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진은 지금 이 상황이 흡사 반자발적 납치라고 생각했다. 무너지는 마음처럼 몸도 무너져 내렸는지 손 하나를 까딱 할 수 없었다. 원영을 끌어안았다고 생각했는데 현실은 그 자리에서 한 걸음 꼼짝도 못 하고 반쯤 앞으로 주저앉았다. 그런 유진을 원영이 다가와 끌어안았다. 원영에게 기대 안겨서는 익숙한 심장박동에 눈앞이 깜박깜박하다가, 팔자 눈썹으로 걱정이 덕지덕지 붙은 원영 손에 이끌려서 조수석에 태워졌다. 거절하지 않은 건 거절하고 싶지 않은 저 마음 때문이었다. 그렇다고 이제와 같이 하고 싶다고 말하기도 어려운 그런 마음. 어디로 가는지도 모르겠는 차창 밖에 풍경이 유진의 시선을 지나쳐 계속 뒤로만 흘렀다. 날 어디로 데려가는 거야. 유진은 뭐라 말을 꺼내고 싶으면서도 그다음에 할 말을 또 고를 수가 없었다. 마냥 이대로 이끌려가고만 싶어졌다.



밖과 안에 온도 차 때문인지, 원영이 조절해 놓은 따듯한 차 안이 몸을 늘어지게 했다. 이상하게도 긴장보다 안정감이 먼저 찾아왔다. 눈앞이 흐려졌다가 유진이 다시 정신을 차렸을 때는 호텔 로비를 바라보는 곳에 차가 세워져 있었다. 유진은 옆얼굴에 달라붙는 원영의 시선을 느낄 수 있었다. 돌아볼 엄두가 나지 않았다. 요 며칠 오지 않던 잠이 그 사이 까무룩 하게 와버렸다. 그냥 잠시 어지러웠던 거라고 둘러대 볼까. 갈대숲 주차장에 내려주면 알아서 다시 가겠다고 하면 원영이 거기 주차장에 내려줄까.








" 깼어? 괜찮아? "


원영의 목소리는 여전히 걱정이 군데군데 붙어있었다. 유진이 괜찮다고 해도 괜찮다는 걸 믿지 않을 만큼. 


" 어, 잠깐 어지러웠어서 그래. 너 왜 여기에 있어. "

" 난 촬영 왔지. 언니는 왜 여기 있어. "


너에게서 멀어지려고. 이런 말을 생각하는 자신이 유진은 우스워졌다. 이젠 할 수도 없는 말이란걸 알았다. 원해도 마음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것도. 원영의 집 앞으로 기어이 달려가 섰던 그날처럼 길이 마치 원영을 향해서만 나 있는 듯했다. 아무리 사랑하지 않겠다고 해도 그럴 수 없는 일이었다. 결국 난 지독히 너를 사랑해서 이랬던 거였다.




" 휴가 때 할 것도 없고 해서. 나 거기 주차장에 다시 내려줘. "

" 언니 지금 운전 못 할 것 같은데... 내가 숙소에 데려다줄게. "

" 나 어차피 그냥 갈대숲만 보고 갈 거였어서 숙소 안 잡았어. 바로 서울 올라 갈 거야. "

" 언니... 여기서 서울까지 차로 최소 4시간이야. "


조금전까지 무너질 것 처럼 안겨 있어 놓고 4시간 운전해서 서울 가겠다는 게 원영에게 씨알도 안 먹히는 것은 당연한 일이었다. 무슨 말을 더 할까. 유진은 그냥 더 말을 내지 않고 가만히 저 앞에 환한 로비를 바라봤다. 조수석까지 가득 차게 펼쳐진 와이드 디스플레이에 이제 곧 23시가 가까워져 온다는 시계가 떠올랐다가 사라졌다. 잠깐 시야가 흐려진 건 줄 알았더니 그 사이 3시간도 더 지나있었다. 3시간이나 기절한 것처럼 정신을 놓아놓고 다시 운전해서 올라가겠다 하면 스스로 생각해도 말이 안 되는 말이었다.




