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그때, 언니가 거짓말 하게 만들어서 미안해. "



원영이 저 말을 내었을 때는 순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마음이 동굴이 되어서였는지, 원영이 울면 아무것도 못 하게 되는 돌이 되어선지 알 수가 없었다. 


드라마나 영화에서도 종종 원영이 눈물을 흘리는 장면을 보긴 했었다. 드라마에서 눈물을 흘리는 장원영은 맑고 아련한 눈망울로 한두방울 뺨을 타고 흐르게 눈물을 흘렸다. 그걸 볼 때마다 이제 예쁘게 울 줄도 아는걸 보니 배우긴 배우구나 생각했었는데, 전혀 아니었던 것 같다. 유진의 앞에서 미안하다는 말을 하면서 우는 원영은 예전처럼 발음도 다 새고 얼굴이 발갛게 퉁퉁 부어서 엉엉 울었다. 




6년 전 그때 했던 거짓말을 언젠가 들킬 거란 걸 몰랐다면 거짓말이었다. 다른 세계에 발을 딛고 사는 우리가 접점이란 것이 생겨서 마주치게 되었을 때 어쩌면 이런 상황은 예견 된 일이었을 거다. 다만 그 타이밍을 예상치 못 했을 뿐이었다. 오히려 그때였다면 좋았을까. 하늘이 참 가혹하시지. 지금 아니라 차라리 그때 네가 나의 거짓말을 알아챘더라면 그럼 내가 조금 덜 버린 받은 기분이었을까. 이제서야 미래에 내가 있는 장원영. 그리고 또 언제 다시 미래에 내가 없을지 모르는 장원영. 다시 자꾸만 그 겨울 그 국밥집 낡은 테이블에 날 앉혀놓는 장원영. 원영은 너무 늦은 후회로 너무 늦은 사죄를 하고 있었다.






" 미안해가 아니라 고맙다는 말을 해야 하는 거 아니야? 네가 하고 싶었던 말을 내가 그때 대신해줬는데. "



돌이 되어버린 마음을 원영에게 던졌다. 제가 던진 그 말이 칼이 되어 원영에게 꽂혀 들 거라는 걸 알았다. 거짓말로 문드러진 걸 잘 숨겨놓았는데 기어이 그걸 들추어냈으니 끝내 유진은 날카롭게 휘두를 수 밖에 없어졌다. 유진이 휘두르는 말에 찢어지고 베이고 피를 흘리는 이가 숨도 죽이지 못하고 울고 있었다. 마주한 벌겋게 퉁퉁 부은 얼굴에서 숨이 넘어 갈 듯한 소리가 났다. 셀 수 없는 미안하다는 말과 잘못했다는 말이 유진의 앞에 쌓였다. 단 한 마디를 가져와 상처에 덧댈 수도 없었다. 그때 알았다. 모든 말에는 때가 있다는 걸. 때를 놓친 말은 그저 또 한 번의 상처가 될 뿐이었다. 



숨이 넘어갈 듯한 울음소리는 곧 유진의 귀를 멍멍하게 만들었다.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잘못했다고 하는 그 얼굴을 차마 계속 마주 볼 수 없었다. 가만히 몇 젓가락 남은 라면 그릇을 내려다봤다. 물이 너무 많아서 싱겁고 심심한 원영이 끓인 한강라면. 그 겨울 원영을 앞에 두고 혼자 먹었던 그 청양고추가 가득했던 국밥이랑 전혀 다른 맹탕인 라면.




 " 내가 안 했어도 네가 헤어지자고 했겠지. 그냥 바쁜 현대사회에 시간 절약했다고 생각해. "




나라고 뭐, 나를 방해라고 생각하는 사람과 미래라는 걸 생각하고 싶었겠니. 둘 다 잘됐지 뭐, 너 배우 되고 싶어 했잖아. 원영의 얼굴을 보지도 못하고 저 말을 하는 목구멍이 타들어 갔다. 매운 걸 먹은 것처럼 식도가 얼얼했다. 맹탕인 라면을 먹어서 조금도 맵지 않았는데 온 몸이 따갑고 아렸다. 반짝이는 한강 둔치가 내려다보이는 20층에 앉아있는데도 마치 그 겨울 대학로 골목 안 국밥집에 앉아 있는 것 같았다. 



