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지금은 전화를 받을 수 없어 음성 사서함으로 연결됩니다. '
바쁜가. 오전에만 두 번 전화를 걸었는데 유진은 여전히 받지 않는다. 아니면 또 내 전화라서 안 받나. 지난 밤에는 전화 받았었는데... 원영은 대본을 외우다가 햇빛이 쏟아져 드는 테라스 창밖으로 시선을 두었다. 누가 보면 이제 겨우 겨울 끄트머리라는 걸 전혀 믿지 않을 듯한 쨍한 햇빛. 오늘도 너무 춥지도 않고 너무 덥지도 않은 그런 날이었으면. 원래도 선선한 날을 좋아했지만 근래는 좋아하는 걸 넘어 바라게 됐다. 강력계 형사가 외근이 많다는 걸, 밖에서 탐문이랍시고 몇시간씩 걷고 범인 잡는다고 뛰어다닐 일이 많다는 걸 알게 된 후로는 더더욱 날이 좋길 바랬다. 햇빛 쨍한 거 말고, 햇빛은 조금 들고 바람이 잔잔히 부는 선선한 날이길. 많이 뛰고 달려도 너무 덥지 않게. 그리고 너무 바람에 살갗이 아리지 않게 춥지 않은 날이길. 비가 오면 혹시나 너무 미끄러워서 넘어질 수도 있으니까 비도 안 왔으면. 그리고 오늘도 무사했으면.
지난 통화 내역에 촘촘히 쌓인 유진의 이름을 내려다봤다. 원영의 통화목록은 유진 아니면 유진의 사무실, 매니저, 가을 이 넷 뿐이었다. 그중에도 유진의 휴대폰에 통화가 제대로 연결된 건 지난 밤 한 번이 전부다. 발신통화 45분 이라고 찍혀있는 걸 가만히 들여다봤다. 45분이나 통화 한 줄은 몰랐네. 헤어지는 게 아쉬워서 걸었던 그 전화는 끊을 때도 아쉬워서 휴대폰만 내려다봤다. 제 속을 잘근잘근 씹다가 또 웃게 되는 그런 통화.
' 너 씻는데도 오래 걸리고 그러니까 그냥 빨리 자라고. 하루종일 연극을 하면 힘들잖아. 그거 다 감정 쓰고 목 쓰는 건데. '
저런 생각을 스물 다섯이 했다. 저 말을 들으니까 꾸벅꾸벅 졸면서 전화를 하다가 ' 원영아- 끊고 자라니까- ' 이런 말을 들었던 게 살며시 기억이 나는 것도 같았다. 끊기 싫다고 원영이 칭얼거리고 유진이 원영을 달래서 전화를 끊게 하는 그런 기억이 하나둘씩 새록새록 피어난다. 겨우 한살 차인데 어쩜 일방통행처럼 배려도 저렇게 일방적이었는지. 유진이 그렇다고 환한 대낮에 길을 걸어가는 것도 아니었는데 어떻게 저 때 그렇게도 쉽게 전화를 그만하라 할 수 있었는지. 유진이 하는 말 마다 그때 얼마나 저를 생각하고 배려했었는지 절절하게 깨닫게 된다. 그리고 스스로 나는 얼마나 별로인가에 대해서도.
제 속을 제가 모른다는 말이 어디서 나온 말인가 했더니 딱 저를 두고 하는 말이었다. 통화하는 중에도 내가 너무 별로라서 유진에게 도저히 다시 사랑해달라 말을 못 할 것 같다고 조용히 흐느끼다가. 그새 또 유진이 하는 말에 눈꼬리에 눈물을 단 채로 웃어버려서 또 그 사랑에 욕심이란 게 나게 되니 말이다.
울다 웃으면 엉덩이에 뿔 난다던데. 시큰둥하고 시답잖게 툭툭 뱉는 안유진의 말이 예전과 같아서, 조금 전까지 흐느꼈으면서도 웃음이 비집었다. 예전에 사귈 때 같았으면 내가 그렇게 예쁘냐 거나 하는 오그라드는 말을 하면서 애교를 부렸을 텐데 어제는 그냥 웃는 거 말고는 더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조금 전까지 전화를 걸었어도 받지 않은 휴대폰을 내려다본다. 또 망설이다가 겨우 전화를 거는 건 결국 사무실 번호다. 결국 한 마디도 못 하고 목소리만 겨우 듣고 끊을 거면서.