" 내 방에서 자고 내일 올라가. "

" 괜찮아. 나 조금 자서... 괜찮아. 운전 할 수 있어. "

" 나 아까 언니 기절 한 건 줄 알았어. 근데 어떻게 언니를 4시간씩 운전해서 가라고 그냥 보내? 내가 언니 잡아먹는 거 아니잖아. 그냥 자고 내일 올라가. "



옅은 한숨 뒤에 어두운 표정으로 꽤 단호하게 내는 말이 뭐라 거절 할 수 없게 만들었다. 마지못해 호텔로 따라 올라가면서 지금 이 모순적인 상황이 어이가 없었다. 그날 원영에게 던진 말에 대해 사과를 해야 할까. 내가 하지 말았어야 하는 말을 했다고. 사실 너를 원망하지 않았었다고.  











원영은 덤덤하고 차분한 목소리로 옆에 침대를 쓰라고 말했다. 테라스 테이블에 놓인 것들을 치우고 간단히 방을 정리하는 동안 시선을 유진에게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졌다. 샤워가운을 내어주고 침대 자리를 봐주는 그 사이에도 원영은 더 이상 별 다른 말을 하지 않았다. 유진은 원영이 만든 그 정적을 굳이 깨지 않았다. 아니 깨지 못 했다. 도대체 언제쯤 상처 받을 용기란 건 생기는지. 딱 한 마디를 해서 딱 한 걸음을 떼면 되는데 그 한마디를 입 밖으로 내지 못하는 것은 6년 동안 다물고 있었던 관성 때문인가. 상처 주는 말은 잘도 해놓고 이럴 때는 또 입 밖으로 침묵만을 낼 수 있는 것이 얼마나 스스로가 한심한가.








유진은 원영의 옆 침대에 천장을 보고 누웠다. 불이 다 꺼진 천장이 무겁게 목을 조르며 내려왔다. 두 팔 간격만큼 떨어진 곳에 놓인 더블 침대에 원영이 누워있었다. 이끌리듯이 원영 쪽으로 돌아 누웠을 때, 어두운 방 안에 반짝한 그 무엇이 원영의 눈인걸 알았다. 원영이 저를 보고 있다는 것도. 그 마주한 눈동자에 놀라지 않았다. 유진은 옅은 숨을 내쉬었다. 원영이 저를 보고 있다는 것에 대한 안도의 숨인 것도 같았다. 



" 언니 왜 안 자...? "

" 아까 좀 자서 그런가. 잠이 안 오네. "

" 걱정 하지 말고 자, 내일 아침에 바로 갈대숲 주차장에 데려다줄게..."



원영은 말끝을 흐렸다. 잠시 숨을 참는 듯했다가 빛이 한점 없는 방안에 입술을 보일 듯 말 듯 하게 깨물고는 다시 나지막하게 말했다.



" 난 언니가 잘 잤으면 좋겠어. "



누가 그러더라, 잘 잤으면 하는 게 사랑인 것 같다고. 원영은 차마 저 뒤에 말까지는 하지 못했다. 정말 유진이 잘 자길 바랐다. 너무 지쳐 보였고 조금 전에 반쯤 의식을 잃고 무너지던 걸 떠올렸다. 그렇게 힘들고 견디기 어려운 거라면 그렇게 온 힘을 다해 피하고 싶은 거라면 아슬아슬하게 붙잡고 있던 걸 이를 악물어 놓아야 할 것 같았다. 놓는다는 게 무슨 의미인지 정확히 어떤 건지는 알지도 못했다. 그냥, 유진이 잘 잤으면 좋겠다. 아까처럼 무너지지 않았으면 좋겠다. 




" 연락 안 할게. 더 다가가지도 않을게. 언니 근무지에서 먼 데로 이사도 할 거야. 우린 이제 다시 마주치거나 같은 세계에 있을 일 같은 거 없어. 언니 말대로 같은 페이지에 있지 않은 삶이야. 그러니까... 도망치느라 지치지도 말고 힘들어서 그렇게 무너지지도 말고... 지난 6년 간 지낸 것 처럼 다시 잘 지내. 난 그냥... 언니가 잘 잤으면 좋겠어. "





잘자. 말을 하는 내내 울먹이지 않으려고 주먹을 쥐었다. 지금 이 방에 조명이 다 내려진 게 저의 표정도 피가 날 걸처럼 깨문 입술도 보이지 않게 할 거였다. 원영은 유진에게 등을 돌렸다. 조용히 유진을 등진 채 벽을 바라보았다. 말을 하는 동안 혼신의 힘을 다해서 덤덤한 연기를 했다. 그 며칠 새 마음 정리도 다 하고 괜찮아진 사람인 것 처럼. 마치 담백하게 놓아줄 수 있는 사람인 것 처럼. 연기력이 뛰어나다고 듣던 모든 말들은 이 순간을 위해 존재했던 것 같았다. 유진이 속았으면 좋겠다. 그리하여 기어이 유진이 다시 예전처럼 아무렇지 않게 살아 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저는 다시 아무렇지 않아질 수 없어도.




