별 천지. 이 표현이 딱 맞을 것 같다. 유진은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알 수가 없었다. 연예인들 사는 거 달라봐야 뭐 얼마나 다를까 했던 거는 유진이 반푼어치도 모른 거였다. 현관부터 얼마나 걸어 들어가야 나오는 건지 알 수가 없는 길이에 약간 초입부터 당황스러웠다. 방금 지나온 길에 이미 방이 몇 개 있었던 거 같은 데 원래 이 아파트가 이렇게 평수가 넓은 아파트였나. 그래도 방배동에 아파트들은 꽤 구조를 안다고 생각했는데 그것도 다 과대평가였나보다. 혼자 이렇게 넓은 곳에 살면 엄청 무서울 것 같은데. 



아이보리 아트월을 지나 통으로 뚫린 파노라마 창으로 한강의 야경이 쏟아져 들었다. 불빛인지 별빛인지 이 정도면 밤에도 집 안이 밝을 것 만 같다. 스타가 사는 집이라 밤에도 별이 찾아드나. 어디에 서 있어야 하는지 약간 발 디딜 곳을 잃었다. 집 안에 들기 전 혼란했던 마음은 겪어 본 적 없는 공간에서 오는 긴장감 때문인지 그새 다 흩어졌다.




" 나 옷 좀 갈아입고. 조금만 기다려. "



그 수상한 차림이 영 마음에 안 들었는지 원영은 집에 들어오자마자 옷 부터 갈아입겠다고 쏙 안쪽 방으로 들어갔다. 뻘쭘하게 어디서 기다려야 하나 헤맸다. 소파에 앉아있자니 지금 너무 한강 벤치에 바로 있다 왔는데 좀 지저분하고 그렇다고 그냥 어슬렁 거리자니 또 너무 남의 집에서 예의 없어 보이는 거 같고. 그냥 적당히 파노라마 창 중앙 어디쯤에 서서 뻥 뚫린 밖이나 내다봤다. 투명하게 깨끗한 창에 혹시 지문이라도 남을까 봐 팔짱을 끼고 고개만 앞으로 슥 내서 내려다봤다. 그래도 집 안에 들어왔다고 걱정 되던 것도 좀 한시름 덜어지고 여유라는 게 조금씩 피어오른다. 20층이니까 밑에서 암벽 등반을 해서 올라 올 수도 없겠지. 앞에 마주 보는 동이 없어서 밖에서 누가 들여다볼 걱정은 안 해도 되겠다. 원영은 아마 한강뷰가 좋아서 고층을 선택한 거겠지만, 지금은 고층 사는 게 퍽 마음에 들었다.  


저 아래로 반포대교에 촘촘하게 불이 들어온 게 보였다. 달빛 분수 광장에 드문드문 불이 밝혀져 한강둔치공원의 테두리를 불빛으로 점쳐볼 수 있었다. 이 정도 높이면 저 끝에 서래섬도 보일 거 같은데. 얼굴을 창 가까이 대서 저 끝을 보다가 다시금 아까 원영이 서래섬 갔던 거 기억하냐고 물은 게 떠오른다.






메밀꽃을 보러 가을에 갔었는데 당연히 기억하다마다. 전날 검색을 해서 이것저것 토막 지식을 알아갔던 게 기억이 난다. 유채꽃 파종 시기 뭐 그런 거. 어디서 주워듣기로 예술을 하는 사람들은 영감 그런 게 중요하다고 해서 시간이 되는대로 그런 기회를 만들어주려고 했다. 하루종일 엉덩이 붙이고 공부만 하면 되는 것과는 예술은 너무나도 다른 거니까. 해줄 수 있는 게 별로 없어서 매화니 지평선이니 뭔가 그런 축제 같은 데라도 같이 다니고 싶었달까. 철마다 노랗고 하얗게 피어나는 꽃들이나 저 멀리 마음을 지긋이 누르는 것 같은 지평선 등을 눈으로 귀로 코로 느끼다 보면 원영에게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이곳저곳을 상식처럼 알아뒀었다.


결국 같이는 못 가고 대부분은 전국에 이런 명소가 있구나 또 이런 축제를 하는구나 하고 알아두기만 한 정보쪼가리가 되었다. 그중에는 수사를 하다가 가본 곳이 있기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걸려있는 축제 홍보 현수막 같은 거나 차창 밖으로 올려다보고 왔던 것 같다. 김제 어디에 지평선 축제가 열린다더라 광양 어디에 매화 축제가 열린다더라 하고 쓰인 전봇대에 걸린 그런 하얀 현수막들. 



