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한강에서 자전거를 한 바퀴 타고 출근을 했다. 예전에 학생 때부터 타던 자전거를 복도 구석에 처박아놨다가 꺼내 탔다. 요즘 잠복이니 뭐니 시간이 통 안 나서 근력운동 할 시간도 촉박한 터에 자전거로 유산소와 근력운동을 동시에 해야겠다 싶었다. 자전거 하체에 좋다던데. 벽 탈 때 도움 되려나. 이젠 서른이 넘어서 그런가 자전거를 꼴랑 한 시간 탔다고 숨이 찼다. 고장만 안 나면 뭐든 평생 쓸 수 있는 건데, 자전거 보다 제 몸 여기저기가 먼저 고장 나는 건가 싶다. 지난번에 추격전 끝에 검거하다가 살짝 탈골 됐었던 왼쪽 어깨가 욱신욱신 통증이 올라왔다.
출근하자마자 낡은 구닥다리 유선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환기를 하다가 '국민 첫사랑 장원영.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 ' 이라는 제목의 기사를 클릭해서 들어가 봤다. 인터넷 커뮤니티 어디에 스토킹 관련된 내용이 올라와서 공식적인 수사를 요청했다는 내용이었다. 담당 경찰서가 어디가 되려나. 하루가 멀다하고 인터넷에 칼부림을 예고하질 않나 스토킹을 하질 않나 하여튼 인터넷이랑 게임이 사람들을 다 망쳤지. 혹시 원영에게 무슨 일이 이미 있었나.
막내랑 핫식스를 마시면서 약쟁이로 추정되는 차량번호 조회요청서를 작성하고, 금융기관에 정보제공요청을 했다가 퇴짜 맞았다는 사건을 다 같이 머리 싸매고 있었다. 금융기관마다 계좌번호 자릿수도 다르고 아주 골치가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 네, 방배서 강력계입니다. '
유진의 자리로 걸려 온 전화가 받자마자 뚝 끊어졌다. 요새 누가 강력계 사무실까지 장난 전화를 하나, 지난번에도 두어 번 이랬던 거 같은데. 쯧... 혀를 차다가 나중에 발신자 정보나 찾아봐야겠다 해놓고는 귀찮아서 말았다. 분주한 오전 중에 김 반장이 손을 들어 유진을 불렀다.
" 안유진이, 너 내가 벌줄 거 있어. "
" 저요? "
" 너 막내한테 듣자 하니까 어깨 탈골 됐었다면서 왜 말을 안 하냐. "
유진은 바로 홱 하고 막내를 노려봤다. 막내가 슬슬 눈을 피하면서 모니터 아래로 190센티미터짜리 덩치를 욱여넣었다. 그러니까 그냥 길로 뛰어서 잡으라니까 그걸 굳이 몸을 던져서 범인한테 몸통 박치기를 하고 아주 자동차 위를 뛰어다니고 난리를 하셨어요. 몸통 박치기를 어깨로 했나 보지? 스파이더우먼도 모자라서 포켓몬스터냐? 유진몬이야?
" 빠지자마자 바로 끼웠습니다. 시정하겠습니다. "
" 개가 똥을 끊지. 당분간 넌 현장 금지야. 얌전히 짱박혀있어. "
" 아, 반장님. 사무실에 있으면서 전화나 받으라고요? 그건 진짜 고문이잖아요. "
" 누가 사무실에 짱박혀있으래? "
엥. 그럼 저 뭐해요? 유진이 눈이 동그래져서 김 반장을 쳐다본다.
" 장원영 신변 보호. 네가 좀 해라. "
유진은 경악한 표정으로 벌리고 김 반장 앞에 서 있었다.
" 지금 그거 시키시려고 일부러 어깨 탈골 얘기 하신 거죠? "
" 장원영이 방배산데. 그래서 관할서가 일단 우리야. "
" 아, 반장님... 아무리 그래도 경찰이 무슨 경호업체도 아니고... 그리고 저는 지난번에 자문도 갔잖아요. 이건 막내 시키세요. 막내가 장원영 좋아해요. "
" 너 말 잘했다. 자문을 네가 했잖아. 안면 있는 사람이 하는 게 백번 낫지. 우리 서에 장원영이랑 안면 있는 사람이 너 말고 누가 있어? "
틀린말은 또 아니라서 한숨만 앞에서 푹푹 쉬었다. 반항을 한다고 해보는데 씨알도 안 먹힐 분위기다.
" 우리 서 관할이고, 수사는 여청과에서 할 거야 우리 과에서 안 해. 우리는 지금 그 약쟁이 새끼 잡는 거도 정신없어. 넌 그냥 안면 있으니까 신변 보호만 하라고. 내가 전에도 얘기했다- 민중의 지팡이. 곰팡이 말고 지팡이. "
표정관리가 안돼서 입을 삐죽거리는 데 어쭈- 하고 김 반장이 눈을 부라린다.