인터넷에 부정청탁금지법 하고 검색을 했다. 식대는 3만원이라는데 다른 건 얼마가 상한선이지. 이런걸 검색하고 있는 게 퍽 웃겼다. 이어폰을 새로 하나 사주고 싶은데 선물은 얼마까지 할 수 있는 걸까. 초록 창에 꼼꼼히 검색을 해보니 선물은 5만원이 상한이란다. 농축수임산물은 15만원. 이어폰은 농축수임산물이 아니니까 그럼 5만원이겠네. 이걸 한 번에 5만원까지라는 거야 5만원짜리를 오백번 주는 건 괜찮은 거야. 5만원짜리 이어폰이랑 5만원짜리 운동화를 같이 선물해도 되는 건가? 기준을 모르겠다.
일단 통화할 때 자꾸 드문드문 소리가 끊어지는 이어폰이 급해 보여서 이어폰부터 이것저것 찾아봤다. 번개처럼 4시간 내 당일 배송이 된다는 해외 유명 업체의 유선 이어폰이 5만원이 채 안 하는 건 이걸 사주라는 기운인가 보다. 고르고 골라 유진을 닮은 파란색으로 주문을 했다. 운동화도 찾아보는데 기능성 운동화 중에 5만원짜리는 눈을 씻고 찾아봐도 없다. 아무래도 많이 뛰어 다니니까 런닝화 같은 걸 신어야 할 것 같은데, 제가 광고하고 있는 스포츠웨어 브랜드도 들어가 봐도 뭔 29만 9천원 이래서 사줄 수가 없었다. 근 몇 년간 얼마 이하 선물을 고르느라고 머리를 싸매는 건 해본 적 없는 일 같은데. 예전에 뜨개질해서 머플러를 선물 했던 것처럼 운동화를 만들어서 선물 하고 싶은 심정이 들었다. 털신을 신고 뛰는 안유진. 상상만으로도 귀엽고 웃겨.
이것도 유진이 받는다고 할 때나 의미가 있는 건데 혼자만 김칫국 마시고 있는 걸 수도 있었다. 안 받겠다 하면 아무짝에 소용없는 짓이었다. 그래도 이어폰은 바꿀 때가 되긴 했으니까 받지 않을까.
오전에만 두 번. 부재중으로 표시된 수신목록을 봤다. 이제 원영의 번호인 걸 아는 데도 지난 밤 여파로 받을 수가 없었다. '장원영' 하고 저장명이 또 한 번 번뜩인다. 마른세수를 하고 모니터나 들여다봤다. 모니터에 켜진 활자가 눈에 잘 들어오지 않았다. 사람의 마음이 참 복잡하다. 누가 어떻게 하면 좋은 지 알려줬으면 좋겠다. 이미 다 잊고 끝냈다고 정말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또 왜 이럴까. 나도 모르게 저 마음 구석 어디에 미련이랄 게 남았나. 되지도 않을 일인 걸 알면서도 원영이 올려놓고 간 등 때문에 자꾸 여기저기 마음에 등이 켜진다. 그 일을 겪고도 또 정말 이렇게 미련곰탱이가 따로 없다.
혹시나 그때 그냥 도피했던 게 아니었나 곰곰이 생각이란 걸 했다. 돌파한 게 아니라 도피를 한 건 아니었을까. 지금도 부재로 두는 저 통화의 수 만큼 도망치고 있다. 범인을 쫓는다고 경찰이 되었는데 지금 쫓기고 있는 것은 저인 것만 같다. 막내가 간식입니다 선배님- 하고 책상 위에 올려놓는 매콤 전주 비빔 삼각김밥을 툭툭 뜯어서 입안으로 욱여넣었다. 원래 이렇게 이거 맛이 맹맹했었나. 저도 모르게 맹맹하다는 말을 입으로 냈는지 막내가 그게 그래도 삼각김밥 중에는 제일 매운 겁니다- 고추장이라도 뿌리시겠습니까? 해서 아니라고 손을 저었다.