휴가때 가족 여행 갈 장소 추천 받는다- 선배들에게 추천하거나 여친이랑 삼백일 기념 여행 갈 데 찾는다는 막내에게 모른 척 가보라고 말해주기도 했다. 막내가 선배님은 애인도 없는데 이런데 어떻게 꿰고 계시는 겁니까? 이런 소릴 하면 주둥이나 때렸다. 축제 외우는 게 취미다 왜. 유진이 알아본 그 명소니 축제니 하던 곳을 정작 유진은 못 가고 다른 사람들만 잘들 다녔다. 


원영이 아까 못 봤다고 했던 서래섬의 유채꽃은 그래도 혼자라도 보러 갔었다. 임용이 되고 나서 방배서로 처음 배정 받은 날에도 갔었고, 방배서 근무하면서 계절 상관없이 한강을 달릴 때 지고 피는 계절마다 서래섬의 계절을 같이 겪었다. 처음 유채꽃을 보러 서래섬에 혼자 갔을 때는 원영의 생각이 많이 났었는데, 그것도 하얗고 파란 계절을 몇 번 겪고 나니까 어느샌가 부턴 그냥 생각 없이 달리기만 했다. 하얗게 메밀꽃이 흔들리는 계절엔 같이 흔들리면서 뛰고, 노랗게 유채꽃이 피어오르는 계절엔 밤에 유채꽃을 가로등 삼아 뛰었다. 색이 알록달록하지 않은 풀꽃이 피는 여름이나 꽃들이 새순을 기다리려 겨우 한번 숨을 쉬는 겨울에도 늘 달리고 뛰었다. 거기서 딱 오른쪽으로 고개를 들어서 20층 높이. 저 만큼 올려다보이는 곳에 원영이 사는 줄은 몰랐다.








괜한 옛날 생각을 또 한다 싶어서 창에서 눈을 떼어냈다. 원영은 자꾸만 저를 이런 불필요한 상념으로 밀어 넣는 것만 같다. 약쟁이 동선을 머리에 그려보거나 내가 그놈이라면 어디로 갔을까 범죄자 마음 역지사지해보면서 살아야 하는데 요즘 들어 빈번히 자주 이러고 있다. 이러다 진짜 일하는 중에 얼빠져서 사고나 당하지. 


겨우 창에서 시선을 떼어내서 둔 소파에 곱게 놓인 낯익은 옅은 하늘색 머플러가 유진의 눈에 들어온다. 그럴 리가. 아직 저걸 가지고 있을 리가. 일순간 얼어붙은 것처럼 몸이 굳었다. 잠이 들지 않았는데 깨어 있는 채로 가위에 눌린 것 만 같다. 아까 1732를 봤을 때도 숨이 턱까지 오르더니, 갑작스럽게 과속방지턱을 넘은 것처럼 덜커덕하고 뭔가 마음에서 덜컥거렸다. 비슷하게 생긴 머플러일 거야. 색도 흔한 색이라 충분히 그럴 수 있을 거야. 내가 착각했겠지. 발끝에서부터 천천히 힘을 주고 겨우 침을 삼켜내어 덜컥거리는걸 다시 안으로 삼켜내 본다. 목 아래 꾹 눌려 닫힌 숨이 멎었다가 겨우 하-하고 뱉어냈다.





" 기다렸지 미안해. 앉아서 기다리지. "


머리를 올려묶은 가벼운 홈웨어 차림의 원영이 다이닝룸 테이블에 앉으라고 의자를 빼준다. 바닥에 붙어서 쉬이 움직여 지지 않는 다리를 끌어다 겨우 그 의자에 앉았다. 정신없이 찬장을 뒤지는 원영이 뒤돌아 있는 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테이블을 등지게 되어있는 이 다이닝룸의 구조가 너무 다행이라고. 식은땀이 흐르는 것 같은 이마에 손을 대고 고개를 잠시 숙였다. 조금 어지러운 것 같아 옅은 숨을 겨우 내쉬었다. 지금 자리를 피해야 할 것 같은데, 오래 운동하고 뛴 게 아무짝에 쓸모 없게도 몸이 쉬이 일어나 지질 않는다. 정신이 육체를 지배한다더니 이런 상황을 두고 하는 말인가 보다. 

















