되면 밥 살게요.


누구세요?


장원영이에요.



 유진은 마약계랑 공조하고 있는 마약 전과 9범 수배자 잠복을 하다가 원영의 문자에 답을 했다. 연락처에 없는 번호여서 누구세요라고 물어본다는 게 가만 생각해보니 온 문자 내용 자체가 원영이겠구나 뒤늦게 알아챘다. 막내랑 2인 1조로 오늘 밤을 차에서 꼬박 새우는 잠복조인데 단팥빵을 먹다가 장원영이에요 라는 말에 답을 하려니 마땅히 할 말이 없었다. 형사랑 배우가 무슨 말을 해. 집에 도둑 들면 연락주세요? 스스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었다.





밥 안 사도 괜찮아요.

요즘 잠복하느라 바빠서 시간이 안 납니다.

그 범인 잡으면요?

그 다음 범인이 번호표 뽑고 대기 중이라서요.

밥은 먹은 걸로 할게요.




 연락처에 저장을 하려다가, 앞으로 몇번이나 연락을 하겠나 싶어서 관뒀다. 대충 자동차 어디에 휴대폰은 넣어놓고 막내가 사 온 소시지 껍질을 벗겨 한입 물었다.



" 너 이거 영수증 챙겼어? "

" 선배님, 당연하지 말입니다. "


 단팥빵 2개, 소시지 2개, 바나나우유 하나, 캔 커피 하나. 8800원짜리 야무지게 영수증 챙겼습니다. 막내가 짧은 편의점 영수증을 흔들어 보였다. 너 너무 소식하는 거 아니야? 선배님, 저 그렇게 많이 안 먹습니다. 네가?


 마약 전과 9범인 약쟁이 여친 집 앞에 검은색 구형 소나타를 대놓고 있었다. 살인범을 쫓다 보니까 마약 유통까지 하는 놈인 터라 마약계랑 강력계가 다 달라붙어 있는 건이었다. 좁은 소나타 안에서 소시지니 단팥빵이니 그따위 거 먹으면서 잠복을 하려니 좀이 쑤신다. 차라리 푸닥거리하면서 추격전을 하거나 한판 붙는 게 낫지. 이런 말을 하면 그러다 허파에 구멍 난다고 선배들한테 재수 없는 소리 좀 하지 말란 잔소리나 들었다. 잠복하다가 살금살금 뒤에서 덮쳐서 잡는 게 안전 제일이야 제발 조용히 잡자 유진아. 넌 뭐 못 두들겨 패서 죽은 귀신이 붙었니. 김 반장도 잔소리를 넘어 이젠 읍소하기에 이르렀다.


 다음번엔 막내한테 단팥빵 말고 참치마요 삼각김밥을 사 오라고 해야겠다, 이 단팥빵도 자꾸 먹으니까 좀 질리네. 고카페인이라고 떡하니 쓰여 있는 캔 커피를 후룩후룩 사골국물처럼 마시다가 선배님 뭐 재밌는 얘기 없습니까? 장원영 만난 건 어땠습니까. 하는 거에 그냥 뭐- 하고 어깨만 으쓱했다.



" 장원영 실제로 보면 진짜 예쁩니까? "

" 응, 예쁘더라 여전히. "

" 여전히? "

" 아... TV에 나오는 거랑 똑같다고. 싸인 받는 거는 깜박했다. "

" 까먹으실 줄 알았습니다. " 



 지루한 잠복 와중에 막내랑 이런저런 얘기나 했다. 야, 저기 쓰레기종량제 봉투 위반이다. 쓰레기 무단투기. 이따 잠복 끝나고 퇴근하면서 주민센터에 신고하겠습니다. 이게 첫 잠복인 막내는 그냥 무슨 현장 체험 나온 것처럼 들떠있었다.



" 선배님, 첫사랑 얘기 같은 건 안 해주십니까. "

" ...넌 내가 무슨 교생선생님인 줄 아냐. "

" 김 선배님 말씀이 원래 같이 잠복하면 선배님들이 그런 거 말해주신다고 했지 말입니다. "

" 아, 또 그 선배가 쓸데없는 얘길 애한테 하셨네. 그걸 믿냐. 너 그래서 경찰 어떻게 할래. "

" 저 속은 겁니까? "

" 나 사실 아이돌이야. 4세대 여자 아이돌 그룹 리더야. "

" ...놀리지 마십시오. 노래나 틀겠습니다. "



 막내 취향인지 어느 발라더의 노래가 휴대폰을 통해 아주 작게 차 안을 메웠다.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 헤어져도 사랑 할 수 있잖아. 그런 가사가 나올 즈음 유진이 야 이거 누구 노래야? 하고 물었다.