" 습관성 탈구 되기 싫으면 말 들어라. 넌 어차피 당분간 밖으론 못 돌아. 얌전히 엉? "
까라면 까 상명하복 경찰한테 ' 안 해요. ' 같은 반항은 역시나 개뿔 소용도 없었다. 원영과 자꾸 얼굴을 마주해서 좋을 게 없었다. 이후 자문일정은 원영과는 거리가 멀고 죄다 제작사 질의응답뿐이라 만날 일이 없어져 내심 안심했었다. 원영이 직접 총기 배우는 건 관둔다 해서 다행이다 하던 차에 일이 더 커지고만 있는 것 같다. 예측된 범위만큼 고요하게 굴러가던 유진의 세계가 아슬아슬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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배우는 촬영이 있는 시즌에도 이런 행사를 원래 많이 다니나. 무슨 브랜드 팝업 행사가 있다고 성수동 어디로 신변 보호랍시고 유진은 경호원들을 따라나섰다. 정치인도 아니고 어차피 대부분의 경호는 고용되어있는 경호원이 다 하고 유진은 그냥 경찰 신분증을 매고 서 있었다. 주로 이런 출퇴근 길이 노출되는 행사에만 얼굴을 비추면 되는 경찰의 뱃지 보여주기용 외근이랄까. 그런 찐따 같은 스토커니 자칭 테러리스트니 뭐니 하는 새끼들한테는 경찰 끼고 다닌다 이런걸 말하는 것만으로도 미치는 효과라는 게 있어서 생기는 일인 셈이다. 팔자에도 없는 일을 하려니 괜히 어깨가 탈골은 되가지고 이게 무슨 일인가 싶다.
반짝반짝하네. 딱 떨어지는 숏 드레스를 입고 포토라인에서 사진을 찍는 걸 보는데 반짝반짝 하다는 게 딱 맞는 표현이었다. 확연히 다른 세계의 느낌. 드문드문 그런 원영과 눈이 마주쳤다. 마주치는 대로 보다가 이내 눈을 돌려서는 카메라를 든 군중들 틈이나 훑었다. 동그랗고 커다란 눈이 쉴새 없이 챠라라라락 소릴 냈다. 저런 사람들은 기자인가. 기자인 것 같지 않은 사람들도 꽤 많이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었다. 빨간 볼캡을 쓰거나 비니 같은 걸 쓴 걸 보니 기자들은 아니고 팬들인가. 단체로 저런 대포 같은 큰 카메라는 다 어디서 났을까. 정말 연예인들이 사는 삶이란 이런 수 많은 사람들에게 모든 것이 노출되고 기록되는 삶이구나.
아무 일 없이 빨리 잡아야 할 텐데. 무서워할 원영도 걱정이고, 언제까지 이런 다른 세계 틈에서 이러고 있을 수도 없었다. 좁은 차에 갇혀서 하는 잠복보다 이일이 더 좀이 쑤셨다.
경찰입니다- 하곤 스태프를 따라 들어가 이상한 게 있나 둘러보다가 요즘은 이런 브랜드를 수백씩 주고 입는 다니 정말 별난 세상이다 생각했다. 별다른 디자인이 없는 것 같은데 왼쪽 가슴팍에 알파벳 몇글자 박혔다고 자릿수가 달라지는 그런 옷들. 정말 연예인들 사는 세계란. 브랜드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잡지사 카메라들마다 인터뷰 영상을 찍는 원영을 보는 기분이 낯설었다. 구석 벽에 기대어 서서 보는 그 모습이 매우 손에 잡힐 듯 가까운 사람인 듯 아닌 듯. 하긴 이젠 가까운 사람은 아니긴 하지. 창밖으로 옅게 빗방울이 흩날리고 있었다. 알록달록한 우산이 인도 위로 하나 둘 씩 피어오르는 걸 내다봤다.
저런 작은 편의점 우산 하나를 나눠쓰고 대학로를 걸었던 적이 있었다. 누구 어깨가 더 젖는다는 그런 소릴 하며 아웅다웅 거리던.
' 나 이렇게 데려다주면 언니는 집에 또 언제가. 비 맞아서 감기 걸리면 어떡해. '
한 시간 거리가 아니라 그보다 더 한 거리여도 데려다 줄 수 있었다. 둘이 같이 걸어가고, 올 때는 정확히 반대 방향으로 혼자 한 시간을 넘게 걸어 돌아왔어도 너무나 쉽게 할 수 있는 걸음이었다. 그때 걸었던 길은 지금 창밖으로 보이는 성수동 골목보다 반치는 좁았을 거였다. 가로등도 더 드문드문하고 달빛도 채 들지 않던 더 좁고 추운 그런 길. 언제적 생각을. 비가 와서인지 쓸데없는 감상이 휘감아 오는 것 같았다.