지은 죄가 너무 많아서 이제는 눈물을 흘리는 것 조차 사치가 된 죄인이 되었다. 혹시나 크게 내는 한숨이, 흐느끼는 울음소리가 유진의 마음을 더 도망치고 싶게 만들까 봐 입술을 깨물었다. 한숨도 눈물도 내지 않으려고. 이 밤에는 한숨 소리, 흐느끼는 소리 그런 것 조차 죄가 되는 그런 밤이었다. 가는 시간을 잡고 싶었다. 이 밤의 끝을 잡고 매달려서 끝이 없는 밤이 되기를 빌었다. 



내일 아침이 밝으면 아무것도 붙들지 못한 채로 혼자 남겨지게 된다. 어떤 표정으로 내일 아침엔 마주 봐야 할까. 어떻게 마음을 숨겨서 그 주차장에 내려줘야 할까. 내려주고 가는 그 마지막 뒷모습을 볼 때 나는 얼마나 많이 울게 될까. 눈앞이 이미 눈물로 가득 흐려졌다. 


배우라는 꿈을 꾸었다. 헌데 그 꿈에 '유진이랑 함께' 하는 삶이 포함되어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았다. 그 꿈이 오롯이 배우만 있는 게 아니었다는 걸, 제가 꿈 꿨던 모든 순간에 유진이 있었다는 걸 너무 늦게 알아서 그 죄로 온전히 안유진을 잃나보다.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고, 보고 싶다는 말조차 할 수 없는 그런 사이가 되나보다. 6년 전 그때 유진이 이런 기분이었을까. 사랑하는 이를 잃는 건 이런 마음일까. 숨을 참았다가 아주 천천히 내쉬었다. 혹시 숨이라도 천천히 쉬면 시간이 천천히 흐를까 싶어서. 눈을 꼭 감았다. 앞을 보지 않으면 흐르는 시간이 멈출까 싶어서. 














" ...나 괜찮지 않았던 거 같아. "



젖은 유진의 목소리가 나지막이 방에 들어찼다. 늘 괜찮다고 하는 이가 괜찮지 않았다는 말을 하고 있었다. 그렇게 도망쳤는데도 사실 지난 6년 동안 잘 지내지 않았다고. 잘 지낸 줄 알았는데 자신을 속인 채 그냥 구석에 등을 다 끄고 주저 앉아있었다고. 그냥 끝까지 붙들어볼걸 후회스럽다고. 그 모든 걸 다 꾹꾹 눌러 담은 그다음 한 마디였다.




" 원영아... 나한테 등 보이지 마. "





부탁이야. 유진이 원영의 꿈을 불안하게 하고 원영은 유진의 마음을 불안하게 하는 이 관계 속에서 아직도 용기랄게 없는데도 유진은 자꾸 다시 안아달라고 하고 싶어졌다. 유진은 두 뺨 가득 눈물을 적시다가 원영의 뒷모습에 겨우 입술만 옅게 들썩이고 말뿐이었다. 웃긴 일이다. 팀원들이 그렇게 쓸데없이 용감한 스타일이랬는데, 몸 상하는 거 개의치않고 물불 안 가린다고. 스파이더우먼이랬나 어벤져스랬나. 그런 별명은 하등 어울리지 않는 것이었다. 원영 앞에서 이렇게나 작고 약한 겁쟁이였다. 마치 원래부터 실은 그렇게 용감하지 않고, 늘 그렇게 괜찮지 않고 여린 사람인 것 처럼. 그래서 그냥 눈물로 다 보여주는 것으로 한다. 내가 이렇게 약하고 겁이 많고 불안해하고 상처받아 아팠다는 걸 너한테 오롯이 다 들키는 것으로 한다. 그러니 이번에는 제발 부디 날 끝까지 붙들고 사랑해달라고. 그런 유진을 다시 돌아 본 원영이 젖은 눈을 마주했다.