" 이거 제 최애곡인데, 신승훈에 ' 사랑해도 헤어질 수 있다면' 입니다. 노래 좋지 않습니까? "

" 딴 거 틀어. 사랑해서 헤어졌는데 헤어지고 나서도 그 사람을 사랑하면 너무 하지 않냐. "

" 누구한테 너무 한 겁니까? "

" 나한테. "


유진은 약쟁이 여자친구 집의 현관을 빤히 노려봤다. 막내는 의아하게 유진을 보다가 뻘쭘하게 노래를 껐다.


" 사랑해서 헤어지신 적 있습니까? 저 그런 말 안 믿지 말입니다. "


 사랑하는데 왜 헤어집니까?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어떻게든 아등바등 지켜내고 해내야지 안 그렇습니까? 190센티미터 거구가 두손을 모으고 무슨 독립투사처럼 말하는데 아주 로맨티스트 납셨다. 



" 넌 그래라. "

" 선배님은 아닙니까? "

" ...사랑하니까 헤어지자고 하는 거야. 안 사랑하면 나 때문에 그 사람이 뭘 잃든 그 사람 인생을 망치든 신경 안 쓰고 이기적으로 굴었겠지. "

" 근데 그렇게 헤어져도 어차피 계속 사랑하게 되잖습니까. 신승훈 저 가사에도 보면 헤어져도 사랑한다고 되어 있지 말입니다. "




 쓸데없는 얘기 그만하고 현관이나 똑바로 쳐다보라고. 눈이 두 개여도 눈이 네 개인 거 처럼 쳐다봐 알았냐. 지금 약쟁이 잡으려고 잠복하는데 뭔 사랑 얘길 하고 있어. 사랑이 쟤 잡아준대? 쟤가 뿌린 마약이 60억원어치에 살해 피해자가 세 명이야. 사랑 타령 하면 60억은 거녕 6천원도 어디서 안 나온다. 죽은 피해자도 안 살아 돌아와. 예 선배님- 저 지금 눈 여섯개 됐습니다. 갑자기 군기가 든 막내가 주변 도로를 레이저를 쏘는 눈으로 둘러봤다.






 그 노랫말처럼 헤어져도 사랑 할 수 있는 거면, 더더욱 안 헤어질 이유가 없는 거 아니겠니. 이런 상념만 검은 소나타 안을 가득 채웠다.







 





-





 총기 사용법은 직접 서에 가서 배우기로 해 매니저가 일정을 조정해놓은 것을 따라 경찰서로 향했다. 오전 일찍 가는 게 좋을 것 같다고. 뭘 배우러 가는 거여도 배우가 경찰서 들락거리는 게 썩 보는 눈에 좋은 일은 아니었다. 매니저 끼고 가면 둘이 얘기할 것도 못 할까 봐 굳이 혼자 알아서 가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괜히 사람들 눈이 신경 쓰여서 모자에 선글라스까지 꼈는데, 그 와중에도 또 너무 못생긴 모자를 쓰면 유진의 눈에 못생겨 보일까 봐 드레스룸에서 모자만 한 시간을 골랐다. 선글라스도 이걸 썼다가, 저걸 썼다가.


 

 약속 되어있는 시간보다 한 시간쯤 일찍 경찰서 근처에 차를 대놓고 기다리다 망설이던 전화를 걸었다. 밥을 산다고 아무리 문자를 보내도 맨날 바쁘고 언제 먹자 그런 답변이 없어서 기어이 전화를 걸고야 말았다. 형사 안유진은, 잠복을 하고 있거나 국과수를 갔거나 아니면 법원에 갔거나 종종 태권도장에서 운동을 하고 있기도 했다. 한창 영화를 찍는 배우보다 형사가 더 바빠 보였다. 전화도 지금 두 번째 거는데 여전히 안 받는다.



 제가 지금 국과수라, 제가 지금 태권도장이라, 제가 지금 법원이라. 매니저한테 제 일이 아닌 척 언뜻 물어보니까 저런 문자는 돌려 돌려 철벽 치는 거라던데. 진짜로 총기 다루는 걸 배우기로 약속한 날이 될 때까지 단 한번을 얼굴을 안 보여줬다. 



저 장원영인데요.

네 9시에 오신다고 하셨죠? 


저 근데 좀 빨리 와버렸어요. 시간 계산을 잘못해서.


제가 지금 경찰서에 없는데. 아침 먹고 있어서.


어디 있는데요?