신인상을 탈 때라던가 천만 배우가 됐다던가 그런 소식은 TV에서 금방 여기저기 퍼 날라 원영의 소식을 끊임없이 들을 수 있었다. 연말 연기대상에서 신인상을 받고 우는 걸 봤을 때는 코 끝이 좀 찡해서 용기를 내 축하 연락을 해보기도 했었다. 닿지는 않았지만 오히려 연락이 닿지 않아서 지금와 생각하면 다행이었다.
엄청 권위가 있다는 어느 영화제에서 상을 받은 것도 뉴스에 나오곤 했었다. 그때 인터뷰를 하던 중계 영상을 보고도 느꼈었다. 아, 너는 그 세계에 있어야 하는 사람이구나. 가는 길을 찾는 게 힘들었다 뿐이지 원영에게 꼭 맞는 옷 꼭 맞는 길이었다. 그때 원영에게 온 기회를 잘 잡아서 다행이었다. 정말 다행이야. 그때 헤어지자고 한 걸 후회하지 않는다고 했던 것은 혼자만의 합리화가 아닌 진심이었다. 원영이 더 위로 한 걸음 더 멀리 두 걸음 멀어질수록 더 잘했다고 여겼다.
원영을 집에 데려다주고 오던 그 언젠가 그 좁고 어두운 길은 아마 그 헤어짐을 대비해 미리 걸어 본 길인 것 같았다. 너는 그 곳에 입구에 데려다주고 나는 돌아오라는. 유진은 원영의 반대 길로 저벅저벅 걸어서 발을 땅에 붙이고 살았다. 담벼락을 넘어 뛰어다니면서 범인을 잡고 영수증 비용처리 결재를 올리면서. 가끔은 범인을 쫓다가 팔이 부러지고 주차된 자동차를 밟고 다니면서 추격전을 하기도 했다. 그리고 때때로 국밥집 벽면에 붙은 원영의 소주 광고 포스터를 보면서 국밥을 먹었다.
막내가 보여줬던 소주 광고 사진이라던가 스파이로 나왔던 영화 사진 같은 건 이미 다 봐서 알았다. 팬아저 라는 말이나 별다줄 그런 말은 몰랐지만.
선배님. 그 새끼 곧 잡힐 거 같습니다.
여청과 갔다 들었는데 영장쳤다고합니다.
그래, 힘들어 죽겠다.
장원영이 갑질합니까?
그렇게 안 봤는데 실망입니다.
?
역시 이래서 조상님들이 분칠한 것들 믿는 거 아니라고 하나 봅니다.
뭔소리야. 갑자기 왜 급발진.
좀만 더 힘내시지 말입니다.
막내에게서 들어온 문자가 다행이었다. 정말 곧 잡힌다니. 중간에 갑질이니 분칠이니 급발진해서 어이는 없었지만 결론적으로 곧 잡을 거 같단 말이었다. 분칠 한 것들 믿는 거 아니다... 조상님들은 어찌 저런 말을 만드셨지.
아무튼 조금만 참으면 된다. 조금만 있으면, 그럼 원영도 안전하게 꿈을 이뤄 행복한 예전 삶으로 돌아갈 수 있고 나도 다시 안전해 질 테니까.
어쩜 이렇게도 얼굴 볼 기회가 없는지. 배우랑 형사는 접점이랄 게 없는 세계여서 그날 국밥집을 박차고 나온 이후로는 유진의 얼굴 한 번을 볼 수가 없었다. 괜히 총기 다루는 걸 안 배운다고 했다고 후회란 걸 했다. 그냥 자문이든 배우는 거든 뭐라도 접점이 더 있었으면 그 핑계로라도 문자 하나 더 보낼텐데. 이후 뭘 물어볼 만한건 죄다 제작사 통해서 하는 통에 유진과 자문을 핑계로도 더 얼굴 볼 기회가 없어졌다. 밥은 이미 사버려서 다시 밥 산다는 말을 꺼내기도 뭐하고 그렇다고 그때 산 거 말고 다른 거 살게요 하기도 민망해서 휴대폰만 내려다봤다. 휴대폰으로 거는 전화는 제 전화라선지 받지도 않았다.
하도 명함을 보고 또 봤더니 휴대폰 번호며 사무실 자리 번호 이메일 주소까지 다 외워버렸다. 뭔 장난 전화도 아니고 사무실 자리 전화로 못 참고 전화를 걸었다가 ' 네, 방배서 강력계입니다. ' 하고 유진이 받는 거에 헉 하고는 바로 전화를 끊기도 했다. 그 전화가 뭐라고 또 심장이 어찌나 쿵쾅거리는지 그날은 그 전화 때문에 잠도 못 잤다.