잠복을 해도 도통 코빼기도 안 비추는 약쟁이 수배에 대한 제보가 들어온 내역을 쭉 뽑아서 훑었다. 괜한 상념에 젖지 말고 일이나 열심히 해야지. 자고로 마음이 복잡할 때는 일에 치이는 게 낙이라는 걸 진작 알았다. 포상금이 있는 탓에 쓸만한 제보보다 아니면 말고 식의 제보가 더 많았지만, 개중에 건지는 게 가끔은 있었다. 구체적인 제보는 아니어도 비슷한 사람을 어디서 봤던 거 같아요 정도만 되도 득이 되는 경우가 있다. 비슷한 사람을 같은 곳에서 봤다는 사람이 두어명이면 그 곳은 가 볼 만한 가치가 있었다. 이미 그 새끼는 부모랑은 절연한 지 오래에 빚쟁이 때문에 부모님도 도주하는 신세라 그쪽은 소득이 없다지만, 슬슬 돈이 마를 시기가 됐으니 어디든 한 번은 얼굴을 비출 때가 됐다. 서울 여친 집에도 머리털 하나 안 비추는 거면 그 여친이랑은 혹시 사이가 틀어졌나. 하긴 뭐 그 여친도 약하는 여잔데 약하는 애들끼리의 의리니 애정이니 그런 건 실낱같이 하찮았다. 잡아놓고 보면 공범 제일 술술 불어대는 건 다 약쟁이들이니까.
' 네, 방배서 강력계입니다. '
자리에 요란하게 전화벨이 울리더니 유진이 받자마자 별 다른 말 없이 전화가 끊어졌다. 이 장난 전화가 또 왔네. 진짜 통화내역 뽑아달라 해야 하나. 건너편에 앉아있던 막내가 선배님 자리로 자꾸 이상한 전화 오지 말입니다. 하고는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 나 없을 때도 왔어? "
" 예- 선배님 있는지만 묻고 그냥 끊어버리고 그러지 말입니다. "
" ...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있는 지 물었다고? "
" 예- 선배님 자리에 계시는지 어떤 코맹맹이 소리 여자가 물었습니다. 그리고 없다고 하면 죄송하다고 하고 바로 끊습니다. "
연락처 남기시면 회신 드린다고 했는데 그냥 죄송하다고 끊고 그럽니다. 말하는 투가 장난 전화도 아니고 정갈하게 갖춰진 말투인데 영문을 모르겠다고 갸웃거린다. 유진도 영문을 모르겠다. 제가 자리에 없을 때 있냐고 물어보는 사람과 제가 받았을 때 아무 말 안 하는 사람이 동일 인물이라면, 그냥 내가 자리에 있는지 확인하는 사람이라는 건데... 팀 전체의 위치도 아니고 나만? 굳이? 그럴 일이 뭐가 있을까. 지원팀에 전화를 넣어 자리 회선에 통화내역 좀 뽑아 달라고 간단히 요청하고는 계속 머리를 굴렸다.
담당 경찰의 위치를 알고 싶어 하는 용의자들이 왕왕 있긴 해도 이렇게 담당 경찰 자리에 전화를 걸어보는 간땡이가 배 밖으로 나온 경우는 흔치 않은데. 예전에 미행했었던 정보원 하나가 그런 적은 있긴 했지만 요즘엔 미행 같은 건 하지도 않아서 머릿속에 물음표만 가득 찼다. 게다가 혼자만 맡은 사건이랄게 없어서 도무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요즘은 밖으로 잡으러 뛰어다니는 건 금지당한 상태라 맨날 사무실에 있거나 법원이나 국과수 같은 데 증거품 들고 나르거나 그런 것만 하고 있는데 나를 왜.
그러다가 문득 아, 내가 혼자 하는 게 있긴 하구나. 예민이란 게 또 도져서 자꾸 원영의 일로 귀결된다. 혹시 내가 원영을 신변 보호 하는 걸 아는 사람이 내 위치 같은 걸 알고 싶어하나. 내가 자리를 비운 다거나 그런걸 원영의 외출 일정과 맞춰 볼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는 사람이 있는 건가. 이름을 내놓고 다닌 건 성수동 팝업 때 밖에 없는데. 그때 내 신분이 그렇게 노출되어있었나. 심란해져서 책상을 탁탁탁 무의식중에 펜으로 쳤다.
