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중고등부 성가대 반주자 모집 ]
원영은 주일예배가 끝나고 공고가 붙어있는 걸 가만히 쳐다봤다. 한번 해볼까. 교회 나올 때마다 집중도 안 되는데 성가대라도 하면 나을까 싶다. 건반을 뛰어나게 잘 치는 건 아니어서 망설여졌다. 못한다고 교회 사람들 입에 오르내리면 그것대로 또 엄마한테 잔소리를 들을 일이었다. 그래도 해보면 꽤 재밌을지도.
대대로 독실한 크리스천 집안에서 주일예배는 기본인데 주일마다 엄마아빠랑만 교회에 오려니 조금 심심하다는 생각이 드는 나이였다. 고등학생쯤 되면 다 그렇지. 엄마랑 떨어져 앉을 수 있기만 해도 교회 나오는 게 좀 나을 것 같았다. 엄마는 이런 원영의 속도 모르고 주일마다 교회 끌고 오기 바빴다. 큰 거 안 바라고 그냥 교회를 가족들이랑 다른 시간대에 다니고 싶었다. 최소한 예배당에서 엄마랑 떨어져서라도 있으면 나을 거 같은데 성가대 할 거 아니면 그냥 같이 다녀, 이런 엄마말을 또 거스를 수가 없었다.
건반에 특출나게 자신이 없어서 공지 앞에서 손만 꼼지락거렸다. 어릴 때부터 피아노 배워서 꽤 친다는 소릴 듣곤 했어도, 성가대 반주자 할 만큼인지는 모르겠다. 엄마가 막내딸이 피아노 좀 친다고 권사님, 전도사님들한테 자랑을 그동안 꽤 하셨는데 괜히 망신당하는 거 아닌가 몰라. 입술을 물었다 놓았다. 입술을 쥐어 뜯으면서 고민을 하고 또 하고. 원영의 입술이 빨갛게 슬슬 부어올랐다. 그래도 엄마랑 떨어져서 교회에 나오려면 이 방법밖에 없는데 할까 말까.
" 지원해봐. "
입술 그만 뜯고. 입술에서 피 나겠다. 옆에서 또래로 보이는 여자가 말을 걸었다. 지원하기만 하면 붙을 걸? 파란 색 포카리스웨트를 마시면서 말하는 게 꽤 청량한 톤이다. 말갛고 순한 것 같은 옆 모습을 슬쩍 쳐다봤다. 혹시 성가대 사람인가 저런 건 어떻게 알지.
" 건반을 엄청 잘 치진 않아서요. "
" 어차피 우리 교회는 거의 뒤에 음악 틀잖아. 건반은 한 곡만 쌩으로하고. "
주일 중고등부 예배를 가보지 않아서 정확히 우리 교회 중고등부 성가대는 어떻게 하고 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원래 교회 바이 교회인데다가 일반부는 또 달라서 감이 없었다. 주일 일반예배는 다 쌩으로 치시던데.
" 요즘 우리 중고등부는 얼마 전에 반주자가 그만둬서 그냥 노래 틀고 하고 반주는 쌩으로 몇 곡 안해... 백퍼 지원만 하면 붙는다. "
말을 자꾸 놓는 게 희한한 사람이다 하면서도 또 나름 정보를 주는 건가 싶어서 자꾸 힐끔 거렸다. 파란 캔을 들고 있어서 청량한 톤인 줄 알았더니, 생긴 것도 시원시원 해서 자꾸 뜯어보게 됐다. 왜? 뭘 봐. 아니 그냥요. 뭘 보냐고 하는데 딱 마주친 눈이 엄청 컸다. 옆에서 힐끗 봤을 때는 눈썹도 정갈하니 가지런하고 말갛고 순해 보였는데 막상 딱 눈을 마주치니까 엄청 크고 뚜렷했다. 순간 약간 무서워서 깜짝 놀랐다. 키가 비슷한지 눈높이가 딱 맞았다. 성가대 잘 알아요? 그냥, 뭐. 긁적거리더니 아무튼 일반 성가대처럼 쌩으로 치는 거 아니야. 겁 먹을 거 없어. 하고는 돌아서 교회 밖으로 나갔다.
청바지를 끌고 저벅저벅 저 멀리 걸어간 그 모습을 쫓으니 달랑거리는 메신저백 하나 매고 어느새 저 교회 앞마당 끝까지 가서는 진돌이랑 놀고 있었다. 은근히 낯을 가려서 신도들한테 잘 가까이 오지 않는 진돌이가 꼬리를 살랑살랑 흔들었다. 우리 교회에 아주 오래 다닌 사람인가. 또래 같은데. 원영은 조금 더 물어볼 생각으로 그 옆에 쪼그려 앉았다. 진돌이가 원영에게도 다가와서 내민 손에 코를 대고 킁킁 댔다.
" 진돌이가 너 좋아하네. 원래 안 이러는데. "
" 오래 다녀서 그런가 봐요. "
" 여기 오래 다녔어? "
" 저 초등학생 때부터 다녔어요. "
몇 살이에요? 자꾸 말을 놔서 신경 쓰이는 데 나이부터 물어봤다. 초등학교 때부터 여기 다녔는데 또래면 이렇게 처음 볼 수가 있나. 넌 몇 살인데? 내가 먼저 물어봤는데 역으로 물어보고 난리였다. 제가 먼저 물어봤잖아요. 너 되게 유치하다. 누가 누구더러 유치하다는 건지 좀 어이가 없어서 그냥 고개를 돌리고는 진돌이나 쓰다듬었다.
너 이름 뭐야? 자기 나이는 안 가르쳐주더니 갑자기 이름을 묻는다. 흥, 나도 안 말해줄 건데. 못 들은 척하고 진돌이만 쓰다듬었다. 요즘 우리 교회 성가대 많이 달라졌다더라-제주도에서 전학 온 친구도 있다고 하고 성가대 얘길 툭 한다.
" 장원영이요. "
제 이름. 성가대 관련해서 물어보고 싶은 게 있으니까 방금 물어본 이름은 마지못해 대답해줬다. 아쉬운 사람이 지고 들어가야 하는 건 별수 없었다. 엉- 그렇구나. 하고는 다시 진돌이를 슥슥 데려다가 또 쓰다듬는다. 뭐야, 가는 이름이 있으면 오는 이름도 있어야지. 자기 이름도 말 안 해주네.
" 그래서, 반주자 지원 할 거야? "
" 몰라요. 아직 결정 안 했어요. "
" 못 한 거야 안 한 거야. "
" 알아서 할게요. "
그새 진돌이는 원영이 손짓을 해도 오지도 않고 다른 손에만 코를 킁킁대고 있었다. 조금 서운하네 나랑 진짜 오래 봤는데 내 손 말고 저기 가서 저러고있구. 옆에서 청량하게 진돌이 손- 하니까 진돌이가 손을 턱 하고 올려놓는다. 아이구, 잘했다. 슥슥 등이니 배니 쓰다듬어 주는 게 또 진돌이랑 보통 사이가 아니다.
" 저기요. 성가대 잘 알아요? "
그래도 물어볼 건 물어봐야지. 이름이나 나이를 알면 뭐라고 부르면서 물어보려고 했는데 아무것도 말을 안 해서 그냥 저기요- 했다. 진돌이를 슥슥 쓰다듬고 있는 그 사람 어깨를 톡톡 치고 물어봤다.
" 아니, 그냥 뭐 어느 정도? "
" 성가대 해봤어요? 반주자 면접도 봐요? "
" 일단 지원해보면 되지 뭘. 지원하라니까. 번호로 문자만 보내면 되잖아. "
손을 탁탁 털고 일어나서는, 그럼 지원해라- 화이팅. 하고는 머리를 한번 슥 쓰다듬어주고 가버린다. 아니, 조금 전까지 진돌이 만지던 손으로 지금 내 머리를 왜 쓰다듬어. 진돌이 그렇게 목욕 자주 하지도 않는데. 이씨, 머리를 탈탈 털고는 벌떡 일어났다. 진짜 이상한 사람이야. 뭐 엄청 아는 것처럼 아까 옆 와서 말 걸더니 막상 물어보니까 내빼고 가버리고. 하늘색 체크 남방을 펄럭거리면서 가는 저 뒷모습이 조금 얄미웠다.
" 안녕하세요... "
중고등부 성가대 토요일 연습에 빼꼼히 문을 열고 들어갔다. 고민을 거듭하다가 공고 마감 시간 직전에 지원 문자를 보냈다. 지원서 양식대로 이름이랑 나이 같은 걸 문자로 보내자마자 바로 합격이라고 답장이 왔다. 자동 회신도 아니고 보낸 지 일 분 만에 합격 문자를 받았다. 성가대 연습실에는 너댓명의 사람들이 모여서 대화를 하고 있었다. 어? 누구? 반주자? 하고는 하이- 한다. 생각보다 빨리 왔네? 다들 은근 붙임성이 좋아서 다행이었다. 살살 눈치를 보면서 테이블에 의자를 붙여 앉았는데 통성명을 하고 나이도 얘기하고 하다 보니까 거의 다 또래들이었다. 아무래도 중고등부면 다 비슷비슷한 나이들끼리 해서 그런가보다.