테이블에 유진이 앉아있는데 뒤로 조금도 돌아 볼 수가 없다. 예상했던 대로 찬장에는 라면이랑 비스무레한건 조금도 눈에 띄지가 않는다. 냉장고도 열어봤는데 양배추, 알배추, 샐러리 스틱, 당근 스틱, 도토리묵, 사과, 계란. 스스로 생각해도 이건 좀 아니다 싶은 것들만 있다. 누가 봐도 식단을 관리하는 연예인의 냉장고 그 자체였다. 가을처럼 땅콩버터 사과에 찍어 먹어볼래? 이럴 수도 없는데 정말 속이 답답하다. 


 유진이 채소라도 좋아하면 샐러리랑 당근 스틱이라도 땅콩소스를 곁들여서 월남쌈인 척 내어주려고 했는데 심지어 유진은 채소를 그다지 좋아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샐러리랑 당근 스틱 같은 걸 주면 누가 봐도 나 여배우라서 관리해서 집에 이런 거 밖에 없어 이런 느낌이니까 또 그게 싫다. 뭔가 그렇게 연예인이라는 걸 체감되게 하고 싶지 않은 그런 기분. 가늠 할 수도 없을 만큼 벌어져 있는 우리 사이의 감정의 간극을 자꾸만 줄이고 싶다. 한식은 엄청 좋아하니까 묵밥 같은 걸 해서 줄까. 엄마가 얼마 전에 해 먹어보라고 김치랑 육수를 보내준 걸 김치냉장고에 넣어놨었는데, 그게 그나마 괜찮을 지도.  


엄마가 해 먹으라고 이것저것 보내줘도 한 번을 해먹은 적이 없이 그대로 버리는 게 일상인데, 그런데도 굴하지 않고 꼬박꼬박 뭐라도 보내는 엄마가 지금 이 순간 구세주다. 유진이 볼까 봐 숨겨서는 휴대폰으로 초록 창에 도토리묵밥 만드는 법을 검색해서 따라 만들었다. 그 레시피 리스트 재료 중에 집에 없는 게 많아서 적당히 없는 건 건너뛰었다. 그래서 결론적으로 엄마가 보내준 냉면 육수에 엄마표 김치를 썰어 넣고 도토리묵만 적당한 크기로 썰어 넣었다. 인터넷에 있는 레시피에는 김 가루도 있고 오이도 채를 썰어 넣고 그러라는데 둘 다 없어서 만들면서도 한숨이 났다. 대충 비주얼은 그럴듯하게 생긴 묵밥을 유진 앞에 내려놓으니 유진이 가만히 보다가 원영을 올려다본다. 유진이 무슨 말을 하기 전에 먼저 선수를 쳐야겠다.



" 엄마가 김치를 주셔서... 언니, 우리 엄마 김치 좋아하잖아... 라면 말고 묵밥 먹어. 라면 건강에 안 좋기도 하고... "


김치가 맛있으면 라면이랑 먹으면 더 맛있지 뭔 묵밥이야. 건강이고 뭐고 한강라면 끓여준다고 데리고 올라와서 묵밥을 주는 게 지금 말이 되니. 스스로 속으로 생각해도 어이가 없고 하나도 핑계가 맞지가 않다. 유진도 똑같이 뻔히 생각할 것 같아서 자꾸 속이 움츠러드는 데, 유진이 그냥 넘어가 줬으면 좋겠다.



" 응, 잘 먹을게. "



유진은 별다른 대꾸 없이 투박하게 썰린 묵을 숟가락으로 퍼 먹었다. 정신이 너무 없어서 간도 제대로 안 본 것 같은데 짤 수도 있는데 두 그릇을 만들어서 먹으면서 맛을 좀 볼 걸 그 와중에 생각이 짧아서 유진 것만 만들어버렸다. 



" 먹을만해? 짜진 않아? "

" 괜찮아. 넌 안 먹어? "

" 응, 배가 안 고파서... 언니 많이 먹어. "

" 식단 하는구나? "

" 아니야. 그냥 배가 안 고파서 그래. "



무슨 말을 더 하고는 싶은데, 막상 앞에서 아무 말 없이 먹는 유진을 보니까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는다. 한참을 소리도 없이 유진이 먹는 걸 보다가 뭐라도 다른 대화거리를 꺼내고 싶어진다. 맛이 어떤지 묻는 거 말고 뭔가 가벼운 얘기를 하고 싶은데 그럴 만 한 게 뭐가 있는지 쉬이 떠오르지 않는다. 둘 사이에 공통적인 주제가 이젠 거의 없어졌다. 이 와중에 무겁게 신변 보호 얘기를 하기도 싫고 경찰이랑 전혀 관계없는 주제는 뭐가 있을까. 경찰 안유진 말고 그냥 안유진이랑 할 얘기를 찾고 싶다. 아까 유진이 흥미 있던 게 뭐였는지 기억 속에 조각조각 틈을 뒤진다.