원영이 이제 와 어떤 미래를 그리던, 그 자리에 유진이 그리는 미래는 자꾸만 부정적 이어졌다. 아주 크게 넘어져 다친 자리에는 흉이 남는다. 그렇게 넘어진 길은 또 넘어질까 봐 사람을 움츠러들게 만든다. 그리고 다시는 그 길로 가지 않는 것을 택한다. 버려질지 모른다는 불안은 더 큰 두려움을 낳는다. 그래서 이번에는 더 있는 힘껏 말을 칼보다 더 날카롭게 휘둘렀다. 아슬아슬하게 눈물로 내민 손을 잡고 싶지 않다는 말을 그렇게 칼을 휘두르는 것으로 한다.




" 네가 원했던 미래랑 내가 원했던 미래가 달랐던 것 뿐이야. 너랑 나는 그냥 같은 페이지에 있을 수 없는 사람들인 거고. "



우린...우리란 말을 쓰는 것도 이상해. 너랑 내가 무슨 우리야. 6년이나 지났는데 이런 대화를 해서 뭐하니... 네가 무슨 말을 해도, 난 이제 절대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저 말을 끝으로 원영을 두고 자리에서 빠져나왔다. 


사람이 망각의 동물이라는 거는 그런 다친 기억을 잊고, 행여 다칠 지언정 그 한 걸음을 그 길로 더 딛으라는 것이었다. 망각해야 하는 기억이 이토록 문신처럼 새겨져서 저는 그 한 걸음을 디딜 수가 없어져 버렸다. 시간이 흉터 위로 질감을 만든 우둘투둘한 벽에 빛이 쏟아졌다. 매끄럽지가 않아서 빛으로 인해 그 질감 너머 그림자가 졌다. 그 어두운 그림자 안에 여전히 유진은 주저앉아 있기를 택한다. 어쩌면 그 빛이 이번만큼은 날 놓지 않을 거란 가능성이 있단 걸 알면서도, 마른 마음 위로 단비를 축축하게 적시고 향긋한 꽃내음으로 날 이끌 가능성이 있는 걸 알면서도, 그래도 그냥 이 기나긴 겨울에 있기를 택하기로 한다. 두 번은 버림받고싶지 않은 마음이 그 선택을 유진에게 강요했다.

  















10평짜리 오피스텔, 창으로 채 달이랑 별이 얼굴을 들이밀지 못하는 침대 위로 유진이 누워있었다. 침대맡 작은 테이블에 올려놓은 시계 초침 소리가 아주 크게 방안에 째깍째깍하고 울렸다. 대로랑 한 블럭 떨어진 차들이 오가는 소리도 들리지 않은 방안에서 저 시계 소리를 셌다. 가로등도 들지 않는, 달도 별도 들지 않는 방 안에 불도 다 껐는데 이상하리 만큼 맘 안에 등이 환하게 켜져 있었다. 다시 올리고 싶지 않았 던 등이 너무 환해서 눈을 꼭 감았다. 눈이 너무 부셔서 도무지 잠에 들수가 없었다.





 어깨랑 몸이 너무 안 좋아서 당분간 쉬어야겠다고, 일주일 정도 길게 연차를 내겠다는 문자를 넣었다. 아직 퇴근을 못하셨는지 늦은 시간에도 김 반장의 답장이 빨리 왔다. 6년 동안 한 번도 연차를 쓴 적이 없는 유진이어서 김 반장은 쉽게 그러라고 답장을 보냈다. 한주 갖고 되겠냐, 길게 쉬어라. 너도 쉴 때가 됐다. 쉬는 동안 어깨 치료 잘 받으러 갔다 오고 제발 밥 좀 세끼 다 챙겨 먹으라고 잔소리를 또 했다. 어깨 잘 치료 받고 2주 뒤에 복귀해라. 치료받은 거 확인 할 거니까 통원기록서 떼와. 김 반장의 마지막 문자가 들어오자마자 휴대폰에 전원을 껐다. 자꾸만 등이 들어오는 곳에 전원을 내리려면 아예 전기를 끊는 게 좋은 것 같다.


 휴대폰에서 나오던 빛도 사라지고 이제 암흑만 가득해진 방안 천장은 새카맣게 못해 무거웠다. 네모난지 동그란지 모양도 알 수 없는 새카맣고 칠흑 같은 천장. 칠흑 같은 그 천장이 이상하리만큼 눈이 부셨다. 자꾸만 그 빛이 눈가를 짓눌러서 잠에 들 수가 없었다. 아무 꿈도 꾸지 않고 과거를 방황하지 않고 모든 혈관을 씻어내듯이 잠들고 싶었다. 그 모든 걸 다 잊어버린 채로. 마치 이 공간에 등이 라는 게 켜진 적 없는 것 처럼.












