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채찬란.
한강에 위치한 인공섬인 서래섬에서 매년 봄에 열리는 유채꽃 축제 유채찬란. 5월 초에 노란 들판이 일렁이게 하는 유채의 개화를 위해 가을부터 파종을 한다고 했다. 원영은 저 멀리 보일 듯 말듯 한 서래섬을 가만히 바라봤다. 아직 온전한 봄이 오려면 시일이 좀 남았으니까 유채꽃이 피기엔 너무 이르다. 그런데도 자꾸 저 앞으로 시선이 가는 것은 옆자리에 딱 한 뼘 떨어져 유진이 앉아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앞에 있는 서래교만 건너가면 그때처럼 같이 걸을 수 있을 것만 같기 때문이다. 귀에 꽂은 오래된 이어폰에서 나는 아주 작고 흐린 옛날 노랫소리가 자꾸만 그때처럼 느껴지게 한다. 한 쪽씩 나눠끼고 있어서일까.
유진과 같이 걸었던 서래섬에 그 길은 당시엔 유채꽃이 아닌 메밀꽃이 피어있었다. 가을에는 여기에 메밀꽃이 핀다고 그래서 가을엔 메밀꽃 축제를 하고, 그리고 그 쯤 유채꽃 파종을 해야 내년 봄에 유채꽃이 노랗게 핀다고. 저는 조금도 모르는 토막 상식 같은 걸 유진이 알려줬었다. 길게 수양버들이 늘어지고 아직 팝콘을 피우려면 한참 남은 파릇한 이팝나무 아래를 걸으면서 우리가 나눈 이야기가 아직 저기 있었다. 내년 5월에 '유채찬란'에 오면 되. 그땐 유채꽃이 피거든. 계절마다 꽃도 보고 그러면 연기하는데도 도움 되고 그러지 않나? 응, 다음에 우리 같이 오면 너무 좋겠다.
다음에 같이 오자고 했던 '유채찬란'인지 유치찬란인지 하는 그 서래섬의 축제는 그 다음에 아예 같이 올 수 없어졌다. 겨울에 제가 너무 당차게 헤어짐을 받아들인 탓이다. 생각해보면 연기에는 영감이니 뭐니 하고 도움이 돼도 공시 준비하는 사람한테는 한 푼 도움 안 되는 아까운 시간이었을 텐데. 그 시절의 어린 장원영은 유진이 자신에게 내는 시간이 얼마나 귀한 것인 지 미처 몰랐었다.
몇 년 뒤에 첫 대상을 받고서 집을 반포에 서래섬이 내려다보이는 데 얻었다. 창밖으로 내려다보면 서래섬이 보여서 봄에는 노랗게 유채꽃이 물든 게 언뜻언뜻 보이고, 가을엔 하얗게 메밀꽃이 흔들리는 게 흐리게 보이는 집으로. 집 밖에 거의 다닐 수도 없는 삶을 살면서 테라스에 앉으면 딱 흐릿한 정도로 볼 수 있는 게 맘에 쏙 들었다. 선명하진 않게, 흐릿하고 언뜻 거기 있는 듯 없는 듯하게. 너무 선명하면 배가 아파서 견딜 수 없을 것 같았다. 가을이 한강뷰라서 그 집을 계약하냐고 차라리 남향에 한남동이 낫지 않냐고 한 말에는 그냥 아파트 이름이 맘에 들어서라고 엉뚱한 대답을 했다. 그때 여기다 집을 한 게 얼마나 잘한 일이야. 이렇게 우연히 한강에서 마주치기도 하고.
" 우리, 서래섬 왔던 거 기억나? "
원영은 큰 용기를 내 물었다. 아주 절절한 물음. 염치가 없어서 저 한마디를 꺼내는데도 수 많은 생각을 했다. 원영이 사준 이어폰을 아직까지 쓰면서 원영이 사줬다는 사실도 잊어버린 유진이 어떤 답을 할지 가늠이 되지 않았다. 나는 너무나도 사무치게 기억하는데 유진은 잊어버렸을 수도 있으니까. 만약 잊어버렸다고 하면 이 물음으로 자투리라도 기억이 났으면 하는 마음으로, 이런 말을 하는 내 마음이 혹시 들킬지도 모르는 걸 알면서 꺼내는 그런 물음이다. 너무 아프고 싫은 기억이라서 잊어버리는 게 차라리 나아서 잊어버렸다고 하면 이번에도 원영이 이기적 이어지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다 들켜도 좋다고 이기적이라고 욕을 해도 좋다고. 지금이 지나면 이걸 물어볼 기회가 다음엔 없을 것 같아서 큰 용기를 내 묻는 거다.