" 아까... 나 진짜 패션테러리스트 같았어...? "


말을 꺼내자마자 묵묵히 묵밥을 먹던 유진에게서 크큽- 하는 소리가 난다. 유진에게 두어장 휴지를 뽑아 건네는걸 유진이 받아 입을 닦는다. 그 와중에도 손 끝에 손이 닿은 것 때문에 다시 입술만 바짝 탄다.





" 의도하고 입은 거 아니야...? "

" 정확히 패션테러리스트 같다는 게 뭔데? "

" 뭐... 약간 사이비 신도 같았어. "



그 뭐냐 정확히는 요즘 시대 사이비 아니고 중세 시대 사이비. 그 동굴 같은 데서 횃불 들고 제사 지낼 거 같은 사이비 있잖아. 동굴에 벽화 같은 거 막 그려져 있고. 유진이 허공에 동굴인 것처럼 표현을 한다. 입꼬리가 슬쩍 올라가는 게 또 슬며시 웃을 것 같다. 유진이 웃었으면 좋겠다. 나랑 대화를 하다가 웃게 되는 상황이 지금 일어났으면 좋겠다.



" 비싼건데에... "

" 그 담요 비싼 거야? "

" 하, 담요 아니고 판초야... "

" 판초가 뭔데? 판초 우의 할 때 그 판초? 그 옷이 방수도 되는 거야? "

" 아아- 진짜... 판초 우의라니..."


놀리라고 판을 깔아준 대로 유진이 예전처럼 가벼운 농을 친다. 방수는 무슨 방수야... 조금 미간을 구기고 칭얼거리는 소릴 냈더니 미안미안 농담이야 나도 알아. 손을 젓고는 작게 웃는다. 근데 그렇게 생긴 게 판초인 줄은 몰랐어- 하고는 또 작게 웃는다. 너무 살풋 웃어서 쏙 들어가는 보조개를 길게 볼 수 없었어도 그래도 좋았다. 마주 앉아서 웃는 걸 보는 거는 얼마 만일까. 유진이 웃는 건 꿈에서나 나오는 장면이었다. 아니면 하얀 천장을 수십번 올려다봐야 나오는 거. 










조금 더, 조금만 더 같이 있고 싶은 원영의 마음과는 다르게 유진은 금방 묵밥 한 그릇을 다 비우고는 의자에서 일어났다. 인터폰 한번 눌러봐도 돼? 응, 왜? 이거 카메라 사각지대 좀 보게. 아트월 벽면에 붙은 인터폰을 꾸욱 눌러서 외부 카메라에 어디까지 나오는지 슥슥 훑어본다. 


" 이거 화면에 사각이 엄청 크다. 오히려 가까이 붙으면 하나도 안 보이네. 화질도 안 좋고. "

" 아, 그럼 안 좋은 거야? "

" 밖에서 벨 누르면 그냥 문 열어주지 마. 매니저나 집에 올 만한 사람은 벨 누르지 말고 현관 앞에서 전화하라고 해. "

" 응, 알았어. "

" 진짜 알았어? "

" 응, 알았다니깐. 벨 눌러도 절대 문 안 열어줄게. "

" 벨 누르면 문 열어주지 말고, 또 아까 내가 뭐 하라고 했어. "

" 아까...? 아까 뭐...? "

" ...현관 비밀번호. 여덟자리로 바꿔. "



바꾸기 싫은데. 그냥 1732 쓰고 싶은데. 이건 대놓고 말하면서 칭얼거릴 수 없는 부분이다. 마지못해 알았다고 언니 가고 나면 여덟자리로 바꾸겠다고 떨떠름하게 대답했다.







보내기가 싫은데, 헤어지기 싫은 사람은 겨우 저 혼자일 뿐 현관으로 향하는 유진의 발걸음은 낭창하고 가볍다. 아쉬운 건 혼자만의 마음이라 이 밤의 끝을 붙들 수가 없다. 그래도 아까 헤어지지 않은 게 어디야. 집안에서 나눈 대화가 패션테러리스트, 판초 우의, 인터폰 카메라 사각지대, 현관 비밀번호... 이런 거지만 아주 작은 사소한 거여도 다 이젠 좋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그런 사소한 거, 깨알 같이 작고 미미한 것이라도 전부 다 하고 싶은 마음이다. 사소한 것도 다 붙들고 싶은 거, 무슨 대화를 할까 고심하는 거 이런 것도 다 짝사랑이다. 