저 구석에 앉아있던 김 선배가 그 정도면 전 애인 아니냐? 하는 말에 기다렸다는 듯이 막내가 안 선배 모쏠 아니었습니까? 해보자는 것도 아니고 쨉을 날렸다. 너보다는 내가 많이 했겠지- 선배님, 그럴 리가 있습니까? 내기하시겠습니까? 그럴 리가 있냐니- 둘이 투닥거리다가 김 반장한테 둘 중에 누가 연애 많이 해봤을 거 같냐고 골라보라고 올려다봤다.
딸래미 아들래미 한심하게 보듯이 내려다보던 김 반장이, 쯧. 가지가지들 하고 있다. 혀를 차다가 그래도 막내가 더 많이 하지 않았겠냐? 유진은 결국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아니 저한테 제일 얼굴 낫다고 하셨잖아요. 얼굴이 낫다고 했지 연애를 잘 할 거 같다고 하진 않았다. 너 인기 없을 스타일인데. 말 문이 막힌 건 유진하나고 김 선배랑 막내랑 저 구석에 최 순경까지 다들 큭큭 거린다.
유진이 넌 글렀어. 사람이 좀 이기적이게 상대한테 나 좀 그냥 사랑해줘라 나 힘들다 이러고 의지하고 그래야 연애도 하지. 너는 뭐 피 철철 흘리면서 간이고 쓸개고 상대한테 다 빼주고 스스로 동굴 팔 타입이다. 그리고 내가 네 애인이어도 그렇게 물불 안 가리고 뛰어다니다가 탈골되고 그러면 발 뻗고 못 자서 너랑은 연애 못하겠다- 뭔지 알지? 무슨 말씀이냐고 대들려다가 앞에는 또 틀린 말은 아닌 거 같아서 그냥 적당히 모르겠다고 하고는 앉았다. 난 너무 알겠는데- 넌 너무 정의로운 스타일이야. 김 선배 말에도 할 말이 없었다. 다들 유진에게 어벤져스니 스파이더 우먼이니 하는데 스스로는 겁쟁이라고만 여겼다.
" 제가 무슨 진짜 스파이더 우먼인 줄 아세요? 뭔 연애까지 그렇게 한다고들... "
" 그럼 선배님의 메리 제인이 장난 전화 한다는 겁니까? "
" 메리 제인은 또 뭐야? "
" 메리 제인 모르십니까? 메리 제인 왓슨이라고 스파이더맨 여친입니다. 예전 스파이더맨 초창기에 나온 캐릭터인데, 직업이 배우입니다. 저 그 캐릭터 진짜 좋아하는데- "
막내가 주절주절 스파이더맨이 당신의 친절한 이웃이라고 하는 히어로인데 어쩌고 하면서 일대기를 읊어대는 거에 한숨이 푹 나왔다.
" 야, 진짜... 시끄럽고. 혹시 나 신변 보호 나갔을 때도 전화 왔었어? "
" 아뇨? 신변 보호 가셨을 때는 전화 안 왔지 말입니다. 그냥 지난번에 법원이랑 국과수 가셨을 때만 제가 받았습니다. 아, 그리고 선배님 비상 연락망 업데이트하셔야 하지 말입니다. 가족 번호 주십시오. "
" 어, 나중에. "
신변보호 갔을 때는 또 안 왔다고? 전 애인이라고 해봐야 장원영 하난데 원영이 사무실로 장난 전화하는 건 개뿔 말도 안 된다.
" 반장님. 장원영 씨 신변 보호요. 당분간 막내로 좀 담당 경찰 변경해주세요. "
" 왜? 어깨 많이 안 좋냐? "
" 제 사무실 전화로 자꾸 전화가 오는 게, 아무래도 제 위치 확인을 하는 거 같은데... 장원영 씨 신변 보호 건하고 혹시 연관이 있을까 봐요. "
" 그 스토커인지 뭔지가 경찰 위치도 따나보네. 가지가지하는구만. 막내야, 여청과에서 더 연락 없냐? "
" 아, 그건 안 그래도 여청과에서 삼일이면 잡을 거 같다고 해서, 이번 주 스케줄만 한 번 더 지원 가면 될 것 같습니다. "
다행이네. 삼일이면 잡을 거 같다니. 다음 신변 보호부터는 담당 형사가 변경된다고 원영에게 연락을 하려다가 굳이 뭘 이걸 또 연락을 하나 싶어서 말았다. 오지랖이지. 경찰이 배우랑 대화 할 일도 없을 텐데.