듣자하니 고3은 거의 안 나온다고 하고, 고1~2가 제일 많다고 했다. 중학생들은 몇 주 나오다가 마는 게 트랜드라고 한다. 지금 테이블에 모여서 수다 떨고 있던 친구들은 다 고1이라서 동갑이었다. 조금 있으면 고2 언니오빠들도 나올 거라고 일회용 접시에 놓인 과자 같은 걸 원영의 앞으로 밀어줬다.
" 우리 거의 말만 성가대고 거의 그냥 교회 노래방이야. "
부담가질 거 하나도 없음. 하고 말하는 저 친구는 낯을 엄청 가린다고 하더니 오히려 말은 잘 붙이고 얼굴만 토마토처럼 익어있었다. 자기는 제주도에서 전학을 왔는데 여기 성가대 다니면서 친구도 사귀고 맘에 든다고 했다. 요즘 전체적으로 교회들 중고등학생 유입이 적다더니 성가대도 인기가 시들하다고 동갑 반주자가 들어와서 너무 좋다는 얘길 들었다. 아무튼 우리 교회 중고등부 성가대는 원래 반주하던 사람이 갑자기 반주 안 한다고 해서 반주자가 공석 되고, 화음 맞추는 것도 드문드문 공석이라 어쩌다 보니까 그냥 단체 노래방처럼 된 실정이었다. 매사에 불만 많은 투덜이 고2 일부 오빠들만 스루하면 그냥 주말에 교회 나와서 노는 거나 다름없다는 말을 들으면서 앞에 놓인 과자를 집어먹었다.
누가 봐도 투덜이처럼 보이는 사람들이 하나둘 더 문을 열고 합류하더니 그새 아홉명 정도 모여서 생각보다 꽤 많구나했는데, 알고 보니까 딱 열 명이었다. 한 명 더 오면 끝. 그리고 그 열 명중에 약속 있어서 안 오고 뭐 일 있어서 못 오고 하다 보면 주일예배에 절반 나오니까 그냥 아주 소동아리 수준인 성가대였다. 꾸준히 나오는 사람은 한 둘인 그런 성가대라니까 뭐 기대한 거랑은 다르긴 했는데, 그래도 엄마랑 교회 오는 시간 만 떨어질 수만 있다면 원영은 다 좋다고 생각했다.
" 하이- "
청량한 톤으로 문을 열고 들어오는 거에 인사를 하려고 일어났더니, 그 진돌이었다. 뭐야, 진짜 성가대였잖아. 원영을 보더니 반주자왔네? 하고는 씩 웃는다. 괜히 그때 안 알려주고 튄 게 다시 얄미워서 그냥 고개만 살짝 까딱하고 말았다. 제일 늦게 와서 따로 통성명을 하거나 소개를 해주지도 않고, 그냥 귀동냥으로 부르는걸 들으니까 애들이 유진언니 유진누나 한다. 고1인 애들이 언니 누나 하는 거 보면 고2 아니면 고3인데. 아까 고3은 거의 안 나온다고 했으니까 고2인가. 그럼 뭐 그때 말 놓은 게 그럴 수도 있긴 하네. 괜히 평소에 좋아하지도 않는 과자만 집어먹었다.
미리 준비해온 거 한 곡만 부르고 집에 가자. 고2 투덜이 오빠 말에 따라서 애들이 악보를 집어 들고 준비를 하고 원영도 준비해온 곡을 연주했다. 오늘 처음 보는 사람 아홉명 아니 여덟명이랑 지난주에 진돌이랑 본 한 명 앞에서 처음 연주를 하려니 좀 떨려서 후들후들 했는데, 막상 첫 음을 시작하니까 또 습관적으로 자연스럽게 손이 연주란 걸 해낸다. 노래방이라고 하더니 다들 화음도 잘 쌓고 노래도 잘 부르고 우와 너무 잘하잖아. 속으로 감탄하면서 그 한 곡을 다섯 번 정도 연습하고는 금방 다들 해산! 하고 흩어졌다. 진짜 쇠뿔도 단김에 빼는 스타일들이네. 건반에서 악보를 챙기고 주섬주섬 가방을 싸서 집으로 가려는데 올- 반주자- 하고 또 그 진돌이가 말을 붙였다.
" 너 연주 잘해서 반주자 됐나보다. "
면접도 안 봤는데 무슨 소리야. 지원자가 나 밖에 없었 던 거 같구만. 불퉁하게 저 면접도 안 봤어요. 하고는 싸던 가방이나 마저 싸는데 알아- 그냥 방금 잘해서 말한 건데? 또 씨익 웃는다. 뭐야 왜 자꾸 웃어. 유진은 테이블 위에 남은 과자를 몇 개 집어 먹더니 남은 걸 정리했다. 테이블 위도 슥슥 휴지로 닦고 작은 비닐에 버릴걸 주워 담는 걸 보다가, 가만히 안을 둘러봤다. 다 나가고 둘밖에 안 남았는데 널브러진 의자들이랑 마시던 음료들이 그대로였다. 다들 안 치우고 그냥 갔네...유진은 별 다른 말 없이 혼자서 의자도 착착 접고 뒷정리를 하고 있었다. 되게 능글맞고 장난꾸러기처럼 구는 거 같더니 평소에도 혼자 저렇게 정리하나.
가만 있기는 뻘쭘해서 원영도 같이 손을 거들었다. 바닥에 떨어진 쓰레기를 같이 줍고 테이블에 먹고 남은 과자랑 챙겨서 쓰레기통에 버렸다. 재활용쓰레기통이 바로 근처에 없어서 밖에 있는 데다 버리려고 빈 페트병을 들었는데 저쪽 끝에서 유진은 캔하고 종이컵을 줍고 있었다. 둘이 별 다른 말은 안하고는 밖에 재활용쓰레기통까지 가서 캔이랑 종이랑 페트병을 버렸다. 키도 비슷해서 걷는 속도가 비슷한지 교회 밖으로 걸어가는 속도가 비슷했다.
진돌이가 또 저 멀리서 이미 꼬리를 붕붕 흔들면서 유진을 반기고 있었다. 살랑살랑도 아니고 완전 붕붕. 지난 주일처럼 진돌이 앞에 앉아서는 진돌이 손- 하는 옆에 원영도 따라 앉았다. 나도 진돌이랑 놀아야지. 진돌이가 유진의 손에 턱하고 앞발을 올렸다. 올- 아이구 잘해쪄요. 배를 슥슥 긁어주는 대로 진돌이가 발랑 누웠다가 다시 얌전히 앞에 앉았다. 아니 왜 저렇게 저 언니만 좋아해.
" 반주자 지원해보라고 한 거요. 바로 붙을 줄 알았죠? "
" 엉, 백퍼 붙는다고 했잖아. "
" 이전 성가대 반주자는 왜 그만뒀대요? "
나야 모르지. 내가 그걸 어떻게 알아. 쌀쌀맞은 건 아닌데 그렇다고 또 친절하지도 않은 어딘가 묘하게 유진은 불퉁했다. 하긴 제가 한 질문이 잘못됐다. 이전 반주자가 왜 그만뒀는지 정확한 사정을 고2 성가대원이 어떻게 알겠어. 진돌이가 앞에 사람이 둘이니까 여기 가야 하나 저길 가야 하나 정신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꼭 앞발은 유진의 손에만 올려줘서 칫- 하고 소릴 내게 됐다.
" 언니, 교회 오래 다녔어요? "
" 응, 왜? "
" 아니 그냥요. 왜 못 봤나 해서요. "
난 너 봤어. 진짜요? 동그랗게 눈을 뜨고 물었는데 유진은 난 너 꽤 오래 전 부터 봤는데 하고 또 느긋하게 말한다. 그럼 왜 지난번에 이름이랑 나이는 물어봤지? 원영은 속으로 갸웃했다. 얼굴만 알고 이름은 몰랐나? 원영은 자신은 왜 유진을 본 기억이 없는지 의아했다. 그래도 유진 정도면 까먹을 얼굴은 또 아닌데, 얼굴 기억도 잘 하는 편이고. 아까 본 고1 친구들 중에도 제주도에서 온 불타는 토마토 빼고는 성가대원들도 희미하게나마 거의 아는 얼굴이었다.
진돌이 엎드려- 유진의 말에 따라 그새 진돌이가 앞에서 엎드리고 있었다. 세상에 진돌이를 7년 봤는데 엎드려 할 줄 아는 건 몰랐다. 그래도 진돌이에 대해서 많이 안다고 자부하고 있었는데 이럴 수가.
" 진돌이가 엎드려를 해요? "
놀래서 동그랗게 눈을 뜨곤 바짝 붙어서 봤다. 진돌이 빵야도 하는데. 진돌이 빵야- 유진이 총 쏘는 제스쳐를 하니까 뒹굴하고 진돌이가 몸을 뒤집는다. 어머, 빵야를 하잖아. 진돌이는 잘한 거를 알았는지 발라당 누워서 신이나 있다. 진돌이가 엎드려랑 빵야하는 거를 이 언니는 어떻게 아는 거지. 아이구 잘해쪄요- 진돌이를 또 슥슥 쓰다듬고 있는 웃는 옆 모습을 보는데 혹시 강아지 조련에 탁월한 재능이 있는 건가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까 정확히 통성명도 안 했네.