 원영은 차마 사놓고 주지도 못한 파란색 이어폰만 만지작거리면서 샵 창밖을 계속 쳐다봤다. 안유진은 그냥 존재하지 않았던 사람인 듯이 증발했다. 문자를 보낼 수도, 전화를 걸 수도 없는 그런 처지였다. 유진에게선 절대 먼저 연락 올 일이 없으니 그냥 하염없이 유진의 연락이 들어올 리 없는 휴대폰만 들여다보고, 날씨가 좋기를 바라고 그런 것 뿐이 할 수 있는 게 없었다. 


영화처럼 시간을 되돌릴 수 있다면 모든 걸 다시 하고 싶었다. 현실이 더 잔혹하고 녹록지 않다더니 아무것도 다시 되돌릴 수도, 바꿀 수도 없었다. 그냥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걸로 그 작은 사실 하나로 이제 만족해야 하는 사이인 것은 아닐까. 




" 어머, 어떡해. 메이크업 다시 해야겠다. "

" 아... 죄송해요... "



원영은 본인도 모르는 사이 울고 있었다. 눈빛으로 목소리로 말투로 문장을 구성하는 모든 단어로 갈기갈기 찢어지고 짓이겨졌다. 6년 전 그 겨울에 헤어지자는 말을 들었을 때, 그때 흘렸어야 하는 눈물이고 그때 아팠어야 하는 아픔이었다. 



' 너랑 내가 무슨 우리야. '


우리에겐 우리라는 말조차 가당찮다는 말은 칼이 되는 걸 넘어 원영의 목을 졸랐다. 멈추지 않는 눈물을 피처럼 쏟으면서 숨도 못 쉰채로 저 벼랑 끝까지 내몰렸다. 유진의 그 말이 차라리 전부 원망이었으면, 활화산처럼 폭발하는 6년짜리 분노와 미움이었다면 그것에 베인 상처에 피가 멎고 아물 수도 있을 거였다. 나가는 뒷모습을 붙들고 주저앉아 매달리거나 무릎이라도 꿇고 엉엉 울었을 거였다. 


 ' 난 이제 절대 널 사랑하지 않을 거야. ' 


유진의 그 마지막 말은, 유진이 스스로 하는 처절한 다짐 같아서 원영은 아물 수 있는 기회마저 얻지를 못 했다. 무릎을 꿇고 기어서 쫓을 수도 없게 만들었다. 그 말에 상처가 나는 것 조차 이기심이었다. 혼자 저를 남겨두고 나가는 그 뒷모습에 손을 뻗는 것도 하지를 못 했다. 그 작은 행동도 아주 작은 마음도 유진이 조금도 허락하지 않았다. 














" 이번 지방 촬영 때 탁송하는 거 어떤지, 대표님이 물어보라고 하셨습니다. "

" 서울 스케줄 없어? 나 중간에 안 올라와? "


 당분간 예정되어있는 세트장 촬영 관계로 지방에 내려갈 계획이었다. 그래도 보통은 주에 한두 번은 서울 스케줄이 있어서 집에 들르고는 했는데, 이번에는 가을이 탁송하는 게 어떠냐고 추천을 했단다. 매니저가 호텔은 어디로 예약이 되어있고, 신변 보호 끝났어도 호텔을 통으로 다 쓸 거고 구구절절 이번 지방 촬영 스케줄에 대해서 얘기를 하는데. 어련히 알아서 잘했을까 싶어서 크게 신경 쓰지 않았다. 유진 외에 그 어떤 곳에도 쏟은 기력이 없었다.




" 이번에 서울 스케줄이 중간에 없어요. 그래서 계속 거기 계시긴 하거든요. "

" 그럼 탁송해야지. 호텔에 내내 있을 수도 없잖아. "

" 탁송 했다고 차 끌고 혼자 드라이브하고 돌아다니라는 건 아니야. 차 없으면 은근히 갇힌 기분이 드니까 탁송하라고 하는 거지. 라고 대표님이 말씀하셨습니다. "




 귀신같이 김가을이 또 미리 매니저한테 말을 맡겨놨다. 어떻게 저를 저렇게 빤히 들여다보는지. 저렇게 머릿속에 들어앉아 있을 거면 어떻게 하면 좋은 지도 알려주면 좋을 텐데.