엘베 앞까지만이라도 배웅을 나가겠다는걸 기어이 거절당하고 현관에서만 겨우 서서 언니 다음에 또 와- 다음엔 진짜 라면 끓여줄게-하고 손을 들었다. 라면 몸에 안 좋다며? 문단속해- 하고 나가는 뒷모습을 현관문이 닫혔는데도 그 자리에 가만히 서 바라보았다. 유진은 제가 하는 다음엔 진짜 라면 끓여줄게- 라는 말에 조금 전에도 다음이 없는 듯 굴었다. 그냥 빈말로라도 다음에 또 올게- 해줄 수도 있는 건데 그 한마디를 안 해준다. 다음이 있을까. 다음이 또 있을까. 다음이 있었으면 좋겠다.




 

 













단지 정문을 빠져나오면서 둘러보니 아까 있던 그 사람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그냥 정말 동네 주민인가. 아니면 그냥 두 명이 다른 사람인가. 요즘 그 브랜드가 엄청 유행이라고 하긴 하던데. 다시 되짚어 보면 경찰서에도 그 빨간 볼캡을 가진 동료가 두어명 있었다. 아까는 괜히 원영이랑 같이 있어서 더 민감하게 받아 들였던 모양이다. 예민도 그런 예민이 따로 없다. 그 사람이 신었던 운동화도 유명 N 브랜드에 인기 모델이니까 막내도 신는 그런 거, 뭐 아예 불가능한 일은 또 아니다 생각하게 된다. 괜히 직업병 돋은 게 혼자 머쓱해져서 머리나 두어번 쓸어 넘기고는 원영의 아파트를 등지고 어둑해진 골목 안으로 걸었다. 


초록창에 집 주소를 도착지로 찍어 도보 길 검색을 하면 도보로 32분 거리라고 나오는 집이 표시가 된다. 하지만 지름길을 알고 있다. 왼편에 조금 더 조그마하게 비집어진 벽면을 옆 걸음으로 들어가면 넘을 수 있는 작은 철문이 있다는 걸 말이다. 그 철문을 뛰어넘으면 도보 32분 거리를 가로질러서 20분도 안 걸려서 갈 수가 있다. 그런데도 그냥 도보 32분 거리를 걷기로 한다.


 주머니 속에 구불구불하게 대충 말아 넣은 이어폰을 귀에 꽂았다. 이걸 원영이 사줬었다는 걸 완전히 잊어버리고 있었다. 너무 당연히 그냥 가지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었나보다. 언제 준거였지. 








 사람의 기억이 너무 신비로운 건, 완전히 잊어버린 줄 알았던 것도 누가 말하면 어렴풋이 저 안에서 그 기억이 고개를 든다는 거였다. 이제 다시 찾을 일이 없다고 불을 꺼놓았던 기억의 창고에 그 누군가 다시 전등을 올린 것 처럼, 그 구닥다리 이어폰이 들어있는 오래된 창고에 불이 커졌다. 그 창고에서 빛이 새어 나와 지나칠 수 없는 걸음을 끌어당긴다. 전기가 완전히 끊어진 줄 알았던 그 창고에 깜박깜박거리는 등이 켜지고 유진은 그 창고에 서서 먼지가 켜켜이 쌓인 서랍들을 본다. 그 서랍 안에 오래된 이어폰을 다시 들여다보면 비로소 떠오르는 것들이 있다. 

 

 혼자 공부할 때 책상 위에 집 식탁 위에 그런 곳에 있던 이어폰이 아닌 둘이 나누어끼고 귀에 꽂아주고 그런 이어폰이 먼지를 가득 얹고 유진을 바라본다. 날 데려가라고. 먼지를 후후 불어서 그걸 다시 마주할 용기는 없어서 그냥 창고 밖을 향해 몸을 돌리면 다른 서랍장에서 또 덜그럭덜그럭 하고 소릴 내 다른 것들이 유진을 부른다. 그런 것들은 못 들은 채 하고 불을 꺼본다. 아무리 등을 내려도 여전히 창고 안이 환하다. 눌러도 꺼지지 않는 창고 등은 유진이 켜고 끌 수 있는 게 아닌 모양이다.












휴대폰으로 진동이 들어와서 보니 저장되어있지 않은 번호였다. 이 번호로 꽤 자주 전화가 들어왔었는데 그동안은 잘 받지 않았었다. 잠시 망설이다가 수신 버튼을 눌렀다. 오래된 구닥다리 이어폰을 통해 낯익은 목소리가 파고들었다.