자꾸 다음으로 미루었던 것들이 이젠 다음이 없다는 걸 안다. 다음으로 미뤘던 그 식사 다음으로 미뤘던 그 약속. 당연히 다음이 있을 거라고 생각한 그것들 중에 그 어느 것도 지금 원영에게 허락된 게 없었다. 이제 유진과는 그때는 쉽게 미뤘던 밥 한 끼를 먹는 것도 어려워졌다. 그래서 이제는 다음이 없을 것 같은 마음으로 용기를 쥐어짜 내서 물었다.
" 응, 메밀꽃 보러 왔었던 거 같은데. "
" 우린 그때 가을에만 와서, 봄에 유채꽃을 같이 못 봤네. "
" '유채찬란' 아직 5월에 할걸? 그때 보러와. 매니저님하고 오거나 그러면 되지. "
언니랑 오고 싶어. 염치가 없어서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는 말을 속으로 두어번 한다. 헤어진 연인의 대화. 언뜻 들으면 누구보다 언니 동생으로 잘 지내는 것 같이 담담하게 대화란 걸 한다. 이미 한번 울타리 밖에 있는 걸 체감하고 나니까 용기가 나려다가 말고 이만큼 다가서다가 말고 그렇게 작아지고 만다. 가을이 짝사랑 모드로 그냥 밀어붙이랬는데. 그때도 널 그렇게 사랑했던 사람이면 언젠가 다시 사랑하지 않을까 이런 말을 동아줄 처럼 쥐고서도 쉬이 되지 않아서 망설인다. 매번 유진은 태연해서 다시 날 사랑해줄 것 같지 않다. 아까 기억나냐고 물으면서 가진 용기를 다 쥐어짜서 써버렸는지 두 번째는 더 당돌해지지가 않는다.
" 비번 때 주로 이렇게 한강에 나와? "
" 그때그때 달라. 한강은 뭐... 비번 아니어도 자주 나와. 달리려고도 오고... 많이 뛰어가지고. "
" 비번 아닌 날도 뛰어? "
" 응, 그냥 달리는 건 기본이야. "
밑창 끝이 조금 뜯어진 유진의 운동화를 내려다본다. 많이 뛴 흔적일 것이다. 아직 신고 다닐 수 있으니까 조금 뜯어졌어도 계속 신는 게 안유진 답다. 운동화도 이어폰도 고장 나지 않으면 버리지 않는 안유진. 그리고 그런 안유진한테 헤어지자는 말을 들은 나.
" 다음 비번은 언제야? "
" 글쎄. 확인을 안 해봤는데 아직. "
" 언제 알 수 있어? "
" 어... 때마다 달라서. 중간중간에 서로 바꾸기도 하고 그래서 대중없어. "
벤치 끝에 손가락만 꼼지락 거리면서 겨우 하나씩 하나씩 질문을 던졌다. 다음 비번 날짜 알면 그때 한강에 맞춰 나와볼까 했는데 쉬이 알 수가 없다. 대화를 하다 보니 대화랄게 없는 사실상 일방적인 질문들이다. 원영이 일방적으로 묻고, 유진이 미지근하게 답을 하는. 그렇다고 또 명확하게 대답해주는 것도 아닌 정말 미지근한 대답들. 대답이 하나같이 때마다 다르고 잘 모르겠고 그런 식이다.
" 너 집에 언제 갈 거야? "
" 언니는? "
" 난 한강라면 먹고 갈랬는데. 상황 봐서 그냥 너 데려다 주거나 그러려고. "
" 데려다주게? "
" 어, 신변 보호 중인 사람이 밖에 막 돌아다니는데 어떻게 그냥 모른 척 가. "
겨우 한마디 원영에게 묻는다는 게 집에 언제 갈 거냐는 말이다. 그래놓고서는 한강공원은 신원불상자가 너무 많아서 위험하다고 꼭 데려다주겠다고. 신원불상자 저런 단어는 대본에서도 거의 못 본 단어다. 저런 말을 쓰는 것 또한 너무나 경찰로 사는 안유진답다. 지금 걱정해주는 거라고 생각하면 이것도 너무 사치인가. 그냥 경찰로 최선을 다하는 그런 걸 사치스럽게 걱정이라고 혼자 생각하기로했다. 손을 들어 올려 한강공원에서 바로 보이는 스카이라인을 뽐내는 아파트 단지를 가리켰다.