" 언니, 이리와... 내가 안아줄게. "



그래서 저 말에 이번엔 망설임 없이 가서 안겼다. 파도치는 마음으로 파도처럼 그 작고 따듯한 품으로 들이쳤다. 나 좀 그냥 안아줘. 나 그동안 너무 힘들었거든. 정말 조금도 나 괜찮지 않았던 것 같아. 너랑 헤어지기 싫었어. 난 그냥 네가 날 더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네가 그 어떤 것보다 날 사랑해줬으면 좋겠어. 내가 널 사랑하는 것보다도 네가 날 더 사랑해주면 좋겠어. 


내가 너의 꿈을 불안하게 해도 그냥 이기적으로 널 사랑하고 싶어졌다고, 이기적이라고 해도 좋으니까 그냥 내가 네 꿈을 망친다고 해도 좋으니까 그냥 널 붙들고 싶어졌다고. 유진의 잠긴 목 안으로 말도 자꾸 잠겼다. 이번에는 제발 날 놓지 마 원영아. 겨우 울먹이는 소릴 내는 유진을 원영이 끌어안았다. 내가 언니를 더 사랑해. 언니가 내 꿈이야. 그걸 내가 너무 늦게 알았어. 원영이 유진의 등을 토닥이다가 이내 손을 끌어올려 머리를 쓰다듬었다. 가만히 끌어안고 고른 숨소리를 서로 주고받았다. 같이 흘리는 눈물로 방 안 가득 흐느꼈다. 다른 말을 더 할 필요는 없었다. 원영은 모든 방에 등을 올렸고 유진의 눈앞은 더 밝을 수 없이 환했다. 눈을 부시게 해 잠에 들지 못하게 몸과 눈을 짓누르던 그 빛은, 이제는 마치 겨울이 가고 봄이 온다고 알리는 것 같았다. 이토록 기나긴 터널 같던 겨울의 끝에 마침내 봄이 오고 있었다. 6년이 넘는 아주 기나긴 겨울이 끝나고 있었다. 

















서래섬에 유채꽃이 피었다. 유진은 한결 가벼워진 차림으로 미라클 모닝을 실천 중이었다. 파란색 이어폰으로 노래를 들으면서 서래섬을 돌 때는 오른쪽 어디쯤의 하늘을 드문드문 올려다보며 뛰었다. 이젠 더 이상 차갑지 않은 공기가 반팔티를 입고 뛰어야 하는지 아침마다 옷차림을 탓하게 만들었다. 손목에 스마트워치에서는 아침부터 뜀박질한 결과로 응원이 쏟아졌다. 참 잘했어요!





계절이 다 지나고 다시 봄이 되었는데도 여전히 범죄의 왕국 대한민국의 일상은 똑같았다. 매일 같이 뛰고 잡아도 매일 새로운 번호표를 든 범죄자가 나타났다. 캐치 테이블 웨이팅도 아니고, 뭐가 이렇게 매번 새롭게 웨이팅을 갱신하면서 나타나는지. 그 와중에는 아직도 못 잡은 그 망할 약쟁이도 있었다. 이 정도면 밀항을 했거나, 같은 약쟁이들한테 칼 맞아 죽은 것 아닌가 그런 얘기를 하다가도 새로운 정보가 들어오면 또 금세 그 앞에서 잠복을 하는 게 일상이었다. 




경찰서 앞 얼큰할매국밥집에서 점심으로 국밥을 먹다 보면 새로운 시즌 광고로 바뀐 원영의 소주 광고 포스터가 붙었다. 점유율이 제일 높은 소주라더니 제일 잘 보이는 곳에 할머님이 턱 하니 늘 붙이셨다. 퇴근하는 골목길에 새로 문을 연 도너츠집에도 원영의 새 사진이 붙었다. 이번 시즌 도넛은 핑크딸기도너츠래나. 딸기우유 같은 착장으로 도너츠를 들고 있는 원영의 사진을 보았다. 핑크딸기도너츠인지 뭔지를 입에 하나 물고 사무실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자마자 막내가 재촉했다. 





" 선배님, 비상 연락망 업데이트 시즌입니다. 지난번에도 갑자기 휴가 가셔서 업데이트 안 하셨지 말입니다. 서장님 방침이랍니다. 더 이상 공란 안 된다고 하십니다. " 


" 그거 꼭 제출해야 되냐. "


책상 앞에 서 있는 막내를 올려다보는데, 막내가 책상에 놓인 도너츠 봉투를 보고는 이거 시즌 메뉴 사면 장원영 포토 카드 주는데 받으셨습니까? 하고 물어서 기가 막혔다. 포토 카드가 뭔데...? 선배님, 저 주시면 안됩니까. 그게 뭐냐니까. 포토 카드가 어디... 어디 들어있는 건지 모르겠는데. 