가을이 짝사랑 모드로 처음부터 다시 해보라고 염치없어도 들이대고 작업도 걸고 그러라는데 데뷔 후엔 들이대는 거 거절만 해봤어서 스스로 해본 적이 없었다. 진짜 어떻게 하는 건데 그게. 기껏 하는 게 무슨 초딩도 아니고 사무실로 전화해서 막상 받으면 놀라서 후다닥 끊는 거나 하는 신세다. 행동은 짝사랑 모드로 체인지가 안되고 마음만 짝사랑 모드로 절절맸다. 원영은 유진을 신경 쓰기도 바쁜 와중에 스토커인지 뭔지가 가을이랑 회사 사람들을 또 신경 쓰이게 했다. 한 두 번 있는 일도 아니라 무섭긴 거녕 하필 이런 때에 이렇게 뭐냐고 속상했다가, 경찰에서 신변 보호랍시고 유진을 보냈길래 오히려 잘됐다고 유진이 오는 스케줄에는 유진만 눈으로 쫓아다니기 바빴다.
성수동 팝업에서 브랜드 관계자들과 대화를 나누고 둘러보다가 조명이 떨어지는 아래 디피되어있는 하얀 셔츠에 눈길이 닿았다. 이 브랜드에서 잘 나오지 않은 무지 디자인에 하얀 셔츠. 바로 옆에 유명 인플루언서가 입어서 화제라는 올블랙 셔츠도 있었는데 새하얀 셔츠에만 자꾸 눈을 빼앗겼다.
' 언니 나중에 경찰 되면 정복도 입어? '
' 임용 될 때나 승진 할 때 그럴 때 입지 않을까? 왜? '
' 그냥- 언니 셔츠 입고 그런 거 궁금해서. 잘 안 입잖아. '
' 나 임용되면 임용식 때 와서 보면 되지. '
임용 될 때나, 승진 할 때 입는다고 했었는데. 한 번을 못 봤네. 저 멀리 구석 벽에 기대서 창가를 내다보는 유진에게 슬쩍 몰래 대봤다가, 다가가서 아예 가슴팍에 셔츠를 들이밀었다. 이십 대 초반 그때처럼 일부러 어리게 굴면 오히려 유진이 봐줄지도 몰랐다. 조금 전까지 창밖을 보던 시선이 의아하게 원영에게 돌아왔다.
" 셔츠는 여전히 입을 일 없어? "
" 승진 할 때 정복 입어. 정복 셔츠. "
" 승진 언젠데? "
" 글쎄... 몇 년 뒤? "
" 그렇게 오래 걸려...? "
" 뭐, 특진하면 더 빨리 될 수도 있긴 한데. 그럴 가능성이 높진 않지. "
" 정복 잘 어울릴 거 같아서 궁금해. "
" 빨리 승진해도, 내가 정복 입은 걸 네가 볼 일은 없지 않을까. "
진짜 미운 말. 아무렇지 않게 사람 후벼파는 소릴 한다. 몇 년 뒤까지 어떻게 기다려 이런 생각이 저한테는 사치라는 걸 대놓고 저렇게 굳이 말로 알게 해준다. 왜 없는데? 입은 거 보고 싶어. 이런 말은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는 말이 된다.
내가 자신의 울타리 밖에 있다고 태연하게 고지하는 사람 앞에서 어떻게든 울어버리지 않고 버티려면 저도 아무렇지 않은 척 ' 그건 그렇네 ' 정도의 말이나 하고 낭창하게 돌아서야 하는 거였다. 아무 미련이 없는 것 처럼 가볍게 셔츠를 원래 자리에 걸어두었다. 그 셔츠에서 겨우 떼어낸 손을 꽉 말아쥐어서 손바닥으로 손톱이 파고들었다.
가면을 쓰고 살아서 내가 잘하는 거, 기어이 잘 해내야 하는 거. 표정 관리를 타고난 것처럼 자연스럽게 잘 하는데도 자꾸 유진이 그걸 못하게, 기를 쓰고 아등바등 용을 쓰게 만들었다. 원영씨 벽에 크게 사인 좀 해주세요. 관계자들이 친절하게 요청하는 거에 감정을 삼켜놓고는 양 입꼬리를 호선을 그려 웃으며 사인을 했다. 눈은 전혀 웃지 못하는 데도 문제가 될 리는 없었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밀면서 원영씨 하트해주세요- 할 때는 눈도 같이 얼마든지 웃을 수 있다는 걸 알았다.
곁눈질로 혼자 훔쳐보는 그 순간에도 유진이 절 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눈이 마주쳤다 싶으면 금방 다른 곳을 본다. 그렇게 돌아간 시선은 다시 원영에게 돌아오는데 얼마나 걸리는지 가늠 조차 할 수가 없다. 돌아올 거라는 확신이 없었다. 지독하게 따듯하고 다정해서 그 따듯함으로 마음이 절절 끓게 만들었던 안유진은 이제 조금도 다정하지 않다. 그 다정이 그 순간에 오롯이 저에게만 허락된 것이었음을 너무 늦게 알았다. 그 순간이 전부 다 지나가 버려서 이제는 저에게 조금도 허락 된 것이 없다는 것도. 다시 굳어지는 표정을 기를 쓰고 웃어내느라 뺨 부근이 조금 뻐근했다.
과거의 내가 지나치게 부러웠다.