' 언니- 나 원영이. '


아, 이거 원영이 번호구나. 전에 저장하려다가 말았던 게 생각이 났다.  이 번호로 오는 전화를 꽤 많이 안 받았었는데. 그 동안 나한테 전화를 꽤 많이 했었네. 아까 외롭다고 했던 말이 생각나 괜히 유진은 미안해졌다. 


' 응, 왜? 무슨 일 있어? '

' 아니, 그냥-  혼자 걸어가면 심심할까 봐. '

' 심심할 것도 많다. '

' 있잖아. 내가 생각해보니까... 예전에 언니가 나 데려다주고 갈 때, 내가 전화를 안 했던 거 같아. '




그때도 언니 돌아갈 때 내가 전화했으면 되는 건데 그걸 안 했던 거 같더라구. 통화하면서 걸으면 언니도 덜 무섭고 그랬을 텐데, 나 뭐 한다고 전화 안 했지? 나 되게 별로다. 낡은 이어폰을 타고 들어오는 목소리가 드문드문 끊겼다. 발걸음이 조금씩 느려지고 있는 것만 같다.







' 너 나한테 전화 했었어. '


 아마도 원영은 까먹은 것 같았다.


' 내가? '

' 어. 너 전화했었는데, 그냥 내가 하지 말라고 했어. 그래서 안 하게 된 거야. '


그랬구나. 그건 기억 안 나. 왜 그랬지? 드문드문 목소리가 끊겨서 결국 이어폰을 빼고 휴대폰을 들었다.



' 너 씻는데도 오래 걸리고 그러니까 그냥 빨리 자라고. 하루종일 연극하면 힘들잖아. 그거 다 감정 쓰고 목 쓰는 건데. '



유진의 말이 끝났는데도 한참을 원영으로부터 말이 돌아오지 않았다. 옅은 숨소리만 들려서 통화가 끊긴 건지 잠시 휴대폰 화면을 들여다봤다. 안 끊겼는데.



' ...그때 언니는 한 시간을 혼자 어떻게 갔어? 난 새벽에 혼자 그 어두운 길을 십 분도 걷기 싫을 거 같은데. '

' 그런 얘기 해서 뭐해. 그냥 가로등 켜져 있으니까 가는 거지 뭐. '

' 응... 그렇구나..나 진짜 별로인 거 같아. '


 

 너 그렇지 않아. 말을 하려다 말았다. 왠지 저 말은 좀 이상하게 들릴 것 같다. 하지만 너 정말 그렇지 않았어. 저 말을 유진은 차마 다 내어 보여 주지 못한다. 서로 별 다른 말을 더 하지 않은 채 골목 안으로 더 깊게 걸었다. 골목 안이 이상하리 만큼 밝았다. 요즘은 가로등을 더 밝은 걸 쓰는 건지. 골목 안도 더 환해지고 저 멀리도 쉽게 눈으로 도너츠 체인점 간판이 들어왔다. 이미 영업시간이 지나서 가게 안에 불은 다 꺼지고 간판만 겨우 등을 밝히고 있었다. 옅게 흔들리던 원영의 목소리는 그 사이 다듬어져서 이내 유진에게 물었다.



' 지금은 어디쯤 가고 있어? '

' 여기...서울 도너츠 근처 지나고 있어. '

' 으응... 어딘지 정확히 위치를 모르겠다. '

' 대충 15분? 정도만 더 걸어가면 돼. '



유진은 본인의 걸음 속도가 너무 느리다고 생각했다. 분명 원영의 집에서 이 도너츠 가게까지 15분? 20분? 거린데 30분 가까이 걸려서 걷고 있었다. 아까 순대에 술을 마셨어서 숙취로 몸이 조금 쳐지나. 이상하리만큼 걸음의 템포가 늘어지고 있다.



' 언니, 거기 도너츠 먹어봤어? '

' 서울 도너츠? 여기 프랜차이즈 잖아. '

' 그니까. 맛있냐구. '



난 단 거 안 좋아해서 안 먹어봤는데. 맛있지 않을까. 등이 다 내려간 가게를 이리저리 훑어보면서 대답했다. 도너츠 가게 앞에 포스터를 보니까 겨울 신상 얼그레이 우유 도너츠 이러고 옅은 브라운색 포스터가 붙어있는데, 여기도 모델이 원영이다. 등이 하나 들어오지 않은 도너츠가게 앞에 서서 원영이 베이지색 베레모를 쓰고 있는 커다란 포스터를 서서 바라봤다. 포스터 사진의 구도가 이상하리만큼 원영에게 집중된 것만 같다.