 경찰서 근처, 간판에 빨간 칠이 벗겨진 얼큰 할매국밥집에 들어서니 4인 테이블에 혼자 앉아 국밥을 먹고 있는 유진이 보였다. 후드티에 새카만 패딩 차림인 게 누가 봐도 어제 밤을 새운 모양새였다. 다 낡은 나무 식탁들 틈을 비집고 들어가 앞에 앉았다. 오전 경찰서 앞 국밥집은 이래도 장사가 되나 싶을 정도로 한가했다. 마주 앉아 쓰고 온 모자는 채 벗지도 못하고 국밥집 벽면이나 눈으로 훑었다. 선글라스는 벗으려다가 벽면에 소주 광고 포스터가 붙어있는 걸 보고는 누가 알아볼까 봐 모자만 더 깊게 눌러썼다. 그런 원영을 유진이 흘끗 쳐다봤다. 이 시간엔 사람 거의 없어서 괜찮아요. 주인 할머님은 TV 같은 건 거의 안 보세요.




 얼큰 할매국밥이라더니 유진은 새빨간 다대기가 풀어진 국밥을 아침이라고 먹고 있었다. 입맛이 여전했다. 청양고추도 잔뜩 넣은 게 누가 봐도 보통 맵기는 아니어보이는 국밥을 아침 속에 잘도 먹었다. 



" 자꾸 밥을 사신다고 해서. 이거 사세요 그럼. "

" 이거요? "

" 네, 만 천 원이에요. 부정청탁금지법에 걸리지도않고 딱이네요. "

" ... 누가 밥을 이런 걸 산댔어요. "

" 국밥이 뭐가 어때서요. 여기 맛집인데. 원영씨꺼도 시키려면 시키세요. 여기 근데 안 매운 건 없으니까 할머님한테 안 맵게 해달라고 해야 합니다. "

" 아니, 국밥이 이상하다는 게 아니라... "


 밥을 산다는 게 그냥 정말 배를 채우는 밥만 산다는 의미가 아닌데. 부정청탁금지법은 또 뭐야, 김영란법 그런 거 말하는 건가. 경찰한테 밥 사는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경찰로 나랑 밥을 먹을 거였나보다. 원영이 앞에서 몰래 옅은 한숨을 쉬어도 유진은 시선 한번을 안주고 국밥을 먹다가, 그새 청양고추도 더 추가해서 먹었다.  



" 너무 맵게 먹는 거 아니에요? 스트레스 받는 일 있어요? "

" 없는데요. 원영 씨는 안 먹을 거예요? "


 스트레스는 원영이 받고 있었다. 그날처럼 국밥집에 마주 앉아있는데 저 혼자만 그날 생각을 하는 것 같고 앞에 앉아 국밥을 먹는 이는 아무렇지 않아 보여서. 얼큰이국밥인지 청양고추 국밥인지 모르겠는걸 멀쩡한 얼굴로 잘도 먹었다. 그러면서도 자꾸 원영씨라고 부르는 거에 입술을 물다 못해 헐 것 같다. 내일도 촬영이 있는데 깨물다 놓은 아랫입술이 빨갛게 부어올랐다. 원영씨 원영씨. 그놈의 원영씨.




" ...그냥 예전처럼 부르면 안돼...? 언제까지 원영씨라고 부를 거야? "

" 앞으로 뭐 얼마나 더 본다고요. "

" ...그러니까. 앞으로 얼마 더 안 볼 거라면서 꼬박꼬박 원영씨에 존댓말 쓰는 게 더 이상해. 그냥 원래 하던 대로 해. "

" ... 네가 이상하면 그러자. 원영아. 됐지? 국밥 안 먹을 거야? 안 맵게 해달라면 안 맵게 해주셔. "


 원영 씨라고 해서 존댓말을 써서 속이 쓰린 건 줄 알았는데, 원영아라고 해도 예전처럼 반말을 써도 속이 쓰린걸 보니 그게 아니었나보다. 얼마 더 안 볼 거라는 말을 아무렇지 않게 입으로 내고 받아들이는 저 태도도, 정말 단 요만큼도 미련이나 감정이 없는 저 태연한 표정이랑 행동이 속을 쓰리게 하는 거였다. 언니 넌 뭐가 그렇게 한 줌도 남은 게 없니. 





" 밥 진짜 이거 사달라고? "

" 어차피 부정청탁금지법 있어서 3만원 넘는 거 못 먹어. "

" 내가 언니한테 밥 사는데 그런 거 신경 써야 하는 줄은 몰랐네. "

" 경찰이니까. "


 경찰 말고 안유진한테 밥을 사고 싶은 건데 기어이 경찰로서만 밥을 먹겠단다. 밖으로 꺼내놓진 못하고 쓰린 속으로 그냥 총기 다루는 건 안 배워도 될 것 같아, 생각해보니까 전에 작품에서 배운 적 있어. 하고 일어서 계산을 하곤 가게를 나왔다. 