' 사랑이 꼭 같이 하는 것만이 사랑의 형태가 아니야. 그 사람이 놓아달라라면 놓아주는 것도 사랑의 형태지 않을까. '



맞는 말만 하는 김가을. 원영을 아끼는 이 조차도 기어이 유진을 놓아야 하는 게 아니냐는 말을 내었다. 저게 정답지인 양. 저 말은 원영의 머릿속에서 꽉 들어차 있는 말이었다. 인정하고 싶지 않은, 받아들이고 싶지 않으면서도 그렇게 해야 할 것 같은 말. 전부 감수하겠다고, 벌을 다 받을 테니까 다시 사랑하는 선택지를 달라고 바랐는데. 유진이 원영에게 내민 선택지는 단 하나였다. 원영이 바랐던 선택지와는 다른 선택지. 유진은 자신의 부재로 그 선택지를 원영에게 강요하고 있었다. 본인의 부재를 이제 받아들이라는 듯이. 











 





' 습관성 탈구로 갈 수도 있으니까, 너무 무리하지 마시고요. 물리치료 받고 가세요. '



 집 근처 정형외과에서 유진은 매일 물리 치료를 받았다. 삼시세끼 꼬박 챙겨 먹으라고 명을 받은 통에 아침에는 오피스텔 1층에 편의점에서 도시락을 먹었고, 점심에는 맥도날드에 대파 버거인지 뭔지 새로 나온 신메뉴를 시켰다. 바로 튀겨나온 짭짤한 소금이 뿌려진 감자튀김을 밀크쉐이크에 찍어 먹을까- 했다가 그건 또 원영이 알려준 거라 그냥 케첩에다 찍어 먹었다.


 저녁엔 같이 공시했던 타 경찰서에 친구 두 명을 오랜만에 만나서 곱창에 소주를 마셨다. 5일장에 도토리묵 가루 35000원에 계좌이체로 팔았는데 3500원만 들어왔다고 신고가 들어왔다질 않나, 다있다는 전국 체인 매장에서 셀프 계산대에 1000원짜리 안 찍은 거 절도라고 신고했다고 진짜 미치겠다는 친구들의 하소연을 들었다. 그냥 깜빡한 거겠지- 오타 낸 거거나. 요즘 세상이 아주 팍팍해. 아니야 하도 사기꾼 새끼들이 많고 도둑놈들이 많아서 어쩔 수가 없다니까. 에피소드 하나에 소주 한 병. 친구들은 내일 출근이라 머리 아프면 안된다고 제로 소주를 시켜마셨다. 곱창집 철제 연탄 테이블에 곱창이 익고, 추가해서 시킨 막창이랑 반찬들 틈새로 원영의 얼굴이 붙은 제로 소주병이 네병 째 비워졌다. 



 원래 술 마시고 나면 단 거 땡기지않아? 친구들한테 붙들렸다. 곱창집 옆에 마감 불을 밝힌 서울 도너츠에 가서 도너츠를 고르다가, 바닐라 크림 먹을래 얼그레이 우유 먹을래? 한 거에 얼그레이 우유 맛 도너츠를 골라서입에 물었다. 바닐라 크림 하나 얼그레이 우유 하나 더블초코 하나 셋이 각각 다른 도너츠 하나씩 입에 물고 회식을 끝마친 인파가 우글거리는 골목을 같이 걸었다. 옆에선 더블초코맛이 너무 달다고 유난스러운데 유진의 입에서 씹히는 얼그레이 우유 도너츠는 그렇게 달진 않았다. 적당히, 너무 달지 않고 물리지 않는 맛. 한식 좋아하는 한식 입맛 한국인들이 좋아할 법한 그런 단맛. 원영의 말 처럼 제가 좋아할 만한 맛이었다.



 


 


 5일 만에 켠 휴대폰으로 가득 문자가 쌓여있었다. 전원을 내린 거니까 유진은 되감아 확인하지 않는 걸로 했다. 아예 보지 않는 걸로. 알람을 전체 지우고, 문자함을 한 번에 싹 비워내렸다. 수신 목록도 같이. 막내가 촉이 좋다더니 휴대폰이 켜진 걸 어떻게 알았는지 전화가 들어왔다.