" 나 저기 살아. 금방 가. "
" 아, RIVERSKY 살아? 슬슬 걸어도 10분이면 가겠네. "
" 언니는 어디 살아? "
" 난 경찰서 근처. 여기서 30분은 더 걸어가야 해. "
자기 집은 손으로 가리킬 수도 없다고, 유진이 저쪽 어딘가 건물이 솟아있는 블록을 향해 허공에 손짓을 한다. 방향이 꽤나 원영의 집과 반대다.
" 지금 집에 갈 거야? "
" 언니 라면 먹는다며. "
" 그냥 가자, 데려다줄게. 너 마스크 내리면 사람들이 바로 알아볼 거 아니야. "
" 언니 먹을 때 그냥 앞에 앉아있으면 되지. "
" 나 누구한테 먹는 거 관찰 당하는 취미 없어. "
" 그래도..."
" 괜찮아. 갈 거면 빨리 가자. 더 어두워지면 더 위험하니까. "
가로등이 다 켜진 한강 둔치 공원길을 걸었다. 바스락 하고 자잘한 모래들이 밟혀 부서지는 소리가 난다. 강변의 양편으로 채 한 송이도 피지 않은 파릇한 꽃줄기들이 흔들린다. 그리고 유진과 나란히 걷는 원영의 마음도 마구잡이로 흔들린다.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 한 마디를 안 하고 걷고있어도, 지금 이 길만 끝나지 않는다면 나란히 걷는 이 순간이 영원할 것만 같다.
서래섬이 아니어도 그냥 집으로 돌아가는 길을 걷는 것도 이렇게나 좋다. 분명 이따 잠에 들지 못 할 것이다. 천장이고 꿈이고 다 여기로 돌아와 걷게 될게 틀림없었다. 유진은 공원에 하얀 간판을 켠 편의점이나 보고 걸어서 저한테 전혀 집중하지 않아도, 단 한 마디가 없어도 다 괜찮았다. 끝나지 않길 바란 것이 무색하게도 눈앞에 신호등이 두어개 지나가고, 커다랗게 입을 벌린 아파트 정문에 둘이 마주 섰다.
" 들어가. 들어가는 거 보고 가게. "
" 언니 집은 여기서 얼마나 가야 해? "
" 글쎄, 뭐 한... 30분? "
난 저쪽으로 30분 정도 가. 유진이 손을 들어 길 한 쪽을 가리켰다. 인적이 제법 드물어진 길 안쪽으로 구불구불 골목이 나오는 곳이다.
" 내가 데려다줄게. "
" 나를? 왜? "
" 맨날 언니가 데려다줬으니까. 나도 한 번 데려다줄래. "
" 난 신변 보호 대상이 아니야, 넌 신변 보호 대상이고. 얼른 올라가. "
" 나 장원영인 거 몰라봤다며. 완전 꽁꽁 싸맸잖아. 다른 사람들도 못 알아볼 거 아니야. "
" 그래도 안 돼. 위험해. "
" 언니도 위험하잖아. "
피식 웃고는 안된다고 고개를 저으면서 말하는 유진을 가만히 본다. 다음번엔 우연히 만나는 이런 일은 다시 없을 수도 있는데. 헤어지기 싫은 마음이 저 안에서 다시금 용기란 것을 짜 올린다. 궁색한 말이든 어이없는 말이든 뭐라도 한 마디를 기어이 하게 만든다.
" 그럼... 라면 먹고 갈래? "
아차, 이건 말이 좀 불순해 보인다. 말을 해놓고도 스스로 너무 놀라서 손을 저으면서 다시 서둘러 뒤에 말을 허둥지둥 붙였다. 귀가 뜨거워 지고 있는 것 같다.
" 아니... 이상한 거 아니고. 언니 아까 한강라면 먹고 싶다고 했는데 나 때문에 못 먹었잖아. "
" 이상한 거 뭐? "
" 어? "
선글라스 때문에 표정이 안 보이는 게 다행이었다. 너무 당황해서 눈만 동그랗게 뜨고 유진을 보는데, 유진도 응...? 하고 동그란 눈으로 원영을 쳐다본다. 진짜 민망해죽겠다. 얼굴이 새빨개지고 귀 끝이 벌겋게 올랐을 텐데 모자랑 마스크 때문에 안보일 거라고 혼자 속으로 어르고 달랬다. 원래 잘 빨개지는 원영과 달리 잘 빨개지지 않는 유진은 정말 이상한 생각을 안 해서 얼굴 색이 똑같은 건지 아닌지 알 수도 없다. 저 혼자만 이상한 생각하고 얼굴이 달아오른 걸까 봐 속으로 민망함 만 더 커진다.