막내가 도너츠 포장지를 뒤지는 동안 마지못해 비상 연락망 종이에 번호를 적었다. 비상 연락망은 쓸 일이 없어야 좋은 건데 굳이 굳이 제출하라고 하는 게 영 마뜩잖다. 무슨 일 생기라고 고사 지내는 것도 아니고. 마지막 자리까지 꾹꾹 눌러 적어서 내민 종이를 받아든 막내가 누구 번호입니까? 하고 물었다. 




" 어... 메리 제인. "


막내가 씩 웃었다. 사무실에 전화하던 메리 제인이 진짜 선배님의 메리 제인입니까. 그 메리 제인 이제 사무실로 더 전화 안 하지 말입니다. 왜 전화를 안 하나 했더니... 야, 시끄럽다 가라. 















원영은 매일 하루의 시작에 날씨가 좋길 바랬다. 샵에서 메이크업을 받을 때도, 행사장으로 이동을 할 때도 매번 바라다 못해 한 번씩은 기도라는 걸 했다. 비도 오지 않고 덥지 않은 날씨가 되길. 그리고 매일 아침 7시에 그리고 오후 8시에 두 번 뉴스를 봤다. 그렇게 해야만 불안 같은 걸 내려 놓을 수 있을 것만 같았다. 기존에 하던 광고의 개런티로 협상에 난항을 겪었어도 그냥 전부 재계약을 했고, 개런티가 맞지 않는 신규 광고도 전부 다 하겠다고 했다. 경찰서 앞 국밥집에 붙은 소주 광고로, 방배동 어느 골목 가게에 사진 포스터로, 대형사거리 전광판에 나오는 광고로. 어디에서든 조금씩이라도 더 유진의 하루에 있고 싶었다. 이 정도면 안유진 씨는 길을 걸을 때마다 원영이 네 얼굴을 보겠다고 가을이 어이없어 했을 정도였다. 가을은 썩 탐탁지 않아 했어도 지금 원영에게 비싼 광고 개런티 같은 게 아무런 의미가 없는 걸 가을도 잘 알았다. 








곧 개봉하는 영화의 시사회에서 좌우명 얘길 할 때 이전에 예능에서 인터뷰를 했던 유명 MC가 똑같은 질문을 했다. 후회하지 말자가 좌우명인데 오늘 시사회를 망치면 어떻게 할 거냐고. 타임리프 물인 본 영화처럼 되돌아갈 거냐 그런 질문이었다.



" 제대로 벌 받아야죠. 다음에 잘하는 건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영화처럼 되돌아가서 고칠 순 없어요. 이미 지나가 버리니까. "


수갑 차는 시늉을 하는 거에 같이 출연한 출연진들이 화기애애하게 웃었다. 보통 벌 받는 표현할 때 무릎 꿇고 손을 드는데 원영씨는 손을 내밀어 수갑을 차는 걸 보니 이제 형사 다 됐다는 우스갯소리가 오갔다.



" 제가 이제 형사를 좀 잘 알아서요. "
















모자에 마스크까지 꼭꼭 눌러쓰고 원영은 영화관 맨 뒷열 구석에 혼자 앉아있었다. 월요일 새벽 심야 영화에는 채 열 명도 관객이 들지 않았다. 자기가 출연한 영화를 심야 영화로 보러오는 배우는 없을 테니 누가 얼굴을 본다고 해도 원영이라고는 크게 의식하지 못할 거였다. 요즘같이 텐트폴 영화도 어려운 시기에 불과 2주 만에 600만 관객을 동원했다고 기사에 오르내리고 있었다. 시사회 인터뷰 영상이 유튜브 숏츠를 도배하고, 인기 동영상에 오르고 또 여기저기서 다시 출연 연락이 소속사로 빗발쳤다. 잡혀있는 GV 일정과 개봉 3주차 무대인사 스케줄이 문자로 들어온 휴대폰에는 여타 연락은 더 들어오지 않았다.  