" 언니, 이름 뭐예요. "
지난 주일에 제 이름 말해줬는데 언니는 안 말해줬잖아요. 아까 애들한테 들었을 거잖아. 애들이 나 부르는 거 듣지 않았어? 슥슥 진돌이 배를 긁으면서 말한다. 진짜 이름 말해주기 싫은 사람도 아니고 왜 저러는 거야.
" 성이 뭐예요? "
" 여성이지 뭐야. "
" 아니. 그 성이 아니잖아요. "
왜 저래 진짜. 부장님 개그야 뭐야. 저도 모르게 질색하는 표정을 지었더니 킥킥-거린다. 유진은 다시 능글거리는 장난기 가득한 얼굴이 되었다. 미안미안 농담. 나 안 씨야. 안유진. 하고 웃는다. 장원영 너 이제 집에 가. 내일 주일예배 아침 일찍 나와야 하잖아. 하고는 탁탁 손을 털고 일어나는걸 따라 일어났다. 아니 근데 장원영은 또 뭐야. 원영이도 아니고. 왜 장원영이라고 부르냐고 하려는데 말을 하기도 전에 저만큼 걸어서 교회를 빠져나간다. 걷는 속도가 엄청 빨랐다.
아침 8시부터 청소년부 성가대 연습실에 일찍 도착해서는 혼자 불을 켜고 건반을 몇 번 두드려봤다. 창문을 열었다가 건반 소리가 나가니까 안되겠구나 하고는 다시 닫았다. 건반 앞에 앉아서 삼십 분쯤 연습을 하고 있는데 문이 끼익하고 열리더니 유진이 들어왔다. 일찍 왔네? 네- 첫날이니까 걱정돼서요. 테이블 뒤 소파를 대충 슥슥 털고 앉더니 나도 노래 연습하게 반주 좀 해줄 수 있어? 해서 알겠다고 팔을 걷어붙였다. 어제도 아까도 잘만 쳤는데 유진이 옆에서 혼자 노래를 부르고 있으니까 중간에 음을 두 번이나 틀렸다. 진짜 왜 이러지. 심란한데 그 와중에 유진은 노래를 또 겁나게 잘해서 그 틀린 음을 다 제대로 맞춰 불렀다.
" 너, 잘하네. "
진짜 맘에도 없는 소리하네. 두 번이나 틀렸는데 비아냥거리는 거 아니야 진짜. 속상해서 그냥 뚱땅뚱땅 아무 건반이나 눌렀다. 이따가 본 예배 때는 실수 안 할 거예요. 진짜 잘할 거예요. 그래그래- 유진이 또 슥슥 머릴 쓰다듬어서 저 손 또 진돌이 만지고 온 거 아니야 머리를 탈탈 털었다.
하, 괜히 실수 안 한다. 잘한다. 그런 말을 했다. 본 예배에서는 세 번이나 틀렸다. 귀가 빨개지고 얼굴도 불타오르는 것 같다. 제주도에서 온 불타는 토마토가 그래도 잘했다- 하고 엄지척 하고는 가는데. 왠지 오늘 성가대 한 친구들이 뒤에서 한 마디씩 할 것 만 같았다. 제주도에서 온 불타는 토마토랑 유진이 노래를 잘해서 그 틀린 음을 그냥 적당히 맞춰 불러서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예배 중간에 시선을 몰아받을 뻔했다. 세 번은 진짜 좀 너무했다고 스스로도 너무 쪽팔렸다. 교회 2층에서 내려오는 계단에 앉아서 계단 손잡이에 콩하고 이마를 대고 있는데 아래 1층에서 중고등부 성가대 2학년 투덜이 오빠들이 얘기하는 소리가 들렸다. 야- 반주 너무 못하더라. 그 정도면 반주 없는 게 나은 거 아니냐. 안유진이 훨 낫다. 하는데 진짜 속상해서 울 것 같다.
" 불만이면 네가 반주하든가. "
목소리톤이 낯이 익어서 내려다보니까 유진이었다. 언제 1층에 있었는지 무표정으로 시큰둥한 말을 하고 있었다.
" 야, 반주가 세 번 틀리는 건 너무 심하지. "
" 너는 네 번이나 음 플랫 됐어. 너나 잘해. "
아까 오전에 연습할 때 잘한다고 했던 거는 비아냥거리는 게 아니었나보다. 이상하게 조금 기분이 나아지는 것 같기도. 다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뒷계단으로 내려와 교회 앞마당 진돌이 앞에 가서 앉았다. 진돌아 누나 진짜 속상해. 진돌이 손- 손을 내밀었는데 진돌이는 꼬리만 흔들고 줄 생각이 없다. 진짜 너까지 속상하게 이럴래. 진돌이 엎드려- 엎드리긴 거녕 또 가만히 저 먼 데만 쳐다보고 있었다. 꼬리만 흔들면 다야? 유진언니한테는 손도 잘 주고 엎드려도 잘 하고 빵야도 해줬으면서 나는 왜 손도 안주고 엎드려도 안 해줘. 속상해서 우다다 진돌이한테 서운하다고 말했다.
전에 유진이 한 것 처럼 총 쏘듯이 하고는 치- 진돌이 빵야- 했는데 무슨 일인지 진돌이가 뒹굴하고 몸을 뒤집는다. 두 박자 늦게 뒹군 거 같긴 했는데 그래도 기분이 좋아져서 우왕- 진돌이 잘했다- 배를 슥슥 긁어주었다. 다시 일어난 진돌이가 계속 저 멀리 다른 데를 보고 계속 꼬리를 흔든다.
아까부터 어딜 보고 저러나 진돌이가 보는 데를 돌아봤더니 유진이 걸어오고 있다. 진돌이가 진짜 좋아하나 보네 저 멀리서 오는데도 막 꼬리 흔들고. 진돌아 누나가 좋아 저 누나가 좋아? 하고 배 긁어주고 있는데 진돌이 나이 많아- 너 누나 아니야. 하고는 유진이 옆에 앉는다.
" 진돌이 8살 아니에요? "
" 그러니까 나이 많지. 강아지 나이는 1년에 7살이랬어. 진돌이 지금 56세야. "
완전 미중년. 그지 진돌아- 하고는 그새 유진 앞에 누워있는 진돌이 배를 긁어줬다. 뭐야 자기도 진돌이 애 취급하면서. 그래도 진돗개한테 미중년이라고 하는 건 퍽 웃겨서 흣-하고 웃었다. 유진이 그런 원영을 힐끗 보고는 같이 웃었다. 뺨 안으로 보조개가 콕 하고 들어갔다.
" 언니도 진돌이한테 애기처럼 그러잖아요. "
" 나는 진돌이 주인이니깐. "
" ...진돌이 교회 강아지 아니에요? "
" 어, 그러니까. 우리 아빠가 목사님이잖아. "
아, 그건 몰랐다. 생각해보니까 우리 교회 목사님 성이 안 씨셨다. 목사님 딸이었구나. 옆에 나란히 앉은 김에 아까 투덜이 오빠들 상대로 내 편을 들어줘서 고맙다고 하고 싶은데, 그 얘길 꺼내면 엿들은 것 처럼 될까 봐 말은 못하겠고 그냥 우물쭈물 했다. 유진이 꽤나 굳은 표정으로 투덜이들한테 말하던 게 생각난다. 지금은 아까랑 다르게 짓궂은 표정이어서 그 차이가 이질적이었다. 웃는 걸 힐끔 쳐다봤더니, 왜? 뭘 봐. 또 저렇게 퉁하게 말한다. 말은 퉁하게 하면서도 얼굴은 웃고 있어서 불퉁한 건지 다정한 건지 헷갈렸다. 보조개가 쏙 들어간 얼굴을 보다가 후다닥 시선을 내렸다.
" 안 봤어요. "
" 봤는데? "
" 안 봤다니까요. "
" 봤다니까? "
" 제 눈이잖아요. 제 맘대로 뭐 보지도 못해요? "
" 거봐, 봤네. "
진짜 어이없어. 집에 갈래요. 오늘 반주 너무 많이 틀려서 얼른 집에 가고 싶어요. 누가 뭐랬냐, 장원영아- 집에 조심히 가라. 원영보다 훨씬 빨리 몸을 일으킨 유진이 더 빠른 걸음으로 교회 앞마당을 빠져나갔다. 또 장원영아-라고 하네 칫- 원영아도 아니고 장원영아는 뭐야. 글자 수도 한 글자 더 많아서 성 붙여서 부르는 게 더 귀찮은데 꼭. 유진이 가고 난 교회 앞마당에서 다시 진돌이 배를 슥슥 긁다가 진돌이 빵야- 했는데 이번에는 또 들은 척도 안 한다. 뭐야 왜 해주다 말다 해. 밀당하는거야? 누나 삐졌어 집에 갈 거야. 진돌이는 여기 있어. 원래 너 여기 살지만.
방 안 침대에 누워서 아까 예배 때를 곰곰이 다시 떠올려보는데 뭔가 유진이 노래를 엄청 잘했던 거 같았다. 음도 다 짚는 거 보면 건반도 잘 치는 것 같기도. 아까 투덜이들이 안유진이 낫다 이러던데 원래 반주도 했었을까. 장래 희망이 혹시 가수 그런 건가. 맨날 파란 캔 포카리스웨트 마시고 있어서 운동선수가 장래 희망 같다고 생각했는데 알고 보니까 혹시 진짜 가수가 장래 희망인 거 아니야. 다음 주일에도 오전에 8시 반 그렇게 일찍 연습하러 오려나.