잠복이 배우 신변 보호보다는 적성 같은데. 휘황찬란한 조명이 있고 포토라인이 선명한 원영의 곁은 눈이 부셔서 눈을 제대로 뜨기 어려울 지경이었다. 카메라 눈동자들이 여기저기 촤라라락 소리를 내는 곳 보다는 좁디좁은 구형 소나타 운전석에서 소시지 뜯어먹는 게 무조건 나은 것 같다. 잠복에 외근을 두탕 뛰었더니 빠르게 비번 날이 왔다. 마침 타이밍 좋게 원영도 스케줄이 없다고 외근도 오프랜다.
비번이라고 경찰서 앞 국밥집에서 늦은 점심을 먹다가, 넌 비번인데 왜 서 근처에서 알짱거려 병원이나 갔다가 늘어져 잘 것이지- 반장님 한테 잔소리나 들었다. 말은 곱게 안 해도 츤데레미를 풀풀 풍기면서 순대도 포장해 유진의 손에 들려줬다. 그 국밥집에서 파는 순대 중에 젤 비싼 병천순대로.
술을 즐기지 않는데도 오늘은 집 거실에 순대 포장 뜯어놓고 소주를 마셨다. 제로 소주가 요즘 유행이라던데, 다음날 머리도 안 아프고. 그 유행이라는 제로 소주도 원영이 광고하는 거였다. 그래서 차마 얼굴 박힌 소주병을 집으로 들고 오진 못하고 일반 소주를 마셨다. 평소엔 비싸서 병천순대는 안 먹고 맨날 찹쌀순대 먹는데, 내돈내산 아니고 누가 사준 거라고 손이 턱턱 갔다. 손가락으로 김이 모락모락 나는 순대를 집어서 입에 쏙 넣었다. 순대 하나 먹고 소주 한잔하고. 대중없이 쉬는 비번 날인지라 평일 오후에 볼 것도 없는 TV 채널을 돌렸다. 케이블 어디에 원영이 전에 출연했던 드라마를 재방송하고 있었다. 이거 참... 국밥집에서 좀 전에 국밥 먹을 때도 벽에 걸려있더니 집구석에 박혀서 소주를 마셔도 TV에 나오고 슈퍼스타 안 보고 살기는 쉽지 않네.
다른 채널로 돌렸는데 이번엔 무슨 영화 홍보차 원영이 나온 예능을 재방송하고 있었다. 온 세상이 장원영 재방송이다. 드라마 재방송, 예능 재방송, 머릿속에선 그 시절 재방송. 마주치기 전에는 TV에서 보고 이런 걸로 이렇게까지 뒤숭숭하지 않았는데. 역시 아무래도 자꾸 마주치는 게 문제로 작용하나보다.
예능에서 자음에 맞는 단어 말하기 하는 걸 보다가 ㅎㅎ 이라는 자음 제시어에 후회? 하고 말하는 걸 봤다. 원래 좌우명이 지나간 일은 후회하지 말자 뭐 그런 거였던 거 같은데. 안 그래도 출연한 국내 유명 코미디언이라는 여자 엠씨가 좌우명이 지나간 일은 후회하지 말자 아니었냐고 깐족대면서 원영을 놀렸다. 녹화하다가 후회하는 일 생기면 어떡할 거냐는 말에 다음에 더 잘 해야죠! 웃으며 대답하는 게 참 천상 연예인이다. 다음에. 그래, 다음에 잘 하는 거 좋지.
' 저녁 다음에 먹으면 안 될까? 일이 생겨서. '
' 언니, 우리 다음에 보자. 다음 주나 다다음주에. '
이상하게 입으로 넘기는 소주가 써졌다. 더 볼 것도 없는 TV는 그냥 꺼버렸다. 마신 소주병을 치우고 절반 쯤 남은 순대도 비좁은 빌트인 냉장고 안으로 넣었다.
뭐해?
쉬어. 비번이라.
뭐하고 쉬는데?
술먹고 이제 자려고.
나 가고싶은데 있는데 경호팀 부르기 좀 그래서...
언니가 같이 가주면 안돼?
나 술 마셨다니까. 매니저님한테 같이 가달라고 해.
지금말고 좀 이따가도?
나 잔다.
빨리 잠이나 자려고 침대에 누웠는데, 장원영이 '뭐해' 단 두 글자로 잠을 다 깨웠다. 어디를 가고 싶길래 경호도 못 데려간다 하고 매니저도 못 부른다 하는지. 근데 경찰은 왜 불러. 괜히 안 간다고 해서 위험하게 혼자 싸돌아 다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이미 깨버린 잠은 더 오지도 않는다. 대충 침대 머리맡 빨래건조대에 걸려있던 점퍼를 하나 걸치고 집 근처 한강공원을 향해 걸었다. 욱신거리는 어깨를 꾹꾹 누르면서 살얼음이 녹은 계절의 거리를 따라 걸었다. 술을 깰 겸 큰 대로를 끼고 걸어 한강 다리 빛이 너울대는 공원까지 30분을 걸어갔다.