' ...여기도 네가 광고해? '

' 웅... 그래서 먹어봤냐고 물어봤어. '

' 뭐야. 광고하는 거 나한테도 바이럴하는 거야? '


황당해서 물어봤는데, 휴대폰 너머에서 옅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내가 언니한테 그런걸 왜 해-


' 내 사진 같은 거 붙어있어? '

' 응, 얼굴이 대문짝만하게 붙어있어. 여기 근데 도너츠 광고를 하는 거야, 네 얼굴 광고를 하는 거야. '



 포스터에 도너츠 그림은 아예 없는데- 골목에 붙어있는 게 다 네 사진이네. 그냥 시큰둥하게 별 얘길 안 했는데도 다시 한번 조금 더 커진 웃음소리가 들린다. 귓가가 간지러워진다. 귓가 뿐 아니라 몸 속에 어딘가도 간지러워 지는 것 같다. 



' 도너츠 사줄까? 그거 열 개 사도 3만원 안 해. 부정청탁금지법에 안 걸려. '

' 도너츠 가게를 열 개 사줄 거 아니면 뭐 사준다 하지 마. '


웃음 소리 때문인지 농담이 나온다. 그래도 자꾸 뭘 산다고 해서 나름 목소리는 깔았다. 한 번 더 옅은 웃음소리가 들린다. 제 입꼬리가 같이 슬슬 올라가는 게 느껴진다. 언니, 내가 도너츠 가게 열 개 사주면 받긴 해?



' 됐어. 나 단 거 안 좋아해. 도너츠 가게도 별로. '

' 얼그레이 우유 도너츠는 괜찮을 걸? 광고 찍을 때 먹어봤는데, 언니가 좋아할 맛이야. 얼그레이 좋아하잖아. 언니 케이크도 맨날 얼그레이만 먹구. '

' ...별걸 다 기억한다. '



 슬슬 올라가던 입꼬리를 다시 내려 눌렀다. 잡생각이 많아진다. 생일 같은 건 자주 잊어먹고 지내고 케이크는 사 먹질 않아서 조금 전 원영이 말 하기 전까진 주로 얼그레이 케이크를 먹었었는지도 잊었었다. 예전에도 원영이 챙길 때나 제 생일은 챙겼었으니까 까먹고 사는 게 너무 당연했다.


 저도 까먹은 제 입맛을 원영이 잘도 기억한다. 얼그레이 케이크만 먹는다거나 원영 어머님의 김치를 좋아한다거나 그런 것들. 아까 묵밥을 내주면서 ' 언니, 우리 엄마 김치 좋아하잖아 ' 이런 말을 들었을 때도 자꾸만 마음이 덜컥거렸다. 


 자꾸만 원영은 여기저기 창고에 등을 올린다. 갑작스럽게 밝아지는 것에 쫓아다니면서 불을 끄다가도 내려가지 않는 등이 너무 당황스럽다. 그렇게 환하게 불을 켜놓고는 버리지 않고 쥐고 있던 자디잔 조각들로 숨을 차게 하고 속을 긁어댄다. 종잇장에 베이는 게 더 아프고 아리듯이 저 자잘한 것들로도 잘도 여기저기 베어진다. 내가 기껏 불을 다 꺼놓았었는데.


 잘 닦여진 아스팔트 길을 한 걸음 두 걸음 더 디뎌 걷는데 원영의 말이 자꾸 속도를 더 더뎌지게 만든다. 들러붙은 것 같은 다리가 무겁다 못해 철근을 달고 있는 것 처럼 들기가 어렵다. 그다음 원영의 말을 들었을 때는 이러다가는 집에 날이 바뀐 다음에나 들어가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 기억하는 게 당연하지, 언니가 좋아하는 거니까. '



그만 전화를 끊어야겠다. 





' 다 왔어. 끊어. '

' 벌써...? 아까 15분 더 가야 한다며. '

' 내 생각보다 내가 걸음이 빠르네. '


아직 집까지 10분은 더 걸어가야 하는데 그냥 이쯤 다 왔다고 하고 전화를 끊기로 한다. 자꾸만 길이 길어지고 누가 잡아서 늘린 것처럼 거리가 늘어나고 있는 것 같다. 러닝머신인 양 제 자리를 쳇바퀴 타고 있는 길을 이러다가는 벗어 날 수 없을 것 같아진다.