학교가 어디랬더라, 전에 모여서 얘기할 때 누구는 어디 학교다 그랬던 거 같은데 유진이 다니는 학교는 못 들었던 거 같기도 하다. 우리 학교는 아니고 이 근처에 고등학교가 꽤 많은데 어디지. 다음 주일에 물어봐야겠다. 근데 뭐만 물어보면 대답을 안 해주고 자꾸 빼고 뭘 보냐고 하고 좀 싹퉁바가지가 없는 거 같은데 어떻게 하면 친해지지. 왜 친해지고 싶은지 모르겠는데 자꾸 안유진 생각이 났다. 진돌이 빵야- 하고 웃는 옆 모습 같은 거 그리고 쏙 들어가는 보조개 같은 거. 불퉁하게 굳어진 표정은 또 묘하게 잘생겼나. 응? 뭐야, 왜 이래. 원래 교회 언니에 대해서 이런 생각하는 건가.
교회 언니랑 친해지는 방법. 인터넷에 검색을 해봤다. 교회 언니랑 친해지는 방법은 안 나오고 교회 언니를 꼬시는 방법 이런 게 나와서 얼굴만 화끈해졌다. 교회 언니를 꼬시는 건 또 뭐야. 언니를 왜 꼬셔. 하필 검색 했을 때 저런 문장이 튀어나오는 일이 일어날 게 뭐야. 누가 뭐라고 한 것도 아닌데 엄마가 방문을 두드린 것 처럼 후다닥 휴대폰을 구석으로 던졌다. 괜히 얼굴이 새빨개지고 귀도 새빨개져서 이불만 머리끝까지 끌어올렸다.
원영은 아침 7시 반에 성가대 연습실에 도착했다. 이번주일에도 실수할까 봐 더 빨리 나와서 연습을 할 참이었다. 이른 아침부터 나온 터라 덜 마른 머리가 아직 축축히 젖어있었다. 창문을 열고 잠시 환기를 시켰다가 시끄러울까 봐 이내 창문을 닫았다. 지난주에 유진이 8시 반쯤 나왔으니까 최소 한 시간 정도는 연습 할 시간이 있을 것 같았다. 저런 생각을 하는 것도 잠시, 끼익-하고 연습실 문이 열리더니 유진이 들어왔다. 예상치 못한 등장에 원영도 놀라고 유진도 연습실에 있는 원영 때문에 짐짓 놀란 기색이었다.
" 장원영...? 너 왜 이렇게 일찍 나왔어? "
유진은 꼭 저렇게 원영을 성을 붙여서 불렀다. 다른 애들한테는 현수야, 지원아, 정우야, 지현아 등등 잘도 성 떼고 부르던데. 심지어 지원이한테는 불타는 토마토라고 별명도 붙여준 상태였다. 지원이는 유진언니가 자기가 낯을 많이 가려서 신경 써주는 것 같다고 자랑하기도 했다. 나한테는 장원영이라고 하는데. 낯 안 가리면 신경 안 써주는 건가. 신경 써달라는 건 아니지만 그래도 너무 성을 붙여서 장원영이라고 불렀다. 지금도 장원영? 말고 원영이? 할 수도 있었잖아. 꼭 원영한테만 장원영- 이라고 해서 자꾸 속이 꼬였다. 나도 안유진 언니라고 할까보다.
" 오늘도 실수할까 봐요. "
" 아침은 먹었어? "
원영은 한껏 불퉁하게 대답했는데, 유진은 예상 범주에 전혀 없는 너무 다정한 말을 던져서 꼬였던 원영의 속을 또 살살 풀어냈다. 아침 안 먹었으면 코코아라도 마실래? 하는 유진을 따라서 성가대 연습실 뒤편에 주차장 쪽 자판기로 향했다. 조립식 건물로 지어진 교육관이 교회 뒤편 주차장과 맞닿아있는 곳에 자판기가 두 대 있었다. 빨간색 자판기에는 유진이 매일 마시는 파란 색 포카리스웨트 캔이나 탄산음료 같은 걸 팔았고, 그 옆에 자판기에는 밀크커피 코코아 율무차 같은 걸 팔았다. 유진이 따듯한 코코아를 한잔 뽑아서 원영에게 건네주었다.
" 코코아 같은 거 마시면 긴장 할 때 도움 된대. "
" 오늘도 틀리면 긴장 때문이 아니라 그냥 완전 못하는 거예요. "
원영이 코코아가 든 종이컵을 받아들었다. 더운 날씨에도 이상하게 손이 떨려서 더 눈치를 봤다. 손 끝이 순간 톡 닿아서 괜히 흠칫 어깨를 움츠렸다. 손 좀 닿으면 어떻다고 갑자기 이렇게 온 신경이 손 끝으로 가는지 모르겠다. 수족냉증으로 날마다 시린 손 끝이 순간 더워졌다. 손에 쥔 종이컵이 따듯하다 못해 뜨거웠다. 왼손으로 들었다가 다시 오른손으로 들었다가 유진을 힐끔 거리면서 손을 꼼지락거리는데 뜨거워? 하고는 원영의 손에서 유진이 종이컵을 뺏어 들었다. 당황해서 허둥지둥 아껴마시는 거에요 하고 말도 안 되는 소릴 했다.
" 코코아 좋아해? "
" 단 거... 좋아해요. "
" 그렇구나. "
좀 식으면 마셔. 손에서 살살 흔들던 종이컵을 다시 원영의 손에 쥐여준다. 이상하게 입이 자꾸 말라서 원영은 오늘은 진짜 실수 안 할 거라고 똑같은 말을 종이컵을 내려다보면서 중얼중얼 반복했다. 유진은 그런 원영을 가만히 보다가 아무렇지 않게 포카리스웨트를 쭉 마셨다. 사람이 실수 할 수도 있지 뭘, 너 잘 할 거야. 하고는 웃었다. 보조개가 콕 하고 들어가는 자리에 원영의 시선도 콕 하고 꽂혔다. 파란 색 캔에 든 걸 자꾸 마셔서 그런지 자꾸만 시원하고 청량하고 파랗고 그렇게 웃는 것 같았다. 저거 너무 마셔서 혈관에 막 포카리스웨트가 흐르는 거 아니야?
원영이 반주 연습 할 때 같이 옆에서 노래 불러주겠다고, 유진은 가사지를 찾아 메신저백을 뒤적였다. 혼자 연습하려다가 유진이랑 둘이 하려니까 좀 긴장되는 거 같기도 했다. 괜히 원영은 건반을 몇 개 혼자 눌러보다가 소리가 시원찮아 건반 뒤 버튼을 기웃거렸다. 으응... 왜 이러지. 지난주에 뭐 건드린 거 없는데. 시무룩해서 건반 뒤를 기웃거리는데 유진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거 켰어? 밑에? 하고는 유진이 건반 밑에 버튼 하나를 눌렀다. 건반에서 바로 둥- 하고 소리가 난다. 유진이 너무 숨도 몸도 가까이 붙어있어서 원영은 순간 숨을 참았다.
" 근데 너 아침 일찍 나오느라 머리를 다 못 말린 거야? 여름이라도 그러면 감기 걸린다. "
" 어쩌다 보니까... 그렇게 됐어요. "
엄청 가까이 붙어있는데 제 머리카락 끝을 따라 오르내리는 시선 때문에 이상하게 입술이 마르는 것 같고 침이 삼켜졌다. 그 시선이 젖은 머리카락 끝에서 조금 젖은 어깨로 또 더 밑으로 내려갔다가 다시 원영의 얼굴로 돌아왔다. 왜 저렇게 보는 거야. 원영은 몸을 작게 움츠렸다. 그 틈에 유진이 입고 있는 옷에서 나는 건지 섬유유연제 향이 훅 들이쳤다. 또 원영은 흣- 하고 숨을 참았다. 둥- 비단 건반에서만 저 소리가 난 건 아닌 것 같았다. 진짜... 이상해.
뒤숭숭한 기분도 문제고 건반 바로 옆에 유진이 서 있어서 그런지 이상하게 손가락이 더 굳는 것 같았다. 평일에 집에서 연습 할 때보다 한두 번씩은 더 틀려서 유진의 얼굴은 쳐다보지도 못하고 악보에만 시선을 꽂아 겨우겨우 반주를 했다. 연습을 하는 내내 한번을 실수 없이 못 치고 원영은 자꾸 기분이 가라앉았다. 잘하고 싶은데 진짜. 원영의 속도 모르고 유진은 잘하네- 이런 소릴 해서 속만 더 상했다.
그래도 미리 오래 연습한 보람이 있었을까. 본 예배 때는 한 번도 틀리지 않고 반주를 마쳤다. 오히려 유진이 노래를 하는 가창석과 거리가 좀 멀어지니까 훨씬 더 수월하게 반주를 했다. 아까는 그냥 괜히 좀 긴장했었나. 제주도에서 온 불타는 토마토 김지원이 대박- 원영이 완전 잘해버렸잖아- 하고 엄지를 척 들어 보였다. 가방을 챙겨서 나오는데 이미 가창석에 유진은 없고, 어딨는지 교회 안을 눈으로 훑어도 보이질 않았다. 걸음이 빠르더니 벌써 집으로 갔나. 시무룩해져서 진돌이나 보려고 나섰는데, 교회 앞마당에 유진이 서 있었다. 걸음 진짜 빠르네 언제 저기까지 갔대. 반가운 마음에 쪼르르 달려가서 유진 옆에 섰다.