" 아무튼... 라면 먹고가라구. 데려다주지도 못 하는데 내가 너무 미안하잖아. "
" 괜찮대도. "
" 언니는 자꾸 사람 빚진 기분 들게 하는 게 취미인가 봐. "
" 나 참... 빚 질 것도 많다. 라면 그게 뭐라고 별게 다 빚이네. "
네 집에 라면이 있을 것 같지도 않은데- 그냥 집에 빨리 가게 해주는 게 나한테 좋은 거야. 유진의 말이 틀린 게 하나 없다. 집에 라면 같은 걸 사놓은 적이 없는 것 같다. 데뷔한 이후로는 라면같이 자극적이고 튀긴면 그런 건 한 입도 입에 안 댔다. 예능 찍을 때나 두어번 먹는 시늉 하고 마는 정도. 매일 식단을 하고 오후 6시 이후로는 입안으로는 그냥 아무것도 안 넣고 살았다. 가끔 이른 시간에 데리러 오는 매니저를 위해서 간단하게 뭐 간식거리를 사놓긴 해도 라면은 진짜 없었던 거 같다. 그래도 그냥 못 이긴 척 올라가 주면 다른 걸 해줄 생각이었다. 집에 있는 게 유진의 입맛에 하나도 맞지 않는 것들 뿐이어서 지금은 제대로 떠오르진 않아도 어떻게든 뭔가 수를 쓸 생각이었다. 그런 생각은 씨알도 먹히지가 않고 어리숙한 수를 뾰족하게 관통 당하고 만다.
" 밥은 시간 없어서 산다고 해도 못 사잖아. 그러니까 그냥 라면 끓여준다고. 안돼? "
부정청탁금지법인지 뭔지 그런 거에 라면 끓여주는 건 안 걸리는 거 아니야? 그것도 걸려? 라면은 3만원 안 하잖아. 내 노동력도 돈으로 환산해서 치는 거야? 다른 사람에겐 부려본 적 없는 고집을 계속 부린다. 부러 어른인 척 하면서 살아서 해본 적 없는 어리광을 빼다 닮은 고집이다.
" 안 먹고 간다고 하면 안 올라 갈 거야? "
" 어, 그럼 데려다주게 해주든가. 저쪽이라고? "
아까 유진이 가리킨 방향을 기웃거리자 유진이 쓱 그 골목 안을 돌아보다가 몸으로 가로막고는 다시 원영을 본다. 조금 망설이는 것 같기도 하다. 다시 한참을 원영을 보다가 공동현관도 보는데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가 없다. 기어이 안 올라가겠다고 하면 더 고집을 부릴 수도 없어서 체념하려는 찰나였다.
" 알았어. 올라가 그럼. "
" 진짜...? "
목소리가 사뭇 놀란 티가 났는지 오히려 얼른 들어가라고 채근했다. 생각보다 너무 빠르게 그런다고 해서 좋으면서도 당황스럽고 또 떨리고 감정이 널을 뛴다. 맘 바뀌기 전에 빠른 걸음으로 유진을 앞장서 공동현관을 통과했다. 유진은 공동현관도 쓱쓱 훑어보고 아무렇지 않게 엘리베이터를 따라 탔다. 엘리베이터가 고층부로 올라가는 내내 할 줄도 모르는 요리랑 메뉴랑 별 생각이 다 든다. 단 둘이 탄 엘리베이터에서 유진은 태연히 여기 몇층까지 있어? 엘리베이터 전 층 공용이야? 이런 질문을 하다가 두어층 더 눌러본다. 민망해서 장난을 치는 건지 그런 유진을 신경도 채 못 쓰고 없는 정신으로 전 층 공용이야 겨우 답하고는 머릿속으로 오만 생각을 한다.
진짜 어떡해. 어떡하지? 라면은 진짜 없을 텐데. 집에 있는 게... 양배추, 계란, 도토리묵, 토마토, 사과, 땅콩버터... 하, 그 와중에 사과랑 땅콩버터는 가을이 땅콩버터에 사과 찍어 먹는 거 맛있다고 사 들고 온 거다. 라면이나 좀 맛있어하지. 괜히 가을은 잘못도 없는데 원망스럽다. 가을 언니가 라면 좋아했으면 그때 라면 사 들고 왔을 거 아니냐고 그럼 집에 라면이 있을 텐데.
중앙 엘리베이터에서 복도를 끼고 한층에 딱 두 세대가 사는 아파트. 바로 마주해 있지는 않아서 나름 프라이버시가 보호된다고 연예인이며 정치인들이 꽤 산다는 아파트 답게 두 세대가 너르게 공간을 두고 떨어져 있었다. 1732, 단 네 자리를 누르고 띠릭- 열리는 현관문을 열었다.