* 여청과 : 여성청소년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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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시즌에 광고만 십여개를 하는 통에 팝업 행사니 매장 오픈 행사니 하는 걸 빠질 수가 없는 게 그동안은 힘들다고 생각했다. 촬영을 매진해서 해야 하는 시즌에도 달에 한두 번은 행사에 가는 통에 자꾸 극에 몰입 된 게 깨지고 방해되는 상황을 견디기 싫었던 것 같다. 종종 가을에게 행사 가야 할 일이 많은 광고는 안 하고 싶다고 얘기를 하기도 했었는데, 그때마다 가을은 행사가 많을 수록 단가가 높고, 또 대중 노출도가 높아야 작품도 더 들어오고 화제성도 유지된다고 안 된다고 했었다. 그래서 스파이 역을 연기하고 있는데 행사에서는 톱스타 여배우로 돌아와야 했고, 헤메코가 스파이에 맞게 세팅되어있는데 그 세팅을 그때마다 바꿔야 했다.
너무나 당연하게도 작품을 하는 스타일 그대로 뷰티 행사에 와주길 바라는 광고주는 많지 않았다. 그럼 그때마다 샵에 들어서 머리를 붙였다 뗐다 메이크업을 이랬다저랬다 여간 골치가 아니었다. 그럼에도 가을의 설득에 홀라당 넘어가서 그걸 꾸준히 참고 참은 게 잘한 일이라는 건 바로 이런 행사 때마다 신변 보호랍시고 경찰이 온다는 거다. 즉 유진이 온다는 거. 지금도 형사 역을 찍고 있어서 한동안 귀걸이도 잘 안 하고 누드톤 메이크업만 하다가 오늘 뷰티 행사랍시고 거의 아이돌 무대화장 같은 화장을 하고 왔다. 의상도 바비인형이 따로 없는 핑크 의상이고, 속눈썹은 또 얼마 만에 한 거야 진짜.
차량 밖으로 내리기 전에 창밖으로 유진이 어디 있는지 빼꼼히 보는데, 아무리 봐도 유진이 보이지 않는다. 창밖으로 카메라를 들고 있는 기자들이나 팬들은 빼곡히 보이는데 씨큐랑 같이 경찰이 서 있던 곳에 유진이 부재다. 경찰이 분명 왔댔는데. 지난번 성수동 팝업 때는 바로 차량 앞에서 부터 유진을 볼 수 있었다. 전에 유진이 서 있던 바로 차량 앞자리에 유진은 없고 웬 거구의 헐크 같은 남자가 서 있는데, 진짜 안유진은 어디 있는 거야. 행사 시각이 다 됐는데도 유진은 안보이고 결국 그냥 씨큐가 안내해주는 걸 따라서 행사장으로 들어갔다.
포토라인에 서서 사진을 찍고, 인터뷰를 하는 와중에도 이리보고 저리봐도 유진이 없어서, 매니저한테 경찰은 혹시 안 왔어요? 하니까 왔단다. 어디 있는데? 매니저가 가리키는 곳을 보니 아까 그 거구에 헐크 같은 남자다.
" 안녕하세요. 장원영이에요. "
" 네- 안녕하십니까. "
자연스럽게 웃는 낯으로 새로 온 처음 본 형사에게 인사를 건넸다. 바쁘신 와중에 도움 주셔서 너무 감사하고 덕분에 제가 이렇게 스케줄을 안전하게 하고 있다고. 수사하기도 바쁘신데 저 때문에 어려운 걸음 하셔서 어떻게 해요.