' 선배님, 휴대폰 켜신 거 촉이 왔지 말입니다. '

' 뭐야. 네 목소리 들으려고 켠 거 아닌데. '

' 병원 다녀오셨습니까? 반장님이 걱정하십니다. '

' 어- 괜찮아. 다 나았대. 멀쩡하대. '


왼쪽 어깨 부근을 꾹꾹 손으로 눌렀다. 요 며칠 눈이 부셔서 잠에 들지 못한 몸은 계속 늘어졌다. 물리치료를 매일 받아도 어깨의 통증은 갈 수록 심해졌다. 스트레스 성인가. 



' 반장님께서 제발 어디 놀러 가라고 하십니다. 골목에서 보일 때마다 속 터지신답니다. '

' 내가 가긴 어딜가. '

' 축제나 명소 같은 데 많이 아시지 않습니까. 방배서 축제 위키피디아 아니십니까? 제발, 어디 좀 다녀오십시오. 원래 그러면서 스트레스 풀고 머리도 비우고 그러는 겁니다. '


김 반장보다 잔소리를 더 하는 것 같은 막내의 전화를 끊고는 며칠 째 잠에 들지 못해 축 처지는 몸을 다시 침대로 뉘었다. 막내 말 처럼 멀리 좀 가서 콧바람이라도 쐬면 머리가 비워질까. 


원영에게서 있는 힘껏 처절하게 도망치고 싶었다가, 나 그때 아프고 힘들었으니까 있는 힘껏 안아달라고 하고 싶었다가 뿌옇게 선명하지 않은 마음이 안개처럼 눈 앞을 가린다. 들키기 싫은 겁쟁이가 되어서 가진 말을 칼 처럼 휘둘러놓고 너무 다쳤을까 또 자꾸 떠올렸다. 원영에게 안 해도 되는 말을 굳이 했다. 이제 와서 그렇게 베고 상처 준다고 달라지는 것도 아닌데, 그냥 혼자 잘 도망치면 되는 일이었는데. 눈앞으로 원영이 울던 모습이 계속 들어차서 며칠 내내 밤을 새다시피 했다. 처음 아른거릴 때는 외면했다가 두 번 그리고 세 번, 네 번이 되었을 때는 저도 모르게 천장 그 어딘가로 손을 뻗었었다. 흐르는 그 눈물을 닦아주고 싶었는지 오히려 그런 말을 해서 미안하다고 하고 싶었는지 모르겠다.



이제 서른도 넘어 알 거 다 알고 스스로 다 결정하고 책임질 수 있는 나이라고 생각했는데, 왜 이토록 감정 앞에 나약해질까. 또 어쩜 그 감정은 끝도 없는 미로 같은지. 단단하다고 생각했던 마음이 한 꺼풀 벗겨보니 이리 여리고 말랑말랑했었는지 몰랐다. 원영을 다시 마주한 것도 아님에도, 정리되지 않던 마음은 더 어지러워졌다. 방배에서 조금 멀어질까. 물리적으로도 더 멀리 가볼까. 이러다가는 세상의 끝까지 도망쳐야 할 것 같았다. 이제는 도망을 치고 싶은 게 맞는지도 헷갈렸다.



버림 받기 전에 택한 헤어짐을 아파도 받아들인다 했었데, 사실은 헤어지고 싶지 않았었는지. 어떻게든 붙들고 싶었는데 도망친 스스로가 이제와 원망이 되는지. 일전에 막내가 했던 말이 저 깊은 어딘가에서 떠올랐다. 사랑하는데 왜 헤어지냐고.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붙잡고 매달리고 어떻게든 아등바등 지켜내고 해내야지. 과거의 나에게 저 말을 하면 결과가 달랐을까. 그때 내가 매달렸으면 끝까지 붙들고 애원했으면 지금 이렇지 않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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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방 촬영 숙소로 가을이 통으로 빌렸다는 호텔은 적막했다. 매니저랑 경호팀 말고는 아무도 없으니 적막한 게 당연한 일이었다. 최대한 관광객들의 발이 닿지 않는 멀리 떨어진 곳에 그러면서도 세트장에서는 또 너무 멀지 않는 곳에 구한 호텔. 말만 호텔이고, 겨우 3층짜리 모텔에 가까운 2성급 호텔이었다. 바로 옆에 타 도시로 이어지는 고속도로 IC가 크게 뚫려있고, 도심 외곽이어서 논과 밭이 늘어선 관광객이 잘 찾지 않는 동네. 오래전에 세워져 마지못해 장사를 하고있는 그런 호텔이 이번 지방촬영간 원영의 숙소였다. 3층짜리 그 호텔에 원영은 3층 맨 왼쪽 끝 301호 제일 넓고 딱 하나 있는 스위트 룸을 썼다. 더블베드가 두 개 나란히 놓인 트윈 더블베드 룸, 커다랗게 테이블도 있고 테라스도 딸린 룸이었다.