" 언니, 저 오늘 안 틀렸죠. "
" 응, 엄청 잘하더라. "
유진이 갑자기 손을 뻗어 머리를 쓰다듬어주었다. 원영은 살짝 멍한 상태로 머리가 쓰다듬어지고 있었다. 뭐지 이 이상하고 살살 오르는 기분. 아- 진돌이 만진 손 아니에요?! 하고 후다닥 손을 쳐냈다. 유진이 나 진돌이 안 만졌어- 하고 파랗게 웃었다.
" 언니, 근데 반주도 혹시 했었어요? "
" 응? 왜? "
" 아까 연습할 때 보니까 건반 다루는 것도 잘하고 그래서요. 보통 성가대 건반 거기 밑에 버튼 있는 거 잘 모르는데. "
" 아, 예전에. 지금은 안 해. "
" 왜요? "
" 그냥, 노래 부르는 게 더 좋아서. "
그러니까 원영이 네가 반주해줘. 난 노래 부를 테니까. 난 간다. 하고는 전도사님들이 부르는 틈으로 손을 흔들고는 뛰어갔다. 유진이 뛰어가는 뒷모습을 가만히 쳐다봤다. 유진이 어깨에 매고 있는 메신저백이 하늘색 체크 남방이랑 같이 흔들렸다. 까만 메신저백이 오르락내리락. 방금은 장원영이 아니고 원영이라고 했네. 어느새 발치에 와서 꼬리를 흔드는 진돌이 옆에 원영은 앉아서 진돌이를 마구 쓰다듬었다. 우리 미중년 진돌이 잘 지냈어? 진돌이 뭐 하고 있었어- 진돌아- 누나 기분 엄청 좋아- 진돌이도 기분이 좋은 것 같았다.
원영은 멀뚱멀뚱 방에 누워서 천장을 올려다봤다. 분명 집안 침대 위에 있는데 자꾸만 까만 메신저백을 오르내리면서 뛰는 뒷모습 같은 게 생각났다. 하늘색 체크 남방 때문인지 하늘같이 맑고 청아해 보였다가 맨날 파란 캔을 들고 다녀선지 파랗게 청량해 보였다가 안유진 때문에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진짜 맨날 마셔서 혈관에 포카리스웨트 흐르나. 씨익 웃을 때 들어가는 보조개 같은 거는 어떻게 또 콕콕 박혀있을까. 원래 입 아래에도 보조개 들어가는 건가. 입가에 보조개 들어가는 건 많이 봤어도 그 밑에도 쏙 들어가는 건 처음 봤다. 하나님이 인간을 창조하셨다는데 유진은 저렇게 콕 보조개를 손가락으로 눌러서 빚으셨나보다.
지난번에 지원과 바자회 관련 회의를 하다가 우연히 지원이도 보조개가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원영이 놀랐던 건 지원이가 보조개가 있었는지 그전까지 몰랐다는 데 있다.
' 지원이 너 보조개 있네? '
' 헐, 그걸 이제 알았어? '
나 여기 쏙 들어가 하고 보조개를 보여주던 지원이 이제서야 내 보조개를 발견한 소감은? 하고 물었었다.
' 너도 예쁘고 귀여워. '
' 응? 너도? 누구 보조개가 또 예쁘고 귀여운데? '
' 어...? '
원영이 너, 왜 얼굴이 빨개지는 거야? 하고 지원이 의아해했다. 저 날 생각을 하니까 다시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 같다. 날씨 때문인가. 날 더운 초 여름의 방안이 후덥지근한 것도 같아서 에어컨을 켰다. 날이 더운 건지, 자꾸 누구 때문에 더워지는 건지 잠옷만 펄럭펄럭 부쳤다. 왜 이래 진짜. 휴, 정신이 나간 거 아니야. 뭔데 자꾸 생각나고 그러는지 모르겠다. 여자 좋아하면 죄라고 했는데 자꾸 생각나는 것도 일종에 죄 아닐까. 큰일 났다.
서둘로 속으로 기도문을 두어번 외웠다. 하나님이 도와주시겠지. 기도문을 외우다 보면 유진의 보조개라거나 뛰어가는 뒷모습이라거나 파랗게 웃는 거라거나 그런 것도 머릿속에서 나가게 해주실 것 만 같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기도문을 두 개, 세 개 종류별로 외우고 그것도 모자라서 성경책도 펴서 읽었다. 성경을 훑어보다가 막 씻고 나와서 아직 젖은 머리칼을 쓸어 넘기는데 아까 유진이 머리를 쓰다듬어주던 게 떠오른다. 다시 기분이 살살 오르는 게 이상했다. 아까 젖어있던 머리카락 끝부터 어깨 아래까지 닿던 시선도 또 떠올라서 가슴 부근 어디쯤이 순간 찌릿해졌다. 흑, 심장병인가. 정말 큰일 났다. 유진이 자꾸 쏟아지는 기도문 사이를 피해서 머릿속을 뛰어다니고 있었다.
교회에 초여름마다 열리는 바자회가 열렸다. 햇살이 따갑게 내리쬐는 앞마당에 하얀 천막이 옹기종기 들어섰다. 각 천막마다 손때 묻은 옷가지부터 정성껏 준비한 수공예품, 그리고 각종 생활용품들까지 다양한 물품들이 테이블 위에 가지런히 진열되어 있었다. 왁자지껄한 소릴 내며 사람들이 천막 사이사이를 돌아다니고, 아이들은 작은 바구니를 들고 달란트를 바꾸느라 분주했다. 안 올려다가 성가대 단원들은 거의 다 참석한다기에 마지못해 엄마를 따라나선 터라 원영은 햇빛을 피할 그늘을 찾기 바빴다. 더운 것도 싫고 땀 흘리는 건 더 싫어서 부채만 펄럭펄럭 부쳤다.
성가대 친구들이랑 각종 수제용품 부스를 구경하고 전도사님 말씀에 따라 심부름을 했다. 한 바퀴 돌고 났더니 그새 할 것도 더 없어져서 여기저기 눈으로 기웃거렸다. 제일 커다란 천막에 분식 부스가 제일 인기였다. 전도사님이 쥐여준 컵볶이랑 스무디를 하나씩 손에 들고 교회 뒷계단에 앉아서 쉬는데 아무리 둘러봐도 유진은 코빼기도 안 보였다. 날도 더운데 괜히 왔다 싶었다. 스무디라도 없었으면 진작 더워서 죽을 뻔. 유진은 이제 고2라서 이런 바자회 안 나오나. 목사님 딸이라서 당연히 올 줄 알았는데. 지난번에 바자회 회의 때도 성가대 단원들이 유진은 이런 행사에 빠지지 않는다고 했었는데 올해는 안 올 건가보다. 나도 그냥 집에서 영단어나 외울걸. 후회하면서 스무디에 꽂힌 새빨간 빨대를 쪽쪽 빨다가 그냥 옆에 내려놨다. 더워서인지 괜히 입맛이 없어져서 컵볶이를 한 입도 채 안 먹고 그대로 들고 있었다.
" 왜 안 먹어? "
떡볶이 안 좋아해? 하고 유진이 언제 바로 옆에 왔는지 바로 옆 계단에 걸터앉아 말을 걸었다. 원영은 화들짝 놀라서 상체를 뒤로 살짝 물렀다. 너무 가까이 유진의 얼굴이 다가와 있었다. 더운 날씨 탓인지 이마랑 목에 송골송골 땀을 달고 있었다. 너무 가까워서 훅- 하고 섬유유연제향 같은 게 지난번 성가대 연습실에서 처럼 들이닥쳤다. 이상해. 분명 엄청 땀을 흘리고 있는데. 이번엔 건반도 없는데 또 어디선가 둥- 하는 소리가 났다. 유진이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는 것도 모자라 아예 건반을 연주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졌다.
" 아... 아껴먹는 거에요. "
" 그런 거야? 나 한 입만. "
유진이 능청스럽게 아- 한다. 먹여달라는 제스처에 우물쭈물하다가 떡을 하나 이쑤시개로 찍어서 입안에 쏙 넣어줬다. 떡볶이를 받아 먹으면서도 빤히 원영을 쳐다보는 눈이 민망해서 시선을 자꾸 밑으로 내렸다. 자꾸 저렇게 빤히 보는데 눈이 엄청 크고 순해서 속마음을 관통 당할 것만 같아진다. 엄청 주기 싫은가보다 되게 망설이다주네 유진이 우물거리면서 큭큭 웃었다.
" 미안, 더 안 뺏어 먹을게. "
내가 아까 점심을 못 먹어서, 너 떡볶이 엄청 좋아하는구나? 하고 유진이 웃는 거에 바로 또 하나 떡을 콕 찍어서 내밀었다. 점심 못 먹었으면 더 먹어요. 유진의 얼굴이 너무 가까워서 차마 제대로 쳐다보진 못했다.