" 오늘은 안 형사님이 안 오셨나 봐요? "
" 아- 그게 안 경위님이 노출이 되신 거 같다고 해서 저로 담당 경찰관이 바뀌었습니다. "
맙소사. 사무실로 자꾸 이상한 전화가 들어와서 아무래도 혼자 맡은 장원영 신변 보호건 관련해서 위치 확인을 당하는 거 같다고 바꿔 달라고 했단다. 원영은 머리가 지끈거렸다. 그 전화 내가 한 거라고 할 수도 없고 이일은 어떻게 한담. 안타까워하는 낯을 들킬세라 얼른 표정 관리를 하고는 그럼 앞으로 계속 오시는 건지, 이제 유진은 다시는 안 오는지 다시 한번 더 물었다. 사근사근한 목소리로 떠보는 거에 따른 의도가 있다는 걸 들키지 않았으면.
" 용의자 특정이 되어서 곧 잡힐 것 같긴 한데...앞으로 지원 나올 일 있으면 그것도 제가 하게 될 것 같습니다. 아무래도 안 경위님은 곧 경감이셔서. "
" 경감이 뭐에요? 경위 다음? "
" 네네- 경위가 승진하면 경감이 됩니다. 이제 경위 6년 차셔서, 곧 경감 다십니다. "
이 사람, 뭔가 착각을 하고있는 거겠지. 유진이 경위 6년 차 일리가.
" 안 형사님이... 6년차세요...? "
혹시 몰라서 다시 한번 더 확인차 물었다. 묻는 목소리가 조금 떨리는데 티가 나지 않게 힘을 주어 말을 내었다. 많이 연차가 되었어 봐야 5년 차 일 거라고 생각했다. 6년 차 일리가 없잖아. 대답을 기다리는 입술이 타고 침을 삼키는 동안에도 조금 어지러운 것 같았다.
" 아, 되게 동안이셔서, 저도 저랑 두세 기수 차이 날까 했었는데. 6년 차 맞습니다. 68기. "
순간 조금 토할 것 같았다. 6년 차면, 그때 합격을 했어야 6년 차가 되는데. 분명 유진은 그때 불합격 했다고 했었다. 도무지 어떤 상황인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 시선은 이미 바닥을 보고 흔들리는 눈동자를 가눌 수가 없어졌다. 최대한 표정 관리를 하려고 이를 악물었다. 저 깊은 곳으로 숨을 들이 마셔도 안까지 숨이 들어차지 않는 기분. 무엇인지 모르는 아주 강한 힘으로 폐가 쥐어 뜯어 지고 있었다. 태연하게 웃어 보이는 미소에 누구도 원영의 속이 저렇다는 걸 눈치챌 수 있을 리는 없었다. 다시 누구보다 더 화사하게 눈웃음을 짓고 손을 카메라에 흔드는 그 마음이 전혀 화사하지 않았다.
여청과에서 원영의 스토커인지 뭔지 인터넷에 이상한 글을 썼다는 놈을 검거했다고 연락을 받았다. 유진은 용의자 얼굴이나 한번 볼 셈으로 여청과 사무실을 기웃거렸다. 도대체 어떻게 생긴 놈일까. 지난번 그 빨간 볼캡일까. 안 경위가 여청까지 무슨 일? 아- 용의자 하나 얼굴 좀 보려고요. 고개를 숙여가면서 여청과 사무실에 들어서서는 조서를 쓰고 있는 옆 모습을 슬쩍 봤다. 옆 모습이 낯이 익었다. 조서 쓰는 걸 귀를 쫑긋해서 들어보니 서른살이란다. 나이도 먹을 만큼 먹은 인간이 진짜 정신이 나갔구만. 순간 욱해서 뒤통수를 후려치고 싶었다.
미성년자도 아니어서 무조건 기소는 될 거 같은데, 상황이 상황인지라 원영이 선처 할 것 같다고 생각했다. 이런걸 선처하면 또 본보기가 되지 않아서 비스무레한 일이 계속 일어나게 되는데, 아쉬워도 어쩔 수 없는 것은 수사를 요청한 연예인 또한 이미지를 먹고사는 직업이기 때문이겠지. 그런 걸 보면 연예인이 정말 쉬운 직업이 아니다. 여기저기서 욕먹고 위협당하고 그러면서도 또 강력하게 처벌해달라고 하기 어려운 입지라는 게 말이다.