  간판에 한글로 호텔 이름이 쓰여 있는 한 동짜리 한옥을 흉내 낸 모텔 비스무레한 거였어도 뭐 썩 나쁘진 않았다. 테라스 밖으로 드문드문한 가로등과 너르게 펼쳐진 논밭 뷰가 꽤 괜찮았다. 저 멀리 보이는 노란빛은 IC 불빛 인 것 같았다. 숨을 크게 들이마시면 풀내음이 나는 것 같기도. 다시 전화를 걸 엄두가 안 나는 유진의 번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전화를 걸고 싶었다. 목소리도 듣고 싶었다. 보고 싶었고 또 보고 싶었다. 열 번 보고 싶은 걸 꾹 눌러 참다가 한 번 보고 싶다는 말을 하기도 힘들다 했었는데 열 번이 아니라 수십 번 수백 번이 되어가고 있었다. 유진은 이제 꿈에도 하얀 집 천장에도 나오지 않았다. 유진이 보고 싶어서 꾸었던 꿈에는 절대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한 그 말이 대신 원영을 쫓아 들어 여기저기를 쑤셨다. 꿈에서 하도 울어서 깨어있을 땐 눈물이 더 나오지도 않았다. 언니, 꿈에도 안 나오는 게 어딨어. 그럼 난 정말 어떻게 해. 




차를 타고 나갈 시간이 되는지 슬쩍 시간을 확인했다. 이 근처에 갈대숲이 유명하다고 했었는데 바람이라도 쐬면 좀 나아질까. 평소였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이 호텔이 순식간에 감옥 같아졌다. 지금 나는 서울에서 200km는 떨어진 곳에 있고, 유진은 서울 방배에 있을 텐데. 마음은 너무 멀어도, 물리적인 거리는 가깝다고 그거 하나로 위안했었다. 새삼 제 위치가 너무 멀어서 더 막막하고 아득해졌다. 같은 하늘 아래 숨 쉬는 걸로 만족 할 수 있어지는 걸까. 다시 날 사랑하게 해달라고 바랐는데, 그 바람조차 너무 이기적이어서 신께서는 계속해서 형벌을 내리나보다. 이기적이었던 크기만큼, 지독하고 막막한 형벌이 계속되었다. 받아들여야겠지. 그게 유진이 원하는 것일 테니까. 숨을 깊게 들이 마시고 다시 내쉬어도 숨을 쉬는 것 같지 않았다. 자신이 없었다. 놓을 자신도 놓고 나서 살아갈 자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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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영시간 동절기 08:00~18:00 ]


유진은 입장이 이미 마감된 안내판 앞을 서성였다. 너무 늦게 도착했나. 예전에 언젠가 이 곳을 검색해서 알아뒀던 적 있었다. 봄에는 꽃이 피는 축제, 여름에는 바다가 보이는 축제 그런 것들 중에, 날이 추워지면 더 예쁜 곳은 어딜까 그러다 알아본 곳이었다. 방배를 좀 벗어나면 다를까 해서 온 건데, 다음에 낮에 다시 와야겠네. 차를 4시간 넘게 달려왔는데, 너무 늦게 출발했나. 겨울에 철새랑 갈대가 맞아준다던 곳은 이미 문을 닫았고, 갈대숲을 끼고 가로등이 들어온 길을 걸었다. 코 끝으로 푸릇한 풀내음이 아닌 건조한 겨울의 풀내음이 훅 하고 들어온다. 겨울이 아직 버석하게 남은 향기. 중간에 휴게소라도 들를 걸 그랬는지, 저녁을 안 먹어서 그런가 속이 더 헛헛한 거 같기도. 