 밥을 정말 만 천 원짜리를 샀다. 6년 만에 안유진한테 사주는 밥이 만 천 원짜리 국밥이어서 계산을 하는 와중에도 울 것 같았다. 비싼 거 사달라고 좀 하지.





 가득 미련이 남은 건 저 혼자 뿐이었나. 그날 마주하지 못하고 말하던 유진의 눈은, 헤어지기 싫은데 헤어지자는 말을 하는 걸로 보였다. 그냥 모른 척 했을 뿐 분명 그런 거라고 혼자 생각했다. 헌데 아니었을까. 유진의 입에서 헤어지자는 말이 나온 걸 혹시 믿기 싫어서, 날 위해서 나한테 헤어지자 한 거일 거라고 그냥 혼자 합리화했던 거였을까. 

 어떤 거 였을까. 헤어지자는 그 말을 옳다구나 덥석 받아들인 제가 이기적인 년이라 온 이별이었던 건지, 실은 안유진이 정말 날 더 이상 사랑하지 않아서 온 이별이었던 건지.



 집을 가는 내내 그날 울었던 것 보다 더 크게 눈물이 났다. 울지 않으려고 운전을 하면서 운전대만 꽉 쥐어서 손바닥이 다 아렸다. 정확히 어떤 거였는지 모르겠다. 마음속 어딘가에, 안유진을 다시 만나면 안유진은 그때처럼 날 사랑해줄 거라는 그런 생각이 미약하게나마 자리 잡고 있었나보다. 무슨 자신감인지 그런 게 저 무의식에 뿌리 깊게 있었나. 근데 그때 정말 헤어지고 싶어서 헤어지자 한 거 였으면 어떡해. 그때 이미 끝난 사랑이면 아무것도 붙들 수 있는 게 없는 거 아니냐고. 헤어지자는 말은 6년도 더 전에 들었는데 그 말을 마치 조금 전에 들은 것 처럼 눈물이 났다. 














 몇일 내내 액션 스쿨이니 에스테틱이니 촬영이니 당일 취소를 해대는 통에 가을이 결국 집으로 쳐들어왔다. 누가 봐도 실연당한 꼴로 내내 침실에 틀어박혀서 이불이나 돌돌 싸매고 훌쩍거렸다. 드레스룸에 고이 접어놓은 옅은 하늘색 머플러도 꺼내다 보고 창밖에 잘 보이지도 않는 서래섬도 내다보면서 엉엉 울고 청승을 떨고 있는데 별안간 벨도 안 누르고 현관문에 삑삑삑삑- 비밀번호를 누르더니 가을이 집으로 들이닥쳤다. 이건 예의와 정도가 칼이라는 김가을이 정말 화가 났다는 뜻이다. 진짜 요즘 장원영 왜 이러지? 정색하고 침대에 있는 걸 내려다보다가 베개도 아니고 머플러에 코 박고 훌쩍거리고 있으니까 또 표정을 금방 풀어서는 옆에 앉았다. 



" 뭐야 왜 그래. 무슨 일인데. "


 가을의 얼굴을 보니까 이십 대 초반으로 돌아간 것 처럼 울컥 속에서부터 눈물이 쏟아졌다. 언니- 하고 끌어안고 엉엉 우는데 영문을 모르는 가을은 등만 말없이 토닥였다. 나도 모르는 새에 뭐 연애하다가 실연이라도 당했니? 귀신같이 속을 들여다보고 저런 말을 했다. 얼굴에 잔뜩 눈물을 방울방울 달고 눈이 벌게져서 쳐다보니까 진짜로? 하고 묻는다.



" 누가 장원영을 울린다니, 근데 나한테 말도 안 하고 연애하는 게 어느 나라 법이야. "


 달래주는 그 와중에도 말 안 하고 연애한 거냐고 잔소리를 콕콕 쑤셔 넣었다. 천하의 장원영이 이 정도면 몇 개월 반짝 만난 상대는 아니고 최소 몇 년일 텐데, 너 나랑 일한 게 벌써 언제부턴데 내가 모르는 애인이 있었어? 믿기지 않아 하는 가을의 허리춤만 끌어안고 원영은 계속 훌쩍거렸다.