영화관에 들어오기 조금 전 나이트 뉴스에서 방배경찰서가 오랫동안 쫓던 마약 관련 용의자를 기나긴 추격과 격투 끝에 체포했다는 뉴스를 보았다. 무려 마약 수사본부와 강력계가 1년이 넘게 협력해서 쫓던 용의자를 체포했다고 했다. 그 과정에서 격한 흉기 난동이 있었고, 경찰이 중상을 입었다는 그 뉴스를 보자마자 원영은 휴대폰을 내려다 봤다. 원영의 휴대폰으로는 아무 연락이 들어오지 않았다. 무소식은 희소식일까.




2시간이 넘는 영화가 눈앞에 상영되는 동안에 불안은 커다란 영화관 화면보다도 더 커졌다. 돌비 음향으로 두드려대는 달리는 소리나 격투 장면들이 자꾸만 심장을 뛰게 했다. 영화에서 썼던 소품들이 더 적나라하게 동공으로 들어찼다. 선혈이 낭자한 현장부터 골목에 떨어져 뒹구는 휴대폰, 이어폰, 철제 문을 뛰어넘는 그런 모든 순간들이 본인이 촬영한 것인데도 보는 것만으로 숨을 턱 막히게 했다. 저 까만 와이드 스크린에 펼쳐지는 영화가 그 누군가에게는 정말로 현실에 일어날 수 있는 일이었다. 그리고 영화의 주인공이었던 원영이 겨우 병원에서 눈을 떠 살아남은 것과 달리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영화관 안에서도 꺼둘 수 없는 휴대폰을 다시 들여다보아도, 여전히 아무 연락은 들어와 있지 않았다. 무소식은 희소식일 것이다.






영화관에 조명이 하나둘 올라갔다. 2시간이 넘은 영화가 끝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었다. 까만 바탕에 하얀 글씨가 콕콕 박힌 수많은 이름들이 올라갔다. 이번 영화의 엔딩 크레딧이 독특하다고들 각종 기사나 커뮤니티에 오르내렸다. 모든 참여자를 기재하여 굉장히 길이가 길고, 심지어 배우 이름이 나오는 순서가 특이하다는 얘기였다.




원영이 손에 쥔 휴대폰으로 진동이 들어왔다. 한 번, 두 번 진동이 울려오는 휴대폰의 화면을 볼 수 없었다. 새벽 1시가 넘은 시간이었다. 심야 영화가 상영을 마치고, 엔딩 크레딧이 올라가고 있는 새벽 1시를 넘긴 시간에 원영의 휴대폰으로 누군가의 전화가 들어오고 있었다. 무소식이 희소식이라던 생각은 진동이 가져오는 불안이 되어 휴대폰을 볼 수 없게 만들었다. 오래도록 올라가는 엔딩크레딧을 다 보지 않은 관객들이 전부 빠져나간 빈 영화관에, 원영이 맨 뒷줄에 숨죽여 앉아있었다. 겨우 숨을 내쉬고 들여다본 휴대폰에는 이름이 떠올랐다가 받기 전 끊어졌다. 다시 전화의 통화버튼을 누르려던 찰나에 누군가 원영의 옆 좌석에 앉았다.








" 왜 전화 안 받아. "


늦어서 미안해, 영화 벌써 다 끝났어? 유진이 말을 채 마치기 전에 원영이 유진을 끌어안았다. 


" 왜...? 무슨 일 있었어? "

" 아니... 아무 일 없었어. "


범인을 하나 잡았는데 처리할 일이 생겨서 늦었다고 유진이 미안한 표정을 지었다. 뉴스에서 봤어, 경찰 크게 다쳤다며. 아, 괜찮아. 그렇게 크게 다친 건 아닌데 기사가 좀 크게 나갔네. 헐크가 손을 좀 베었어. 헐크라서 회복 빠를 거야. 어깨에 계속 얼굴을 묻고 있는 원영을 가만히 유진이 안아주었다. 내 걱정했구나. 앓는 소리를 내는 원영을 유진이 안고 토닥였다. 서로 이렇게나 불안하게 만드는 나날을 살고 있었다.




" 영화 같이 못 봐서 어떡해. 미안. "

" 괜찮아. 같이 영화 보려고 한 거 아니야. 다른 거 땜에 보자고 한 거야. "


겨우 앓는 숨을 가라앉힌 원영이 유진을 당겨다가 영화관의 커다란 스크린을 손으로 가리켰다. 여전히 끝도 없이 올라가던 엔딩 크레딧이 이제는 끝이 다가오는지 노랫소리가 조금씩 더 높아졌다. 빼곡하게 적힌 자문 명단 끄트머리에 유진이 이름이 떴다. 그리고 바로 이어 주연배우 이름이 올랐다.