처음 방배서 배정 받았을 때는 경찰서에서 가까운데 집을 구해야 하는데 하필 반포라서 집 값이 걱정이었다. 경찰서에서 10분 거리에 10평짜리 오피스텔을 보증금 8천에 월세 90만원 주고 구해서 역시 반포다 너무 비싸다 했는데, 정붙이고 사니까 한강공원을 걸어갈 수 있는 게 퍽 잘 구한 집이었다. 그 사이에 월세가 100만원이 되었어도 여기만 한 집이 없다 싶다.
직장생활을 이 정도 하면 다들 청약도 넣고 그런다던데, 맨날 어디서 담 넘는 추격전하고 차 안에서 단팥빵이나 씹느라 그런걸 알아보고 그럴 겨를은 없었다. 평범하게 사는 게 제일 어려운 것 같다.
한강이 바로 마주 보이는 공원 벤치에 앉아서 러닝을 하거나 산책을 하는 이들을 가만히 바라봤다. 밑창이 슬슬 일어난 운동화를 탁탁 털고, 습관처럼 귀엔 옛날 유선 이어폰을 꽂았다.
예나 지금이나 유선 이어폰만 써서 올드하다고들 그랬는데 요즘은 유선 이어폰이 레트로니 뭐니 다시 트랜드란다. 매번 충전해야 하는 걸 못 챙기는 탓에 쓰던 유선 이어폰인데 고장 난 시계도 하루 두 번은 맞는다고 갑작스럽게 유행 얼리어답터가 돼버렸다. 언제 샀는진 기억도 안 나는 데다 레트로라고 치기엔 지금 제 이어폰은 다 삭아서 너무 구닥다리였다. 그래도 시험 준비할 때부터 지금까지 오랜 시간 고장 한번 안 났다. 저의 책상 위에, 집 식탁 위에, 바지 주머니 속에, 침대 머리맡에 까지 제 자리를 꼬박꼬박 차지하는 애였다. 이 구닥다리 옛날 이어폰에 적응이 된 귀는 다른 새 이어폰의 음질이 아무리 좋아도 낯설어서 제대로 듣지도 못했다. 요즘 노랜 잘 알지도 못해서 한강을 보면서 그 구닥다리 유선 이어폰으로 시험공부 할 때 듣던 예전 노래만 주구장창 들었다.
한강 저 끄트머리로 윤슬이 흐르고 해가 슬슬 기울어졌다. 가끔 드문드문 멀어지는 노래를 들으면서 해 떨어지는 걸 보다니 정말 평화로운 한 때다. 이따 집 가기 전에 한강 라면이나 하나 먹고 가야지. 아니지 이 범죄의 왕국에서 범죄자 새끼들 다 잡아 처넣어야 하는데 쉴 때가 아닌데 지금. 평화로운 상념은 자꾸 저런 직업병 같은 생각이 들어서 오래가진 못 했다.
유진의 앞으로 모자를 깊게 눌러쓰고 마스크까지 올려 쓴 여자가 주춤주춤 다가왔다. 해가 다 지고 있는데 뭔 선글라스까지 끼고 있는지 너무 이질적이고 수상했다. 직업병이 도져서 수상한 그 여자를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훑었다. 나중에 혹시 진술해야 될 일이 생길까 봐 손목에 찬 워치로 시각도 확인했다. 머리에 쓴 베이지색 모자부터 선글라스에 마스크로 꼼꼼하게 다 가린 행색. 그 와중에 신고 있는 새하얀 운동화는 누가 봐도 명품브랜드다. 한강에 러닝이나 산책을 하러 나오면서 누가 저런 운동화를 신어. 패션은 사이비 신도 비스무레한데 운동화만 패셔니스타다. 걸친 저 야상인지 판초인지 뭔지 옷이 도대체가 무슨 패션인 건지 가늠도 안된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너무 수상쩍은 여자였다.
" 이거 지금 우연이야? "
노래 사이사이로 파고들어 오는 목소리가 아는 목소리여서 유진은 깜짝 놀라 귀에 꽂았던 이어폰도 빼고 벌떡 일어났다. 너무 놀라서, 장원영? 너 지금 근데 차림이- 말을 하려다가 걍 문장이 통째로 묵음 처리 됐다. 정말 놀라서 입도 못 떼고 머릿속으로만 말하고 절로 할 말을 잃었다는 거다. 겨우 놀란 걸 가라앉히고 입을 뗐다.
" ....뭐야? 왜 여기 있어? "
" 언니야 말로 왜 여기 앉아있어? "
" 난 집이 가까워서 산책 왔지. 너 근데... "
저 근데... 에 많은 의미가 담긴 게 전달이 됐는지 원영이 일단 조용히 하고 앉으라고 한다. 진짜 겁도 없이 불특정 다수 신변 불상의 시민이 많은 한강공원에 그것도 해가 뉘엿뉘엿 떨어지는 시각에 무슨 사고라도 나면 어쩌려고. 어이가 없어서 추가로 언성이 높아질 뻔했다.