" ...비밀번호 바꿔. "
몇 글자 되지도 않는 말이 심장을 떨어지게 한다. 저 말은 굳이 가리지 않아서 1732인걸 보고 하는 말이겠지. 채 안으로 들어서지도 못했는데 현관에서 울 것 같은 표정으로 유진을 보게 된다. 너무 단호하게 바꾸라고 하는 게 안 그래도 울타리 밖에 있는데 밖이다 못해 아주 저 멀리 내쳐져 버리는 기분이다. 마스크를 쓰고 있는 게 얼마나 다행인지. 아니면 지금 제 표정이 너무 울먹여서 그걸 보는 눈빛을 못 참고 기어이 울어버릴 것만 같다.
" 왜...? "
바꾸기 싫어. 언니는 안 써도 내가 쓸래. 혼자 쓰는 것도 안 돼? 언니는 다 괜찮은지 몰라도 난 안 괜찮아. 혼자라도 계속 쓰고 싶어. 목 끝까지 찬 말을 하지는 못하고 겨우 울 것 같이 물었다. 지금 하나부터 열까지 다 미련으로 후회로 가득차서 이 번호라도 붙들고 싶은 걸 대체 어떻게 할까.
" 소리 들어보니까 네 자린데. 네 자리는 너무 위험해. 여덟자리는 되어야 해. 기왕이면 일주일마다 바꾸고. "
아, 번호를 본 건 아니구나... 저 멀리 크게 내친 건 아니라고 안도했으면서 그러면서도 내가 이 번호를 쓰는 걸 유진이 아는 게 더 좋은 건 아닐까 그런 생각을 또 한다. 참 사람 마음이 간사하지. 조금 전에 내쳐진 것 같은 기분에 순간 주저앉을 뻔했으면서도 그렇다. 자꾸만 울 것 같았다가 금방 살살 녹았다가 마음을 주체할 수가 없다.
" 안 들어가? "
" 어... 들어와. "
정신이 하나도 없이 허둥지둥하면서 유진을 집안으로 들였다. 제 마음이 너무 낯설고 간지러웠다. 유진은 원영을 자꾸만 이십 대 초반 그때만큼 어리고 철없게 만들었다가 다시 서른 살 죄인을 만들었다가 혼을 쏙 빼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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형사의 촉 또는 직업병이라는 건 타고나는 건 아니다. 촉이라고 해야 할지 직업병이라고 해야 할지 정확히 뭐라 해야 할 지는 모르겠으나, 우연이 몇번인지 이질적인 게 몇번인지 그런걸 세는 것 또한 직업병이라면 직업병일지는 모르겠다. 어려서부터 관찰력이 좋았던 건 아니었는데 그냥 이 바닥에서 구르다 보니까 절로 관찰력이라는 건 경험치처럼 쌓이고 늘었다. 특히 이질적인 것에 대한 관찰력은 눈에 띄게 늘었다. 그런데도 함부로 그 촉인지 직업병인지 뭔지를 뽐낼 수 없는 것은 틀릴 때도 종종 있기 때문이다.
지하철 코인락카 앞에서 주머니에 손을 꽂고 전화를 하는 어슬렁거림이 이질적이라 거슬려서 말을 걸었을 때 그게 보이스피싱 수거책인 경우도 있지만, 괜히 네가 뭔데 사람을 범죄자로 의심하냐고 멱살이 잡히기도 한다. 그래도 반복되는 우연이라거나, 반복되는 이질감은 의심하게 된다. 보통 사람들은 우연이 세 번이면 인연이라고 한다던데, 형사들한테는 우연이 두 번만 되도 사건이다.
그 사람은 이질적이었다.
그건 첫 번째 우연이자 첫 번째 이질적인 것이었다. 원영은 전혀 몰랐으나 유진의 눈에는 보였던 첫 번째 이질감. 원영의 집으로 10여분을 걸으면서 시선을 둔 하얀 편의점 옆에 파라솔 아래 앉아 라면을 먹던 사람. 마스크를 써서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어도 성수동 팝업에서 본 커다란 카메라를 들고 있던 빨간 볼캡을 쓴 사람 이랑 비슷하다고 생각했다. 우연이겠지. 그러나 이질적인 건 여전하다.
한강에 러닝하는 차림도 아닌 이가 혼자 와서 라면을 먹는다. 그것도 마스크를 끼고. 젓가락질을 분주히 하는데 면발을 들어 올리기만 하고 마스크를 내려서 진짜로 먹진 않는다. 언뜻 봐도 라면은 그득하게 종이 그릇에 가득 차 있다. 끓인 지 시간이 좀 지나서 퉁퉁 불은 채로.