원영에게 용의자가 검거되었으니 이제 안전하다고 연락을 하려다가, 어련히 반장님이 알아서 소속사에 통지를 할까 싶어서 굳이 연락을 하지는 않았다. 새삼 저번에 막내가 간다고 문자를 미리 줄 걸 그랬나. 너무 무섭게 생겨서 좀 놀랐을 수도 있는데. 헐크 같이 생겼어도 매우 따듯하고 순한 녀석이라는 걸 미리 알려 줄 걸 그랬다. 보고 놀라서 까무러쳤으면 어떡하지.
해가 다 떨어지고 별 하나 뜨지 않은 늦겨울에 낮은 하늘을 보고 퇴근길을 걸었다. 이젠 신변 보호 더 할 일도 없으니까 뒤숭숭 하던 것도 끝이려나. 골목에 구부러진 길을 걷다가 크게 기지개를 한번 켜고 하늘을 다시 올려다봤다. 콧속으로 아직 차가운 바람이 훅 스며들었다. 원영도 이제 안전해 졌으니까, 나도 괜찮아지겠지. 예전처럼 TV에서나 겨우 보는 그런 상태로 되돌아가면 다시 다 괜찮아질 것 같다. 미련인지 뭔지 모르겠는 그런 것들도 회피인지 돌파인지 몰라도 그냥 뭐든.
길가에 밟히는 돌가루들을 슥슥 긁어보다가 원영과 다른 미래를 혹시 그려봤던 건 아닌가 그런 생각을 또 했다. 꿈의 주머니에 넣어두었던 게 번듯한 형사라는 두 글자가 아니라 원영과의 무엇이었으면 제 꿈은 아무것도 못 이룬 건 아닌가.
실은 그냥 좋은 사람인 척을 하는 걸지도 몰랐다. 원영을 위하는 거 그런 것도 물론 있었겠지. 그렇지만 온전히 그것 뿐만은 아니었을지도. 스물 다섯의 안유진은 어쩌면 무서웠을지 몰랐다. 버림받기 전에 버리는 게 낫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정확히 말하면 그때 이미 버림 받은 거나 마찬가지니까. 원영의 입에서 말만 나오지 않았다 뿐이었다. 시간이 더 지나서 그런 일이 일어나면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았다. 스스로 극복 할 수 없을 거라 생각해서 미리 버림받는 걸 택했던 것 같다. 저의 위선이 이제서야 눈에 보인다. 사랑해서 헤어졌다 했는데, 무서워서 헤어진 거였을지도. 불안한 미래, 예견되지 않는 상처에 대한 두려움 그런 것들이 끝까지 원영을 붙들지 못하게 만들었던 것일지도 몰랐다.
휴대폰으로 '장원영' 하고 화면에 불이 들어온다. 받을까, 말까. 지금 이런 속으로 전화를 받으면 속에 있는 말을 자칫 잘못해서 해버릴 것만 같다. 잠시 망설이는 사이 부재중으로 바뀐다. 두 번째 전화 역시 받을 용기가 나지 않는다. 제가 겁쟁이라는 것을 들킬 것만 같았다. 마침내 세 번째 화면에 '장원영'하고 글자가 반짝이고 나서야 겨우 저 안에서부터 용기를 짜내어 그 전화를 받았다.
' 언니, 전화 왜 이렇게 안 받아. '
' 바빴어. 대한민국이 범죄의 왕국이라. '
' 할 얘기 있는데 집에서 잠깐 보면 안돼? '
원영의 목소리가 조금 젖어있었다. 눅눅하다 못해 여기저기 축축했다. 원영의 저런 목소리는 자꾸 사람의 마음을 약해지게 만든다. 꼭 무슨 일이 있는 것만 같아서.
' 무슨 일 있어? '
' ...응. 그러니까 얼굴 보고 얘기 좀 해. '
' 무슨 일인데. 전화로는 못 하는 얘기야? '
' ...언니 사무실에 전화 건 사람 나야. '
막내가 코맹맹이 소리 여자가 전화했다더니 나름 음성 변조란 걸 한 장원영이었나보다. 막내가 메리 제인아니냐고 하더니 정말 메리 제인이었네. 왜 굳이 사무실에까지 전화를 했을까. 원영은 그때나 지금이나 행동이 투명했다. 말은 불투명하게 해도 행동은 투명한 장원영.