' ...엄청 빠르게 걸었나 봐. '


저 목소리는 왜 자꾸 아쉬워하는 것처럼 들리는 지 모르겠다. 괜한 마음이 들어서 다시 또 걷던 걸음을 멈추고 기어이 멈추어 섰다. 정신을 바짝 차려야지. 대충 말끝을 얼버무려 끊는다- 하고는 종료 버튼을 누르려는데 이어폰 저 너머에서 잘자- 하고 돌아오는 말이 걸음 뿐 아니라 손도 느려지게 만든다. 발도 손도 다 거북이걸음을 하고 있다. 느리게 깜박거리게 되는 눈꺼풀도 마찬가지다. 온 몸이 다 느려지고 거북이가 되었다. 











방배동 상가 뒤 골목에 도너츠가게의 간판 등이 하얗게 떨어지는 곳에 서서는 눈만 끔벅거리고 있는 상태가 되었다. 커다랗게 프린트가 되어 상가 유리 벽에 절반 만큼 붙어있는 원영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겨우 종료 버튼을 누르고는 왼 손목에 진동을 울리는 스마트 워치를 내려다봤다. 잘 하고 있어요! 멈추지 마세요! 하고 격려어린 워치의 자막이 올라온다. 아직 집에 도착도 못했는데 현재 45분을 걸었다고 잘하고 있댄다. 잘하긴 뭘 잘해. 지금 20분 거리를 45분 걸려서 온 거야? 아주 굼벵이가 따로 없네. 두배 넘게 걸렸잖아. 옅은 한숨을 내쉬고는 가게 앞 원영 광고 앞에 무릎을 숙여 앉아 신발 끈을 고쳐 묶었다. 이어폰도 다시 돌돌 감아 빠지지 않게 바지 주머니 안 깊숙이 밀어 넣었다. 


지금부터는 그냥 뛰어가야겠다. 계속 이러다가는 제자리걸음 하듯이 이 자리를 돌게 될 수도 있으니까. 잡생각 없이 전속력으로 집을 향해 5분 뛰는 걸로. 탁탁- 하고 뛰는 소리가 골목 안으로 울린다. 뒤로는 커다랗게 붙어있던 원영의 얼굴이 이제 다시 멀어진다. 다닥다닥 붙은 편의점을 두어개 지나 채 몇 분뒤지 않았는데도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이깟 숨이야 괜찮다. 죽는 것도 아닌데. 오피스텔 건물이 눈에 확 들어올 때부터 다시 점차 발걸음이 서서히 느려졌다. 지금 이게 뭐 하는 짓일까. 






' 언니, 지쳐 보여. 내가 안아줄게. '


턱 까지 찬 숨을 고르면서 원영이 그때 했던 말을 떠올린다. 유진이 괜찮다고 할 때마다 하던 말들. 정말 괜찮은 건지 괜찮은 척하고 사는 건지 그 사이의 차이도 모르는 유진에게 원영은 저런 말을 했었다. 조금 뛰었다고 충격이 오는지 어깨가 다시 욱신대고 통증이 올라왔다. 괜찮다 괜찮다 했는데 어깨는 여전히 방심하는 틈마다 통증의 존재를 각인시켰다.  





아무래도 지금 들어가 봐야 잠을 못 잘 것 같다. 그런 느낌이 든다. 분명히 오늘 잠을 못 잘 것 같다는 느낌. 가만히 골목 한 가운데 서서 숨을 골랐다. 그리고는 다시 오피스텔에서 등을 돌려서 달렸다. 목적지 같은 건 없었다. 그냥 숨이 차고 땀이 나고 아무 생각을 안 할 수 있으면 된다. 괜찮을 때까지 그렇게 다시 정처 없이 달리고 또 달리고 숨이 차고 땀을 흘리면 된다. 지나가는 가로등이 몇 개인지 간판은 몇 개인지 모르겠다. 길 위에서 보내는 밤이 될 것만 같았다.  


 워치에선 힘내라는 응원이 계속해서 유진에게 쏟아졌다. 조금만 더 힘내세요! 포기하지 마세요! 끝까지 달리세요! 여러 차례 진동이 계속되어 손목을 내려다 보다가 다시 올려다본 눈앞에 광경은 유진을 주저앉아 숨을 내쉬게 만들었다. 믿기지가않았다. 상황이 아주 크게 잘못되어가고 있었다.











RIVERSKY



아까 보았던 노랗고 밝은 원영의 아파트 정문 로고가 유진을 내려다 보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