걸음을 옮길수록 드문드문해지는 가로등이, 처음에는 두 개마다 하나씩 등이 들어와 있었다가, 서서히 멀어져서 세 개마다 하나씩 등이 들어왔다. 스산하게 바람이 불고 샤아아- 하는 소리가 들린다. 바람이 무언가를 쓰다듬고 지나간다. 바람이 나도 좀 쓰다듬어줬으면. 바람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날 좀 쓰다듬어주었으면. 유진의 감각 저 깊은 어딘가에서 이제 더는 몸에도 마음에도 체력이란 게 남아있지 않다고 깜박깜박 경고등을 올렸다.




드문드문한 가로등 사이 제일 밝은 버스정류장에, 요즘은 보기 드물다는 자판기가 버스정류장 벤치 옆 홀로 하얀 등을 올리고 있었다. 시내버스 단 한 개 노선이 1시간마다 한 대씩 온다는 버스 시간표를 보았다. 갈대숲이 펼쳐진 외곽까지 들어오는 시내버스 막차는 이제 곧 끊길 시간이 되었다. 파란 플라스틱 벤치에 앉아서 이제 네 개마다 하나씩 등이 들어온 저 멀리 걸어갈 길을 보다가, 동전이 있었던가 주머니를 뒤적였다. 다행히 오백원 짜리 동전이 하나 걸려서 냉큼 밀크커피 한잔을 뽑았다.


서울에서 차로 4시간이 떨어진 곳. 거의 수백킬로미터는 떨어졌을 텐데 이러면 장원영으로부터도 조금 멀어지나. 입안으로 넘기는 밀크커피가 달달하다가 끝맛이 씁쓸하게 올라왔다. 부질없는 생각이었다. 지금 여기 앉아서 얼마나 멀어졌을까 이런 생각을 하는 거 자체가 단 한 걸음도 멀어지지 못 하고 있다는 반증이니까. 저 멀리 갈대숲 어딘가에 바람 소리가 아닌 원영이 흐느끼는 소리 같은 것이 들렸다. 10평 오피스텔에서 갈대숲으로 장소만 바뀌었다. 이 정도면 이제 환청이 아닐까. 귀에 들리는 소리를 떨쳐보려고 고개를 두어번 저었다. 누군가를 생각하지 않고 싶어서 하는 생각은 결국 그 사람을 다시 생각하는 것으로 귀결되었다.  



유진아, 걸어야지. 계속 저 멀리까지. 갈 수 있는 데까지. 뛰어서 가지는 못해도 계속 걸어야지. 시간도 해결을 못한 걸 내가 걸어서 도망칠 수 없다는 것을 알아도 발버둥 치는 거다. 괜찮다 하고 살아낸 6년이 정말 괜찮았던 거였는지. 사실은 전혀 괜찮지 않았는지. 정말 사랑하고 싶지 않은 건지 사실은 이토록 처절하게 사랑하는 건지. 







 

오른편으로 너르게 갈대숲이 너르게 펼쳐져 있었다. 나흘을 밤을 샌 잠복이나 비를 맞고 뛰어다니던 탐문보다도 요 며칠이 더 몸도 마음도 녹초가 되었다. 감당이 안되는 감정이 발걸음이 무겁다 못해 그 자리에 주저앉을 것 같게 만들었다. 주차장까지 돌아가긴 쉬운 여정이 아니어졌다. 자칫 발을 헛딛었다가는 넘어질까 봐 가로등 빛이 닿는 곳을 잘 살피면서 걸었다. 가로등 간에 간격은 갈수록 넓어지고 중간마다 어둑하게 빛이 끊어져 늪이 됐다. 별 하나 뜨지 않은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가로등 빛이 끊어지는 곳에도 계속 빛이 들어 뒤를 쓱 돌아봤다. 자동차 한 대가 따라오고 있었다. 곧 지나쳐 갈 줄 알았는데 차 속도가 흡사 유진의 걸음 속도였다. 엉금엉금 따라오는 헤드라이트 빛으로 어두운 길이 환해졌다. 그다음 가로등까지 가는데도 여전히 제 걸음 속도에 맞춰서 기어 오는 그 차를 유진은 다시 한번 돌아봤다. 뭐지. 가로등 빛이 닿지 않는 까만 길의 틈을 그 자동차의 헤드라이트가 하얗게 채웠다. 유진은 헤드라이트 빛이 환하게 카펫처럼 깔린 길을 밟았다. 