' ... 이젠 그러지 마. '
' ... 저거 말고도 할 말 더 있어. 그러니까 얘기 좀 해. '
' 뭔데? '
' 얼굴 보고 해야 하는 얘기야. 내가 지난번에 라면도 다음에 끓여준다고 했잖아. '
얼굴을 마주하면 자꾸 감당 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것만 같다. 그런데도 저렇게 원영이 말하는 것을 끝내 또 거절하지 못한다. 젖어있는 저 목소리가 울 것만 같아서인지, 그냥 장원영을 거절하지 못하는 건지 이유를 알 수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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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진은 원영과 마주 앉아 맹탕인 라면을 김치를 올려서 호록호록 먹었다. 통 라면을 끓여 먹질 않는 원영이 끓인 라면이니, 한강인 건 당연한 일이었다. 다음에 라면 끓여준다더니 정말 한강라면을 끓여줬다. 원영은 두어젓가락 먹다가 그냥 젓가락을 내려놓고는 유진을 바라봤다.
" 우리 엄마 김치 맛있지. "
" 응, 맛있어. "
" 다음에 파김치도 보내주신댔어. "
" ...너 파김치 안 먹잖아. "
" 그걸 기억해? "
유진이 라면을 먹다 말고 고개를 들어서 원영을 잠시 바라본다. 그러게, 그걸 기억하네 내가. 스스로 얼그레이 케이크 먹던 입맛인 건 잊어버렸으면서, 그 사실이 또 착잡하고 우스워서 유진은 별 다른 대답은 않고 다시 차분히 젓가락질을 이어갔다.
" 할 말은 뭔데? "
" 다 먹고 나서 얘기해 저녁도 못 먹었다며. "
달그락-젓가락과 도자기 그릇이 가볍게 부딪히는 소리가 난다. 멈추지 않았으면 하는 소리. 원영은 턱을 괴고 그 소리를 내는 이를 보면서 그 소리를 듣는다.
" 엄마 파김치오면, 짜파게티도 다음에 끓여줄게. 또 먹으러 올래? 파김치에 짜파게티 먹는 것도 좋아하잖아. "
" 분식집이야? "
" 응, 안유진 전용이야. "
엄마가 단호박 식혜랑 갈비찜도 보내준다고 하셨어. 단호박 식혜도 얼려서 줄게. 응? 언니 그것도 좋아하잖아. 갈비찜도 다음에도 먹으러 오라고 얘기를 하는 원영을 유진이 가만히 쳐다본다. 표정이 없는 것도 아니고 웃는 것도 아니고 무슨 생각을 하는 지 알 수가 없는 표정이었다. 원영은 내심 그래도 지금 유진이 자릴 박차고 나간 다거나 하지 않는다고 스스로를 위안했다.
" 너 왜 자꾸 집에 오라고 나 꼬셔. "
먹는 걸로 자꾸. 경찰이라 잘 못 먹고 다니는 거 같아? 나 잘 먹고 다녀. 하고는 다시 호록호록 라면을 먹었다.
" 보고 싶어서. "
저 말에는 끝내 유진이 젓가락을 내려 놓았다. 젓가락과 도자기 그릇이 가볍게 부딪히던 소리는 금세 사라지고 그 자리를 정적이 채웠다. 유진에게서 빤히 돌아오는 시선이 감히 네가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냐는 듯 칼이 되어 원영에게 날아들었다.
" ...미안해. "
이미 눈가가 다 젖어 들었는데도, 그 칼에 철철 피를 흘리는데도 입술을 깨문 원영은 미안해 뒤에 더 말을 내지 못했다. 무슨 말을 해도 위선일 것 같았고, 그 어떤 말도 죄일 것 같았다. 그날 그 순간부터 지금까지 모든 날이 이기적이었다. 다시 사랑해달라고 빌었는데 그것조차 지독한 이기심이라는 걸 알았다.
" 그때, 언니가 거짓말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
솔직하지 못했어서 미안해. 내가 너무 나빴어서 그리고 지금도 너무 나쁘고 이기적이어서 다 미안해. 보고 싶어 하는 것도 다 미안해.
기어이 눈물이 두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후회한다고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사죄하면서 흘리는 눈물은 끓어 넘쳐서 참아지지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