" 아니야. 아껴먹는 거라며 너 많이 먹어. "
난 저기 가서 다른 애들 거 먹을래. 스무디는 내가 마신다? 땡큐- 하고 원영의 스무디를 들고 갔다. 걸음이 어찌나 빠른지 원영이 말리기도 전에 그새 저 멀리 다른 애들 무리 쪽으로 뛰어가버렸다. 점심 못 먹었으면 더 먹지. 아껴먹는 거라고 하지 말걸. 그리고 스무디 그거 내가 먹던 건데... 유진의 뛰는 박자에 맞춰 오르내리는 까만 메신저백 처럼 마음이 오르내렸다. 다른 애들 무리 사이에서 얘기를 하면서 스무디를 마시는 유진을 보는데 기분 탓인지 이상하게 중간중간 유진이랑 눈이 마주치는 기분이 들었다. 이제는 하다하다 이런 착각도 하나보다. 그나저나 저거 내가 쓰던 빨대인데... 새빨간 빨대가 유진의 입안으로 쏙 들어갔다 나올 때마다 괜히 얼굴이 막 달아오르는 것 같다. 지금도 가슴 어디쯤이 찌릿했다. 빨대 그거 좀 같이 쓰면 뭐 어떻다고. 더워서 그런가. 흑 진짜 심장병 같은 거면 어떡해. 자꾸 입이 바짝 마르는 것 같아서 침을 삼켰다. 집에서도 자꾸 머릿속에서 뛰어다니더니, 교회 앞마당에서도 뛰어다니고 도대체 어디까지 따라서 뛰어다닐 거야. 교회에서도 유진이 머릿속에 뛰어 다니는 게 정말 죄책감이 든다.
그 사이 유진은 그 무리에서도 떡볶이며 핫도그며 또 한입 씩 뺏어 먹고 있었다. 원영만 속이 엉망이고 유진은 아무렇지 않을 거라서 또 속이 상했다. 독실한 목사 딸을 자꾸 머릿속으로 맘속으로 데려와서 뛰어다니게 하는 스스로가 더욱 죄인 같아져서 자꾸만 입술을 깨물었다. 목사님도 이놈 하시고 하나님도 불호령을 치실 게 뻔했다. 진짜 되지도 않을 생각들. 목사님 딸이 여자 좋아할 리 있겠냐구. 그 누구보다 나한테 사탄이라고 할걸. 파랗게 웃던 유진이 미간을 찡그리고 화를 내는 상상 같은 게 마구마구 쏟아졌다.
저 멀리서 다른 성가대 언니가 유진의 입으로 쏙 떡볶이 어묵을 넣어주는 걸 보았다. 입가에 묻혔는지 유진의 입가도 닦아준다. 원래 잘 저렇게 입에 넣어달라하고 그런 스타일인가 보네. 다른 사람 것도 잘 받아먹구. 애도 아니고 열여덟이나 돼서 왜 입에 다 묻히고 먹어. 그리고 묻었으면 자기가 닦아야지 남이 닦아주고 진짜 다 커서 칠칠맞게.
진짜 이런 생각 좀 그만. 또 기분이 축축 늘어졌다. 원영의 속도 모르고 유진은 원영에게 오라고 손짓을 했다. 원영아- 하고 저기 멀리서 부르는데 못 들은 척하고 휙 뒤를 돌아서 성큼성큼 걸었다. 속으로 줄기차게 기도문을 외웠다. 하늘에 계신 우리 아버지 아버지의 이름이 거룩히 빛나시며 아버지의 나라가 오시며... 아버지의 나라는 안 오고 대신 안유진이 자꾸 맘속으로 온다. 속으로 외우는 기도문 소리보다, 원영아- 하고 조금 전에 유진이 부른 소리가 더 크게 맘에서 울렸다. 자꾸만 유진의 입안으로 들락날락하는 새빨간 빨대가 아른거렸다.
원영은 늦은 성가대 연습이 끝나고 오랜만에 목욕을 한 것 같은 진돌이 앞에 앉아서 쓰다듬고 있었다. 다들 노래방을 간다고 우르르 나가서 노래방을 가기 싫은 원영만 느지막이 연습실을 빠져나왔다. 교회 십자가 옆으로 나란히 달이 떠올라서 전신주에 톡 걸렸다. 연습 때문에 제일 늦게까지 남았던 성가대가 빠져나간 교회는 이제 완전 적막했다. 오늘은 연습하다 몇음 실수를 해서인지 기분도 별로고 집에 가기가 싫었다. 진돌이는 그동안 누리끼리하더니 오랜만에 목욕을 당해서 오늘은 털이 하얗고 더 귀여웠다. 진돌이 완전 하얘졌네- 바닥에 자글자글하게 깔린 뾰족한 자갈에 쪼그리고 앉아서 꼬리를 흔드는 진돌이를 보니까 오늘 실수해서 얹혔던 속이 그래도 좀 내려가서 후우- 하고 원영은 큰 숨을 내쉬었다.
진돌아- 너 유진언니 학교 어딘지 알아? 늘 올출이더니 요즘 통 얼굴을 볼 수 없는 유진이 생각나서 진돌이를 슥슥 쓰다듬으면서 말했다. ' 원영이 네가 반주해줘. 난 노래 부를 테니까. ' 하더니 2주 동안 연습에도 안 나오고 목사님 딸이 주일에도 예배에 안 나왔다. 완전 나일롱 크리스천이야. 바자회 이후로 통 못 봐서 어떻게 된 건지 모르겠다. 왜 안 나오냐고 물어보고 싶은데 유진의 연락처도 없었다. 괜히 유진한테 연락처 달라고 하는 게 맘이 불경한 짓인 거 같아서 연락처도 모른 채 지냈는데 그냥 물어봐서 알아둘걸.
유진이 왜 안 나오는지 정확히 아는 사람이 없었다. 지원이 한테도 물어봤는데 유진언니 학교에서 다쳤다던데? 하고 들은 게 전부였다. 또 투덜이들 말로는 유진이 개학하고 남친 생겨서 요즘 놀러 다니기 바쁜 거 같다고 했었다. 다친 거야 아니면 데이트를 하는 거야. 그나저나 남친이 있나 보네. 하긴 여친이 있을 리는 없겠지. 유진은 남자들한테 인기가 엄청 많을 것 같긴 했다. 아닌가 여자들한테도 인기 많은 건가. 진돌이는 원영에게 처음에만 잠시 관심을 주고는 다시 저 멀리 어딘가를 보면서 꼬리를 흔들었다.
진돌이 너 유진언니 남친 누군지 알아? 진돌이가 대답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런 질문을 진돌이한테 하고 있는 게 그냥 어이가 없어졌다. 진돌이 엎드려- 진돌이는 엎드리긴 거녕 계속 꼬리만 엄한 곳을 보면서 흔들고 원영에게는 눈길 한번을 주지 않는다. 진돌이 빵야- 이것도 해줄 리가 없었다. 지난번에는 그래도 한번 해주더니, 원영은 여전히 저 먼 곳만 바라보면서 꼬리를 흔들고 있는 진돌이가 야속해졌다. 어디 보는 거야.
" 치- 나 오늘 실수 많이 해서 속상하단 말이야. 유진언니도 안 나오고. 진돌이 너 이럴 거야. "
실수한 게 속상한 건지 유진이 안 나온 게 속상한 건지 남친이 있다는 게 속상한 건지 뭔지 모르겠지만 엄청 속상했다. 다친 거면 어딜 얼마나 다쳤지. 2주 동안 못 나올 정도면 진짜 엄청 크게 다쳤나. 유진이 다쳐서 안 나온 거랑 남친이랑 데이트 하느라 안 나온 거 중에 뭐가 더 나은가. 이딴 생각이 들어서 우울해졌다. 진돌이한테 투정을 부렸는데, 진돌이는 말을 알아듣는 게 틀림없었다. 혼자 꽁알거리다가 진돌이 빵야- 했더니 좀 박자가 늦긴 했어도 뒹굴 굴러주었다. 그거에 또 금세 기분이 좀 풀어져서 우왕- 진돌이 착해- 역시 미중년이야- 하고 배를 쓰다듬었다.
또 혼자 저러고 있네. 유진이 교회 뒷계단에 앉아있는데 앞마당 구석 진돌이 앞에 원영이 쭈그려 앉아있었다. 불편하지도 않은가 긴 다리를 접고 쭈그려 앉아있는 게 흡사 3센치였다. 거리가 꽤 멀어서 원영은 유진이 있는 줄도 모르는 것 같았다. 이미 달이 뜨고 어두운 저녁인데 다른 애들은 다 집에 갔는데 혼자 저기서 뭐 하고 있는 건지 모르겠다. 진돌이 앞에서 쪼그려있는 옆 모습을 보는데 조만간 원영의 볼이 진돌이 앞으로 쏟아질 거 같았다. 진돌이랑 뭘 하는 건지 가만 보고 있으려니까 진돌이는 원영에게 관심도 없고 뒷계단에 있는 유진만 보고 꼬리를 흔들고 있었다. 저 눈치 없는 미중년이- 나 말고 원영이를 봐야지. 손으로 저기보라고 휘휘 젓는 시늉을 하려다가 왼손에 한 깁스 때문에 불편해서 걍 허우적대는 꼴이 됐다. 진돌이는 그러던지 말던지 유진만 보고 꼬리를 살살 흔들었다.