" 여기가 신변 보호 받는 사람이 혼자서 저녁에 올 데는 아닌데. "
" 그럼 언니가 같이 있어 주면 되겠다. "
원영은 태연하게 놀란 유진을 당겨서 벤치에 나란히 앉았다. 하여튼 가끔 이렇게 대책 없이 굴었다. 어쩜 서른이 됐어도 똑같지. 유진은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그냥 건너편 한강이나 쳐다봤다.
저 한강 둔치 공원 끝에 보이는 농구장 위로 아직 해가 다 넘어가지도 않았건만 가로등이 하나둘 켜졌다. 조금 전에 소주를 한 병 마셔서 술 냄새가 날 것 같았다.
선글라스랑 모자랑 마스크까지 끼면 사람들이 거의 못 알아본다고 가끔 한강공원은 나온단다. 원래 이렇게 입고 다니진 않고 나도 이상한 차림인 거 알고 평소에 이런 스타일 전혀 아니니까 오해하지 말고 어쩌구 주절거리는 게 스스로 생각하기에도 이상한 차림이라고 생각하나 보지. 근데 오해할게 뭐가 있다고 저렇게까지 주절주절 변명을 하는 이 상황이 퍽 웃기다. 저도 모르게 살풋 웃었나보다.
" ...왜 웃어...? "
" 아니... 아무것도. "
" 좀 너무... 이상해...? "
야상인지 바람막인지 판초인지 뭔지 정체를 모르겠는 그 옷매무새를 주섬주섬 다듬는 게 더 웃긴데 이를 악물고 입꼬리를 눌렀다.
" ...아니. 괜찮아. "
" ...이상하구나. "
언니 목소리가 그래. 하는 퉁명한 목소리가 예나 지금이나 조그맣고 뾰로통한 게 똑같다. 마스크에 가려져 보이진 않지만 입이 댓발 나와 있을 거란 걸 알 수 있다.
" 아니 뭐... 체포 할 뻔했어. "
" 체포 할 뻔했다고...? "
" 패션테러리스트로. "
" 하- 진짜... "
형사들끼리 하는 농담을 습관적으로 해놓고 순간 아차 싶어서 좀 머쓱했는데 원영은 패션테러리스트 아니야 하고 새하얀 운동화로 발을 탁탁 구른다.
아무튼 엄청 수상해 보이긴 해도 장원영이라고 단박에 떠오르진 않았다. 장원영보다는 약간 사이비 신도에 더 가까운 꽁꽁 싸맨 차림이었다. 도를 아십니까? 이럴 말을 걸 것만 같아서 그 누구도 관심을 줄 거 같지가 않은 행색. 그러면서도 쫑알쫑알 산책 나가자고 경호나 매니저 부르는 건 너무 갑질 연예인 아니냐고 하는 말이 또 맞는 말이었다.
" 경호팀이랑 매니저는 갑질이라 못 부른다면서 나한테 연락을 왜 했어. "
" 언니는... 언니니까. "
" 경찰 함부로 막 오가가라 하면 안돼. "
" 경찰이라서 연락한 거 아니고 언니라서 연락한 거야. 어차피 안 된다고 했잖아. "
" 앞으론 친구 불러서 다녀. 혼자 다니지 말고. "
나 부를 친구 없어. 하고 바닥을 운동화 밑창으로 슥슥 쓰는 걸 가만히 내려다봤다. 얼마나 밖을 돌아다니지 않으면, 아까 너무 이질적으로 새것 같다고 생각한 새하얀 운동화는 밖을 잘 돌아다니지 않는 걸 재차 말해주는 듯했다.
" 친구가 왜 없어. "
" 몰라. 집순이라 그런가... 스케줄 많아서 약속에도 잘 못 나가니까, 언젠가부턴 아예 부르지도 않던데. "
" 연예인 친구들이랑 놀면 되지. 연예인들은 다 연예인 친구들이랑 노는 거 아닌가. 이런데 산책 나올 때 같이 나오면 좋잖아. 다 비슷비슷한 빌라 살고 그러드만. "
" 연예인 친구도 없어. "
일반인 친구도 연예인 친구도 다 없다고 하는데, 순간 약간 말문이 막혔다.
" ...인스타에 같이 사진 찍고 그런 사람들 많이 있잖아. "
" 그거는 그냥 스케줄 같이 했으니까 피드용으로 찍는 거지 친구 같은 거 아니야. 근데 언니 내 인스타 봤어? "
" ... 나도 인스타 보고 살아. "
너 인스타도 모르는 사람은 엄청 시대에 뒤 떨어진 거 아니야? 유진은 순간 구구절절 변명하는 것 처럼 보일까 봐 걱정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겨우 산책도 같이 나올 사람이 없다는 말에 걱정이 돼서 인스타 얘길 꺼낸 게 괜한 짓이었다.