이 계절, 꽃가루 알러지기 창궐하지도 않는 시점에 마스크를 굳이 쓰고 라면 먹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그 확률은? 퉁퉁 불때까지 먹지도 않고 먹는 시늉만 하는 건 왜 일까. 누굴 기다리나? 아니면 라면이 막상 끓여놓고 보니까 맛 없을 거 같아서? 이 우연은 처음이기 때문에 우연이겠거니 하게 되는 것이다. 그 빨간 볼캡이 국내 유명 브랜드여서 누구나 하나쯤은 가지고 있다는 유명템이니까. 그래 뭐, 기우겠거니 괜히 원영 때문에 더 예민하게 직업병이 도저가지고 아무렇지 않은 상황을 또 거슬려 하는구나 하는 것이다. 이상하게 예민이 극에 달해서 주변에 하나같이 거슬리는 게 눈에 들어온다.
그리고 두 번째 우연과 두 번째 이질적인 상황은 이제 의심을 하게 되는 것이다.
원영의 아파트 정문. RIVERSKY 하고 커다랗게 노란빛을 번뜩이는 로고 아래서 대화를 하다 ' 라면 먹고 갈래? ' 이런 말 때문에 정신이 없어지고 속에서 이상한 울컥거림 같은 게 밀고 올라와 목이 빨개지는 것 같았다. 잘 안 빨개지는 체질인 게 다행이다. 다 헤어진 마당에 이런 생각은 왜 드는 거야 혼자 속이 헛헛하던 때였다. 그러다 다시 돌아본 정문 옆 골목 입구에 같은 빨간 볼캡을 보고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가로등 두 개 정도 채 떨어지지 않은 곳에 아까 베이지색 점퍼랑 다른 카키색 점퍼 차림의 빨간 볼캡을 쓴이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다른 사람인가? 워낙 국민템인 볼캡이어서 하도 많은 사람들이 쓰고 다니니까? 그 사람이 통화를 하면서 몇 걸음 가까이 왔을 때 같은 사람일 수 있는 가능성을 점쳤다. 위에 걸친 점퍼는 아마도 리버시블이겠지. 그렇지만 운동화는 바꿔 신을 수가 없다.
원영을 가리고 서서 우연과 이질감을 되짚어 본다.
한강 편의점, 원영의 아파트 정문. 같은 빨간 볼캡. 우연이 두 번이면 사건이다. 이질적이던 마스크, 아까 그 편의점에서 여기까지 약 8분 거리. 그릇에 가득 차 있던 라면을 다 버리고 정리까지하고 빠른 속도로 8분 거리를 따라잡아서 왔다. 그리고 굳이 그 사이에 리버시블 점퍼를 바꿔서 다른 사람인 척을 한다.
물론 그냥 국민템을 즐겨 착용하고 감기 기운이 있어서 마스크를 썼을 수도 있다. 하필 혼자 한강에 나가서 라면을 한 젓가락도 안 먹고 뒤적거리다가 퉁퉁 불렸으며, 걸음이 빨라서 여기까지 빨리 걸었고, 패셔너블해서 리버시블 점퍼를 그 8분도 안되는 사이 카키로 바꿔입은 이 동네 사람일 수도 있다는 얘기다. 아니면 전부 그냥 예민해진 유진의 똥촉이고 둘이 전혀 다른 사람일 수도 있다. 그래도 지금은 최악의 상황일 때를 가정해서 행동을 해야한다는 것. 제일 최악을 떠올린다.
그래서 이런 생각을 하게 된다. 저 사람이 내가 경찰인걸 안다면? 그 성수동 팝업에서 나만 저 사람을 본 게 아니라, 저 사람도 나를 봤다면? 그럼 경찰 때문에 리버시블 점퍼를 뒤집어 입고 싶어지지 않았을까? 통화하는 척을 하면서 경찰이 가길 기다리고 있는 것은 아닐까?
원영은 분명 얼굴을 다 가렸다. 모자도 깊게 눌러썼고, 선글라스도 썼고, 마스크도 한 상태다. 근데 어떻게 원영인 걸 알았을까. 유진은 원영이 사이비 신도 같은 수상한 차림이라고 생각했었다. 헌데 만약에 원영에게 집착하고 있는 사람이라면 어떨까. 얼굴을 다 가렸어도, 키 라거나 몸 선이라거나 하는 것으로 원영을 알아볼 수 있지 않을까? 걸음걸이라거나? 굳이 이렇게까지 다 가린 거 자체가 오히려 연예인 같아 보이지 않았을까? 그리고 애초에 이 아파트에 원영이 산다는 걸 이미 안다면 어떨까. 아니면 혹시 나를 알아봐서? 그 성수동에서 경찰인 내 얼굴을 기억해서 나랑 대화하는 이 키의 여성이 얼굴을 다 가렸는데도 원영인 걸 알게 된 건 아닐까?