진돌아-너 유진언니 학교 어딘지 알아? 텅 빈 교회 앞마당에 또랑또랑한 원영의 목소리가 꽤 멀리 유진이 앉아있는 자리까지 들린다. 나한테 물어보면 될 걸 저걸 말도 못하는 진돌이한테 왜 물어보고 있는 거야. 유진은 저 상황에 자꾸 비실비실 웃음이 났다. 지난번에 이름이랑 성가대 뭐 그런 거 잘 대답을 안 해줘서 그런가. 그래도 진돌이는 그거 대답 못 해줄 텐데. 아니나 다를까 진돌이는 계속 유진이 있는 쪽 어디쯤을 보고 꼬리를 흔들었다. 저기 쪼그려 앉아서 물어보고 있는 게 자꾸 웃음이 나서 조용히 웃었다.
진돌이 너 유진언니 남친 누군지 알아? 원영이 진돌이한테 묻는 저 말은 너무 황당해서 유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내가? 내가 나도 모르는 남친이 있었나. 또 투덜이들이 괜한 말을 지어서 성가대에 나불거린 것 같았다. 하여튼 그 지옥의 주둥이들을 지져버리던가 해야지. 남친은 무슨 남친. 평생에 절대 안 생길게 남친인데. 지난번 주일에 원영이 반주 실수했을 때도 반주자가 너무 못 한다는 둥 많이 틀린다는 둥 원영도 없는 자리에서 타박했던 게 심기에 매우 거슬렸었다. 자기들이나 잘 할 것이지. 그때도 진돌이 앞에서 원영이 저렇게 앉아있었던 게 생각났다. 속상한 일이 생기면 진돌이랑 얘기를 하나.
" 치- 나 오늘 실수 많이 해서 속상하단 말이야. 유진언니도 안 나오고. 진돌이 너 이럴 거야. "
원영의 입이 댓발 나와 있었다. 볼이 쏟아지다 못해 흐를 거 같은데, 입은 그거보다 더 나와 있다. 가로등 빛에 볼까지 그림자가 생길 것 같았다. 진돌이는 여전히 유진만 신경 쓰는 통에 원영이 해달라는 거에 통 장단을 맞춰주지 못했다.
진돌이 빵야- 원영이 저 말을 하는 거에 맞춰서 유진이 손을 들어 진돌이한테 총 쏘는 시늉을 했다. 저 멀리 떨어진 유진을 보고 있던 진돌이가 유진이 쏘는 총을 맞고 뒹굴 하고 한 바퀴 뒹굴었다. 우왕- 진돌이 착해- 원영이 기분이 좀 나아졌는지 한껏 풀린 표정으로 진돌이를 쓰다듬었다. 지난번에도 그러더니 진돌이가 빵야 해주는 거 엄청 좋아하나 봐.
" 혼자 진돌이랑 뭐해. "
유진이 가까이 다가가자 예상을 못한 원영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언니 교회 나왔었어요? 하고 물었다. 저 말이 다 끝나기도 전에 언니 팔 왜 그래요?? 하는 눈이 너무 동그랗게 더 커져서 쏟아질 것 같았다.
" 아- 그냥 좀 다쳤어. "
" 좀 다친 게 아닌데요. 완전 깁스했잖아요. "
" 너 이 시간에 뭐해. 집에 안 가고. "
" 그냥요... 진돌이 목욕해서 귀여워서요. "
원영은 유진의 깁스에서 눈도 못 떼고 말했다. 왜 다쳤는지 하나부터 열까지 물어보고 싶어서 죽겠다는 눈치인데 차마 말을 못 하는 듯했다.
" 진돌이한테 내 학교랑 남친 물어보려고 한 건 아니고? "
씨익 웃으면서 하는 유진의 말을 듣자마자 원영은 얼굴이 새빨개지다 못해 귀까지 활활 타오르는 불타는 토마토가 되었다. 제주도에서만 불타는 토마토가 나는 건 줄 알았더니 서울에서도 나는 건 줄은 몰랐다.
" 그... 그런 적 없는데요? "
" 거짓말 하는 거 죄야. "
원영은 아무 말도 못 하고 그냥 진돌이만 쓰다듬었다. 진돌이는 이제 살짝 귀찮은 기색이었다. 진돌이가 발로 귀를 탁탁 털어서 자갈이 같이 타락타락 하고 부딪혔다.
" 나 학교는 저 사거리 앞에 여고다녀. "
" ....남친은요...? "
" 누가 나 남친 있대? "
" 성가대 오빠들이 그러던데요. 언니 남친이랑 데이트하러 다녀서 요즘 잘 못 나온다고..."
" 걔들 진돌이 보다 멍청한 애들이니까 걔들 말 들을 거 없어. "
걔네 둘이 합쳐도 진돌이보다 아이큐가 낮을걸. 그래보이긴해요. 원영은 킥킥 웃다가 작게 대답하고는 다시 진돌이를 쓰다듬었다. 아까보다 부쩍 경쾌해진 손놀림이어서 진돌이는 이 손길이 꽤 맘에 드는지 다시 원영 앞으로 아예 배를 발랑 까고 뒤집어졌다.
" 나 남친 있는 거 왜 궁금했는데. "
진돌이를 쓰다듬던 원영의 손이 흠칫 하고 멈췄다. 영문을 모르는 진돌이만 뒤집었던 몸을 다시 돌려 원영 앞에 가 앉았다. 다시 쓰다듬어달라는 거였다.
" 몰라요. "
" 나도 너 남친 있는지 궁금한데. "
원영은 유진을 가만히 쳐다봤다. 대답 안 할 거야? 하기 싫음 말고. 유진은 자갈을 고르던 손을 탁탁 털었다.
" 언니는 나 남친 있는지 왜 궁금한데요? "
지난번에 성가대 관련해서 쉽게 대답 안 해준 거에 대한 복수인지. 대답은 안 하고 역으로 질문이 유진에게 돌아왔다. 과거의 업보였다. 유진은 쪼그려 앉았던 거를 털썩 하고 엉덩이를 붙이고 앉았다.
" 몰라 나도. 너도 모른다며. "
" 내가 사실 안다고하면 언니도 알려줄 거예요? "
" 모른다는 거 거짓말이야? "
원영이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거짓말하는 거 죄라니까. 유진이 주변에 자갈을 손에 들고 저 멀리 어디로 툭툭 한 두 개씩 던졌다. 유진의 옆으로 자갈이 조금씩 비워져서 반반해진 바닥이 서서히 드러났다.
" 그럼 말 안 할래요. 이건 더 큰 죄라서요. "
" 나도 그런데. "
셋 세면 동시에 말하자. 어때? 하고 유진이 원영의 눈을 가만히 들여다봤다. 거짓말하기 없기. 이렇게 눈 마주 보고 있는데 거짓말 하면 완전 나쁜 거잖아. 원영이 알았다고 고개를 끄덕였다. 유진이 천천히 숫자를 셌다.
하나.
둘.
셋.
" ... "
" ... "
둘다 말은 안 하고 묵언수행을 했다. 유진이 하하하- 하고 크게 웃었다.
" 미안미안. 진짜 이번엔 진짜 말하기. "
" ...언니는 이거 다 그냥 장난 같죠. 저한테도 그냥 장난 치는 거죠. "
원영은 이제 유진 쪽으로는 시선도 주지 않고 말했다. 원영의 옆 모습을 유진이 가만히 들여다봤다. 고민과 심란과 우울과 혼란이 뒤섞여 군데군데 들러붙어 있는 얼굴.
" 다 언니 때문이에요. "
" 뭐가? "
" 언니가 자꾸... "
원영은 뭔가 말하려다 말고 다시 얼굴을 숙인 채 그냥 바닥을 돌로 긁었다. 눈이 울망해지는게 혼자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유진은 가만히 계속 눈을 맞췄다. 원영아 얼굴 보여줘. 자꾸 고개를 숙이니까 보고 싶잖아.
" 자꾸 왜 날 시험에 들게 해요... 자꾸 죄 짓게 하고... "
유진은 그냥 불편한 손을 들어 원영의 머리를 쓰다듬어 주었다. 지금은 이렇게 해주는 게 좋은 것 같았는데 오히려 원영은 더 울망해지더니 이내 훌쩍였다.
" 왜...왜 울어. "
원영은 아예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웅얼거렸다.
" ...언니가 좋아서요. 좋으면 안되는 데 좋아서요. "
목소리가 축축했다. 진돌이가 원영 앞에 앉아 어쩔 줄 모르고 빙글빙글 돌다가 유진 앞에서는 월월- 하고 짖었다. 진돌이한테 타박 당하는 느낌. 원영 가까이 유진이 얼굴을 들이밀었다. 당황했던 얼굴엔 미소가 완연했다. 파랗게 웃는 유진을 보지도 못하는 원영은 그냥 계속 무릎에 얼굴을 파묻고 있었다.
" 너, 내가 엄청 좋은가보다. "
" ...놀리지 마요... 죄인 거 저도 알아요... "
목사님한테 이를 거예요? 언니 목사님 딸이니까? 나한테 사탄이라고 할거죠... 원영의 목소리는 이제 기어들어 가다 못해 개미보다 더 작아졌다. 얼굴을 힐끗 들어 유진의 눈치를 보다가 더 시무룩해졌다. 원영은 울지도 못하고 빨개진 눈을 하고 있는데 유진은 계속 웃는 낯이었다.