" 유선 이어폰 쓰면서 시대에 엄청 앞서가나 봐. "
" 이건 원래부터 그냥 충전하기 귀찮아서 쓰는 거고. "
" 외로워. "
많이. 말을 자르면서 들어온 저 문장 때문에 유진은 말문이 막혔다. 금방 다시 입을 뗄 수 있었던 아까와 다르게 뒤에 할 말을 이을 수가 없었다. 외롭다니. 모자에 마스크에 선글라스까지 얼굴을 다 가리고 있어서 원영의 얼굴이 조금도 보이는 게 없는데도 덤덤한 그 목소리가, 한강을 보는 옆 모습이 그 자체로 외로워 보였다.
네가 왜. 아니지 이런 생각을 내가 왜. 어련히 알아서 잘할까. 전에 막내한테 듣자 하니 원영은 알잘딱깔센의 대명사로 불린 댔었다. 알아서 잘 딱 깔끔하고 센스 있게 그런 거란다. 알아서 잘하고, 야무지고 그렇다고 그래서 업계에서 스태프들이 걱정할 거 하나 없다고 하는 그런 연예인이라고 했었다. 장원영이랑 일하면 너무 프로 오브 프로라 스태프들이 칼퇴 할 수 있어서 다들 장원영이랑 일하고 싶어 한다고. 출연한 작품만 알았지, 원영이 사람들 사이에서 저렇게 평가되고 있는 이미지인 줄은 몰랐다. 당연하다고는 생각했다. 예전에도 원영은 워낙 알아서 잘했으니까. 그때도 자기가 할 수 있는 거 자기가 해야 하는 걸 알아서 찾아서 잘 하고 기회도 잘 잡았다. 자기가 좋아하는 일이고 좋아하는 삶이니까 어련히 알아서 잘할 텐데 괜한 생각을 한다.
" 노래 같이 들으면 안돼? "
나 이어폰 없어- 하는 말에 이어폰 한쪽을 원영에게 내밀려다가 망설였다. 진짜 오래된 옛날 이어폰이어서 검은 고무 패킹이 드문드문 삭아있었다. 고장 나지 않아서 계속 쓰다 보니까 브랜드명이 마킹되어있던 고무 패킹은 이미 다 삭고, 빨간 줄은 여기저기 색이 바래있었다.
" 이어폰이 좀... 지저분해. 오래돼서. "
제 손에 들린 이어폰 한쪽을 원영이 가만히 내려다봤다. 골동품 같은걸 써서 이상하다고 생각하나 아니면 너무 지저분해서 쓰기 싫을지도.
" 쓰기가 좀 그럴 거 같은데..."
" ...괜찮아. "
기분 탓인지 괜찮다고 말하는 원영의 목소리가 조금 떨린 것 같았다. 선글라스에 마스크까지 한 얼굴은 전혀 보이지 않아서 그냥 그렇게만 들리는 건지 뭔지 정확히 알 수가 없었다.
한쪽 이어폰을 꽂은 원영의 옆모습을 슬쩍 쳐다봤다. 원영의 선글라스에 비친 주황빛 해넘이 너머로 한강 물이 흔들거리고 저 먼치에 잠수교가 하나둘 조명을 밝히고 있었다. 이 시각이면 슬슬 강으로 호선을 그리며 분수를 뿜어야 하는데 지금은 아직 따듯한 봄이 오기 전이라 잠수교 분수는 종적을 감췄다.
원영이랑 같이 앉아 있어서인지 자꾸만 잠수교에 호선을 그리던 주황빛 파란빛 보랏빛 분수 아래를 걷고 있는 것만 같다. 야외무대에 공연을 보다가 같이 라면을 먹던 기억 따위가 슬금슬금 유진의 기억 틈을 비집고 들어온다. 한강에서 라면 기계 처음 써본다고 둘 다 허둥거리던 기억 같은 거. 물을 내가 붓는 거야 기계에서 나오는 거야? 이런 말을 하던. 한강라면이 한강에서 먹어서 한강라면이야 아니면 한강처럼 물이 많아서 맹탕이라고 한강라면이야? 이런 말. 저의 의문에 원영은 한강에서 먹어서 한강라면이라고 했고, 저는 물이 너무 맹탕이라서 한강라면인 것 같다고 했었다.
그런 조각난 기억들은 저리로 휘저어 보내고는 다시 한강을 보면서 나눠낀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었다. 그 노랫소리 틈으로 아주 작은 목소리. 아까 원영의 목소리가 떨린 것 같다고 생각한 건 착각이 아니었다고 알려주고 있었다. 귓틈으로 파고드는 건 더욱 더 떨리는 아주 작은 목소리였다. 마치 들릴 듯 말듯, 어쩌면 유진이 못 듣길 바라는 듯한 그런 작은 혼잣말.
" ...이 이어폰 내가 사준 건데. "
아, 그랬던 것 같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