하필 비번에 동네 마실을 나온 거라 경찰 공무원증도 없다. 가서 실례합니다만 경찰인데 신분증 좀 제시해 주시겠습니까? 이러기 어려운 상황이라는 거다. 행여 경찰 공무원증이 있었어도 지금 원영이 앞에 있는 상황에서 저 사람 앞에 가서 서긴 어려운 노릇이다. 신변 보호를 요청한 사람이, 자신의 집 앞에 용의자로 추정되는 이가 왔다는 걸 알았을 때 느끼는 공포감이 너무 크다. 원영에게 결코 좋은 상황이 아니었다. 또한 만에 하나 이게 단순한 의심이 아니라 정말 용의자라면, 용의자를 경찰이 자극했을 때 흉기를 소지하고 있거나 하는 여타 상황에서 원영을 보호 할 수 있는 여건이 갖춰진 곳이 아니다. 비단 원영 뿐 아니라 오가는 시민도 너무 많다. 그렇다면 저 사람을 자극하지 않고 자연스럽게 원영이 안전하게 집으로 들어 갈 수 있는 방법이 필요하다.
시간을 계산해본다. 원영이 여기서 날 보내고 돌아걸어서 공동현관을 통과하는데 얼마나 걸릴까. 저 사람이 두 개의 가로등이 떨어진 거리를 전속력으로 뛰어와서 그 공동현관을 통과하는데 걸리는 시간은? 아니면 만에 하나 저 사람이 공동현관 비번을 혹시 알고 있다면? 아니면 만에 하나 원영이 내 생각보다 내가 가는 걸 오래 보고 있어서 더 늦게 돌아서 들어간다면? 엘리베이터가 너무 늦게 내려온다면? 변수가 너무 많다. 그냥 같이 올라가는 게 낫겠다.
" 알았어. 올라가 그럼. "
" 진짜...? "
원영을 따라 너른 공동현관을 통과하면서 구조를 위아래로 훑었다. 여긴 공동현관 밖에서 엘리베이터의 이동이 보이는 구조다. 연예인이랑 정치인들 많이 사는 아파트를 누가 이 따위로 지었지. 지을 때는 이렇게까지 그들에게 인기가 있을 줄 모르고 지었나보다. 연예인들이 사는 아파트는 프라이버시 같은 거 보안이 철저하다던데, 그럴듯하게 눌러야 하는 공동현관 비밀번호와 CCTV 말고는 도대체 뭐가 구조적으로 안전하다는 건지 모르겠다. CCTV만 많으면 다인가. 게다가 공동현관 비밀번호는 누르는 것도 다 보이고 7942다. 기가 찬다. 이웃 주민들 다 친구합시다야 뭐야.
공동현관부터 온 복도에 빨간 눈을 깜박이는 CCTV는 범죄가 이미 일어나고 난 다음에 범인을 잡는 데나 효과가 있다. 연예인들 많이 사는 아파트라고 소문이 자자한 아파트가 갖춰진 보안시스템이 겨우 저게 다다. 갖춘 건 그럴듯하지 않은데 고급 디자인이랍시고 공동현관에 벽면 곳곳은 대리석을 모양을 내서 붙여놨다. 진짜 쓸데도 없는 거. 벽이 보기 좋아서 어디에 쓴다고.
공동현관 밖에서도 엘리베이터의 이동이 보인다는 말은 공동현관에 들어오지 않아도 문에 얼굴을 붙이고 본다거나 하면 엘리베이터가 몇 층에 서는지 보인다는 얘기다. 심지어 이 아파트는 공동현관 유리창을 아주 깨끗한 투명유리를 쓴다. 음각 디자인을 넣어서 고급스럽게는 보이게 해놨는데 보안에는 마이너스다. 진짜 사치스러운 인간들은 치장만 신경 쓰지 정작 중요한 건 다 뒷전으로 집을 만드는 게 틀림없다. 원영의 말처럼 저층부와 고층부를 한 번에 쓰는 엘리베이터라니 그건 개중에 나은 상황이었다. 휘황찬란하게 불이 들어와 있는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가면서 원영이 누른 층 말고도 저층부를 벗어나기 전에 저고층을 섞어 몇 개 버튼을 눌렀다. 무슨 장난이냐고 원영이 타박하면 대충 이런 비싼 아파트 처음 와봐서 버튼 디자인이 신기해서 그런다 이런 거짓말로 얼버무리려고 했는데, 묻지 않아서 다행이었다.