" 누군데. 연예인이야? 말해봐. "


 네가 그 사람이 꼴 보기 싫어서 화가 나서 우는 거야 아니면 넌 너무 사랑하는데 그 사람은 너 사랑 안 한대서 속상해서 우는 거야. 전자면 같은 작품은 안 들어가게 손 써주고 기왕이면 그 사람 들어간다는 작품도 투자비도 싹 빼버릴게, 근데 후자면... 일단 누군지 들어나 보자. 배우야 아이돌이야 뭐야. 침대 턱 걸터앉아서 말해보라고 하면서 휴지로 코도 흥흥 풀게 하고 뺨에 덕지덕지 붙은 눈물도 닦아줬다. 

 


" 연예인 아니야. "

" 그럼, 운동선수야? 사업가? 비트코인하는 사람은 안돼. "


 요즘 사기꾼들 중에 연예인들한테 접근해서 잘해주고 그러다가 사기 치고 그러는 사람 많다더라. 차라리 같은 연예인이 낫지, 사업가 이런 거는 진짜 안돼. 특히 뭐 미국 유학파 출신이라고 그러면서 IT사업한다 이런 애들. 암호화폐다 뭐다 다 연예인 이름 팔아서 사업으로 투자금 한탕하고 튀려는 애들이라니까. 잠실에 유명 주상복합 산다는 둥 이런 거 믿으면 안돼. 지가 막 신뢰감 있는 사람이라고 하는 말 믿으면 절대 안된다. 지 입으로 신뢰상이라는 애들중에 신뢰할 만 사람 하나도 없어. 인감증명서 뭐 그런 거 해준 건 아니지? 걱정이 된 가을이 줄줄 심란 섞인 잔소리를 했다. 원영이 하도 우니까 적잖이 놀란 심장이었는지 평소답지 않게 말 수가 부쩍 늘었다.




" 그 사람...경찰이야... "


아, 경찰이면 오히려 다행이네. 근데 네가 경찰 만날 일이 뭐가 있어? 사고 쳐서 경찰서 갈 일도 없는데. 의아한 표정을 짓다가 이내 설마 하는 표정으로 표정이 바뀐다. 너 설마... 영화 찍을 때 자문 받은 그 경찰이야 혹시? 오르내림 없던 가을이 은연중에 놀란 티를 내는 거에 원영은 고개만 끄덕였다.



" 근데 그 경찰... 만난 게 몇주 전 아니야? 너 엄청 금방 사랑에 빠지는 그런 스타일이었어...? 연애하다가 그런 게 아니라 혼자 짝사랑해서 우는 거야...? "


 짝사랑이라고 하니까 또 서러운 울음이 터져서 가을을 붙잡고 눈물을 뚝뚝 흘렸다. 어머, 미안해 짝사랑이라고 한 거 취소. 가을이 또 등을 토닥거렸다. 원래 짝사랑아니었어... 울어서 다 새는 발음으로 오만 얘길 가을에게 쏟아냈다. 나 진짜 짝사랑 아니었다고.

 













" 그러니까... 상 받을 때마다 네 기분이 거지 같은 그 이유네 그 사람이. 너무 복잡한데 사연이. "



 근데 너도 그때 헤어지고 싶었다며 다 너의 업보야. 가을이 또 맞는 말을 한다. 언니 지금 위로하는 거야 불 지르는 거야 더 설움이 복받쳤다. 나도 내가 이기적인 거 알아 나쁜 거 안다구. 원영이 헤어진 전 애인 만나더니 다시 스무살 다 됐네. 



 차라리 스무살이면 낫지. 이제 서른에 그때 일 잘못했다고 후회한다고 다시 사랑해달라고 매달릴 수도 없는데. 누가 봐도 헤어지고 싶어 하는 티를 풀풀 내던 저에게 기꺼이 헤어지자는 말을 한 이가 사실은 더 이상 날 사랑하지 않아서 그랬을지도 모른다고. 그런 가능성을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 그냥 헤어지자는 말을 의도한 이기적인 년이 되는 게 수백 배 수천 배 나을 것 같았다.




" 그래서, 넌 그 사람 여전히 사랑해? "


눈에 눈물을 달고 고개만 끄덕였다. 가을이 머리를 살살 쓸어 넘겨준다. 으이그... 그때 왜 그랬어.


" 고민할게 뭐 있어. 그냥 계속 사랑해야지. 할 수 있는 건 다시 다 해봐. "


짝사랑은 원래 마음이 아픈 거라고. 뭐든 할 수 있는 걸 다 하라는 가을의 말에 엄두가 나지 않는다.


" 내가 너무... 염치가 없으니까... 날 엄청 싫어할 수도 있잖아. "

" 그래도... 그때 널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면, 지금은 미련 없어도 다시 널 사랑하지 않을까? 언젠가는 다시? "






그럴까. 안유진이 다시 그래줄까. 날 다시 사랑해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