" 왜 웃어요... "
" 사탄이라고 안 할 건데. "
" 사탄이라고 안 해도 악마라고 할 거잖아요... "
" 아닌데, 그냥 나도 너 좋아한다고 할 거였는데. "
원영은 조금 놀랐는지 아예 자갈 뒤로 엉덩방아 찧듯이 앉았다. 자갈끼리 부딪혀서 타락 하는 소리가 났다. 아이고. 원영아, 거기 그렇게 앉으면 돌 때문에 엉덩이 아파 이쪽으로 앉아. 조금 전까지 자갈을 다 골라 던져서 반반한 바닥이 드러난 자리로 유진이 손을 탁탁 쳤다. 유진과 아주 가까운 바로 엉덩이를 붙여 앉아야 하는 자리였다.
" 하나님이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시던데. 원수 말고 원영이는 안되나. "
원으로 시작하는 건 똑같은데. 사람이 엄청 많아서 하나님이 우리 둘 쯤은 못 보고 넘어가실 수도 있을 걸? 유진은 능글맞게 손으로 하늘을 가리는 시늉을 했다. 한 손으로 어림도 없는 커다랗고 너른 하늘을 가렸다.
" 손... 깁스했는데 자꾸 그렇게 움직이지 마요. "
원영은 훌쩍이면서 아까 유진이 돌을 골라놓은 반반한 자리에 엉덩이를 붙여 앉았다. 둘이 엉덩이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있는 앞으로 진돌이가 앉아서 꼬리를 흔들었다. 원영은 손을 꼼지락거리다가 진돌이를 슥슥 쓰다듬었다. 조용한 교회 앞 마당에 원영의 시선이랑 생각이 제일 소란스러웠다.
" ...손 왜 다쳤어요...? "
" 아, 그냥 계단에서 넘어졌어. 딴생각하다가. "
" 그러다 큰일 나요. "
애도 아니고 딴생각하다가 계단에서 넘어지는 열여덟이 어딨어요. 눈가에 떨구지도 못한 눈물을 달고도 조곤조곤한 말투로 하는 타박을 듣는데 유진은 기분이 살살 올랐다. 잔소리도 꽤 듣는 게 좋아서 마냥 웃었다. 좀 웃게 하고 싶은데.
" 그게 네 생각이면? "
웃게 하려고 나름 아까부터 계속 능글맞게 말하고 있는데 원영은 웃긴 거녕 얼굴만 새빨갛게 되어서 그래도 다치면 안 돼요... 하고 개미만 하게 목소릴 냈다. 유진은 깁스 한 왼손을 원영 앞으로 내밀었다.
" 낙서할래? "
원래 깁스하면 빨리 나으라고 낙서하고 그런다던데. 네 생각하다 다쳤으니까 네가 빨리 나으라고 해줘. 하고 말하는 유진을 원영이 가만히 보다가 다시 깁스한 왼손을 내려다봤다. 잠시 생각하는 듯하더니 가방을 뒤져서 네임펜을 꺼내 끄적였다. 뭐라고 쓰나 보려는데 손으로 가리고 써서 보이질 않았다. 더 얼굴을 들이밀어서 보니까 ' 빨리 나아요.' 하고 빈 하트를 하나 붙여놨다.
" 하트는 왜 비었어. 칠해줘야지. "
유진의 말에 또 꼼꼼히 하트 안을 칠해서 채워준다. 사각사각하는 소리가 나서 몸이 간지러워진다.
" 네가 썼다고 밑에 표시도 해. "
" 뭐라고 써요? 원영이? "
" 애인이라고 하던지- "
저 말에는 또 눈을 동그랗게 뜨고 유진을 쳐다봤다.
" 언니 목사님 딸이고... 저 모태신앙인데, 둘 다 크리스천인데... 여자끼리 연애해도 돼요...? 이거 죄라고 하던데, 막 지옥 간다고... "
" 원영아, 너는 생각이 너무 많아. "
그냥 애인이라고 써. 저 말에 원영은 다시 귀가 새빨개져서는 우물쭈물하다가 ' 안유진을 좋아하는 사람'하고 적어놨다.
" 엥, 펜 줘봐. "
유진이 원영에게 펜을 받아다가 '을' 이란 글자에 크게 X를 치고는 '이' 로 바꿔 썼다. 거꾸로 써서 삐뚤빼뚤한 '이' 자였다. 삐뚤빼뚤한 글자를 보고 원영은 입가를 씰룩였다.
" 언니, 다음 주일에도 7시 반에 올 거예요? "
" 왜? "
" 그냥요..."
" 더 빨리 올까? "
유진을 보지도 못하고 고개를 끄덕이는 원영의 귀가 여전히 새빨갰다. 슬그머니 얼굴도 새빨갛게 올라오는 게 다시 또 서울에 불타는 토마토가 열릴 것 같았다. 가까이 얼굴을 들이민 유진이 얼마나? 하고 파랗게 웃었다.
" 몰라요. 그냥, 언니 편한 대로.. "
" 근데 꼭 다음 주일까지 기다렸다 봐야 돼? 우리 그냥 평일에도 보면 안 되나. "
싫으면 말고. 하고 다시 몸을 뒤로 빼는 유진의 겉옷을 원영이 다급하게 잡았다.
" 누가... 싫댔어요...? "
유진이 또 웃었다. 자꾸 저렇게 웃어서 원영은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원영의 얼굴은 활활 타고 새빨간데, 앞에서는 자꾸만 시원하고 파랗게 웃었다. 유진은 손을 살짝 자기 목에 갖다 대봤다. 온도 체크. 혹시 손이 지금 차가운가. 다행히 다 늦은 밤인데도 손이 따듯한 편인 거 같았다. 원영에게 손을 내었다. 유진이 내민 손을 원영이 잠시 내려다봤다.
" 안 잡을 거야? "
유진이 머쓱해서 안 잡을 거면 말구 나 진돌이 안 만졌는데...란 뒤 말을 채 입 밖으로 내기도 전에 작고 차가운 손이 닿았다. 잡는다기보다 손안으로 들어온다고 하는 게 더 정확했다. 쏙 하고 한 손에 다 들어왔다. 손이 엄청 차네. 엄청 작고.
언니 근데 진돌이가 다 들어서 어떡해요. 진돌이가 하나님한테 이를 수도 있잖아요. 진돌이 내 편이라서 아무한테도 안 일러 그리고 미중년이라 입 무거움. 진돌이는 빵야도 내가 시킨 것만 하는 멋진 미중년이야. 아닌데... 진돌이 제가 시켜도 빵야 하는데요? 아닐걸- 원영은 동그랗게 눈을 뜨고 유진을 봤다. 유진이 배시시 웃었다. 이제는 원영도 같이 유진을 따라 웃었다.
교회의 빨간 십자가보다 높게 뜬 달이 가로등보다 더 밝았다. 전신주에 음표처럼 걸린 그 달이 교회 앞 마당을 내려다보았다. 소곤소곤한 대화를 달이 부끄러워하며 들었다. 크고 밝은 그 달빛으로 하나님의 시야도 다 가려줄 것 같은 밤. 그 달 아래 꼬리를 잡으러 빙글빙글 도는 진돌이가 있고, 서울에서 난 불타는 토마토도 있었다. 또 그 앞에 파랗게 웃는 유진도.
유진은 ' 안유진(을)이 좋아하는 사람 ' 이 적어놓은 '빨리 나아요.' 라고 쓰인 낙서를 내려다보면서 얼마 전에 쳇 GPT에 질문했던 어떤 문장을 떠올렸다. 성가대 반주자 공고가 나기 한참 전에 유진이 쳇 GPT에 질문했던 문장이었다.
Q. 교회 동생을 꼬시는 방법?
A. 성가대나 봉사활동 등을 통해 유대감을 쌓아보세요. 이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가까워 질 수 있습니다. 억지로 어필하려 하기보다 자연스러운 관심을 보이는 것이 중요합니다. 상대에게 긍정적이고 신뢰할 수 있는 모습을 보여야 합니다. 너무 서두르거나 부담을 주기보다는 서로의 시간을 존중하면서 관계를 천천히 발전시키세요.
유진은 휴대폰을 붙들고 성가대 반주자 지원 문자가 언제 들어오나 기다리고 있었다. 성가대 반주를 그만두면서까지 공고를 낸 상태인데 일주일째 지원 문자가 없었다. 다리를 벽에 올렸다 내렸다 기지개를 켰다가 아주 마음이 초조했다. 반주자는 안 되는 거였나 그냥 성가대원을 모집한다고 공고를 낼걸 그랬나. 전도사님들이 피아노 좀 친다고 얘기하던걸 주워듣고 반주자 공고를 낸 건데 이게 아닌가 입안이 썼다. 마감 시간 코앞까지 강아지마냥 휴대폰에 코를 박고 있다가 마지막으로 들어온 문자를 보았다. 이름 장원영, 나이 17세. 유진은 지원자 이름을 보자마자 침대에서 벌떡 일어나 바로 답장을 보냈다.
[ 합격입니다. 토요일 3시 성가대 연습실로 나오세요. ]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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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악마의 식탁'을 호르몬이 철철 흐르는 노딱으로 써서, 양심상 노딱 아닌 걸로 하나 더 가져왔습니다.
늘 윶녕하세요 :)