졸음운전인가 아니면 인신매매 납치범. 이 지역에 납치사건이 있다는 얘긴 들어보지 못 했는데. 따져 볼 기운이 없었다. 따라오는 그 자동차를 달고 걷다가 더는 가로등이 들어와 있지 않은 길 이제 어둠뿐인 초입에 다다랐을 때 멈추어 가만히 그 자동차를 쳐다봤다. 유진의 걸음에 맞추어 같이 멈춰 선 자동차가 같이 유진을 마주했다. 매끄럽고 유한 바디감의 그 자동차에서 누군가 내렸다. 헤드라이트 등 때문에 정확히 얼굴이 보이진 않고 가는 실루엣부터 확 눈에 들어왔다. 누구지. 나 여기서 지금 납치라도 당하나. 경찰이 휴가 중에 납치당하는 건 좀 웃긴데. 지금은 저항 할 기력이 없는데 이대로 그냥 납치를 당하나.



별이 하나 떠 있지 않은 밤. 옆으로 갈대숲이 늘어서고 건조한 겨울의 풀내음이 코 끝을 파고들어 오는 그 밤. 비로소 빛에 순응한 눈에 그 얼굴이 보인다. 가는 실루엣이, 흐릿하던 그 얼굴이 선명하게 가까이 다가온다. 뒤를 비추는 헤드라이트가 너무 밝은 데도 그 모습이 더 밝은 것 같았다. 눈이 부셔서 살짝 눈을 감았다가 도무지 믿기지가 않아서 아예 눈을 꼭 감고 싶어졌다. 도망치고만 싶더니, 자꾸만 울고 있어서 잠을 한 숨 못 자게 만들더니. 얼굴을 마주하니까 굳게 먹었던 마음 같은 건 다시 다 토해내고 싶어진다. 



우연일까. 한강에서 마주쳤던 그 우연처럼 이번에도 너랑 나 또 우연일까. 우연이 두 번이면 사건이라는데 이번에도 우리 우연일까.






" 언니 왜 여기 있어? 괜찮아? "


놀란 얼굴로 다가오는 원영을 멍하니 바라봤다. 답을 기다리는 원영의 얼굴이 더 선명하고 가까워진다. 한 걸음 또 한 걸음 다가오는 걸음에서 물러나지지 않는 떨어지지 않는 발이 그 자리에 그대로 원영을 기다리고 있다. 그 예전처럼 유진을 보던 얼굴이 온다. 차마 코앞까진 오지 못하고 두어걸음 떨어진 거리에 원영은 멈추어 섰다. 오고 싶어 죽겠다는 얼굴을 하고는 가지런한 눈썹이 팔자가 되어 언니, 괜찮냐구. 하고 한 번 더 묻는다. 



" 괜찮아. "


 아니 안 괜찮아. 말로 꺼낼 수 없었어도 그다음 말에는 그냥 몸이고 마음이고 다 무너졌다.



" 언니... 너무 지쳐 보여 안아줄게. 아니... 내가 안아줘도 돼? "



늘 안아주면서 했던 말. 원영이 이번엔 저 말에 허락을 구한다. 참 이상하지. 내가 겁쟁이라는 걸 들키는 것을 두려워하면서도 너에게만은 다 들키길 간절히 기다린다. 모든 걸 너에게 샅샅이 들키길 바라는 것은 내 두려움을 알아주는 건 너 하나로도 충분하다고 여기기 때문일지도. 그 두려움이 너에게서 기인한 것일 지라도, 피를 흘리게 한 모든 아픔과 불안이 전부 너로 인해 얻은 것일 지라도. 종국에 나는 다시 또 네가 나의 두려움부터 아픔까지 모두 알아주길 바라고 있었다.



뿌리칠 수 없는 말. 벗어날 수 없는 품. 기어이 한걸음에 다가와 그 따듯한 품으로 다시 끌어당겨 그 시절처럼 가둔다. 그러면 안 되는 걸 알면서도 그럴 수 없다는 걸 알면서도 저런 말을 하는 얼굴을 계속 보고 싶게 만든다. 저 걱정어린 말도 계속 듣고 싶게 만든다. 괜찮냐고 묻는 저 물음에 사실은 나 괜찮지 않았다고 말하고 싶게 만든다.




이토록 처절하게 도망쳤는데도, 끝끝내 장원영이 내 인생에 사건이 될 건가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