경찰 자문     [서울 방배 경찰서] 안유진 경위님

배우             장원영







두 문장이 같이 연이어 올라가는 걸 유진은 가만히 바라보았다. 이런 건 예상하지 못했는데. 저렇게 스크린 같은 페이지 안에 나란히 이름이 붙어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차마 뭐라 말을 해야 할지 입을 못 떼고 있는데 원영이 먼저 말로 선수를 쳤다.




" 왜 아무 말이 없어? "

" 아, 예상을... 못해서. 보통 엔딩 크레딧에 저렇게 잘 안 쓰잖아. "

" 놀랐지. "




감동이면 감동이라고 말을 하라고 어깨에 얼굴을 붙이고 말하는 원영에게 나도 알려줄 거 있는데- 하고 유진이 이마를 콕 찍었다. 


" 뭔데? "

" 너, 나 정복 입은 거 볼 수 있을 듯? "

" 어...? "

" 오늘 그 놈 잡아서 특진 할 거야. 그리고 반장님이 경감 달아야 몸 사릴 거 같대. "

" 경감 달아서 몸 사리는 게 아니라 날 생각해서 몸을 사려야지... "


원영은 축하한다는 말보다 불안하다는 말을 먼저 꺼냈다. 이마를 붙이고 속닥거렸다. 언니 때문에 불안해 죽겠어. 나도 너 때문에 불안해 죽겠거든. 



그래도 인생이 원래 다 불안하고 두렵고 그런 거 아닌가. 당장 내일 무슨 일이 일어날지 알고 사는 사람은 아무도 없으니까. 우리가 사는 매 순간은 불안의 연속이고 그 불안이 촘촘히 꿰어져 단단하게 안정적인 삶이 된다. 그래서 그 불안과 그로 인해 밀어닥치는 두려움까지 모두 끌어안아 서로를 사랑하는 것으로 한다. 엔딩 크레딧이 다 올라가고 음악도 다 끝나버린 영화관에 모든 불이 환하게 켜졌다. 







둘이 손을 잡고 영화관을 나와서 집을 향해 걸었다. '유채찬란'이 이제 축제의 막을 내릴 때가 곧 다가온다는 얘길 했다. 우리가 전에 가려다가 한 번을 같이 못 간 곳.





" 나보다 언니가 더 바빠서 못 가는 거 아니야? "



사람들이 배우가 바쁜 줄 아는데 사실 형사가 더 바쁘다는 걸 알아야 한다고 원영이 구시렁거렸다. 잠복 시즌이라 달에 한 번 얼굴 보기가 힘들어서 불만이 될 만 했다. 지난번에는 같이 밥을 먹다가 두 숟가락을 뜨기도 전에 전화를 받고 뛰어나가기도 했었다. 드라마 같은 데선 잠복하고 그럴 때 경찰서로 옷도 가져다주고 그러던데, 난 그것도 못하고. 왜 이렇게 나라에 나쁜 놈들이 많은 거야. 잡아도 잡아도 끝이 없어. 언니가 너무 바빠서 데이트를 못 하겠네. 다들 착하게 좀 살지. 심통 섞인 원영의 말이 우르르 유진에게 쏟아졌다.



" 난 너 길에서 자주 봐. 근데 그 도너츠 새로 나온 거는 너무 달더라. "

" ...나는 언니가 너무 바빠서 못 보잖아. "

" 아니... 내가 바쁜 게 문제가 아니라, 사람들이 널 많이 알아보는 게 더 문제야. "

" 알아봐도 상관없다니까. 난 공개 연애 하고 싶은 사람이라고 몇 번 말해. 오히려 공개 연애하면 내가 경찰서로 찾아가서 언니를 보는 게 더 편할 수도 있어. "


진짜 무슨 소리야- 배우가 경찰서 드나들면 어떡해. 하도 어이가 없어서 원영의 손을 잡고 있지 않은 반대 손으로 유진은 이마를 집었다.



" 네가 너무 위험해. "



원래 국선 변호사랑 강력계 형사 이런 직업군이랑은 연애한다고 소문내는 거 아니야. 유진은 그새 심각해져서 목소릴 깔았다. 범죄자들 중에 이상한 놈들이 얼마나 많은데 괜히 범죄자가 아니라니까. 