1732.
그 번호를 봤을 때 순간 이 아슬아슬하고 긴장되는 상황보다 저 번호를 아직 원영이 쓴다는 것 때문에 숨이 막혔다. 저 네 자리 숫자가 순식간에 유진을 다른 상황으로 몰아넣었다. 저 번호를 아직까지 네가 왜.
헤어지고나서 연락을 한번 하지 않아서 번호를 바꾼 줄은 처음에 몰랐었다. 그러다 신인상을 받았던 날인가, 겨우 용기를 내서 축하한다는 연락을 했을 때 원영이 번호를 바꿨다는 걸 알았다. 당연한 일이었는데 그게 뭐라고 그때는 괜히 착잡했는지 모를 일이다. 다른 미련이 아닌 축하도 한 번 못 해주는 게 착잡했었나.
유진은 번호를 작년에야 겨우 바꿨다. 이미 여기저기 나가 있는 번호를 바꾸기 귀찮다는 이유로, 또 시간도 없는데 통신사 가기 귀찮다는 그런 이유로 차일피일 미루다가 작년에서야 겨우 그렇게 되었다. 그래서 아직도 경찰서 유진의 자리 낡아빠진 서랍장 한 구석엔 뒷자리가 1732로 끝나는 휴대폰 번호가 박힌 명함이 수십장 남아있었다. 작년에 바꾼걸 너무 잘했다고 생각했던 건, 자문을 갔다가 원영에게 명함을 줄 때였다. 그때 제 명함에 1732로 쓰는 휴대폰 번호가 있으면 원영이 얼마나 당황스러웠겠어. 귀찮음인지 남은 뭔가인지를 모르고 작년까지 쓰던 번호를 바꾼 건 너무 잘한 일이라고 그날 생각했었다.
" 소리 들어보니까 네 자린데. 네 자리는 너무 위험해. 여덟자리는 되어야 해. 기왕이면 일주일마다 바꾸고. "
비밀번호는 못 본 척했다. 굳이 아는 티 내봐야 좋을 것도 없고 이제 와서 뭐 하러. 보안 생각해서 여덟자리로 바꾸라는 말이나 하고는 흔들리는 시선만 여기저기로 옮겼다. 그렇다고 또 17321732 이런 식으로 바꾸면 어떡하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인데. 똑같은 거 두 번 반복하지 말라고 하려다가 그럼 괜히 너무 훈수 두는 거 같고 번호 본 티가 날까 봐 더 말은 안 했다.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이는 원영이 조금 정신없어 보이는 건 착각인지, 사실 저도 정신이 없으니까 둘 다 정신 없는 상태일지도 몰랐다. 정신을 다시 잘 차려야지. 유진은 원영을 따라 현관을 들어서면서 머리를 툭툭 쳤다. 숙취가 슬슬 올라오는 것 같은 느낌.
라면은 분명히 없을 거 같다. 기상천외한 걸 음식이라고 내놔도 그냥 적당히 먹고 나와야겠다. 목적은 결국 아까 그 수상한 사람 때문에 집에 안전히 들여보내려는 거였으니까. 이따 나갈 때는 어떻게 해야 하나. 내가 아파트에서 나오면 그 수상한 사람이 원영이 집에 혼자 있다는 걸 다시 알게 되는 거 아닌가. 얼마나 뒤에 나가야 하나, 너무 빠르게 나가면 계속 앞에 기다리고 있을 수도 있겠지. 1시간? 2시간? 그러면 또 너무 늦게까지 있는 거라 부담스럽다. 문을 단단히 닫고 있으라고 아무도 문 열어주지 말라고 하면 말을 들을까. 경찰에 신변 보호 요청해놓고 비밀번호 네 자리 쓰는 원영이 말을 잘 들을 것 같지는 않았다. 자꾸만 커다랗게 걱정이 꼬리에 꼬리를 물어서 정신은 안 차려지고 안 그래도 없는 정신만 계속 쏙 빠졌다.
집에 둘이 있으면 또 뭔 얘길 해야 하지. 시간도 좀 늦었고 둘만 있으면 이렇다 할 얘기가 또 없을 것 같다. 아까 서래섬 간 거 기억하냐고 물었던 걸 떠올리니 그 질문은 이상하게 말랑한 질문이었다. 원영은 그런 걸 왜 기억하냐고 물어봤을까. 내가 기억을 좀 못하면 어떻다고. 이런 심란에 저런 심란. 종류별로 카테고리가 다른 심란이 마음과 머릿속에 아귀가 맞지 않게 들어차서 정리가 되지 않는다.
뭘까 이건. 왜 이럴까.
유진의 마음이 방랑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