" 언니, 그럼 지금 가자. 지금 새벽이니까 사람 하나도 없을 거 아니야. 응? "











마침내 그 새벽에도 '유채찬란'이었다. 20층에서 내려다 보던 저기 멀리 얼핏 보이는 노란빛이 아닌 까맣게 내려앉은 하늘 아래서도 빛이 들어온 듯 밝은 노란 유채밭이었다. 사람 하나 없는 꽃들로 가득한 서래섬 복판에서 원영은 끼고 있던 마스크를 벗어내고 깊게 숨을 들이 마셨다. 저 안에 깊은 곳 까지 유채꽃향이 훅 하고 들어왔다. 손에는 유진의 손을 꼭 쥐고 있었다. 이제는 놓지 않을 거였다. 봄에는 이런 향을 맡으면서 이런 노란빛을 보면서 걷고, 가을에는 수양버들 아래를 다시 메밀꽃을 보면서 걷게 될 그런 길이었다. 이팝나무에 꽃은 언제 핀다고 했더라. 유진이 파란색 이어폰 한쪽을 원영의 귀에 꽂아주었다. 귓가에 유진이 즐겨 듣는 옛날 노래가 들렸다. 유진의 손은 따듯하고 길가엔 봉우리를 다 틔운 꽃이 흔들리는 길에 또 마음이 마구 요동치고 흔들린다. 




" 언니. "


조심스레 유진을 부르니, 응? 하고 유진이 원영을 바라본다. 유채꽃향도 너무 향긋하고 기분도 붕붕 나르고 이제 몸도 우주만큼 날아오를 것 같으니 아무래도 오늘은 이전과는 다른 마음으로 묻고 싶어졌다. 망설이고 속을 좀 먹다가 입술을 깨문 채 겨우 내었던 그 물음을 떠올렸다. 절절하고 용기를 겨우 짜내 물었던 그런 물음이 아닌 완전히 다른 마음으로 물어야겠다. 조금 더 설레고 간지럽고 그리고 오늘은 투명하게 속마음을 다 드러낸 물음으로. 이번에는 속마음을 들키는 거 아니고 대놓고 보라고 보여주는 거다.




" 우리, 서래섬 왔던 거 기억나? "



물음을 던지는 원영의 얼굴을 유진이 빤히 바라보았다. 가까이 다가온 유진의 뺨 어디쯤 가만히 이마를 대봤다. 그리고 입술도. 이제는 허락을 구하지 않고도 유진을 끌어안을 수 있었다. 조금 상기 된 그 뺨에 입술을 부비고서야 비로소 유채꽃이 완연한 봄이 라는 것이 실감 났다. 입술의 예민한 그 촉감으로 봄이 만져졌다. 그래서 있는 힘껏 꼭 닿아있는 유진의 허리를 더 세게 끌어안았다.




" 우리 가을에 메밀꽃 보러 왔었잖아. 그때 유채꽃 보러오자고 했었는데 지금에서야 왔네. "




우리 여기 오는 데 6년이 넘게 걸렸다. 근데 너 이거 저번에도 물어보지 않았었나. 유진이 기억을 더듬는 사이에 둘을 둘러싸고 있는 유채꽃도 엿듣지 못하게, 원영은 유진에 귓가에 가만히 입술을 붙여 속삭였다. 안고 있는 허리는 여전히 놓지 않았다. 이번에도 일전과는 확연히 다른 마음, 확연히 다른 목소리의 물음이었다. 또 훤히 속을 보여주는 물음. 원하는 답이 명확하게 있는 그런 물음을 던졌다. 언니 너는 대답만 하면 돼.





" 우리 집에서 라면 먹고 갈래? "



유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피식 웃고는 역으로 묻는다. 



" 한강 라면이야? "



뭐- 비슷해. 하고 귀가 빨개져서 유진에게 속닥거리다가 키득거리는 그런 대화 소리, 그리고 그렇게 맞닿는 옅은 숨이 유채꽃이 수줍어 눈을 가린 서래섬에 그렇게 있었다. 



기나긴 6년의 겨울을 돌고 돌아, 정말 그 새벽에도 유채찬란. 아니 유치찬란이었다.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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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족한 글 읽어주셔서 감사드립니다.

늘 윶녕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